제 13 장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관상하는 사람이 되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매일 기도를 위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여,
                                           참으로 개인적이고 관상적인 기도를 실제로 하는 것이다.


                                                         차       례

      제 13 장 거룩한 독서
        제1절  거룩한 독서의 과정        
        제2절 거룩한 독서                
        제3절 거룩한 영적 독서                
          1. 영적독서에 대한 이해
          2. 일상생활에서의 기도        
          3. 영적독서 전통으로의 복귀        
          4. 집중기도의 역할                
          5. 다른 기도와 함께 하는 영적독서생활        
          6. 실제적인 제안        
          7. 공동기도를 위한 스콜라적인 영적독서 방법
          8. 공동기도를 위한 수도원적인 독서방법
          9. 개인적인 영적 독서
       제4절 수도 전통에 따른 거룩한 독서


제 13 장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제1절 거룩한(Lectio divina) 독서의 과정

거룩한 독서는 수도원의 환경에서 발전된 관상기도의 방법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는 성서를 경청하는 방법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특히 수도원 공동체 : 역자 주)는 근본적으로 성서적 환경이다. 이것이 또한 공동체의 성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수도원은 수도자가 언제나 성서적 환경에 몰입하는 장소이며, 하루 동안 시간에 따라 다른 성무일도를 읽고 고독과 침묵을 지키며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성례 때와 개인적인 독서 때에 성서를 경청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어떤 힘과 같은 것이 있어서 수도자를 점차로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의 믿음으로 움직여나가게 하는 것 같다.

중세기의 수도승들은 이러한 다른 수준들을 '성서의 네 가지 의미'라고 불렀다. 이러한 성서의 의미들은 우리의 인간적인 지적수준에서 어떤 특정한 내용을 논의하는 네 가지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구절을 네 가지 다른 수준으로 경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성서가 신비로운 역동을 내포하고 있어서 하나님 말씀을 더욱 깊은 수준에서 이해하도록 경청하는 사람을 이끌어 준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것에는 자의적(字意的, literal), 도덕적(moral), 유의적(喩意的, allegorical). 그리고 일치적(unitive, 때로는 anagogical) 의미들이다. 현대 주석학자들은 일차적으로 성서의 자의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이러한 말씀들을 해석하는 방법을 이해하기 위하여 말씀의 문헌적 의미와 문화적 배경을 알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성서 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셨는가를 찾아내는 데 아주 가치가 있다. 그러나 거룩한 독서의 목적은 이것이 아니다. 수도승들은 거룩한 독서를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적 통찰을 얻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것은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우정이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는 성서 필사본은 그 수가 적었다. 수도승들은 성서 중 하나의 책, 예를 들면 이사야나 어느 복음서를 일년 동안 읽곤 했다. 그들은 시편을 암기하여 언제나 성서들을 여러 장을 외울 수 있었다. 그들이 거룩한 독서를 할 때면 그것은 좀 특수한 경우였다. 그들이 성서를 읽다가(사실은 암송하다가) 어느 구절이 마음에 와 닿으면 읽기를 중단하고 그 내용을 묵상하고는 그 내용에 대하여 좋은 열매를 맺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청하며 기도를 드렸다. 그들은 논리적 묵상에서부터 정감적 기도 혹은 의지의 열망으로 넘어가서는 그 열망을 계속해서 수없이 반복하고, 마침내는 하나님 안에 쉬는 체험을 했다. 이것이 거룩한 독서 모든 과정의 목표였다. 어떤 수도승은 단지 하나나 두 단어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물렀다. 전 수도원의 환경은 성서 속에 온전히 파묻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관상으로 옮겨 가는 것이 권장되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살고 있다면 평정의 상태로 다시 자극을 받기 위해서나, 아니면 그 상태로 다시 되돌아가기 위하여 성서를 열심히 읽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수도자들은 그들의 분위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생활 구조 때문에 하나님의 현존 속에 여하간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거룩한 독서는 단지 정신적인, 그리고 순수한 영적인 활동만은 아니었다. 중세기의 수도승들은 말씀들을 중얼거림으로써 그들의 신체도 대화에 참여했다. 그들은 또한 말씀을 아주 천천히 읽음으로써 때로는 전 과정이 두어 시간 걸리기도 했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거룩한 독서에 대하여 아주 무감각해졌는데 그 이유는 신문이나 잡지를 읽는 것, 그리고 속독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성서도 마치 읽어 치워야 할 하나의 책을 읽듯이 하는 경향이 있다. 거룩한 독서는 이와는 정반대이다. 내용을 음미해 가면서 여유 있게 하나님의 계시에 잠기는 것이다.

이 독서 과정의 아주 기막힌 점은 기도 기간 중에 예수님과 한수준의 관계에서 다음 수준의 단계로 옮아갈 수 있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이끄시는 데에 대하여 여러 가지 다른 응답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점차로 예수님과의 우정이 깊어지면서, '성서의 네 가지의 의미'가 우리 자신의 삶 속에 역동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있다. 그 말씀은 우리 안에 하나의 동상처럼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활동이다.

어떻게 이러한 역사(役事)가 이루어지는 것인가? 성서의 첫 번째 자의적 의미는 역사적 메시지이며 예수님이 보여 주신 표본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한 독서로 복음 속에 들어가면 우리는 자신의 삶 속에서 그 말씀을 실천하게 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우리가 성서를 얼마나 읽었느냐는 것보다는 그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성서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된다고 했다. 우리가 실천에 옳기고 복음을 살기 시작하면 우리는 도덕적 의미에 도달한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문헌 연구가 매우 가치 있기는 하지만, 말씀의 문헌적인 의미에 대하여 읽고 사색하는 것보다는 그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더욱 온전하게 그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도덕적인 의미를 체험하고 난 다음에 새로운 현실이 태어나기 시작한다. 우리가 말씀을 읽어 가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친구들을 새로운 수준의 믿음으로 이끌어 가는 성서 속의 사건들을 우리 안에 내면화하면서, 우리는 성서의 도덕적인 의미를 넘어서 유의적인 의미로 움직여 간다. 그것은 서서히 복음이 우리에 관한 것이라는 깨달음이 솟아오르고, 페이지마다 우리의 삶이 거기에 반영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 은총에 의해, 지금 성령의 신비 속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하나님의 체험은 그 당시에 예수님과 접촉을 가지고 그분의 신비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실제로 일어난 체험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비추어 보는 의미는 신약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토마스 키딩”이 로드 아일랜드 주에 있는 밸리 폴즈에서 수련기간을 끝냈을 때에 고해 신부는 그에게 "구약을 전부 읽어야겠어."라고 말해주었다. 그의 생애 중에 그 당시에는 십자가의 성 요한에 더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순명하는 관상 수사로서 "물론 그렇게 하지요."라고 대답하고는 창세기를 무거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은 과히 나쁘지 않았다. 거기에는 아주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출애굽기를 집어 들었다. 나는 "이것을 한마디 한 마디 새겨 가며 읽어야 하나?"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여하 간에 읽기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말하자면 신비로운 빛이 페이지의 뒤편에 나타났다. 즉 말씀들이 나를 향하여 튀어나오기 시작했고 키딩은 몹시 흥분했다. 그는 "이것은 정말로 나의 인생에 관한 책이야. 누가 이 책을 썼든지 간에 그는 나의 정신과 의사임에 틀림없어." 라고 중얼거렸다.

키딩은 “거기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지도자에게 불평하고 있는가를 읽었고, 그것이 내가 그 당시에 하고 있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갔고 죄의 노예 상태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며, 그것이 바로 나의 회두의 이야기와 같았던 것이다. 몇 마디 말씀만으로도 나에게 아주 거대한 의미와 이해의 전망을 보여 주었고, 그때까지 내가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나를 흥분시킨 책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유의적 의미가 당신에게 주는 것이다. 즉 당신의 개인적인 영적 여정을 구원의 역사를 기록한 구약의 어떤 사건과 동일시할 수 있게 해주는데, 노아의 홍수, 홍해를 건너감, 요르단 강을 건너감 등과 같은 고전적 성서의 사건들이 성사(聖事: sacrament)로 만들어질 수 있게 되었으며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그 성사들과 만난다. 구원의 역사는 지금 우리 안에서 일하고 있는 은총과 같다. 그것은 구약 안에 나타나고 있고 장차 오실 그리스도로 힘입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충만한 은총은 복음서에 나타나 있으며 그 은총의 열매는 교회의 성사 안에 보배로이 간직되어 있다. 유의적 수준에서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지금 성례 중에 독서를 통하여 듣고 있으며, 거룩한 독서로 그 맛을 보며,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알아보게 된다. 그것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같은 은총이 작용하는 것이다. 당신이 이것을 체험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아주 다른 방법으로 성서를 경청하게 된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역사적 문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영적 여정의 체험에 관한 것이 된다.

성서의 네 번째 수준은 일치적(anagogical) 수준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아주 깊이 잠길 때에 나타나며, 이때에는 계시가 계속되는 것처럼 당신에게서부터 그 말씀이 나온다. 요한 카시안은 당신이 마치 시편을 쓰고 있는 사람처럼 시편을 노래하는 경우가 성서를 일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하나의 지표라고 했다. 당신은 그 말씀에 동화되었고 말씀은 당신에게 동화된 것이다.

성서의 유의적 의미에 대하여 다른 한 가지 측면을 말하고 지나가야 하겠다. 이것은 바로 무의식을 덜어 내는 과정 혹은 정화의과정이다. 정화는 우리 인격의 어둔 면을 직면할 때에 일어나는데 이것은 성서의 내용과 자신을 생생하게 동일시하는 결과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정직함이 발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서적 사막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성서적 사막은 어떠한 장소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막을 지나간 사건이나 그와 유사한 성서상의 사건들이 외적으로 상징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내적으로 경험하는 어떤 상태를 가리킨다.

성서의 유의적인 수준의 의미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폐물들을 덜어 내는 과정을 포함하는데 이 폐물들이란 우리가 잉태된 이후 지금까지 우리에게 끼친 정서적 손상들을 말한다. 우리가 일단 관상기도의 도움을 받아 일상적인 심리적 인식 수준의 껍질이 깨어지고 나면, 우리는 정서적 쓰레기들을 비우는 자발적인 과정을 지나면서 이것을 견뎌 내야 한다. 하나님과의 일치의 체험이온전하게 이루어지고, 지나친 요구와 숨겨진 동기들을 가지고 있는 거짓 자아 대신 참 자아가 우리의 행동 동기가 되려면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비워 내야 하는 것이다.

성서의 네 가지 의미가 나선형으로 움직이는 것을 살펴보자, 당신은 그저 빙빙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거룩한 독서 중에 같은 말씀으로 돌아갈 때에 그것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당신의 삶 속에 성서의 네 가지 수준의 의미를 점차로 내면화해 가면, 당신이 같은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더 높은(아니면 더욱 깊은) 수준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나선형으로 움직이는 것은 관상적 삶의 모든 측면들이 발전해 가는 방식이다. 이것은 로케트처럼 수직으로 곧바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같은 옛 관습으로 계속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정말로는 똑같지 않다. 그 이유는 당신의 삶이 외적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당신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말씀하실 때에 우리를 초대하신 것 같다. 이 말씀은 우리가 더욱 깊은 수준에서 경청할 때에 더욱 잘 들을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시려고 하셨을 때에 그들이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것을 기억하지 않는가? "그들의 마음은 완전히 백지상태였다."라고 마가는 말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가 갖는 가장 큰 장애는 스스로를 자신의 거짓 자아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며, 그 거짓 자아는 습관적인 기대와 요구와 '마땅히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식적으로는 자신을 하나님께 투신한다고 하면서도, 유의적 수준에 도달하기 전에는 무의식의 치유가 정말로 일어나지 못한다. 관상기도는 우리의 귀를 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도와주는 과정을 촉진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프로그램과 계획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훈련을 통하지 않고도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금욕주의는 금욕 수련에만 열중할 때에 자신의 정서적 프로그램을 오히려 키워 주고 그 병적인 요소를 더해 갈 뿐이다. 진정한 금욕 수련은 우리의 무의식에서 오는 동기에 대하여 어떤 처리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경청의 과정을 깊어지게 하며 이것은 두 가지 경험으로 일어난다. 그 하나는 우리의 가장 깊은 심층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하는데, 이것은 마음의 평화와 영적인 위로에서 오는 것으로서 우리의 전 인생을 하나님께 의탁할 수 있게 만든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알고 계시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분은 비밀스럽게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만드신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 없이는 우리 성격의 어두운 면, 아주 복잡한 행동동기, 아주 비참할 정도로 우리가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깊은 기도는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향상시켜 주어 우리가 어떠한 것도 인정할 수 있게 하고, 자신의 어두운 면을 인정한다고 하여 우리가 파멸에 이르게까지 되지는 않게 한다. 그러한 신뢰가 없다면 우리 자신의 심리적 방어 기제를 계속 가지고 있게 된다. 우리는 그것들이 온전히 드러나지 못하도록 감추려고 한다. 마치 아담과 하와처럼 우리가 숲 속에 숨는 것과 같다. 반면에 자신의 어두운 면들을 받아들이면 그것들은 제거된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서 치워 버리신다. 관상기도의 과정은 우리의 무의식에 있는 것들을 풀어주는 하나의 방법이다. 우리의 육체가 배설을 필요로 하듯이 우리의 심령도 배설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관상기도로 깊이 쉬는 결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 말씀의 역동이 어떻게 기능하는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간 사실을 예로 들어 보자. 자의적으로 보면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망가도록 허락한 후에 그것을 다시 철회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라는 늪지대를 건너갔다. 그들을 쫓던 이집트 사람들은 물이 그들 위를 덮쳤을 때에 모두 물에 빠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망하여 건너편 언덕에 도달한 후 노래를 불렀다. 그러고는 약속된 땅으로 가는 동안 40년을 광야에서 보냈다.

우리가 이집트 사람들이 죄악의 폭군을 대표하는 것으로 비유해 볼 때에 도덕적인 의미가 생긴다. 그리고 사막을, 즉 정화, 하나님을 기다림, 그리고 사막의 유혹에 부딪쳐서 인간 본성으로 반항하는 것과 같은 사실들을 우리의 내면으로 체험할 때에 유의적 의미가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일치적 의미는 평화와 신적인 일치의 상징인 약속의 땅에 사실상 도착했을 때에 갖는 체험이다. '쉼'(rest)이라는 말이나 라틴어의 quies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고전적인 의미를 갖는다. "무거운 짐진 자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라고 그리스도께서 그 유명한 초대를 하셨다.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안식도 아주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죄스러운 습관과 강박적 행동의 폭군에서 해방될 때에 깊은 안식이 거기에 따라오는 것이다. 그리고 죄악의 뿌리에서 해방될 때에 우리는 더욱 깊은 안식을 얻는다. 그러고 나면 자신의 정서는 거짓 자아가 시키는 일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고, 복음의 가치를 따르게 되면서, 덕을 실천하는 일과 자기 성격의 어두운면에서부터의 자유 안에서 기쁨을 맛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커다란 안식은 완전한 사랑의 안식인데 이 사랑 안에서는 가장 활발한 활동 중에서도 안식을 가질 수 있다. 그 이유는 집착이나 좌절 때문에 생기는 에너지의 낭비가 없기 때문이다. 무의식 속에서 좌절감을 갖게 만드는 행복을 위한 정서적 프로그램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서 동기를 얻어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깊은 안식은 사랑에서 온다.

우리가 새로운 수준의 믿음으로 옮겨 갈 때마다, 처음에는 분열과 비탄과 혼동과 암흑을 경험한다. 우리가 영적인 여정에 관하여 미리 경고를 받지 않는다면, 이러한 경우에는 마치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내가 잘 모르는 죄를 짓지는 않았는가?"와 같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현재 수준의 태도에서, 우리의 삶이 그 수준에서 더 이상 잘 작용하지 않는다고 경험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이때에 우리는 사실 더욱 깊은 수준으로 가도록 도전과 압력을 받은 것이다. 과도적인 단계에서는 언제나 고통스러운 법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 위치만을 알고 있을 뿐이며, 특히 여정의 초기 단계에 있을 때에는 무지의 세계로 옮겨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좋다. 우리는 창조적인 변화의 순간이 왔을 때에 저항하게 된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한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옮겨 가게 만드는가? 그것이 의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해야만 하는 그 무엇인가? 거룩한 독서의 방법에 따르면 우리는 그저 성서를 계속해서 읽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계속해서 경청을 하다 보면 신뢰가 자라고 어떤 인간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자라난다. 성서를 쓰게 만드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그 성서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깨우쳐 준다. 그 말씀은 결국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에 도달하게 된다. 말씀은 가장 외적인 것에서 시작하지만 가장 내적인 방향으로 작용하여 우리 안에 머물러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가 성서의 일치적인 의미를 이해하게 될 때에 외적으로 경청한 말씀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경험하고 있는 내적인 것을 확인시켜 준다.

거룩한 독서의 이러한 역사(役事) 안에서 관상기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수도원에서 하는 고전적인 거룩한 독서의 수련 -말씀에 대한 논리적 묵상에서 정감적 응답으로 그리고 관상 안에 쉼으로 옮겨 가는- 에서는 거룩한 독서의 한 기간 중에 일어나는 나선형의 움직임은, 성서의 네 가지 의미를 통하여 가는 더 큰 움직임 안에서 신비로운 '구동축(驅動軸)'역할을 하면서, 특히 유의적 수준과 일치적 수준으로 향하여 가게 해준다. 이 유의적 수준과 일치적 수준에서 무의식의 정화와 일치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거룩한 독서가 정상적으로 진전할 때에는, 여러 가지 기도의 단계를, 그것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영적인 여정에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생각조차하지 않으면서 지나간다. 이러한 단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것은 종교 개혁 때에 '정신기도'라는 말이 생겨나면서 기도의 전통에 끼여 들게 되었는데 '정신기도'라는 말은 16세기 이전의 문헌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영적인 움직임에 대하여 다루는 역사적 과정에서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범주화하는 경향에 묶여 버렸다. 학구적 풍토가 조성되고 있던 중세 후기의 특징인 분석하는 경향으로 말미암아 영적 여정의 자발성이 상실되었고, 더구나 거룩한 독서의 마지막 부분인 하나님 안에 쉼 -그것이야말로 모든 이전의 단계를 거치는 목적이었는데도- 은 아주 빼어 버렸다. 그들은 몇 년이고 영적 독서를 하고 논리적 묵상을 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아주 오래 살았거나 임종을 앞두고서야 관상의 체험을 했으면 하고 희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누구도 그렇게 희망하도록 기대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준비하는 행동조차 취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관상은 봉쇄 수도원 같은 곳에서나 하는 하나의 기도의 형태로 더욱더 간주되었는데 실상은 그곳에서도 보편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거룩한 독서와 관상을 이어 주는 중요한 결속은 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결속을 다시 찾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수련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이전에는 하나로서 성장해 왔고 구조적으로 서로를 풍요롭게 해주어 왔다. 거룩한 독서가 관상으로 옮겨 가서 하나님 안에 쉬는 경험을 하면, 무의식의 내용이 의식으로 올라오면서 치유가 된다. 이렇게 되면 다시 우리 존재의 더욱 깊은 수준에서 복음을 경청하고 응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제2절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의 단계

 

1 . 읽기(Lectio) :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음

거룩한 독서의 첫째 단계는 독서 혹은 읽기이다. 재료나 방법에 있어, 이것은 평범한 독서가 아니다. 그 재료는 "하나님 말씀" 또는 성서이며, 독서 방법은 좀 더 정확하게는 "들음"이나 "귀 기울임"으로, 영감 받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하시는 분을 경청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서를 "영감 받은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는 의미에 관하여 예전보다 좀 더 폭넓게 이해하고 있다. 한때 그 구절은 성서 저자들이 직접 성령의 감도를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썼다 - 일종의 "신성한 받아쓰기"- 는 제한된 의미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성부께서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 안에 살도록 보내주신 성령은 성서 말씀을 살아 있게 하는 같은 성령이시다. 말씀과 내 안에 현존하시는 이 성령께 대한 나의 활발한 믿음이, 성서를 읽고 들을 때, 말씀하시는 분의 살아 있는 실재를 성서 안에 "불어 넣어주거나", "그 안에서 숨쉬게 한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독서를 준비하기 위해 내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내 인격 전체를 한 초점에 맞추기 시작한다. 몸에 관하여 동서양의 모든 기도 수련에서 공통되는 일관된 원리는 등을 똑바로 세우지만 긴장하지 않는 것이다. 다리를 접거나 포개서, 마루나 방석에 앉든, 혹은 똑바로 의자에 앉든 간에, 그 기본 의도는 혈액순환이나 호흡을 방해하지 않고, 반면에 충분히 집중하고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이런 모든 준비들은 나와 친밀하게 현존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한다는 믿음을 확고히 하고 깨닫도록 돕는 수단이다. 이러한 마음 자세로 성서말씀을 선택하는데, 짧은 성서 구절이 더 좋다. 그리고 '천천히' 읽으면서, 온전히 주의를 기울여 마음으로 듣는다. 이것은 이미 정신과 마음을 당신께로 열도록 나를 부르시는 그분께 대한 내 응답의 시작이다. 때때로 나를 사로잡는 성서구절은 이미 나의 가슴에 충격을 주었던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요 근래 성례에서 제시된 구절일 수도 있다. 또는 "주제별 성서구절"을 이용할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 내 목표는 말씀들을 인격화하고 현실화하여, 마치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하고 계신다고 여기게 하는 것이다.

한 예로, 주제별 성서구절에서 "뉘우침과 자비" 중의 사 65:1-2가 나를 사로잡았다고 가정해 보자. 앞서 제시한 준비 후에, 나는 읽기(Lectio)를 시작한다. 그리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사 65,1-2).

내가 믿음을 갖고 이 말씀을 들을 때, 비록 짧은 성서구절이지만 주님께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씀하시기에, 나는 이 성서 말씀으로 돌아갈 때마다 매번 다른 의미와 중요성을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비록 내가 이기심이라는 불순함을 지니고 찾더라도, 그분은 당신을 찾도록 '허락 하신다' 는 깨달음이 나를 후려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갑자기 보잘 것 없음과 감사의 느낌을 내 안에 일깨운다. 혹은 "나 여기 있다"는 세 단어는 예기치 않게 곧장 울려 퍼져, 나로 하여금 그분의 항구한 현존을 새롭게 깨닫게 한다.

성서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유일한 분을 받아들이고 단어 자체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 너머를 듣는 것이다. 마치 다른 사람이 말하면 단순한 상투어에 불과한 구절에 사랑하는 사람은 무게를 싣듯이, 단어들을 살아있게 하는 성령은 그 단어들을 '통하여' 표현되는 것 이상의 의미 그 자체이다. 나는 이 사실을 피정 지도 중에 거듭거듭 관찰하고 있다. 똑같은 성서구절을 듣는 각 사람들이 저마다 완전히 고유한 자기 방식으로, 아주 빈번하게 내가 전에는 전혀 기대하거나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들을 때 그러하다.

예를 들어 앞에서 제시한 성서구절에 잠재되어 있는 무수한 은총이 여기서 드러날 수 있다. 이것은 거저 주어지며 내 자신의 논리적 추리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 단어들이 '나를 감동시키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때 나는 단지 평화롭게 "나 여기 있다"와 같은 한 구절을 택하여 나의 의식 속에서 계속 되뇌이고,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사랑과 신뢰의 상태에서 주님과 '함께 있음'으로 흡족할 것이며, 특별히 이 때 내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실제로 이 깨달음은 이 기도 시간의 참된 열매일 수 있다. 그러나 특별한 구절을 끌어내어, 나에게 그 의미를 성찰하기 시작하면, 그 때는 다음 단계인 묵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2. 묵상(Meditatio) : 말씀을 묵상함

앞에서 거룩한 독서를 "서로간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것"으로 기술하였다. 이 과정에서, 읽기(Lectio)의 역할은 단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설명하였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우리의 주고받음이 성장하는 우리의 상호관계를 심화시킬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내 생활에 공간을 만들고 하나님께 돌아간다.

이제 이 열망이 나를 끌어당기는 묵상에서, 나는 그분에 관해서 좀 더 알고 싶고, 더 큰 신뢰와 확신을 갖고 내 삶 속에 그분을 받아들여 그분께 나를 열어드리고자 한다. 나는 그분이 참으로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알고 싶고, 그분이 나에게 계시하고자 하는 바를 알고 싶다. 이 계시에 관해 다음과 같이 빗대어 설명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책방에 가서 그리스어나 일본어, 혹은 히브리어로 쓰여진 책을 보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나는 그 언어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뒤에서 앞으로 읽는지, 아래에서 위로 읽는지, 혹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지 조차 모른다. 내가 얼마나 이해하고 싶은가와는 상관없이, 내게 그 책은 이른바 '닫혀진 책'이다. 그러나 한 점원이 우연히 내 어려움을 알아채고 자원해서 한글로 번역된 책을 건네준다면, 나는 즉시 각 페이지에서 전달하는 의미와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언어'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유한한 지성과 이해로는 그분의 완전함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예수님 안에서 당신을 우리의 인성으로 번역하셨다. 우리가 함께 나누는 인간의 삶을 가능한 한 가장 깊이까지 살고 체험하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살과 피로 나에게 드러나 계신다. 예수님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 '이다'. 그리고 단지 역사 속에서 살다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지금 내 세계에, 내 마음 안에,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으로, 내가 알고 사랑할 수 있는 한 인간으로 드러난 계시 '이다.' 또한 약속하신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그 선물은 이미 주어졌다. 그분은 참으로 나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여기서 여러분들이 읽기를 잠시 멈추고, 아래에 제시된 요한복음 14장의 주목할 만한 구절을 잠간동안 깊은 믿음으로 묵상하고, 마치 처음으로 '여러분에게 일러주시는' 것처럼 들으라고 제안한다. 이렇게 개별화하는 일을 강조하기 위해서, 별표 안에 여러분들의 이름을 넣으면 좋겠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
그대들이(★)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분을 알게 되었고 또 그분을 뵈었습니다

(요 14:5-7절).

그리고 나는 아버지께 청하겠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영원히 함께 계실 다른 협조자를 그대들에게 붙여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세상은 그분을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대들은(★) 그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그대들과 함께 머물고 그대들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 14:16-17절)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서 보내실
협조자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내가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요 14:26절)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잠간 시간을 내어 자신이 들어가고 있는 신앙의 차원에 관하여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에 가까이 갔을 때, 그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출 3:5-6) 이와 비슷한 내적 혹은 외적 방법을 취할 때, 우리 역시 우리가 다가가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 때 우리는 기도 중에 의식적으로 그분 앞에 나올 수 있게 하는 신앙의 선물이 지닌 경이로움과 신비를 알아차리게 된다. 묵상 중에, '하나님과 교통' 이 "물론" 가능하다고 자주 습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그러므로 시작할 때부터 기도는 언제나 성령의 사랑어린 주도권에 따라 선물로 받은 '응답' 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것(현실화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모든 기도는 그분의 선물이므로, 우리가 구하는 바를 청하는 것은 적절하다. 위에 제시한 요한복음서의 인용구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이해하기 위하여 내 정신과 마음을 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도록 성령께 간청함으로써 예수님의 그 약속을 요청할 수 있다.

주님과 각 사람의 기도 관계는 고유하다. 개인 은사들이 다양하다는 것이 하나의 근거이다. 상상력이 잘 발달되고 활성화된 사람들일 경우, 상상을 이용하면 그들의 묵상을 생생하게 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받을 것이다. 성 이냐시오의 㰡”영신수련』에서는 이러한 접근법을 "관상(Contemplatio)"이라 부르는데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고전적 의미와는 다른 의미로), 상상력을 통하여 복음서의 장면 속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을 보고, 듣고, 주위 환경을 만지고, 냄새 맡는다고 상상한다. 그 장면에 나오는 사람들과 나를 동일시하거나, 내 자신이 거기에 머물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 듣고, 체험하는 것이다. 방금 인용한 요한복음서의 발췌구절을 예로 들면, 내 상상력을 동원하여 무대를 재설정해 본다 -이 장면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마지막 만찬을 가지신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내 눈으로 그분의 응시를 받아들인다.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실 때 내 눈으로 무엇을 보는가? 그리고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상상력이 활성화되거나 잘 발달되지 않은 대신 좀 더 직관적인 사람은 그 구절에서 진리나 내적 통찰을 음미함으로써 더욱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확고한 사랑이 심저를 깊이 꿰뚫을 때까지, 그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그 말씀을 천천히 거듭거듭 되풀이함으로써 예수께서 지금 말씀하고 계신 내용을 깊이 내면화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응답하게 된다.

우리가 기도에 어떻게 접근하든 간에, 기본원리는 다음과 같다. 1900년대 초기에 활동했던 저명한 베네딕도회의 영성지도자 돔 체프만은 이것을 간결하게 요약했다. "네가 할 수 있는 대로 기도하라. 할 수 없는 것은 하지 말라." 참되고 진실할 때, 가장 단순한 말은 (혹은 가슴이 너무 벅차면 전혀 말이 없다.) 날조되고 빌려온 최고로 과장된 웅변술보다 확실히 더 웅변적이다. 그리고 가장 명백한 것은, 그러나 분명하기에 아마도 쉽게 간과될 수 있지만, 성령께서 내게 기도를 가르치시도록 자주 '청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묵상' 부분을 더 이상 펼쳐나가지 않고 여기서 끝내려고 한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묵상은 내적 움직임이고 우리 존재의 자발성과 실제성에 따라 그것의 모든 진정성이 좌우되는데, 그것에 관해 내가 상세한 '방법' 안내서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일 오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오직 성령만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칠 수 있다. 그 밖의 사람들이 제공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가 성령의 가르침을 체험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도와줄 뿐이다. "사랑 안에 있음"이라는 우리의 근원적인 비유로 돌아가면, 우리에게 사랑하기를 가르치는 것은 사랑이고, 그것은 어떠한 객관적인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

하나님의 이 사랑이 우리 마음에 와 닿을 때, 우리는 기도(0ratio)라는 다음 단계로 끌려 들어간다. 이전의 모든 것들은 준비 과정이며, 이 단계가 진정한 기도의 시작이다.

 

3. 기도(Oratio) : 말씀이 마음을 건드림

앞 부분의 주제인 묵상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형성되어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는 묵상을 통해 모든 피조물 안에서, 그리고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묵상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친밀함,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키우고 풍요롭게 하며, 사랑과 섬김으로 부르시는 그분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되는지를 성찰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이 모든 것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닐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한 믿음과 신념의 본질적인 기초를 확립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묵상은 주로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적 활동과 상상이므로, 만약 묵상이 지성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다면 참된 기도에 도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의 목표는, 비록 최고라 할지라도, 하나님에 '관한' 사고나 개념, 혹은 지식이 아니라, 내 가장 깊은 곳, 참 자아 안에 신비스럽게 숨어계시는 그분,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라. 신비가들의 말로는, "하나님은 나의 나이다(God is my me)."

이 가장 깊은 중심은 관상의 영역, 기도(Oratio) 혹은 "마음의 기도"인데 거기에 이르는 길의 시작에 대해 지금부터 고찰하고자 한다. 이 시작은 우리 자신의 계획에 따라 미리 결정되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지침" -마치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어떤 것을 '하고' 나서 다음에 할 것이 이어지는- 을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성령의 이끄심에 응답할 때 마침내 마음에서 자발적인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을 단순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성인들의 인용구 중에서 "오, 하나님! 당신을 위해 우리를 내시었으니,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안식이 없나이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보다 더 널리 잘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자명한 진리처럼 인정받고 있으며, 또 우리의 표면의식 아래 가까이 있는 내적 갈망을 되울려준다.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우리의 방어기제와 가면을 벗으며, 하나님 앞에 우리의 적나라한 궁핍과 피조물 상태로서 있을 때, 본래부터 있던 이 갈망은 기도 안에서 일깨워진다. 시간이 지나면 이 갈망이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갈망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가온다. 반면에, 기도(0ratio)는 우리 활동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길을 준비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끊임없이 그분께 열고, 성령의 처분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적극적인 노력이다.

우리는 묵상과 이 마음의 기도 사이에서 오랫동안 움직일 수 있지만, 마침내는 점차적으로 단순하게 된다. 지적인 추리와 사고가 점점 줄어들고, 마음은 단순하게 솟아나는 사랑과 열망으로 가득 차며, 이것은 친밀한 내적 대화 형태를 취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아주 가까운, 그러나 아직 너무 멀게" 느끼면서 우리 마음의 갈망이 자발적으로 그분을 소리쳐 부르거나, 혹은 마음의 불신과 무가치함을 깨닫고서 치유와 자비를 청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온갖 어리석은 약속을 다 하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과 은밀해진다.

이 기도 중에 우리 마음은 그분께로 그리고 그분에 의해 열려지고, 그래서 그분의 빛이 들어올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가는 데 장애가 되는 우리의 환상 속에 우리를 남겨두지 않으신다. 빠르든 늦든 간에 그 환상들은 우리에게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할 것이다. 곧 자율권, 자만심, 통제, 교만, 역할극, 관대함의 한계 등을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주장하는 거짓 자아가 그것이다. 이 목록들은 각 개인마다 제각기지만,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은사와 은총의 삶을 저해하는 그 효과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여기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길은 역설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지금 시작한 "환상에서 깨어남"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고통스럽지만, 이것은 그분 사랑의 더 큰 은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큰 사랑의 은총에 협력할 때, 우리는 거짓 자아의 지배에서 풀려날 것이고,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상과 닮은꼴"인 참 자아에 우리의 중심을 둘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분이 우리에게 계시하시거나 요청하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면, 그만큼 우리의 기도는 진실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결코 그분에게 완전하게 응답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응답하는 우리의 지향과 노력이 진실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㰡”무지의 구름』의 다음 구절은 위안과 용기를 준다 :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비 가득한 눈으로 네가 누구이거나 또는 무엇을 했느냐를 보시지 않고, 네가 열망하는 상태를 보신다. (저자(성 카타리나)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레고리오 성인은 선언하신다. "모든 거룩한 열망은 성취를 늦춤에 따라 강도가 높아지고, 늦추어서 희미해지는 열망은 결코 거룩한 열망이 아니다."

이 "거룩한 열망"의 증가는 기도(Oratio)가 주는 효과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거룩한 열망을 통하여, 또 우리의 갈망뿐 아니라, 때로는 우리가 그분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들 때 체험하는 바로 그 좌절과 무력감을 통하여, 당신 힘으로 더 큰 능력을 우리 안에 창조하신다. 이것은 우리의 참 자아와 중심이 일치하는 곳인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가 우리의 무게중심인 하나님을 향하여 마치 자석의 힘에 이끌리는 것과 같다. 우리가 지속적인 회개 과정을 방해하는 환상을 더 많이 털어버릴수록, 이 이끌림이 한층 더 강력해진다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그분을 위해 살기 위해서 우리의 참된 중심인 하나님께 더 온전하게 방향을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은 기도 중에 일어날 뿐만 아니라, 기도로부터 흘러나와 구체적이고 세세한 일상까지 스며들어 다른 이들과 사건에 대하여 반응하고 응답하는 가운데서도 일어난다.

이러한 회심의 역동성은 세례자 요한의 단호한 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그분은 갈수록 커져야 하고, 나는 갈수록 작아져야 합니다." 이 복음의 원칙이 지닌 긍정적인 면은 "나의 참 자아는 점점 커져야하고, 거짓 자아는 점점 작아져야합니다." 전쟁터, 혹은 투쟁의 영역은 내적 생활과 외적 생활을 망라한다. 동전의 양면처럼, 내적 생활에서는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활동에 승복하기 위해 투쟁하고, 외적 생활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승복을 매일의 삶에서 행동하고 구체화하기 위해 투쟁한다.

이 기도(0ratio) 단계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인내롭게 기다리며 마음을 평온하게 하기를 배울 때까지는, 결국 기도가 우리에게 가르쳐줄 터인데, 가끔씩 아주 간단한 성서구절 읽기(Lectio)로 돌아가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시편 42장의 첫 구절같이 간단한 구절을 읽는 것이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 이 몸은 애타게 당신을 찾습니다.

그러나 독서를 기도로 대치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기도(Oratio)단계에서 점차적으로 우리는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하나님을 더 민감하고 더 직관적으로 깨달아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제한된 지적 기능이라는 덜 밝은 빛을 성급하게 추구하여 그 깨달음이 가려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제시하는 도움말을 들어보자. 성녀는 우리가 작은 불을 피웠을 때 (우리의 기도 중에), 그 불이 계속 타오르도록 이따금 작은 가지 하나나 둘(예를 들어, 성서의 몇 마디 말씀)을 그 위에 놓아도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큰 가지(긴 독서나 혹은 정신의 활동)를 그 위에 던져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그러면 그 불꽃은 꺼지기 때문이다.

이 기도(0ratio)단계에 적합한 기도의 예를 들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 기도는 그분께 열렬한 사랑으로 손을 뻗쳐 하나님께서 어루만지시는 마음이 자발적으로 고유하게 내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룩한 독서의 네 단계 중 셋째단계에 있다. 돔 마르미온(베네딕도회 아빠스, 1853-1923)은 이것을 아래와 같이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읽는다 (읽기 : Lectio)

하나님의 눈 아래서 (묵상 : Meditatio)

마음에 와 닿을 때까지 (기도 : Oratio)

그리고 불길 속으로 뛰어 든다 (관상 : Contemplatio)

깊이 사랑하는 친밀한 인간관계의 지속적인 발전이라는, 앞에서 인용한 유비에 따르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은 실제로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가고, 우리는 온전히 내어주고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갈망, 즉 사랑하는 이들의 일치하고자 하는 갈망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다시 우리 매일의 삶은, 그 기도가 참되다면 우리의 기도와 병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기도에서 요청받은 것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일을 매일의 관계 속에서도 그만큼 확장시켜야 한다. 이 일이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열망과 노력은 진실해야 한다.

 

관상으로의 변형

보다 깊은 차원으로 움직이고는 있다 할지라도, 지금까지의 읽기(Lectio), 묵상(Meditatio)과 기도(0ratio)의 연속적인 세 차원에서, 우리는 여전히 활동이 지배적인 요인으로 남아 있는 영역에 있다. 마지막 관상(Contemplatio)으로의 변형, 또는 관상(이것은 종착점이 아니라 새롭고도 결정적인 시작)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을 향해서 움직이는 반면에, 일종의 어두움이나 '밤'이 덮쳐오고, 우리의 길이 불분명해질 때 겪는 우리의 '체험'은 이것과 상치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하나님께서 이성과 상상이란 우리의 본능적 기능들을 '폐쇄' 시키고 만족과 열정의 정감적 느낌을 박탈함으로써, 그분이 점점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신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에 관하여 뚜렷하게 사고하거나 추리할 수 없게 되고, 아울러 열성과 느낌이 말라버린다. 광야가 시작된다. 이 위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계속 나가야 하는가를 이해하려면, 그리고 위대하나 분간할 수 없는 약속의 출발점에 있음을 깨닫지 못한 채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유혹받지 않으려면, 현명한 지로를 받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밤에서 새로운 새벽으로 가는 이 여정을 이끌 정평 있는 스승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다. 그는 이 주제에 대해 㰡”가르멜의 산길㰡• 㰡”어둔 밤㰡• 㰡”살아있는 사랑의 불꽃』등의 저술에서 상세하나 다소 빙빙 돌려 말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계속 다룬다. 그러므로 텔마 홀은 간략하게 요점을 정리하고 관련되는 주요사항들을 함께 제시하였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제시한 세 개의 "표지"

첫째, 성인은 어둔 밤과 무미건조함의 체험이 성령의 직접적인 개입의 확실한 지표인지, 혹은 단지 우리의 방종과 싫증 같은 어떤 다른 원인에 의한 결과인지를 식별하는 세 가지 표지를 제시한다.

1. 전처럼 추리적인 묵상을 할 수 없거나, 묵상에서 만족이나 위안을 얻지 못하는 현실. (주의: 할 수 있는 한 묵상을 계속하고 중지하지 말 것)

2. 하나님께 관한 다른 상세한 점에 상상이나 감각을 집중하기가 싫어짐. 예를 들어, 더 이상 하나님 생각으로 만족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체와 하나님에 대한 개념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정신적 이미지나 개념에 정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분의 현존과 관련된 모든 감각적인 위안이 소멸된다. 엄청난 고통을 체험하게 되고, 우리가 퇴보하거나 길을 잃었다는 두려움이 따르며, 전혀 기도할 수 없게 된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것은, 설명할 수는 없 지만, 하나님에 관한 것들에 대한 혐오뿐이다. 이것은 혼란스럽고, '미지근함'으로 받아 들여진다. 그러나, 어떤 해박한 영적 조언자에게는 명백한 것처럼, 바로 이 고통이 참된 관심을 무심코 드러낸다. 왜냐하면 실제로 미지근하다면 그런 관심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세 번째의 확실한 표지가 결정적이다. 첫째와 두번째 표지는 침체되거나 소진된 경우, 단지 진지함이 부족한 경우에도 체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가지 표지가 함께 드러날 때, 성 요한은 그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확신해도 된다고 주장한다. 이 표지는 묵상을 할 수도 없고, 그 외의 어느 것에서도 만족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별한 지식이나 이해, 또는 지적인 활동, 기억과 의지 없이도, 하나님께 대한 단순한 사랑의 깨달음에서, 내적 평화와 고요와 쉼 안에 홀로 머물도록 이끌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일반적인 사랑의 깨달음과 앎 속에서만 머물기를 좋아하게 된다.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

그런 다음, 성 요한은 어떻게 우리 자신을 이끌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특유의 조언을 하는데, 기도 안에서 우리의 활동으로부터 이루어지는 변형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지적했다. 성 요한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얼마나 쉽게 하나님의 일이 그릇되어 망가지는지를 주시하고, 우리의 노력은 여행의 목적지에 도달해 있는 사람이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계속 걷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음에 더하여, 필연적으로 그는 목적지로부터 떠나갈 것입니다."

성 요한은, 비록 우리가 "할 일 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고, 이렇게 하는 것이 다소 잘못된 것 같아 보일지라도, 오히려 우리 자신을 고요함 속에 머물도록 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관심, 노력, 그리고 하나님을 맛보고 느끼려는 열망 없이, 사랑스럽고 평화로이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단순히 만족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열망들은 우리를 소란스럽게 하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활동에 의해 우리에게 은밀하게 교통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주의를 흩어놓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수용적인 수동"을 위하여 받아들이는 시간이며, 이것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그렇게 보일지라도 게으름과는 거리가 멀다. 여기에 선(禪)의 지혜를 적용해 본다.

고요하게 앉아 있어라.
아무 것도 하지 말아라.
봄은 오고
그리고 풀은 저절로 자란다.

비록 우리가 활동하지 않는 것 같아도 은총은 제 갈 길을 가고, 우리의 탁월한 지식이 없어도 성령의 일은 진행된다.

그리고 나서 성 요한은 이러한 일반적인 사랑의 지식을 지니게 되는 초심자들이 '항상' 묵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명백히 밝힌다. 왜냐하면 이 변형은 즉각적으로 또는 총체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일반적으로 관상이 습관으로될 때까지 상당한 기간에 걸쳐 일어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묵상하려고 하는 매순간 우리는 묵상하려는 우리의 열망과 능력의 부족과 함께, 이러한 지식과 평화도 즉시 알아차린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특별한 것들을 숙고하고 이해하려고 고집한다면, 우리의 흐릿한 생각으로 성령의 단순한 빛을 가리고 간섭하게 될 것이라고 성인은 주의를 준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고유하게 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 요한은 우리에게 보증하기를, 조금씩 조금씩, "놀랍고도 장엄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지닌 성스러운 고요와 평화가 신성한 사랑에 둘러싸여 우리 영혼에 불어넣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활동하지 않고 무심해지는 동안 이 관상이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마치 이것은 우리 손에 붙잡으려 할 때 사라져버리는 공기와 같다. "이 시간에 사람의 노력은 소용이 없을뿐더러, 내적 평화와 감각의 무미건조함을 통하여 영 안에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일에 장애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요점들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

세 가지 표지 :

1. 전에 하던 묵상을 할 수 없음

2.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에 흥미를 잃음. 대개 길을 잃어버렸다거나 퇴보한다는 두려움이 따름. 감각이 무미건조함

3. (1번, 2번과 함께 드러날 때 결정적임) 고독한 기도로 이끌림

- 주의를 기울이고, 전반적이면서 사랑 가득함, 그러나 모호함 : "수동적으로 주의를 기울임"

 

해야 할 것

* '받아들이기', 그리고 성령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자리를 마련하기.

* 내적 침묵으로 이끌림에 따르고 사랑에 찬 주의를 기울이면서 머물기.

* 모든 활동을 버리고, 자기를 잊은 채, 하나님 사랑의 어두움 속으로 끌려가도록 내버 려두기

* 묵상을 다시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할 것, 내적 침묵이 습관으로 될 때까지.

나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 때문에 "마음의 기도"에서 관상으로 변형되어 가는 영역을 이 정도까지 조명하였다.

첫째,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하여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좋은 지향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이끄심대로 따르기보다 그 이끄심을 반대할 수 있다. 성 요한은 "망치밖에 모르고 그 연장으로(이성과 상상 등) 두드려대는 대장장이와 같은" 영적 지도자들을 맹렬히 비난하며, 그래서 그들이 알아챌 수 없는 성령의 움직임에 역행한다고 했다. "지도자들은 이 일에서 그들 자신이 주요 대리인, 안내인 영혼을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된 안내자는 성령이라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

둘째, 기도(Oratio)에서 관상(Contemplatio)으로 변형되어 가는 이 영역은 16세기경에 가르치기 시작하였던 기도의 영성에서 자라지 못한 "끊겨진 지점"이 되었다. 그 결과 관상은 정상적인 기도 밖으로 고립되었고, 오직 드물게 '선택된 영혼들' 만을 위한 범주로 따로 떼어졌다.

오늘날 그러한 외부 제도나 교회의 강요는 주된 요소가 아닌 반면에, 현대 서구 사회에 지배적인 사조의 '영향' 으로, 그리스도인의 기도에서 관상을 저지하고 배제할 수 있다는, 또 다른 현실적인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이 기술의 시대에서 실용적으로 머리를 써서 거둔 모든 업적들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질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기 위해 종종 직관 기능의 발달을 희생시키는데, 그 기능이야말로 관상과 직접 관련된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은 기도하는 동안에 끊임없이 이지적으로 생각하고, 분석하며, 판단하고, 일반적으로 "책임을 맡으려는" 후천적인 고집 센 경향 때문에 관상의 자발적인 성장을 막거나 지연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통제하려는 어떤 노력이라도 떠나보내길 요구하는 관상의 내적움직임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관상에는 수동적인 받아들임이 요구된다. 그것이 실제적인 창조이고 응답인데도, 실용적인관점에서는 순전히 시간 낭비로 보인다. 그러므로 특별히 마음의 기도에서 관상으로 변형되어 가는 이 지점에서, 우리가 무엇을 체험하고 필요로 할 것인지에 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향심기도(Contering prayer)"는 㰡”무지의 구름』의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현대에 적용시킨 것이다. 이 기도는 읽기와 묵상으로부터 마음의 기도, 관상의 내적 침묵에까지, 자발적인 움직임 안에 들어 있는 지적인 암초들을 떠나보내는 것을 특별히 지향하고 있다. 기도에서 지적인 활동 때문에 유난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토마스 키팅의 책 㰡”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를 지속적인 안내자로 삼으면, 큰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토마스 키팅 신부는 향심기도 운동의 창시자로서, 풍부한 관상 전통을 그 책에 담고 있다

 

4. 관상([ontemplatio) : 침묵으로 들어감,

"말씀에 깊이 잠김"

관상은 이상한 신천지로, 그곳에서는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모든 것들이 뒤집혀 있는 것같이 보인다. - 그곳에서는 새로운 언어(침묵)와 새로운 존재방식('무엇을 함'이 아니라 단순히 '있음')을 배우고, 우리의 사고와 개념, 상상, 감각과 느낌을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믿음을 위하여 버리게 되며, 하나님의 부재(우리의 감각으로는)가 그분의 현존'이고' 그분의 침묵(우리의 일상 인식으로는)이 그분의 언어 '이다'. 이것은 무지로 들어가는 것이고,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매달리는 친숙한 것들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또한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계 3:17) 존재(은총이 우리에게 드러내지만, 우리가 본질적으로 받아들이기는커녕 인정하기조차 두려운 것)에 우리의 모든 희망과 기쁨의 가능성이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참 자아를 아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상적인 자아는 환상이므로 이 여정에서 버려야만 한다. 거짓 자아는 하나님 현존 의식을 소유하고 잡으려고 애쓰지만 결코 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움켜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손을 펴야 받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거짓 자아는 알려질 수 없는 것 - "무지의" 직관적인 사랑으로만 알 수 있는데- 을 '알기' 원하는 자아이다. 또한 자율권, 통제, 자기에게 의미의 중심을 두기라는, 실재처럼 가장한 환상을 옹호함으로써 거짓 실존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자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연민어린 목적은 오로지 우리에게 실망과 슬픔을 줄 그러한 환상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관상의 시초에서 체험하는 어두움이라는 수단을 통해서(그리고 간헐적으로 빛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아마도 관상기도에 관하여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이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을 신뢰하라는, 또한 당신께 '우리 자신을 맡기라' 는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 자신 너머로, 예컨대 그분의 사랑으로 들어가는 이 신비스러운 여정에 들어갈 수 없는 우리의 피상적인 자아 너머로 우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말이다.

어떻게 기도하느냐고 아주 단순하게 물어본 수피 친구에게 써 보낸 토마스 머튼의 답장은 관상기도의 방법에 대한 귀중하고 아름다운 증언이다 :

이제 당신은 나의 묵상 방법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 기도 방법은 아주 단순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현존과 그분의 의지와 사랑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에 집중함으로써만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나의 기도 특성을, 예언자가 묘사했듯이, "마치 당신이 그분을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것을 상상하거나 하나님의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내 생각으로는 일종의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이것은 모든 것인 그분을 경배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은 무(無)임을 통째로 깨달으려는 커다란 갈증이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 기도는 무와 침묵의 중심에서 솟아나는 일종의 찬미입니다. 여전히 내가 "내 자신(my self)"으로 있다면, 이것을 나는 장애로 여길 것입니다 그분이 뜻하신다면 없음(無)을 온전한 명료함으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뜻하시지 않는다면, 이 없음은 실제로 그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보이고 그리하여 장애로 됩니다. 이것이 나의 평범한 기도방법, 묵상입니다. 이것은 어떤 것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얼굴을 직접적으로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그분 안에서 길을 잃지 않는 한, 그분을 찾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기술하기를, 관상은 "하나님께서 은밀하고 평화롭고 사랑스럽게 흘러들어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만약 방해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혼을 사랑의 영으로 태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덧붙이기를, "사랑의 불은 대체로 처음부터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해가 부족한 영혼은 그 자신 안에 사랑을 위한 평화로운 자리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우리 자신의 반성이나 의지의 힘이라는 매개물을 사용하고 거기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다만 흘러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야훼 앞에서 고요히 머물고, 그분을 그리워하며 기다는 것이다"(시 37:7).

여기서 "'내가 '기도하는 동안 여기 앉아 있어라'고 겟세마네에서 제자들에게 이르신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은 아주 적절하다. 머튼은 이 개념을 아래와 같은 특유의 표현으로 제시한다 :

기도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짓입니다. 그 위험은 우리의 그 기도들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갖게 되는 위험입니다. 기도의 위대한 점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곧장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당신의 기도가 기도를 방해한다고 말한다면, 그만 두십시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도록 하십시오.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심을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오. 자신을 잊어버리십시오. 예수님의 기도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우리 안에서 그분이 기도하도록 하십시오‥‥ 최고의 기도방법은 기도를 그만 두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알든 모르든, 당신 안에서 기도하시는 분이 기도하게 하십시오. 이것은 은총의 힘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 우리의 참된 내적 정체성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성령 안에서 누리는 성부와 그리스도의 관계입니다.

이러한 자아의 소멸로 예수님의 영은 우리 안에서 기도할 수 있고 우리 안에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오직기도 시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줄리안 그린이 말하듯이, "사람은 인간을 위한 마음 하나와 하나님을 위한 또 하나의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점차적으로 그분의 사랑으로 가는 데 우리가 놓는 장애들을 아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치우기에 충분할 만큼 사랑하는 것(혹은 그것들을 치우도록 허용하는 것),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고 그 사랑에 승복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매일의 삶 안에서 병행되어야만 한다. 매일의 삶에서 우리는 천천히, 반복해서, 우리 자신을 위해서 얻기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우리자신을 내어주는 쪽을 선택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머튼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관상은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을 키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전혀 불가능하다" 그 연민은 심지어 -그리고 특별히- 우리에게 드러나는 어두운 우리 자신에게까지 확장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어두운 자신을 부정하거나 그로 인해 화가 나는 것은 거짓 자아가 자기를 영속화하려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성인들과 신비가들에 관하여 쓴 책에서, 관상은 매우 빈번하게 비상하고 때때로 기괴하기까지 한 현상들과 연루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가운데서, 그들 자신조차 모르는 채, 활동하고 있는 참된 관상가들이 얼마나 되는지 추측할 수 없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수동적이고, 움츠려들며, 환상에 잠기고, 때로 억압된 관상가의 유형은 풍자일 뿐이다. 왜냐하면 관상은 열정을 위한 능력, 그리고 삶에 대한 불타는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이상한 용어("어둔 밤", 감각의 무미건조, 포기, 신비적 은총 등)를 써서 관상에 대해 말하는 글은 관상을 일상생활이나 보통사람들과 무관한 것으로 보게 할 위험성을 지닌다. 그러나 하나님은 '평범하시다!' 육화가 계시한 대로 그분은 우리의 인간성에 들어오셨고, 반드시 그 안에서 그분은 발견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와 모든 피조물은 그분 안에서 존재한다. 엘리사벳 발레트 브라우닝이 쓰기를 :

땅은 하늘로 가득 차고,

모든 흔한 덤불들은 하나님으로 불타네,

오직 보는 사람만이 신을 벗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주위에 앉아 먹딸기를 따네

더 나아가, 관상은 물리적 은둔생활(이것은 결코 관상가들을 배출한다는 보장이 아니다)에 의존하지 않고 '마음의 은둔생활에 의존한다. 즉 세속에서 애정 어린 관계들과 활동적인 역할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약속하셨듯이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 안에 집을 지을 것이다(요 14:23 ; 사역).

그러므로 관상가가 되는 것은 봉쇄 수도자나 활동 수도자 같은 어느 특정한 생활양식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형태가 무엇이든 간에, 오히려 그것은 사랑이 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으면서 모든 일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관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관심을 덜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갖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그리고 어떤) 기도 안에서 성장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날마다 기도 중에 내적 고요와 침묵을 위한 실질적인 시간을 마련하고, 진실로 거기에 우선권을 두고 충실하게 머물러야 한다. 유연할 필요는 있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랑의 관계를 유연성의 원칙과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연인들은 서로 혼자 있기 위한 시간을 계획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일이 저절로 일어나게 한다. 그런 시간 없이는 어떠한 깊은 관계도 가능하거나 지속할 수 없으며 성장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재적인 하나님은 발견될 수도 있으나, 초월적인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를 계시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속 충실하게 기도할 때, 우리는 충실성과 항구함 안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한 분께 주의를 다하여 깨어 있는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기다리는 일"이, 우리가 빛 안에 있든 어두움 속에 있든지 간에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 베르나르도가 우리에게 확인시키듯이, "비록 그분을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때라도, 찾는 과정이 결코 헛되지 않는 그분만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도한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6-19)

성인은 다음과 같이 기도를 마친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엡 3:20).

기도 시간 외에도 우리는 성찰하며 삶으로써 사물의 표면 보다는 삶 자체에 관해서 "묵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은 "삶을 듣기",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과 사람들과 평범한 일상사에서 어떻게 현존하시는지 알아차리기이다.

이 묵상법을 현실적으로 성장시키는 데 매우 도움이 되는 훈련은 이렇다. 즉 하루를 마치기 전에 우리를 스쳐간 시간들 속에서, 또는 그분이 드러나기보다는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환경 안에서 아마도 평범한 일로 위장되었을 텐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가를 성찰하고 기도로 분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란 우리가 살고 있는 내내 끊임없이 숨쉬는 공기와 마찬가지로, 매순간 생명과 존재와 사랑으로 그분을 받아들이며, 우리가 하나님 안에 몰두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은 일은 우리의 내적 눈을 열어 항상 거기에 있는 것을 '보고,' 이 가장 깊은 실재에 관하여 깨달아가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며 움직이며 살아가기 때문"(행 17:28)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유머스럽게 말하기를, "하나님은 언제나 집에 계신다.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는 것은 우리들이다." 관상은 믿음의 선물을 발전시키면서 이러한 깨달음을 발전시킬 것이며, 이것으로 우리는 현실을 보는 하나님의 비전에 참여하게 된다.

비록 사소하긴 하지만 우리가 내적 생명을 양육하고 육성 할 수 있는 방법들은 많이 있다. 내적인 삶은 최소한의 내적 침묵을 요구하므로, 우리는 예를 들어 우리를 지배하는 자동차, 라디오, 텔레비전 등의 끊임없는 소음을 차단할 수 있다. 우리는 쓸데없는 소란과 동요를 피하고 생명을 주는 고요와 평화의 섬을 창조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기도의 질뿐만 아니라 우리 관계의 질, 가족, 친구, 우리가 접하는 모든 이들과의 관계에 기여한다.

우리 중 거의 대부분은 영적 성장의 커다란 적(敵)인 자기중심적 지향에 도전하는 기회를 찾으려고 아주 멀리 볼 필요가 없다. 이 기회들은 가정이나 단체 생활 안에 넘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의 '스승'은 우리가 처한 바로 그 상황임이 판명될 것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남을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내어주는 데 동의하라고 요청하신다. 오직 극적이고 영웅적인 경우에만 그것들을 기대한다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생명이 자라나기 위해서, 거짓 자아에 대해 죽을 수 있는 많은 기회를 놓칠 수 있다.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는, "물론 우리는 고상하고, 장엄한 방법으로 고통 받으려 합니다.… 얼마나 환상적입니까! 보잘 것 없이 고통당하는 것, 그것이 고통입니다!"라고 말한다. "고통당하는 것"은 받아들이고,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내와 연민을 지니고, 우리 자신을 참아내고 견디어 내는 것이 가장 오래 지속될 필요가 있는 시간들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과 우리의 불완전함과 실패에 무자비해지거나 화가 나는 것은 오로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거짓 자아와 완전함이 가능하다는 거짓 자아의 환상에서 더 많이 비롯하기 때문이다. 다시금 역설의 요소가 이러한 관찰 속에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거짓 자아를 부정하는 모든 경우와 기회는 자유와 기쁨이라는 동전의 다른 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길이고, 그분의 약속이다.

그래서 관상은 궁극적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가는 움직임이다. 한 랍비의 이야기가 이 사실에 함축되어 있는 것들을 뛰어난 감수성으로 잘 보여준다.

옛날에 한 랍비가 한번은 제자들에게 밤이 지나고 새날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한 제자가 "멀리 있는 동물을 보고 양인지 개인지 분간할 수 있을 때 새 날이 아닙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랍비는 대답했습니다. "아니." 또 한 제자가 "멀리 있는 나무를 보고 무화과나무인지 복숭아나무인지 분간할 수 있으면 새 날입니까?" 랍비는 대답했습니다. "아니." "음, 그렇다면 무엇인지요?"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너희가 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다 너희의 자매형제로 다가올 때, 그 때가 새 날이다. 만약 너희가 이것을 할 수 없다면, 시간이 언제이든 상관없이, 여전히 밤이다."

모든 남녀를 형제요 자매로 보는 것은 신비가의 믿음의 비전에 함께 하는 것이다. 신비가의 핵심 직관은 하나님 안에서 온갖 것(ALL)이 일치하고 하나 되는 것이다. 이것은 관상의 은혜로운 효과로서, 현실을 보는 우리의 눈을 점차적으로 변형시킨다. 이 신비적 비전은 비밀스럽거나 '몽롱한' 꿈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명백하게 우리 지구의 생존은, 하나의 사랑 곧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들과 우주의 모든 것이 일치하고 상호 연대하는 일을 전반적으로 실현하는 데 달려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은 신비가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전혀 그리스도인으로 있지 못할 것이다." 칼 라너의 심원한 진술이다.

 

 

제 3 절 거룩한 영적 독서

1. 영적 독서에 대한 이해

기독교의 기도의 전통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들 중 하나는 Lectio divina라는 리틴어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직역하면 "거룩한 독서"라는 뜻이다. 즉 성경을 우리의 삶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기도의 전통은 하가다(hαggadah)라는 히브리 성경공부 방법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성경 본문의 내적 의미를 탐구하기 위해서 본문을 자유로이 사용하여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예수님 시대의 유대 인들의 경건한 관습이었다. 유대인들은 성경구절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삶이 변화될 때까지 반복하여 그 구절을 읽고 암송하곤 했다. 말씀을 반복하여 읽는 것이 사람의 존재 전체, 특히 마음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성경에 접근하는 기독교의 방식은 히브리 방법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 나름의 형태를 취한다.

이에 대해 설명해 보자. 거룩한 영적 독서(Lectio divina)에는 두 가지 전통적인 방법이 있다. 즉 수도원적 방법과 스콜라적 방법이 있다. 수도원적 방법의 기원은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수도사들이 종일 혼자 기도하는 특별한 방법에 적용된다. 수도사들이 모여 공동체와 함께 성무일과에 따라 기도할 때에, 특별한 성경 구절이 수도사의 관심을 끌 수도 있다. 그럴 때 그는 종일 그 구절을 생각하고 반추한다. 그러다 보면 자발적으로 기도하거나 그 말씀의 능력 안에서 쉼을 얻기도 한다. 기도에는 여러 "순간들"(moments)이 있는데, 그것들이 일정한 순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며 유동적이다. 기도는 수용적인 방법으로 성령의 흐름을 따른다. 말씀이 수도사의 일부가 되어, 종일 활동할 때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앞으로 수도원적 영적 독서에서의 다양한 움직임들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기도의 네 순간(moments)이라 언급하겠다.

영적 독서의 또 다른 방법은 스콜라적인 방법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12세기의 카르투지오회 수사인 귀고(Guigo)의 저술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 시대의 교회에서는 영적인 일에 대한 저술에서 다소 분석적인 방법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귀고는 네 순간을 분석하여 순서를 부여하고, 수도원적 영적 독서의 각 순간에 진행되는 것들을 묘사했다. 그것은 다소 집중적인(concentrative) 방법이다. 솔직히 말해서, 귀고는 이 네 순간이 영적 독서를 구성하는 분리된 요소로 여기지 않았지만, 수세기가 지나면서 그것들은 분리된 요소로 간주되게 되었다. 스콜라적 영적 독서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네 단계(steps)를 언급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영적 독서 방법은 동일한 목표를 갖는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의 보다 깊고 심오한 만남을 목표로 한다. 성경을 읽을 때에, 수도원적 방법은 보다 수용적인데 비해, 스콜라적 방법은 보다 집중적이고, 전자는 다소 유동적이고 후자는 보다 계획적이다. 전자는 성령의 움직임에 대해 보다 개방적이며, 후자는 실천의 단계에 집중한다. 두 가지 방법 모두가 복음의 관상적 차원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내 경험에 의하면, 처음에는 스콜라적인 방법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도의 다양한 순간과 단계를 학습할 수 있다. 그 관습은 개인기도 시간을 위해 고안된 것이지만, 공동기도 때에 사용될 수 있다.

나는 수도원적 영적 독서에 대해서 논할 때에는 "순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스콜라적인 방법에 대해서 논할 때에는 "단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중요한 것은 성경 안에서 기도하고 성령의 능력을 만나는 것이다.

스콜라적인 방법에 대해 상세히 다루어 보자. 어떤 의미에서, 나는 기도라는 네 단계로 이루어지는 춤을 가르치려 한다. 기도의 단계들을 이해하고 나면 순간들을 보다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적 독서는 성경을 읽는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네 단계의 훈련이다. 영적 독서의 전통은 실망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카르투지오회원인 귀고는 이 기도의 네 단계를 단순화하는 직관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그의 통찰은 "실용적인" 방법을 좋아하는 이 시대에 큰 의미를 갖는다. 어떤 의미에서 귀고는 시대를 앞서 간 예언적 인물이었다.

귀고는 그 수련을 야곱의 사다리처럼 세상에서 천국으로 올라가는데 사용되는 수도사들의 사다리라고 불렀다. 그 사다리를 올라가거나 내려갈 수 있고, 몇 단계를 건너 될 수도 있고, 우회할 수도 있고, 대체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네 개의 단계는 이 전통의 생명이 되어야 한다.

독서는 정신을 이끌어 성경을 주의 깊게 보게 해준다. 묵상은 이성의 지도 아래 감추인 진리의 지식을 깊이 생각하는 정신의 주의 깊은 활동이다. 기도는 병든 것을 제거하고 선한 것을 얻기 위해서 마음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관상은 정신이 하나님 안에서 정지되어 영원한 달콤함을 맛보는 정신의 고양이다.

사다리의 첫 단계는 독서(Lectio)이다. 그것은 우리를 이끌어 성경을 주의 깊게 경청하게 한다. 이것은 동방 교회에서 복음서를 낭독하기 전에 부르는 찬송을 상기시켜 준다 : "주의를 집중하라." 회중은 깊이 있고 집중하여 경청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두번째 단계는 묵상(meditatio)이다. 이것은 정신의 세심한 활동으로서, 우리의 지성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본문의 의미를 탐구하여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 단계는 추론적 묵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세번째 단계는 기도(oratio)라고 불린다. 귀고는 기도란 병든 것을 제거하고 선한 것을 얻기 위해서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그것은 중보기도, 또는 감성기도이다. 마음으로, 마음을 통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관상(contemplatio)이다. 귀고는 관상이 란 "하나님 안에 정지되어 영원한 감미의 기쁨을 맛보는 정신의 고양"이라고 묘사한다.

앞에서 "관상"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이야기한 바 있다. 관상에는 수득적 관상과 주부적 관상이 있다. 수득적 관상일 경우에는 우리가 주도하여 쉼을 얻는다. 주부적 관상의 경우에는 성령의 은사가 보다 깊은 쉼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 능력을 초월하는 쉼이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안에서의 쉼에 대해 말하려 한다. 그것은 수득적 관상의 또 다른 형태이다.

스콜라적 독서는 귀고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오 주님, 나는 당신의 얼굴을 찾으려 노력해왔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묵상해왔으며, 묵상하는 동안 당신을 더 많이 알고픈 뜨거운 갈망이 성장했습니다. 당신께서 나를 위해 성경의 떡을 떼시는 동안. 나는 당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알면 알수록, 더욱 더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이제는 문자라는 껄질을 통해서가 아니라 경험으로 알기를 원합니다.

경건한 기도를 하는 많은 진지한 사람들은 껍질에 만족한다. 귀고는 관상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영혼이 이처럼 주님을 부르고 갈망하는 동안, 하나님은 영혼이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흐름을 중도에 저지하시고 서둘러 자신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천국의 감미로운 이슬로 목욕하고 최고의 향품을 바른 갈망하는 영혼을 만나러 오신다. 하나님은 지친 영혼에게 힘을 주시고, 배고픈 영혼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 하나님은 메마른 영혼을 비옥하게 하시며, 세상 것을 잊게 하시고, 망각 속에서 영혼을 정화시켜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을 망각하게 하시며. 취하게 하심으로써 냉철하게 만드신다.

이것이 껍질 속에 들어 있는 알맹이이다. 영혼이 관상 안에 거할 때, 하나님의 압도적 인 은혜가 기도의 노력을 차단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우리의 조직, 개념, 이미지 등은 모두 사라진다. 귀고가 자아의 망각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언급한 것이다.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에서도 이 망각의 전통을 언급한다. 귀고는 상실과 획득을 설명하기 위해서 역설을 사용한다. 그는 은혜, 즉 하나님의 임재가 영혼을 취하게 함으로써 냉철하게 만든다고 설명한다 :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높아지고, 높이는 사람은 낮아질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행해진다. 그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완전한 선물로서 임할 수 있는 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려는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냉철한 상태에 머물기 위해서 이러한 상태를 소유해야 한다고 결정할 때, 성령은 우리를 취함과 혼돈으로 인도하신다. 우리는 오순절 날의 베드로처럼 된다. 우리는 술 취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제자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에 사람들은 그들이 술에 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우리가 실컷 마시면, 취함을 통해서 맑고 명료한 상태로 이동한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 문자에 집착하여 깊이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과 종교적인 표현을 망친다.

귀고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

말하자면, 독서는 기초요 출발점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료를 공급해 준 후에, 우리를 묵상에게로 위탁한다. 묵상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을 진지하게 질문하며, 보물을 파내어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묵상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으므로(두뇌는 결코 우리가 원하는 곳에 우리를 데려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묵상은 우리를 기도에게 위탁한다. 기도는 전력을 다해 그 자체를 하나님에게로 들어 올리며, 원하는 보물, 관상의 감미를 달라고 요청한다. 관상은 앞의 세 단계에서의 수고를 보상해준다.

"전력을 다해 자체를 하나님께로 들어 올려 원하는 보물을 요청한다"는 구절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몇 년 전에, 친구들과 함께 캘리포니아 북서부에 있는 레드우드 국립공원을 여행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자라는 삼나무들은 많은 햇빛을 받아 높이 성장하기 위해서 다른 나무들과 경쟁하기 때문에, 꼭대기 부분에 가지들이 많았다. 우리 일행 중에는 체구는 작지만 사람됨은 거인인 부인이 있었다. 그 부인은 숲 속에 멈추어 서서 두 팔을 높이 들고는 "자라라. 자라. 나도 삼나무처럼 되고 싶다"라고 소리쳤다. 나는 그 광경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우리도 그 부인과 같다. 우리는 자신이 작다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거인이 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보물이시기 때문이 다.

귀고는 네 단계 모두에 충실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

묵상이 없는 독서는 무미건조하다. 독서가 없는 묵상은 잘못된 것이다. 묵상이 없는 기도는 열의가 없다. 기도가 없는 묵상은 결실이 없다. 헌신적인 기도는 관상에 이르지만, 기도가 없이 관상에 이르는 것은 기적이며 지극히 드문 일이다.

여기에서의 영적 독서는 관상적 차원 안에 있다. 영적 여행을 진행할 때에는 이 네 단계 모두가 필요하다. 독서에 치중해야 할 때가 있고, 묵상에 치중해야 할 때도 있다. 감성기도를 위해 노력해야 할 때가 있고, 관상을 위해 노력해야 할 때가 있다. 이 네 단계는 항상 필요한 것이지만, 성령은 때에 따라 그 중 하나를 강조하신다. 우리가 진실로 성장하려면 이 네 단계 모두가 필요하다. 우리가 이 완전한 과정을 제대로 의식하면, 기도가 풍성해지고 결실을 얻을 것이다.

한 가지 이야기를 해 보겠다. 칼 J. 아리코(집중기도와 관상여행 저자)가 젊었을 때에 시무한 교구에는 댄스 스투디오에서 파트 타임으로 춤을 가르치는 부부가 있었다. 그 부부가 목사에게 와서 한 주일에 한 번씩 6주 동안 부부들에게 춤을 가르쳐 주겠다고 제안했고, 목사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결혼한 부부들이 춤을 배우는 모습이 어떠했을지 상상해보라. 쉬운 과정은 아니었지만, 매일 밤 강습을 마칠 때쯤이면 훌륭하게 춤을 주는 광경이 꽤 그럴 듯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그들이 평범한 춤의 단계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스텝을 배우기 위해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스텝씩 밟아가다 보면, 스텝의 연속이 아니라 춤이 된다. 그러나 춤을 추려면 먼저 스텝을 배워야 한다. 이 원리는 영적 독서에도 적용된다.

하나의 훈련이나 움직임에는 네 단계가 있다. 귀고는 그 단계들을 훈련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하나의 훈련을 이루는 네 개의 구성요소로 본다. 이 훈련의 목적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데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네 단계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게 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양육해 주려는 목적을 지닌 하나의 연속체이다. 이네 단계는 매우 특징적이고 분석적이기 때문에, 네 종류의 각기 다른 기도인 것 같은 인상을 받기도 한다. 각각의 단계를 독립된 기도로 취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기도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귀고의 시대 이후로 그러한 일이 발생해왔다. 이 분석적인 방법은 이해를 위한 훌륭한 도구이지만, 기도의 전체적이고 역동적인 특성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

전통적으로 영적 독서는 개인적으로 행해져야 한다고 간주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 분야에서 발달이 이루어지고 있다. 집중기도 모임에서는 점차 영적 독서를 중시하여 행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 집중기도를 한 후에 영적 독서를 행하는 일이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는데, 그것은 침묵할 때에 보다 깊은 차원에서 보다 개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각 단계를 마친 후, 또는 기도를 마친 후에 성경을 서너 번 읽고 간단하게 전체적인 나눔의 시간을 갖는다. 공동체 경험은 무척 귀중하다. 물론 그것은 전통적으로 제시되어온 것과 동일한 독서가 아니지만, 나는 그것이 하나의 발전된 형태로서 현대인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성경으로 기도하는 것" (praying the Scriptures)라고 부르지 않고, “영적 독서”라고 부른다. 영적 독서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보다 깊이 알고자 하는 사람은 사이몬 턱웰(Simon Tugwell)의 『불완전의 길』(Ways of the Imperfection)을 읽어보라.

영적 독서의 과정이 항상 제대로 이해된 것은 아니다. 12세기 중엽에 귀고는 "수도사들의 사다리"를 제시했다. 전통적으로 경건 생활을 위해서는 기도와 성경 읽기, 또는 성경 주석 읽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강조되었다. 15세기에 서방 수도원 운동의 창시자인 성 베네딕트는 규칙을 작성하면서 특별히 영적 독서 시간을 배정했다. 그의 규칙은 그 후 수백 년 동안 큰 영향을 미쳐왔다. 그는 묵상 기도 시간을 따로 배정하지 않았다. 그가 강조한 것은 성무일과를 하면서 행하는 공동기도였다. 개인적인 기도, 사적인 기도는 "짧게 자주" 해야 했다.

그것은 하루 종일 짧지만 열심히 전통과 교회와 그리스도의 정신을 염두에 두고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 영적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는 가정이었다. 틱웰은 8세기에 게르만 족의 선교사로 파송된 성 보니페이스의 친구 성 레오바(St. Leoba)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녀는 영적 독서에 전념했기 때문에, 기도 시간이나 식사 시간, 그리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손에서 성경을 놓지 않았다. 심지어 잠자는 동안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낭독하게 하곤 했다. 젊은 여인들이 이 일을 맡았는데, 한 음절이라도 빠뜨리고 지나치면,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 바로잡아 주곤 했다.

성 암브로스(St. Ambrose)의 말에 의하면, 초대 교회 교부들 중 가장 유식한 오리겐은 음식을 먹을 때에도 성경을 읽었다고 한다. 잠 잘 때에는 형제들 중 한 사람이 성경을 읽어 주어야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밤낮으로 기도 뒤에는 영적 독서를 하고, 영적 독서 뒤에는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오리겐의 견해였다.

오늘날도 영적 독서가 극단적으로 강조된다. 피정하는 동안 내내 독서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과거에 작성한 피정(퇴수) 노트를 보면, 그 당시 나는 피정(퇴수)하는 동안 읽은 책들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고 고백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나의 독서는 일종의 지적인 활동이었다. 당시 나는 많이 알면 그만큼 내 삶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당시에는 "핵심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이 여행을 계속 해야 하는 나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이제 나는, 그것은 진정으로 성령께 복종하여 나를 지배하게 하는 방법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때가 되면, 우리는 보아야 할 것을 보게 된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독서가 장려되었고,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기도하려 했으며, 묵상은 주로 지적인 활동으로 간주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관상은 오해되어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정상적인 기도의 일부로 간주되지 않았다. 이처럼 스콜라적인 영적 독서의 단계는, 독서, 묵상, 반응, 그리고 휴식이다. 이것을 라틴어로 표현하면, Lectio, meditatio, ortio, contemplatio이다. 오랫동안 독서와 묵상이 강조되어 왔고, 최근에 와서야 기도와 관상이 일반인의 기도생활에 들어와 자리잡게 되었다.

수도원적 영적 독서는 두 분야를 제외하고는 스콜라적 방법과 매우 흡사하다. 첫째, 그것은 하나의 기도 형태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경험되는 순간들로 간주된다. 일상적인 활동을 하면서 하나의 단어나 구절을 취하여 이따금 그것에 대해 생각하거나, 그것을 놓고 기도하거나, 그 말씀의 능력 안에 쉰다. 그것은 수용적이고 유동적인 것으로서. 하루 종일 그 사람에게 작용한다. 두번째 차이점은 두번째 단계에 있다. 스콜라적 방법에서의 두번째,『단계는 묵상(meditatio), 지력을 동원하여 하나의 단어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도원적 방법에서는 그것은 반추(ruminatio), 그 단어나 구절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지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포착하기 어렵지만 중요한 차이점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지성보다는 마음을 향하여 움직이게 함으로써 복음의 관상적 차원으로 보다 깊이 움직이는 데 도움을 준다.

나의 견해에 의하면, 우리는 먼저 스콜라적인 방법을 배워 네 단계를 이해한 후에, 수도원적 방법으로 이동한다. 그것은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과 흡사하다. 우리는 무도장에 있다. 우리는 몇 가지 새로운 스텝을 배웠다. 음악이 흘러나오면, 우리는 두 발을 움직이는 방법에 집중한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 스텝에 익숙해지면, 음악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음악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빨려 들어간다. 우리가 밟는 스텝들은 하나의 춤을 이룬다.

수도원적인 영적 독서에 관한 토마스 키팅의 논평을 인용해 보자 :

그것은 옛날 사막 교부들이 실천했으며, 후일 동방과 서방의 수도원에서 실천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스콜라적 형태보다는 관상기도를 지향한다. 전자는 오늘날 추론적 묵상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발달하여, 하나의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이동하는 것, 또는 일련의 단계들 중 하나로 인식된다. 만일 우리가 그 방법에 매달리지 않고 관상기도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그 방법은 훌륭한 기도 방법이 된다. 수도원적 방법에는 단계나 사다리 등은 존재하지 않으며. 순간들(moments)만 존재한다.

하나의 순간은 다른 순간들에게 양분은 공급한다. 우리는 성경본문을 펼쳐서 한 구절을 택하여 하룻동안 활동하면서 그 구절을 생각하고 그 구절을 놓고 기도한다. 그 성경구절이 우리 존재 속에 깊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다. 종일 그 구절을 지니고 다니며, 그 구절과 함께 한다. 그것은 우리의 호흡처럼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집중기도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영적 독서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2. 일상생활에서의 기도

수도원적 전통에 대해 언급해야 할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귀고보다 50년 전에 활동한 성 빅톨의 휴(Hugh of St. Victor)는 활동(operatio)이라고 불리는 단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휴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기도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을 염려했다. 나는 진정한 기도는 진정한 염려와 행동으로 이어지며, 진정한 행동은 다시 기도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귀고는 활동(operatio)은 자신이 제시하는 구조의 리듬을 깨뜨리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포함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도 옳지만, 그것은 일상생활과의 관계를 깨닫는데 도움이 된다.

네 단계의 영적 독서 훈련을 하면서, 우리는 결국 침묵으로 들어가며, 침묵의 에너지가 세상에서의 활동(operatio)으로 폭발한다. 일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수단에 의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활동을 하면서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기도를 의지한다. 월리엄 쉐넌(William Shannon)은『하나님의 얼굴을 찾음』(Seeking the Face of God)이라는 책에서 활동(operatio)에 관해 훌륭히 다루었다. 그는 그 용어를 통용되게 만들었고, 그것은 사회 활동이라고 부른다.

신학자 로버트 멀홀랜드(Robert Mulholland, Jr.)는 존 웨슬리를 연구하면서, 귀고 이후에 발달한 또 다른 전통을 지적한다. 그는 이것을 리듬이라고 묘사한다. 처음에는 침묵이 있고, 침묵에서 독서가 나온다. 독서에서 경청이나 묵상이 나오며, 거기서 기도가 나온다. 우리는 기도에서 관상으로 이동한다. 그는 관상은 자연스럽게 구체화(incarnatio), 기도의 에너지의 구체화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그는 활동(operatio)이라는 단어 대신에 구체화(incarnatio)를 사용한다. 그것은 기도하면서 말씀에 가까이 간 사람은, 생활 속에서 그 말씀을 구체화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구체화는 예수께서 시작되었으며, 우리 안에서 계속된다. 그 때에 우리의 사회적 활동은 기도하면서 경험한 것에서 생겨난 행동이 된다. 우리는 긍휼하고 개방적인 정신으로 행동하게 된다.

우리는 얼마 동안 일하고 나면 평화나 고요에 대한 욕구를 의식하게 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단순히 평화와 고요함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의 휴식을 원한다. 우리는 종종 "나는 조그만 평화와 고요함을 원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간단한 휴식은 피로를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은 기도 중에 얻는 보다 깊은 휴식이다.

이러한 순서가 규칙적으로 순환하기 때문에 기도 시간은 고립된 것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기도할 작정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기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이와 같은 순환하는 순서와 훌륭하게 통합된다. 기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에너지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의 특징인 비조직적인 일과 통합될 수 있다.

 

3. 영적독서 전통으로의 복귀

기도에 대한 이러한 논의가 새롭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잃어버렸는가? 역사적으로 이 전통을 상실한 것은 네 가지 상황 때문이다. 첫째, 16세기의 종교개혁은 교회로 하여금 감성적인 차원(oratio)과 관상적인 차원(contemplatio)에서 후퇴하게 만들었다. 이것들은 통제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그 혼란한 시대의 교회는 보다 강력한 통제를 기대했다. 교회가 위협을 느낄 때마다, 그것은 마음을 뒤로 하고 머리로 올라갔다. 이것은 복잡한 질문을 간단하게 관찰한 것이지만, 그것을 간단히 요약해 준다 : 보다 분명한 규칙, 보다 상세한 요리문답, 보다 빈번한 선포, 사방으로부터의 보다 치밀한 감독. 이것은 훌륭한 것이지만, 관상적 차원을 추구하는 자유를 손상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태도는 성 이그나티우스에 의해 강화된 것이 아니라, 이그나티우스의 영성 훈련을 강화해야 한다고 느낀 공동체 내의 다른 권위자들에 의해 강화되었다. 그들은 감성적인 측면과 관상적인 측면을 가볍게 다루었다. 이그나티우스는 감성 기도와 관상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최근에 와서야 이그나티우스의 영성훈련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가 행해졌다. 이그나티우스의 영성훈련이 16세기에 공식화한 것은 무엇인가? 이그나티우스의 영성훈련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헌신을 돕기 위한 피정과 반성의 공식이며 과정이다. 그것은 가장 대중적인 영적 여행 방법 중 하나이다.

그 다음에 정적주의(Quietism)가 발생했다. 이 운동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다. 이 운동에서는 마음만 옳은 장소에 있으면 다른 모든 책임은 하나님께서 보살펴 준다는 뜻을 함축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경청과 묵상과 독서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다.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면, 그가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그 후에 얀센주의(Jansenism)이 등장했다. 이 운동에서는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해서 말하기를 주저했다. 이 운동은 인간의 선함을 의심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행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학문, 올바른 생각, 금욕주의가 한층 더 강조되었다. 감정과 본능이 의심스러운 때에, 사람들이 어찌 지도자가 없이 관상의 여행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겠는가?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어려움에 직면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독서, 묵상, 그리고 결단을 강조했다. 이것도 훌륭한 것이지만, 감성 기도와 관상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 무렵, 성인 숭배가 성행했고, 숫자를 상징으로 사용하는 일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나는 이 방법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수도사의 사다리 중 몇 단계를 생략한 것이다. 그러면, 영적 독서는 어떻게 되살아났는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카리스마 운동에서는 감성 기도를 크게 강조했다. 사람들은 기도 안에 마음, 느낌, 감정 등이 차지할 공간이 있을 수 있음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카리스마 운동은 교회의 경계를 초월하여 퍼져가면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자신이 이것을 강조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전통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상실했던 것, 감성기도, oratio를 다시 발견했다.

내가 처음으로 카리스마 파 기도그룹을 만났던 일을 기억한다. 당시 학교에서는 교구 부속학교를 밤에는 여러 집단이나 조직이 사용하도록 권장했었다. 내가 교정을 걷고 있는데 어느 교실에서 이상한 소리로 기도하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일까?' 라고 혼잣말을 했다. 나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기도의 세번째 단계, 즉 감성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황 바울 6세는 주요한 관상 수도회들에게 그들의 은사를 재발견하라고 요청했고, 그들은 자신의 역사적 뿌리로 돌아가, 관상적 차원을 보다 잘 의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현대 세계에서 수도원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관상적 차원의 일부, 또는 대부분이 상실되었음을 인정했고, 관상적 수행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깔멜 수도회의 언스트 라킨(Ernest Larkin), 베네덱트 수도회의 존 메인(John Main),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베절 페닝튼(Basil Pennington), 토마스 키팅, 월리엄 메닝거. 그 외에 조지 맬로니, 월리엄 그린, 월리엄 존슨 등의 지도자들이 관상적 전통을 적극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해서 처음에는 두 가지 반응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과격하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즉시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도 시간에 고요와 침묵을 경험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도자들의 선한 뜻과 인내 덕분에, 우리는 영적 독서와 기도의 관상적 차원을 재발견했다.

이들 외에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학자들은, 우리가 사다리 중에서 두 개의 가로장(감성적인 것과 관상적인 것)을 잃어버렸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우리는 십자가의 요한과 아빌라의 테레사의 글에 접하기 시작했다. 불쌍한 깔멜 수도회에서는 16세기에 종교재판을 통과하기 위해 자기들의 문서들을 잘라내고 편집하고 수정해야 했었고, 그 때문에 우리는 한 번도 완전한 깔멜 수도회의 문서를 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이후, 우리는 편집되지 않는 원문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수백 년 만에 우리는 그들이 실제로 말하고 의도했던 것을 제대로 연구할 수 있었다. 우리는 교회 교부들 및 우리 전통에 속한 위인들을 발견했다.

이제 우리는 관상기도는 소수의 특수한 수도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보편 교회의 전통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보편교회의 전통은 관상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우리 문화 안에서도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관상에 대한 갈망이 무척 강력했기 때문에, 수십 만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기도와 영성을 배우기 위해 교회를 떠나 동방으로 가고 있었다. 교회는 한 번도 그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그들은 기도문은 배웠지만, 기도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교구 생활에서의 기도는 도덕적인 권면과 종교개혁 이후의 신앙을 벗어나지 못했다. 신자들을 초월명상, 불교, 선 등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줄 사람들에게로 몰려가고 있었는데, 이러한 전통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검증된 놀라운 명상 수행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구도자들에게 줄 것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라킨, 메인, 페닝튼, 메닝거, 키팅 등이 관상에 대한 워크샵을 제공하기 시작했을 때, 사방에서 여러 종파의 사람들이 참가했다. 그들은 힌두교와 불교 신자들과 대화하면서, 청중들의 절반이 로마 카톨릭 신자이고, 40퍼센트가 유대교 신자이고, 나머지 10퍼센트가 기타 종교의 신자임을 깨달았다.

가톨릭 전통과 유대교 전통은 신자들의 내면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는 갈망을 일으켜 놓았지만, 그러한 연합이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못했다. 사람들은 관상의 경험을 원했다. 그리하여 이 주제에 대한 서적과 테이프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나는 이러한 워크샵 분야에서 그다지 유명하지 못하다. 그러나 내가 영적 독서와 관상과 집중기도에 관한 워크샵을 개최하면, 수백 명이 참석한다. 사람들을 마음을 열고 우리가 부름 받은 여행에 대해서 배우려 한다. 우리는 지금 자신의 전통을 발견하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하찮은 것이 아니며, 현재의 신앙에 위협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완전한 우리의 전통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이 험한 여행을 하다가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려 한다. 사람들은 관상 여행을 원하지만, 그것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고의 가르침이 매우 도움이 된다. 그는 기초가 되는 구조와 개념적인 배경을 제공한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와 침묵의 신비로운 세계에 들어갈 때에 사용할 청사진과 지도가 있다는 것을 아는 데 도움을 준다.

영적 독서의 특성을 요약해 주는 훌륭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침례교 목사가 그의 감동적인 설교의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신학적으로 말하지 않고 "나는 나 자신을 충분히 읽고 분명히 생각합니다.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 다음에는 나 자신을 버립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지금까지 내가 설명해온 과정을 정확하게 요약한 말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독서 안에서 구하십시오. 그러면 묵상 안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기도 안에서 두드리십시오, 그러면 관상 안에서 문이 열릴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유명한 베네딕트 회 수도사 마르미온(Marmion)은 "우리는 마음이 감화를 받아 불이 붙을 때까지 하나님의 시선 아래서 읽는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 아래서(meditatio), 읽고(lectio), 마음이 감화를 받아(oratio). 불이 붙는다contem- platio).

 

4. 집중기도의 역할

 

집중기도(Centering Prayer)는 영적 독서(lectio)와는 구분되며, 기도의 부분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인 동시에 훈련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히 다룰 것이며,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치려 한다 : 집중기도는 우리가 지나친 개념화, 지나친 활동, 지나친 자아 의존 등에서 이탈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것은 관상의 은사를 받아들일 공간을 만들어준다. 동시에 그것은 자신의 사고방식에 대한 지나친 염려, 자신의 존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활동에 의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욕구, 스스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태도 등을 버리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러한 태도를 버리고 시간을 가지고 영적 독서를 행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실 장소가 우리 안에 만들어진다. 영적 독서는 집중기도의 침묵 안에서 우리와 함께 쉬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상기시켜 준다.

 

5. 다른 기도와 함께 하는 영적 독서의 역할

나는 영적 독서의 단계들과 순간들을 내가 행하는 전통적인 기도에 적용하는 것이 무척 유익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사역할 때, 네 단계를 적용하는 본보기로서 마리아의 기도(눅 1:28-42)를 사용한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기도문을 보다 깊은 차원에서 기도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영적 고전을 읽을 때에도 그것을 사용해왔다. 십자가의 요한의 글 중 한 단락을 취하여 네 번 읽으면서 매 번 읽을 때마다 적절한 질문을 하면, 그 문장의 껍질을 지나 알맹이에 이르는 데 도움이 된다. 영적 여행을 하는 현대의 순례자들은 영적 독서의 전통을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다.

 

6. 실질적인 제안

영적 독서는 적절한 때에 개인적으로 행하는 사적인 기도 수행이다. 그것은 훈련을 따르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성령의 활동에 대해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다. 다음은 그룹에서 행할 의도로 고안된 스콜라적 / 수도원적 영적 독서의 본보기이다. 이것은 이 방법으로 성경을 알려는 갈망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향한 성령의 새로운 운동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개인적인 영적 독서를 위한 본보기도 포함시켰다.

스콜라적 방법을 사용하려는 사람은, 독서, 묵상, 반응,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쉼 등을 생각할 것이다. 수도적 방법을 사용하려는 사람은, 독서, 반추, 반응, 쉼, 하나님의 말씀이 됨 등을 생각할 것이다.

 

7. 공동 기도를 위한 스콜라적인 영적 독서 방법

1). 독서(lectio :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경청함)

· 첫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당신의 관심을 사로잡는 단어나 구절이 무엇 인지 알아내라

· 적절히 쉬면서 그 구절을 천천히 읽으라.

· 일 분 동안 침묵하면서 묵상하라.

· 만일 듣는 사람들이 원한다면, 그들이 읽으면서 관심을 갖게 된 단어나 구절을 큰 소리로 발표하게 하라.

· 그 후에는, 들은 것이 내면에 깊이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서 몇 분 동안 침묵하 라.

 

2). 묵상(meditatio :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함)

· 두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떠오른 생각이나 고찰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라

· 적절히 쉬면서 그 구절을 천천히 읽으라

· 일 분 동안 침묵하면서 깊이 생각하라

· 만일 모든 사람들이 원한다면, 말씀을 들으면서 의식하게된 생각을 소리 내어 발표하게 하라.

· 그 후, 들은 말이 내면에 깊이 자리잡게 하기 위해서 몇 분 동안 침묵하라.

 

3). 기도(oratio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 감성기도)

· 세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 말씀 안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을 표현해 주 는 기도가 내면에서 솟아오르는지 의식하라

· 적절히 쉬면서 그 구절을 천천히 읽으라

· 일 분 동안 침묵하면서 묵상하라

· 만일 모든 사람들이 원한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신이 경 험하고 있는 것을 표현해 주는 기도를 소리 내어 말하게 하라

· 그 후에, 들은 것이 내면에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서 몇 분 동안 침묵하라

 

4). 관상(contemplatio : 하나님의 말씀 안에 쉼)

· 네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앉아 있으면서 마음의 침묵 안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시게 하라. 하나님의 첫번째 언어 는 침묵이다.

· 적절히 쉬면서 그 구절을 천천히 읽으라

· 3-4분 동안 침묵하라.

 

마무리 기도 :

전능하신 하나님, 당신의 말씀의 은사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말한 단어나 구절, 우리가 의식하게 된 생각, 마음에 떠오른 기도를 행동으로 옮겨, 당신께서 우리의 삶에 임재하시고 활동하시는데 동의하고픈 참된 갈망을 상기하게 해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선택사항

마무리 기도를 한 후에, 참석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경험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간단한 신앙의 나눔에 참여하라고 요청한다. 그 후에, 들은 것을 내면에 깊이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서 몇 분 동안 침묵한다.

 

8. 공동기도를 위한 수도원적 영적독서방법

서언 : 수도원적 방법은 체계적이지 못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방법이라 할 수 없다. 이 방법을 시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은 후에는 오직 성령의 이끄심을 따른다.

예를 들어보자

․ 말씀을 읽는 동안에, 특별히 관심이 가는 단어나 문장이나 구절을 의식하게 될 수도 있다.(독서)

․ 또는 단어나 문장이나 구절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함께 있으면서 마음속으 로 그것을 반복할 수도 있다. (반추)

․ 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을 표현해주는 기도가 내면에 서 솟아오르는 것을 의식할 수도 있다. (반응)

․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안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고찰을 초월하여 하나님과 함께 쉬면서 단어나 문장이나 구절 안에 쉰다. (쉼)

그 구절을 여러 번 천천히 읽어라.

한 번 읽은 후에는 1분 30초 동안 침묵하라.

 

마무리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당신의 말씀의 은사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말한 단어나 구절, 우리가 의식하게 된 생각, 마음에 떠오른 기도를 행동으로 옮겨, 당신께서 우리의 삶에 임재하시고 활동하시는 데 동의하고픈 참된 갈망을 상기하게 해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선택사항

마무리 기도를 한 후에, 참석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경험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간단한 신앙의 나눔에 참여하라고 요청한다. 그 후에, 들은 것을 내면에 깊이 자리잡게 하기 위해서 몇 분 동안 침묵한다.

 

9. 개인적인 영적 독서

1). 첫번째로 성경 구절을 읽는다(소리를 내어 읽는 것도 유익하다). 특히 마음이 끌리는 단어나 문장이나 구절을 되풀이하여, 그것이 마음 속 깊이 자리잡게 만든다. 이 때 어떤 통찰이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그러한 통찰을 확대하지 말고, 마음속으로 음미하면서 한 단어나 문장이나 구절을 반복하라.

2). 그 말씀을 즐기라. 그 말씀이 마음속에 올려 퍼지게 하라. 원할 때마다 계속 그 구절을 읽어, 암송하라.

3). 기도 시간 내내 고요하게 받아들이려는 태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경청하려는 태도를 유지하라.

4). 이 단어나 구절이나 구절을 계속 경청하면, 무의식적으로 기도가 솟아날 것이다. 그러면 기도를 하고, 다시 마음속으로 그 단어를 반복하라.

5). 당신이 그 단어나 문장이나 구절의 의미를 초월하여 말씀의 거룩한 임재의 은사로 이동하는 것을 발견하면, 그 임재가 머물러있는 동안 하나님 안에서 쉬라.

 

주의사항

이 단계들은 각기 분리된 것이 아니지만, 서로에게로 흘러들어간다. 한 구절이나 장을 읽는 일을 서둘러 마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경청하는 것이다.

 

확대실천

휴식한 뒤에는 그 단어나 문장이나 구절을 일상생활의 활동 속으로 가지고 들어가, 그것에 경청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그 안에서 쉬라. 그것이 당신의 일부가 되게 하라.

 

 

제 4 절 수도원 전통에 따른 거룩한 독서

고대 수도 전통과 동양의 정신에 근거해서 우리는 성서독서와 성서 묵상(반추기도) 수행을 아래 방법에 따라 시도해 볼 수 있다. 여기 제시되는 것은 하나의 가능한 수행 방법이므로 꼭 이것만 따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수행은 하나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확연히 깨닫게 해 줄 것이다.

 

1. 개인 독서

1).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한다.

인간은 심신 상관적 존재다. 이 평범한 진리를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양의 사고는 영혼과 육체를 철저히 분리시켰으며, 그 결과 철학 · 종교 · 윤리 모든 면에서 수세기 동안 이원론이 지배해 왔다. 다행히 오늘날 서양에서는 이런 이분법적 사고의 한계와 문제점들을 인식하여 동양의 심오한 정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동양은 언제나 육체와 영혼의 가치를 모두 존중해 왔으며, 특별히 몸에 관심을 쏟았다. 몸과 더불어 모든 것이 시작된다. 명상도 눈과 폐와 복부와 척추의 작용을 가르치는 예술이다. 예컨대 힌두교의 요가나 선불교 등이 이에 속한다.

서양인들의 기도는 이지적이고 지성적인 경향이 짙다. 이것은 머리로 하는 기도일 뿐 영적 에너지가 발생하는 몸의 더 깊은 단계에서 드리는 기도는 아니다. 서양은 이성과 추리, 논리를 강조하지만 동양은 직관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할 때 몸의 역할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 월리엄 존스턴 신부의 견해에 공감한다. 그가 말하듯 몸은 결코 묵상이나 기도에 장애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더 깊고 근원적인 차원으로 인도한다. 그는 더 나아가 서양은 동양으로부터 수혈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렉시오 디비나를 시작하기 전에 이런 동양정신에 입각하여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1) 자세(調身)

성서 독서나 성서 묵상을 시작하기 앞서 몸의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자세가 바르지 못하면 호흡이 깊지 못하고, 호흡이 깊지 못하면 마음 역시 고요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월리엄 존스턴은 자세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토마스 머튼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참선」 부록에 다양한 자세들을 상세히 소개했다. 결가부좌, 반가부좌, 일본식 좌법인 세이자 외에도, 기도 의자 자세, 의자에 앉은 자세 등이 있다. 기도의자는 현재 한국의 몇몇 수도원(예 : 예수원)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요가나 참선에서 앉는 자세는 몇 가지 점을 제외하면 거의 비슷하다. 여기서는 수행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결가부좌와 반가부좌를 소개한다. 결가부좌는 왼발을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오른발을 왼쪽허벅지 위에 깊숙이 올린 다음 가볍게 이쪽저쪽을 움직이는 자세로, 연화좌라고 불리기도 한다. 반면 반가부좌는 오른발만을 왼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는 방법으로서, 이 자세에서 적당한 높이의 방석을 사용하면 척추가 곧게 펴지게 된다. 기존 교회에서는 의자에 앉는 자세를 활용해야겠지만, 기도의자를 사용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아주 효과적이다. 단점은 항상 휴대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기도하기에 불편하다. 긴 시간을 기도하거나, 장소에 구애 받지 않으려면 좌선이 좋다. 어느 자세를 취하든 자신에게 가장편한 자세가 가장 좋다. 기도 자세는 어느 자세를 취하던 공통점은 좌선 자세를 취할 때 중요한 것은 몸의 중심이 단전에 모이도록 척추를 곧게 세워 귀와 어깨가 수직이 되게 하고, 머리끝으로는 천장을 밀어 올리듯 하고, 턱은 안쪽으로 당기는 것이다. 턱이 들리면 자세에 힘이 빠지고 쉽게 졸음이 온다. 눈은 반쯤 살며시 감거나 뜨는 게 좋고 완전히 뜨거나 감지는 말아야 한다. 눈을 가볍게 뜰 때는 앞에 모셔진 십자가 등 적당한 곳에 시선을 고정시키면 된다. 에바그리오 역시 기도할 때는 눈을 살며시 뜬 상태에서 아래를 보라고 권고했다.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에서도 명상할 때는 움직이지 말고 몸과 머리와 목을 꼿꼿이 일직선으로 하며, 시선은 코끝에 두라고 가르친다. 편자는 경험상 눈을 살며시 감는 것을 권한다. 이때 손의 모습은 왼손을 오른손 위에 올리고 엄지손가락끼리는 인(印)자 모양으로 가볍게 붙여 몸쪽에 닿게 하고, 엄지손가락은 대충 배꼽 높이에 둔다. 양팔은 자유롭고 편하게 두되 팔 밑에는 계란을 하나 끼워 들 것처럼 가볍게 뗀다. 그리고 좌선 중에 초보자들은 자주 입 안에 침이 고이는데, 이 때는 윗니 가까이 입천장 부근을 혀끝으로 살짝 치올려 대고 있으면 된다. 이렇게 자세가 잡히면 천천히 몸을 전후좌우로 움직여 가장 안정되고 편안한 지점을 찾아 몸의 중심을 잡는다. 그곳이 바로중심점이다. 이런 자세가 현대인들에게 실질적으로 어떠한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다음의 연구 결과는 매우 흥미롭다

* 척추를 곧추세우면, 내장의 압박이 그만큼 줄고 복 압력이 생겨 호흡이 편해지고 정신도 안정된다.

* 온몸의 긴장이 사라지면 마음이 집중되고 스스로 초연해지므로, 피로가 가시고 평 온이 유지된다.

* 자세가 안정되면 마음도 따라 바르게 된다. 이때 혈액순환이 원활해져 생기 충만해 질 뿐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찾는 즐거움도 맛볼 수 있다.

바른 자세는 그래서 중요한데, 성서 독서나 성서 묵상 때는 꼭 이런 자세가 아니어도 각자 편한 자세로 바르게 앉으면 된다. 동방의 헤시키즘에서는 등받이 없는 높은 의자에 앉아 머리를 구부리고 수염을 가슴 위에 둔 다음, 시선은 배 한가운데나 배꼽 위에 두고 온 정신을 집중하라고 권한다. 그러나 동양의 수행법에서는 이런 자세가 별로 권장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서독서나 성서 묵상 때는 가급적 허리를 곧게 펴고 바른 자세를 취하면 좋다. 위의 다양한 자세 가운데 각자 자기 신체에 맞는 자세를 골라 수행에 적용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2) 호흡(調息)

자세를 바르게 했으면, 이제 호흡을 고르게 할 차례다. 그래야 마음도 가지런해진다. 호흡과 마음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 호흡이 고르지 못하면 마음도 흔들리고, 마음이 동요되면 호흡도 흩어진다. 그러므로 호흡을 의식적으로 고르게 하여 자율신경을 조절하면 감정의 움직임도 조절되고 마음의 안정도 가능해진다. 경험에 의하면 명상에서 호흡은 매우 중요하다. 많은 호흡법 가운데 여기서는 실제로 도움이 될 방법을 간단히 소개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방법은 복식호흡이다. 이것은 아랫배와 가슴을 부풀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잠시 멈췄다가 다시 숨을 토해 내는 간단한 방법이다. 단전호흡은 배꼽 3~4cm 아래의 단전에 초점을 맞추어 호흡한다. 모든 생명과 에너지가 단전에서 솟아나기 때문에 단전호흡을 하면 숨도 고르고 깊어진다.

요가에서는 완전 호흡법과 쿰바카 호흡이 두드러진다. 전자는 숨을 먼저 내뱉고 배와 가슴으로 숨을 깊이 들이쉬고(吸) 잠시 멈춘 후(止)" 천천히 내뱉는데(吐) 그 비율은 대략 1:4:2쯤 된다. 반면 후자는 모든 요가 호흡의 총칭으로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튼 다음, 오른손 둘째손가락을 미간에 대고 충분히 숨을 내쉬고 나서,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오른쪽 콧구멍을 막고 왼쪽 콧구멍으로 충분히 숨을 들이쉰다. 그리고 가운데 손가락으로 왼쪽 콧구멍을 막고 완전히 숨을 멈춘다. 그러고는 다시 오른쪽 콧구멍을 막은 엄지손가락을 떼면서 숨을 토하고 다시 그쪽으로 흡(吸), 지(止), 토(吐)를 번갈아 가며 되풀이하는 방법이다. 여기서도 1:4:2의 비율이 좋다.

참선 수행에도 수식관(數息觀)과 수식관(隨息觀)이 있는데 전자는 선의 호흡법을 대표하는 것으로 호흡을 세면서 하는 방법이다. 즉, 들이쉬면서 하나, 내쉬면서 둘 ‥‥ 이렇게 열까지 센 후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오는 수행이다. 후자는 호흡만을 의식하여 숨쉬고 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는 수행이다.

사실 이런 호흡의 중요성이 동양 종교들에서만 강조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전통, 특별히 헤시키스트들도 그 중요성을 언급했다. 동방 교부들의 영성 작품모음집『필로칼리아㰡•,(Philokalia,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에서는 이렇게 권고한다.

우리는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쉽니다. 호흡은 몸이 살아가는 데 기본이 되고 몸의 온기를 유지시켜 줍니다. 따라서 방에 고요히 않아 마음을 모으고 기도(氣道)를 따라 들이마신 공기를 모두 심장으로 들어가게 한 다음 그대로 있으십시오‥‥ 그리고 다음의 그대로 있으십시오. 그리고 다음의 기도를 읊으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계속 하십시오.

시나이의 그레고리오는『필로칼리아㰡•에서, 기도할 때 마음 편히 해서는 안 되고 호흡을 자제해야 함을 여러 교부들의 예를 들어 권한다. 『이를 없는 순례자㰡•에서 "예수기도"(심장기도)를 설명할 때도 들숨에 "주 예수 그리스도님", 날숨에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호흡에 맞춰 기도하는 방법을 일러 준다. 예수회의 드 멜로 신부 역시 여러 묵상법들을 소개하는데, 숨을 들이쉴 때 하나님의 성령이 자기 안에 들어옴을 의식하고, 숨을 내쉴 때 자신의 온갖 두려움, 부정적인 느낌들을 내뱉는다고 상상하면서 어떤 느낌들은 호흡을 통해 즉시 표현해 보라고 권한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각자 자기에게 맞는 방법들을 골라서 활용하면 되겠다.

바른 자세와 느린 심호흡은 언제나 필요하다.

(3) 마음(調心)

인간의 마음은 거대한 대양과 같다. 거기에는 온갖 것들이 혼재해 있다. 이런 마음을 잘 다스려야 고요와 평화를 간직할 수 있다. 작은 감정의 파고에 쉼 없이 마음이 끌려 다니다 보면 어느새 마음은 황폐해져 깊은 내적 생활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깊은 내적 생활이나 정신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릴 필요가 있다. 그러나 마음을 고요하게 다스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예배나 묵상 중에 우리 마음은 온갖 걱정 · 근심 · 분노 · 미움으로 요동친다. 더욱이 현대인은 많은 생각과 걱정들로 한시도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나 자기 본래의 마음을 잃고 거짓마음에 휩싸여 있는 한, 존재의 중심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이 점에서 앞서 말한 동양의 방법들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선에서는 좌선을 권하며 특히 호흡을 고르게 함으로써 마음의 고요를 찾으라고 가르친다. 마음이 감정을 조절해야지, 감정이 마음을 지배하면 문제가 생긴다. 마음이 감정과 생각에 좌우되지 않고 고요해지면 통합된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고요하고 순수한 마음을 통해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고 가르쳐 왔다. 교회의 많은 영성가들은 한결같이 이 마음의 심저(心底)에 깊이 들어가라고 충고한다. 하나님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 마음에 거하시므로, 마음을 잘 가꾸어야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더욱 뚜렷이 드러나게 된다. 물론 교회사를 보면 마음의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극단주의자들도 있었다. 그래도 앞서 말한 중요성 때문에 동양의 전통이나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에서는 한결같이 마음의 고요를 강조한다.

지금까지 성서 독서를 시작하기 전에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런 동양의 유산이 현대의 서양인들에게 각별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한다.

몸과 마음을 바르게 했으면 이제 깊은 호흡과 함께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한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깊이 의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타종교나 뉴에이지 운동과 렉시오 디비나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우리는 인간의 가능성을 알지만한계도 분명히 깨닫고 있기에 더욱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사실 좌선, 요가, 단전호흡, 초월명상 등, 인간 잠재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많은 수행법들은, 자칫 인간 능력을 절대적으로 맹신한 나머지 신을 도외시하는 뉴에이지 운동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이에 대해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오늘날 한국의 사회적 종교적 흐름은 건전한 신앙생활보다 환시 · 기적 · 예언 등의 기이한 현상을 중시하고 이에 집착하며, 더 나아가서는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방법들을 시도하는 초보자들은 되도록 영적 지도자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실제로 그러한 수행을 깊이 하다 보면 신비 현상들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너무 집착하면, 정작 달은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만 보는 우를 범하게 된다. 우리는 영적 여정을 정확히 직시하고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손가락이 아니라, 직접 달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성서 독서나 성서 묵상을 시작할 때 하나님 현존을 의식하는 것은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하여 하나님과의 일치로 나아가게 한다. 17세기 가르멜회 수도자 라우렌시오 수사는 수도생활 40여 년을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수행에 바쳤다. 그도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오랜 노력과 수행을 통해 마침내 일하거나 기도하거나 산책하거나 다른 어떤 일을 하거나 항상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 수 있었다. 하나님의 현존을 자주 의식하고 오래 수행하다 보면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늘 하나님께로 정신을 집중하게 된다. 이렇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늘 하나님 현존 안에서 생활해야 한다. 최소한 성서 독서나 성서 묵상을 시작하기 전에라도 하나님의 현존을 깊이 의식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행 17:28)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이 사실을 자주 망각하니 유감스럽다. 성서 독서나 성서 묵상을 시작할 때 조용히 앉아 몸과 마음을 다스린 후, 하나님의 현존을 깊은 호흡과 함께 느끼고 받아들임은 그래서 필요하다.

3). 성령께 도움을 청한다.

아무리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하고 하나님의 현존을 깊이 의식하더라도 성서 독서나 성서 묵상을 열매 맺게 해주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성령이시다. 성령만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 이분만이 거룩한 말씀의 의미를 계시하시며,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 삶을 안전하게 인도하신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영성생활이 빗나가지 않고 하나님 안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다. 예수님도 공생활 시작 전, 사막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셨기에 사탄을 물리치실 수 있었다. 초기 수도자들 역시 사막이나 광야로 들어갔지만, 그들을 인도했던 분은 바로 성령이었다. 성령만이 우리를 가장 안전하고 직접적으로 하나님과의 일치로 나아가게 한다. 이 성령은 우리 안에 사랑 · 기쁨 · 평화 · 인내 · 친절 · 선행 · 진실 · 온유 · 절제의 열매(갈 5:22-23)를 맺게 한다. 그러므로 성서 독서나 성서 묵상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어 당신의 심오한 말씀의 신비를 깨닫고 우리 안에서 열매 맺게 해 주시도록 성령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 성령께 도움을 청할 때는 자유롭게 청원기도를 드리거나 "오소서, 성령이여! 저의 마음에 임하소서"라는 짧은 기도를 바칠 수도 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각자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마음을 열고 성령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4). 성서 말씀을 작은 소리로 천천히 읽고 듣는다.

☞ 유의 할 점

* 빨리 읽으려고 서두르지 않는다.
* 전 존재로 읽는다. 손으로는
(촉각) 성서를 들고 읽을 곳을 편다. 눈으로는(시각) 성서 의 말씀을 보고, 입으로는 그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읽는다. 귀로는(청각) 그 말씀을 듣고, 기억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다.
* 가능하면 그날의 독서와 복음을 읽는다.

 

5) 성서 말씀 중에 마음에 닿는 구절이 있으면, 거기에 잠시 머무른다.

☞ 유의 할 점
* 마음에 닿는 구절에 밑줄을 그어 표시해 둔다.
* 그 구절을 작은 소리로 천천히 반복 암송한다.

 

6) 같은 방법으로 성서를 읽어 내려간다.

7)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기도로 끝마친다.

☞ 유의할 점

* 일어나기 전에 고요히 감사기도를 바친다.
* 일어나기 전에 마음에 닿았던 성서 구절들 중 하나를 택하여 기억이나 쪽지에 간직 한다.
* 일어나면서 그 구절을 가지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 선택한 성서 구절을 일상에서 끊임없이 되뇐다.

 

2. 공동 독서

1) ~ 3) 개인 독서와 같다. 그러므로 개인독서를 다시 읽으면 된다.

1)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한다.

2)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한다.

3) 성령께 도움을 청한다.

4) 성서 말음을 작은 소리로 천천히 읽고 듣는다.

(1)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다(첫 번째 독제)

☞ 유의할 점

* 한 사람이 선택된 성서 구절을 천천히 소리 내어읽는다.
* 성서 구절의 선택은 모임의 성격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되도록이면 그날의 독서와 복음 중에서 골라 읽기를 권한다.
* 각자 잠시 침묵하면서 봉독된 성서 말씀을 전체적으로 되새겨 본다.
* 지도자는 서둘러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말고 적당한 침묵의 시간을 가진 후에 다음 독서를 하도록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며 듣는다(두 번째 독서)

☞ 유의 할 점

* 다른 한 사람이 같은 성서 구절을 소리 내어 천천히 반복해서 읽는다.
* 잠시 침묵하면서 마음에 닿는 성서 구절을 택해 기억 속에 간직한다.
* 지도자는 서두르지 말고, 반드시 적당한 침묵의 시간을 가진 후에 다음으로 넘어가 야 한다.

(3)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다(세 번재 독서)

☞ 유의 할 점

* 셋째 사람이 똑같은 성서 구절을 천천히 소리 내어 읽는다.
* 각자는 침묵 중에 자신이 선택한 말씀을 믿음 · 소망 · 사랑 안에서 천천히 반추한 다.
* 마찬가지로 지도자는 서두르지 말고, 반드시 적당한 침묵의 시간을 가진 후에 다음 으로 넘어가야 한다.

5) 나눔

☞ 유의 할 점

* 자기에게 의미 있게 다가온 성서 구절이나 자신이 깨달은 바를 서로 자유롭게 나눈 다.
* 나눔은 모두가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원하지 않으면 조용히 다음 사람에게 차례 를 넘긴다.

6)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기도로 끝마친다.

☞ 유의할 점

* 지도자는 공동체를 대표해서 자유롭게 감사 기도나 주님의 기도를 바칠 수 있다.
* 각자는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선택된 하나의 성서 구절을 기억 속에 간직한다.
* 공동 독서가 끝나면 선택된 그 성서 구절을 가지고 각자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 일상에서 선택된 성서 구절을 끊임없이 되뇐다.

 

3. 반추기도

1) ~ 3) 개인 독서와 같음

4) 성서 말씀을 천천히 반추한다.

(1) 선책한 성서 구절을 떠올린다(토출)

씹기 위해서는 반드시 음식을 먹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반추기도에는 반드시 재료가 될 성서 구절이 필요하다. 이런 성서 구절은 성서 독서에서 선택하는데, 되도록 아침 시간에 그날 하루 동안 반추할 성서 구절을 선택하여 기억하거나 쪽지에 적어 간직한다. 그리고 그 구절을 종일 되씹을 양식으로 삼아 일할 때나 쉴 떼, 차를 기다리거나 걸어가면서, 가능한 한 자주 천천히 되뇌어 보기를 권한다. 그러나 그것이 대단히 어려울 경우도 있다. 업무를 급히 처리해야 하거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상황에서 말씀을 평화로이 되뇐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저녁에 묵상 시간을 따로 정해 놓고 집중적으로 성서 말씀을 반추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억이나 쪽지에 간직해 둔 성서 말씀을 떠올려야 한다. 평소에 성서 독서를 소홀히 했다면, 성서 묵상에 필요한 성서 구절을 떠올릴 수도 없다. 토출하기 위해서는 성서 독서 시간에 선택된 성구를 기억이나 쪽지에 간직해야 한다.

(2) 성서 구절을 되씹는다(재저작/재혼합)

이렇게 선택된 하나의 성서 구절을 천천히 호흡이나 심장에 맞추어 되씹는다. 단순히 되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 소망 · 사랑의 마음으로 성서 말씀이 머리에서 마음에로 각인될 수 있도록 아주 천천히 되뇐다. 이때 절대로 추리나 상상 혹은 공상을 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을 특히 어려워하는 이들이 많다. 사실 그간 많은 묵상법들이 상상과 추리를 강조해 왔으며, 도미니코회 영성신학자 조던 오먼은 "추리 작용이 없으면 묵상이 아니다"기까지 했다. 이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며 묵상에 도움 되는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성령의 움직임 안에서 자연스럽게 사용되어야 한다. 너무 인위적인 추리나 상상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한 마음으로 성서 말씀을 되풀이하다보면 어느덧 저절로 새로운 영감들이 떠오르게 되는데, 그때 자연스럽게 거기에 자신을 내맡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묵상에서 인위적인 상상과 감정은 자칫 자기 충족감이나 자기만족이라는 헛된 길로 오도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반추기도에서 진정한 깨달음이나 열매를 주시는 분은 우리가 아닌 성령이다. 반추기도는 성령을 우리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에 우리를 맡기는 것이다.

상상과 추리에 의한 하나님의 이미지는 결코 하나님이 아니다. 이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불완전한 것들이라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충고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더 깊이 들어갈 수가 없다. 기존의 묵상법들과는 달리, 반추기도는 상상과 추리 작용을 거부한다. 그냥 단순히 믿음 · 소망 · 사랑에 가득 찬 마음으로 말씀을 천천히 되뇌는 수도자들의 전통적인 방법이 반추기도다. 여기에는 어떤 기교도 필요 없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부담 없이 시도해 볼 만한 독특한 성서 묵상 방법이다. 시토회의 앙드레 루프 아빠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성서 말씀을 되풀이함으로써 나는 과일에서 과즙을 짜내듯 그 말씀에서 참된 의미를 발견한다. 나는 그 말씀으로 자양분을 받고 스스로를 먹이며, 그 안에서 힘을 얻는다. 이때 내 마음은 새로운 빛으로 채워지며, 나는 그 말씀에 더 깊이 매료된다. 그 말씀은 나와 하나 되어 내 마음에 스민다. 마음 깊이 스며들어 다함없는 자양분으로 힘 북돋아 주시는 그 능력에 힘입어 나의 내적인 존재는 다시 태어난다." 예수회 신부 월리엄 존스턴의 말은 보다 구체적이다. "어떤 성서 문구든 계속 맛있게 되새기는 것도 훌륭한 명상법이 될 수 있다. 그러면 모든 걱정과 쓸데없는 생각과 추리를 떨쳐 버리게 될 것이다‥‥ 조용히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 반복하라. '몸이 옷보다 더 소중하지 않습니까?' 이 말씀에 대해 생각도 추리도 하지 말고 … 깨달을 때까지 그저 그 말씀을 음미하라‥‥ 이 신비를 깨닫게 될 때, 몸이라는 말이 더욱 힘차게 발음되고 내 몸과 그 말씀은 하나가 된다." "카시아노의 㰡”담화집』에서 이사악 압바는, 뜨겁고 짧고 잦은 기도의 실천을 설명하면서 "마음이 이것을(짧은 기도문구나 성구- 역자 주) 꾸준히 묵상하여 강해지면 마침내 온갖 사고방식의 풍부하고 충만한 자료를 다 버리고 ‥‥ 다만 이 한 구절의 가난에 스스로를 제한하게 된다." (담화집 10.11)"고 말한다. 성서 말씀을 자주 열심히 반추하면 하나님과의 일치가 가능해지고 마음과 기도가 단순성과 통일성을 갖추게 된다. 이때 기도를 바치는 이는 논리적인 반성에서 떠나 하나님께 대한 고요하고 단순하며 사랑에 충만한 예배로 나아간다. 그 때문에 반추기도는 고요하고 단순하고 열렬하게 말씀을 되씹어 그 맛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3) 성서 말씀을 마음에 간직한다(재연하)

되씹은 음식물은 재연하를 거치며 소화 계통을 통해 살과 피로 흡수된다. 반추기도에서도 되씹은 하나님의 말씀이 풍요로운 맛과 함께 우리 마음에 흡수되어 영혼의 양식이 된다. 영혼은 이 영적 양식으로 살찌고, 분망함 중에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하며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말씀이 완전히 내 안에 녹아 들어가면 말씀과 내가 하나가 된다. 말씀과 나 사이에 거리도 없어져 말씀이 곧 나이고, 내가 곧 말씀이 되는 높은 경지에 도달한다.

깨달음을 추구한 옛 선승들의 경우도 그러했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여정을 십우도(심우도)로 표현한다. 처음에는 소와 나의 분리를 체험하지만 수행이 깊어지면서 소와 내가 하나가 되고, 나중에는 소도 나도 없어지는(人牛俱忘) 텅 빈 충만을 체험하고, 마지막에는 "입전수수", 즉 맨발에 배꼽을 드러낸 채 걸망 하나 메고 너털웃음 지으며 저잣거리로 돌아온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여정도 이와 비슷하다. 물론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깨달음의 여정, 완덕의 여정이라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우리의 영적 여정 역시 처음에는 말씀과 내가 분리된 단계에서 시작하지만, 어느덧 수행이 깊어지면 말씀과 내가 하나임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더 높은 단계로 넘어가면 말씀이 나이고, 내가 말씀인 경지에 다다른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성 요한이나 아빌라의 데레사가 말한 변형일치의 단계다. 이를 바울 사도는 "이렇게 나는 살아 있지만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갈 2:20)라고 표현했다. 말씀이 몸과 피로 완전히 소화되어 나와 하나 되면 더 이상 말씀과 나는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상태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던 상징적인 모습이기도 하고, 타볼 산의 예수님 모습일 수도 있다. 이렇게 말씀과 완전히 하나가 된 영혼에게는 장소가 문제되지 않는다. 시장 한복판이든, 사막이든, 수도원 울타리 안이든 밖이든, 장소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냥 거기에 하나님 말씀과 하나 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높은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늘 성서를 가까이하고 되새기며, 마음 깊이 간직하여 참된 양식이 되도록 애써야겠다.

4)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마칠 시간이 되면 함께 기도하던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지도자는 종이나 징으로 신호를 보낸다. 신호가 울리면 바로 일어서지 말고 고요한 분위기를 지속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이 시간 함께해 주시고 말씀의 심오한 신비를 깨달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3~4분 정도 지난 후 다 함께 "알렐루야" 노래를 부르며 주님을 찬미한다. 알렐루야를 부르는 방법은, 처음에 선창자가 허밍으로 노래를 시작하면 다 함께 허밍으로 따라 하고, 그다음 작은 소리로 반복하고, 다시 더 큰 소리로 반복하여 노래한 후에, 다시 작은 소리로, 그리고 허밍으로 끝마친다. 끝으로 주님기도로 묵상 시간을 마치면 몸을 전후좌우로 천천히 움직이면서 자세를 푼다. 결코 조급해 하거나 빨리 끝내려 해서는 안 된다. 자세를 다 푼 다음에는 앉은 자리에서 원활한 혈액순환을 위해 간단한 운동을 한다. 두 발끝을 최대한 몸 바깥쪽으로 쪽 폈다가 다시 몸 안쪽으로 최대한 끌어들여라. 그러면 저린 부분들이 빨리 회복되고 혈액순환도 잘 될 것이다. 묵상이 끝나고 일어설 때도 자신이 되뇌었던 말씀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일어나야 한다. 일어설 때 무슨 말씀을 되뇌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면 분명 반추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다. 반추기도를 오래하면 성서 말씀의 표상적 의미를 넘어 깊은 영적의미를 꿰뚫어 알게 된다. 세상의 온전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경지에서이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