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장      향심기도(마음의 기도)

                                        관상하는 사람이 되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매일 기도를 위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여,
                                        참으로 개인적이고 관상적인 기도를 실제로 하는 것이다.


                                                   차       례


                                          제 14 장  향심기도(마음의 기도)
                                              제1절 향심기도의 발상                 
                                              제2절 향심기도의 첫 단계들                
                                              제3절 향심기도에서 의지와 지향
                                              제4절 상징으로서의 거룩한 단어        
                                              제5절 동의한다는 몸짓으로서 거룩한 단어
                                              제6절 향심기도의 요약        
                                              제7절 향심기도가 깊어지는 체험


제 14 장 향심(마음의)기도

 

1. 향심기도의 발상

향심기도는 14세기 무명의 작가가 쓴 「무지의 구름」과 십자가의 성 요한 등과 같은 사람들의 그리스도인 전통에서 나온 하나의 기도 방법이다. 향심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현존으로 들어가게 하여 듣고 받아들이는(受容的) 관상적 태도를 길러 준다. 이것은 가톨릭 전통에서 언제나 성령의 순수한 선물이라고 생각해 온 것과 같은 엄격한 의미의 관상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너무나 바쁜 마음과 삶 때문에 오는 장벽을 줄여 줌으로써 관상을 준비하도록 해주는 방법이다.

향심기도의 역사적 뿌리는 내가 1961년에서 1981년 동안에 수도원장으로 있었던 매사추세츠의 스펜서에 있는 성 요셉 수도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 수도생활을 쇄신하려는 첫 번째 파도가 일던 때로서 아직 토마스 머턴 신부가 살아 있어서 종교 간의 대화에 관한 그의 연구와 교류(서신교환과 대화)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저술하고 있었다.

1970년 중반 쯤 되어서 나는 우리 수도 공동체의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전통을 어떤 형태로 만들어 활동적인 사목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게 할 수는 없을까? 또 동양적 수련이나 명상 기술을 지도받은 젊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전통에도 그와 유사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들의 그리스도교전통으로 되돌아올 수 있게 하는 방법을 만들 수는 없을까?"

키딩이 공동체 안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에 월리엄 메닝거 신부가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14세기의 영적인 고전인 「무지의 구름」에 바탕을 두고 그는 '구름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방법을 구성했다. 그리고 피정의 집에서 이것을 사제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거기에 대한 반응이 무척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것을 테이프에 수록했다. 이 테이프는 1만 5,000개 이상 팔렸고, 이것이 「무지의 구름」의 저자가 권고하는 단순한 형태의 기도를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 기도는 '하나님', '사랑' 등과 같은 한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로 향하는 순수한 지향' 을 나타내는 것이다.

1976년 초에 바실 신부는 스펜서의 객사에서 처음에는 사제들에게 그 다음에는 원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워크숍의 입문 형태로 이 향심기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2년쯤 후에 우리는 참가하려는 모든 사람을 다 수용할 수 없음을 깨닫고, 피정에 참가한 사람들이 나가서 다른 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지도자가 되도록 도와 줄 수 있는 어떤 진보된 워크숍을 고안하기 시작하였다. 이 진보된 워크숍은 20분짜리 네 기간의 기도와 그 사이에 5분에서 10분 정도의 침묵의 걷기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키딩은 콜로라도 스노매스에 있는 성베네딕토 수도원으로 갔는데 거기서 향심기도를 가르치겠다는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1982년 5월에 아스펜 본당의 보좌 신부가 한 주에 한 번씩 4주간 기도에 관하여 이야기를 해달라고 나에게 요청했다. 80여 명이 모였다. 그 후에 키딩은 트라피스트 수도원과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피정을 가지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영적 여정에 관한 일련의 비디오 테이프 자료가 서서히 준비되어 갔고, 1986년 늦은 가을에 녹화되었다.

그 무렵, 컬럼비아 대학교의 토마스 머턴 센터에서 교목 폴 딘트 신부님의 지도하에 일하고 있던 에드 베드나라는 사람이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조직망을 구축하는 일에 대하여 나에게 관심을 표명했다. 이것은 성 이냐시오 본당에서 있었던 실험을 보증하는 좋은 조짐으로 보였다. 에드와 구스는 뉴욕 대도시 지역에서 알려진 수도자들과 탐색적인 회의를 주선했다. 그들은 예수회의 데이비드 툴란 신부와 제임스 로프레스티 신부, 베네딕토 수도회의 데이비드 스텐달 -라스트 수사, 예수회의 대니얼 베리건 신부, 폴 딘트 신부, 카를 아리코 신부와 그 밖의 사람들이었다. 이 회의에서 일어난 열성으로 '관상지원단' 이라는 조직이 탄생하게 되었다.

관상지원단의 비전 선언문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복음의 관상적 차원을 살 수 있도록 해주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라는 확신에 찬 말로 결말을 맺었다.

2. 향심 기도의 첫 단계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로마 가톨릭 교회는 사제나 수도자들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온전한 크리스찬 생활을 하도록 권장하여 왔다. 이것은 평신도들도 봉쇄 생활을 하지 않으면서도 복음의 관상적 차원을 생활화할 수 있는 어떤 구조적 삶을 각자가 찾을 창의력과 책임을 가지라는 것을 뜻한다. 봉쇄 생활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곳에 사는 수도자 수녀들에게도 결점들도 있고 허점들도 있다.

수도 생활이란 그 나름대로의 어려움들을 갖고 있는 특수한 생활방식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모든 인간관계가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아주 세밀해진다. 세속에서와 같은 시험은 없다고 하겠지만 그들이 부딪치는 시험은 더욱 굴욕적인 것들이다. 수도자들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흥분하게 되며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알지 못할 때도 많다.

신적인 일치(Divine union : 하나님과의 일치)는 모든 크리스찬의 목표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성례를 행하며, 인간으로서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장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특수한 삶의 방식만이 이 목표를 달성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기도에 앞선 사람들은 결혼을 한 사람들이거나 목회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하루 종일 바쁘게 뛰는 사람들이다. 몇 년 전에 나는 평신도 단체들의 대표들 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다. 이 단체들은 부부 피정(marriage encounter), 사회 활동 단체, 사회기구, 새로운 공동체들이었다. 나의 주제는 수도원 영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는데 나는 "수도원"이란 말 대신 "크리스찬"이란 말을 썼다. 이 전통적인 가르침(수도 생활에 관한)에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감동을 받았다. 수도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자신들의 경험과 연결되었던 것이다. 이 예는 영적 여정이 복음을 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크리스찬에게 해당된다는 확신을 나에게 주었다.

신적인 일치라는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신적일치를 이루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 위에 동양이나 서양의 영성 수련은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향심 기도는 관상 기도로 들어가는 데에 일어나는 장애를 줄이려고 만들어진 것이다. 이 신중하게 마련된 방법은 관상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제공한다. 이것은 크리스찬 전통의 영성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낡은 서가 속에서 꺼내어 현대의 밝은 빛으로 내놓은 방법이다. 동양의 묵상훈련 방법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방법들이 오늘날에 중요하다는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향심 기도는 단지 방법일 뿐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기도이다. 만일에 우리가 관상 기도로 이끌어가는 방법도 관상 기도의 일부라고 그 뜻을 확장 해석한다면, 향심기도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하여 한 단계 한 단계씩 오르는 관상 기도의 사다리에서 제일 첫번째 다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향심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직관력을 세련시켜 관상 기도로 쉽게 들어가게 하는 방법이다. 향심 기도는 이렇게 가는 유일한 길일뿐만 아니라 매우 좋은 길이다." 방법으로 말하자면 향심 기도는 수도 영성의 하나의 정수(精髓)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수도훈련의 기본을 하루에 두 차례씩의 기도 기간으로 응축시킨 것이다. 우리가 항생제를 먹을 때 약물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적당량의 항생제를 먹어야 한다. 또 그 질병을 이기기 위해서 핏속에 요구되는 양만큼의 항생제가 들어 있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관상 기도로 이득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의 심령과 신경 조직에 어느 수준의 내적 침묵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수련으로서의 향심 기도는 우리의 정신 집중이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의 흐름에서부터 빠져 나오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우리자신을 그 사고의 흐름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그 보다 더 깊은 자아의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이 기도는 우리의 의식을 우리 존재의 영적 수준에 열도록 하는 것이다." 이 수준을 토마스 키딩은 “우리의 기억, 상상, 감정, 내적 체험, 외부 사물의 인식 등과 같은 것이 더 있는 큰 강으로 비유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적인 사고와 감정에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정신적 현상들이 솟아나는 그 원천을 의식하지 못한다. 배나 물건들이 강의 표면에 떠 있듯이 우리의 사고와 감정들도 어디엔가 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내적 의식의 흐름 위에 떠 있으며 이 내적 의식의 흐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수준은 우리의 일상적 의식에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가 이 수준과 직접 접촉하지 않고 있으므로 우리가 이 수준의 의식을 개발하기 위하여는 어떤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 인간적 존재의 이 수준이 바로 우리를 가장 인간적이게 만드는 수준이다. 우리의 심령 위를 떠내려가는 가치들보다도 내적 수준에서 발견하는 가치가 우리에게는 더욱 기쁨을 주는 가치들이다. 우리는 이 수준에 들어가 매일매일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해야 한다. 우리에게 신체 훈련, 음식, 휴식, 수면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적 침묵의 순간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침묵이 우리에게 가장 깊은 새로움을 주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자신을 열고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이다. 영적 여정을 위해서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의 일상적 사고(思考)가 우리 의식의 후면으로 물러나게 하여서 우리가 그 사고들을 의식하지 않은 채 우리의 의식이라는 강 위를 떠내려가게 내버려 두고, 그리고는 우리의 의식의 강 자체로 우리의 주의를 돌리는 데 있다. 우리 자신을 강가에 앉아서 배가 떠가는 강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치자. 우리가 앉아서 배보다는 강을 바라보다보면, 의식 위에 흐르는 사고(배와 같은)에는 더 이상 주의(注意)를 주지 않는 습관이 발전되면서 좀 더 깊은 주의 집중이 생겨날 것이다.

이 방법에서는 우리의 내적 의식의 스크린에 비춰지는 어떠한 지각(知覺)도 사고라고 본다. 이것이 정서, 영상, 기억, 계획, 외부에서 오는 소음, 평화스런 감정, 심지어 영적 교감일 수도 있다. 다른 말로하면 의식의 내적 스크린에 비춰지는 어떠한 것도 "사고'라고 간주한다. 이 기도(향심 기도)의 방법은 기도 중에 일어나는 어떠한 사고, 심지어 아주 신앙심 깊은 사고라 할지라도 떠 내려 보내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떠 내려 보내기 위하여서는 비교적 편안한 자세를 가져서 자신의 몸에 대한 사고(思考)가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혈액 순환을 방해하는 자세도 피해야 한다. 이래야 도중에 몸의 불편을 느끼지 않게 된다. 지나친 소음이나 기대하지 않았던 소음 때문에 방해되지 않을 비교적 조용한 장소를 선택해야 한다. 집안에 그럴 만한 장소가 없을 경우에는 가장 방해받지 않을 시간을 선택하라.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눈을 감는 것이 좋다. 일상 활동으로부터 감각들을 거두어들이면 깊은 휴식을 가질 수 있다. 전화 소리와 같은 갑작스런 소리나 방해가 생겨서 깨우게 될 수도 있다. 자명종이나 타이머로 끝나는 시간을 알리도록 되어 있으면 가급적 소리가 조용한 것이 좋다. 시계가 시끄러운 것이면 베개로 덮어 둔다. 외부 소음을 가급적 줄이도록 함이 좋다. 소음이 일어나더라도 흥분하지 말라. 흥분하는 것은 감정으로 채워진 사고의 일종으로서 일단 침묵에 이른 상태를 깨어 버리게 된다. 가장 정신이 맑은 때를 기도 시간으로 선택하라. 하루의 일상 사업이 시작되기 전의 아침 시간이 좋은 시간이다.

이렇게 편하게 느낄 적절한 시간, 장소 의자, 자세들을 선택하였으면 눈을 감고,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고 자신을 내어 드리는 의향을 표시하는 거룩한 단어를 선택하여 그 단어를 상상의 수준에 도입한다. 이 단어를 입술로나 목소리로 나타내지 않는다. 편하게 느끼는 한두 음절이나 한 단어라야 한다. 당신이 기도 중에 무슨 사고가 의식 속에 들어왔을 때마다 그 단어를 가볍게 의식 속에 떠올린다.

거룩한 단어는 당신이 가고 싶은 어떤 곳으로 가게 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당신의 지향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함으로써 당신의 영적 성향이 이끌리는 그 무엇에 대하여 더욱 깊은 의식을 갖도록 개발하는 데 필요한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당신의 목적은 모든 생각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힘이 아주 강해서 하나님 안에 곧바로 빠져 들지 않는 한, 침묵을 시작한 뒤 한동안은 사고들이 떠오를 것이다. 향심 기도는 스위치를 켜듯 하나님의 현존을 켜는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다음은 하나님에게 달렸다. 향심 기도는 하나님께 당신 자신을 맡겨 드리는 것이며, 그 결과를 결정하는 이는 하나님이다.

당신은 아마도 두 손을 합장하고 손가락들을 하늘로 향하는 자세를 알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심적 기능들을 함께 모아 하나님께로 향함을 뜻한다. 거룩한 단어는 이와 똑같은 목적을 갖는다. 이것은 방향을 가리키는 지침이며 육신적이 아니라 정신적인 지침(pointer)이다. 거룩한 단어는 전혀 애쓰지 않으면서 도입해야 하는데, 아무런 노력 없이 자발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처럼 의식에 떠올려야 한다.

거룩한 단어는 일단 잘 습관화되면, 보통 떠오르는 일상적 사고들의 수를 줄이는 방법이 되며 의식의 흐름을 타고 흐르는 사고들 중에서 관심을 끄는 사고들을 막아 주는 방법이 된다. 이것은 그 사고들과 직접 부딪쳐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 현존하시며 내 안에서 활동하시게 하는 당신의 지향을 다시 한 번 확인함으로써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당신 의지가 동의(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대한)를 거듭하고 이것이 습관이 됨으로써, 당신은 불요불급한 사고의 흐름들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어느 시간 동안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하여 불안하게 느낀다면, 아무도 밤에 6, 7시간 동안 잠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바란다. 그렇지만 이 기도를 행함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매우 조용한 활동이다. 계속해서 거룩한 단어로 되돌아감으로써 당신의 의지가 지속해서 하나님께 동의하는 것이며, 이것이 정신이 깨어 있기에 충분하고도 정상적인 활동인 것이다.

20, 30분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적 고요를 이루고 피상적인 사고수준을 넘어가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당신은 아마 더 계속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경험을 하다보면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를 알게 된다. 적당한 시간이 지난 다음에 당신의 일상적인 사고로 다시 되돌아간다. 이 시간이 아마도 하나님과 대화하기 좋은 때일 것이다. 이때에 당신은 조용히 목소리로 기도하기 원할 수도 있으며 하루의 일과를 계획하기를 원할 수도 있다. 눈을 뜨기 전에 최소한 2분 정도 그대로 있는 것이 좋다. 잠시 동안 외적이거나 내적 감각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깊은 영적 주의성을 얻게 되므로 금방 눈을 뜨면 신경을 거스르게 된다.

이 기도를 매일 수련함으로써 당신 존재의 영적 차원에 대한 감수성이 개발되면서 일상 활동을 하는 시간에도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으면서도 당신은 하나님께 내면으로 향하라고 불린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당신의 영적 생활의 질이 향상되면서 이전에 느껴 보지 못하였지만 이제는 세상으로부터 어떤 진동 같은 것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을 억지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일상 직업 중에 하나님이 현존하심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흑백 텔레비전 스크린에 색상을 가한 것과 같다. 영상은 그대로이지만 이전에는 감지하지 못했던 새로운 영상의 차원(色)으로 질이 아주 높여진 것이다. 과거에도 하나님은 현존하셨지만 이 현존을 감지할 적절한 도구가 없었기 때문에 전달되지 않았을 뿐이다.

언제나 존재하였고 또 참여하도록 초대되어 왔던 실재의 더 충만한 수준으로 자신을 조율하는 방법이 관상 기도이다. 이와 같은 확장된 의식으로 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줄이기 위하여 몇 가지 합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한 가지 길은 의식의 흐름을 타고 일상적 사고가 흐르는 속도를 늦추는 일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사고들 사이사이에 틈이 생기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사고의 저변에 있는 실재를 인식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 향심 기도를 논의하면서 호흡조절이라든가 요가라든가 달리기처럼 우리의 신체와 정신과 신경을 평온하게 만드는 어떤 방법을 계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방법들은 이완 작용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믿음의 관계다. 이러한 관계는 매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 드리기 위하여 시간을 내어드리는 것으로 나타내는데, 다시 말하면 누구도 깨뜨릴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심각한 데이트를 하나님과 갖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기도는 사고(思考)라는 정신 기능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병석에 있을 때에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향심 기도에서 가장 근본적인 마음가짐은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드리는 것이다. 크리스찬의 수련은 인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신약 성서에 의하면 인내란 무제한의 시간 동안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며, 중도에 포기하거나 지루함이나 절망으로 빠지지 않음을 뜻한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자정이 지나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마음가짐과 같다. 주인이 마침내 집에 돌아오면 그 종은 그 때에 집안일을 맡아서 해야 한다. 이와 같이 당신이 만일 참고 기다린다면 하나님은 결국 자신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다. 물론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몇 가지 질문

다음은 토마스 키딩의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에서 기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제시한 것이다

1). 나는 이러한 훈련으로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그래도 나의 정신 기능들을 비우도록 노력해야 하는가?

그러려고 일부러 노력하지 않는 것이 좋다. 기도 중에는 언제나 가벼운 영적 활동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러한 활동들은 거룩한 단어를 생각하거나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단순한 인식 등이다. 공백을 경험한다. 함은 아주 섬세한 방법으로 자신의 의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당신의 의향이 작용하지 않는 한 그 공백의 경험은 유지되지 않는다. 이것은 아주 단순하기 때문에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방법의 기도는 배우는 데 시간이 걸리고 또 때때로 기도 중에 공백감이라고 해석되는 것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이 기도는 하나님 안에서 쉬는 방법이다. 만일 당신이 공백을 알아차렸다면 이것 또한 사고이기 때문에 단순히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2). 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하나

만일 졸고 있다면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부모의 팔에 안긴 아이는 때로 잠드는데 부모는 아이가 그 팔에서 평온하게 잠들고 있으면서 가끔 눈을 뜨기만 한다면 이로 인해 마음 쓰지 않는 법이다.

3). 나는 시간이 그렇게 빨리 갔는지 놀랐다. 그게 20분이었나?

그렇다. 시간이 빨리 갔다는 것은 당신이 그 사이에 사고가 별로 없었다는 표시다. 그것이 반드시 좋은 기도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의 기도 시간에 가졌던 심리적 경험을 기준으로 기도를 판단하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 때로는 당신이 기도 중에 내내 너무나 많은 생각들로 시달렸다 하더라도 그 기도 시간이 아주 이익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의 의향이 보기보다 더 깊었을 수도 있다. 어떠한 경우도, 한 기도 시간 중에 일어났던 일로 기도가 어떠하였는가 하는 판단을 올바르게 내릴 수는 없다. 그 대신 한두 달 지난 다음 당신의 일상생활에 어떠한 열매를 가져왔는가를 보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인내를 갖게 되었다든가 자기 스스로에게 더 마음이 편해졌다든가, 아이들에게 화를 덜 냈다든가 내가 하는 일에 식구들이 불평을 덜 한다든가 한다면 이것들이 당신 안에서 달라진 가치관들이 작용하고 있다고 하는 표시들이다.

향심 기도 중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면 시간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우리의 시간에 대한감각이 상대적임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기도가 항상 짧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어떤 때는 너무 긴 것처럼 보인다. 기도의 성장 과정에서 우리는 평온함과 사고와의 투쟁 양극을 왔다갔다하게된다. 직관적 기능이 점차 세련되면서 점점 안정된 모습으로 깊은 수준에 지향을 두게 되는 것이다.

4). 만일 졸리거나 몹시 피곤해지면 사고들이 줄어드는가?

만일 당신이 꿈을 꾸지 않는 한 일반적으로 그렇다고 본다. 수도원에서 새벽 3시에 일어나면 때로 정신이 몽롱할 수가 있다. 이렇게 새벽에 피곤하여 생각할 수가 없게 되는 바로 이 시간을 이용하는 것이 우리가 쓰는 좀 특수한 방법의 일부인 것 같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한 다음에도 새벽과 마찬가지의 경험을 할 것이다. 이럴 때 당신이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알맞을 정도로 깨어 있으면서도 나른한 기분을 즐기려 들지만 않는다면 이것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잠이 들게 되더라도 나쁘게 여기지 말라. 당신은 아마 조금 더 휴식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당신이 가장 정신이 맑다고 생각하는 시간을 선택하도록 하여 기도 시간에 머리를 끄덕이며 졸기보다는 좀 더 향심 기도의 온전한 경험을 갖도록 노력하라. 만일 잠이 든다면 그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몇 분간이라도 향심 기도에 들어감으로써 그 날의 기도를 망쳤다는 기분이 들지 않도록 하라. 이러한 기도를 하는 데 필요한 활동은 아주 단순해서, 깨어 있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잠들기 쉬운 것이다. 거룩한 단어를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활동이다. 예수께서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향심기도 중에 하는 것이다. 깨어 있음이 인식이 살아있기에 충분한 활동이다. 기도란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를 열어 드리는 것이다.

향심 기도란 주의(注意, attention)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지향(志向, intention)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구별을 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떤 사고 내용에 대해 주의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계시리라고 믿는 당신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갈 지향을 갖는다. 당신은 관념이나 느낌으로가 아니라 순수한 믿음으로 스스로를 하나님께 열어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문을 아주 부드럽게 노크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힘을 다해 문을 두드리면서 "법에 따라 이 문을 여시오 나를 들여놓도록 요구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이 문을 열도록 강요할 수 없다. 이 문은 상대 쪽에서 열리는 것이다. 당신이 거룩한 단어로 말하는 것은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무제한 기다림의 게임이다. 긴급하게 일어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은 아무런 일이 없었던 양 거룩한 단어로 부드럽게 돌아가야 한다. 어떠한 영상이나 들려오는 음성이 있다 하더라도 거룩한 단어로 돌아와야 한다. 이것이 이 방법의 기본이다.

5). 나는 기다림의 기분으로 있었다. 그 때에 나는 무엇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기도는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노력하지 않도록 하는 훈련, 떠나 버리는 훈련이다. 노력한다 함도 하나의 사고이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쉽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혹은 "당신의 의식 안에 거룩한 단어를 살짝 얹어 놓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애쓴다 함은 무엇인가 얻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 지향적인 상태를 말하는데 반면에 향심기도는 당신을 현재로 이끌기 위해 마련한 방법이다. 기대함이란 미래 지향적이며 그러므로 이것 또한 일종의 사고이다.

우리의 일상적 사고로부터 우리의 정신을 비우는 일은 우리가 단지 시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마치 욕조 안의 마개를 우리가 빼는 것과 같다. 물은 저절로 빠져 나가며 우리가 물을 욕조 밖으로 밀어낼 필요는 없다. 그저 흘러 나가게 내버려 둔다. 이 기도에서 당신은 이와 비슷한 일을 하는 것이다. 당신의 일상의 사고들이 당신으로부터 빠져 나가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기대하지 않으면서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활동이다.

6). 느낌은 어떤가? 그것도 떠나보내야 하는가?

그렇다. 이 기도의 관점으로 보면 그것도 사고이다. 어떠한 종류이건 감지(感知)하는 것은 다 사고로 간주한다. 생각을 별로 하지 않으면서 하는 사색 행위도 사고로 간주한다. 향심 기도는 모든 지각을 지나가게 하는 훈련인데 그 지각한 내용을 밀어내거나 언짢게 여기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떠나 보냄으로써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점차 당신은 평화롭고 조용하며, 잠겨 드는 것과 같은 영적인 주의성을 발전해 나가게 된다.

7). 더 깊은 주의는 사고를 덜 하는 데서 오는 것인가?

그렇다. 당신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갈 수 있는 가장 깊은 곳에 이른 것이다. 그 순간에는 시간에 대한 아무런 감각도 없다. 시간이란 사물이 진행되는 데서 측정되는 것이다. 아무런 진행이 없을 때 무시간성(無時間性)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즐거운 경험이다.

8). 외부로부터 오는 잡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신이 어쩌지 못하는 외부 잡음에 대하여 최선의 길은 그 잡음에 대한 저항하는 마음을 떠나보내고 그 잡음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는 일이다. 외부적인 것은 기도에서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렸다. 당신이 어떠한 통제도 할 수 없는 그 외부적 주의 혼란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당신은 지구상의 어떠한 잡음 속에서도 이러한 깊은 주의성을 갖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외부로부터 오는 곤란에 대하여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라. 부정적 태도를 가짐으로 해서 얻어지는 것이라고는 당신이 매일의 기도 시간을 헛되이 지나쳐 버리는 것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절대로 허락될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이 기도 시간 동안 잡음으로 해서 진통을 겪고 기도가 실패하였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

9).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도 관상할 수 있는가?

그렇다. 이 말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돌아다니기만 해도 관상적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관상적이 되기 위하여서 필요한 자질은 당신이 인간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좀더 관상적으로 되는 자질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만일 당신이 이 방법(향심 기도)에 충실하기만 하면 이 방법은 누구라도 잘할 수 있다.

10). 같이 여행을 하는 동료에게 "나는 지금 묵상을 하려고 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이다. 그들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몇 분 동안의 조용한 시간을 갖는 것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11). 나는 사고들이 지나가도록 노력하는 것을 의식한다. 나는 그 때에 하나님에 대한 나의 이미지로 노력하는데 이것들은 영상으로 나타난다. 그것 또한 버려야 할 사고의 일종인가?

이 기도의 관점에서는 어떠한 영상도 사고로 간주한다. 상상이나 기억이나 추리 등이나 어떠한 감각에서 일어나는 지각(知覺) 행위는 모두 사고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지각이 일어나도 떠나 버려라. 의식의 흐름에 떠오르는 어떠한 것도 심지어 자신에 관한 생각까지도 결국은 지나가 버린다. 문제는 모든 사고들이 지나가 버리도록 허용할 수 있는가에 있다. 흐르는 강의 표면에 떠서 흐르는 것들에 주의를 주지 말고 그 강 자체에 주의를 주라.

12). 나는 지금까지 영상에 의존하여 하나님께 주의를 드렸다. 만일 영상을 지워 버리면 어떻게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알 수 없다. 이제는 내가 단순히 반복하는 단어에 주의를 주어야 하는가?

당신의 주의는 어떤 특정한 사고를 지향해서는 안 된다. 거룩한 단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거룩한 단어는 단지 당신의 참 자아와 그 자아의 중심에 계시는 하나님께 당신을 열어 드린다는 당신의 지향을 재구성하는 방법에 불과하다. 당신은 그 거룩한 단어를 계속해서 반복할 필요는 없다. 내적 침묵이야말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경험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다. 당신은 무엇이든지 억지로 해서는 안 된다. 억지로 하고자 하면 당신은 또 다른 사고를 끌어들이는 것이 된다. 그리고 어떠한 사고든지 사고는 당신이 가고자 하는 그곳으로 가는 길을 쉽게 막아 버린다.

어떤 사람들은 단어보다는 시각적 영상을 사용하여 더 쉽게 초월한다. 당신이 영상을 더 선호한다면 일반적인 것, 즉 너무 세밀하지 않은 것으로 선택하라. 예를 들면 당신이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마치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듯 하라.

13). 당신이 말을 하고 있는데 내가 마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기 직전서 버린 영상을 갖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침묵에 잠길 때 마치 낭떠러지 끝에 선 느낌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 떨어질 위험은 없다. 상상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상상은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다. 상상을 많이 한사람들, 그것에 깊이 빠진 사람들이 습관적 사고방식을 벗어 버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 기도를 계속하다 보면 편안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3. 향심기도에서 의지와 지향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영원으로부터 한 말씀을 하시며 이 말씀을 침묵 속에서 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이 침묵 속에서 그 말씀을 듣는다."라고 했다. 이러한 말을 빌리면 침묵이 하나님의 첫 번째 언어이고, 나머지는 모두 유치한 번역이라고 볼 수 있다. 향심기도나 다른 전통적인 수련의 방법들은 우리의 감지기관을 아주 순수하게 만들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과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에게 아주 단순하게 하시는 말씀을 더욱 잘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방법들이다. 그러므로 향심기도는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에 관상기도 자체가 아니고 관상을 준비하는 기도이다. 그렇지만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그것은 관상기도라는 사다리에서 첫 단이라고 부를 수 있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향심기도가 어느 때에 엄격한 의미의 관상이 되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수련을 통하여 우리가 그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성령께서 우리를 향하여 움직여 오신다는 것을 알뿐이다(그림 1 참조).

    



우리의 수련이 더욱 습관화되어 감에 따라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이해의 은사가 더욱 강해지고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떠맡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 습관적으로 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꼭 기도 중에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고 일상생활 중에 그 효과를 경험하게 된다. 향심기도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면 우리의 내적 침묵의 능력이 향상되고 일상생활 중에 성령의 섬세한 움직임에 대하여 민감해지면서 우리를 정화와 거룩함으로 인도한다.

             



이 수련 중에 우리의 활동이 한 몫을 하기는 하지만 아주 부드러운 활동이다. 우리의 활동이 아주 최소한으로 될 때에 우리의 공헌(기도에 대한)이 시작되고, 우리의 활동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에 공헌이 끝난다. 향심기도의 기본적인 수련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동의한다는 지향을 나타내는 단어 -예를 들면, "아빠", "예수님", "평화" 혹은 이와 유사한 다른 단어들- 를 선택하는 것과 우리의 지향이 점점 흐려져 갈 때에 그 단어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향심기도는 아마도 관상으로 이르게 하는 움직임을 촉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련 중에서 가장 수용적(소극적)인 방법일 것이다. '수용적'이란 말로 내가 무엇을 뜻하려고 하는가? (그림 2)에서 보듯이, 다양한 수용적인 그리고 주의 집중적인 수련들을 눈금으로 나타낸 선상에서 향심기도는 한 쪽 끝을 나타낸다. 향심기도는 주의(注意, attention)를 집중하는 수련도 아니다. 주의를 연습하는 수련도 아니다. 그것은 지향(志向, intention)의 훈련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 즉 우리의 선택의 기능을 계발하려는 것이다. 또 의지는 우리의 영적인 사랑이 하는 기능이며 기본적으로 의지는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의 감정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이것을 반드시 요구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하는 자아포기의 태도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다른 생명체에게 가지시는 것과 같은 관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갖겠다는 의향과 태도이다.

향심기도는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받아들이는 것뿐 아니고 하나님의 활동하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기도기간 중에(그리고 기도하지 않는 기간 중에라도) 갖는 경험은 성령과 우리가 갖는 관계, 그리고 성령은 기본적으로 치유적이라는 특성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우리가 병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건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러한 성령의 의료적인 활동(고전적으로 이것을 정화적이라고 부른다.)에 부딪히면 우리는 아마 대단히 놀랄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 안에서 쉴 때에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어떤 행복한 고요를 경험하는 대신에 무의식으로부터 나오는 강한정서나 눈물을 흘리는 것과 같은 거친 움직임에 부딪치기도 한다. 우리의 신뢰가 자라면서 이러한 일들을 기도 과정의 일부로 보고 그것을 감수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진료는 매우 고통스러울 수가 있는데 이것은 의사가 우리의 고통을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질병이 심각해서 그러한 심각한 치료를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의지는 하나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는 버릇을 길러 준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의 기도 안에 성령의 영향도 증가한다. (그림 1을 보면 성령이 우리를 향하여 오는 것으로 상상할 수도 있다. 향심기도의 수련이 깊어 갈수록 상호 작용이 생겨서 때로는 우리의 부드러운 활동이 우세하기도 하고 때로는 성령이 기도를 떠맡기도 한다.

후자의 경험은 아빌라의 데레사가 내면의 성에서 주입된 평정, 고도의 기도, 일치의 기도, 온전한 일치의 기도라고 부른 기도의 상태들에 대해 기술한 내용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들은 우리 기능들이 침잠하는 수준이며 동시에 이 상태를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현존의 활동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활동을 다소간에 인식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활동은 더욱 깊은 친밀의 수준에 들어갔을 때에는 단지 현존하심뿐일 수가 있는데, 너무 친밀한 상태에서는 사실상 우리의 여러 기능들은 그것들을 해석하거나 어떤 경험으로 나타내 보일 수도 없는 것이다.

고요의 기도라는 영적인 위안을 받았다거나 일치의 기도로 하나님 안에 완전히 잠입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령의 활동이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은 오히려 우리가 너무나 병들어 있어서 특별한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들로 우쭐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반면에 우리는 그것에 저항해서도 안 된다. 그것들이 우리의 치유에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깊은 치료 중에 치료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치유자와 전이(轉移: trans -ference)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비로운 정서적 과정으로서 우리가 치유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우리가 어릴 적에 있었던 권위적인 인물과 가졌던 관계를 그 치유자에게 전이하는 과정이다. 그러면 그 치유자는 우리가 아동기에 느껴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받아들임을 우리에게 보여 줄 수가 있다. 이 받아들임은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정서적 결함을 치유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연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우리를 정서적 수준에서 온전히 받아 주는 경험을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온전한 자아 동일시를 갖거나, 영적 여정에 중요한 자산으로서, 심리학자들이 부르는 튼튼한 자아를 갖기가 매우 힘든 것이다.

어린 시기부터 많은 상처를 지금까지 가지고 온 바로 이 자아를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려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결핍되어 왔기 때문에 자신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심지어 잘못 태어났다는 정서적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현대 우리 문화에 전염병처럼 번진 자기혐오라는 질병의 원천이다. 이 질병은 영적여정이 발달되기 위하여 어느 정도 치유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영적 여정은 우리 자신과 자아 동일시를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자아 동일시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영적인 위안을 확인받거나 어느 기간 동안 평화와 새로워지는 기분을 갖는 것은 하나님과 갖는 일종의 전이와 같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부모들이 자신들이 어릴 적부터 가져온 상처들 때문에 알게 모르게 우리를 거부했을지도 모르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확인해 주신다. 우리가 만일 자아 혐오와 어렸을 적의 상처들을 극복할 수 있다면 다음 세대에 상당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부모들은 자녀들이 다 자라기 전에 자신의 잘못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에 대하여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슬픈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 때부터 있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다. 여기에 대하여 가져야 하는 올바른 반응은 우리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다루어 그것에서 나와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주 현실적인 과정이 영적여정에서 중요한 측면인 것이다. 진단적인 관점에서, 현대 심리학자들의 발견이 인간 조건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인간 조건은 병(病)적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우리의 기도에서 우세하게 되면 향심기도 중에 거룩한 단어나 거룩한 상징을 쓰는 일이 점점 덜 필요하게 되며 덜 중요하게 된다. 우리의 기억이나 상상의 수준에서 어떤 사고들이나 감정에 우리가 집착해 있음을 알게 될 때에 자유로이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며, 이것은 사고들을 밀어 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에 동의한다는 우리의 원래의 지향을 재확인하려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더 적응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팔에 안겨 자신이 쉬고 있다는 영상이나 하나님의 사랑하는 눈빛 안에 머물고 있다는 영상을 쓰기를 더 좋아할 수도 있다. 호흡에 맞추는 것도 허용되는 수련인데 이것은 특히 동양 묵상의 방법에서 호흡수련을 받은 사람들에게 더욱 매력을 준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향심기도 중에 이러한 상징에 주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상징은 단지 우리의 지향을 나타내려고 사용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거룩한 단어도 지향에 초점을 맞추려고 사용하는 것이지, 주의의 대상으로서나 주의집중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거룩한 단어나 거룩한 상징은 비디오카메라에서 초점을 조절하는 기구와 같은 것이다. 만일 청중을 찍으려고 한다면 앞에 앉은 사람들에게 약간 초점을 조절해야 하는데 중간에 있는 사람들은 흐려질 것이다. 중간에 있는 사람들을 찍으려면 그들에게 초점을 맞추기 위하여 렌즈를 조절해야 하며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도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은 비유에서는 우리가 물리적인 명료성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나는 여기서 다른 문맥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다. 거룩한 단어가 가져다 주는 초점 맞추기는 어느 얼굴이나, 물체나, 상징들을 상상 속의 초점에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향이 흐려질 때에 이 지향에 초점을 맞추려는 것이다. 지향은 어떠한 관상기도 수련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인이지만 향심기도 중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 기도 중에 우리가 하는 유일한 활동은, 기도시간 중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도록 동의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지향을 유지하는 것이다.

어떤 사고나 감정이나 인상에 이끌려서 일상적인 인식의 수준으로 다시 떠오르면 우리의 지향은 흐려진다. 이것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 사고가 무의식에 있는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 중의 어느 하나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동기 때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우리가 비록 복음의 가치를 따르기 위해 아동기의 태도나 행동을 의식적으로는 거부했다 하더라도 정서적 프로그램은 아직도 무의식 속에 잠재해있을 것인데, 예를 들면 자신이 속한 특정한 문화 속에 있는 안전의 상징에 정서적으로 집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어릴적에 가졌던 불안감에서 오는 고통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강하다면 그 결핍의 기억을 무의식 속에 억압해 넣는다. 그러나 무의식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정서는 에너지이기 때문에 그것을 억압한다고 해서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신체 속에 저장되어있다. 신체는 적절하게 처리되지 않은 정서적 에너지를 저장하는 창고이다. 그 결과로, 어떤 사람은 신체와 신경계통에 에너지가 건강하게 흐르는 것을 막아 버린다. 이것은 다시 그 아픔을 감추기 위하여 보상적 활동을 할 필요를 더 강하게 한다. 중독이란 자신이 직면하기를 원치 않는 정서적 아픔에서 자신의 의식을 분산 시키는 궁극적인 방법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영적 여정은 인격 성장의 한 과정이며, 그리고 어른으로서 생활을 파멸시키거나 우리의 인간관계를 방해하는 아동기의 정서 수준에 고착하는 것에서 해방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여정은 신성한 정신치료의 한 형태이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보통 신체와 정서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수준에서 우리를 치유해 주시는 것이다.

정서적으로 강한 각각의 수준에는 우리의 기억 저장소에 미리 녹음된 끝없는 비평이 그것과 상응하게 저장되어 있다. 강한 정서가 일어나면 그 사람은 즉시 솟구치는 비평에 사로잡혀서 그 비평들은 평화와 고요와 초연함에서 더욱 멀어지고 그래서 관상을 요구하게 된다. 인식의 표면에 지나가는 사고들이 무의식에 있는 정서 프로그램을 자극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대한 우리의 동의가 점점 흐려질 때에, 우리가 초점을 맞추는 기구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향심기도의 용어상, 이러한 사고들을 강의 표면을 지나는 배로 비교한다(그림 3참조).

조절을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주의가 아니다. 주의는 향심기도에서 2차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특정 사고나 사물 혹은 만트라와 같은 기도에서 하는 것처럼 거룩한 단어에 주의를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주의는 일반적이며 하나님의 현존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향심기도가 하는 실제의 일은 하나님의 현존에 동의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심리적인 내용과 함께 현재의 순간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고나 감정이 비평과 함께 무의식적인 프로그램을 휘저어 일으키면, 우리가 그 '배에 오르기' 전에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시간과 인내와 많은 실수를 통하여 우리는 사고들을 즉시 떠나보내는 습관을 기르게 되는데, 우리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함으로써가 아니라 단지 거룩한 단어로 아주 부드럽게 돌아감으로써 한다. 만일 당신이 배에 오른 것을 알게 되거든 그저 단순히 내려라. 거기에 당신이 생각을 가졌다는 자책감이나, 한숨이나, 혹은 괴로운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어떠한 반성도 또 다른 사고, 즉 배인 것이다.

이 기도는 그 자체가 아주 단순한 -어린이의 특징인 단순성, 이전에 무엇이 일어났는지는 잊어버리고 지금 현재의 순간에 몰두하는 것과 같이- 기도이다. 어린이의 기분이 아주 쉽게 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눈물에서 웃음으로 바뀐다. 단순히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기를 동의하는 것이 향심기도에서 요구되는 활동의 전부이다. 어떠한 분석이나 비평이나, 죄악감이나 자책감은 원래의 사고보다 더욱 산만하게 하는 것이다. 원래의 사고는 아마도 단순히 미래에 대한 계획이거나 하나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원래의 사고는 감정이나 부끄러움이나 죄악감같이 정서를 동반하는 사고처럼 내적 침묵에서부터 당신을 끌어내 오는 효과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 기도에서 우리의 사고들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습관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고들을 전부 피할 도리가 없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관상에서 완전하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 경우라면 당신은 아마도 이 책을 읽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이 다른 99.9퍼센트의 사람과 같다면 이러한 과정 속에 어느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며 당신의 일생 중에 아마도 끝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여정은 기도 중에 일어난 것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 중에 일어난 일이 우리의 일상생활을 정화 과정의 연속이 되도록 만드는 데 있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생활의 부침(浮沈)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여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죽음, 있는 그대로 우리와 결속을 하신다. 완덕이란 우리가 온전하다고 느끼거나 완전해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우리가 알아차리지 않으면서도 하는 데 있다. 어떠한 점수도 바라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저 행할 뿐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우리의 지향을 온전히 명료하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와 같이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취약하며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이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어느 때이고 원래의 지향 -즉 우리 안에 하나님이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동의한다는 지향- 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어떤 방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정기적으로 수련을 하면, 우리는 즉시 떠나보내는 것이 수월해진다. 그러면 우리는 무지의 구름으로 들어가는데 이 무지의 구름은 조그만 동의의 행동을 계속 반복함으로써 발전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충분하게 정서적 프로그램을 무너뜨렸으므로, 그것들이 다시 침입해 들어오는 것에 민감해져서 우리의 원래의 지향에 즉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며, 때로는 거룩한 단어나 상징으로 돌아올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 한다.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우리를 열어 드린다는 우리의 지향의 상징으로서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는 데서 오는 어떠한 움직임으로, 우리의 존재의 영적인 수준에 조금씩 다가간다. 이것을 다른 비유로 말한다면 강의 표면을 따라 지나가는 것보다는 의식이라는 강 자체에 일반적인 주의성을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거룩한 단어는 우리의 지향성의 상징일 뿐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선택해야 하는 단어도 없고 더 좋고 나쁜 것도 없다. 그러나 어떤 단어는 아이디어의 연상을 불러 오고 다른 일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단어는 피하는 것이 좋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주의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능력을 발전시킨다. 사랑으로 한다는 것의 특징은 수련에 충실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수련을 하는 동안 인내를 가지고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향심기도의 지침

1.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한다는 지향을 상징하는 거룩한 단어를 선택한다.
2. 편안한 자세로 앉아 눈을 감고 잠시 마음을 정리한 다음 하나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동의한다는 상징으로 거룩한 단 어를 마음에 떠 올린다.
3. 어떤 사고가 마음속에 들어온 것을 인식하게 되면, 아주 부드럽게 그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4. 기도시간이 끝나면 눈을 감고 약 2분간 침묵 속에 머문다.

 

4. 상징으로서의 거룩한 단어

거룩한 단어는 당신이 어떠한 것을 선택하였든지 관계없이 거룩하다. 그 이유는 그 단어의 뜻이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지향이 거룩한 때문이다. 거룩한 단어는 절대 신비이며 당신 안에 머물고 계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 드린다는 당신의 지향을 나타낸다. 그것은 당신의 의식 속에 지나가는 어떤 사고에 당신이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되돌아가야 하는 초점이 된다.

그 단어에 편한 느낌이 들면 그 단어에 머물러라. 만일 당신이 어떤 다른 단어로 옮기고 싶으면 옮겨도 좋다. 그러나 이 단어 저 단어로 계속 옮겨 다니지 말라. 거룩한 단어는 당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나 화살표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드리고 그분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당신의 지향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누가 다른 시간에 다른 형태의 기도를 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향심기도는 특별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아니다. 당신을 하나님께 열어 드림으로써 당신은 의미상으로는 과거의,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과 같다. 당신은 모든 창조를 끌어안는 것이다. 이로써 당신은 모든 실재(實在, reality)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실재를 비롯하여, 당신이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당신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실재, 말하자면 당신 존재의 영적 수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거룩한 단어는 당신이 당신의 원천(source)으로 파고들 수 있게 만든다. 인간은 무한한 행복과 평화를 위해 만들어졌다. 우리가 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알았을 때에 우리 자신을 그 방향으로 밀고 갈 필요는 없다. 어려운 점은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 그와 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거짓 자아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또 거짓 자아가 관심을 갖는 것, 그리고 그 거짓 자아를 자극하고 강화시키는 세속적인 것들과도 동일시한다.

거룩한 단어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강의 표면에서 강 밑으로 우리의 의식을 옮겨 주는 방법이나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려는 하나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들고 있는 공을 그냥 놓아 주기만하면 그 공은 제 스스로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러므로 내가 던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양으로 거룩한 단어는 공을 놓아 주듯 모든 생각을 그냥 떠나보내는 방법이다. 이것은 내적 침묵으로 이끌려 있는 영적 기능들이 자동적으로 그 방향으로 끌려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이러한 영적 움직임은 어떠한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우리의 일상적인 관심사를 떠나보내려는 뜻만을 필요로 할 뿐이다.

인간의 의지는 무한한 사랑으로 향하고 인간의 마음은 무한한 진리로 향하도록 만들어진 만큼, 아무 것도 이것을 막지 않는다면 의지와 마음은 사랑과 진리로 향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의지와 마음이 향하는 자유가 제한된 것은 이것들이 다른 방향으로 돌려졌기 때문이다. 향심기도 중에 이러한 기능들이 자유를 도로 찾게 된다.

그러므로 거룩한 단어는 여러 가지 사고들을 줄여서 하나님께 열어 드린다는 하나의 생각으로 집약시키는 방법이다. 그것은 번잡한 상상을 침묵으로 옮겨 주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 은총의 힘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곳, 즉 영적인 영역으로 우리 자신이 들어갈 수 있도록 허용해 주는 조건이다.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떼어놓는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바로 우리의 생각이다. 우리가 그 생각을 떨쳐 버리면 우리의 문제는 상당히 줄어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분이 모든 실재의 부분이시라는 믿음을 갖는데 실패한다. 현재의 순간순간, 우리가 보는 모든 사물들, 우리 존재의 근저(根底)가 모두 그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는 개인적 체험을 갖게 될 때까지는 이것을 잘 믿으려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점진적으로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서로서로를 통하여, 그리고 모든 이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내적 체험을 갖고 나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 모든 사건들, 그리고 모든 자연들 속에 계신 그분을 감지하는 능력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때에 우리는 어떠한 외적인 감각으로 그리고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즐기는 체험을 갖게 된다.

관상기도는 우리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실재를 각성하는 하나의 길이다. 우리는 우리가 숨 쉬고 있는 공기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살지만 공기는 언제나 우리 안에, 우리 주변에 있다. 그와 같은 모양으로 하나님의 현존은 언제나 우리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시고 우리주변에 계시며, 또 우리를 감싸 주고 계신다. 우리의 인식은 이러한 실재의 차원에 대하여서 불행하게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기도와 성사와 영적 수련의 목적은 우리가 이것을 각성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매 순간순간에 현존하시지만 우리는 세상을 보는 우리의 관점 때문에 우리 안에 커다란 장애를 만들어 놓았다. 그러한 관점은 그리스도의 마음, 바로 그분의 말씀의 차원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바울 사도에 의하면 믿음과 세례로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의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으로 우리 것으로 하려면 그리스도의 초대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이 발전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들어라_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함께 먹게 될 것이다."(계 3:20) 하시며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이다. 문을 여는 데에 큰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적 관심사들에는 우리의 무의식적 가치관들이 내포되어 있다. 어떤 사고들은 우리의 마음을 끈다. 우리가 그것에 집착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어렸을 때에 형성된 정서적 프로그램에 이 사고와 관련하여 저장되었던 그 무엇이 의식 속으로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들이 의식 속을 지나갈 때 거기에 심하게 정서적으로 연결된 가치관들이 자극하고 위협을 주기 때문에 우리 의식 속에서 신호등이 빤짝거리며 켜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든 사고와 사고 형태들을 떠나보내는 훈련을 함으로써 우리의 정서적 속박과 강박에서 점차 자유로워지게 된다.

관상기도 중에 성령에서는 우리가 휴식할 수 있고 영적 다툼을 하지 않을 위치에 우리를 놓아 주신다. 성령께서는 은밀한 도유(塗油 : 기름 발라 주심)를 통하여 우리가 지각할 수 없는 심적 수준에서, 우리 인간의 연약한 성질 때문에 생긴 상처를 치유해 주신다. 그것은 마치 마취된 사람이 수술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모르고 깨어난 후에야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내적 침묵은 하나님의 사랑이 뿌리 내릴 수 있게 하는 완전한 온상이다.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하나님 사랑의 상징으로 겨자씨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그것은 씨 중에 가장 작은 것이지만 엄청나게 크게 자랄 여지를 갖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자라게 하고 우리를 변형시킬 힘을 가지고 계신다. 관상기도의 목적은 우리의 내적 변형의 과정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음절이나 두 음절의 단어로 그들의 사고들을 떠나보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만일 당신에게 시각적 영상이 더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사용하라. 그러나 그 영상을 상상의 수준에 도입하면서 만일 다른 사고가 들어왔다고 깨달을 때 바로 그 영상으로 부드럽게 되돌아와야 한다. 시각적 영상은 일반적인 것이어야 하며 너무 선명하거나 정밀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수 성체 앞에서 기도할 때 영상의 방법이 특히 도움이 된다. 그들은 눈을 감고 있으면서 단순히 기도 중에 주님의 현존을 인식한다.

자신의 호흡을 따라가는 것이 마음을 가라앉게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조심스럽게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향심기도에서 기도의 목적은 우리의 모든 사고를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아의 존재의 근저와의 접촉을 더욱 깊게 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갖는 지향이 이 기도의 근본이다. 향심기도는 우리의 주의를 어떤 단어나 영상이나 혹은 호흡에 맞추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전 존재를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자세나, 만트라나 만다라 같은 것에 정신을 집중하여 얻어지는 우리의 영적 특성을 경험하는 것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가 전제되어야 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승복하도록 하는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크리스찬이면서 정신을 고요하게 만들기 위하여 어떤 육신적 심리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면 그것을 기도 중에 실행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만일 예를 들어 당신이 당신의 사고를 평온하게 하기 위한 방법을 지금 사용하고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과 더 가까이 가려는 동기를 가지고 해 보라. 향심기도는 정신 이완 훈련은 아니지만 정신 이완의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우리의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의 훈련이다.

몇 가지 질문과 답

다음은 본 장에 나타난 몇 가지의 질문과 답이다.

1). 어떻게 거룩한 단어가 작용하는가?

거룩한 단어는 당신이 깊은 내면의 수준에서 생각하는 단순한 사고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어떠한 형태이든 받아들이는 것이다. 입술로 외우는 단어는 외적인 것이므로 이러한 기도와 상관이 없다. 상상 속의 사고는 내적인 것이며, 당신 의지의 충동을 나타내는 단어는 더욱 내적이다. 단어의 단계를 넘어서 순수한 인식으로 들어갔을 때에만 내면화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의 발꿈치에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는 그에게 말씀하시는 분에게서 듣는 말씀들을 넘어가서 그분과의 일치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향심기도를 하려고 앉아서 거룩한 단어를 내면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룩한 단어를 넘어서 그 단어가 지향하는 분, 즉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어떠한 관념도 넘어서, 절대 신비이신 하나님의 현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께 가고자 하는 열망 우리 안에 그분이 현존하시도록 우리를 그분께 열어 드리고자 하는 열망은 우리의 주관(主管)에 달려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기 위하여 어디로 갈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그분께 우리가 일치하도록 여러 가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으로 그분이 우리를 당신께 끌어당기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안에 이미 진행되고 있는 어떤 행위에 자신을 여는가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현존에 동의하는 것 자체가 바로 그분의 현존이다. 거룩한 단어는 우리의 심적 인식의 수준을 넘어서 우리 존재의 원천,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계시는 삼위일체이신 분을 지향하는 것이다.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하나님은 하나의 사진이나 동상처럼 생명이 없이 계시지 않고 살아 활동하시며 계신다. 이 기도의 목적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중심에서 끊임없이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활동과 접촉을 이루려는 데 있다.

만일 당신이 이 기도를 여러 달동안 수련한다면 이 기도가 당신에게 맞는 기도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이 기도를 수련함으로써 얻는 경험을 대치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새로운 친구를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만일 당신이 새 친구를 정규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누면 빠르게 서로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하루에 두 번, 아침 일찍 한 번 그리고 저녁 식사 전에 한 번 할 것을 권하는 것이다. 그 "대화'가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면 당신은 확실히 평화와 새로워짐을 경험할 것이다. 때로 그 대화는 야구 경기에 흥미가 없으면서 야구 스코어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과도 같다. 당신이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 흥미를 가지면 그 사람이 흥미로워하는 것에도 흥미를 갖는 것처럼 그 대화에 인내를 갖게 된다. 만일 당신의 장기적 목표를 하나님과의 우정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에 둔다면 별재미 없게 느끼는 기도의 시간도 당신을 부담스럽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주 근본적인 원칙은 매일 기도를 하는 것이다.

2). 만일 전 기도 시간 동안 사고의 물결이 끊임없이 몰려오면 어떻게 하나?

침묵하기 시작할 때에 당신은 당신의 안과 밖에서 몰려오는 사고들로 머리가 꽉 찬 것을 인식할지도 모른다. 상상은 영구히 작동하는 인간의 기능이기 때문에 언제나 상상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의 기억과 상상 수준에서는 사고가 계속 일어날 것을 기대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무도 즉각적으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평화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당신은 당신의 있는 그대로를 그리고 하나님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서, 하나님께서 늘 편안하지는 않더라도 가장 좋은 길로 당신을 인도하시리라는 것을 신뢰하여야 한다.

바라지 않는 사고가 떠올라도 마음 쓰지 말고 그대로 떠나버려라. 만일 기도 중에 많은 사고가 떠오를 것이라고 이미 기대하면 사고가 떠오르더라도 마음이 덜 상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향심기도의 목표가 모든 사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느낀다면 당신은 계속해서 실망할 것이다. 실망을 느낄 때 그것은 감정이 뒤섞인 또 하나의 사고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즐기던 내적 고요를 산산히 부수고 말 것이다.

3). 거룩한 단어를 항상 떠올려야 하는가?

사고들이 지나가 버리면 거룩한 단어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초기에는 그것을 당신의 잠재의식으로 이끌어 들이고 그리하여 당신의 기도시간 동안에 필요할 때마다 다시 불러들이기 위하여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기본 법칙은 강 위에 떠가는 모든 사고들을 떠내려 보내는 것이다. 그것들이 떠내려가는 한은 당신은 그것들에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당신이 떠가는 배 위에 무엇이 있는가 하고 보고 싶어질 때에는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그러나 노력을 들이지 않고 아주 부드럽게 하라.

당신이 만일 누구와 말다툼을 했거나,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기도하려면 다소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성서를 읽거나, 거리를 한 바퀴 걷거나 뛰는 것, 혹은 요가를 하면 당신의 감정적 소요를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침 일찍 기도하는 이유는 그 시간에는 아직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전이기 때문이다.

4). 어느 기도 시간 중에 거룩한 단어는 아주 없어지는가 아니면 때때로 없어지는가?

가장 깊은 수준에서 하는 거룩한 단어는 내적 평화의 경험이다. 그 때에는 당신의 향심기도가 지향하는 여정의 끝에 도달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영구한 상태는 아니다. 당신은 그곳에서부터 되돌아 나오게 되고 그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되돌아가야 한다.

5). 당신은 거룩한 단어의 반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지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거룩한 단어를 반복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 지향에 매달릴 수가 있는지 궁금하다. 나에게는 그 둘이 같이 다니는 것 같다.

초기에는 거룩한 단어에 매달리지 않으면서 그 지향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거룩한 단어를 계속 반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거룩한 단어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힌두 전통의 만트라 기도방법과 유사한 크리스찬의 기도 형태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향심기도가 아니다. 향심기도에서는 당신이 어떤 다른 사고를 하고 있다고 알아차렸을 때에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이 기도가 점점 편해질 때에 당신은 단어를 넘어선 어떤 내적 평화의 장소에 당신이 들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당신은 거룩한 단어 너머에 다른 주의의 수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거룩한 단어는 하나의 지침이며 당신은 그 지침(指針)이 가리키는 곳에 다다른 것이다. 그러한 경험을 할 때까지는 당신은 거룩한 단어로 계속 돌아감으로써 당신이 어떤 사고를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당신의 지향을 재확인하도록 해야 한다.

6). 거룩한 단어는 어떤 정서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고 또 어떤 분위기를 갖는 것 같다. 나는 향심기도 중에 거룩한 단어가 어떤 정서적요소를 가져오는지 보려고 그 단어에 머물러 있는 것과, 향심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나에게 가져오신다는 희망으로 그 단어의 감정적 요소를 포함한 모든 것을 털어 버리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

거룩한 단어의 의미나 그 단어로부터 오는 반향 같은 것을 알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당신은 당신의 마음에 어떤 다른 사고를 유발하지 않는 단어, 어떤 특정한 정서를 불러일으키지 않을 단어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거룩한 단어는 하나의 몸짓으로서 당신의 지향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지향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것이다. 당신은 단순히 그 지향을 나타내는 단어를 선택할 것이며, 어떤 의미나 감정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라야 한다. 의미가 적을수록 더 좋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거나 침묵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그것은 믿음의 움직임을 촉진하는 내적 분위기를 이루는 것이다. 순수한 믿음의 움직임이 관상기도의 핵심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러한 믿음에 채워 주실 수가 있는 것이다.

당신은 더 이상 거룩한 단어를 생각하지 않는 점에 도달할 것이다. 당신이 기도하기 위하여 조용히 앉으면 당신의 모든 심적 기능들은 한데 모아져 하나님 안으로 녹아들게 된다. 내적 침묵이 바로 그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거룩한 단어이다. 예를 들면 당신이 뉴욕에 가려면 당신은 출발점에서 승차권을 산다. 그러나 당신이 일단 그곳에 가면 또 다른 승차권을 사기 위해 매표소로 가지 않는다. 당신은 이미 거기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거룩한 단어는 내적침묵에 이르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므로 당신이 어떠한 생각도 넘어서 끝없는 하나님 사랑의 현존 안으로 일단 들어가면, 거룩한 단어로 되돌아갈 필요가 없다. 당신은 이미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다.

7). 때로 나는 평정 상태에 아직 이르기도 전에 내가 이미 평정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때로 이것이 사실인가를 시험해 보곤 하는데 정말로 평정에 이르기도 전에 평정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여 거룩한 단어로 되돌아가기를 꺼려한다. 그러면서도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야 한다는 느낌을 여전히 갖는다.

그렇게 빨리 확신하지 말라. 그 상태에 몇 분 더 머물러 있어 보아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더 친밀하고 더 가까이 계신다. 만일 주께서 당신에게 다가와서 당신을 끌어당기신다면 아주 좋다. 주에서 늘 그렇게 하시지는 않지만 당신이 주께서 그렇게 하시도록 도와 드릴 수가 있다. 향심기도는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기도이다.

8). 거룩한 단어는 정확히 무엇을 향한 것인가? 거룩한 단어로 향한 것인가? 그 단어의 의미로 향한 것인가? 그 단어의 소리로 향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현존하신다는 희미한 감각을 향한 것인가?

그 어떤 것도 아니다. 향심기도 중에 우리의 주의는 거룩한 단어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계속 반복하는 것도 아니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 소리는 더욱 아무런 의미도 없다. 거룩한 단어는 오직 상징일 뿐이다. 우리의 의지가 향하는 곳을 가리키는 지침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우리의 몸짓이며 표시이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가 우리는 모른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단어는 폭풍 속에서 배의 나침반이 방향을 가리키는 바늘과 같다.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수단, 더구나 절대적 수단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힘에 의해서 하나님의 현존을 희미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향심기도의 기본적인 초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인적(神人的) 존재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더 깊게 하려는 것이다.

9). 나는 향심기도를 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그들이 어떤 침묵이 일단 형성되면 그들은 거룩한 단어를 더 이상 떠올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5분 정도 침묵 속에 머무른 다음 다른 사고들이 떠오르고 그 때에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리고는 거룩한 단어를 떠나 다시 침묵으로 들어가고 다시사고가 떠오르면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렇게 단어를 떠났다가 단어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들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그들이 잘 아는 것같이 들린다. 어떤 기도교사들은 그들의 경험으로부터, 현대서구 사회의 사람들의 마음은 매우 활동적이어서 적어도 기도 초기에는 크리스찬 만트라를 계속해서 반복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한다. 아주 활동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하여 그렇게 함으로써 이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향심기도는 주의를 집중하는 적극적 방법이 아니고 수동적인 방법이다. 두 가지 기도가 다 같은 목표를 갖는 우수한 방법들이지만, 둘이 같은 기도는 아니며 인간의 심령에 다른 효과를 가져 온다. 향심기도에서 거룩한 단어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기르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어떠한 단어도 쓰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내적 움직임만으로도 충분한 경우가 있다. 당신이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 드리겠다는 단순한 뜻을 가지고-앉자마자 내적 침묵 속으로 빠져 들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거기 계시지만 사람은 자신의 직무나 직업으로 인해 그것을 못 느끼고 있을 뿐이다.

관상기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한 종류의 주의이다. 차라리 그것은 주의(注意)라기보다 지향(志向)이라고 함이 좋다. 성령께서 당신의 기도를 더욱더 이끌어 가면서 당신은 아주 순수한 의식으로 끌려가게 되는데 그 순수한 의식은 당신의 참 자아를 바라보는 하나의 직관(直觀)이다. 이 세상에서는 순수한 믿음으로가 아니고는 하나님을 곧바로 아는 길이 없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심적 기능에는 어둠일 뿐이다. 이 어둠은 우리의 기능들이 사라졌다기보다는 우리의 직관이 그 기능들을 초월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르면, 이 순수한 믿음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다.

관상기도로 여러 가지 내적 체험 혹은 무체험으로 나가는 길이 열린다. 어떻게 체험하든지 간에, 이것들은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활동하시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련이다. 그러한 지향이 이루어지면 당신은 엄청난 자유를 느끼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이상의 위안을 바라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영적 위안 또한 감각적 위안과 마찬가지로 주의를 산만케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내가 앞에서 말했던 정서적 문제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우리를 위안해 주신다. 그 동안 사랑이 결핍되었던 사람에게는 더 많은 정(情)이 필요하다. 성령은 그것을 어느 심리 치료자와 마찬가지로 잘 아신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랑과 정을 퍼부어주신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거룩하다든지 아니면 성령께서 그 사람들을 더 사랑하신다는 말은 아니다. 이 말은 그 사람들이 남보다 사랑을 더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지만, 언제나 그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그들이 하나님과 더 좋은 의사소통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데, 이 의사소통은 심리적 기능으로 하는 인식의 영역을 넘은 것이다.

 

5. 동의한다는 몸짓으로서의 거룩한 단어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의 의식을 강에 비유하고, 사고들을 강의 표면에 지나가는 배로 견주어 보았다. 강의 표면은 평상시의 심리적 인식수준을 나타낸다. 그렇지만 강에는 깊이도 있듯이 우리의 인식에도 깊이가 있다. 인식의 일상적인 심리적 수준이 있듯이, 인식의 영적인 수준 또한 있어서 거기서 우리의 지력과 의지가 영적인 방법으로 기능하고 있다. 더 깊은 수준 혹은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내재하고 계시면서 거기에서 현존하고 있는 신성한 에너지가 매순간 우리의 존재와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그림 참조). 우리 존재의 가장 중심에 혹은 가장 내면에 인간적인 노력과 하나님의 은총이 만나는데 그것을 비가들은 '존재의 바탕'(ground of being) 혹은 '영의 정상'(peak of spirit)이라고 부른다.

                          

많은 묵상의 방법들이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지만, 이러한 단어들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 인식의 다른 수준에 표적을 두고 있다.

거룩한 단어는 우리의 가장 내적 존재 속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시는 것을 우리의 영인 의지가 동의한다는 표식이다. 그 단어는 상상 속에 나타나지만 일상적 의식의 흐름의 수준에 직접적이고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지향만을 나타내는 것이고, 이 지향은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현존에 나를 열어 드리고 맡기기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향심기도와 다른 수련, 즉 촛불을 바라본다든지, 만트라를 반복한다든지, 어떤 영상을 상상한다든지 하는 것과 같이 어떤 형태의 주의(注意)를 사용하는 방법들과 다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단어를 계속해서 반복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지향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그것을 사용한다. 강 위에 배가 지나가듯이 사고들이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거나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 그냥 지나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구태여 거룩한 단어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이러한 경우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갖는 지향의 방향이 중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향을 나타내는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할 때에, 우리의 의지의 움직임이 상상 속에 아주 섬세하게 나타난다. 그 단어를 조심스럽게 완전하게 발음할 필요도 없다. 단어에 대하여 사색하지도 분석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단지표식이거나 상징일 뿐이다. 우리의 외적인 감각에서 시작하여 (거룩한 바라봄이나 호흡을 이용할 수도 있다), 우리는 영적인 수준과 영적인 감각으로 옮겨 가는데, 이 영적인 감각은 외적인 감각에 비유할 수 있다. 거룩한 단어는 우리의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와 상상 속에 다만 순간적으로 반향하는 반면에, 만트라나 주의집중을 하는 과정은 사고의 흐름을 느려지도록 만든 것이다.

거룩한 단어의 일차적인 기능은 사고들을 밀어 내려고 하거나 서서히 사라지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현존에 머물고, 기도시간 동안에 성령의 활동에 우리를 맡겨 드린다는 지향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어느 보트가 그냥 지나가지 않고 우리를 끌어당기거나 우리를 밀치려고 할 때에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어떤 특별한 사고에 끌려 들어갈 때에는 하나님의 현존에 머문다는 우리의 일반적 사랑의 지향이 순수성을 잃어 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거룩한 단어는 이미 보았듯이 카메라에서 초점을 맞추는 기구와 같은 것인데 이것은 영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지향에 맞추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시작할 때에는 우리의 일반적인 사랑의 지향을 하나님께 향한다. 그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수련을 처음 시작할 때에 편하게 느끼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우리는 어떠한 사고라도 예외없이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 둔다. 그것들이 즐거운 것이거나 고통스러운 것이든, 그것들이 영적인 위안을 주는 것이든, 아니면 사고와 감정이 폭우처럼 쏟아지든 관계없이 그냥 보낸다. 때로는 무의식으로부터 오는 사고들의 폭풍 속에 휘말려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그냥 가만히 앉아 그것을 감수하면, 그 고통 자체가 거룩한 단어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포기도 우리의 내면에서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하심에 대하여 깊은 동의를 하는 것과 같다.

관상으로 이르게 하는 모든 방법들은 다소간에 사고과정을 지나쳐 버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고 과정이 우리의 중독적인 과정 -강박적인 사고에 기름을 붓거나 고통에 가면을 씌우기 위하여 외부 세계로부터 무엇을 얻고자 하는 걷잡을 수 없는 마음- 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사고 없이 20분에서 30분간 정기적으로 휴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신이 자기의 사고와는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우리의 사고는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사고가 바로 자기라고 생각하며, 만일 자기의 사고가 흥분하게 하거나 기죽이게 하거나 불길한 것일 때에 그것에 얽매이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그런데 하나의 훈련으로서 매일 잠시 동안 그저 생각하기를 중단해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사고에 지배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 향심기도의 설명에서 '사고'라는 말은 단지 관념이나 영상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고 감정들, 우리 외부에서 그리고 내부에서 오는 감각적 인상들, 그리고 영적인 감각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어떠한 지각(知覺) 내용들도 모두 '사고'라는 포괄적인 개념에 들어간다.

관상을 준비시키는 여러 가지 방법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인간의 정신에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이 모든 준비 방법들을 하나의 스펙트럼 상에 놓는다면 이것들은 수용적(受容的)인 방법에서부터 주의집중적인 방법까지 다양하다. 주의집중적인 방법에서는 우리가 많은 일을 혹은 모든 일을 하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만트라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 우리의 호흡에 초점을 맞추는 것, 촛불이나 그와 유사한 물체를 바라보는 것, 어떤 자세를 계속 유지하는 것, 혹은 참선 중에 관(觀: 화두를 사색함)하는 것 등이다. 향심기도와 같이 수용적인 방법에서는 주의에 초점을 맞추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우리의 노력은 극히 최소한에 머문다.

어떤 방법은 더 수용적이고 어떤 방법은 더 주의 집중적이다(그림 참조).

                                                

선(禪)에도 향심기도와 아주 근사한 특별한 수련이 있는데, 이 수련에서는 어떤 자세로 그냥 앉아서 사고에 주의를 주지 않는다. 어떤 자세를 유지하려면 처음에는 어떤 노력을 필요로 한다. '긴장을 풀고, 그러나 정신은 예민하게'라는 조건 말고는 어떠한 특별한 자세를 요구하지 않는 향심기도가 아마도 가장 수용적인 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

향심기도와 다른 수련들을 구별 짓는 것은 향심기도의 지향성(志向性, inten- tionality)이다. 향심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의성과 지향성의 차이를 구별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그러한 사람들은 향심기도와 다른 기도 사이에 외적으로는 유사하게 보이기 때문에 이것들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향심기도에서는 지나가는 사고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우리가 영적인 인식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전체의 심리적 인식 수준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세포로 삶을 시작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개인적인 빅 뱅(Big Bang ; 우주 형성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고 하는 하나의 창조이론)이다. 그러나 그 하나의 세포 속에는 나머지 삶을 지탱해 줄 만큼 충분한 에너지가 있다. 이제 우리의 가장 심층의 존재(inmost being) 혹은 존재의 신적인 바탕(divine ground of our being)을 살펴보자(위 그림 참조). 그 중심에서부터 참 자아(ture self)가 전개되고 그 에너지가 적절하게 표출된다. 우리가 왜 인간 조건이라고 부르는가 하는 이유를 알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 참 자아와 접촉을 하지 않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유아기 때, 출생 때, 아니면 어떤 현대 정신 치료자들이 말하듯, 출생 이전에 가졌던 고통에 대한 반응으로서 아주 어릴 적에 우리는 거짓 자아라는 것을 만들어 내고, 이 거짓 자아는 참 자아를 억누르고 참자아의 잠재력을 감추어 버린다. 이 거짓 자아는 우리의 아픔과 자기 보호 노력에 영향을 받아 우리의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며, 그 결과로 대부분의 경우 외적 사건이나 그것에 대한 우리의 정서적 반응에 지배되는 상태를 경험한다. 거짓 자아는 우리가 내적인 자유로 행동하기보다는 외적인 사건에 지배를 받을 때에 기능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심리적 의식은 마음을 사로잡는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완전히 그 영화에 사로잡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외적 사건이나 이 사건에 대한 우리의 정서적 반응에 지배를 받는 것은 마치 우리가 아주 좋은 영화를 보면서 우리 자신을 영화의 줄거리나 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신이 지금 영화관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이와 유사하게우리는 대부분의 시간, 우리 자신의 영적인 수준과 접촉을 하지 못하면서, 우리가 외부 사건에 대하여 자율적인 선택을 하기보다는 그 사건에 스스로 지배를 받도록 허용한다. 우리가 향심기도를 통하여 이러한 과점을 다루고 무의식에서 나오는 역동을 인정하게 되면서 우리의 영적인 기능과 참 자아가 해방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거짓 자아가 요구하는 행복의 상징에게 자신이 부여한 정서에 얽매이지 않고 이것을 상대적인 관점에서 보게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내적 평화를 경험하기 시작하고 이러한 행복이야말로 참으로 찾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향심기도의 수련 중에 우리는 이전에 가졌던 것과 똑같은 정서적 반응에 직면하게 되지만, 이번에는 그것을 보지 못하면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보게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거짓 자아의 경향을 인정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 이유는 그것을 알아봄으로써만 그것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분석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것을 알아보면서 그대로 떠나보내면 되는 것이다.

내적 자유가 발달되면, 우리는 마치 재미없는 영화를 보면서 언제고 일어나 영화관을 나갈 수 있는 사람처럼 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대로 앉아서 계속 관람해도 된다는 것도 안다. 이것이 영적 수련을 한 사람과 아직 시작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러한 과정을 시작하기 이전에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나, 환경이나, 어릴 적에 형성된 우리의 내적 역동 -그 역동에 대하여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이 나를 계속해서 지배하도록 허용 한다. 기도 수련을 시작하면, 우리는 이러한 역동에 대하여 자율적인 힘을 가짐으로써 그것을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참 자아를 찾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창조적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이 우리 안에서 성장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중심으로부터 행동하기 시작한다. 향심기도의 가장 큰 효과는 자신의 중심으로부터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외부 세상과 상호관련을 맺지 않는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이전보다 더 잘 상호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나 환경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지 않으면서 현실(reality)이 보여 주는 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향심기도는 단지 하나의 기도 방법이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가 복음과 그 가치에 응답하도록 만들어 주는 과정을 시작하는 기도이다.

 

6. 향심 기도의 요약

1). 신학적 배경

오순절의 은총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로서 우리 안에 계심을 확인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각자 안에 각성을 주시는 분으로서 언제 어디서나 계시다. 그분은 살아 계신 주님으로서 언제나 우리 안에 사시도록 성령을 보내 주시며, 기도와 활동 중에 성령의 열매와 참된 행복(마 5장)을 경험하고 또 나타내도록 힘을 주심으로써 당신의 부활을 증거 하게 하셨다.

2). 거룩한 독서

거룩한 독서는 그리스도와의 우정을 키우는 가장 전통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대화 중에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대화의 주제를 알려 주시듯 성서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이다. 매일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말씀을 사색하면, 그저 안다고 하는 관계를 넘어 우정과 신뢰와 사랑의 태도로 발전시켜 준다. 대화는 단순해지고, 6세기의 대 그레고리오 성인이 크리스찬 관상 기도의 전통을 요약하면서 말한 "하나님 안에서 쉼"이라는 통공(혹은 합일, communion)의 상태로 이른다. 이것이 16세기까지 관상 기도에 관한 고전적인 의미였다.

3). 관상 기도

관상 기도는 성세의 은총과 정기적인 거룩한 독서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전한 것이다. 우리는 기도가 사고와 감정이 언어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가지의 표현일 뿐이다. 관상기도는 사고와 단어와 정서를 넘어서서 절대 신비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가슴과 마음을 열어 드리는 것이다. 호흡보다 더 가까이 계시고, 사고보다 더 가까이 계시며, 선택보다 더 가까이 계시고, 우리의 의식 그 자체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우리 안에 계심을 믿음으로 알고 있는 그 하나님께 우리의 인식을 열어 드리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우리가 동의하기만 하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어 줄 수 있게 우리를 내적으로 정화시켜 주는 과정이다.

4). 향심 기도의 방법

향심 기도는 거룩한 독서로 시작된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깊게 해 주도록 만들어진 것이며, 관상 기도의 은총에 우리의 기능들을 준비시켜 줌으로써 관상 기도를 촉진시키게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예전의 가르침(예를 들면 무지의 구름, The Cloud of Uuknowing)을 현대적 형태로 제시하면서 거기에 어떤 순서와 규칙을 부여하여서 만든 것이다. 이것은 다른 기도를 대치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도들을 새롭고도 완전한 각도에서 조명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 기도 중에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또 활동하시도록 동의한다. 그리고 다른 시간에는 우리의 주의가 나의 밖으로 옮겨 가서 모든 것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한다.

향심 기도의 방법은 관상으로 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을 줄이는 방법이며 인간의 기능들을 이 은총에 협조하도록 준비시키는 방법이다. 이것은 이전에 있었던 가르침을 현대적인 형태로 제시한 것이며 거기에 어떤 순서와 질서를 첨가한 것이다. 이것은 다른 모든 종류의 기도에 대신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 대신 다른 종류의 기도에 새로운 시각을 부여한다. 이 기도 시간에는 내면에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에 주의를 향하게 한다. 다른 기도에서는 주의를 외부 세계로 돌려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하나님에게로 향한다. 향심 기도는 거기에서 끝나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를 시작하는 기도이다. 그것은 체험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기도이다.

향심 기도의 방법은 우리의 일상적 사고의 흐름을 꺼 버리려고 만들어진 것이다. 이 사고의 흐름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는 습관적인 방법,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습관적 방법을 강화할 뿐이다. 이것은 마치 라디오를 장파에서 단파로 돌리는 것과 같다. 우리는 장파 라디오로 장파 방송을 듣는 데 익숙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먼 거리에서 오는 방송을 들으려면 다른 파장으로 돌려야 한다. 이와 비슷하게, 당신의 일상적인 사고와 정서적 패턴을 꺼 버리면, 당신 앞에 새로운 현실 세계가 열린다.

5). 향심기도의 실행

향심기도를 체계적으로 하기 위하여,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을 수 있는 편안한 자세를 취하라. 그리고 눈을 감아라. 보통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눈을 감음으로써 이 세상의 반은 사라진 셈이다. 사고들의 흐름을 늦추게 하기 위하여, 하나의 생각만을 하여라.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당신이 편하게 느끼는 한 음절 혹은 두 음절의 단어를 선택하라.

어떤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때에도 거룩한 단어를 사용할 때와 마찬가지의 절차를 따른다. 이 단어는 사고와 상상과 정서너머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신비에 당신을 열어 드리려는 지향을 상징하기 때문에 거룩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그 내용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그 지향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현존을 향하여 안으로 들어가는 움직임의 방향을 나타내는 지침(指針)일 뿐이다.

시작하기 위하여, 푹신거리는 솜 덩어리 위에 새 깃을 아주 부드럽게 올려놓듯 그 거룩한 단어를 당신의 상상 속에 살짝 떠올려라. 어떤 형태이든지 이 거룩한 단어를 계속 생각하라. 그렇다고 이것을 반복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점차로 맥빠진 듯이 되고, 희미해지고, 흑은 습관적으로 반복되다가 사라지기도 할 것이다. 어떤 형태로 일어나건 그대로 받아들여라.

당신이 어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면, 당신의 지향을 나타내기 위해 그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이것이 효과적이기 위하여서는 자주 열심히 이 단어를 되풀이하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오히려 시작할 때에 당신의 상상에 얼마나 부드럽게 이 단어를 떠올리는가, 또 다른 생각들이 떠올랐을 때에 어떻게 즉시 이 거룩한 단어로 돌아오는가에 달렸다.

향심 기도 중에 사고들은 불가피한 부분이다. 우리의 일상적 사고들은 강 위에 배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떠 내려오기 때문에 우리가 그 강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사고(思考)"라 하는 것은 의식의 스크린을 지나가는 어떠한 지각 내용을 뜻한다. 우리는 보통의식의 내적 스크린을 끊임없이 지나가는 상상, 기억, 감정, 외적 인상 등을 인식한다. 우리가 사고의 흐름을 얼마간 늦추면 그 배들 사이로 공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거기에 현실이 떠오른다.

향심 기도는 당신의 주의(注意)를 일반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 구체적 형상에서 무형의 것으로 옮겨 주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배에 주의를 빼앗긴다. 그 다음에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관심을 갖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들을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 두라. 그것들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음을 알게 되면, 당신의 내면에 현존하시는 하나님께로 향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바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거룩한 단어는 당신의 지각이 더욱 깊어지는 수준으로 생각하는 단순한 사고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 당신 안에 올라오든지 간에 그 거룩한 단어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입술에 떠 올리는 것은 외부적인 것이어서 이 기도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상상 안에서의 사고는 내적인 것이며, 의지를 나타내는 단어는 더욱더 내적이다. 당신이 단어를 넘어서 순수한 인식으로 가는 것만이 내면화를 완성하는 과정이다. 이것이 베다니아에서 마리아가 예수의 발치에서 했던 것이다. 마리아는 듣는 말씀을 넘어가 말씀하시는 분에게로 나가고 그와의 일치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앉아서 향심기도를 하면서 하는 것이 바로 거룩한 단어를 내면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룩한 단어를 넘어서 그 단어가 가리키는 분, 즉 궁극적 신비, 하나님의 현존과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어떠한 지각도 넘어서- 일치하는 것이다.

6). 향심기도 중의 사고들

우리가 정신을 가라앉히려고 할 때 의식의 흐름 속에 여러 가지 종류의 사고들이 떠오른다. 사고의 종류에 따라 적절한 반응이 따르게 된다.

1). 상상으로 하는 공상.

가장 분명히 나타나는 사고들은 우리의 상상력의 끊임없는 활동으로 만들어 내는 피상적 사고들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의 주의를 주지 않으면서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두 사람이 대화를 할 때에 길거리에서 오는 소음이 창을 통해 들려오는 것과 같다.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만 밖에서 나는 소음을 피할 도리가 없다. 그러다 보면 그 소음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때가 있다. 또 어떤 때는 자동차 경적 소리가 순간적으로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기도 한다. 가장 합당한 반응은 그 소음을 받아들이고 가급적 거기에 주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상황에서 주의가 분산되지 않고 대화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2). 정서적으로 흥미를 끌며 떠오르는 사고들.

두 번째의 사고는 길거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흥미를 느낄 때 일어나는 사고들이다. 예를 들면 말다툼이 벌어져서 호기심을 끈다. 이러한 사고는 어떤 대응을 요구하는 사고이다. 이 때에는 하나님께 드리고 있던 사랑의 주의로 돌아가는 뜻으로 거룩한 단어를 떠올려야 한다. 이러한 흥미를 끄는 사고들에 빠졌을 때에 자신에게 짜증 내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짜증도 또 다른 하나의 사고이기 때문에 당신을 내적 침묵으로부터 멀리 가게 만든다. 내적 침묵이 이 기도의 일차적인 목표이다.

3). 내적 성찰, 그리고 심리적 개안.

우리가 깊은 평화와 내적 침묵에 잠길 때에 세 번째 종류의 사고가 떠오른다. 우리 정신 안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눈부신 신학적 성찰이나 엄청난 심리적 개안처럼 보이는 것이 맛있는 미끼같이 우리 눈앞에 어른거려서 "잠시 시간을 내어서 이 기막힌 성찰을 잘 파악해야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만일 당신이 그것을 기억에 넣을 만큼 오랫동안 이러한 성질의 사고를 묵인하면 당신은 내적 침묵의 깊고도 신선한 물에서 건져 올라오게 된다. 고의적으로 하는 사고는 당신을 침묵에서 올라오게 한다.

이 기도에서는 아주 밀접한 종류의 자기 부정이 필요하다. 영적인 행복의 시간인 피로 회복과 같은 경험이 기도의 부산물이긴 하지만 이것만이 기도의 목적은 아니다. 이 목적은 우리가 가장 집착하고 있는 것 -말하자면 우리의 깊은 사고들과 감정들이 솟아나는 그 원천- 즉 거짓 자아를 부정하는 데 있다.

이러한 종류의 금욕 수련은 우리의 거짓 자아의 정서적 프로그램에 집착하는 그 뿌리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철저하고도 기쁨을 주는 자기 부정인데 이것이 효과적이기 위하여 시달릴 필요는 없는 자기 부정이다. 문제는 가장 유용하고 적절한 종류의 자기 부정을 선택하느냐와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인 것이다.

4). 자아 성찰.

깊은 평화에 들고 어떤 특정한 사고들로부터 해방하고 나면 자신 안에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성찰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긴다. 당신은 "마침내 나는 해냈다."라든가, "이 기분은 참 좋군." 혹은 "내가 어떻게 이 경지에 도달했는지 정신적으로 기록해 두어 내가 원할 때마다 이렇게 한다면!"하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진행되고 있는 것을 성찰하든지 아니면 그러한 체험을 떠나보내든지 선택해야 한다. 만일 떠나보내면 당신은 더 깊은 내적 침묵으로 들어간다. 만일 성찰하면, 당신은 거기에서 나오게 되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다시 시작하는 일이 빈번할 것이다.

성찰은 체험에서 한 걸음 물러난 것이다. 이것은 실재의 사진일 뿐이다. 당신이 체험을 성찰하기 시작하면 체험은 끝났다. 즐거움에 대한 성찰은 그 즐거움을 가지려는 시도일 뿐이다. 그러면 즐거움은 잃어버린다. 관상 기도에서 성찰하려는 경향은 가장 다루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순수한 즐거움, 순수한 체험, 순수한 인식의 순간을 저장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우리가 원할 때에 다시 그곳에 이를 수 있도록 어떻게 거기에 이르렀는지를 기억하려고, 깊은 평화와 일치의 순간을 성찰하기 원한다. 그러나 당신이 이 유혹을 지나가도록 버려두면, 당신은 새로운 자유의 수준을 지나면서 더욱 세련된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하나님의 현존은 우리가 숨쉬는 공기와 같다. 당신이 그것들에 매달려서 그것을 소유하려고 들지만 않는다면 당신이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다.

이 기도는 사랑이며 은총인 하나님의 성령과 통교(communion)하는 것이다. 우리의 소유 본능은 우리를 유쾌하게 만드는 즐거운 삶에 매달리게 만드는데, 하나님의 현존보다 더 기쁜 것은 없고 이것은 깊은 안정과 평정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탐욕에는 하나님이 반응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온전히 손에 닿을 수 있는데 그것을 자유로이 받아들이면서도 소유하려고 들지 않을 때에 그럴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의 기도는 자아 승복을 배우는 기도이다. 그것은 많은 실수를 통하여 소유하려 들지 말고 떠나보내도록 우리를 가르친다. 만일 당신이 이 기도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성찰하려는 뿌리 깊은 습관을 극복하면, 당신은 평화를 얻고 그것을 소유하려는 생각을 안하게 되며, 그리하여 그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5). 내적 정화.

어떤 형태의 묵상이나 기도든, 사고를 초월하는 것이면 내적 정화의 작업을 갖게 한다. 이 작업은 하나님이 하시는 정신 치료의 학교이다. 이것은 깊이 뿌리박고 있는 긴장을 사고라는 형태로 표출하도록 우리의 신체를 도와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치료에서 오는 사고들은 그것들이 어디서 그리고 왜 오는지 본인은 알지 못한다. 그 사고들은 어떤 힘을 가지거나 정서적으로 충전된 채 떠오른다. 어떤 이들은 최근의 어떤 사건과 관련지을 수 없는 분노, 슬픔, 두려움 등을 느낀다. 이러한 것들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하여 일생 동안의 해결되지 못했던 심리적 문제들이 점차로 해소되고, 본능적 욕구에 기초를 두고 행복해지려고 어렸을 적에 마련하였던 정서적 반응 체제들이 무너지면서 거짓 자아는 참자아에게 자리를 내어 준다.

일단 당신이 이 사고들이 불가피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치유와 성장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기만 하면, 그것들에 패해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것들을 고통스러운 주의 산만으로 보는 대신에, 내적 침묵과 사고 두 가지를 포용하는 넓은 시각으로 보게 되는데, 이 사고들은 비록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깊은 평정의 순간과 마찬가지로 정화에 아주 가치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7). 하나님 안에서 쉼

당신이 평온히 앉아서 깊이 들어가면 당신은 사고는 물론이고 그 거룩한 단어도 사라지는 곳에 도달할 것이다. 이것은 자주 의식의 정지라는 어떤 공간처럼 경험하게 된다. 다음에 당신이 자각하는 것은 "내가 어디에 있었나? 나는 거룩한 단어를 떠올리지도 않았고 사고들도 없었는데." 하는 생각이다. 혹은 시간 밖(外)에 있었다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시간은 동작을 재는 자(尺)다. 만일 일상적 사고가 줄어들어 아주 적은 수의 사고 밖에 없게 되면 기도의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내적 침묵이나 "하나님 안에서 쉼"은 사고와 상상과 정서의 저편의 일이다. 이러한 인식은 당신에게, 당신의 존재의 핵심은 내적이어서 파괴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고 그분의 거룩한 생명을 나누어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 중에 내적 침묵의 분명한 경험을 즐기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고요, 평정과 동시에 간헐적인 사고들이 떠오름을 늘 체험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체험을 하지 못한다. 어떠한 형태와 정도의 내적 침묵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되 바라지는 말라. 바람은 또 다른 사고이기 때문이다.

8). 향심기도 실행을 위한 몇 가지 지침과 설명

지침들

1. 하나님이 당신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심에 동의하는 지향의 상징으로서 거룩한 단어를 선택하라.

2. 편안히 앉아 눈을 감고 하나님께 동의하는 지향의 표시로 그 거룩한 단어를 조용히 떠올려라.

3. 어떤 사고가 떠올랐음을 인식하면 조용히 그 단어로 돌아가라.

4. 기도가 끝날 때 눈을 감고 2, 3분간 침묵 속에 머물러 있어라.

 

지침에 대한 설명

1. "하나님이 당신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심에 동의한다는 지향의 상징으로서 거룩한 단어를 선택하라"

1) 거룩한 단어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 우리가 머물겠다는 지향과 하나님의 활 동에 승복하겠다는 지향을 나타낸다.

2) 거룩한 단어는 간단한 기도 중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합한 단어를 주십사 고 청하여서 전택한다.

예 : 주님, 예수, 아빠, 아버지.

또 다른 예 : 사랑, 평화, 샬롬(평화란 뜻), 고요 등.

3) 일단 거룩한 단어를 선택하였으면, 그 기도 시간 중에는 바꾸지 않는다. 왜 냐하면, 그리하면 또 다른 사고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4) 어떤 사람에게는 거룩한 단어보다 하나님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듯 나의 시선을 내면으로 돌 려서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함을 나타낸다. 거룩한 단어와 마찬가지로 거 룩한 바라봄도 같은 지침으로 한다.

 

2. "편안히 앉아 눈을 감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는 것을 동의 하는 상징으로 거룩한 단어를 조용히 떠올려라"

1) "편안히 앉는다"는 말은 상대적인 편안함을 말하는데, 즉 너무 편안하여 잠이 오 지 않을 정도며, 아니면 조금 불편하여서기도 중에 몸의 불편을 생각하지 않을 정도를 말한다.

2) 어떻게 앉든 등은 곧게 세운다.

3) 잠이 들었으면, 깨어났을 때 시간 여유가 있으면 몇 분간 기도를 계속한다.

4) 식사를 마친 뒤에 이 기도를 하면 졸리게 된다. 적어도 한 시간쯤 기다렸다가 향 심 기도를 하라. 잠자기 직전에 이 기도를 하면 잠자는 습관을 해칠 수도 있다.

5) 우리 주변과 내면에서 돌아가는 것들을 떠나보내기 위하여 눈을 감는다.

6) 가벼운 솜 위에 깃털 하나를 얹듯 아주 가볍게 거룩한 단어를 떠올린다.

 

3. "사고가 떠올랐음을 인식하면 거룩한 단어로 부드럽게 돌아가라."

1) '사고'란 감각적 지각, 감정, 영상, 기억, 성찰, 해설 등과 같은 것 모두를 망라하 는 단어다.

2) 사고는 향심 기도의 정상적 부분이다.

3) 아주 가볍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는 것은 최소의 노력으로 하라는 말이다. 이것이 향심 기도 중에 우리가하는 유일한 행동이다.

4) 기도 시간 도중에 이 거룩한 단어는 아주 희미해지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4. "기도가 끝날 때 눈을 감고 2, 3분간 침묵 속에 머물러라."

1) 이 기도를 그룹으로 할 때에는 인도자가 2, 3분간 주님의 기도를 하며 다른 사람 들은 그냥 듣는다.

2) 이 2, 3분은 우리의 정신이 외적 감각 세계로 되돌아오는 데 적응하는 시간을 줄 수 있게 하며, 또 일상생활에 이 침묵의분위기를 가져올 수 있게 한다.

 

9). 몇 가지 실행점들

1. 이 기도의 최소 시간은 20분이다. 하루에 두 번 하도록 권고한다. 한 번은 아침 일 찍, 그리고 한 번은 오후나 이른 저녁에 하라.

2. 기도가 끝나는 시간을 알려면 너무 요란하게 울리지 않는 자명종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3. 향심 기도의 주된 효과는 기도 중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게 된다.

4. 신체적 증세 :

1) 기도 중 신체의 여러 부분에 약간의 통증, 가려움, 뒤틀림을 느끼거나 그저 안절 부절 못하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신체 속에서 정서적 매 듭들이 풀어지는 데서 온다.

2) 또한 사지가 무겁거나 혹은 가벼워짐을 느낄 수도 있다. 이것은 보통 영적주의(注 意)가 깊어져서 나타난다.

3) 어떠한 경우든, 주의를 주지 말 것이며, 아니면 그 감각에 잠간 머물렀다가 거룩 한 단어로 돌아가도록 한다.

5. 거룩한 독서는 향심 기도의 발전의 관념적인 배경을 제공한다.

6. 1주일에 한 번씩 지원 그룹에서 기도하거나 같이 나눔을 하면이 기도에 계속 헌신 하도록 용기를 준다.

 

10). 향심기도의 효과를 일상생활로 확대하기

1. 하루에 두 번 기도한다.

2. 성서를 정기적으로 읽고 이 책에서 방법에 관한부분을 공부한다.

3. 12장에서 제시한 대로 매일 하나나 두 가지 방법을 수련한다.

4. 향심 기도회나 발전 프로그램(그 지역에 있으면) 등에 참가한다.

1) 이 모임에 참가하면 개인 기도에 항구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준다.

2) 또한 테이프나, 독서나, 토론을 통하여 더 지식을 쌓을 기회를 준다.

 

11). 더 발전하기 위한 몇 가지 요점

1. 기도 중에 여러 가지 종류의 사고를 분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 상상이나 기억의 일상적인 분심.

2) 주의를 끌거나 산만하게 하는 사고들.

3) 내성과 심리적인 개안 등.

4)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나 "이것은 기막힌 경험이군." 등과 같은 자아 성찰.

5) 무의식을 덜어 내면서 일어나는 사고들.

 

2. 이 기도 중에 우리의 경험을 분석하거나, 기대를 걸거나, 다음과 같은 목표를 지향하는 것을 피하라.

1) 거룩한 단어를 계속 반복한다.

2) 아무런 사고도 갖지 않는다.

3) 마음을 공백으로 만든다.

4) 평화를 느끼거나 위안을 받는다.

5) 영적인 경험을 성취한다.

 

3. 향심 기도가 아닌 것.

1) 이것은 기술이 아니다.

2) 이것은 정신 이완 훈련이 아니다.

3) 이것은 자기 최면이 아니다.

4) 이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다.

5) 이것은 심령 현상과 같은 것이 아니다.

6) 이것은 하나님 현존의 "느낌"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7) 이것은 논리적 묵상이나, 정감적 기도가 아니다.

 

4. 관상 기도는

1) 하나님과의 관계이면서 동시에 그 관계를 키워 나가는 수련이다.

2)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운동이다.

3) 그리스도와의 대화를 넘어서 그분과의 통공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다.

4) 우리가 하나님의 언어인 침묵에 습관 들이게 한다.

 

결론

향심 기도 중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평화와 감사로 받아라. 그리고 거기에 어떠한 판단도 하지 말라. 비록 당신이 하나님 현존을 감격스레 경험한다 할지라도 이 시간은 그것을 생각하는 시간이 아니다. 어떠한 사고든 오고 가는 대로 내버려 두라. 이 기도에서 떠오르는 사고들을 다루는 기본 원칙은 이것이다. 사고에 저항하지 말 것이며, 거기에 매달리지 말 것이며, 감정을 가지고 사고에 반응하지 말라. 어떤 상상이나, 감정이나, 성찰이나, 경험들이 당신의 주의를 끌면,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얼마나 많은 사고들이 이 기도 중에 있었나.

혹은 얼마나 평화를 즐겼나로 이 기도를 판단하지 말라. 이 기도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은 일상생활에서 당신이 큰 평화와 겸손과 사랑을 갖게 된 것과 같이 장기적으로 맺어지는 기도의 열매이다. 내적 침묵을 맛봄으로써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나, 인종이나, 국가, 종교, 개인적 성격과 같은 표면적 특성 이상의 어떤 것으로 보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되면 다른 모든 실재를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게 된다. 관상 기도로 익은 열매는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생활로 돌아와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서가 아니라, 사고나 기타 모든 것을 넘어서 늘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존재이신 분 - 무한하고, 알 수 없으며, 신성하신 분은 순수한 믿음의 하나님이시다. 이 기도 중에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적 질문, 즉 "당신은 누구이십니까?"라는 질문에 부딪치고,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기다리는 것이다.

 

7. 향심기도가 깊어지는 체험

키딩은 프로이트의 대단한 관찰력은 인정을 하지만, 그와는 아주 다르게 무의식을 이해하고 있다. 용어 사용에서 키딩은 칼 융의 관점에 오히려 더 가깝게, 무의식은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잠재력도 있고, 우리가 완전히 억압해 넣은 정서적 내용들이나 정서적으로 부하된 사건들이 거기에 있다.

아니면,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해서, 무의식을 '심리적'인 것과 '존재론적'인 것의 두 부분으로 구별할 수 있다.

심리적인 부분은 우리의 인간적인 전 역사, 특히 주로 생존해야 한다는 동기로 어렸을 적에 억압해 넣었던 정서적 충격들을 가지고 있다.

존재론적인 무의식에는, 다른 말로 존재의 수준에는, 아직 활성화되지 않고 있는 영적 발달에 대한 모든 인간적인 잠재력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또 자연적인 에너지와 은총의 에너지로 구분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이 두 가지 에너지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다 창조하시고 돌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에너지는 생명의 힘, 역동적 근거, 쿤다리니, 우주적 에너지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이것들을 통하여 모든 존재하는 것이 생겨나고 돌아가는 어떤 창조적인 과정에 우리가 참여한다. 그리스도교의 용어에 따르면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요한 복음의 서두)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에너지는, 만일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잉태에서부터 육체적으로 온전히 성숙할 때까지, 점차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동시에 두뇌와 신경계통을 통하여 정신적이고 영적인 발전의 기초를 이루어 준다.

우리가 영적 여정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 접촉하지 못한 선천적이고 거룩한 에너지와 더불어, 거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현존도 있다. 이 삼위는 교회의 교부들의 용어에 따르면 분리될 수 없는 일치 속에 무한히 서로 다른 세 가지 '위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엄청나고도 무의식적인 거룩한 생명이, 우리의 세례 때에 혹은 영적 여정에 진지하게 투신할 뜻을 표시하면서 세례에 대한 열망을 가질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거나, 자연적인 에너지와 은총의 에너지로 이 거룩한 생명에 참여하며 나눈다. 이러한 인간에게 내재하는 신화(神化 : divinized, 초대 그리스 교부들이 즐겨 사용한 말)의 잠재력을 실재화하고 활성화하는 것이 인간이 해야 할 탐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탐험에 우리가 어느 정도 우선을 두느냐에 따라,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존재적 힘이 우리의 특정한 삶 속에서 얼마나 활성화될 것이냐 하는 정도를 결정짓는다.

우리가 무의식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인간적인 그리고 신적인 성장으로 가는 길이 벽에 부딪치기도 한다. 이것들은 신체적이거나 정서적이거나 영적일 수 있다. 향심기도는, 엄격한 의미에서 관상에 이르게 하면서, 우리의 삶 중에서 인정하지 않았던 문제들을 정면으로 부딪치라고 부드럽지만 끊임없이 우리를 부른다. 때로 우리는 그것이 정말로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다. 때로는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처럼 그 문제들이 무의식적인과정이기 때문에, 그 문제의 어떤 측면을 우리는 아직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벽에 부딪히면,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그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우리를 맡겨 드리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고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현재의 상황하에서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행동할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벽이 무너지기를 기다리면서 기도하는 일이다. 그리고 때로 이것은 오랜 기다림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향심기도를 정규적으로(하루 두 번씩) 하면, 은총에 대항하는 우리의 내적 저항이 끊임없이 줄어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싶어하시는 것을 인정하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려고 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저항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저항은 다른 방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아픔과 같은 육체적인 증세, 진지하게 "네"라고 대답할 수 없다는 감각, 아니면 일반화된 불편한 마음 등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대로 기다리면서 향심기도를 정기적으로 하면, 언젠가는 저항의 둑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성을 갖기 시작하는 연령쯤에 정상적으로 사색적 자아의식(reflective self- consciousness)을 온전하게 갖게 되면서, 우리 안에 계신 신성한 에너지와의 접촉을 완전히 상실한다. 향심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대하여 동의하는 움직임이다. 향심기도를 오래 수련할수록 우리가 언제 깊은 곳으로 가는지를 더욱 잘 모르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잘 안되는군." 하고 생각한다. 언젠가 하나님의 현존에 강하게 사로잡혔던 때가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인간의 기관은 상황에 대하여 놀랄만큼 잘 적응한다. 팔 다리가 없거나 눈이 멀었거나 다른 신체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삶에 매우 적응을 잘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나 깊은 휴식에 아주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알아차리지도 못하곤 한다. 그렇다고 은총이 우리 안에서 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도 초기에 우리는 자주 하나님 안에 잠기곤 했지만 이제 3,4년이 지난 다음에는 마치 기도를 하는 것이 이를 닦는 것과 같이 습관화되어 아침저녁으로 우리가 자동적으로 기도하게 된다. 평정의 기도를 경험하더라도, 처음에 이 체험을 했을 때에 가졌던 인상을 이제는 갖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앉아서 기도하더라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지나가는 사고들을 인식하고 나서는 일어나 일상의사무로 돌아가고, 이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간다.

사실 정화의 과정이 언제나 진행되고 있지만, "나는 지금 휴식하고 있다. 나는 지금 짐을 덜어 내는 중이다. 나는 지금 원시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나는 지금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려고 애쓰고 있다."는 등과 같은 신호판들이 옛날처럼 우리 앞에서 신호를 주고 있지는 않는다. 휴식한다는 감각은 상대적이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깊이 잠입했다는 것을 다른 신호를 통하여 짐작해야 한다. 이러한 것 중에 하나는 시간의 흐름이다. 앉아 기도를 하면 사고들이 계속 지나간다. 우리가 이전에 녹음되어 있는 모든 비평들을 무시하는 것을 아직은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은 기도가 잘 되지 않는군." 하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기도시간이 다 되어서 기도시간의 끝을 알리는 비퍼 소리가 들릴 때에 금방 기도를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거나 시간이 매우 짧았던 것처럼 보이면 분명히 깊은 곳에 가 있었던 것이다. 시간은 동작을, 특히 특정한 물체가 지나가는 것을 재는 단위이다. 사고가 많았을 때에는 기도가 긴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많은 사고들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시간이 짧은 것처럼 보이면, 우리가 단단히 향심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복음의 위대한 가르침을 기억해 보자. 하나님의 왕국은 커다란 경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상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은총의 씨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끼여드시지만 우리가 알아차리도록 하지는 않으신다. 우리의 기도가 실제로 깊어질수록, 그것은 더욱 습관적으로 우리의 정상적인 인식의 밖으로 떠나간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경험의 해석은 우리의 문화적 배경과 기질과 개인적 역사에 의해 조건화된 것이다.

은총의 경험이 더욱 섬세해지고 영적으로 되면 우리는 그것을 덜 알아보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위안이라든지, 내적인 감미로움이라든지, 아니면 사랑의 물결과 같은 형태로 오는 영적인 경험에 저항해야 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각각 다른 시기에 우리의 다른 의식 수준에게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우리가 의식의 사다리를 올라가서 이성의 수준 너머 직관의 수준으로 가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아이디어는 확장되고, 다른 수준에서 하시던 의사소통을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하시지 않으신다.

많은 관상 기도자들이 논리적 묵상이나 어떤 특정한 소망을 아뢸 수 없게 됨을 경험한다. 그것들은 그저 마비되었다. 그들은 기도하지 않는 시간에는 이와 같은 정신적인 일들을 잘할 수 있지만, 그들이 기도를 하려고 하자마자, 그들은 무기력한 상태로 들어가고 만다. 성령께서 그들의 기도를 떠맡으셨다고 해서 그들의 성찰에 대해 성령께서 관심을 덜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성찰과 같은 정신활동들은 사실상 기도의 예비에 불과할 뿐이다. 만일 성령께서 뛰어난 생각들을 원하신다면, 천사를 불러 시킬 수도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천재를 원하셨다면 하나님은 천재들을 더 많이 창조하셨을 것이다. 유다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기도 중에 깊은 휴식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원천은 주파수가 매우 높아서 휴식이나 위안과 같은 것으로 더 이상 전달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단순히 신비한 이끌림이나 하나님에 대한 배고픔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관상기도에서 진전되고 있다는 확실한 표시의 하나이다. 평상적인 인식의 강에 눈에 뜨이는 보트가 지나가면서 우리의 무의식에 뿌리박고 있는 정서 프로그램 중의 하나를 건드렸기 때문에 우리의 동의가 약간 흐릿해질 때면, 언제나 성령은 우리의 동의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움직이신다.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과 그에 따라 고통스럽게 만드는 욕망들을 가진 거짓 자아가 완전히 비워질 때까지는, 지나가는 사고들은 계속해서 마음을 끌거나 혐오감을 자아낼 것이다. 그 이유는 아직도 무의식 안에 자극받을 그 무엇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 안에 자극받을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에 내적 자유는 완성되고 평화는 습관적으로 찾아온다.

처음 몇 년 동안에 경험했던 휴식에 대한 영적인 감각은 늘 휴식하고 있는 상태로 순수해지기 시작한다. 이 휴식의 영주 상태는 '평화'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으로서 감각되지 않는, 즉 감각으로는 지각되지 않는 그러한 평화를 말한다. 그것은 기쁨과 슬픔을 넘어선 것인데 하나님의 현존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항구한 사랑 속에 안전하게 머문다. 그렇지만 아직도 완전히 부숴지지 않은 거짓 자아가 남아 있어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정서 프로그램의 하나에서 오는 욕망을 일깨워 주는 자극에 우리가 아직도 민감하다면 우리의 평화는 아직 어떤 주의를 요한다고 보아야 한다.

휴식은 평화로 이끈다. 평화란 특별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어떤 무엇에 대해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저 평화로운 것이다. 시편 작가는 이러한 경험에 대하여 아주 잘 표현을 하고 있다. "차라리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 품에 안겨 있는 어린이인 듯 내 영혼은 젖 떨어진 아기와 같나이다."(시편 130)

엄마의 우유를 먹으려고 안달하기를 마침내 끝내고 우유 때문에 보채는 일 없이 엄마가 그저 엄마이기를 받아들인 아기의 모습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이 진전인가, 아닌가?

우리가 감정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 기도의 심리적인 내용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 내용에 대해 만족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하나님 안에 쉴 수 있다면 시간은 빨리 지나간다. 가끔 우리가 어떤 무의식적인 내용에 부딪히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극적인 것은 되지 않는다. 어릴 적에 가졌던 원시적인 정서들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여러 번 정신적 역겨움을 경험하고 난 뒤에는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두려움을 가지지 않는다. 경험이 새롭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처음 대할 때에는 충격적인 것으로 보인다. 일생 쌓여 온 정서적인 내용들을 아직 계속해서 덜어 내지만, 무의식의 짐을 내려놓는 것이 이제는 상대적으로 잘 보이지 않는 경향이 있고, 그러한 일들이 일상적인 기도 중에 일어난다.

이 기간은 한 수준의 무의식 혹은 한 수준의 믿음에서 다음 수준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영적 여정의 봄기간 후에, 특히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이 하나님의 활동으로 뿌리 뽑히는 감각의 밤이 거듭될 때에, 이성과 감각으로 가졌던 믿음은 사라진다. 우리 자신의 활동으로 우리가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점차로 하나님의 활동에 -특히 위안이라는 모유에서 이유(離乳)하는 동안에- 우리 자신을 맡겨 드리고, 느껴지는 위안 대신에 순수한 믿음의 수준에서 하나님의 현존이 주는 안정된 감각을 받아들이면서, 치유는 우리에게 일어난다. 순수한 믿음은 어떠한 종류의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특히 '영적인 정크'라고 할 수 있는 감각적 위안을 바라지 않는다. 영적인 여정의 단단한 음식은 순수한 믿음이다. 이것은 '생명으로 이르는 좁은 길'이며 어떤 특별한 심리적인 느낌이나 경험 없이 그저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림으로써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향성이 어두움에 떠오르는 별과 같다. 그것이 관상기도의 '초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봉사하고, 하나님께 귀를 귀울이고,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께 맡겨 드린다는 우리의 지향이 순수하게 남아 있는 한, 어떠한 종류의 사고를 하더라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것들은 우리 기도의 순수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意志)가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치료에 자신을 맡겨 드리고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지향이 확고하면, 신성한 치료는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영적 여정이 잘 진전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지향에 거짓 자아가 끼여들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거짓 자아는 착각을 주는 데에 도사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에게 굴복시키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영적인 자만에 아주 미묘하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영적 자만에 대한 마지막 정화가 전통적으로 영의 어둔 밤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무의식에 있는 거짓 자아의 잔재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한, 그리고 결과적으로 변형적 일치를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마지막 정화가 진행될 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지향성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면서, 섬세하게 일어나는 집착들을 알아차리자마자 그것을 인정하고 끊어 버린다. 우리가 그 거짓 자아를 전례로 가져오고 성사를 받을 때에 가져올 수는 있지만, 그 거짓 자아를 관상기도에 언제까지나 가져올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관상기도의 성질이 그 거짓 자아를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의사소통하시는 주파수가 높을수록, 신적 전달은 더욱 잘된다. 가장 높은 수준을 해석할 만한 인간의 기능은 없다. 믿음만으로 그것과 접촉할 수 있다. 어떻게? 우리의 동의로서. 이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 처음에는 이처럼 극히 단순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현존하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현존을 놓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문제이다. 모든 영적인 훈련은 하나님께서 부재(不在)하시다는 극적인 착각을 줄이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지(부재하시지) 않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대로 우리가 실제로 행동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재하신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 혼동을 용해시키기 위해 어떠한 일을 하기만 해도 우리의 영적 여정은 앞으로 나간다.

무의식을 덜어 냄은 보통 정서적으로 부하된 사고의 형태를 취한다. 우리의 기도가 자리 잡고 나면, 덜어 내는 과정은 어둔 밤이 극렬하게 진행되는 때와 같이 어떤 정화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눈에 덜 뜨이게 된다. 다음그림에서 보듯이 사고와 휴식은 같은 원형과정에 있는 다른 두 개의 순간이다. 사고에 저항하거나

                 

그것들을 자신의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것으로 간주하면, 우리는 덜어 내는 과정에도 저항하는 것이며, 우리의 치유를 지연시킨다. 우리가 저항하지 않으면 그 과정은 계속된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수련은 그저 수련하는 것이다.

물론 향심기도가 우리에게 좋은지를 알 권리가 우리에게는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좋은지를 아는 좋은 방법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나타나는 영향을 보는 것뿐이다. 그러면 그것은 어떠한 영향을 말하는 것인가? 우리 인간에게는 성공을 어떤 큰 것으로 간주하는 속성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가치체계는 아니다. 거룩한 단어로 계속 다시 돌아감으로써 우리는 점차로 거짓 자아의 껍질들을 사라지게 하며 마침내는 그것들이 없어져 버린다. 그러고 나면 우리의 지향은 더 이상 도전을 받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네" 라고 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점점 더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의 동기로 행동하게 되는데, 이것은 어렸을 적에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만든 자기중심적 우주나 자신이 만든 자아에서 동기를 얻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수련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여기 다른 현상 하나를 지적해야겠다. 여기서 '경험이 있는' 이란 말은 그것을 몇 년간 하루에 두 번씩 수련해 온 사람들을 말한다. 당신이 기도를 시작하여 휴식이나 평화로 옮겨가고 있다고 치자. 초심자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어떤 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면 거룩한 단어로 아주 부드럽게 돌아가라."

후에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어떤 사고에 이끌리고 있음을 알아차릴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초심자는 이 두 가지의 차이를 분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거룩한 단어는 지향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우리 존재의 영적인 수준을 향해 가고자 하는 의지의 움직임이다. 우리가 평화에 도달하면 이중의 인식 수준이 나타난다. 25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나, 내일 일어날 일들, 아니면 다음 여름휴가에 대한 계획 등과 같은 사고들이 지나간다고 치자.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흥미를 갖고 있지 않음도 안다. 이럴 때에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야 하는가' 라고 생각한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야 하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우리가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거룩한 단어가 우리를 가도록 촉진하고 있는 그곳에 이미 와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단어는 그 이상의 일을 할 수 없다. 우리가 평화의 장소에 와 있으면, 우리는 더 이상 방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방법은 바로 깊은 평화에 머물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향심기도 중에 때로 우리는 두 가지 의식의 수준을 동시에 경험한다. 하나는 우리가 흥미를 느끼지 않는 사고와 감정의 인식,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섬세한 현존의 인식이다. 이러한 경우에 많은 사고가 지나가더라도 우리는 거기에 주의를 주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음이나 슈퍼마켓에서 들려주는 음악과 같다.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고 그대로 참아 낸다. 만일 우리가 그 소음을 없애기 위하여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려고 애쓴다면, 우리의 평화를 불필요하게 깨뜨리고 만다. 어떤 마음을 끄는 사고가 우리를 일상적인 인식의 수준(강의 표면)으로 끌어 올린다고 알아차렸을 때에만 우리가 거룩한 단어로 돌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아주 순수해진 곳에 있기 때문에 거룩한 단어를 분명하게 떠올릴 필요도 없다. 우리는 단지 그것이 없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그저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그 정도의 일이 아마도 내적 평화로 향하는 움직임을 다시 찾는 데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섬세하더라도 우리의 지향의 순수성이 도전을 받을 때에는 그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아주 덜어 냄을 심하게 하는 기간에 무의식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치 지하의 화산이 폭발하거나 지진이 일어나는 것과 흡사하다. 아니면 밀려오는 파도처럼 사고와 지각과 정서들이 거룩한 단어를 파묻어 버리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우리가 거룩한 단어를 찾을 수 없거나 찾는다 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에는 일어나는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거룩한 단어의 구실을 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식 안에 원시적인 정서나 괴롭히는 사고들이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과 함께하고 싶다는 우리의 지향을 나타내는 상징이 될 수도 있다. 그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그때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소나기였던 것이다. 비록 폭풍우 속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그것이 지나간 것으로 만족하고 거룩한 단어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평화란 우리가 모든 것, 즉 하나님, 자신, 다른 사람 그리고 우주에 대하여 갖는 올바른 관계이다. 이것은 평형을 유지하는 행동이다. 그 경험이 아주 섬세하여 우리는 그것을 경험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분명히 경험이지만, 우리가 그 이상의 것을 바란다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복음의 비유에서 겨자씨와 같다. 그것이 아주 작기는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나중에 큰 나무로 자란다. 우리의 시야를 일상적인 삶의 흐름 안에 유지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거기가 하나님의 왕국이 진정으로 있는 곳이다. 평상적인 삶의 흐름 밖으로 나온 것을 알아차리면 즉시 이것이 과연 하나님 왕국인가를 의심해야 한다. 키딩은 무의식을 덜어 내는 것에 대하여 걱정하는 것보다는 환시라든가 음성을 듣는 것과 같은 커다란 경험들을 더 우려한다. 이것들은 다루기가 더 어렵다. 이러한 것들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온 의사소통이 아니라고 믿기도 어렵기는 하지만, 사실상, 이러한 의사소통에 대하여 우리가 그렇게 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에 따르면 하나님을 가장 안전하게, 확실하게 그리고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순수한 믿음이다. 그의 표현으로는 이것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첩경'이다. 이 가르침은 훌륭하며 아주 순수하다. 그렇지만 보상적인 만족에 대한 욕망을 가질 희망을 배제하지도 않았다. 보상적 욕망은 하나님과의 일치가 오는 것을 늦추게 한다. 보상에 대한 욕망은 영적인 여정의 관점에서 볼 때에, 영적인 군것질이나 정크 음식을 찾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이 따위의 모든 것들을 정화하셔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진정한 음식이며, 그것이 우리를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 히브리의 저자들은 인간의 기본요소로서 육체와 영혼과 영을 구분했다. 신체적인 육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인 육신을 말한다. 영혼은 자체의 특수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 표현 중의 하나가 우리의 정서로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경험한다. 그 예로서,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동정을 느끼거나 즉각 친밀감을 느낀다. 그 사람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삶이나 욕망 같은 것들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이 그 사람과 반향을 일으켜서, 그와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안다. 혹은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당신이 하신 일이 나를 깊이 감동(touch)시켰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실제로 그 사람을 만지거나(touch) 하지 않았지만 거기에는 정서적인 상호작용이 있었던 것이다.

'영'은 아마도 우리의 영적인 에너지를 말하는 것일 터인데,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존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신다는 것에 대하여 단순히 다르게 묘사한 방법이다. 심리적인 인식의 표면적인 수준 아래에는 더 깊은 영적인 수준이 있어서, 거기에서 사고와 감정의 일상적인 기능들보다 더 깊은 수준으로 하나님과 친밀하게 조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수준이 향심기도로 지향(志向)하고자 하는 수준이다. 우리 존재의 핵심 안에서는 하나님의 내재하심에 대한 인식이 더 친밀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영적인 에너지가 활성화되고(하나님의 현존에 대하여 우리가 더욱 민감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그것들의 온전한 잠재력에 실제로 접촉하게 될 때에는 우리는 낮은 수준에서 그것들을 덜 지각한다. 그리고 감각적 위안과 성찰은 관심 밖으로 떨어져 나간다. 그것들이 아직 존재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이상 거기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육신과 영혼과 영의 세 수준에서 우리를 양육하시는 것 같다. 개인적인 발전이 진전되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더욱 확장되고 심오해진다. 성령은 우리 자신 안에 경험하고 있는 모든 질병을 재정비하셔서 우리 존재의 각 수준에 알맞게 우리의 거룩한 에너지를 표현할 수 있게 하신다.

양자 역학에 따르면 여러 가지 수준의 물질 에너지들은 동시에 같은 물리적 공간을 공유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하게, 신적인 에너지는 우리 안에서, 우리가 전혀 지각하지 못하는 여러 수준에서 일하실 수 있다. 그것은 이 에너지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든가 존재하더라도 현존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은총의 수준에서는, 우리가 성장하는 데에는 디딤돌이 되어 주기 때문에 좋았지만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이 온전하게 나타나는 데는 적절하지 못한, 집착이나 지나친 의존들에게서 믿음이 정화된다. 영적인 여정은 이렇게 하여 우리의 즉각적인 인식에서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 신적인 에너지는 우리의 기능들이 그 에너지를 가장 지각하지 못하는 때에 가장 힘을 발휘하신다. 우리가 향심기도를 하려고 앉아서 우리의 지향을 정하고 나면, 하나님의 현존이 이미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그 현존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이란 그저 동의하는 것이다. 신성한 에너지는 우리 안으로 우리를 통하여 흐른다. 가장 순수한 형태 안에서는 그것이 최대의 힘으로 24시간 열려 있다. 동의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그대로에게 우리를 열어 드린다.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역사나, 문화적 조건화나, 성격상의 편견으로 그것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또 해석하는 매체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현존에 동의한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의 조건하에서 자신을 전달하신다. 그것은 우리의 동의이다. 환시나 위안이나 체험이나 심리적인 성취 등은 모두 어느 정도 가치를 가지고 있겠지만, 순수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전부라는 최대의 가치를 우리에게 가리키(指)는 극히 제한된 가치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믿음이 일단 확신으로 형성되고 나면, 내가 누구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누구이신가에 대한 관점에 변화를 준다. 이것은 신학적 덕과 성령 칠은을 통하여 적절히 작용해서, 일상생활의 현실과 일과들에 올바르게 반응할 수 있게 하고, 평범한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들 안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알아볼 수 있게 만든다.

여기에 에너지가 아직 더 남아 있는데 그것은 다음 삶을 위해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신학자들이 Beatific Vsion(천국에서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본다는 신학적 용어 : 역자 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신체적 육신의 한계에서 자유를 얻을 것이 요구된다. 이 에너지는 아주 강력해서 만일 일상생활의 사건들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여들어서 이 신적인 에너지와 우리가 계속해서 접촉하는 것을 분산시켜 주지 않고 그 에너지에 우리가 그대로 노출되었더라면 우리의 존재는 아마도 그 강한 힘 때문에 순식간에 승화되어 흔적만 남고 사라졌을 것이다. 이 에너지가 성운(星雲)을 형성하는 에너지이다. 우리는 이 에너지를 한 번에 조금씩만 받을 수 있을 뿐이다. 하늘나라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을 말하자면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는데, 그러고 나서야 우리의 육신은 영광을 받고 이 에너지를 다룰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