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3 관상기도에 관한 질문과 답

 

질문과 답은 관상기도 수련을 하는 동안 다가오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알아 볼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에 수록된 내용에서 100% 발췌한 것입니다. 그 이상 가감(加減) 없이 그대로 수용한 것입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1. 거룩한 독서와 관상 기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거룩한 독서는 성서 구절을 읽기 시작하여서 하나님과 친교를 이루는 관상적 방법의 하나다. 성서 내용을 묵상하면 자발적 기도(읽은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말씀드림, 즉 응답)로, 그리고는 마침내 하나님 현존 안에서의 쉼으로 쉽게 옮겨간다. 향심 기도는 거룩한 독서의 세 단계에서 마지막 단계인 하나님 안에서 쉼으로 옮아가는 하나의 방법이다.

 

2. 십자가의 성 요한과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논리적 묵상을 하다가 하나님께서 그 수련 능력을 거두실 때 이외에는 그 묵상을 중단하지 말라고 가르치는데 향심 기도는 그 전통과 어떻게 적합하도록 하겠는가?

기본적인 믿음에 대해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하여 신앙의 진리를 어느 정도 묵상하는 것, 즉 논리적 묵상은 관상에 필요한 기초이다. 관상 기도를 너무 빨리 도입하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에 대한 나의 답은 이렇다. 데카르트-뉴턴적 세계관에서부터 발전되어 온 정신 자세로 인해 모든 사물을 분석하려고만 하는 고정 관념이 생겨서, 인간의 직관적 능력을 억압하려 하였기 때문에 서방 세계에서의 우리의 관상은 논리적 묵상에 대하여 문제를 안고 있다. 서구 사회는 묵상에서 자발적 기도(응답)로, 그리고 자발적 기도에서 내적 침묵(경이와 감탄)으로 자발적으로 넘어가는 것을 방해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연결하여 기도하면서도 거룩한 독서의 전통 안에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독자가 거룩한 독서를 이미 하고 있다면, 당신은 어떤 특별한 순서나 시간표를 따를 필요는 없다. 당신은 그저 은총의 영감에 따라서 성서 내용을 이리저리 생각하며 단지 어떤 의지의 행위만 하거나 아무 때고 관상 기도로 들어갈 수 있다. 물론 논리적 묵상이나 정감적 기도가 처음에는 우세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적 침묵의 순간도 나타난다. 만일 성서를 묵상하고 그 말씀에 자신을 맡기며 그리고는 향심 기도의 시간을 갖도록 사람들을 권장한다면 그것은 바로 거룩한 독서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다.

 

3. 거룩한 독서에서 관상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결점을 보상할 수는 없는가요?

현대 사람들이 거룩한 독서에서 관상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결점을 향심 기도가 일종의 보상을 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현대 문제에 대한 성찰이며 동시에 관상기도에 관한 전통적인 크리스찬의 가르침을 재생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단지 재생하기 위한 이론적인 노력 이상의 것이 여기에 요구된다. 현존하는 지적 편견을 넘어가기 위하여서는 사람들이 실제로 경험하도록 하는 어떤 방법들이 절대 중요하다. 이미 관상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이 편견을 발견하면서, 나는 그 편견이 우리 문화 속에 생각보다 뿌리 깊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동양으로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을 보면 서양에서는 이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서양에서는 영적 배고픔이 만족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동양에 찾아갔던 사람들이 크리스찬 종교 안에도 관상 기도의 전통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에 위안을 받는 것을 본다. 관상 기도로 들어가는 준비로 향심 기도를 한다는 것은 오늘날에 누가 새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오히려 향심 기도는 관상 기도의 전통적 가르침을 다시 획득하는 방법이며 이 가르침을 더욱 알리고 더욱 쉽게 접하도록 만드는 방법이다. 다른 점이라면 그것을 방법적으로 알려주려고 노력한다는 것뿐이다. 누구나 그 안에 들어가고 유지하는 길을 따르며 그 안에서 성장하려면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이미 관상 기도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지속적이고도 질서 있는 양식(樣式)을 따름으로써 더욱 내적 침묵을 계발해 갈 수 있다. 향심기도의 방법은 바로 이 내적 침묵의 계발이라는 안목에서 제공하는 것이다.

 

4. 나는 이러한 훈련으로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그래도 나의 정신 기능들을 비우도록 노력해야 하는가?

그러려고 일부러 노력하지 않는 것이 좋다. 기도 중에는 언제나 가벼운 영적 활동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러한 활동들은 거룩한 단어를 생각하거나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단순한 인식 등이다. 공백을 경험한다. 함은 아주 섬세한 방법으로 자신의 의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당신의 의향이 작용하지 않는 한 그 공백의 경험은 유지되지 않는다. 이것은 아주 단순하기 때문에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방법의 기도는 배우는 데 시간이 걸리고 또 때때로 기도 중에 공백감이라고 해석되는 것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이 기도는 하나님 안에서 쉬는 방법이다. 만일 당신이 공백을 알아차렸다면 이것 또한 사고이기 때문에 단순히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5. 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하나?

만일 졸고 있다면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부모의 팔에 안긴 아이는 때로 잠드는데 부모는 아이가 그 팔에서 평온하게 잠들고 있으면서 가끔 눈을 뜨기만 한다면 이로 인해 마음 쓰지 않는 법이다.

 

6. 나는 시간이 그렇게 빨리 갔는지 놀랐다. 그게 20분이었나?

그렇다. 시간이 빨리 갔다는 것은 당신이 그 사이에 사고가 별로 없었다는 표시다. 그것이 반드시 좋은 기도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의 기도 시간에 가졌던 심리적 경험을 기준으로 기도를 판단하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 때로는 당신이 기도 중에 내내 너무나 많은 생각들로 시달렸다 하더라도 그 기도 시간이 아주 이익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의 의향이 보기보다 더 깊었을 수도 있다. 어떠한 경우도, 한 기도 시간 중에 일어났던 일로 기도가 어떠하였는가 하는 판단을 올바르게 내릴 수는 없다. 그 대신 한두 달 지난 다음 당신의 일상생활에 어떠한 열매를 가져왔는가를 보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인내를 갖게 되었다든가 자기 스스로에게 더 마음이 편해졌다든가, 아이들에게 화를 덜 냈다든가 내가 하는 일에 식구들이 불평을 덜 한다든가 한다면 이것들이 당신 안에서 달라진 가치관들이 작용하고 있다고 하는 표시들이다.

향심 기도 중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면 시간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우리의 시간에 대한감각이 상대적임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기도가 항상 짧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어떤 때는 너무 긴 것처럼 보인다. 기도의 성장 과정에서 우리는 평온함과 사고와의 투쟁 양극을 왔다갔다하게된다. 직관적 기능이 점차 세련되면서 점점 안정된 모습으로 깊은 수준에 지향을 두게 되는 것이다.

 

7. 만일 졸리거나 몹시 피곤해지면 사고들이 줄어드는가?

만일 당신이 꿈을 꾸지 않는 한 일반적으로 그렇다고 본다. 수도원에서 새벽 3시에 일어나면 때로 정신이 몽롱할 수가 있다. 이렇게 새벽에 피곤하여 생각할 수가 없게 되는 바로 이 시간을 이용하는 것이 우리가 쓰는 좀 특수한 방법의 일부인 것 같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한 다음에도 새벽과 마찬가지의 경험을 할 것이다. 이럴 때 당신이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알맞을 정도로 깨어 있으면서도 나른한 기분을 즐기려 들지만 않는다면 이것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잠이 들게 되더라도 나쁘게 여기지 말라. 당신은 아마 조금 더 휴식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당신이 가장 정신이 맑다고 생각하는 시간을 선택하도록 하여 기도 시간에 머리를 끄덕이며 졸기보다는 좀 더 향심 기도의 온전한 경험을 갖도록 노력하라. 만일 잠이 든다면 그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몇 분간이라도 향심 기도에 들어감으로써 그 날의 기도를 망쳤다는 기분이 들지 않도록 하라. 이러한 기도를 하는 데 필요한 활동은 아주 단순해서, 깨어 있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잠들기 쉬운 것이다. 거룩한 단어를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활동이다. 예수께서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향심기도 중에 하는 것이다. 깨어 있음이 인식이 살아있기에 충분한 활동이다. 기도란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를 열어 드리는 것이다.

향심 기도란 주의(注意, attention)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지향(志向, intention)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구별을 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떤 사고 내용에 대해 주의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계시리라고 믿는 당신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갈 지향을 갖는다. 당신은 관념이나 느낌으로가 아니라 순수한 믿음으로 스스로를 하나님께 열어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문을 아주 부드럽게 노크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힘을 다해 문을 두드리면서 "법에 따라 이 문을 여시오 나를 들여놓도록 요구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이 문을 열도록 강요할 수 없다. 이 문은 상대 쪽에서 열리는 것이다. 당신이 거룩한 단어로 말하는 것은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무제한 기다림의 게임이다. 긴급하게 일어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은 아무런 일이 없었던 양 거룩한 단어로 부드럽게 돌아가야 한다. 어떠한 영상이나 들려오는 음성이 있다 하더라도 거룩한 단어로 돌아와야 한다. 이것이 이 방법의 기본이다.

 

8. 나는 기다림의 기분으로 있었다. 그 때에 나는 무엇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기도는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노력하지 않도록 하는 훈련, 떠나 버리는 훈련이다. 노력한다 함도 하나의 사고이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쉽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혹은 "당신의 의식 안에 거룩한 단어를 살짝 얹어 놓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애쓴다 함은 무엇인가 얻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 지향적인 상태를 말하는데 반면에 향심기도는 당신을 현재로 이끌기 위해 마련한 방법이다. 기대함이란 미래 지향적이며 그러므로 이것 또한 일종의 사고이다.

우리의 일상적 사고로부터 우리의 정신을 비우는 일은 우리가 단지 시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마치 욕조 안의 마개를 우리가 빼는 것과 같다. 물은 저절로 빠져 나가며 우리가 물을 욕조 밖으로 밀어낼 필요는 없다. 그저 흘러 나가게 내버려 둔다. 이 기도에서 당신은 이와 비슷한 일을 하는 것이다. 당신의 일상의 사고들이 당신으로부터 빠져 나가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기대하지 않으면서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활동이다.

 

9. 느낌은 어떤가? 그것도 떠나 보내야 하는가?

그렇다. 이 기도의 관점으로 보면 그것도 사고이다. 어떠한 종류이건 감지(感知)하는 것은 다 사고로 간주한다. 생각을 별로 하지 않으면서 하는 사색 행위도 사고로 간주한다. 향심 기도는 모든 지각을 지나가게 하는 훈련인데 그 지각한 내용을 밀어내거나 언짢게 여기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떠나 보냄으로써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점차 당신은 평화롭고 조용하며, 잠겨 드는 것과 같은 영적인 주의성을 발전해 나가게 된다.

 

10. 더 깊은 주의는 사고를 덜 하는 데서 오는 것인가?

그렇다. 당신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갈 수 있는 가장 깊은 곳에 이른 것이다. 그 순간에는 시간에 대한 아무런 감각도 없다. 시간이란 사물이 진행되는 데서 측정되는 것이다. 아무런 진행이 없을 때 무시간성(無時間性)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즐거운 경험이다.

 

11. 외부로부터 오는 잡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신이 어쩌지 못하는 외부 잡음에 대하여 최선의 길은 그 잡음에 대한 저항하는 마음을 떠나보내고 그 잡음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는 일이다. 외부적인 것은 기도에서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렸다. 당신이 어떠한 통제도 할 수 없는 그 외부적 주의 혼란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당신은 지구상의 어떠한 잡음 속에서도 이러한 깊은 주의성을 갖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외부로부터 오는 곤란에 대하여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라. 부정적 태도를 가짐으로 해서 얻어지는 것이라고는 당신이 매일의 기도 시간을 헛되이 지나쳐 버리는 것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절대로 허락될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이 기도 시간 동안 잡음으로 해서 진통을 겪고 기도가 실패하였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

 

12.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도 관상할 수 있는가?

그렇다. 이 말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돌아다니기만 해도 관상적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관상적이 되기 위하여서 필요한 자질은 당신이 인간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좀더 관상적으로 되는 자질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만일 당신이 이 방법(향심 기도)에 충실하기만 하면 이 방법은 누구라도 잘할 수 있다.

 

13. 같이 여행을 하는 동료에게 "나는 지금 묵상을 하려고 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이다. 그들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몇 분 동안의 조용한 시간을 갖는 것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14. 나는 사고들이 지나가도록 노력하는 것을 의식한다. 나는 그 때에 하나님에 대한 나의 이미지로 노력하는데 이것들은 영상으로 나타난다. 그것 또한 버려야 할 사고의 일종인가?

이 기도의 관점에서는 어떠한 영상도 사고로 간주한다. 상상이나 기억이나 추리 등이나 어떠한 감각에서 일어나는 지각(知覺) 행위는 모두 사고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지각이 일어나도 떠나 버려라. 의식의 흐름에 떠오르는 어떠한 것도 심지어 자신에 관한 생각까지도 결국은 지나가 버린다. 문제는 모든 사고들이 지나가 버리도록 허용할 수 있는가에 있다. 흐르는 강의 표면에 떠서 흐르는 것들에 주의를 주지 말고 그 강 자체에 주의를 주라.

 

15. 나는 지금까지 영상에 의존하여 하나님께 주의를 드렸다. 만일 영상을 지워 버리면 어떻게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알 수 없다. 이제는 내가 단순히 반복하는 단어에 주의를 주어야 하는가?

당신의 주의는 어떤 특정한 사고를 지향해서는 안 된다. 거룩한 단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거룩한 단어는 단지 당신의 참 자아와 그 자아의 중심에 계시는 하나님께 당신을 열어 드린다는 당신의 지향을 재구성하는 방법에 불과하다. 당신은 그 거룩한 단어를 계속해서 반복할 필요는 없다. 내적 침묵이야말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경험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다. 당신은 무엇이든지 억지로 해서는 안 된다. 억지로 하고자 하면 당신은 또 다른 사고를 끌어들이는 것이 된다. 그리고 어떠한 사고든지 사고는 당신이 가고자 하는 그곳으로 가는 길을 쉽게 막아 버린다.

어떤 사람들은 단어보다는 시각적 영상을 사용하여 더 쉽게 초월한다. 당신이 영상을 더 선호한다면 일반적인 것, 즉 너무 세밀하지 않은 것으로 선택하라. 예를 들면 당신이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마치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듯 하라.

16. 당신이 말을 하고 있는데 내가 마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기 직전서 버린 영상을 갖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침묵에 잠길 때 마치 낭떠러지 끝에 선 느낌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 떨어질 위험은 없다. 상상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상상은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다. 상상을 많이 한사람들, 그것에 깊이 빠진 사람들이 습관적 사고방식을 벗어 버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 기도를 계속하다 보면 편안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17. 어떻게 거룩한 단어가 작용하는가?

거룩한 단어는 당신이 깊은 내면의 수준에서 생각하는 단순한 사고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어떠한 형태이든 받아들이는 것이다. 입술로 외우는 단어는 외적인 것이므로 이러한 기도와 상관이 없다. 상상 속의 사고는 내적인 것이며, 당신 의지의 충동을 나타내는 단어는 더욱 내적이다. 단어의 단계를 넘어서 순수한 인식으로 들어갔을 때에만 내면화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의 발꿈치에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는 그에게 말씀하시는 분에게서 듣는 말씀들을 넘어가서 그분과의 일치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향심기도를 하려고 앉아서 거룩한 단어를 내면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룩한 단어를 넘어서 그 단어가 지향하는 분, 즉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어떠한 관념도 넘어서, 절대 신비이신 하나님의 현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께 가고자 하는 열망 우리 안에 그분이 현존하시도록 우리를 그분께 열어 드리고자 하는 열망은 우리의 주관(主管)에 달려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기 위하여 어디로 갈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그분께 우리가 일치하도록 여러 가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으로 그분이 우리를 당신께 끌어당기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안에 이미 진행되고 있는 어떤 행위에 자신을 여는가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현존에 동의하는 것 자체가 바로 그분의 현존이다. 거룩한 단어는 우리의 심적 인식의 수준을 넘어서 우리 존재의 원천,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계시는 삼위일체이신 분을 지향하는 것이다.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하나님은 하나의 사진이나 동상처럼 생명이 없이 계시지 않고 살아 활동하시며 계신다. 이 기도의 목적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중심에서 끊임없이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활동과 접촉을 이루려는 데 있다.

만일 당신이 이 기도를 여러 달동안 수련한다면 이 기도가 당신에게 맞는 기도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이 기도를 수련함으로써 얻는 경험을 대치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새로운 친구를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만일 당신이 새 친구를 정규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누면 빠르게 서로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하루에 두 번, 아침 일찍 한 번 그리고 저녁 식사 전에 한 번 할 것을 권하는 것이다. 그 "대화'가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면 당신은 확실히 평화와 새로워짐을 경험할 것이다. 때로 그 대화는 야구 경기에 흥미가 없으면서 야구 스코어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과도 같다. 당신이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 흥미를 가지면 그 사람이 흥미로워하는 것에도 흥미를 갖는 것처럼 그 대화에 인내를 갖게 된다. 만일 당신의 장기적 목표를 하나님과의 우정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에 둔다면 별재미 없게 느끼는 기도의 시간도 당신을 부담스럽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주 근본적인 원칙은 매일 기도를 하는 것이다.

 

18. 만일 전 기도 시간 동안 사고의 물결이 끊임없이 몰려오면 어떻게 하나?

침묵하기 시작할 때에 당신은 당신의 안과 밖에서 몰려오는 사고들로 머리가 꽉 찬 것을 인식할지도 모른다. 상상은 영구히 작동하는 인간의 기능이기 때문에 언제나 상상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의 기억과 상상 수준에서는 사고가 계속 일어날 것을 기대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무도 즉각적으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평화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당신은 당신의 있는 그대로를 그리고 하나님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서, 하나님께서 늘 편안하지는 않더라도 가장 좋은 길로 당신을 인도하시리라는 것을 신뢰하여야 한다.

바라지 않는 사고가 떠올라도 마음 쓰지 말고 그대로 떠나버려라. 만일 기도 중에 많은 사고가 떠오를 것이라고 이미 기대하면 사고가 떠오르더라도 마음이 덜 상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향심기도의 목표가 모든 사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느낀다면 당신은 계속해서 실망할 것이다. 실망을 느낄 때 그것은 감정이 뒤섞인 또 하나의 사고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즐기던 내적 고요를 산산히 부수고 말 것이다.

 

19. 거룩한 단어를 항상 떠올려야 하는가?

사고들이 지나가 버리면 거룩한 단어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초기에는 그것을 당신의 잠재의식으로 이끌어 들이고 그리하여 당신의 기도시간 동안에 필요할 때마다 다시 불러들이기 위하여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기본 법칙은 강 위에 떠가는 모든 사고들을 떠내려 보내는 것이다. 그것들이 떠내려가는 한은 당신은 그것들에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당신이 떠가는 배 위에 무엇이 있는가 하고 보고 싶어질 때에는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그러나 노력을 들이지 않고 아주 부드럽게 하라.

당신이 만일 누구와 말다툼을 했거나,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기도하려면 다소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성서를 읽거나, 거리를 한 바퀴 걷거나 뛰는 것, 혹은 요가를 하면 당신의 감정적 소요를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침 일찍 기도하는 이유는 그 시간에는 아직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전이기 때문이다.

 

20. 어느 기도 시간 중에 거룩한 단어는 아주 없어지는가 아니면 때때로 없어지는가?

가장 깊은 수준에서 하는 거룩한 단어는 내적 평화의 경험이다. 그 때에는 당신의 향심기도가 지향하는 여정의 끝에 도달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영구한 상태는 아니다. 당신은 그곳에서부터 되돌아 나오게 되고 그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되돌아가야 한다.

 

21. 당신은 거룩한 단어의 반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지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거룩한 단어를 반복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 지향에 매달릴 수가 있는지 궁금하다. 나에게는 그 둘이 같이 다니는 것 같다.

초기에는 거룩한 단어에 매달리지 않으면서 그 지향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거룩한 단어를 계속 반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거룩한 단어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힌두 전통의 만트라 기도방법과 유사한 크리스찬의 기도 형태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향심기도가 아니다. 향심기도에서는 당신이 어떤 다른 사고를 하고 있다고 알아차렸을 때에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이 기도가 점점 편해질 때에 당신은 단어를 넘어선 어떤 내적 평화의 장소에 당신이 들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당신은 거룩한 단어 너머에 다른 주의의 수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거룩한 단어는 하나의 지침이며 당신은 그 지침(指針)이 가리키는 곳에 다다른 것이다. 그러한 경험을 할 때까지는 당신은 거룩한 단어로 계속 돌아감으로써 당신이 어떤 사고를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당신의 지향을 재확인하도록 해야 한다.

 

22. 거룩한 단어는 어떤 정서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고 또 어떤 분위기를 갖는 것 같다. 나는 향심기도 중에 거룩한 단어가 어떤 정서적요소를 가져오는지 보려고 그 단어에 머물러 있는 것과, 향심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나에게 가져오신다는 희망으로 그 단어의 감정적 요소를 포함한 모든 것을 털어 버리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

거룩한 단어의 의미나 그 단어로부터 오는 반향 같은 것을 알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당신은 당신의 마음에 어떤 다른 사고를 유발하지 않는 단어, 어떤 특정한 정서를 불러일으키지 않을 단어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거룩한 단어는 하나의 몸짓으로서 당신의 지향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지향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것이다. 당신은 단순히 그 지향을 나타내는 단어를 선택할 것이며, 어떤 의미나 감정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라야 한다. 의미가 적을수록 더 좋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거나 침묵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그것은 믿음의 움직임을 촉진하는 내적 분위기를 이루는 것이다. 순수한 믿음의 움직임이 관상기도의 핵심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러한 믿음에 채워 주실 수가 있는 것이다.

당신은 더 이상 거룩한 단어를 생각하지 않는 점에 도달할 것이다. 당신이 기도하기 위하여 조용히 앉으면 당신의 모든 심적 기능들은 한데 모아져 하나님 안으로 녹아들게 된다. 내적 침묵이 바로 그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거룩한 단어이다. 예를 들면 당신이 뉴욕에 가려면 당신은 출발점에서 승차권을 산다. 그러나 당신이 일단 그곳에 가면 또 다른 승차권을 사기 위해 매표소로 가지 않는다. 당신은 이미 거기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거룩한 단어는 내적침묵에 이르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므로 당신이 어떠한 생각도 넘어서 끝없는 하나님 사랑의 현존 안으로 일단 들어가면, 거룩한 단어로 되돌아갈 필요가 없다. 당신은 이미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다.

 

23. 때로 나는 평정 상태에 아직 이르기도 전에 내가 이미 평정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때로 이것이 사실인가를 시험해 보곤 하는데 정말로 평정에 이르기도 전에 평정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여 거룩한 단어로 되돌아가기를 꺼려한다. 그러면서도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야 한다는 느낌을 여전히 갖는다.

그렇게 빨리 확신하지 말라. 그 상태에 몇 분 더 머물러 있어 보아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더 친밀하고 더 가까이 계신다. 만일 주께서 당신에게 다가와서 당신을 끌어당기신다면 아주 좋다. 주에서 늘 그렇게 하시지는 않지만 당신이 주께서 그렇게 하시도록 도와 드릴 수가 있다. 향심기도는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기도이다.

 

24. 거룩한 단어는 정확히 무엇을 향한 것인가? 거룩한 단어로 향한 것인가? 그 단어의 의미로 향한 것인가? 그 단어의 소리로 향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현존하신다는 희미한 감각을 향한 것인가?

그 어떤 것도 아니다. 향심기도 중에 우리의 주의는 거룩한 단어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계속 반복하는 것도 아니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 소리는 더욱 아무런 의미도 없다. 거룩한 단어는 오직 상징일 뿐이다. 우리의 의지가 향하는 곳을 가리키는 지침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우리의 몸짓이며 표시이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가 우리는 모른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단어는 폭풍 속에서 배의 나침반이 방향을 가리키는 바늘과 같다.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수단, 더구나 절대적 수단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힘에 의해서 하나님의 현존을 희미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향심기도의 기본적인 초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인적(神人的) 존재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더 깊게 하려는 것이다.

 

25. 나는 향심기도를 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그들이 어떤 침묵이 일단 형성되면 그들은 거룩한 단어를 더 이상 떠올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5분 정도 침묵 속에 머무른 다음 다른 사고들이 떠오르고 그 때에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리고는 거룩한 단어를 떠나 다시 침묵으로 들어가고 다시사고가 떠오르면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렇게 단어를 떠났다가 단어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들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그들이 잘 아는 것같이 들린다. 어떤 기도교사들은 그들의 경험으로부터, 현대서구 사회의 사람들의 마음은 매우 활동적이어서 적어도 기도 초기에는 크리스찬 만트라를 계속해서 반복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한다. 아주 활동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하여 그렇게 함으로써 이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향심기도는 주의를 집중하는 적극적 방법이 아니고 수동적인 방법이다. 두 가지 기도가 다 같은 목표를 갖는 우수한 방법들이지만, 둘이 같은 기도는 아니며 인간의 심령에 다른 효과를 가져온다. 향심기도에서 거룩한 단어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기르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어떠한 단어도 쓰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내적 움직임만으로도 충분한 경우가 있다. 당신이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 드리겠다는 단순한 뜻을 가지고-앉자마자 내적 침묵 속으로 빠져 들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거기 계시지만 사람은 자신의 직무나 직업으로 인해 그것을 못 느끼고 있을 뿐이다.

관상기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한 종류의 주의이다. 차라리 그것은 주의(注意)라기보다 지향(志向)이라고 함이 좋다. 성령께서 당신의 기도를 더욱더 이끌어 가면서 당신은 아주 순수한 의식으로 끌려가게 되는데 그 순수한 의식은 당신의 참 자아를 바라보는 하나의 직관(直觀)이다. 이 세상에서는 순수한 믿음으로가 아니고는 하나님을 곧바로 아는 길이 없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심적 기능에는 어둠일 뿐이다. 이 어둠은 우리의 기능들이 사라졌다기보다는 우리의 직관이 그 기능들을 초월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르면, 이 순수한 믿음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다.

관상기도로 여러 가지 내적 체험 혹은 무체험으로 나가는 길이 열린다. 어떻게 체험하든지 간에, 이것들은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활동하시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련이다. 그러한 지향이 이루어지면 당신은 엄청난 자유를 느끼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이상의 위안을 바라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영적 위안 또한 감각적 위안과 마찬가지로 주의를 산만케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내가 앞에서 말했던 정서적 문제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우리를 위안해 주신다. 그 동안 사랑이 결핍되었던 사람에게는 더 많은 정(情)이 필요하다. 성령은 그것을 어느 심리 치료자와 마찬가지로 잘 아신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랑과 정을 퍼부어주신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거룩하다든지 아니면 성령께서 그 사람들을 더 사랑하신다는 말은 아니다. 이 말은 그 사람들이 남보다 사랑을 더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지만, 언제나 그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그들이 하나님과 더 좋은 의사소통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데, 이 의사소통은 심리적 기능으로 하는 인식의 영역을 넘은 것이다.

 

26. 신비적 체험을 얻기 위하여 약물을 쓰는 것은 어떤가?

어떤 이들은 영적인 경험을 하기 위하여 마음을 취하게 하는 약물을 쓰는 것 같다. 그것보다는 어떤 수련으로 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데 약물은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어떤 동방적 묵상의 강력한 방법들처럼 약물이 자신의 감정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그것들을 무의식에서 풀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LSD를 흡입한 어떤 사람들은 약물로 인해서 자신의 무의식에서 풀려 나온 어떤 심리 현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채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

 

27. 나는 한번 "이게 모두 무슨 감각인가? 깨어 일어나자." 하는 생각이든 적이 있다. 내가 물론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좋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다른 사고였다. 어떤 사고가 당신을 몹시 괴롭히더라도 당신이 할 일은 단지 그것들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그것과 싸우면 당신은 다른 생각들도 일어나서 손해만 본다.

 

28. 내가 한번 매우 씨름을 했던 어떤 것에 대해 분명히 알고 싶다. 과거에 나는 아주 결심을 가지고 향심기도에 전념했다. 나는 조용히 아주 부드럽게 향심을 하는 대신 떠밀다시피 주의를 집중하는 느낌을 가졌었다.

당신은 이 기도를 당신의 의지력으로 할 수 없다. 당신이 노력을 하면 할수록 당신은 더욱 잘 안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애를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긴장을 풀고 떠나보내어라. 거룩한 단어를 부드럽게, 아주 부드럽게 떠올려라. 이것을 마치 당신이 솜덩이 위에 새털 하나를 올려놓듯 하라.

물론 야구공이 당신에게로 날아들듯 사고들이 날아들면, 당신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것을 막아낼 길을 찾으려 들 것이다. 그 공을 때려 구장 밖으로 쳐 내는 것처럼 사고들을 쳐 내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당신은 솔직하게 "나는 이 사고들로 얻어터지고 있다."라고 시인하고 그것들을 참아 내라. 그리고 기억하라. 당신이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이 모든 것들은 지나가 버릴 것이다. 폭력을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 이 기도는 완전히 비폭력적인 기도이다. 너무 힘들여 노력하면 앞이마가 조여 오고 목 뒤가 뻣뺏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당신이 당신의 주의를 그 통증과 함께 떠나보내면 그것들은 대개가 버린다. 다른 말로 해서, 당신은 통증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통증 속에서 쉬어라. 통증은 다른 모든 사고들을 녹여주는 길을 제공한다. 그것은 당신의 주의를 하나의 점으로 수렴하여 주는데, 이것이 바로 거룩한 단어가 하는 구실인 것이다. 당신의 통증이 사라질 때 당신은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29. 내가 처음 하는 기도 시간 동안에 홀의 다른 곳에서 카운슬링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거기서 들려오는 소리가 커서 나는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큰 소리로 거룩한 단어를 외치고 싶었었다.

그러한 경우에 그저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 이외에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면서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때때로 당신은 소음들을 참아 내는 이외에 아무 것도할 수 없다. 당신은 깊은 내면에서는 새롭게 되었지만 그것을 외적으로는 즐기지 못했을 뿐임을 생각하라.

 

30. 앞으로 기도가 30분 혹은 그 이상 한 시간까지 갈 때도 있을 것이며 그 때에 당신의 등에 불편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이제 기도를 끝낼 때가 되었구나." 하고 중단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계속해야 할 것인가.

당신의 기도는 등이 아프기 전에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마다 정상적으로 기도를 끝내는 때를 감지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20분 후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반시간이나 혹은 더 오랜 다음에 오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당신의 기도가 끝날 때를 당신이 감지하지 못한 채 1시간 이상 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만일 그것을 계속할 은총이 있고 또 그렇게 하도록 이끌린다면 어느 때까지고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

기도를 오래 하는 더 좋은 방법은 두 번의 기도 기간을 이어서 하도록 설정하되 그 중간에 5분 내지 10분간 명상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걷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한 자세로 오랫동안 앉아 있음으로 해서 오는 불편을 없앨 수 있다.

그러나 기도 시간이 길고 짧음이 기도의 가치를 표시하는 것은 아니다. 기도의 질이 기도의 양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온기도 시간 동안 당신이 내적 침묵 속을 들락날락하는 것보다는 단한순간의 신적 일치가 더 값지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당신을 풍족하게 해주시는 데는 한순간이면 족하다. 그렇게 볼 때에 기다리는 과정은 신적 일치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치가 순간적으로 있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이처럼 순간이나마 하나님 속에 잠기는 경험도 없이 한 두 시간 수준이 얕은 관상 기도에 매달렸던 것보다는 더 나은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는 자신의 기도가 정상적으로 언제쯤 끝나는가를 실험과 수련을 통하여 알아 두는 것이 좋다. 기도가 잘되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도를 오래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31. 내가 기도에 깊어질 때 나는 두려움 때문에 거기서 빠져 나오고 만다. 나는 그곳에서 마냥 머물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나는 이 두려움이 심리적인지, 신체적인지, 영적인 것인지 알지 못한다.

이것은 자주 있는 경험이다. 당신이 당신 자아를 거의 망각하게 되는 곳에 이르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강하게 그리고 마음 놓이게 해주시면서 끌어당기시지 않는 한, 당신은 두려움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상상력에 따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것을 무시하고 그 물 속에 뛰어들면 그 물은 매우 기쁨을 줄 것이다.

 

32. 지난밤에 나는 거의 빠져 들게 되었는데 나는 갑자기 거기에서 뛰쳐나왔다. 후에 나는 매우 잘못했다고 느꼈지만 왜 내가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께 이렇게 여쭈어라. "만일 당신이 나를 저쪽으로 데려가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고는 긴장을 풀어라. 당신이 맨 처음 마취 상태에 들어간다면 당신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당신이 다소간 억지로라도 마취해야 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마취를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기도는 그러한 상황과 비슷하다. 당신의 생각이 끊어진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 당신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시도해 봐라.

 

33. 나는 거의 그 아름다운 상태로 막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두려움이 생겨서 나는 중단하였다. 내가 왜 그렇게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한 경험이 일어날 때 그 경험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말라. 그냥 내버려 두라.

 

34. 만일 이 기도를 너무 오래, 그리고 자주 하면 무기력한 상태로 빠져들지는 않는지?

만일 당신이 하루 5, 6시간 이상씩 오랫동안 하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하루에 서너 시간 기도하는 것이 사람에게 역효과를 준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달 동안 서서히 기도를 발전해 가면 기도를 오래 하게 되기도 한다. 만일 당신이 기도를 올바르게 한다면 당신은 일상생활에서 무기력해지기보다는 활력이 증가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당신을 지치게 하던 감정적 찌꺼기에서 당신이 해방되기 때문인 것이다.

당신의 피상적 기능들이 의식의 흐름을 타고 떠내려가는 배나 쓰레기들을 의식하고 있다고 해서 당신의 내적 기능인 지력과 의지가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신은 원하지 않는 사고들이 지나갈 때 고통을 가지고 의식하며 또 그것들이 없어졌으면 하고 바라기도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당신은 당신의 내면에 신비하게 현존하는, 전혀 표현할 수 없으면서도 정교하고 섬세한 어떤 신비적인 것에 당신이 빠져 들고 있음을 의식할 것이다. 이 이유는 내가 앞서 말한 확장된 인식을 당신의 정신이 발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표면적 차원과 아주 깊은 차원의 두 가지 차원에서 인식할 수 있음을 말한다. 만일 당신이 표면에서 일어나는 사고들로 흥분하여 여기에 사로잡히면 당신의 깊은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식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당신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당신의 상상과 기억의 내적 소음 때문에 이 깊은 차원의 경험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만일 기도 시간이 빨리 갔다면 당신은 그만큼 깊이 들어갔었다는 표시인데 아마도 당신 자신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당신이 상상들로 방해를 받지 않으면 시간 감각은 중단된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당신의 의식은 완전히 살아 있으면서도 시간만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란 자신의 투영(投影)이다. 아무런 사고도 없을 때 당신은 시간에서 해방된다. 이것은 당신에게 우리의 신체가 우리의 영에서 빠져 나갈 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관하게 할 것이다. 깊은 기도 속에서 당신은 어쨌든 당신의 육신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죽는다는 사실이 당신을 두렵게 만들지 않을 것이며 그 이유는 이미 당신이 영이 육신을 떠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미리 경험하였기 때문인데 이와 같은 상태는 매우 즐거운 경험인 것이다.

 

35. 기도 중에 때때로 나는 날아갈 듯이 아주 행복한 느낌을 갖는데 이것은 매우 즐거운 경험이다.

당신은 기도를 너무 심각하게 다루지 말라. 하나님에게는 유희적인 어떤 면이 있다. 펭귄이나 다른 어떤 동물들을 볼 때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어떤 장난기를 보여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유희적인 면은 현실의 아주 심오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것을 보면 우리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다루지 말 것과 또 하나님께서 어떤 유머 감각을 가지고 우리를 창조하셨음을 깨우쳐 준다.

 

36. 나의 수호천사가 향심기도 중에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가?

당신이 그에게 말하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천사나 악마는 당신이 아주 깊은 관상 기도 중에 있을 때 당신에게 일어난 일을 보지 못한다. 그것들은 당신의 상상과 기억의 기능들을 사용할 때 당신이 하는 일을 알고 이것들에 자기들의 이야기를 유입시킬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신이 깊은 내적 침묵 속에 있을 때 거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이다. 오직 그분만이 영혼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실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잠재울 때 자신을 무형의 존재들에게 열어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르면 당신이 사고와 감정을 넘어서 하나님의 현존에 빠져 들면 그곳보다 더 안전한 곳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마귀들이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내적 침묵에서 빠져 나왔을 때만 마귀들이 당신을 유혹으로 괴롭힐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혹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이 관상 중에 가졌던 것과 같은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이 다윗 왕이 시편에서 "나의 피난처, 나의 힘, 나의 바위, 나의 요새, 나의 성탑, 나의 성채!"라고 하는 말의 뜻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관상 기도를 수련할 때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위험에 우리를 열어 주게 된다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 수준에서는 그보다 깊으신 분외에는 아무도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안에 계시며 그분의창조적 사랑으로부터 우리가 매 순간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37. 오늘 나의 기도 시간 중에 한 가지 사고가 계속해서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나의 기도가 끝났을 때에 그것이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그것은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나는 그 사고를 경당으로 가지고 와서 그것을 주님 앞에 바치고 난 뒤에 나의 기분이 좀 나아졌다. 나는 그것이 마치 가시 박힌 것 같아서 그것을 그저 뽑아 버렸다. 당신이 하나님께 이렇게 여쭐 수 있을 때 기도 중에 주님께 이것을 바치는 것이 어떤 이점이 있는가?

어쨌든 당신이 이끌리는 대로 하라.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아주 자유스럽게 해야 한다. 나는 관상 기도가 지난 몇 세기 동안 잊혀져 왔기 때문에 이 기도를 강조하는 것이다. 당신이 내적인 침묵으로 열심히 기도하는 시간이 다른 형태의 기도와 서로 상충하는 것은 아니다.

 

38. 향심기도를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목소리로 기도하지 않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나 자신을 비울 때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내 존재의 깊은 곳에서 기도하신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생각을 떠나 버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제 나는 말로 기도할 필요가 없고 그저 긴장을 풀고 그분이 오셔서 기도하도록 해야 됨을 알게 되었다.

기도란 하나님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뀌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일이 빨리 일어날수록 우리의 기도가 더욱 좋아진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관심을 갖고 그분을 찾기 시작한 이상, 가장 좋은 길은 기도 속에 침묵하여 그분이 기도 과정을 끌어가시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모님께 아주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던가? 그분의 존재가 바로 기도였고 그분의 모든 동작이 기도였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큰일을 하셨나?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 세상에 가져오셨다. 아니 말씀이 자신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시도록 허락하셨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도록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무엇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임 때문이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현존이 우리의 기능들을 통하여 나타날 때, 우리가 길을 걸어가든, 국을 마시든 간에 거룩한 생명이 세상 속으로 쏟아지는 것이다. 모든 행동의 효과는 그것이 솟아나는 원천에 달린 것이다. 그것이 거짓 자아에서 나오면 그것은 심하게 제한되어 버리지만, 그것이 하나님에 잠긴 사람(즉 관상 상태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나오면 아주 효율적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모님의 성소(聖召)와 같은 관상의 상태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낸다.

 

39. 유혹받고, 스트레스 쌓이고, 어려움을 겪을 때에 관상 기도를 하는 것에 대해 확실히 알고 싶다. 나는 나에게 평화가 오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한다는 생각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게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가?

관상 기도로 들어가라고 권할 때 내가 생각한 것은 사고와 감정을 잠재우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유혹으로 시달릴 때에 관상 기도에서 하듯 같은 종류의 떠나보냄을 수련하라는 것이다. 유혹도 나의 의식의 흐름을 타고 떠가는 다른 사고와 마찬가지로 취급하라. 떠나보내면 그것으로 충분한 방법이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도록 해 보라.

 

40. 우리가 어떤 것을 떠나보내는 일상생활의 습관이 확실하고도 실제적으로 우리를 기도에 준비시키는 방법이 되는가, 그리하여 우리가 기도 중에 떠나보냄이 더욱 쉬워지는가?

당신이 생활 중에 하는 활동과 기도 중에 하는 활동 사이에는 상호 관련성이 있다. 그것들은 서로 도와준다.

 

41. 당신이 어떤 일에 흥분하였을 때 어떻게 침묵과 평화 속에서 기도할 수 있는가?

이러한 경우에는 당신이 어떤 완충적인 상황을 거치지 않고도 침묵 속에 기도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당신은 한 블록 정도 달리기를 하거나 신체 운동을 하든지 혹은 적절한 독서를 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앉아서 평정을 얻으려고 할 때 고요한 의식의 흐름 곁에 앉아 있기보다는 나이아가라 폭포 밑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당신이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당신 자신이 평정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여야 한다. 어떤 경우는 그 시험은 너무 커서 당신을 짓밟아 버리기 때문에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내적 침묵 속으로 도저히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도하기 위해 어떤 시간을 허용한다면 당신이 그 문제와 더불어 감정적 폭풍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42. 왜 당신은 그룹으로 기도할 때 반시간으로 제한하는가?

그 정도가 주의를 유지하는 정상적 시간이라고 본다. 그보다 길면 기도를 시작하거나 계속하는 용기를 꺾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내적 침묵의 감각을 이루기에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시간동안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하면 당신은 침묵을 안정시키는 저수지를 갖는 것과 같다. 하루 시간을 두 번에 나누어 같은 시간 동안 깊은 기도에 들어가면 그날 하루를 지내는 데 필요한 그 침묵의 저수지를 마련하는 최선의 기회를 갖게 된다.

당신이 활동을 더 할수록 그 만큼 기도 시간의 필요도 늘어난다. 활동을 지나치게 하면 영적으로 바닥이 드러난다. 그 활동들은 신비한 환상적 요소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트레드밀(벨트가 계속 돌아가고 그 위를 걷게 만든 운동 기계)이나 회전 마차와도 같아서 거기에서 빠져 나오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규칙적인 기도가 참다운 수련이다. 당신이 하던 일을 멈추고 기도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긴급한 자선 활동이 아닌 다른 어떠한 활동보다는 당신이 기도하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 그렇게 하면 당신이 하는 일이 잘 돌아가고 더 빨리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 그 때에 당신은 당신의 활동과 먼저 해야 하는 일(기도) 사이에 가치를 견주어 볼 수 있게 된다.

 

43. 한 번 길게 기도하지 않고 왜 두 번으로 나누어야 하는가?

하루에 두 번으로 나누어 하는 기도는 당신의 침묵의 저수지에 더욱 당신을 가깝게 만든다. 당신이 그 저수지에서 멀리 떨어지면 그것은 그 저수지에서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물을 다 빼 가고 난 다음에 있는 수도의 맨 끝에 당신이 있는 것과 같다. 당신이 수도꼭지를 틀면 당신은 겨우 몇 방울밖에 받지 못한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수압을 올려놓아라. 당신은 그 저수지가 찰 때까지 채워라. 그러면 물은 언제나 흘러내릴 것이다. 관상 기도는 활동을 위한 준비이다. 그 활동은 우리가 흥분과 욕망과 집착을 가라앉히는 침묵 속에서 성령의 감도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침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기회를 최대한으로 드리는 것이다.

 

44. 기도 중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색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그것들을 떠나보내는 것이 좋은가?

이 기도 중에는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사색하는 것은 적당치 않다. 우리는 이 기도 중에 판단을 완전히 중단하여야 한다. 기도가 끝난 다음에 사색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당신이 경험을 쌓아가면서, 당신은 기도를 당신의 다른 신앙생활과 잘 조화를 이루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어느 정도 개념화의 작업이 필요하기는 하다. 그렇지만 당신은 기도의 효과를 얻으려고 당신의 기도를 분석할 필요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기도 중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하지 않음이 좋다. 당신이 기도로부터 열매를 얻게 되면 당신은 그것을 동시에 깨닫게 된다. 사실상 다른 사람들이 "당신은 이전처럼 그리 흥분하지 않는 것 같다."라고 말할 것이다. 당신 자신도 이전에는 부드럽지 않았지만 이제는 행동이 부드러워진 것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당신이 이전에는 화가 났을 때 남을 두드려 주고 싶은 충동을 받았었지만 이제는 약한 질책 정도에는 만족스러울 만큼 잘 다스리게 됨을 알아차릴 것이다. 관상 기도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 아주 다른 태도를 형성시켜 준다. 즉 다른 차원에서 이것을 보게 된다. 극단적인 감정은 안전하지 못하다는 감각에서 오고 특히 위협을 받는다고 느낄 때에 그런 감정을 갖는다. 그렇지만 당신이 깊은 침묵 중에 하나님의 현존을 계속해서 재확인하게 되면, 당신은 다른 사람의 반대를 받거나 비난의 대상이 될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당신은 비난을 받거나 멸시를 당하더라도 그 속에서 무엇을 배울 만큼 겸손해지고, 비난이나 멸시로 인해 자책감이나 복수심 같은 것으로 시달리지 않게 된다. 사람들이 어린 시기에 발달시킨 낮은 자아상으로 인해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 것이 이 문화에 팽배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향은 특히 이 사회가 고도로 경쟁적 사회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뒤떨어지면 자신이 이 문화에 부족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그렇지만 침묵의 깊은 기도 속에서는 당신은 새 사람이 된다. 아니 당신 자신이 된다.

 

45. 기도로 위안을 받고 있는데 기도를 아주 오래 하면 어떤가?

만일 당신이 지나치게 하면 그것은 나쁜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 지나친 슬픔과 마찬가지로 지나친 기쁨도 피곤하게 만든다. 이 기도의 목적은 더 기도하고 더 침묵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침묵을 활동과 조화를 이루게 하려는 것이다. 영적인 위로가 너무 만족스럽게 되면 이것도 덫이 될 수 있다. 이렇기 때문에 관상기도를 어느 시간으로 제한하는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영적으로 지나치게 탐닉하지 않으면서도 당신에게 적절하게 좋은 기도 시간의 양을 상식적으로 알아내게 한다. 내적 침묵으로 가까이 간다는 것은 아주 귀중한 선물이다. 이것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 사람의 미적 감각 자체를 바꾸어 놓는다. 이러한 경험을 자주하게 되면, 반대되거나 상반적인 상황에 대처하는 힘이 길러진다. 내적 침묵은 인간이할 수 있는 경험 중에서 가장 힘을 길러 주는 경험이며 가장 확신을 주는 경험이다. 사실상 하나님의 현존보다 우리에게 더 확신을 주는 경험은 없다. 그러한 계시는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말을 우리에게 한다. "너는 좋은 사람이다. 나는 너를 창조했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말씀의 더욱 완전히 충만 된 감각 속에 머물도록 인도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갖는 부정적인 감정을 치유해 준다.

 

46. 나는 기도 중에 숨이 멈출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나는 나의 신체적 리듬과 함께 할 때 가장 안전함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거기에 주의를 주고 너무 오랫동안 떠나보냄 속에 머무는 것이 두렵다.

당신의 호흡이 얕아질 수 있겠지만 당신이 산소를 필요로 할 때에 당신은 자동적으로 호흡하도록 되어 있다. 당신의 몸은 자체가 좋은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의 호흡이 얕아질 때 몸은 스스로 깊은 숨을 쉬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잠을 잘 때도 일어나는 일이며 또한 기도 중에도 일어날 것이다. 생각하는 것과 숨쉬는 것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다. 호흡이 얕아지면 생각도 줄어든다. 그렇지만 당신이 생각하자마자 다시 호흡도 증가한다.

 

47. 단식하면 묵상이 더 잘된다고 들었다. 아마도 이것은 훈련하기에 달렸다고 추측한다.

단식의 능력은 사람마다 다르다. 권고할 것은 뱃속이 찼을 때는 향심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기도는 신진 대사를 줄어들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결과로 소화와 같은 신체 과정이 느려진다. 식사 후에는 한 시간 반 정도 기다려라. 그리고 잠들기 바로 전에 기도하지 말라. 그러면 에너지가 솟아나서 몇 시간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단식을 함으로써 향심기도가 더 잘될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 반대의 영향도 있을 수 있다. 배가 너무 고프면 기도 시간 동안에 거기에 신경이 쓰여서 단식은 기도를 저해한다. 향심기도 중에 따라야 하는 원칙은 신체를 잊어버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극단성이 아니라 삶의 단순성이 이러한 수련에는 더 적합하다.

 

48. 사기를 돋우기 위해 집단이 도움이 된다. 같이 기도하는 것이 더 나은가 아니면 혼자 기도하는 것이 더 나은가?

그룹을 통해서 사기와 심리적 지원을 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 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모이는 지원 그룹이 도움이 된다. 그런 반면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방법에 자신을 맞추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혼자 하기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두 가지 경험 다 값어치가 있다.

 

49. 내가 아무 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될 때, 나는 나의 호흡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가장 좋은 길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주의를 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마치 교회로 가기 위하여 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 누가 당신 곁에서 걸어가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그냥 그대로 걸어가면서, 같이 가기를 청하지 않았던 그 사람에게 주의를 주지 말라. 그러면 당신은 결국 가고자 하는 곳에 이르게 된다. 일어나는 어떠한 것에도 "예" 하고 받아들여라. 그렇게 하면 강박적인 영상이 더 잘 지나가 버리게 된다. 그런 일에 짜증스럽거나 즐거운 마음으로 반응하면 그 특정한 사고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 된다.

의식의 흐름 속에서 떠내려가는 어떠한 사고도 시간이 해결해 준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움직이는 것들이어서 결국 지나가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냥 기다리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모두 지나가고 만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들에게 무엇을 하려 들거나 털어버리려고 애를 쓴다면 당신은 그것에 붙잡혀서 그것들과 같이 떠내려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사고가 들어오게 하라. 그리고 그것이 가 버리게 하라. 성가시게 생각도 말며 아무런 기대도 하지 말라. 이것이 아주 섬세한 자기 부정이긴 하지만, 이것은 신체적 엄숙보다는 낫다. 이 신체적 엄숙은 자신에게 주의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떠나가 버리지 말고 하나님을 기다리며, 정상적인 기도 시간을 내구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들이 진정한 신심을 얻는 데 가장 효과적인 훈련이다. 이것을 잘 지키면 마침내 완전한 내심의 변화(즉 변형)에 이르게 될 것이다.

 

50. 어떤 때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식하기도 하는 것 같다. 거룩한 단어를 떠올리기는 하지만 그것을 반복할 수가 없다. 이것은 일상적인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는 아니지만 여기에는 다소간의 인식이 있기 때문에 잠자고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것은 우리가 깨어 있으려고 하는 인식이다. 그것을 아마도 영적인 주의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깊은 주의는 외적인 상황을 인식하면서도, 자신은 신비하게 내적으로 향한 주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외적으로 아무런 인상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과 같다. 이 때에 당신이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에게 온통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식당에서 그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면, 웨이트레스가 오고 가고 하더라도 당신은 그와의 대화에 열중하기 때문에,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그 웨이트레스가 당신 테이블에 청구서를 놓고 가더라도 당신은 이제 식사가 끝났다거나 아니면 모두가 떠났기 때문에 그 식당을 떠나야 할 시간이라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다. 이 기도는 말을 주고받는 대화가 아니라 내심을 주고받는 대화이다. 이것은 다른 기도에 비해 높은 수준의 기도이기 때문에 이보다 낮은 수준의 기도는 이 속으로 다 스며드는 것이다.

 

51. 나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종류의 저항 때문에 씨름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씨름을 하면서 동시에 이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 기도를 하나님과 씨름하는 시간으로 갖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

사람이 내적으로 침묵에 들어가면 일상적으로 흐르는 사고들의 뒤에 숨어 있던 어떤 갈등 같은 것이 의식에 떠오르기도 한다. 통상적으로 나는 이 시간 동안에 그것들과 씨름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가버리도록 내버려 둔다. 이것들을 사색하는 것은 기도가 끝난 다음에 한다. 관상 기도의 가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온전히 빠져 드는 것에 있는데, 내적 침묵의 진보로 이루어지는 그 관계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심리적인 문제들이 큰 평화의 시간 동안에 머리에 떠 올라오고 사색의 초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당신의 성찰은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게 만드는 하나의 요술이다. "침묵이 아닌 것은 어떠한 것"도 환영하는 것이 이런 종류의 기도에 대항하는 거짓 자아의 반응이다. 내적 침묵은 거짓 자아의 모든 성향과 아주 상반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어느 시간 동안 조용히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어떤 갈등을 놓고, 특별한 성찰을 하면서 바로 기도 시간 중에 그것을 다루어야 한다는 영감을 받은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이럴 경우 당신이 느끼는 대로 자유스럽게 하라. 그러나 이러한 일이 자주 생기면 그것은 잘못이다.

 

52. 오늘 나는 사고들이 들락날락하면서도 늘 그렇듯이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거룩한 단어를 쓰는 것과 현존 안에 머무는 것 사이에 균형을 잡으려고 더듬거리고 있다.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단순한 현존을 몇 번 체험했다 그 때에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묻곤 한다 "지금 거룩한 단어를 써야 하는가?"

당신이 깊은 내적 침묵에 있을 때, 깊은 못에 있는 물고기에게 맛있게 보이는 미끼처럼 어떤 사고는 당신에게 유혹을 준다. 당신이 이것을 물면 당신은 잡힌 것이다.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도록 노력하라.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것은 모든 사고들을 떠나보내는 습관을 길러서 얻어지는 것이다. 마침내 당신은 의식 속에 흘러내리는 것들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데, 그것이 즐거운 것이든 고통스러운 것이든 결국은 지나가고 말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부연할 것은, 이 기도의 훈련을 통하여 삶의 사건들을 오고 가는 대로 내버려 둘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삶을 더 쉽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향심기도는 떠나보내는 훈련이다.

 

53. 어떤 때는 아무런 사고도 없다. 다만 나의 자각만 있었을 뿐이다. 이것을 떠나보내야 하는지 그 자각을 그냥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당신이 아무 사고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였다면 그것도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사고였다. 그 때에 당신이 아무런 사고가 없다는 그 인식마저도 잊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여 순수한 의식(pure comsciousness) 거기에서는 자신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다. 당신의 일상적인 심리적 기능들이 되돌아왔을 때 거기에는 평화로운 기쁨의 감각을 가질 수 있는데 이것은 당신이 자고 있지 않았다는 좋은 표시이다. 우리가 가는 곳이 아는 자, 알고 있는 자, 알려지는 자 이 모두가 하나인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곳에서는 인식(awareness)만 남는다. 인식하는 자는 사라지고 이와 함께 의식의 대상도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신적일치인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다. 이 경험은 일시적이지만 이 경험이 당신을 관상상태로 이끌어 간다. 당신이 하나님과 일치하고 있다고 느끼는 한 당신은 하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룬 것이 아니다. 어떤 사고가 있는 한 그것은 완전한 일치가 아니다. 완전한 일치의 순간에는 아무런 사고가 없다. 당신이 거기에서 빠져 나올 때까지 당신은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경험이 너무 희미해서 당신은 잠자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은 주님과 하나가 되었다고 느끼는 감각과 같은 자아 성찰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영적 수준에서 일치를 이룸은 순수한 의식의 상태인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지식의 유입(流入, infusifnl: 하나님에 의한 것 : 역자)이며 그것이 일어나는 동안 거기에는 성찰 같은 것은 없다.

우리 마음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이 없다라는 인식을 갖고 싶어하는 무엇이 있다. 우리 자신을 떠나보내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지라도 우리가 계속해서 어떠한 사고도 떠나보내려고 하지 않고는 떠나보냄을 이룰 수 없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성찰하면 우리는 관상에서 떠나 관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신적인일치가 겁나는 일처럼 보인다. 이러한 일치의 상태가 어떠한 상태인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식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의식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만일 의식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지면 떠나보내는 과정을 억제하는 것이 된다.

향심기도는 떠나보내는 수련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향심기도는 어떤 사고든지 옆으로 제쳐놓는 것이다. 한번 하나님과 일치하는 경험을 하고 나면 당신은 세상의 모든 즐거움도 쓰레기통에 버릴 것이다. 영적인 소통에 대해 성찰하게 되면 신적 일치가 사라지게 된다. '금강경(Diamond Sutra)'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떠한 것에도 매달리지 않는 정신을 길러라"거기에는 환시, 탈혼, 내적 음성, 영적교감, 심령 선물 등이 포함된다. 이것들은 순수한 의식보다 가치가 덜한 것들이다.

영적 위로에 대해 성찰하지 않기란 매우 힘들다. 특히 당신이 그러한 것들에 대한 경험이 적을 때 그렇다. 그러나 당신이 내적 침묵에 접근하고 충분한 시간 수련하면 당신은 매달리는 방법(떠나보냄과 반대되는)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용기를 잃거나 죄 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실패는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길을 열어 준다. 당신에게는 언제든지 억만의 기회가 있음을 기억하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회를 없애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 자신이 우리에게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다가오신다. 우리에게 미끼를 던지시고 잡아당기시곤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시고 아니면 우리를 밀어 주신다. 그리하여 그분은 바라시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점차로 당신은 내적 침묵에 익숙해질 것이다. 관상 기도의 초기단계에서 당신이 느꼈던 기쁜 평화는 점차 정상적인 경험이 된다. 인생의 어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은 관상 기도에 익숙해져서 당신이 받은 커다란 선물까지도 알아채지 못하게 된다. 당신은 습관적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침묵 속에 들어가고 그러면 모든 것이 습관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말은 당신이 더 이상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려는 의지를 보여 주는 그러한 침묵의 기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만일 사고들이 지나가는데도 당신이 그것들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침묵의 기도 속에 들어갔다고 확신할 수 있다. 모든 기능들이 하나님에게 맡겨졌을 때 온전한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영적 여정의 끝은 아니다.

 

54. 관상기도와 여타의 일상생활과는 어떠한 관계성이 있는가?

기도 중에 이루어졌던 일치는 현실의 다른 부분 안으로 융화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현존은 우리 모든 삶에서 하나의 4차원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3차원적 세상은 참된 세상이 아니다. 그 이유는 가장 중요한 차원이 빠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시간의 매 찰나적 순간에 그 차원으로부터 모든 존재들이 생겨나고 돌아가는 그러한 차원 말이다. 이것은 무성 영화에 음성을 싣는 것과도 같다. 그림은 똑같지만 음성이 가해짐으로써 좀 더 생생하게 된다. 관상기도가 경험하는 단계에서 하나님의 내재를 의식하는 단계로 옳겨 갈 때 관상 상태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관상 상태에 이르면 우리가 쉬면서 동시에 행동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쉼이면서 행동인 한 원천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적일치의 전주곡을 경험하고는 어느 기간 동안 그 경험을 잃어버려서 다시 그곳으로 향해야 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영적 여정의 어떤 지점에서부터도 시작해 주실 수 있다. 당신이 출발점보다 앞선 지점에서 시작했다면 당신은 출발점으로 돌아가 그 갭을 메워야 한다. 어떤 사람들이 6,7세에 환시를 보았다고 해서 그들이 행운아라고 부러워하지 말라. 이러한 사람들도 어렸을 때에 가졌던 정서 프로그램을 헐어 버리기 위해 투쟁을 거쳐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하나님에 의해 잠시 잠재워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림들에게 큰 장점은 그들 자신의 삶에 무엇이 빠졌는가 경험으로 알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 아니고는 그것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길을 부러워하는 것은 잘못이다. 당신은 당신에게도 신적일치를 위하여 필요한 무엇이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어떠한 기대도 방해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집착의 한 형태이며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조종하고 싶은 욕망이기 때문이다.

감각적이거나 영적인 위안을 받고 싶은 마음을 떠나보내라.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이 당신에게로 흘러 들어옴을 느낀다면 그것은 하나의 일치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일치는 당신이 인식하는 일치일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순수한 일치도 아니요 완전한 일치도 아니다. 영적인 위안은 너무나도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으로 그것을 열심히 찾고 싶어 한다. 한번 그 경험을 하면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마치 언제나 위안을 받는 것처럼 위장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전 존재로 그것을 찾으려고 애쓰며 이렇게 외칠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이루었었는지 그 방법을 기억하기만 한다면"

당신이 이와 같은 욕망으로 움직이고 있는 한 당신은 하나님을 조정하려 드는 것이다. 당신이 하늘이 열리고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잊어버려라. 그저 거룩한 단어로 돌아오라.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잃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영적 소통은 당신이 그것을 성찰할 기회가 주어지기도 전에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 당신이 그것을 다시 생각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선물의 완전한 이익을 이미 받았다. 영적 선물에 대한 기대를 떠나보내는 것이 그 선물을 받게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당신이 집착을 버리면 버릴수록 더 많이, 아니, 더 잘 받을 수 있게 된다. 아주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일들을 떠나보낸다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55. 왜 기도에는 위안과 쓸쓸함, 내적 고요와 잡다한 분심, 하나님의 현존과 하나님의 부재가 교차하면서 나타나는가.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재와 현존이 바뀌는 것은 우리가 몹시 사랑하는 사람과 갖는 것과는 다르다. 솔로몬의 노래(雅歌)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로 비유한다. 교부들은 이 구절을 특히 좋아한다. "한 팔로는 팔베개 해 주시고 한 팔로는 나를 끌어안아 주십니다"(아2:6). 그들의 해석에 의하면 하나님은 두 팔로 우리를 안아 주신다. 왼팔로는 우리를 낮추시며 잘못을 고쳐 주시고 바른팔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으로 우리를 위안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끌어안으시기를 바란다면 하나님의 두 팔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 팔은 우리의 정화를 위해 주시는 고통이며, 다른 팔은 일치의 기쁨을 주신다. 당신이 신체적 고통이나 심리적 고난이 당신을 괴롭힌다고 느낄 때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더욱 힘주어 끌어안으신다고 생각해야 한다. 시련은 그분의 사랑의 표현이지 그분의 거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관상기도에서 하나님의 부재로 인해 절망했다가도 그분과 일치하는 경험으로 보상받게 된다. 당신이 하나님을 더욱더 그리워할수록,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처럼 보일 때 더욱 고통스럽다. 고통은 삶의 굴곡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큰사랑을 받기 위하여 지불하는 대가의 일부이다. 하나님의 사랑이건 인간적인 사랑이건, 사랑은 당신을 상처받기 쉽게 만든다. 기쁨과 슬픔의 교차는 우리가 영적 여정을 하면서 우리를 심리적 체험에 집착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그들이 끌어안는 것보다는 사랑받는다는 것에 더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과도 이와 같다. 우리가 어떠한 경험을 하든지 간에 그분은 그분 있는 그대로 사랑받기를 원하신다. 사랑의 대가, 즉 사랑을 대가로 받으려는 것은 자연적인 경향이다. 우리의 심리적인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가 하나님을 그대로 사랑할 것을 이러한 기복(起伏)을 통하여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이러한 종류의 자유는 영적인 여정을 안정시켜 준다. 그로부터, 영적 여정이 부침(浮沈)하는 사이에, 표면상으로는 고통을 받더라도, 하나님 사랑에 뿌리를 둔 가슴을 흔들지는 않게 한다.

기쁨이 괴로움이고 괴로움이 기쁨인 영적 수준이 있다. 그곳에서는 기쁨인가 괴로움인가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것은 그 사람이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문제가 되는 지점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볼 때 괴로움은 기쁨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완전히 희생하는 길이다. 이것은 우리의 괴로움을 줄여 주지는 않지만 이 괴로움은 일상적 괴로움과는 다른 질(質)을 가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자질을 가지고 있다. 그 괴로움 속에서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표현되지 않는 그러한 온전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그 크신 사랑을 우리 각자에게 주시었는데,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시고 조건 없음을 우리에게 증명하셨다.

 

56. 일상 직업 중에 내적 매력에 이끌린다고 생각이 들 때 기도해도 좋가?

물론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운전 중에는 눈을 뜨고 있을 수 있을 때에만 그러라고 권한다. 이러한 상황이 아니고 좀 여유 있는 시간이라면 그렇게 해도 좋다. 그런데 이것을 정도가 지나치게 할 수도 있다. 기도의 즐거웠던 부분이 우리 기도의 목표는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기도의 전주(前奏)와도 같다. 만일 당신이 어느 중개적인 감정이나 사고 없이도 하나님과 일치할 수 있으면 거기에는 하나님과 떨어짐 같은 감각은 없다. 영적 위안은 우리의 정신 기능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며 우리의 여러 가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을 선과 악, 옳고 그름, 상찬과 처벌 등과 같은 수준에서 다루는 것과는 아주 다른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갖게 해준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깊어지면 당신은 필요 이상으로 기도를 오래 끌 필요가 없다. 당신이 당장 해야 할 직무가 있을 때는 내적 침묵으로 가고 싶은 매력을 잠시 희생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급히 해야 할 일이 없다면, 시간이 있는 대로 5분간 혹은 십 분간 내적 침묵으로 들어감도 무방하다.

관상 수도회에서는 개인의 관상생활의 표현을 아주 존중해야 한다. 각 사람의 발전 단계에서 각각 다른 때에 어느 때는 공동 생활로 더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어느 때는 고독으로 더 부르신다. 공동체 생활만 있거나 고독의 생활만 주어지는 공동체에서는 관상적 소명을 완전히 드러내도록 이끌어 주는 상황이라 볼 수 없다. 수도원들이 아주 좋은 곳이라도 한계가 있다. 때때로 하나님은 그러한 제한된 상황에서 어느 사람을 더 완전하게 하시지만, 현대는 개인적인요구에 일반적으로 더 민감해진 때 이므로 관상자들도 필요한 요구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점과 그것을 지원하며 동정심을 가져야 함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관상 기도자들에게 어떤 고통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기도 한다.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수녀는 예수의 성심 환시를 볼 때에 그녀는 황홀 상태에 들곤 하였다. 다른 수녀들이 성가대 자리를 뜨라는 손짓을 받고 일어날 때 그녀는 일어날 수 없었다. 그녀의 장상들은 그녀가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불순명이라고 질책하였다. 어떤 수녀들은 그녀가 마귀에 사로잡혔다고 생각해서 자신들과 다른 수녀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녀에게 성수를 뿌리곤 하였다. 가련한 마르가리타 마리아에게서 악마를 쫓아내려고 하는 그 수녀들의 얼굴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라. 마르가리타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기도 생활은 아주 정상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감각들은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주시는 강한 은총을 붙잡아 둘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뒤에 그녀가 영적으로 더 성숙해졌을 때, 그녀는 자신의 감각 상태를 잘 유지하게 되었고 그녀의 기도 상태는 더 이상 눈에 뜨이지 않게 되었다.

영적 위로가 감각과 신체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일은 관상기도의 성장에 따라 일어나는 하나의 단계이다. 체질에 따라서 더 영향을 받는다. 어떤 이들은 이런 일을 경험하지 않는다. 만일 이것이 특히 강할 때면, 몸은 근육을 움직일 수 없고 시간은 모르는 사이에 흘러간다. 향심기도를 하다 보면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희미하게 알게되기도 한다. 기도의 기간이 아주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보일 때에는, 당신의 기도가 조금만 더 깊어졌더라면 시간 개념이 전혀 없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일 누가 다가와 당신을 건드리면 당신은 깜작 놀라 깨어날 것이다. 만일 한 공동체에서 이러한 현상을 위험한 것, 악마로부터 온 것, 혹은 겸손한 수도자에게는 일어나면 안 되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이러한 공동체는 영성 생활의 발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과거 수백 년 동안에 있었던 반관상적인 태도 때문에 이러한 태도들이 보편적이었었다. 신비주의가 잘못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극단적으로는 종교 재판까지 가게 되었고 아빌라의 데레사나 십자가의 성 요한의 글들을 의혹의 눈으로 보곤 하였다. 지금에 와서는 십자가의 성 요한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신비가로 인정받고 있다. 만일 그가 종교 재판의 의혹을 샀다면 더군다나 다른 일반 수도자들이 자신들은 신학자도 아니고 영적 지도자도 아니면서 그러한 경험을 입 밖에 낼 수도 없는 처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내적 기도의 은총과 그것을 소통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것들은 항상 같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때때로 진정한 관상의 경험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표현하면 좀 보수적인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일이 있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을 힘겹게 표현하면서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기도 한다.

신비가의 언어는 신학적인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침실의 언어요, 사랑의 언어이며, 그러므로 과대, 과장의 언어이다. 만일 남편이 아내를 숭배한다고 말한다고 해서 아내를 여신으로 모신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그가 느낀 사랑을 어찌 달리 표현하지 못하고 과장해서 말한 것뿐이다. 만일 당신 주위의 사람들이 그러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당신이 아마 마귀에게 걸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57. 성령 운동이 어떻게 이러한 관상적 기도와 맞게 되는가?

성령 운동은 성령께서 힘을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온전한 영감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역동적으로 활동하신다는 것을 현대 크리스찬들이 깨닫도록 지대한 공로를 하였다. 그 운동의 영향으로 바울사도와 또 사도행전에서 기술한 것과 같은 크리스찬 공동체의 자발성을 오늘날에 도로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 크리스찬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주위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전례를 행하고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 변형(transform)하였던 것이다. 이 집회에서 은사에 의해 성령의 현존이 생생하게 나타났었다. 방언의 은사는 신자 개인의 믿음을 돋우기 위한 것으로 여겨져서, 공동 예배 때에는 억제되었던 것 같다. 방언의 해석, 예언, 치유, 가르침, 사목, 그리고 다른 은사들이 각 지방의 영적인 혹은 물질적인 요구에 맞추도록 제공되었었다. 크리스찬의 관상 전통의 발달 속에 나타내 왔던 이 지속적인 성령의 활동은 성령 쇄신으로 다시 살아난 이러한 성서적 표본 안으로 융합되어야 한다.

 

58. 나는 성령 운동에 참여하고 아주 심오한 영적 체험을 한 어떤 사람을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은 그 경험들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그의 본당 신부님도 모르고 있다. 그 사람은 봉쇄 수녀원의 어느 관상적인 수녀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수녀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아주 전형적인 경험들입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그녀는 신비적 서적들을 소개해 주었고 또 계속해서 지도를 하고 있다.

성령 운동은 현대의 크리스찬들이 지원적인 공동체의 필요성과 동시에 기도의 개인적 체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성령으로 세례받음"은 그 그룹의 활기에서 오는 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어떤 요인에 의해서 이끌어지는 초월적 신비의 은총인 것 같다. 방언의 은사는 비관념적 기도의 초기적 형태이다.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없다. 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 중에서, 관상적 전통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지도를 받을 수 있게 된 사람은 다행한 사람이다. 당신이 몇 년 동안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를 함께 나누고,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을 한 다음에 당신은 어디로 가는가? 거기에는 틀림없이 갈 곳이 있다. 이제는 기도회의 회원들이 더 관상적인 기도의 표현으로 옳겨 갈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 그룹에 침묵의 시간을 도입할 때가 되었다. 만일 이 회합에 침묵이 도입된다면 이 운동에 더 많은 사람이 머물게 될 것이다. 그룹에 모인 사람들의 성분, 그리고 그들이 가진 신학적인 배경에 따라 그룹마다 다르긴 하지만, 모든 그룹은 영적인 가르침이 절대 필요하다. 어떤 성령 운동가들은 당신이 생각을 하지 않는 사이에 악마가 생각에 끼여 들어 당신 대신 생각한다는 이유로 관상 기도를 반대하기도 한다. 사실상 당신이 내적침묵으로 기도하면 악마는 당신 근처에도 오지 못하는 것이다. 당신이 논리적 묵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오히려 악마가 당신의 상상 속에 끼여 들 기회가 더 늘어난다. 당신이 내적 침묵에서 나와 감각과 이성의 세계로 다시 돌아왔을 때에 악마가 끼여 들어 일들을 망쳐놓을 수가 있는 것이다. 성령 운동은 아주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령이 약속하시는 바를 완전히 얻기 위해서는 크리스찬적 관상 기도의 전통에 더 문을 열어야 한다.

 

59. 이 기도에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일하시게 하는가?

모든 상황하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게 하는 것은 어렵다. 이 기도에서는 그냥 떠나보내면서 당신이 하는 일을 살펴보지 않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 이 방법은 당신이 어떻게 앉는가, 얼마나 한 시간을 내어야 하는가에 있지 않고, 떠오르는 사고들을 당신이 어떻게 다루는가에 있다. 세상의 종교들이 개발한 모든 위대한 영적 훈련의 기본적 요점은 사고들을 떠나보내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의 여러 수준의 존재를 융화(融和)하고 통일시켜 그 융화하고 통일시킨 존재를 하나님께 승복케 하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60. 관상 기도 중에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는가, 아니면 관상 후에 하나님께서 거기 계셨음을 알게 되는가? 무엇을 인식하면서도 거기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구별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면서도 거기에 대해 외적으로 성찰하지 않을 수 있다. 순수한 인식은 경험의 즉시성(卽時性)을 갖는다. 우리는 무엇인가 성찰하도록 훈련과 교육을 받아 왔다. 그렇지만 성찰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체험에 깊이 빠져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일을 너무 즐기기 때문에 당신이 즐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성찰할 시간이 없었던 경험은 없는가?

그렇다. 그렇지만 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이 든다.

물론이다. 그런데 그 느낌을 성찰하지 말라는 말이다. 만일 당신이 성찰하면 당신이 이해하는 어떤 것으로 그 체험의 수준을 낮추어 버린다. 하나님은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인식은 경외심, 존경심, 사랑, 그리고 즐거움이 한데 어우러진 순간적인 체험이다.

우리는 행복하도록 만들어졌으며 그것을 얻으려 하는 것에 잘못은 없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행복에 너무 굶주렸기 때문에 행복을 얻자마자 온 힘을 다해 우리 삶을 거기에 매달려고 든다. 그것이 잘못이다. 행복을 가장 잘 받아들이는 길은 그것을 버리는 것이다. 당신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도로 드리면 당신은 더욱 비워질 것이고, 그렇게 비우면 당신은 하나님을 받을 공간이 그만큼 더 커진다.

하나님의 체험은 당신이 이전에 체험했던 어떤 것처럼 느껴지면서 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잘 맞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체험도 완성과 복지의 느낌을 준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신비하게 다시 채워진다. 이 체험은 우리에게 확신감과, 평화와, 기쁨과 존경심을 모두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물론 그 다음에 우리에게는 "정말 좋다. 어떻게 이것을 붙잡아둘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일어난다. 이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경험에 의하면 그것은 가장 잘못된 일이다. 매달리고 붙잡는 우리의 내적 경향이야말로 하나님과 일치하는 데 장애가 된다. 우리가 붙잡으려 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떨어져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 떨어져 있다는 느낌은 우리 인간의 정상적인 심리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우려 때문에 인간은 행복이 자신의 코 아래 있는데도,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행복의 길을 찾으려 드는 것이다. 우리가 행복을 감지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을 뿐인데도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일치했다는 안전감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붙잡을 수 있는 어떠한 소유나 힘의 상징에 매달려 자신의 연약한 자아상(self-image)을 부추겨 세우려 든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이 길과 거꾸로 가는 길이며, 즉 우리가 갖고 싶은 모든 것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현존의 느낌이 무엇보다도 바람직하고 즐겁기 때문에 그러한 느낌마저도 떠나보내야 하는 하나의 사고이다.

하나님의 현존에 매달리는 것은 공기에 매달리는 것과 같다. 당신은 공기 한 쪽을 떼어 내어 당신의 서랍 속에 감추어 둘 수 없다. 그와 비슷하게 당신은 하나님 현존의 한 조각을 떼어 내어 다음 기도시간까지 그것을 옷장에 숨기거나 냉장고에 보관해 둘 수 없다. 이기도는 무엇이든지 떠나보내는 훈련이다. 이것이 발전하면 기도하지 않는 시간에 일어나는 사물이나 사건들을 떠나보내도록 도와 줄 것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이 세상의 좋은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자유롭게 흘러 들어오는 하나님의 은총을 줄이게 하여 하나님 현존을 즐기는 것을 방해하는 사물에 대한 집착이나 중독 같은 것을 말한다.

 

61. 사고들은 언제나 되돌아오는가? 나는 어느 동안 평화의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사고들이 다시 파고든다. 그것은 언제나 일어나는 일인가?

어떤 기도 시간에도 평화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어떤 때는 줄곧 평화 속에 머무는 수도 있기는 하다. 당신의 경우, 아마도 다음 기도 시간에 당신은 비행기 조종사들이 말하는 휘몰아침과 같은 상태를 경험할 것인데, 끊임없이 솟으며 방해하는 사고들로 자꾸 튀어 올라오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재앙과 같은 것이 아니며 당신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평화와 사고의 우박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것은 중요한 과정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향심 기도의 방법은 단지 한 가지 기도방법일 뿐이라는 것과 다른 때에는 다른 기도를 해야 할 것도 기억하라. 향심 기도는 구약에서 야곱의 사다리와 같다. 야곱은 천사로 나타난 하나님과 밤새 씨름을 한 뒤에 잠에 곯아떨어졌다. 그는 꿈에 땅에서 하늘에 닿은 사다리 위를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다. 사다리는 의식이나 믿음의 다른 수준들을 뜻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모든 수준에서 대화를 해야 한다. 즉 입술과, 몸과, 상상과, 정서와, 정신과 직관적 기능과 침묵의 수준으로 말이다. 향심기도는 사다리의 한 단계에 불과하다. 이것은 하나님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기회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자의로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좀 더 나은 수준이 있다. 인간적 친우 관계에서도 대화에 다른 수준들이 있다. 그러나 친우 관계가 더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면, 둘이 나란히 앉아 있으면서 아무 말도 필요치 않은 통교(communion)의 수준으로 발전한다. 그 두 사람이 말을 않는다고 해서 두 사람 사이에 우정의 깊은 즐거움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들과의 그리고 하님과의 관계에서 우정을 표현하는 다른 방법들과 다른 수준들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다루신다. 이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다른 수준에서 하는 기도보다 더욱 친밀의 차원을 더해 준다. 목소리로 하는 기도에 잘못은 없다. 그러나 그 기도는 유일한 방법이거나 가장 심오한 기도 방법은 아니다.

 

62. 매일 관상 기도를 너무 오래 하면 어떤 질병을 유발하기도 하는가?

만일 당신이 시간이 많고 또 기도로 특별히 위안을 받으면 기도가 즐겁기 때문에 당신은 할 수 있다면 기도를 오래 하려고 애쓸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안을 받는 것이 기도의 목적은 아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이 기도를 너무 수련하여서 병들어 버린 어떤 수녀를 놀려댄 적이 있다. 하루에 7, 8시간 혹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내적침묵에 머물고 있으면, 그의 감각은 일상적인 일에서 너무 오래 물러나 있기 때문에 요즈음 말하는 감각 결핍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많은 시간동안 내적 침묵에 머물면 신진 대사 기능이 저하되는데 그러면 뇌에 혈액 공급이 저하된다. 피정 중일 경우와 같은 때에 이렇게 하는 것은 무방하겠지만, 이것을 매일매일 반복하게 되면 좀 지나칠 수 있다. 만일 일 주일 이상 지속하려면 감독이 필요하다. 모든 것은 분별을 가지고 행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일이 없는가 하고 판단하면서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제약을 받을 필요가 있다.

 

63. 관상 기도를 오래 하면 더 가치가 있는가?

하루에 두 번 이상 하면 자아 지식(self-knowledge)의 과정을 촉진할 수도 있다. 그 결과 과거에 당신이 마주 대하거나 다루지 않았던 과거의 일들에 대한 성찰을 가지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된 점을 보기를 피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관상기도에 발전하면 자기 자신에게 완전히 솔직해지는 것을 막는 모든 장애로부터 해방된다. 하나님께 더욱 신뢰할수록 당신은 더욱 자신에 대한 진실을 마주할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이 정말로 신뢰하는 사람 앞에서 당신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를 마주 볼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을 신뢰하면 당신이 어떠한 일을 했건 또 안했건 관계없이 그분이 계속해서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은, 그분은 언제나 당신 성격의 어두운 면을 알고 계시며, 친한 친구에게 털어놓듯 당신이 이야기하게 만드신다. 자아 지식에 대한 성찰은 당신을 화나게 하지 않고 오히려 당신에게 자유감을 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당신은 "왜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는가?" 하고 말하며 당신은 더 이상 자신에게 무엇이 일어나는가에 대해 덜 관심을 갖고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가를 생각하는 자유를 갖게 된다.

 

64. 기도 시간 중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됨은 역설적인 것 같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일 당신이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면 당신이 아무 생각도 없다는 생각도 없어야 한다. 거기에는 순수한 인식이 있을 뿐이며 그것이 관상 기도의 근사치의 목표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당신 전 존재를 당신 인격의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면,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인 면, 그리고 표현적이거나 감수적인 면들과 융화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인식하면서도 그 생각조차 생각하지 않으면 당신은 목표를 이루었다. 그 지점에서 한 발자국 더 가면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물론 당신이 결국은 그 맛좋은 순간에서 빠져 나오고 다시 마음이 떠돌게 될 것이다. 그 내적 침묵에서 나오는 것을 알아차리면 즉시 직전에 가졌던 하나님의 현존으로 아주 부드러운 주의를 돌려라.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는 생각이 마지막까지 유보해야 할 자아 성찰이다. 자아 성찰 이상으로 들어갈 수 있으면, 자아 망각으로 가라. 그리하여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려고 하는 충동을 떠나보내면, 당신은 더 깊은 평화와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성찰하기를 멈출 때 우리 내심은 분열되고 또 고통을 받을 것이라는 신념이 우리의 깊은 내심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성찰하기를 멈추면 우리는 완전한 평화로 이르게 될 것이다.

 

65. 나는 거룩한 단어를 언제 써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 언제 쓰지 말아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사고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이 거기다. 우리에게는 성찰하려고 하는 뿌리 깊은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 말을 이해하기 좀 어렵다. 자신을 인식하고자 하는 이 타고난 경향이 자기중심적 경향의 마지막 보루이다. 사막의 안토니오 성인은

"완전한 기도란 자신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기도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다. 내가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바로 안토니오 성인이 말씀하신 마음의 상태를 말한 것이다. 완전한 기도를 하고 있을 때는 성령이 당신 안에서 기도하신다. 거짓 자아를 하나님께 승복시키는 것이 거짓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이 경험이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새로 태어나야 한다."(요 3:3)고 말씀하시면서 설명하려고 하신 경험이다. 새로 태어나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 니고데모가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갈 수 있습니까?"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하는 말을 너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성령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나도 영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바람은 불고 싶을 때 불지만, 너는 그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이와 같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완전히 새로운 길인 것이다.

 

66. 나는 중심으로 들어가는 기도를 일 년 이상 해 오고 있다. 나는 물에 빠진 사람이 타이어를 잡으려는 것처럼 그 기도어에 매달려 있다. 오늘 기도 중에도 그 타이어가 나를 가로막아서, 나는 그 타이어를 집어 던져 버렸다. 나는 이것이 한 발자국 진보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구명대(救命帶)를 집어 던져라. 그것은 잘못된 생명을 붙잡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서 성령으로 살려면 거짓자아는 죽어야 한다.

 

67. 기도에 더욱 진보하면 영적 지도가 더욱 필요한 것인가?

영적 지도가 용기를 북돋우고 지원하는 데 도움이 되는 때가 있다. 관상 기도 중에 때때로 당신은 무거운 날씨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내적 침묵을 통하여 깊은 무의식으로 들어갈 때, 마치 석유샘을 건드려서 그것들과 함께 떠오르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또 여러 달 동안 혹은 몇 년간 어려움을 겪게 되기도 할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어두운 밤"이라고 부르는 기간도 경험할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 이것들이 더 어렵기도 하고 덜 어렵기도 하다. 이럴 때 확신을 주는 어떤 것이 필요하며 이 때가 영적 지도를 필요로 하는 때이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가 이러한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이면 도움보다는 해를 줄 수도 있다.

어떤 때는 마음을 잃지 말고 그냥 기다리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그 석유가 다 말라 버리면 당신은 새로운 깊이로 들어갈 것이다. 혹 당신이 두 층 사이에 갇힌 엘리베이터에 들어 있는 것과 같기도 하다. 당신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 장애가 없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영적인 지도자는 당신이 영적인 도정에서 당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확신을 가지고 알아볼 만큼 충분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지도자는 사람들이 이끌어 가는 삶에서 이것을 분별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이전에 없었던 엄청난 죄인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어떤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다면 그들에게 "잊어버리시오! 당신은 참으로 행운아입니디"라고 말할 줄 알고 있어야 한다. 당신이 정화(淨化) 과정 중에 있어서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으면 당신 자신에 대해 잘 판단하지 못한다. 아무도 당신을 도와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닥칠지도 모를 시련 중의 하나임을 기대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마련하실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럴 때 당신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 때문이다.

 

68. 나는 기도어를 마음속에 일어나는 사고들에 대해 저항하는 수단으로 썼다고 생각한다. 괴롭히는 정서들을 다루지 않으면서 그 정서 속에 빠진다는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무의식의 짐을 덜어 내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심한 안절부절못함, 육체적 고통, 두려움과 불안과 같은 정서들을 다루는 하나의 방법은 일이 분 동안 그 고통스런 감정 위에 쉬면서 그 고통이 당신의 기도어가 되도록 허용하라. 다른 말로 하면, 정서를 떠나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단순하게 그 정서를 느끼는 것이다. 고통스런 정서들이나 심지어 어떤 육체적 고통도 그것들을 완전히 받아들일 때에 소멸되는 경향이 있다. 큰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면서 일어나는 다른 현상들은 가려움, 눈물, 웃음 등이다. 어떤 사람들은 향심 기도 중에 웃음의 발작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이전에 농담(joke)을 들었지만 그 때에는 어떤 마음이나 성격 상태 때문에 웃지 못했던 것이 이제 다시 생각나고 이제는 겸손해졌거나 자유로워져서 그것을 웃을 수가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당신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옛날의 어떤 슬픔이 그 때에는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표현하도록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관상 기도는 당신의 삶에서 끝내지 못했던 어떤 것들을 끝내도록 도와서 뒤엉킨 것처럼 보이는 감정이나 사고의 형태로 그 정서들이 표출되도록 만들어 준다. 이것이 정화의 역사(役事)라고 할 수 있다. 강하게 느끼는 두려움, 불안, 혹은 노여움 등이 현재의 경험과 무관할지도 모른다. 그것들을 앉아서 견디어 내는 것이 그것들을 위로하는 것보다 더 이롭다. 향심 기도의 목적은 평화를 체험하는 데 있지 않고 무의식 속에 있는 장애를 비워 버림으로써 하나님과 영원한 일치의 상태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관상기도가 목적이 아니라, 관상의 상태가 수련의 목적이며, 어떠한 낭만적이고 위로가 되는 경험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신비스럽게 재구성하여서 오는 하나님 현존의 인식을 항구하게 지속하게 하려는 것이다. 당신 삶의 어떤 시점에서, 한밤중일 수도 있고, 전철 속에서 혹은 기도 중에, 신경 계통과 정신 안에 마침내 필요한 변화가 이루어진다. 그 특정한 단계의 영적 여정은 그 스스로 해결을 가져와서 당신은 이전에 가졌던 문제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의식이 재구성되는 것은 정규적인 수련에서 오는 열매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특정 체험을 목표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당신이 이전에 전혀 경험하지 않은 의식의 상태를 당신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를 기대하는 것은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일 뿐이다. 수련을 계속하면 결국 의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여정의 이 단계에서 가장 의미 있게 일어나는 일은 인격의 정감시스템에 평온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정서가 왔다갔다하는 것으로부터 당신은 자유를 얻는데 그것은 그 정서의 변화를 갖게 했던 당신의 거짓 자아(fllse self)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 때에는 정서들은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나타나면서 그것들이 당신을 흥분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이것이 참으로 내적 혼란에서의 놀라운 해방인 것이다.

어떤 정서적 경험 때문에 당신이 안절부절 못하고, 흥분을 느낄 때, 그냥 기다리는 것보다 더 시간을 잘 보내는 방법은 없다. 언짢은 정서로부터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을 밀어내려는 유혹을 크게 받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당신의 주의가 부드럽게 그 정서로 옮아가도록 허용하면서 그 정서 속에 잠기면 당신은 좋은 자쿠지(Jacuzzi : 물이 분출하도록 만든 욕조)에 들어간 것처럼 하나님이 당신을 껴안아 주시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서 단지 느끼기만 하라.

당신이 만일 장님이었다가 시력을 회복하였다면 당신은 아주 추한 것도 감사하게 볼 것이다. 당신이 아무런 정서도 가지고 있지 않다가 어느 정서를 느끼게 되면 유쾌하지 못한 정서라도 감격스럽게 느낄 것이다. 사실상 언짢은 정서란 없다. 다만 당신의 거짓 자아가 그렇게 해석할 뿐이다. 극단적으로 정서가 교차하는 일은 그것을 그저 받아들임으로써 해소될 것이다. 이것을 실습하려면, 먼저 그 정서들을 알아보고 분간하여야 한다. "그래, 나는 화났다. 공포에 떨고 있다. 몹시 두렵다. 불안해하고 있다." 등등. 어떠한 감정이든지 좋은 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근본이시므로 어떤 점에서는, 죄 의식도 하나님에게서 온다. 만일 당신이 고통스런 감정을, 그것이 마치 하나님인 양, 껴안으면 당신은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존하는 모든 것의 근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떠나보냄"이란 말은 단순한 단어가 아니다. 당신이 무엇을 떠나보내려고 하는가에 따라서 그것은 아주 미묘하고 중요한 뉘앙스를 가진다. 만일 어떤 사고가 당신을 산란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떠나보냄은 그 사고에 마음 쓰지 않음을 뜻한다. 만일 그 사고가 당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 사고는 쉽사리 떠나가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당신은 다른 어떤 방법을 써서 떠나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는 하나의 방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그 사고에 파묻혀서 그 사고를 분간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처음에는 가능하지 않겠지만 계속 노력하면서 어떻게 되는지 보라. 관상 기도의 기본적인훈련은 떠나보내는 훈련이다.

이 다섯 번째 종류의 사고에 대하여 말한 것을 종합하면, 관상 기도는 관상 기도가 지향하는 어떤 큰 실재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완성하는 전 과정의 일부인데 이 완성을 위해서는 우리가 무의식의 수준에서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 드릴 것을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어떤 때는 평화롭지만 어떤 때는 사고와 정서들 때문에 매우억눌리게도 된다. 두 가지 경험은 모두 완성과 치유의 같은 과정의일부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경험들은 똑같이 평정과 감사의 마음파 또한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가지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 모두는 변형의 과정을 이룩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사고들이 계속 폭포처럼 쏟아져 괴로움을 당할 때, 거룩한 단어를 애써서 당신의 상상에 떠올리려고 하거나, 당신의 정신에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힘겸도록 그 단어를 되풀이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정신 속으로 스며드는 어떠한 다른 사고들을 다루는 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그것들을 다루어야 한다.

어떠한 사고에도 저항하지 말구 매달리지 말고 또 감정적으로 대하지 말라. 이것이 당신의 의식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는 다섯 가지사고들을 다루는 적절한 반응들이다.

 

69. 내가 기도에서 빠져 나왔을 때, 내가 울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슬프지는 않았다. 나는 묵상 중에 어느 부분에서도 슬퍼하고 있었다고 보지는 않았다.

당신은 만일 서방 수도 생활의 창시자인 누르시아의 베네딕토 성인께서 늘 울고 계셨다는 것을 알면 아마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것이 그분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하여 드리는 아주 특징적인 반응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때로 아무 말을 할 수 없구 아무 생각도할 수 없고 아무 느낌도 없는 때가 있다. 이 때의 유일한 반응은 무한히 선하신 하나님의 현존에 잠기는 것이다.

눈물은 슬픔을 나타내기도 하고 기쁨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것들은 또한 다른 길로는 표현하지 못하던 온 정서 덩어리를 털어 버리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기도 중에 눈물이 흐르거든 그것을 은총으로 받아들여라.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선물로 받아들여라. 이것은 고통스러우면서도 동시에 기쁨일 수 있다. 기쁨이 아주 커지면 고통스러울 수가 있다.

기도 중에 기도에 대한 어떤 체험이나 성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다. 기도 후에 그것들을 되돌아볼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 중에 눈물이 흐르거나 입에 미소를 띠었다든가, 눈썹이 씰룩하든가, 가려움이나 통증을 느끼게 되면 그것들을 다른 사고들과 똑같이 취급하라. 그래서 부드럽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오라. 이 기도는 내적 고요 속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기 위하여, 사고에 의존하는 우리의 인간적 성향을 떠나보내는 기술 습득이다. 그것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털어 버려야 한다. 우울하다는 생각이나, 기분이나 감정이 며칠 동안 지속되면 이것은 우리의 심령이 일생동안 쌓였던 처리 안 된 정서적 잠재들을 비우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라. 이것이 지나면 우리의 심리 상태는 호전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토하는 것과도 같다. 저녁 식사 중에 이런 일이생기면 물론 불쾌하겠지만 토하고 나면 기분은 휠씬 좋아질 것이다.

물론 기도 시간 내내 어떤 신체적 통증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면 당신은 실제로 어떤 병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니 의사를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때때로 이것들은 정서적인 것들이 당신의 신체 안에 꽈리를 틀고 있다가 풀어지면서 일시적인 통증이나, 눈물이나, 웃음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는 기도 중에 폭소를 억누르지 못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이전에는 재미있게 생각하지 않았던 무의식 속의 어떤 것에 부딪치고는 이제야 마침내 그 농담의 뜻을 알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가 깊어지면서 자신의 인격 속에 숨어 있던 어두운 면을 인정할 능력이 각자의 알맞은 리듬에 따라서 생긴다. 좋은 정신 치료자는 환자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상대할 능력이 생길 때까지 기다린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겸손과 신뢰가 깊어지면 인격의 어두운 면을 더 쉽게 인정하게 된다. 결국 자신의 인간적인 가난함과 무기력함의 중심에 다다르게 되고 거기에 다다른 것을 즐겁게 생각하게 된다. 그때에 당신은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의 자유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 이유는 거기에서 자신의 인격이나 재주에 대해 이기적이거나 집착적인 태도를 더 이상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제 완전히 하나님의 손에 맡겨졌다. 내적 자유가 바로 기도의 목표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자유, 참 자아로 사는,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변형되는 자유, 바로 그 자유 말이다.

 

70. 정적의 기도에는 치유라고 하는 차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적어도 그것이 나의 경험이다. 어떤 사람은 치유할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커다란 마음의 상처가 있을 때에 정적의 기도는 이러한 상처를 진정시키는 고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렇다. 그것이 중요한 효과의 하나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내적 침묵 속에서 성령은 은밀하게 우리의 영혼에 기름 발라(塗油)주시고 가장 깊은 상처를 치유하신다고 가르쳤다.

 

71. 영혼뿐이 아니고 신체도 치유하시는가?

정신 신체적 질병(psychosomatic illness : 정신적 원인에서 생기는 신체적 질병 : 역자 주)은 확실히 정서 생활에 평화가 왔을 때에 치유될 수 있다.

 

72.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눈에서 당신의 하시는 일을 감추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겸손을 위해서, 사도 바울에게 가시를 주신 것과 비슷한 그 무엇을 말이다.

관상 기도는 확실히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당신이 말한 것처럼 어떤 연약함을 견디어 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만일 어떤 타입의 사람들이 기도에 아주 성공적이라고 한다면 가끔 그들이 현실로 끌어내려질 필요가 있다.

향심 기도의 방법은 단지 관상 기도로 들어가기 위한 입구일 뿐이다. 일단 관상 기도의 경험이 발전하게 되면 그것에 대해 말하기가 더욱 어려워지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경험은 일상적인 정신적 생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영장 물 속의 광선들을 상상해 보자. 그것들이 물에 닿을 때까지는 하나로 합쳐진 광선이었으나 물 속에서는 그것들이 한줄기 빛과는 전혀 다르게 된다. 물 속의 빛은 여기저기서 온다(난반사를 통해 : 역자 주). 그와 비슷하게, 관상기도 속에서 얻은 하나님 체험은 그것을 어떻게 구별해서 말하기 어렵다. 그것에 대해 말할 것이 적을수록, 더 하나님의 현존 속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것 안에 그리고 모든 것을 통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의 시야(視野) 밖에 있는 것과 같다.

어떤 것이든 처음 시작할 때는 경이롭게 보이지만 일단 거기에 익숙해지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그랬던 것처럼 정서적인 먼지를 일으키지는 않게 된다. 영적인 여정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생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관상 기도가 매우 신비하게 보인다. 그 경험이 그들에게는 정말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그 경험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당신이 말했던 종류의 연약함, 당신이나 남이 보기에 분명한, 그러한 연약함은 자기 자신은 물론 남에게도 그 경험을 감추게 하는 좋은 수단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친구들의 거룩함을 남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감추시기 좋아하신다.

 

73. 기도 생활이 성장하면서도, 사람들은 아직도 사고와 관상의 순간이 교차하는 경험을 하는가?

무의식이 비워지면서 좀 더 성숙한 인간적 성품의 덕이 쌓아지고 결과적으로 은총이 자유롭게 흘러 들어감으로써 눈에 뜨이는 태도의 변화가 나타난다. 관상 기도에서 체험한 신적 일치는 그 때에만 일어나지 않게 된다(즉 항상 일어난다 : 역자). 매일 생활에서 침묵의 순간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현실은 더욱 투명하게 보이고신적인 원천(즉 하나님 : 역자 주)은 침묵의 순간들을 통하여 비추일 것이다.

무의식이 비워진 다음에는 기도 초기에 머리 속을 지나가던 사고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정화의 과정은 끝난 셈이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인식이 계속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의식이나 무의식 속에 그것을 방해할 장애가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현실에는 아무런 잘못된 것이 없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며, 우리가 자신 안에 있는 장애로 인해 현실을 적절히 연관 짓지 못하는데 있다. 우리 안의 모든 장애가 걷힌 다음, 하나님 현존의 빛이 언제나 우리의 영을 비추는데, 심지어 우리가 활동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도 그렇게 된다. 우리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태에 압도당하는 대신, 이제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참 자아의 지배하에서 살아가게된다.

아마도 관상 기도의 발달 중 첫 단계는 우리의 일상적 심리 세계의 속박으로부터 독립하고 있다는 자각일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단지 신체로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인식, 또 사고와 감정으로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인식 말이다. 이제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외적인 사물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지는 않게 된다. 우리의 영적인 성질도 인식하게 된다. 우리의 영은 삼위 일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이러한 깨달음이 다른 모든 현실의 부분을 이루어서, 열심히 활동하는 중에서도, 상황이나, 외적 사물이나, 혹은 우리의 감정과 사고에 압도당하는 일이 없게 된다.

그러나 모든 외부 현실에서 독립하고 또 거리를 두게 되었다는 경험은 절대적 독립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참 자아를 확인하는 것일 뿐이다. 더 발전하면 또 다른 자각이 생긴다. 무의식의 창고가 비워졌을 때, 우리 내부의 심오한 수준에 대한 인식은 모든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심오한 수준에 대한 인식에도 이르게 한다. 이것이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의 기초가 된다. 당신이 만일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당신은 참 자아가 당신 안에서 표현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심을 인식하게 되고, 더 나아가 모든 이가 이러한 잠재력을 향유하고 있다는 자각도 얻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의 그리스도" 이것이 성숙한 크리스찬 공동체를 나타내는 좋은 표현이다. 당신보다 더 큰 어떤 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그 아름다움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 아룸다움의 원천도 반영하게 된다. 이제는 하나님이 내재하시는 어떠한 것과도 일치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다른 모든 사람 안에 살아 계시다는 깨달음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자발적으로 사랑을 보일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들을 인격, 인종, 국가, 성별, 신분 혹은 다른 특성들로(당신이 좋아하든 않든 간에) 보는 대신에, 이제는 아주 깊은 것, 즉 그 사람이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게 된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긴급히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를 보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잠재적 초월성이 아직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커다란 동정심을 가져온다.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사랑은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게 만들고, 우리의 새로운 독립감은 새로운 관계로 이끌어 가는데, 이 관계란 보통 일반적 관계와 같이 의존에 바탕을 둔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관계이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더 큰 자유로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게 하는데, 그 이유는 더 이상 자신의 이기적인 목표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고. 닥치는 현실을 현실 그대로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적인 사랑은 옷을 입듯이 입었다 벗었다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하나의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실에 대해 반응하는 올바른 방법이다. 그것은 나 자신을 포함하여 존재들(하나님이 존재이신 것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창조물과 모든 섭리: 역자 주)과 맺는 올바른 관계이다. 그리고 그 관계는 일차적으로 받아들이는 관계인 것이다. 누구도 자신이 신으로부터 받은 것 이상의 사랑을 가지지는 못한다. 일단 그 사랑을 받으면 현재 상황에 알맞은 방법으로 우리의 이웃에게 이것을 전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에 대해 응답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74. 하나님과의 일치의 상태를 하루 종일 유지하는 것이 이 기도의 목적인가?

그렇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렇게 잘 지속되지는 않는다. 기도가 발전하면서 후에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더욱 일치에 가까워 가고 있다는 증거들이 나타난다. 그리고는 감각에 영향을 주는 회상(回想)의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과 일치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이 더 높은 수준의 의식의 상태로 몸을 준비시키라고 내가 하는 말의 뜻이다. 육체적 황홀경은 신체의 허약함 때문이다. 하나님의 강력한 의사 소통에 견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감각의 포기 상태에서 신체로부터 탈혼하게 된다. 이러한 단계를 이미 거친 신비가는

신체적 황홀경을 경험하는 일이 적다. 그들은 신체적 상태와 이루는 영적인 교신 (communi

-cation)을 잘 조화시켜서 이전처럼 불편한 상태를 경험하지 않으면서도, 그것들(하나님께서 주시는 교신)을 받아들일 만큼 신체가 강하게 된다. 이제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된다. 만일 당신이 선(禪)에서 말하는 "십우도(十牛圖)"를 알고 있다면 열 번째의 소는 대오 각성(大悟覺醒) 후 평범한 삶으로 돌아온 것을 뜻함을 알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처음 시작한 삶과 이루게 된 삶 사이에 어떤 구별을 지을 수가 없다는 것을 상징하며 다른 접은 이 평범성 안에 완전한 변형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뿐이다.

사람들이 평범한 삶을 거룩하게 살 수 있도록 된 것은 은총이 승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에는 회상 속에 잠겨 드는 그러한 순간이 온다. 그 후 이 모든 것이 잘 조화를 이룬 다음에는 잠겨 드는 은총을 의식적으로 체험하지 않더라도 같은 은총이 주어진다. 이전에 하나님과 일치했던 정도 혹은 그 이상으로 평범한 일상 활동을 자유스럽게 영위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성령으로부터 왔다고 할 수 있을 때에는 온전한 의미의 기도를 계속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보다 못한 상태라면 우리는 하나님과 일치하기 위하여 무슨 방법을 써야 한다.

존재함(being)과 행위함(doing)에는 차이가 있다. 일단 자신의 존재가 그리스도로 변형을 이룬 다음에는 그 사람의 모든 행위는 그 내적 변형으로 도유(기름 부음)된다. 나는 이것이 마더 데레사의 커다란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분은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카메라가 그분을 좇아가는 것은 그분의 신체적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하나님의 신비스런 마력을 발산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이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지만 그분의 영적 상태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확신한다. (그분의 행함이 아니라 그분의 변형된 존재의 상태가 그분의 매력이라는 뜻이다 : 역자 주). 이것이 바로 관상 기도가 이끌어 주는 변형의 종류라고 말할 수 있다. 영적인 발전의 낮은 수준에서는 매우 쉽게 지쳐 버린다. 그러나 앞으로 더 나아가도록 도전이 따르는데 우리가 이 도전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그 여정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성모님보다 더 영적으로 성장하신 분은 없다. 그 이유는 그분의 성장을 막을 아무런 내적 장애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에게 있어서 은총 안에서의 성장이란, 끊임없는 시련을 받으면서, 일상적인 인간적 조건 상태에서 성장하셨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분은 가장 무거운 시련을 받으셨다. 변형으로 일치하면, 덜 발전한 크리스찬보다 훨씬 더 큰 시련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만일 영적인 성장을 하고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영적 성장을 쌓아가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이 거룩해진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지는 않으시리라고 확신한다. 하나님은 거룩해진 사람들이 무엇을 하기를 원하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거짓 자아에서 해방시켜 주셨다면 거기에는 어떤 목적이 있으셨을 것이다.

이제 누가 내적 부활, 변형으로 일치함에 이르고, 더 이상 정서적 혼란을 겪지 않고 그것들이 모두 성덕으로 바뀌었다고 하자. 그리스도는 이러한 사람들 속에 경이스러운 방법으로 살고 계시며, 그들 또한 그분과의 영원한 일치를 인식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러한 각성의 상태를 버리고 이전에 그들이 감당했던 혹은 그보다 더 나쁜 시련을 받으라고 하셨다고 치자. 그들의 하나님과의 일치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들의 정신 수준에서는 이 일치가 완전히 감추어진다. 이것이 대리적 고통(vicarious suffering)의 형태이다. 변형적 일치는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공짜표가 아니다. 어떤 이에게 이것은 완전한 고독과 적막의 생활일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신적일치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도적 활동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 어떤 이에게는 어떤 특수한 지향이나 혹은 전 인류를 위한 극심한 신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을 뜻할 수 있다. 예수께서 그분의 신성한 위엄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인류의 구원자가 되신 것과 같은 이유로 그들의 변형된 인류애 때문에 그들의 고통들은 커다란 가치를 갖게 된다.

소화 데레사는 최후의 병상에서 그 때까지 큰 즐거움이었던 천국에 대한 생각을 더 이상 즐길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의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받은 것으로 보아 변형적 일치에 이르렀음이 분명하다. 그녀가 어렴풋이 인식했듯이 그녀는 그 당시의 불신자들 때문에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었다. 데레사는 이성주의의 와중에서 살았고, 그 때는 인간적 지력을 숭배하는 데서 오는 오만함이 절정에 다다랐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영적 여정의 가장 큰 시련은 변형적 일치를 이룬 다음에 올 수 있다. 그렇다고 일치가 사라지지는 않는데 그것이 아주 순수하면, 빛줄기가 진공관을 통과하듯 그것을 감지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닳는 가장 심오한 길인데, 바울이 말하듯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상태의 결과를 짊어지시려고 하나님이시기를 스스로 포기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허약함을 스스로 체험하시고 우리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려고 하나님과의 고유한 일치의 관계의 특권을 포기하셨다. 이러한 희생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었으면서도 하나님의 요청에 따라 이 상태를 향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견디기 힘든 시련으로 들어간 사람들에 의해서만 닳아질 수 있다. 이것은 많은 신비가와 성인들을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어떤 이가 한번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면 그 삶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러한 삶이 된다. 그 삶은 경이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당신이 그들에게서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확실히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당신이 영적 여정에서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모든 기대를 포기함으로써만이 아메리칸 인디언의 관상 기도 용어인 치유의 호수(Medicine Lake)에로 이끌릴 것이다.

관상 기도는 여러 가지 단계와 변천을 거치게 된다. 당신을 혼동하게 만드는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한다. 주님께서는 책을 통해서, 어떤 사람을 통해서, 그리고 혹은 당신 자신의 인내를 통하여 도움을 주실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은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으시고 내버려 두시기도 한다. 어쩌면 불가능한 상황을 견디며 살아가도록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불가능한 상황을 평정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영적 여정에서 상당히 앞설 것이다. 당신은 고독과 실존적 처절함에 부딪칠 것이다. 이 세상에 당신을 이해하거나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낄 것이며 하나님은 몇 억 광년이나 멀리 떨어져 계신 것처럼 느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준비의 과정이다. 하나님은 농부와 같이 당신 영혼의 땅에서 40배 60배가 아니라 100배의 수확을 올릴 수 있도록 준비하신다. 그것은 땅이 잘 갈아져야 함을 뜻한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 위를 트랙터로 한 방향으로 그 다음에는 다음 방향으로 또 그 다음에는 빙빙 돌면서 땅을 가시는 것과 같다. 그분은 그 흙이 고운 모래같이 잘 갈아질 때까지 그러기를 거듭하신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을 때 씨를 뿌리신다.

아니면 자라나는 나무를 상상해 보자. 처음에는 나무 기둥과 가지뿐이다. 그 후에 잎이 돋는다. 이 때에 나무는 아름답게 보인다. 이때를 당신이 처음에 내적 침묵에 들어가기를 배운 때에 생기는 즐거움에 비길 수 있다. 잎이 난 뒤에 꽃이 피는데 이 때가 깊은 만족의시기로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꽃은 곧 시들고 땅에 떨어진다. 열매는 계절의 마지막에 열리는데 그것도 나무에서 익으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러므로 나뭇잎이 돋아나고 꽃이 필 때 여정의 끝에 다다랐다고 생각하지 말라. 영적 여정은 멀고 먼 여정이다.

그뿐만 아니라, 여정은 당신의 체험이 순환함(cycling)을 보게 되는데, 이 때에 처음에 시작한 곳으로 되돌아가서 아무런 진전이 없었던 것으로 느끼기도 할 것이다. 순환함은 마치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다. 당신이 시작한 곳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층 높은 수준에 있는 것이다. 독수리는 태양을 향해 빙글빙글 돌면서 제자리에 오지만 실은 수직상으로 더 높은 곳에 이른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의하면, 우리의 영혼으로 들어오는 거룩한 빛은 어둠의 빛줄기이다. 어두운 방에 비치는 빛줄기가 보이는 것은 먼지 때문이다. 만일 먼지가 없다면, 그 방을 통과하는 그 빛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관상 기도가 완전히 발전했다는 상징인데, 그 상태가 너무 순수해서 그것을 받는 이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변형이 진전하여 외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람은 어떤 성사(聖事)보다도 하나님을 더 잘 나타낸다.

이것이 바로 무염 시태 축일의 의미인 것이다! 우리도 성모님의 시초의 모습-하나님 현존과 활동을 순수하게 투과시키시는 모습을 가지라고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다. 관상 기도는 관상 상태에 이르게 해주는 학교이며 하나님은 이것을 이용하여 우리가 일치의 상태에 머물도록 해주신다. 이 상태에 들어가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흘러 들어옴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에 성령께서 영감을 주시고 성령께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되어 주신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