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성화(聖化)와 견인(堅忍)

 

 

성도의 성화(聖化)

 

1. 성화에 대한 성경의 용어들

 

거룩하게 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qadash, 카다쉬)절단하다(to cut)’라는 뜻의 어근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며, 따라서 구별의 개념을 강조한다. 이것이 신약성경의 단어(hagiazo, 하기아조)의 주된 개념이기도 하다. 성화라는 주제를 다룰 때는 이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성화를 무엇보다도 영적 갱신으로, 즉 인간에게 도덕적영적 자질들을 부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것은 성화의 원 뜻이 아니다. 성경의 단어들은 영적 자질들이 마음에 부여된다는 개념보다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위치 혹은 관계의 개념을 표현한다.

성화되는 사람은 원칙상 죄악 된 삶에서 끌어올려져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에 놓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 그분께 대한 봉사를 위해 구별된다. 구약성경은 외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구별된 혹은 성별된 사람들과 사물들을 거론하는 가운데 거룩한 사람들과 거룩한 사물들을 거듭해서 말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위한 이 외적 성별은 더 깊고 내면적인 마음의 헌신을 상징했다. 하지만 성경의 단어들이 우선적으로 관계를 가리킬지라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인간 안에 주관적 성결을 일으키시는 사역을 가리키기도 한다(17:17; 20:32, 26:18; 고전 1:2; 살전 5:23).

 

 

2. 거룩함과 성화의 성경적 개념

 

성경에서 거룩함의 개념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적용된다. 이것이 주로 가리키는 것은 하나님에서 피조물과 절대 구분되시며, 천상의 엄위로 피조물로부터 높이 떨어져 계시며, 따라서 피조물이 근접할 수 없는 분이라는 점이다. 이 첫째 개념에서부터 점차 둘째 개념이 발전했다. 죄 많은 인간은 죄 없는 존재보다 하나님의 위엄을 한층 예리하게 의식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엄위로운 순결에 비추어 자신의 불결을 의식하게 된다(참조. 6). 따라서 하나님이 피조물과 구별되신다는 개념이 하나님께서 모든 불결로부터, 특히 죄로부터 구별되어 계신다는 개념으로 넘어갔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24:3 이하). 하지만 이것조차 전부가 아니다. 적극적인 면에서,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개념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라는 개념으로 점차 발전하여 결국 거의 동일한 의미가 된다.

둘째로 거룩함의 개념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에게도 적용된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과 성전 같은 거룩한 장소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같은 거룩한 사람들이 있었고, 제사들과 결례(潔禮)들 같은 거룩한 의식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과 사물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구별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특정인들을 외적으로 성별한 것은 단지 마음의 내면적 성별을 상징하는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며, 언제나 그러한 내면적 성별을 수반하지만은 않았다. 성별되었으면서도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전혀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었다. 오직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가진 사람들만 주님께 진정으로 거룩했다.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윤리적 성품들이 그들의 마음에 전달된다. 이러한 구약적 거룩함의 개념이 신약성경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성경적 거룩함의 개념은 단지 그 자체로 도덕적 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본 윤리적 선이라는 것을 유념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도덕적으로 크게 향상된 것을 자랑할지라도 성화의 사역에는 전혀 문외한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성경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향상될 것을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관련하여 도덕적으로 향상될 것을 요구한다.

성화는 성령께서 죄인을 죄의 오염에서 씻어주시고, 그의 전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새롭게 하시며, 그에게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자비롭고 끊임없는 사역으로 정의할 수 있다.

 

 

3. 성화의 특징들

 

1) 성화의 창시자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이 성화의 과정에서 철저히 수동적으로 남는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은 성화의 일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도록 주신 방편들을 부지런히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고 또 협력해야 한다(고후 7:1; 3:5-14; 벧전 1:22).

2) 성화는 칭의처럼 하나님의 법적 행위가 아니라, 도덕적인 재창조 행위이며, 이 행위로써 죄인은 내적 존재가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형상에 점진적으로 부합하도록 만들어진다.

3) 성화는 대체로 기나긴 과정이며, 이생에서는 완성에 도달하지 않는다. 중생과 회심이 있은 뒤 곧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에는 당연히 그 과정이 매우 짧을 수 있다.

4) 성화 과정은 영혼에 관한 한 죽을 때 혹은 죽은 직후에 완성되며, 육체에 관한 한 부활 때 완성된다(3:21; 12:23; 14:5, 21:27).

 

 

4. 성화의 본질

 

1) 성화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화가 인간 의지에 동기들을 불어넣고 그로써 더욱 성결에 힘쓰도록 설득함으로써, 중생 때 그에게 심겨졌던 새 생명을 이끌어내는 것일 뿐이라는 그릇된 견해를 주장한다. 실제로 성화는 중생 때 부여된 거룩한 성향이 강화되고, 그 거룩한 실천이 증대되는,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적 사역이다. 본질상 그것은 일부분은 직접적이고 일부분은 간접적인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께서 방법들을 사용하시는 한도에서, 인간은 그 방법들을 올바로 사용함으로써 협력할 의무가 있다(살전 5:23; 13:20, 21; 고후 7:1; 12:14).

 

 

 

2) 성화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1) 옛 사람의 억제

성화의 소극적인 면은 죄로 말미암는 인간 본성의 오염과 부패가 점진적으로 제거되는 데 있다. 옛 사람, 즉 죄에 오염된 인간 본성이 점차 십자가에 못 박힌다(6:6; 5:24).

 

(2) 새 사람의 소생

성화의 적극적인 면은 영혼의 거룩한 성향이 강화되고, 그 거룩한 실천이 증대되며, 그로써 새로운 삶의 과정이 시작되는 데 있다(6:4, 5; 2:12, 3:1, 3). 성화가 이끄는 새로운 삶을 가리켜 하나님을 향한 삶이라고 한다(6:11; 2:19).

 

3) 성화는 전인(全人)에 영향을 준다.

성화는 마음에 발생하기 때문에 자연히 전체 유기체에 영향을 준다. 속사람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외적 생활에도 변화를 일으키게 마련이다(6:12; 고전 6:15, 20; 고후 5:17; 살전 5:23). 성화는 특히 죽음의 위기와 죽은 자의 부활에서 완성된다. 성경은 성화가 지식에 영향을 주고(31:34; 6:45), 의지(36:25-27; 3:13), 감정(5:24), 양심(1:15; 9:14)에도 영향을 준다고 가르친다.

 

4) 성화는 신자들이 협력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인간이 성화 사역에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은 악과 유혹에 대한 거듭된 경고(12:9, 16, 17; 고전 6:9, 10; 5:16-23)와 거룩하게 살라는 끊임없는 권면(6:8; 15:2, 8, 16; 8:12, 13, 12:1, 2, 17; 6:7, 8, 15)에 잘 나타난다.

 

 

5. 이생에서 성화의 불완전성

 

성화는 인간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줄지라도, 신자들이 이생에서 이뤄가는 영적 발전은 불완전하게 남는다. 신자들은 살아 있는 동안 죄와 싸워야 한다(왕상 8:46; 20:9; 7:20; 3:2; 요일 1:8).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는 육체와 영 사이에 전쟁이 끊이지 않으며, 심지어 그들 중 아주 훌륭한 사람들조차 완전을 위해서 여전히 분투한다(7:7-26; 2:20, 5:17; 3:12-14). 죄의 자백과 사죄를 바라는 기도가 필요한 일로 언급된다(9:3, 20; 32:5, 130:3; 20:9; 64:6; 9:16; 7:14; 6:12, 13; 요일 1:9).

완전주의자들은 이 진리를 부정한다. 그들은 인간이 이생에서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성경이 신자들에게 완전하라고 명령하는 사실(벧전 1:16; 5:48; 1:4), 종종 신자들을 가리켜 거룩하고 완전하다고 하는 사실(고전 2:6; 고후 5:17; 5:27; 5:14; 3:15; 2:10), 성경의 어떤 성도들, 이를테면 노아(6:9), (1:8), 아사(왕상 15:14) 같은 사람들이 완전한 삶을 살았던 사실, 사도 요한이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들은 범죄치 않는다고 천명한 사실(요일 3:6, 8, 9, 5:18)을 근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이런 예들은 근거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중생한 사람들뿐 아니라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성결을 요구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도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음을 입증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성경이 경우에 따라서 신자들을 완전하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꼭 그들이 죄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다고, 즉 원리상 완전하다고, 혹은 충분히 장성했다는 의미에서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전 2:6, 3:1, 2; 5:14; 딤후 3:17).

성경은 죄 없이 살아간 신자들의 예를 보여 주지 않는다. 모범으로 언급된 사람들조차 중대한 죄에 빠졌다(9:21; 3:1; 대하 16:7 이하). 그리고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은 범죄치 않는다는 요한일서의 말씀은 새사람이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신자가 죄 가운데서 그냥 눌러 살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욱이 요한의 이 진술, 즉 신자가 사실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진술은 완전주의자들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말씀인 줄을 알 것이다. 아무리 완전주의자들일지라도 그렇게까지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완전주의자들의 주장은 무의미하다.

 

 

6. 성화와 선행

 

성화는 자연스럽게 선행을 행하는 삶으로 귀결된다. 선행은 성화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여기서 상고할 것은 바로 성화의 결실인 선행이다.

 

1) 선행의 본질

우리는 선행을 말할 때 완전한 행위라는 뜻으로 말하지 않고, 적어도 원리상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조건들에 부응하고, 영적 의미에서 선한 행위라는 뜻으로 말한다. 이러한 선행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원리와 그분의 뜻을 행하려는 의욕에서 솟아난다(6:2; 삼상 15:22; 1:12; 7:17, 18, 12:33). 선행은 하나님의 율법을 외적으로 준수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타난 뜻에 의식적으로 순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선행의 목전의 목표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이다(12:1; 고전 10:31; 3:17, 23).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난 사람들만 그러한 선행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어떤 의미로도 선행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과 모순될 것이다(왕하 10:29, 30, 12:2, 14:3; 6:33; 2:14). 중생하지 못한 사람도 겉으로는 율법에 부합하고, 동료 인간들을 배려하려는 고상한 동기들에서 우러나오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만한 가까운 목표에 부합하는 행위들을 할 수 있다. 이런 행위들은 오로지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서 그 설명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행위들을 가리켜 일반적으로 선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럴지라도 이 행위들은 근본적인 결핍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영적 뿌리에서 잘려나가 있고,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진지한 내적 순종을 조금도 나타내지 못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2) 선행의 공로적 성격

신자들의 선행은 엄격한 의미에서 공로가 아니다. , 신자들의 선행은 자연스럽게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내적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의 선행을 보상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의무를 지고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조건에 부합한 행위에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부모가 경우에 따라 자녀들에게 내리는 상과 비슷하다. 성경은 신자들의 선행이 공로가 아니라고 분명히 가르친다(17:9, 10; 5:15-18, 6:23; 2:8-10; 딤후 1:9; 3:5).

그것이 공로가 될 수 없는 여러 이유가 있다. 신자들은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며, 따라서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린 것을 가지고 공로라고 할 수 없다(17:9, 10).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매일주시는 힘이 아니면 선행을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선행을 공로로 내세울 수 없다(고전 15:10; 2:13). 아무리 훌륭한 선행이라도 불완전한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순종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하시지 않는다(64:6; 3:2). 신자들의 선행은 영광스러운 영원한 상과 도무지 비교할 수 없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죄인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뒤에는 공로가 되는 행위, 즉 구원과 영광을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게 하는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3) 선행의 필요성

선행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그럴지라도 이 필요성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선행은 구원의 공로를 쌓는 데 필요하지 않고, 심지어 구원의 필수 조건도 아니다. 유아들은 어떠한 선행도 하지 않고서도 천국에 들어간다. 성경은 선행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럴지라도 성인(成人) 신자들의 삶에 선행이 꼭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기 때문이고(7:4, 8:12, 13; 6:2), 그것이 신앙의 열매이기 때문이고(2:14, 17, 20-22), 감사의 표시이기 때문이고(고전 6:20), 신앙의 확신을 위해서이며(벧후 1:5-10),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이다(15:8; 고전 10:31).

선행의 필요성은 율법 폐기론자들에 대해서 반드시 견지되어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위해서 죽으셨으므로 신자들이 삶의 준칙으로서의 율법을 지킬 의무에서 해방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철저히 잘못된 입장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언약의 의무인 율법을 완성하셨고, 자기 백성을 위해서 율법의 형벌을 담당하셨지만, 자신을 위해, 그리고 오직 자신을 위해 삶의 준칙으로서의 율법을 지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신자들에게 원리상 스스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며, 그 결과 그들은 어떠한 강제에 의하지 않은 채 마음으로부터 자진하여 율법에 순종한다.

 

 

성도의 견인(堅忍)

 

1. 성도의 견인의 본질

 

개혁교회만이 사실상, 그리스도인이 은혜의 상태에서 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 소지니파, 아르미니우스파, 심지어 루터교조차 그리스도인이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성도의 견인을 믿지 않는다. 이 교리는 오해하기가 쉽다. 그 명칭은 신자들이 인내하며 구원의 길을 가는 꾸준한 행위를 자연스럽게 암시한다. 하지만 이 인내(견인)는 비록 신자들이 협력하는 행위로 간주할 수 있긴 하지만 주로 신자들의 행위인 것은 아니다. 신자들은 만약 그들 홀로 남겨진다면 넘어지고 말 것이다. 엄격히 말해서, 견인하시는 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견인은 신자의 마음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지속되어 완성에 이르도록 성령께서 신자 속에서 끊임없이 행하시는 사역이다.

 

 

2. 견인 교리의 증거

 

견인 교리는 성경의 직접적인 진술들로 입증될 수 있다(10:25, 29; 11:29; 1:6; 살후 3:3; 딤후 1:12, 4:18). 이 교리는 선택 교리의 귀결이기도 하다. 선택 교리가 가르치는 바는 단지 구원의 어떤 수단이나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만 선택되지 않고 완전한 구원이라는 목표도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견인은 그리스도의 공로들과 중보의 효과에서도 추론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신 사람들은 다시 정죄 아래로 떨어질 수 없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끊임없이 중보하시는 일은 언제나 효과가 있다(11:42; 7 :25). 견인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이루는 신비한 연합에서도 자연스럽게 추론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 한번 심겨지고 그로써 영생을 얻은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그리스도의 몸에서 단절되며 이 생명을 잃을 수 있겠는가? 영생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이 과연 타당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견인은 신자들이 이생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추론된다(3:14, 6:11, 10:22; 벧후 1:10). 만약 신자들이 어느 순간에든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3. 견인 교리에 대한 반론들

 

견인 교리가 거짓 안전과 나태와 방종과 부도덕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이 자주 제기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보호하심을 받는다고 가르치면서도, 우리가 끊임없이 경성하고 근면하고 기도에 힘쓰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생각을 권장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성경에는 이 교리에 반대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제시하는 세 부류의 구절들이 있다.

(1) 만약 신자가 타락할 수 없다면 불필요하게 될 배교를 경고하는 구절들(24:12; 1:23; 2:1, 3:14, 6:11; 요일 2:6). 하지만 이 구절들은 신자가 견인 사역에 반드시 협력해야 함을 입증할 뿐이다. 사도행전 27: 22-2531절과 비교해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된다.

(2) 신자들에게 성화를 위해 계속해서 힘쓰라고 권면하는 구절들. 만약 신자들이 그들의 존속에 의심이 없다면 이런 권면들이 불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권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시기 위해서 도덕적 방법들을 쓰신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3) 실제로 배교한 사례들을 기록하는 구절들(딤전 1:19-20; 딤후 2:17, 18, 4:10; 벧후 2:1, 2). 하지만 그 구절들에 언급된 사람들이 참된 신자들이라는 증거가 없다. 성경 자체가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신앙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고 가르친다(9:6; 요일 2:9; 3:1). 사도 요한은 그런 사람들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요일 2:19).

 

필자는 위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고, 결론을 말하려 한다.

성화는 성령께서 죄인을 죄의 오염에서 씻어주시고, 그의 전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새롭게 하시며, 그에게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자비롭고 끊임없는 사역으로 정의할 수 있다.

견인은 신자의 마음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지속되어 완성에 이르도록 성령께서 신자 속에서 끊임없이 행하시는 사역이다.

관상기도는 성령의 사역으로 기독교교리의 구원의 서정 중에서 성화와 견인의 사역의 하나라고 말하려 한다. 하나님의 성령의 성화와 견인 사역 없이 인간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일에 인간 스스로 협력해야 할 부분도 있어서 인내하면서 수련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 하는 것이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