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믿음소망사랑의 실천

 

 

믿음과 소망 사랑의 관계

 

1. 히브리서 111절에 있는 믿음

 

믿음의 본질은 믿음의 합당한 기초가 되는 약속의 실체를 통해 제일 낫고 명백하게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약속이 제거될 때 믿음은 완전히 무너지거나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에 근거하여 믿음 을 정의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가 내린 정의 아니면 그가 믿음을 논의하면서 적용시킨 묘사,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11:1, 참고. Vg.)라는 구절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가 여기에서 사용한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은 경건한 마음이 기대고 쉴 수 있는 일종의 밑받침을 의미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도는 마치 믿음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확실하고 안전하게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단 누군가가 휘포스타시스를 신뢰라는 뜻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때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보다 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을 취하지만 이런 해석도 싫어하지는 않는다.

한편 바울이 의미하려고 하는 것은 책들이 펴 놓일’(7:10) 마지막 때까지 우리의 구원에 속한 일들은 너무나 고상하기 때문에 우리의 감각으로 느끼거나 눈으로 보지 못하며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는 것이며, 또한 그 마지막 날까지 우리는 우리의 감각의 모든 한계들을 넘어서고 우리의 지각을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의 건너편으로 향하게 하고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 자신을 초월하는 것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이러한 일들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소유에 대한 확신은 소망 가운데 있고 그러므로 보지 못하는 일들에 대한 것이라고 그는 덧붙이고 있다.

바울이 기록하고 있듯이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8:24). 바울은 그것을 지시혹은 증거’ -혹은 어거스틴이 종종 번역하고 있듯이 현재 존재하고 있지 않는 것들에 대한 확신(‘확신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λεϒχος이다, 11:1)- 라고 부르고 있는데, 여기에서 바울은 마치 믿음은 나타나지 않은 것들의 증거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보는 것이요 애매모호한 것들의 선명함이요 현재 없는 것들의 있는 것이요 감추어진 것들의 드러남이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비밀들, 그리고 특별히 우리의 구원에 속한 비밀들은 그것들 자체로는 인식될 수가 없으며 또한 말하자면 그 자체의 성격상으로도 인식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볼 수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행해졌고 성취된 것으로 간주할 만큼 하나님 말씀의 진리에 대해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

(믿음과 사랑)

그러나 사람의 지성이 일깨워져서 신적인 선하심을 맛보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동시에 불붙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해 두신 그 풍성한 감미로움을 알려지게 되면 우리는 동시에 크게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일단 한 번 그것에 의해 감동을 받게 되면 사람은 그 감미로움에 휩싸여 이끌려 가게 된다.

그러므로 만일 왜곡되고 사악한 마음이 그런 감정을 체험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편 우리는 그런 감정으로 하늘에까지 이끌려 들어가서 가장 깊숙이 숨겨진 하나님의 보화들과 하나님 나라의 가장 거룩한 장소들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된다. 이러한 장소들은 부정한 마음이 들어가 더럽혀져서는 안 되는 곳이다.

사랑은 믿음과 소망보다 먼저 있다고 하는 스콜라 철학자들의 가르침은 미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서 처음으로 사랑을 일으키는 것은 오직 믿음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는 베르나르드의 말은 얼마나 더 올바른가! 즉 바울이 경건한 자의 자랑’(고후 1:12)이라고 부르고 있는 양심의 증거는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나는 믿는다. 첫째로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비를 떠나서는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선행을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선행을 할 수 없다. 끝으로, 여러분은 그것이 값없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 어떤 행위로도 영생을 얻게 하는 공로를 세울 수 없다.

조금 지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즉 이런 것들은 충분하지 않고 다만 믿음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믿음과 동시에 우리는 구원이 우리를 위해 예비되어 있다는 성령의 증거를 믿어야만 그들이 죄 용서함을 받게 된다는 것을 믿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죄를 사하시고 공로를 인정해 주시고 상급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초보 단계에 굳게 설 수 없다는 것도 역시 믿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문제들은 적절한 곳에서 논의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단지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에 만족하도록 하자.

 

 

2. 믿음과 소망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살아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영원한 구원에 대한 소망을 그 불가분리적인 동반자로서 곁에 함께 두고 있어야 한다. 아니 오히려 믿음은 그 자체에서 소망을 일으키고 낳는다. 이 소망이 제거된다면 우리가 아무리 웅변적으로 또는 우아하게 믿음에 관해 논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전혀 믿음이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만일 믿음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진실성을 확고히 믿는 것이라면 -그것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우리를 속이거나 헛되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면- 이런 확신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들, 즉 그들이 절대로 참되다고 믿는 약속들을 성취하실 때가 앞으로 오게 되리라는 것을 확고히 기대할 것이다.

따라서 간단히 말하자면 소망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믿음이 하나님에 의해 참으로 약속되었다고 믿는 것들을 기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믿음은 하나님이 진실하시다고 믿으며, 소망은 그의 진실이 나타나게 될 시간을 기다린다. 믿음은 그가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을 믿으며, 소망은 그가 친히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심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를 기대한다. 믿음은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믿으며, 소망은 그것이 언젠가 계시될 것을 기대한다. 믿음은 소망이 근거를 두는 기초이며, 소망은 믿음을 키워 주고 유지시켜 준다. 하나님의 약속들을 이미 믿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하나님에게서 아무것도 구할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이 무너지거나 희미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의 연약성이 오래 참는 소망과 기대에 의해 유지되고 양육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올바르게 우리의 구원을 소망에 두고 있다(8:24). 소망은 고요하게 주님을 기다리면서 믿음이 너무 서두르다가 넘어지지 않도록 억제시킨다. 소망은 믿음을 강하게 만들어 줌으로써 하나님의 약속들 가운데 흔들리거나 그것들의 진실성에 대해 의심하지 못하게 한다. 소망은 믿음을 새롭게 만들어 줌으로써 지치지 않게 해 준다. 소망은 믿음을 그 마지막 목적지에 이르게 될 때까지 유지시켜 줌으로써 중도에서 아니 첫 출발점에서 넘어지지 않게 해준다. 간단히 말해서 소망은 믿음을 새롭게 하고 회복시켜 줌으로써 계속적으로 믿음을 인내로써 기운을 내게 해 준다.

만일 우리가 얼마나 많은 종류의 시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공격하고 때리는지에 대해 생각한다면 믿음을 세우기 위해서는 소망의 뒷받침이 여러 방면에서 얼마나 필요한지를 더욱더 잘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주께서는 자신이 약속하신 것들을 늦추심으로써 종종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오랫동안 초조한 마음상태에 두실 때가 있다. 여기에서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2:3)고 한 예언자의 말을 시행케 하는 것이 소망의 역할이다.

어떤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연약한 상태에 빠져드는 것을 허용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향해 노골적으로 분노를 나타내 보이시기도 한다. 이럴 때에 소망이 우리를 도와서 다른 선지자가 말한 대로 야곱 집에 대하여 낮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릴”(8:17) 필요가 더욱더 절실해진다. 또 베드로는 기롱하는 자들이 일어나서(벧후 3:3),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4)라고 물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상 육신과 세상은 우리에게 이와 동일한 말들로 속삭인다. 여기에서 우리는 끝까지 인내하는 소망으로 우리의 믿음을 지속적으로 버팀으로써 천 년을 하루같이 여길 정도로(90:4; 벧후 3:8) 영원을 고정적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3.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의 자비라는 동일한 기초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연관성과 유사성 때문에 성경은 종종 믿음소망을 서로 바꾸어서 사용하고 있다. 베드로가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다고 가르칠 때(딤전 1:5) 그는 믿음을 소망에 해당되는 어떤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소망은 믿음의 영양분과 힘이기 때문이다.

때로 이 두 단어는 동일한 서신에 나오고 있는 것처럼 함께 결합되기도 한다.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21).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소망으로부터 기대가 나오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참고 소망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나타나게 되기까지 우리 자신의 욕망을 유보시키기 때문이다(1:20). 이 모든 문제는 이미 인용한 바 있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다(1).

다른 구절에서 비록 부정확하기는 하지만 바울은 동일한 의미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5:5). 즉 그 이유는 값없이 주어진 사랑에 관한 복음의 증거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지금 소망 아래에 감춰져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보여 주실 때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피터 롬바르드는 소망의 기초를 두 가지, 즉 하나님의 은혜와 행위의 공로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는 이제 분명해지고 있다. 소망이 가지고 있는 목표는 믿음이 가지고 있는 목표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믿음의 유일한 목표는 하나님의 자비라는 것을 분명히 말했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두 눈을 떠서 그 목표를 바라보아야만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롬바르드가 그럴듯하게 제시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는 말하기를, “여러분이 감히 공로 없이 어떤 것을 소망한다면 그것은 소망이 아니라 과대망상이라고 불려야만 한다고 하였다.

친애하는 독자여, 하나님이 참되시다고 믿는 사람을 무모하고 과대망상적인 행동을 하는 자라고 공언하고 있는 이런 짐승과 같은 자들을 무시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닐까? 주께서는 우리가 모든 일들이 그의 선하심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고 기다리기를 원하시는데, 그들은 그것에 의지하고 바라는 것을 과대망상적인 행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선생은 선생이다! 그들이야말로 논쟁을 일삼은 자들의 미친 학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학생들에게 값어치 있는 선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죄인인 우리가 구원의 소망을 품으라는 명령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받은 것을 알았을 때 하나님의 참되심을 기꺼이 믿음으로써 오직 그의 자비하심만을 의지하고 행위에 의존하는 것을 버리고 감히 선한 소망을 가지도록 하자. “너희 믿음대로 되라”(9:29)고 말씀하신 그분은 결코 속이지 않으실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의 향주덕

 

 

1. 믿음

 

믿음소망사랑이라는 세 가지 덕들은 향주덕(向主德), 혹은 대신덕(對神德)이라고 한다. 향주덕은 우리가 거룩하신 삼위와 돈독한 우정을 나누면서 살아가려는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덕이다(5:2-5). 다른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할지라도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고전 13:13) 이 세 가지 덕의 근원과 동기와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그래서 인간적인 덕들은 인간의 능력을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기에 적절하게 해주는 향주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향주덕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행위의 기초가 되며 그 행위에 활력을 불어넣고 특징을 부여하기때문이다. 영혼이 하나님과 일치로 건너가기 위해(‘’, 1, 2,1) 반드시 끌어들여야 하는 매개체는 향주덕이다. 향주덕을 통하여 영혼이 지니고 있는 감관의 능력들은 물론 지성과 의지와 기억을 온전히 정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두움을 헤쳐 나가는 데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역시 향주덕이다. 어두운 밤의 최종 목적 역시 자연적이며 초자연적인 모든 것들을 지성과 의지와 기억에서 모두 없애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와 목표는 바로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세 향주덕으로 이루어진다. …… 요컨대, 믿음과 소망은 사랑 안에 담겨 있다. 죄와 죽음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사랑은 죽음과 죄보다 더 강하다고 선언한다. …… 사랑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며 일반적인 인간애나 박애도 아니다. ……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개인과 역사 안에서 사랑의 마지막 승리를 믿는 것이다. 소망과 믿음을 그토록 어렵게 만드는 것은 세상이 제시하는 전혀 다른 전망 때문이다. 세상은 아직 하나님 사랑의 투명한 표지로 바뀌지 않았다. 그렇지만 믿음으로 내세우는 사랑이 참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세상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변화시켜야 한다. 사랑은 인간에게 사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라고 요구하므로, 사랑은 하나님의 전능을 드러낸다. 다만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하나님의 겸손이 그리고 인간의 죄를 참아 주시는 하나님의 인내가 부활날 아침에 이룬 승리의 보편화를 미루고 계시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가 하나님 아들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협력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사랑이 승리하여 그 힘이 온전히 드러날 것이다. 전능한 사랑의 힘이 널리 퍼져 나갈 것이다. 만일 믿음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믿음도 소망도 헛된 것이다. 교회는 소망의 토대인 과거 사건과 소망의 미래 성취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지금 사랑을 체험할 때에 비로소 믿음은 과거사건을 바르게 보고 해석하는 눈을 지니게 되고, 이 세상의 풍조를 거슬러 소망의 투쟁을 계속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된다.”

영혼이 이 향주덕으로 단순히 신랑의 은총과 우정을 얻는 것뿐만이 아니라 세 가지 원수들(세상악마육체)로부터 안전하고 든든하게 나가게 될 것이다”(‘’, II,21,3). 그리고 영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내외적인 모든 것들을 없애버리고 어둡게 하려고 원하면 원할수록 믿음이, 그리고 부수적으로 사랑과 소망이 영혼 안에 부어지는데 이 향주덕은 하나처럼 작용한다”(‘산길’, I,24,8). 만일 영혼이 모든 외적인 징표들과 현상들에서 마음이 떠났다면 매우 순수한 믿음은 더욱 높아질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영혼에게 더욱 강하게 믿음을 심어주시고 키워주실 것이다. 이때에 사랑과 소망도 키워주시는데 믿음의 어둡고 적나라한 습성을 통하여 영혼에게 아주 높고 거룩한 깨달음을 즐기게 한다. 또한 애덕을 통하여 사랑의 엄청난 달콤함을 즐기게 하고, 소망을 통하여 영혼의 기억 안에서 만족을 느끼게 한다(‘산길’, 11,6,1). 이렇게 향주덕이 영혼에게 만들어주는 유익함은 놀랄 만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영혼의 완전한 일치를 위하여 향주덕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중요한 것이다(‘산길’, III,32,4). 특히 영혼의 혼인 예복으로서 적합한 것은 오직 향주덕이어야 하며, 그 복장의 색깔은 흰색(믿음)초록색(소망)빨간색(사랑)이라고 한다(‘’ II,21,4- 12; ‘산길’, II,11,5-9). 결국 향주덕은 영혼을 하나님보다 못한 모든 것에서 떼어놓는 직무를 지니고 있으며, 영혼을 하나님과 합치게 하는 직무를 가지고 있다”(‘’, II,21,11).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향주덕에 대한 개념은 스콜라신학에서 말하는 그 개념과 일치하면서도 차이가 있는, 매우 독창적인 것이다. 그리고 향주덕을 떠나서는 십자가의 요한의 신비신학을 말할 수 없다.

믿음은 일종의 내재적 선으로거룩한 실재인 삼위일체는 물론 구원경륜을 깨닫도록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상으로 주시는 선물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에 대한 내적인 동의다.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은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실체이시고 믿음의 내용이시며, 믿음은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것”(‘노래’, 1,10)이라고 가르친다. 또한 믿음의 실체이며 내용을 초라한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이 되신 하나님, 즉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이외에 더 이상 드러낼 믿음이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산길’, II.22.7)이라고 한다. 또한 믿음을 샘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와 그분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적인 선물들을 통해서만 영혼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4:10). 더 나아가서 믿음은 그리스도께 대한 것이며, 진리들처럼 순수하고, 강하고 밝으면서 자연적인 형상들로부터 깨끗해진 것이라고 한다(‘노래’, 12,3). 영혼이 하나님을 찾으려면 믿음과 사랑 안에서 그분을 찾아라. 세상의 사물들에게서 기쁨을 찾으려거나 즐기려거나 알아야 하는 것 이상으로 깨우치려 하지 말아야 한다. 믿음과 사랑, 이 두 가지는 네가 모르는 곳, 즉 하나님께서 숨어 계신 곳으로 너를 인도해주는 장님을 인도하는 어린아이다. …… 믿음은 하나님께로 가는 발이며, 사랑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의 안내자이다. 영혼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면서 믿음의 신비들과 은밀한 것들을 잘 묵상하고 관상한다면 사랑은 믿음 안에 내포된 것을 드러나게 해줄 것이다”(‘노래’, 1,11). 그래서 영혼이 내적으로 믿음의 옷을 입고 하나님께 다가가야만 그분과 일치할 수 있다고 한다(‘’, II,21,4).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영혼이 굶주리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또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산길’, II,9,1; 24,4; ‘노래’, 12,9). 그러나 믿음을 통하여 느껴진 진리들은 마치 밑그림과 같은 것들이며, 지복직관의 상태에 들어가서야 완성된 그림을 볼 수 있고, 동시에 영혼도 완전한 상태가 된다(‘노래’, 12,6). 이렇게 믿음은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기뻐하기 위한,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놀랄 만한 인격적 매개체이다.

영혼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려면 믿음이 어두움 속에서 지성을 완성시켜야 하는데(‘산길’, II,6,1) 그렇게 되기 위해서 영혼은 무엇보다도 영적인 결함들과 욕구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산길’, II,1,1). 이것은 바로 지성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영혼이 믿음이라고 하는 영적인 밤”(‘산길’, II,1,3), “믿음의 심연”(‘산길’, II,4,1), 혹은 믿음의 어두움을 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믿음은 영혼에게 어두운 밤”(‘산길’, II,3,4)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믿음을 장님의 안내자처럼 의지하면서걸어가는 가운데 순순한 믿음 안에서 영적인 욕구들과 기쁨들과 감관의 능력들 모두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산길’, II,1,2). 결국 믿음은 영혼이 하나님을 분명하게 뵙도록 하기 위해서 영혼에게 어두움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초자연적인 이끄심 안에서 빛을 보낸다(‘산길’, II,3,1). 믿음이 만드는 어두움이 심오하면 할수록 믿음이 보내주는 빛도 그만큼 밝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믿음을 영혼에게 있는 분명하고 어두운 습성이라고 한다. 어두운 습성이라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 계시된 진리들을 믿게 하기 때문이다”(‘산길’, II.31). 이렇게 십자가의 요한이 당대의 스콜라신학에 입각한 믿음에 대한 정의를 수용하면서 믿음의 행위믿음의 내용을 모두 포함하여 설명하고 있다. 믿음의 내용을 말한다면, 이미 하나님 스스로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대하여 교회에게 모든 것을 계시해 주셨으므로(‘산길’ II,22,7; 27,1-4), 이 믿음의 내용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기(‘산길’, II,22,3) 때문에 인간의 모든 판단과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산길’, II,22,13). 또한 구약성경을 통하여 계시된 모든 것들은 물론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셨고, 응답하셨으며, 계시해주셨던 모든 것들이 바로 믿음의 신비들이라면서(‘산길’, II,22,3)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인간의 능력으로는 믿음의 내용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강생 이후에 하나님께서 침묵 속에 머무르시는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내용 안에서 이미 모든 것을 다 말씀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드러내거나 드러낼 믿음의 내용이 없기 때문이라고 명쾌하게 결론을 내린다(‘산길’, II,22,7). 또한 믿음의 빛은 우리들의 시력을 초월하면서 다른 빛들과 결코 어우러지지 않으므로(‘산길’, II,3,1) 모든 영혼에게서 자연적인 빛을 빼앗고 어둡게 하면서 초자연적인 지식을 전해준다고 한다(‘산길’, II,3,5). 믿음의 행위를 말한다면, 십자가의 요한은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 정의를 내리려고 하지는 않지만 바울 사도의 가르침(10:17)을 인용하면서 결정적인 표현을 한다. “믿음은 단지 들음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에 대한 영혼의 동의일 뿐이다”(‘산길’, II,3,3). 믿음의 주관적 차원을 부각시키는 가운데 십자가의 요한은 믿음행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산길’, II,27,5). 믿음은 영혼의 눈이기 때문이다(‘노래’, 32,5). 결국 믿음의 행위는 영혼이 영적인 밤 안에서 하나님과 실체적이고 거룩한 일치로 곧게 걸어가도록 하는 것이다(‘산길’, II,23,4). 믿음의 행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혼이 장애물을 뛰어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로만 가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계시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 지성의 고유한 자연적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믿음의 내용을 말할 때 이미 밝혀진 것이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유사성도 없으며, 거룩한 존재와 피조물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있다. 그래서 비록 천상적이건 지상적이건 제아무리 유사성을 많이 갖추고 있는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피조물들의 방식을 통해서 지성이 하나님께 이르기란 불가능하다”(‘불꽃’, 3,38). 그래서 영혼이 하나님의 신비를 볼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하나님께 가도록 하는 거룩한 길은 오로지 밝은 믿음의 순수함이다(‘산길’, II,8,3).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얻기 원한다면 육체를 통하여 얻어지는 자연적 지식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얻어지는 초자연적 지식에 의지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암흑이라는 믿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산길’, II,8,4-6). 영혼이 하나님과 일치하기 위해서 유일하게 적절한 방법인 믿음에 의지해야 하는데 믿음과 하나님 사이에는 단지 믿는 하나님과 보는 하나님 사이의 차이 밖에 없을 정도로 유사성이 많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통해서 비춰지는 눈부시고 거룩한 빛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산길’, 1,9,1). 또한 계시된 진리에 대한 동의(믿음행위)가 하나님께 대한 깨달음을 얻게 하는데 자연적인 빛을 잃은 지성이 어두움 속에서 기댈 수 있는 빛이란 오직 믿음뿐이기 때문이다(‘산길’, II,16,15).

박쥐의 눈들이 태양 빛을 받을 때 완전히 깜깜해지는 것처럼 우리의 지성도 하나님의 엄청난 빛을 받을 때 깜깜해진다”(‘산길’, II,8,6).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하늘 위에 계시며 영원의 방법을 말씀하시는 데 반해 땅 위에 있는 장님인 우리는 시간과 육체의 방법을 말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산길’, II,20,5).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자연적인 빛을 통해 얻는 지식에 기대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자연적 지성으로라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자기 길을 포기하고, 자기 방식이 없는 초자연적인 범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산길’, II,4,4-5).

영혼이 믿음으로 인도되기 위해서, 즉 영혼이 믿음에만 의존하고 그 믿음을 빛과 안내자로 삼기 위해서는 감각적으로나 영적으로 가질 수 있는 모든 애착이나 욕구를 벗어버리고(‘산길’, II,4,2), 지성 안에 있는 것을 모두 지워버려야 한다(‘산길’, II,6,1). 또한 의지와 감각을 비우고 좁은 문으로, 즉 그리스도의 문을 통하여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하고(‘산길’, II ,7,2-3), 자기 본성을 벗어버리고 없애버리면서 죽어야 한다(‘산길’, II,7,7). 자연적 빛을 통하여 볼 수 있는 모든 대상들이 가져다주는 이해를 없애버리는 가운데 모든 욕구를 없애는 일이(‘산길’, 1,3,1) 바로 믿음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은 오로지 어두운 믿음에만 의존하고 오직 그 믿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빛과 안내자로 삼아야 한다(‘산길’, II,4,2). 왜냐하면 감각은 통상적으로 영혼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면서 통로이기 때문이다. 또한 감각은 하나님께서는 물론 악마도 역시 초자연적인 형상과 영상을 가지고 지성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찾아오는 곳이라서 그 선물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인지 악마가 주는 것인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면 악마의 교묘함에 쉽게 넘어가기 때문이다(‘산길’, II,16,4). 그래서 영혼이 조금만 열심을 낸다면 충분히 주어질 수 있는 것들, 즉 외적인 감각이나 거룩한 것에 대한 감촉들(환청환시환각환촉 등)이 있다 할지라도 영혼은 내적인 감각에 의한 현시들, 즉 상상적 현시들에게도 절대로 한눈을 팔지 말고 모두 거절해야 한다. 영혼은 앞에서 말하는 것들이 나타나는 것에는 절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그 어떤 감각적인 기쁨을 원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힘쓰고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는 가운데 단지 앞에서 말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 좋은 영(정신)에 눈을 집중해야 한다”(‘산길’, II,17,9). 영혼이 믿음에 있어서 완전한 순수함을 갖추지 못한다면 절대로 완전한 변화를 기대할 수 없으며, (믿음의) 순수함의 비율에 따라 하나님과 영혼의 일치와 밝아짐과 출중함이 더하거나 덜할 것이다”(‘산길’, II,5,8).

감각들을 통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부정하거나 없애버린다면 영혼이 어두운 곳에 텅 빈 채로 있다. …… 오관이 아닌 다른 것을 통해서는 아무런 빛도 영혼에게 들어갈 수 없다. …… 영혼을 더 이상 아무런 혼돈에 빠뜨릴 수도 방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 그래서 이 벗어버림을 영혼에게는 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산길’, 1,3,4; 13,4). 이것이 바로 어두움이라는 믿음행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영적인 욕구들과 기쁨들과 감관의 능력들을 모두 부정하는 것”(‘산길’, II,1,2), 온갖 사물에 대한 욕구의 기쁨을 없애버리는 것을 우리는 밤이라고 부른다”(‘산길’, 1,3,1). 믿음의 밤은 이성적 빛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산길’, II,2,2). 밤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께 다가가는데 있어서 영혼이 자신의 고유한 재주를 피우지 않을수록 더욱 안전하게 가는 것이며, 그것은 더욱더 믿음 안에서 가는 것이다”(‘산길’, II,1,3). “하나님께서는 암흑 속에 숨어계시기 때문에”(‘산길’, II,9,1) 지성은 믿음이라는 그 암흑 아래에서만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된다. 이렇게 영혼이 믿음 안에서 지성을 모두 비우고 안내자인 믿음의 빛에만 의지하게 될 때, 즉 믿음의 순수하고 단순한 빛 가운데 머물게 되면서 영혼의 본성이 비워진 상태가 된다면 자연적으로는 물론 초자연적으로 거룩한 것이 주어진다. 그런데 이때에 영혼이 스스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윽한 기쁨과 깨달음에 의해 움직여지기 때문에 무엇을 느끼거나 보려고 하지 말고 단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전념하기만 하면 된다. 단지 믿음의 눈을 뜨고 있기만 한데 초자연적인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과 같이 충만함을 체험한다는 것이다(‘산길’, II,15,2-4). 이렇게 초자연적이고 수동적으로 건네지는 이런 것들 안에서 영혼이 자연적 지성이나 다른 감관의 능력들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재주를 피운다면 자기 방식과 거칠음 때문에 높게 오를 수가 없다”(‘산길’, II,29,7).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은 더욱더 믿음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이다.

영혼이 감각적인 것들에 대한 애착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영혼 안에 거룩한 일치의 빛이 자리를 잡을 수 없다(‘산길’, 1,4.2). 영혼이 비록 믿음 안에서 어둡다고 할지라도 영혼의 손에 사랑의 일치라고 하는 빛을 들고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오로지 믿음의 빛을 막고 있었던 이 세상의 질그릇을 깨뜨리면서 영광 속에서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이다”(‘산길’, II,9,4). 영혼이 영(정신)의 수동적 밤에 들어갈 때, 즉 하나님과 영혼이 일치를 이루기에 아주 적합하고 딱 맞는 순수하고 어두운 믿음의 길로 걸어갈 때(‘’, II,2,5)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2:12)는 말씀을 듣게 되는데(‘’, II,2,5), 이때에 바로 생생한 믿음이라고 하는 매우 은밀한 사다리를 거쳐서”(‘’, II,15,1)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로,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께로 오르락내리락 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이때에 믿음의 옷이야말로 가장 강하기 때문에 신랑의 은총은 물론 그분과의 일치를 끈끈하게 유지하도록 모든 지성의 시야를 막아버리는 것은 물론 악마도 알아보지 못하고 달려들지도 못하게 한다(‘’, II,21,3-4). 믿음의 옷인 흰색 변장은 거룩한 지혜와 일치하기 위해(‘’, II,21,11), 그리고 강생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노래’, 7,7)를 깨닫기 위해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은총으로 인정받은 영혼에게 주어지는 영적 혼인(‘노래’, 22,3)은 영혼이 지니고 있는 믿음의 순수함과 강직함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노래’, 31,3). “이것은 영혼에게는 대단한 기쁨이며 만족스러움이다. 영혼이 자신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본다는 것은 영혼에게 매우 거룩한 빛과 거룩한 열기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저 세상에서는 영광의 빛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는 최고로 밝은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불꽃’, 3,80)

 

 

2. 사랑

 

사랑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의 시작이며 끝이다. 성경이 선포하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다. 위격적 사랑의 유대 곧 성령 안에서 영원으로부터 성자를 낳으시는 분은 아버지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유로운 피조물들이 삼위일체께서 나누시는 사랑의 친교 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려고 세상을 창조하셨다. 죄마저도 하나님의 계획을 파괴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죄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강화시켰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을 위한 당신의 활동이 어디까지 나아가는지 보여주셨다. 바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나아가셨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비우는 것이 사랑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자기 비움을 완전히 드러내시게 되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받는 사람과 결합시켜 주는 기쁨의 황홀경만이 아니다. 사랑은 또한 자기 포기와 거부를 처절하게 겪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희생이기도 하다.”

향주덕으로서의 사랑에 대하여 십자가의 요한은 특별한 논리를 펼치지는 않았지만 영적 여정에서 애덕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정리해주고 있다. 용어의 선택에 있어서도 애덕(caridad)보다는 일반적으로 사랑(amor)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우리도 이런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애덕은 베풂(자비)과 우정의 사랑을 말한다. 진정한 우정이란 베풀음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애덕의 체험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는 선행이 아니라면 하나님 앞에 무슨 가치가 있으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산길’, III,30,5)라고 질문한다. 그런데 믿음과 마찬가지로 이런 사랑 역시 모든 것들에 대하여 의지를 비워버리면서 모든 것들에 앞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강요한다”(‘산길’, II,6,4). “믿음과 사랑 안에서 그분을 찾아라. 세상의 사물들에게서 기쁨을 찾으려거나 즐기려거나 알아야 하는 것 이상으로 깨우치려 하지 말아야 한다”(‘노래’, 1,11). “영혼이 믿음 안에서 더욱 순수하고 깨끗하게 닦아질수록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사랑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며, 사랑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영혼이 더욱 밝게 비춰지고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산길’, II,29,6). “믿음과 사랑, 이 두 가지는 네가 모르는 곳, 즉 하나님께서 숨어계신 곳으로 너를 인도해주는 장님을 인도하는 어린아이다. 은밀한 것이라고 우리가 말했듯이 믿음은 하나님께로 가는 발이며, 사랑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의 안내자이다. 영혼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면서 믿음의 신비들과 은밀한 것들을 잘 묵상하고 관상한다면 사랑은 믿음 안에 내포된 것을 드러나게 해줄 것이다”(‘노래’, 1,11). 그 이유는 사랑이란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는 방법이며 원인”(‘산길’, II,29,6)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능력과 끈질김은 대단하다. 하나님을 포로로 만들고 묶어놓기 때문이다”(‘노래’, 32,1). 십자가의 요한은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인용하면서 모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 위하여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사랑에 뿌리를 내리라고 훈계를 한다”(‘노래’, 36,13). “사랑을 통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노래’, 1,13). 또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외에 어떤 것으로도 기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노래’, 1,14) 때문이다.

사랑이야말로 일상생활에서는 물론 영성생활에서 매우 중요하고 미묘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적 성숙의 표징이면서 동시에 원초적 힘(에너지)이기도 하다. 또한 사랑은 가장 첫째가는 계명으로 꼽히는 동시에 영혼의 최종 목적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유일하고 굳건할 때 그만큼 덕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완전하고 결정적이며 많은 꽃을 피우게 된다.”(‘노래’, 30,9)고 한다. 사랑은 영혼의 의지가 여러 가지 기쁨들로부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의 기쁨의 힘을 온전히 쏟아 부을 수 있도록 한다(‘산길’, III,17,2). 그래서 신랑(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본 영혼은 자기 신랑을 만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기를 결코 늦추지 않는다(‘노래’, 3,1: ‘산길’, I,14,2). 영혼이 의지를 통하여 누릴 수 있는 모든 기쁨이 유익하고 완전한 것이 되기 위해 그 기쁨을 오직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영혼이 다른 어떤 기쁨일지라도 부정하지 않거나 없애버리지 않는다면, 비록 그것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매우 탁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기쁨은 헛된 것이며, 아무런 유익함도 없고, 하나님 안에서 의지의 일치를 위해 오히려 훼방을 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아두어야 한다(‘산길’, III,24,7).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슬픔과 고통과 탄식에 젖어있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II,4,1) 사랑으로 이루는 완덕은 영(정신)의 가난과 벗어버림이기 때문이며(‘노래’, 1,14), 애덕이 아니라면 영혼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룰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산길’, III,30,4). 사랑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 영혼이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영혼을, 아니 영혼의 모든 욕구를 죽인다(‘노래’, 7,4). 이렇게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애덕은 영적 여정에서 의지에 대한 정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은 사랑을 말하면서 의지의 지도자, 혹은 의지의 조련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두운 밤을 지나려면 영혼은 온갖 사물에 대한 욕구의 기쁨을 없애버려야 한다(‘산길’, I,3,1). “의지는 사랑의 금()에서 생기는 달콤한 형상을 받아들이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산길’, II,8,5). 그래서 만일 영혼이 애덕의 힘으로 의지를 정화시키지 못하면서 나머지 감관의 능력들을 정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애덕을 통해서만 믿음 안에서 이룬 일들이 생기가 있고 커다란 가치를 지닐 것이며, 애덕이 없이는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에 야고보는 사랑이 없는 행동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다(2:20)”(‘산길’, III,16,1). 그렇다면 애덕을 통한 의지의 정화란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 매우 중요한 열쇠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영혼이 의지를 완전하게 정화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덕 안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6:5)는 말씀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산길’, III,16,1).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은 믿음과 소망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고전 13)을 확인하고 있다. 또한 사랑으로 향하는 올바르게 정화된 의지가 없다면 믿음과 소망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영혼의 힘은 영혼의 감관의 능력들과 감정들, 그리고 욕구들에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의지에 의해 다스려진다.”(‘산길’,III,16,2)고 하면서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 그리고 의지에 있어서 하나님과 일치에 이르기 위해 감정과 감관의 능력들을 사랑 안에서 오로지 하나님께만 적용시켜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요한에게 애덕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고 따르기 위해 가장 핵심적이며 중요한 잣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기쁨두려움소망, 그리고 고통이라는 네 가지 감정들이 영혼을 지배한다면 자연적이며 초자연적으로 받을 수 있는 지혜를 위해 요구되는 평화와 고요함 가운데 영혼을 놔두지 않는다.”(‘산길’, III,16,6)고 한다. 그래서 의지가 감관의 능력들과 감정들과 욕구들이 하나님께 향하도록 방향을 틀어놓을 필요가 있다. 만일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영혼은 자신의 힘을 하나님을 위해 간직할 수 있고,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산길’, III,16,2). 또한 현세적이며 자연적이고, 감각적이며 윤리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영적인 기쁨들에 대해서도 의지가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로워야 하는데 그 이유는 오로지 하나님께 자신의 사랑을 쏟아 부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결국 의지가 하나님께 영광과 영예가 되는 것에만 기뻐하고 복음적 완덕에 따라서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산길’, III,17,2). “애덕은 영혼을 잘 보호하도록 다른 덕들에게 활기와 힘을 주고, 그 덕들과 함께 신랑을 기쁘게 해드리도록 영혼에게 정숙함과 우아함을 제공한다. 애덕이 없이 다른 어떤 덕도 하나님 앞에 매력적일 수가 없다”(‘’, II,21,10). “애덕은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에 두었던 의지의 애착과 욕구를 없애고 비워놓고 하나님 안에 두게 하기 때문이며”, “의지의 능력을 준비시키고”, “의지를 하나님과 일치시키기”(‘’, I,21,11) 때문이다. 사랑의 또 다른 특성은 사랑하는 이를 사랑받는 대상과 같게 하는 것이다”(‘노래’, 28,1). 그래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을 서로 닮게 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붙들어 매놓는다(‘산길’, 1,4,3).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십자가의 요한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며(‘노래’ 31,5), 동시에 하나님께서 영혼을 바라보심 역시 영혼을 사랑하시는 것이다(‘노래’, 32,3).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바라보시면서 영혼에게 기울어지시고, 영혼 안에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찍어주시고 부어주신다(‘노래’, 32,4). “어머니가 자식을 가슴에 품어 키우면서 아이에게 봉사하고 선물을 주듯이 아버지(하나님)께서는 영혼을 귀여워해 주시고 선물을 주시는데만 전념하신다”(‘노래’, 27,1). 이렇게 하나님을 어머니상으로 표현한다는 자체가 시대적 상황과 신학적 배경에서 볼 때 대단히 과감한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영혼에게 당신의 은총을 주시는 것은 영혼이 당신 사랑에 합당한 능력과 자격을 갖추게 하시려는 것이다”(‘노래’, 32,5). 다시 말해서 영혼이 하나님 안에 사랑의 달콤한 자리를 잡고 하나님께서도 영혼 안에 자리를 잡으신다”(‘노래’, 35,1).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혼을 사랑하시는 것은 확실한 방식으로 영혼을 당신과 동등하게 만들어주시면서 당신 안에 끌어들이시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시는 바로 그런 사랑으로 당신 안에서 영혼을 사랑하신다”(‘노래’, 32,6). 이런 사랑과 우정의 동등성을 확보하는 것은 영혼의 간절한 열망인데 영혼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척도이기 때문이다(‘노래’, 28, 1). 하나님과 영혼 사이에 우정과 사랑의 동등성이 확보될 때, 즉 영혼이 완덕에 도달할 때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다. 그때에는 영혼의 지성은 하나님의 지성이 될 것이고, 영혼의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가 될 것이며, 영혼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될 것이다. …… 이런 힘으로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영혼이 하나님을 매우 강하고 완전하게 사랑한다. 두 의지가 하나의 의지에 일치하고 있으며 단지 하나님의 사랑밖에 없다”(‘노래’, 38,3; 39,4). 동등성과 동일성은 다른 것이다. 하나님과 동등한 사랑을 나눈다고 해서 영혼이 곧 하나님이다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5:48)고 하셨듯이 십자가의 요한이 참여를 통하여하나님처럼(거룩하게) 된다고 하는 말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영혼을 당신과 등등하게 해주시는 것은 영혼을 위대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노래’, 28,1).

사랑이 영혼과 하나님 사이의 영적 혼인을 실현시킨다. 영혼이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는다면(‘노래’, 1,12)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통해서 영혼에게 당신을 드러내시고(‘노래’, 13,11), 사랑을 통해서 일치를 이루시기 때문이다(‘’, II,12,5-6; 13,3). 영적 혼인에 도달한 복된 영혼에게는 모든 것이 혼인의 기쁨과 사랑의 실체이다(‘노래’, 28,10). 하나님께서는 온유함으로 당신의 권능에서 나오는 힘과 친절에서 나오는 사랑을 영혼에게 드러내시면서 당신 가슴의 사랑과 힘을 영혼에게 주시기 때문이다”(‘불꽃’, 4,13). “이렇게 높은 단계에서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엄청난 변화가 동반되니만큼 그만큼 영혼이 하나님과 일치하고 만족하게 된다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영혼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물론이요 아무것도 청하지 않고 단지 자기 신랑(하나님)을 위해서만 청한다”(‘불꽃’, 1,27). 또한 영혼이 해야 할 일이나 하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고 신랑이 영혼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홀로 하는 일도 없다(‘노래’, 37,6). “사랑이란 절대로 게으르지 않고 오히려 불꽃처럼 끊임없는 움직임이기”(‘불꽃’, 1,8) 때문에 영혼이 하는 일이란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뿐이다”(‘노래’, 26,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작정 영혼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이 먼저 사랑을 뿌려주시고 영혼의 사랑을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에게 사랑과 은총을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사랑과 의지에 따라서 주신다”(‘노래’, 13,12). 그래서 영혼이 지성으로 새로운 지식을 이해하기 전에 이미 의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사랑하기 시작한다(‘노래’, 26,7-9). 마음이 먼저이기 때문에 머리로 파악하기 전에 이미 심장이 뛴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또한 십자가의 요한은 성령의 일곱 가지 선물들에 따라서 사랑의 단계를 간단하게 말하는데(‘노래’, 26,3) 이것은 아마도 어둔밤’, II, 19-20에서 말하는 사랑의 단계를 말하는 듯하다.

 

 

3. 소망

 

향주덕인 소망이 믿음과 사랑에 비해 마치 부수적인 것처럼 묘사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망 역시 믿음과 사랑과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초자연적인 선물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요한은 영의 능동적 정화라는 관점에서 집중적으로 기억과 더불어 설명하고 있다(‘산길’, III,1-15). 영적 혼인에 이르게 된다면 영혼이 받게 되는 초자연적인 선물이란 엄청난 보화이기 때문에 인내와 소망을 가지고 견뎌내고 참을 필요가 있다고 가르친다(‘산길’, III,2,15). 하나님께서는 영혼이 당신께 다가가려는 뜨거운 열정과 적극적인 움직임을 만들어주시는데 영혼은 마치 행복을 얻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하나님께 대한 소망으로 살아가도록 하신다(‘불꽃’, 3,21). 소망은 영혼에게서 피조물에 대한 것은 물론 모든 소유에 대한 기억을 비우고 떼어버린다. 오직 하나님께 대한 소망만이 하나님과 일치를 위한 기억을 순수하게 준비시키기 때문이다(‘’, II, 21, 11). 영혼이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친교가 제아무리 잘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그 충만함은 미래에 이루어질 실재이다. 소망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기에 그분의 은총을 통해서만 실현된다. 또한 소망의 행위는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거룩한 도움 안에서 안전함과 신뢰를 포함한다. 그래서 소망의 중심과 바탕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그렇다고 소망이 마치 믿음이 그런 것처럼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는 것은 아니다. 구원이란 단지 하나님의 약속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부르심에 대해 인간이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달려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망에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불확실성과 두려움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함께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모습을 십자가의 요한은 영가의 첫째 노래를 위한 서론에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영성생활의 초보자인 영혼은 자신의 부족한 모습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절실하게 체험한 뒤에 영원함의 영광 속에서 그분을 만끽하기 위해 더 이상 죽을 육신에 매달리지 않으면서 자신은 물론이요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떠났다.”(‘노래’ 1,2)고 선언한다. 이렇게 떠날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자신의 삶에 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셈을 바치고 이유를 밝혀야 하는데 마지막 한 닢을 갚을 때까지 해야 하며(5:26),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둥지를 틀게 될 때 불을 켜고 모조리 뒤지실 것(1:12)처럼 해야만 했다(‘노래’, 1,1). 자신을 돌이켜보면서(자아인식) “하나님께 다다르기 위해서는 자연적이건 초자연적이건 자신의 지각들을 부정할 수 있는 최종적인 것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하면서 가야 할 필요가 있다.”(‘산길’, III,2,3)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소망은 항상 가지지 못한 것에 두고 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 원한다면 이 세상 것에 대해서는 물론 저 세상에 대한 모든 기억을 비워버리고 어둡게 해야 한다(‘산길’, II,6,3). 그러나 이런 결단과 깨달음은 구원에 대한 소망이 주는 확실성과 더불어 하나님의 격렬한 사랑,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로 향하는 뜨거운 사랑 안에서 체험된 적극적인 믿음에 의한 것이다. 뜨거운 사랑으로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영혼의 믿음 안에서 소망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이렇게 소망은 믿음을 통해서만 충만하게 이루어지는 것인데도 탄식이 동반된다. 그런데 이 탄식은 구원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찬 영혼이 사랑에 빠졌을 때 그의 마음속에서 나온다. 또한 사랑의 상처를 입었을 때에 상처로 인해 탄식이 나오는데 이제껏 살아왔던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찾으려니까 그분의 부재를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탄식이 깊어진다. 하나님을 뵙고자 하는 열망과 소망이 클수록 영혼은 그분이 안 계심으로 고통스러워 소리치는 것이며, 특히 신랑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친교를 즐겼을 때 더욱 그렇다. 하나님의 부재체험이 영혼을 자신과 모든 피조물로부터 뛰쳐나가게 한다(‘노래’, 1,14). 소망은 하나님과 만남을 위한 박차(拍車). 소망은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움직이게 하고, 설득시키는 가운데(‘’, II,21,8) 하나님을 소유하게 하면서 동시에 결정적인 의미에서의 사랑과 소유는 종말에나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소망은 도피가 아니라 선물이라는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소유는 소망의 적이다. 이미 소유하고 있다면 더 이상 소유하기 위해 싸우거나 안타까워하거나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영혼이 자연적이건 초자연적이건 하나님께 관한 많은 정보들에 대한 기억이 없으면 없을수록 아직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망은 많이 생긴다.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은 기억과 소망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기억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 없을수록 그만큼 더 소망을 간직하게 되며, 소망을 많이 간직할수록 더욱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게 된다. 하나님께 대해서라면 영혼이 기다리는 만큼 그만큼 다가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억이 많이 버려질 때 더욱 하나님을 기다리게 되고, 그리고 만일 완전하게 버려졌다면 그만큼 완전하게 거룩한 일치 안에서 하나님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지식에 대한 기억의 맛과 달콤함이 없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과 일치라고 하는 최고의 소유와 완전한 달콤함에 이를 수 없다.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14:33)”(‘산길’, III,7,2). 결국 소망은 기억을 정화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소망의 목적 역시 하나님과 일치다. 기억을 정화시키는 올바른 길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로 가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지워주시는 멍에를 기꺼이 짊어지는 것이다(11:30).

소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기억이란 인간 생활에 있어서, 특히 이해와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비교하고 검토할 수 있는 척도를 저장해두는 창고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기 원한다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기억이라는 창고에 각인된 어떤 지식이나 일체의 인상도 남기지 말고 아무것도 없이 깨끗해져야 하며, 하나님께 관한 것들이 아니라면 모든 형상들을 온전히 벗어던져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기억은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자연적인 한계와 맞닿는 곳까지 영혼을 끌고 갈 것이며, 기도는 하나님과 일치라는 최종목적을 벗어나서 자기만의 공상에 빠지게 할 것이다. 하나님과 일치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묵상기도가 끝나야 하는 때임에도 사색에 매달린다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기억으로 이해될 수 있는 형상이나 영상을 지니고 계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산길’, III,2,3-4). 이런 경향을 십자가의 요한은 마치 짐승처럼 된다고 표현하는데 분심이 생겨 끝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는 뜻이다. 더욱 결정적인 의미는 영혼이 지니고 있는 본성적인 능력으로는 본성적인 것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자연적인 것이 초자연적인 것이 되거나 합치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산길’, III,2,I3). 물론 영혼은 자연적인 형상이나 영상에서부터 하나님과 일치를 위해 출발할 것이다. 그러나 영적 성숙이 이루어지면서 자연적인 것을 멀리 버리면 버릴수록 그만큼 하나님과 일치에 가까이 이르게 될 것이다. 자연적인 것들을 포기한다는 것이 시간을 낭비한다거나 영적 보화들을 빼앗긴다는 생각에서 빨리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수동적인 밤에 들어갈 것이다. 이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얻어지는 유익함이란 엄청난 보화이기 때문에 인내와 소망을 가지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산길’, III,2,15). 만일 영혼이 하나님과 일치에 이르게 된다면 감관의 능력들이 하나님 안에서 변화되었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감관의 능력들을 소유하고 계신다. 또한 이미 그 능력들의 주인이 되셨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그 능력들을 움직이시는 분이시며, 거룩한 영(정신)과 의지에 따라서 거룩하게 명령을 내리시는 분이시다”(‘산길’, III,2,8). 따라서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변화되어 있다면 사물들에 대한 지식이나 형상들을 기억 안에 저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산길’, III,27-8). 바울 사도의 가르침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2:20)라는 말씀 그대로라는 것이다. 완덕의 상태에 있는 영혼 안에서 성령께서 영혼을 움직이시는 분이시고, 이끌어 가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영혼이 어떤 형상에 의해 동요를 겪지도 않을 것이며, 오직 성령에 의해 움직일 것이라고 한다(‘산길’, III,2,10).

기억이 정화되지 않으면 영혼에게 끼치게 되는 첫 번째 해로움을 말하는데, 만일 이 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세상이 가져다주는 볼 것들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라고 하며, 자연적인 깨달음과 납득할 수 있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연적이건 초자연적이건 모든 지각들을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산길’, III,2,3). 아마도 이것은 세상이 가져다주는 달콤한 것들 때문에 찾게 되는 소죄까지도 모두 피할 수 있도록 지난날에 저지른 죄에 대한 생각까지도 모두 비우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영혼이 감관의 능력들의 요구나 작용들을 부정하고, 비우고, 방해를 받지 않는 상태로 나아가야 하는데 십자가의 요한은 우선 자연적인 시각(視覺)을 잃어버려야 한다고 가르친다(‘산길’, III,2,2). 기억 속에 있는 것들로서 듣고, 보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보는 것으로 표현되는 모든 것들은 오관의 대상이나 기억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산길’, III,2, 4). 그래서 이 밤과 정화의 단계에 들기 위해 영혼은 듣거나 보거나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보거나 만지는 모든 것들을 기억 속에 저장하거나 입력시키지 말고 오히려 즉시 잊어버려야 하며, 만일 필요하다면 다른 것을 기억하면서 효과적으로 잊어버리도록 애를 써야 한다. 기억 속에 그것들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나 형상이 남아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마치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지상의 것이나 천상의 것에 대한 어떤 개념(정보)에 매달리지 말고 기억은 자유롭고 아무런 걸림이 없어야 한다.”(‘산길’, III,2,14)고 가르친다. 그래서 관상기도에 가까이 이를수록, 즉 묵상기도에서 더 이상 사색이나 추리가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도록 감관의 능력들을 침묵하게 하고 조용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만일 기억과 더불어 감관의 능력들을 계속해서 작용하게 한다면 애착과 욕구가 또 다시 생길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무슨 생각이나 추리를 하지 않는다면 마치 아무런 은혜를 받지 못하고 분심과 게으름에 빠질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오히려 현세나 내세에 관한 모든 것들에 대하여 기억의 문을 닫아버린다면 분심이 들지도 않을 것이며, 악습들이 파고들지도 않을 것이고 침묵 가운데 영(정신)의 귀를 오로지 하나님께만 열어놓는 것이다(‘산길’, III,3,4-5). “영혼이 모든 지각들에 대해 의지와 지성과 기억의 능력들의 문을 닫고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영혼이 알지 못하게,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르게 영혼 안에 영적으로 들어오실 것이다”(‘산길’, III,3,6). 결국 감관의 능력들의 모든 움직임들을 붙잡아놓고, 분심에서 벗어나서 오로지 성령께서 활동하시도록 자기를 비워야만 관상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정화되지 않은 기억에 의한 지식들 때문에 영혼에게 끼칠 수 있는 두 번째 해로움은 악마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한다. 악마는 영혼의 기억에다 형상들과 지식들과 사색들을 첨가시킬 수 있고, 의지에다가도 교만과 인색, 분노와 질투, 그리고 미움과 거짓 사랑을 심어줄 수 있다고 한다. 가장 심각한 것은 기억의 작용에 의한 추리와 지식들을 통하여 영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기억이 이런 모든 것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고 망각 속에 지워버리고 자유로워진다면 악마는 기댈 곳이 전혀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산길’, III,4,1). 결국 기도하는 영혼이 세속적인 일들을 많이 생각하거나 기억을 많이 활용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악마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이며, 잠심상태를 흔들어놓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에 커다란 해로움을 끼칠 것이다.

정화되지 않은 기억에 의한 자연적 지각들 때문에 영혼에게 끼칠 수 있는 세 번째 해로움은 윤리적인 선(고요함평화안정)을 방해하거나 영적인 선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이런 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무조건 감정들의 고삐를 잡고 무질서한 욕구들에게 재갈을 물려야 하며, 영혼에게 애착이 생기게 하는 것들을 멀리해야 한다. 기억에 의한 지각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면 절대로 영혼에게 동요를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다(‘산길’, III.5.1). 지각의 변화에 의해 마음의 동요가 따르는데, 이 동요에서 빚어지는 기쁨과 슬픔, 그리고 미움과 사랑까지도 잊어버리려고 애를 써야만 고요함과 평화와 안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산길’, III,5,2). 특히 영혼이 기억의 지각들에 사로잡히기만 한다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위해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에 변화될 수 있다거나 이해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산길’, III,5,3). 만일 지식들과 생각까지도 버리고, 듣는 것과 보는 것, 그리고 자신 안에서 일어났던 기억들조차 상관하지 않는다면 고요함과 평화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산길’, III,6,4). 다시 말해서 기억에 의한 지식들이나 생각들로부터 생기는 동요가 없기 때문에 마음이 평화와 고요함에 젖어들 수가 있으면서 거룩한 지혜와 덕들을 갖출 채비를 하게 된다(‘산길’, III,6,1). 이렇게 될 때 하나님과 일치에 대한 소망이 더욱 커진다. 기억에 대한 정화와 잠심은 영혼이 많은 죄와 불순함에 빠지게 하는 악마의 장날에서 벗어나게 하면서 성령께서 자신을 이끌어 가시도록 준비시키기 때문이다(‘산길’, III,6,2-3).

초자연적인 지각들에 의해 생기는 지식(환시계시환청, 영적인 느낌들)이 만들어내는 기억을 지우지 않아서 영혼이 방해를 받는다면 그 영혼이 하나님과 일치하는데 커다란 방해가 될 것이다(‘산길’, III,7,1).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은 하나님과 일치라는 축복을 얻으려면 영혼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스쳐갔고, 자신 안에 분명하고 또렷하게 남아있는 형상들과 초상들과 지식들을 간직하기 위해 무슨 생각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산길’, III,7,2)고 강조한다. 기억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초자연적인 지식들이나 형상들은 절대로 하나님께 대한 것들이 아닌데도 많은 이들이 그런 지각들에 대한 기억의 맛과 달콤함에 젖어드는 것은 물론, 거기에 머물기를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일치라고 하는 최고의 소유와 완전함과 달콤함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산길’, III,7,2). 초자연적인 지각들이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들이라고 생각할 것이지만 단지 자기 환상일 뿐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악마로부터 오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며, 악마로부터 오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산길’, III,8,3).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혜라면 영혼의 뜻이나 생각과는 상관이 없이 별안간 영혼에게 주어지는 깨달음이라서 영혼이 그것들에 대해 무엇을 한다든지,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다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음들에 대해 단지 겸손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받아들여야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당신이 원하실 때 원하시는 방법대로 하실 것이다”(‘산길’, II,26,9). 그러나 이런 초자연적인 지각들로부터도 자유로워질 때 고요함을 얻는 것은 물론 영적 지도자들을 찾아다녀야 하는 수고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며, 상상적인 모든 형상들과 초상들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영혼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산길’, III,13,1). 그래서 영상들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지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믿음을 통하여 소망 안에서 하나님만 알려고 하는 것”(‘산길’, III,13,9)이 가장 중요하다. “만일 영혼이 겸손하지 않고 조심성이 없다면 악마는 영혼에게 아무런 의심 없이 수천 개의 거짓을 믿게 할 것이다”(‘산길’, II,26,17).

소망으로 피조물과 모든 소유에 대한 기억을 비우고 떼어버리는 일 (‘’, II,21,11)을 잘 한 영혼, 즉 기억이 정화된 영혼은 기댈 것이나 가질 것이 없는 빈 마음으로 어둡고 비밀스러운 밤을 잘 지나가면서 하나님이 아니라면 어느 곳에도 눈길을 주거나 주의를 집중하지 않는다(‘’, II,21, 9).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해 눈을 들어 올리는 것이 바로 소망이 영혼 안에서 일상적으로 하는 직무이기 때문이다(‘’, II,21,7).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는 소망을 두지 않는 영혼은 오로지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위해서 고통을 이겨내고, 자신의 모든 욕구와 관심은 하나님께로 향한다(‘노래’, 28,4).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은 하나님께 대한 확실한 소망이 없이 사랑을 찾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라고 한다(‘’, II, 21,8; 22,2). 영적 혼인을 거의 이루게 된 영혼은 아직도 소망 속에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허전함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에 비록 부드럽고 즐거운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영광이 완성되고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는 상태인 하나님의 양자(8:23)로서의 위치가 확정되기까지는 많은 탄식을 하게 된다”(‘불꽃’, 1,27). 사랑에 빠진 영혼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탄식이란 소망에게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노래’, 1,14).

 

1-3 믿음 소망 사랑의 관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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