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깨달음의 은총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관상 때문이다. 관상을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으로서 그분을 알고 사랑하며, 우리 본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깊고 생생한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듣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의 목적에 다다른 모든 사람들은 다 천상에서의 관상가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 세상에 있는 동안에 이런 초자연적 상황으로 들어가 새로운 환경을 맛보도록 되어 있다.

관상을 체험한 사람에게가 아니면 어떤 책도 관상에 대해서 적절한 설명을 할 수 없고 보면, 관상의 맛이 어떠하리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결국은 하다 보면 제대로 알아듣게 될 것이다.

관상이 우리 영혼에 부어 주는 빛의 철저한 단순성과 분명함은 우리를 갑자기 새로운 수준의 의식에로 일깨워 준다. 우리가 전연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그러나 그 새 세상은 낯설지 않으며 확실한 것 같다. 관상의 강렬한 빛이 비추고 있는 동안 우리 감각의 옛 세상이 이제는 우리에게 낯설고 남의 것 같으며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그 빛이 떠나고 나면 우리는 정상으로 되돌아온다.

 

관상을 자각이라고 한다면 자연 상태의 가장 확실한 체험은 마치 잠자는 것과도 같다. 자연계의 가장 예리하고 확실한 정화성은 이런 고요한 관상과 비교할 때에 꿈과도 같은 것이다.

야곱이 꿈에서 깨어나 하나님께서 정말로 이곳에 계시는구나. 그것을 몰랐었네!” 하고 소리치듯 우리의 영혼도 속세에서 깨어난다. 하나님 자신만이 실재가 되시고 다른 모든 실재는 하나님 안에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여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되고 만다.

이런 빛이 우리의 본성을 초월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우리에게 보지 않고도 아는 것처럼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 같다. 마치 암흑 중에도 명확하고, 논란을 거친 증거도 없이 확신하고, 경험을 능가하는 체험으로 가득 차며 말문을 막는 심연 속에서 조용히 신뢰하는 것과도 같다.

, 하나님의 슬기와 지혜의 깊은 풍요로움이여!”

존재의 중앙에 문이 열린다. 그 문으로 우리는 끝없는 심연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비움으로 우리를 어루만져 우리를 비워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순하게 만드시는 순박함으로 우리를 순진하게 만드신다. 모든 변화와 모든 복잡성, 그리고 모든 역설과 모든 다양성은 사라진다. 우리의 마음은 깨달음의 공중에서, 어둡고도 평온하며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실재에서 헤엄친다. 더 바랄 것이 없다. 부족한 것이 없다. 슬픔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의 밖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뿐이다.

초자연적 본능은, 우리 안에 이미 피어난 자유의 이런 심연의 기능은 우리를 우리의 이기심에서 끌어내 자유와 기쁨의 무한한 공간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이미 가르쳐 주고 있다.

이제 겨우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드디어 새로 태어난 것 같다. 지나간 모든 것은 다 실수였으며 태어나기 위한 어설픈 준비였다. 이제야 본연의 자기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직도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의 가난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 거기에 무한한 자유와 완전한 행복에로 가는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어느 것도 자기의 것이 아니면서도 모든 것은 다 자기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무한의 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자기 안에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암흑의 심연을 재어 보려고 생각해야 아무 소용이 없다. 자유와 환희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어떤 장소공간이 아니다. 엄청나게 크고 평온한 활동이다. 이 심연은 사랑이다. 이 심연은 우리 안에 광활하고 난공불락의 나라를 세운다.

이 평화의 중추를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밖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 아름다운 밤하늘의 공기마저도 들어올 수 없는 자기만의 활동 영역이 있다. 오관(五官)상상(想像)논쟁을 좋아하는 마음, 그리고 욕망은 그런 별빛 없는 칠흑 같은 밤하늘에는 없다.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다고 해서 거기에 대해 어떤 말이나 생각을 하려고 하면 그 즉시 그곳에서 물러나 말할 수 있는 외부의 세계로 되돌아온다.

정신은 이 암흑의 문 밖에서 어떤 형태로든 활동을 하더라도 본인은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이 암흑 속에, 헤아릴 수 없는 평화 속에 안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인이 일거리를 줄 때까지 시간이 있으면 문 앞에 서서 잡담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용히 있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것은 평화로운 암흑의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오고 또 사랑의 결정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은총이다.

관상하는 영혼의 처지는 마치 낙원에 있는 아담과 하와의 처지와 같다. 모든 것은 다 나의 것이다. 그러나 대단히 중요한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 모든 것은 다 받은것이다.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것, 요구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가질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마치 자기 것인 양 어떤 것을 소유하려고 하면 그 순간에 우리는 에덴동산을 잃고 만다. 천사가 불칼을 들고 서서 하찮은 모든 이기심과 나는 원해”, “나는 필요해”, “나는 요청해하는 가 들어오지 못하게 지키고 있다. 완전한 한 인격체로서가 아니면 낙원에 들어갈 수 없다.

가장 위대한 겸손만이 우리에게 본능적 민감성과 조심성을 줄 수 있다. 이 민감성과 조심성이 우리가 암흑에서도 이해하고 맛볼 수 있는 쾌락과 만족을 추구하지 못하게 막아 줄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요청하거나 하나님 안에서의 순수하고 평온한 안식을 보다 강화하려는 행위라고 하더라도 그 행위에 의존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없이 주시려 하는 완전한 은총, 우리의 능력을 무력화(無力化)는 완전한 선물을 우리는 모독하고 탕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이것이다. 즉 어떤 열망이나 수고 또는 영웅적 행위로도 값을 치르고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순수한 선물인 우리 존재의 진수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직접 그 선물을 마련하거나 유지하고 증가시킬 길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활동은 평화롭고 위안을 주는 이 빛의 흐름에 방해가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활동이나 수고를 사랑이나 순종으로 요구하실 경우,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충성이 당신이 좋아서 이런 것들을 통해서 당신과의 깊은 체험적 일치를 유지하려고 하실 때에는 예외이다.

기껏해야 우리는 마음으로 가난한 가운데 편히 쉬며 이 위대한 선물을 받을 수 있게 우리를 내맡기고, 가능한 우리의 본능을 기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모든 욕심을 멀리하는 것뿐이다. 그런 것들이 그 자체로는 아무리 순수하고 고상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관상 중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실 때에 은연중에 조용히 오시는 그분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지루하고 부자연스러운 우리의 생활수준의 활동이나 생각, 논쟁이나 주장으로 그분의 오심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하고 행복하며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자유롭게 응답해야 한다. 그러나 관상 중에 감사드릴 때에는 말로보다는 조용히 받아들이는 평온한 행복감으로 해야 한다. “마음을 비우고 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라.” 이것이 하나님의 깊고 깊은 실재 안에 있는 우리의 비움이며, 한없이 귀중한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의 우리의 침묵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빛으로 우리를 받아들이는 고요한 암흑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갖는 기쁨이다. 하나님께 찬미를 드리는 것은 다 이런 것들이다.

 

하나님의 이런 해맑은 어둠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선언의 여섯 번째 것인 청결한 마음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5:8). 이 청결한 마음은 잠시 동안이나마 형상과 생각, 사람이 자기의 기호에 따라 원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준다. 청결한 마음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하여 흔히 쓰는 비유도 필요 없게 해준다. 비유 그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유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깊고 투철한 체험을 통해서 확실하게 모든 것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잠깐 동안 비유를 무용지물이 되게 할 뿐이다.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생생한 어둠 속에서 어떤 때에는 사랑의 깊은 감동이 일어 잠시 동안 우리를 이기심의 오랜 고뇌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주고, 하늘 왕국을 차지할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해 주신다.

우리가 다시 욕망과 비판과 유혹의 혼란으로 빠지게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는 경우에 우리는 얼마 동안이나마 기쁨을 간직했던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된다.

그 상처는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 쓰라린 상처로 속이 아프다. 우리는 우리가 아닌 우리로 되돌아왔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기를 바라시는데 우리는 아직도 그 영역 밖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 주신 곳을 우리는 갈망한다. 우리가 정녕 청빈하게 되어 자유로워지고 다시는 타락하지 않게 되기를 눈물로 애원한다. 순진한 어린아이들의 낙원으로부터 지혜가 있는 곳으로 다시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그런 때를 열망한다. 현세의 지혜는 슬픔으로 기복이 심하고 행복을 막으려 올가미를 놓는다.

이것이 깨달음의 은총이다. 우리는 자신을 버리고 비움의 기쁨으로, ()의 기쁨으로 들어간다. 거기에는 어떤 지식의 대상도 없고 끝도 없으며, 허물도 없고 때묻음도 없는 하나님의 진리만 있을 뿐이다. 낙원의 맛을 보여 주는 이 깨끗한 빛은 모든 자존심보다도 뛰어나고 논평보다도 훌륭하다. 그리고 또 소유권을 넘어서는 것이며 은거 이상의 것이다. 그 빛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작용을 한다. 모든 사람 안에서, ‘이런 세계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 안에서빛을 비추는 이 빛이 참다운 빛이다. 이 빛이 우리 가운데에 서 계시는데도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그리스도의 빛이다.

 

1-6 깨달음의 은총.pdf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