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성화(聖化)의 여정(旅程)의 각 단계들

 

 

여기에 제시하는 것들이 논리전개가 지나치게 단순하고 불충분하게 보이거나 혹은 반대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위험성을 스스로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영성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인 오직 하나님과의 일치(一致)’를 향한 긴 여정(旅程)을 따라 나아갈 영적 성화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인간의 영적인 성화는 하나님의 주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림_성화.jpg

그러나 하나님과의 일치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의 협력이란 한 마디로 믿음소망사랑의 훈련과 실천을 말하는데, 이것은 정화와 기도 안에서 병행 실천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화(聖化, 영적 여정)에 대해서, 도표로 각 단계들을 묘사하고, 번호를 매기어 각 번호에 따라 살펴보기로 한다. 특히 우리 인간 편에서 해야 하는 몫을 정화와 기도, 두 가지 측면에서 병행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도표에는 초심자들에게 요구되는 감각의 정화와 묵상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일치까지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이 영적 여정은 복음적이기 때문에, 분명히 모든 성도들을 위한 것이고, 우리 각자는 이 안에서 확실한 지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각 영혼 안에서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 각자가 서로 다른 방법과 서로 다른 시기를 통해서 인격적으로 성화되도록 하시니, 성화의 과정을 무지의 구름이 제시하는 정화조명일치의 단계에 따라 표시하고자 하였으므로 십자가의 성 요한께서 제시하신 도표는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성 요한도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예고했다.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영혼을 다른 길로 이끌어 가시기 때문에 영적 여정을 거니는 방식의 반만이라도 다른 이의 방식과 일치하는 영혼을 찾기란 거의 힘들 것이다.”

 

 

1.

 

(무지)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어둔 밤과는 다르다. 어둔 밤은 영혼의 의지에 즐거운 것들과 육체에 감미로운 것들, 그리고 세상의 외적인 모든 것들에 대해 지니고 있는 모든 감각의 욕구를 끊어버림과 정화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감각의 정화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란 성화의 전 과정을 말한다.

위 도표에서 전체를 끌어안는 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향한 영혼의 여정의 출발점부터 끝까지 모두 (무지)’ 안에 포함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한다. 영혼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게 되는 변화의 과정을 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는 영혼의 출발점에서부터 말할 수 있는데, 영혼이 전에 지니고 있었던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욕구를 없애면서, 즉 세상의 모든 것들을 부정하면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없앰과 부정이란 인간의 모든 감각들에게는 밤과 같은 것이다. (출발점의 문제)

둘째는 영혼이 이 일치로 가야 하는 여정이나 방법에서부터 말할 수 있는데, 그 방법이란 곧 인간의 지성에게는 마치 밤처럼 또한 깜깜한 것이다. (여정의 문제)

셋째는 영혼이 도착하는 곳인 하나님 편에서부터 말할 수 있는데,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 세상에 사는 영혼에게는 바로 어두운 밤이다. (목표의 문제)

하나님과 거룩한 일치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밤들을 거쳐야 한다. 여기서 밤의 세 부분은 사실 하나의 밤을 이루는 부분들이다. 그러나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적인 밤처럼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감각의 밤인데 사물들이 잘 보이지 않게 되는 초저녁에 비교된다. 신앙을 말하는 둘째 밤은 완전하게 어두워진 한밤중에 비교된다. 셋째 밤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새벽녘을 말하는데 그때에는 대낮의 빛이 즉시 도달한다. 이상 세 가지가 영혼이 하나님과 신비로운 일치를 하기 위하여 거쳐 가야 하는 밤들이다.

그런데 이 의 영혼은 맹인처럼 완전히 어두움 속에 빠져서 이 밤의 여행에 유일한 안내자인 신앙에 내맡기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향해 걸어간다. 이 밤을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정화조명일치라는 삼단계로 나누었으나, 십자가의 요한은 영혼의 활동이 우세(優勢), 즉 영혼 자신이 주도권을 갖는 능동적인 밤과 하나님의 활동이 우세한, 즉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직접 개입하셔서 영혼을 정화하는 수동적인 밤,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이 두 부분은 도표처럼 분리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시기와 방법에 따라 나타난다. 능동적인 부분이 밤의 길에서 무엇보다 첫째 부분을 차지하고, 수동적인 부분이 마지막 부분에서 더 우세하다는 것이 사실임에도 능동적 밤과 수동적 밤이 동시에 작용하지 않으면 정화의 효과를 낼 수 없으며, 따라서 이 두 가지 밤은 어떤 의미에서는 동시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한쪽이 주도권을 가질 때 다른 쪽은 역할이 약화 혹은 열세한 것이지 결코 참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주도권이라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취하실 때부터 영혼은 순종해야 하며, 영혼의 능동적 밤은 수동적 밤에 의해 조절되고 맞추어지며 요구에 응해야 한다.

밤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작용이며, 특히 하나님의 직접적인 작용은 합당한 응답을 요구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말하기 힘든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는 내가 지니고 있는 능력을 발휘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많은 영혼들에게 필요한 것이므로 주님께서 내게 말을 하도록 도와주실 것이라는 신앙으로 시작할 것이다. 많은 영혼들이 덕의 여정을 시작하고, 우리의 주님께서 거룩한 일치에 이르게 하는 어두운 밤에 놓아주시기를 원하지만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 이유는 때로는 영혼들이 그 밤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거나 포기하기 때문이고, 또 때로는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지 못하거나 영혼들을 정상까지 인도해줄 수 있는 깨어 있는 적절한 안내자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영혼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재능과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이 많은 영혼들이 조금만 용기를 냈더라면 정상에 도달 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영혼들이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지 않거나 모르기 때문에, 혹은 이들에게 첫걸음을 떼어놓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거나 걸어가게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유치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을 본다는 것이 참으로 슬프다. 비록 우리의 주님께서 이것저것 따지시지 않고 영혼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많이 베푸신다할지라도 많은 영혼들이 고생은 실컷 하고 얻은 것은 별것 없이 늦게 도착한다. 그 이유는 일치에 이르는 확실하고 순수한 여정을 가기에 필요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영혼들의 협조가 없이도 데려가실 수 있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께서 많은 영혼들을 데려가신다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겨드리지 않는다. 자기들을 데려가시는 것에 오히려 반발하면서 조금밖에 걷지 않거나 혹은 그것이 자신들의 의지에 끌리지 않기 때문에 허탕을 치기가 일쑤이다. 결국 고통만 더할 뿐이다.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거나 맡겨드리는 것 대신에 오히려 경솔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이끄심을 방해하거나 반발하는 영혼들이 많이 있다. 이런 이들은 마치 어머니가 자기 팔에 안고 가기를 원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발로 걸어가겠다고 떼를 쓰면서 조금도 걸을 수 없도록 울고불고 발버둥치는 어린아이들과 같은 것이다. 만일 걷는다 해도 어머니는 어린애 보폭으로 어기적거릴 뿐이다.”

이제부터 각 단계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자.

 

2. 출발점

그림_성화.jpg

영성(靈性)의 산()을 오르기 위한 출발점은, 죄에서 완전히 이탈하고 하나님께로 결정적으로 돌아선, 그런 의지(意志)이다.

우리가 이미 아는 바대로, 이 길에서 진보(進步)하기 위한 영혼의 걸음걸이는 정화(淨化)와 기도(祈禱)이다. 이 둘은 공통적인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여기 그 중요한 특징들만을 열거해 보자:

정화(淨化)와 기도는 병행적(竝行的)으로 진보하는데, 결과적으로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정화(淨化)의 어떤 단계는 기도의 어떤 형태와 상응한다.

정화와 기도는 서로 영향을 미친다. 정화의 증가나 감소는 기도의 증가나 감소를, 기도의 증가나 감소는 정화의 증가나 감소를 반드시 유발시킨다.

정화와 기도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세한 활동이 영혼의 활동일 때는 능동적이고, 영혼이 수동적으로 머무르는 반면 하나님께로부터 우세한 활동이 나오는 경우는 수동적이다.

그러나 이 영혼의 수동성한가함이라는 말과 비슷하다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순응성(順應性)온순함과 같은 말이다. 이 순응성은 산의 정상을 향한 영적 활동을 요구하는데, 영혼이 오로지 받기만 하는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3. 성화

 

1) 정화(淨化)

 

믿음소망사랑은 하나님을 최고선(最高善)으로, 무한히 매력적이고 무한히 사랑스러운 최고선으로 우리에게 제시한다.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명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12:30).

하나님께 대한 이 전적인 사랑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격렬히 끌어당기는 감각적인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과 대조된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할 이 사랑을 하나님 아닌 피조물들에게 돌리기 때문에, 이 피조물들을 마치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존재하는 것인 양 사랑하게 되는 위험을 날마다 겪게 된다.

무질서(無秩序)란 피조물들을 사랑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들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직접 피조물들 안에서 우리의 행복을 찾음으로써 질서의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피조물들을 사랑하는 데에 무질서가 있는 것이다. 앞으로 말하게 되겠지만 피조물들은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이 무질서를 피하기 위해서, 또 우리 마음속에 숨어 있는 피조물들에 대한 애착을 피하기 위해서, 피조물들이 우리에게 주는 유혹에 대항해야 함은 불가피하다. 바로 여기에서 피조물들에 대한 우리 사랑의 점진적 이탈(離脫)인 정화가 이루어진다.

우리 마음의 정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그만큼, 다시 말해서 우리 의지(意志)의 미소한 부분이나마 무질서한 방법으로, 즉 질서의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피조물을 사랑하는 그만큼, 우리 사랑은 더럽고 불순한 사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께로 향하기에 부적당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의 말대로, “한 마리의 새가 가늘거나 굵은 줄로 묶여 있다고 하자. 아무리 가는 줄이라 할지라도 단단히 묶여 있다면 마치 굵은 줄에 묶여 있는 것처럼 날아갈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가는 줄을 끊기가 더 쉽다. 그러나 아무리 쉽다고 할지라도 끊어지지 않는다면 날아갈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피조물들에 집착되어 있는 사람은, 비록 가늘다고 할지라도 그 노끈을 끊어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께로 날아오를 수 없다.

그러나 되풀이해 말하지만, 끊어버려야 할 노끈은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피조물들에 대한 무질서한 사랑’, 즉 하나님 때문이 아닌 피조물 자체 때문에 그것들을 원하는 그런 사랑이다.

따라서 정화에 관심을 가진 영혼이 자기의 것들을, 자기의 합당한 일이나 자기 생활에 유익한 사물들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자기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피조물들을 직접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피조물들도 더 완전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부부(夫婦)의 사랑을 예로 들어보자.

남편은 아내를 두 가지 방법으로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순수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랑할 수 있다. 이 경우에, 남편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동기는 바로 아내 자신이고, 아내가 완전할 수 있기를 바라나, 아내는 항상 피조물로서 머물러 있게 된다. 이런 사랑은 당연히 자기 아내의 인간적인 품성에 매여 있게 되고, 지상적인 행복에만 한정될 것이다.

만일 이와는 반대로, 남편이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는 아내의 모습 안에서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같은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아내에 대한 그의 사랑은 아내의 인간적인 품성에 좌우되지도 않고, 순전히 지상적인 행복만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의 사랑은 아내를 하나님께로 이끌고 하나님과의 영원한 일치를 지향하는 그런 사랑이 될 것이다.

두 번째 사랑이 첫 번째 사랑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는 것을 누가 모를 것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합당한 일을,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상급들이나 고통 때문에 사랑하거나 인내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행하도록 우리에게 명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또 우리가 그것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랑하거나 인내하게 되는 것이다.

기쁨도 고통도, 성공도 실패도, 건강도 병고(病苦), 또는 죽음 자체까지도, 우리에게 그것을 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침착한 이탈 안에서 그것들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깊은 평화 중에 그것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온갖 다양한 사물들, 가령 집이나 식량이나 돈 따위,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적인 것들도, 그것들에 우리 마음을 집착하지 않고, 다시 말해서 그런 것들에 우리 행복을 묶어두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즉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하고 유익한 수단들로서, 우리가 그것들을 이용하게 될 것이다.

사실상 우리 의지(意志)를 정화시키는 것은 사랑하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랑을 최대한으로 증진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 전부를 오로지 하나님께만 집중시키는 탁월한 목표를 가지고, 피조물들에 대한 의지의 완전한 이탈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적 사랑의 완전함과 힘을 가지고 다시 피조물들에게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2) 기도

 

의지의 정화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일치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도를 통해 완성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새가 하늘로 오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땅에 묶어두는 줄을 끊어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날개를 움직이고 높이 날아올라야 한다.

기도란 바로, 하나님께로 향한 영혼의 이 날아오름이고, 인간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로 밀착시키는 것,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 안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서, 인간은 믿음을, 특히 사랑을 최대한으로 실천하게 된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영혼 안에서, 하나님께 대한 인식과 존경은 점점 커나가고, 자기 자신과 피조물들에 대한 존경은 점점 줄어든다. 그러면 소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로잡으실 만한 탁월한 분이심을 발견하고서 영혼의 모든 욕망을 그분께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때까지, 영혼을 하나님께 항상 더 완전히 밀착시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기도는 , 믿음소망사랑으로 배양된 기도는- 영혼을 하나님과의 일치의 상태에로 인도한다. 거기서는 더 이상 두 의지(意志, )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의 의지()만이 존재하니, 하나님의 뜻, 바로 영혼의 뜻이 된다.

정화, 즉 모든 피조물에 대한 의지의 이탈이 하루의 모든 행위들 안에 미치는 동안, 우리는 기도에 편리한 시간과 장소를 기도를 위해 남겨두어야 한다.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5:16)는 것과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6:12)는 것을 전해준다.

기도에 드려질 시간은, 각자의 고유한 능력들과 필요성들에 따라 각자에 의해 선정되어야 한다. 일이나 가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평신도들도, 하루에 30분이나 20분 정도 조용한 곳에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도 그것을 암시해 주신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6).

하나님과의 이 만남에 있어서, 영혼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바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행위들이다. 우리는 점점 더 완전한 기도의 형식을 원하지만, 모든 기도의 본질은 우리가 앞서 말한 것처럼, 믿음소망사랑의 실천이다.

만일 영혼이 하나님과의 이 만남에 성실하다면, 그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의 일치는, 하루의 모든 행위들에 확산되고, 예수의 다음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점점 습관이 될 것이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18:1). 이 말씀은 삶의 모든 상황들 안에서 항상 하나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것을 원하라는 뜻이다.

 

   2-1 성화의 여정의 각 단계들.pdf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