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감각의 능동적 정화(淨化)

 

 

감각의 능동적 정화의 단계에서 영혼이 성취해야 할 목표는 감각적인 모든 맛과 모든 자기만족에 대한 거절이다. 사실 영혼의 진보를 방해하고 해를 끼치는 것은 이 세상의 사물들이 아니라, 오히려 피조물들에 대한 욕망과 그 맛이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1:5). 빛과 어두움, 상반되는 둘이 한 주체에 공존할 수 없다. 그러므로 피조물에 대한 집착인 어두움과 하나님이신 빛은 상극이므로 빛은 어두움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영혼이 먼저 집착을 쫓아버리지 않고서는 하나님과의 일치의 빛이 그 안에 자리하여 사귈 수 없다(고후 6:14).

영혼은 피조물들로부터 물리적으로 이탈하지 못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피조물들에 대한 욕망과 맛으로부터 그 의지(意志)가 이탈하지 못한 경우에도, 자신을 정화(淨化)시킬 수 없다. 이것은 사랑은 서로 닮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같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랑에 붙들어 매놓기(종속시키기) 때문이다.

 

 

1. 첫 단계는 감각적인 맛에서 벗어나야(이탈) 한다.

 

물질적이고 지상적인 사물들의 맛으로부터 쉽게 이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요한은 먼저 우리의 취미와 감각을 영적인 것들에로 집중시킬 것을 권한다. “그들은 아직도 세속의 사물들에 대한 맛에서 벗어나지도 떼어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손에서 하나의 물건을 빼앗으면서 손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울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른 것을 쥐어 주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열심 있는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면 의지가 기뻐할 수 있는 이런 만족감들과 욕구들을 다 벗어던져야 한다.” 어두움을 지니는 자가 빛을 파악하지 못하듯이 피조물(세속의 사물)에 집착하는 영혼도 집착을 깨끗이 씻어버리기까지는 하나님을 파악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아직도 잘 먹고 편안하게 살고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술집이나 TV 앞에서, 혹은 더 나쁘게는 감각적인 쾌락 안에서 당장에 자신의 맛을 낙으로 삼고 추종하고 있는 사람은, 그런 것들을 보다 영적이고 고상한 수준에로 끌어올리고, 자신의 의무 수행이나 사랑의 실천이나 기도의 실천묵상영적 독서, 또 관대함에 대한 자신의 갈망을 만족시킬 만한 수련(修鍊, 苦行)의 실천에 전념하도록 할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즐기던 것보다 더 고상한 감각적(感覺的)인 기쁨이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고, 지상적인 만족을 찾느라고 보낸 시간들이 그에게는 낭비된 시간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의 감성은 영적 보화들의 맛으로 풍부해지게 되고, 물질적인 보화들로부터 이탈하게 되며,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는 데에도 성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욕구는 모든 것이 다 해로운 것인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답은 어떠한 욕구이든 다 해롭거나 영혼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의지적(意志的) 욕구이다. 저절로 일어나는 자연적인 욕구는 영혼이 동의하지 않고, 또 그것이 충동에 불과할 때는 하나님과의 일치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이승에서 이것마저 끊어버리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연 본성이 그런 것들을 지니고 있다 해도 영혼은 이성(理性)의 힘으로 그것들을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의지적 욕구는 아무리 작은 것이나 결점까지라도 일체를 비우고 영혼에서 없애야만 비로소 오롯한 일치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일치 상태란 영혼이 의지로써 하나님의 의지대로 전적으로 변화되는 데 있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하나도 없이 매사에 그분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것일 따름일 것이다. 따라서 영혼이 만일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어느 불완전한 것을 원한다면 벌써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이니, 하나님의 뜻에 없는 것을 영혼이 지닌 탓이다. 이는 곧 영혼이 환히 알고도 의지로써 결정에 동의하지 않으며 또 알면서 동의하지 않을 만한 자유의 힘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의지적인 불완전에 기인하는 습성, 예를 들면 말을 많이 하는 버릇, 무엇인가를 절대 버릴 마음이 없는 집착, 즉 사람방 같은 것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음식과 쓸데없는 대화, 그 외에 만족을 느끼려 하고, 알고 싶어하고, 듣고 싶어하는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극복하지 않는 한 하나님과의 일치는 고사하고 일치로 나아가는 것마저도 불가능하다.

한 마리의 새가 가는 줄에 묶여 있다 하자. 가늘거나 굵거나 간에 줄이 끊어지지 않아 새가 날지 못한다면 줄이 아무리 가늘다 해도 굵은 줄에 매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가는 줄은 물론 끊기는 쉽다. 그러나 아무리 쉽다 해도 끊지 않으면 날지 못한다. 이와 같이 어느 것에 대한 집착을 끊지 않는 영혼은 비록 덕이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일치의 자유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나의 결점이 다른 결점을 끌어오고 다른 결점은 또 다른 결점으로 번져가기가 일쑤이니 하나의 욕() 끊기를 소홀히 하는 영혼이 이 욕구가 지닌 나약함과 불완전함에서 나오는 많은 욕구를 갖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따라서 그는 항상 떨어져 갈 것이다. 우리가 보아온 많은 사람들은 철저한 이탈정신과 자유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은총을 하나님께 받았는데도 하찮은 집착을 시작했다는 것 하나 때문에 하나님의 일과 맛과 거룩한 고요를 느끼지 못한다. 이는 그들이 처음부터 감각의 맛과 욕구를 끊지 않고 고요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 자기를 지키지 않은 까닭이다(산길, I,11, 1-5 참조).

 

 

2. 진정하고 고유한 의미에서의 정화(淨化)

 

불완전한 영혼들에게 있어서는 이 첫 단계의 결과가 이미 큰 성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첫 단계는 곧장 두 번째 단계로서 보다 결정적인 진보에로 넘어가야 한다. , 모든 분야에 있어서 감각적인 맛에 대한 전적(全的)인 수련(修鍊, 苦行, mortifi- cation; , 절제금욕, 혹은 죽음)에로 넘어가야 하고, 이는 영적인 분야까지도 포함해야 한다.

감각의 능동적 정화가 시작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많은 영혼들이, 심지어는 수도자들까지도, 자신들을 정화시키는 이 훈련에 과감히 복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직하고 선한 사람들로서 자신의 생애를 끝마치게는 되지만,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거룩한 모험에 참여하겠다는 결심은 없이, 기다림 속에 머무르고 있다.

반면에, 관대한 영혼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감각들은 무척 조잡하고 물질적인 능력들이어서 순수한 영이신 하나님께 내가 도달하도록 할 수 없다. 내 감각들은 기껏해야 내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조금 쉽게 할 수 있을 뿐,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줄 수는 없다. 그러니 나는 그것들을 이용하지만, 그것들에 의지하지는 않겠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을 원함이 없이 그냥 이용하겠다. 그래서 마치 사람이 이미 자기가 지나온 다리(橋梁)를 뒤에 남겨두고 걸어가듯이, 그것들을 담담하게 넘어서서, 이 길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무한한 사랑이신 분께로만 내 마음을 향하겠다.”

 

참고로 십자가의 요한은 영혼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임재)이 체험되는 데는 세 가지의 방법이 있다고 한다. 이를 간단하게 정리한다.

첫째는 본질적(esencial)인 방법으로 모든 영혼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며, 이 현존(임재)을 통하여 영혼의 삶과 존재의 가능성이 결정된다. 이 현존이 없을 때에 영혼의 삶을 버릴 수밖에 없으므로 살아 있는 영혼에게는 절대로 없어질 수 없는 것이다.

둘째는 은총을 통한 현존 체험인데 은총으로 말미암아 만족스럽게 기뻐하는 영혼 안에 하나님이 머무시는 것을 말한다. 모든 영혼이 다 간직하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에 대한 죄에 빠진 영혼에게는 체험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셋째는 영적인 애정을 통한 현존 체험인데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영혼에게 영적인 현존을 드러내시면서 영혼을 새롭게 만들어주고 기쁘게 해 주신다고 한다.

 

한 가지 알아둘 것은, 외적이고 육체적인 감각들에게 나타나는 방식으로 지성에 초자연적 지각들과 깨달음이다. 그것들은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등이다. 영적 도유(塗油, 기름을 바름)라고도 하는 이런 현상은 깨끗한 영혼들 안에서 정신()으로부터 감각으로 스쳐가는 것이다. 이것은 감정적인 정신으로 이루어지는 신심의 행위와 애착에서 생기는 것인데, 열심 있는 사람들 각자에게 자기방식대로 느껴지는 것이다. 비록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육체적 감각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그것을 확신한다거나 받아들이지 말고, 더 나아가서 그것들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시험해보려는 마음조차도 먹지 말고 그것들로부터 피해야 한다. 그것들은 외적인 것들이고 육체적인 것들인 만큼 그만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확실성이 덜하다. 하나님의 나타내심은 감각에게보다는 정신()에게 매우 일상적인 것이고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감각적인 것들을 피하는 것이 영혼을 위해서는 훨씬 더 안전하고 도움이 된다. 육체적인 감각에 주어지는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커다란 잘못을 저지를 것이며, 이렇게 속은 사람은 엄청난 어려움에 빠질 것이다. 적어도 영적인 것으로 가는 데 있어서 자기 안에 확실하게 장애를 끌어들이게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악마로부터 오는 것이 분명하다. 악마는 내적이고 영적인 것보다는 외적이고 육체적인 것이 손을 더욱 많이 뻗치고 영혼을 아주 쉽게 속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육체적인 감각에 주어지는 형상들과 대상들에 매달리면 영혼은 신앙이라는 일치의 방법과 길을 더욱 더 잃어버리게 된다. 악마들은 자주 감각들에게 시각에는 성인들의 모습이나 엄청나게 아름다운 빛들을 보여주고, 귀에는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는 말을 들려주며, 입에는 아주 부드러운 향기와 달콤함을 넣어주고, 감촉에는 쾌락을 가져다준다. 악마는 영혼이 이런 것들에 푹 빠져들게 하면서 끔찍한 악으로 끌고 간다.

그래서 육체적 감각에 주어지는 현상이나 감정들을 항상 물리쳐야 한다. 혹시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을 물리치는 것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며, 영혼이 그것을 물리치거나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현상이나 감정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혼에게 원하시는 열매나 효과들을 받아들이기를 영혼이 거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체적 현시나 혹은 다른 감각들 가운데 어느 것에 느껴지는 영적인 느낌이 영혼의 가장 내적인 부분에서 이루어지는 은총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그 순간에 정신() 안에 이미 그 효과가 있음이 느껴지기 때문에 영혼은 그것을 좋다거나 나쁘다고 할 겨를이 없다. 이런 것들은 정신 안에서 수동적으로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런 느낌들이 있고 없고는 영혼이 그것을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것에 달려 있지 않다.

또한 악마로부터 오는 이런 작용들도 비록 영혼이 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영혼이 정신 안에서 소동을 일으키고 냉담함과 허영과 자만심이 일게 한다. 악마의 작용들은 단지 영혼 안에서 초기의 충동을 일으킬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만일 영혼이 원하지 않는다면 영혼을 크게 흔들어 놓을 수는 없다. 불안을 가져올 수도 있으나 만일 영혼이 용기와 신중함을 가진다면 오래가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들은 영혼을 꿰뚫고 들어가며 사랑하도록 영혼의 의지를 움직이고 그 효과를 남긴다. 그래서 영혼은 아무리 저항하려고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뒤에서 할 말이지만 여기서 언급하기로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영혼이 자기 안에서 은총을 통하여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과 일치를 통하여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은총을 통하여서는 단지 서로 사랑하는 것이지만, 일치를 통하여서는 사랑하면서 동시에 서로 교류하는 것이다. 이 차이는 영적 약혼과 영적 혼인 사이에 있는 차이와 같다.

약혼에서는 단지 약혼자와 같아진 예만 있으며 약혼자들의 오직 하나의 의지와 우아하게 건네주는 장식품과 패물들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혼인에서는 일치는 물론이요 인격들의 교류가 있다.

 

 

3. 정화(淨化)의 실천에 필요한 구체적인 규범들

 

이 관대한 영혼들에게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다음과 같은 정화의 규범들을 제시한다. “주의사항들을 마음에 담고 의지 안에서 일어나는 반발심을 잘 극복하여 잘 실천했다면 감각의 밤에 들어가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더 풍성한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 육신의 정욕(육체의 쾌락)과 안목의 정욕(눈의 쾌락)과 이생의 자랑(삶에 대한 우쭐함, 요일 2:16)을 없애도록 해야 한다.

 

이를 네 가지 점에서 요약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음

감각(感覺)들에 대한 정화

()들에 대한 정화

자애심(自愛心)에 대한 정화

이것들을 하나씩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1)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음

영혼이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면 자기의 삶을 그리스도께 맞추면서 매사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본받을 일상적인 욕구를 지녀야 한다.” 모든 행위를 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처럼 자신의 삶을 행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생애를 깊이 연구하고 묵상할 것이다.

 

성인의 이 말씀은 근본적인 것이다. 사실 예수께 대한 사랑과 그분을 닮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 영혼 안에 없다면, 앞으로 보게 될 여러 점들 안에서 언급되는 모든 규범들은 참고 견딜 수 없는 짐들이 될 것이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영혼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불이 타고 있다면, 가장 무겁게 느껴지던 희생도 가벼워질 것이고, 본성으로는 가장 괴롭던 포기도 감미로운 것이 될 것이다(11:28~30 참조).

여기서 주의할 점은, 성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욕망이 한결같아야 하고, 그 영혼이 수행하는 모든 행위들 안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하루의 봉헌이나 단순한 습관적인 지향(志向)’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포기를 가능하게 하고 거기에다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시시각각으로 새로워지는 실천적인 사랑이다.

 

2) 감각(感覺)들에 대한 정화

예수께 대한 사랑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의지를 모든 감각적 즐거움들에 대한 포기에로 향하게 해야 한다.

감각들이 가져다주는 어떤 기쁨일지라도 그것이 순수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공경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거절해야 하고 비운 상태에 머물러야 한다.”

 

이는 지상 생애 동안 성부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 외에는 어떤 다른 즐거움도 갖지 않으셨고 갖기를 원하지도 않으셨던 주님의 말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라.”(4:34)처럼 아무것도 원하지 말아야 하고 다른 기쁨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그리고 여기서 성인은 현명하고도 실천적인 두 가지 권고를 한다.

a)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공경하기 위해 중요하지 않은 무엇을 보거나, 들음으로써 얻는 즐거움이 있거든, 가능한 한 그것들을 듣지도 말고, 쳐다보지도 말고, 소유하거나 행하지도 말고, 피하라.

b) 말하는 것이나, 감각의 모든 것들에 있어서도 더도 덜도 말고 거절할 수 있다면 기꺼이 거절해야 한다. 만일 그것을 피할 수 없다면 단지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방법으로 감각들에 의한 기쁨을 즉시 비우고 없애려고 노력하는 영혼은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얻고 덕()에 있어서 크게 진보할 것이다.

 

3) ()들에 대한 정화

감각의 정화에 있어서, 영혼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본성이 가장 싫어하는 것을 향해서 자신의 의지를 정향(定向)시킴으로써 욕()들에 대한 정화를 실천해야 한다.

사실 욕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감각에 즐거운 것에 집착하도록 한다. 이 욕들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욕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고, 본성적인 욕들에 반대되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원함으로써 욕들에 대한 반격을 행함에까지 이르러야만 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분명히 말한다.

 

욕들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영혼은 항상 다음과 같은 것에로 향하도록 마음을 담아서 실천해야 한다.

 

더 쉬운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을,

더 맛있는 것보다 더 맛없는 것을,

더 즐거운 것보다 오히려 덜 즐거운 것을,

쉬는 것이 아니라 고된 것을,

위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 없는 일을,

많은 것이 아니라 적은 것을,

크고 값진 것이 아니라 작고 값이 없는 것을,

무엇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을,

 

세속적인 것들 가운데 더 좋은 것을 찾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나쁜 것을 찾아야 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철저하게 벗어버림과 비움, 그리고 가난함으로 들어가기를 원해야 한다.

 

4) 자애심(自愛心)으로부터의 정화(淨化)

십자가의 요한은 자애심을 끊어버릴 것을 단호히 요구한다. 다시 말해서, 이 교활한 자기만족, 영혼의 구석구석에 스며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미묘한 친절마저도 끊어버릴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이 자애심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다.

이 승리를 얻기 위해서 성인은 세 가지 규범을 제시한다.

첫째, 자신을 낮추면서 실천하도록 노력하고,

다른 이들이 자신을 그렇게 다뤄주도록 원하라.

(이것이 육체의 쾌락=육신의 정욕에 맞서는 것이다.)

둘째, 자신을 낮추면서 말하도록 노력하고,

다른 이들이 자신을 그렇게 말하도록 원하라.

(이것이 바로 눈의 쾌락=안목의 정욕에 맞서는 것이다.)

셋째, 자신의 낮은 처지를 생각하고 자신을 낮추면서 생각하도록

노력하고, 다른 이들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도록 원하라.

(이것 역시 자신은 물론이요 삶에 대한 우쭐함=이생의 자랑에 맞

서는 것이다.)

 

감각의 정화의 마지막(모든 욕구들을 끊어버림과 모든 기쁨을 없앤 상태)에서, 영혼은 놀라운 일이자 그 자신의 보다 큰 기쁨으로서, 모든 지상적인 맛들과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설사 전에는 감각적인 집착들이 마치 바닥에 떨어진 껌처럼 발에 붙어 하나님과의 만남에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했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 애착들이 끊어져서 자유롭게 달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는 님과의 일치를 즐기기 위한 진정한 자유에로 날아오를수 있게 된다.

 

 

2-2 감각의 능동적 정화.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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