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묵상기도

 

 

관상적 생활의 본질을 말하는 저술가들은 한결같이 관상적 생활이 실제로 관상을 준비하는 생활이 되려면 정화와 기도, 특히 묵상기도를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감각의 정화만으로는 영혼이 예수님께 대한 위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그분을 닮기를 열렬히 바라는 그런 상태에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화에는 묵상기도가 동반되어야 한다.

 

묵상(默想)’이라고 불리우는 기도는 영혼이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 -예를 들면, 그분의 선하심, 그분의 의로우심, 그분의 편재(偏在)하심 등- 이나, 혹은 예수님의 생애의 신비 -예를 들면, 그분의 매 맞으심- 이나, 혹은 예수님의 말씀 -예를 들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계명을 지킨다하신 말씀- 을 주의 깊게 생각하고,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 자신의 마음을 불태우기 위해서 상상력(想像力)까지 이용해서 그 주제에 대해서 곰곰 생각하는 것이다.

 

묵상기도란?

십자가의 요한의 생각을 더욱 명확히 알아듣기 위해서는 아빌라의 테레사(예수의 테레사)의 가르침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아빌라의 성녀 예수의 테레사에 의하면, 묵상이란 자기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 하나님과 단 둘이서 자주 이야기하면서 사귀는 친밀한 우정의 나눔 이다. 결국 이는 사랑의 친교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해 주심을 느끼고, 한편 자기 편에서도 주님께 자신의 사랑을 드러낸다. 즉 사랑의 부름을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을 속삭이게 된다. 그래서 아빌라의 테레사는 거듭 묵상기도란 많이 생각하는 일이 아니고 많이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생각하는 일을 사랑 아래 두라고 강조하고 있다.

물론 묵상기도 중에도 생각은 하게 되지만, 그것은 슬기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고 더욱 깊이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빌라의 테레사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묵상 기도 중 줄곧 생각만 하면서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된다. 잠시 생각한 다음에는 주님이 그대들을 사랑하심을 깨닫게 될 것이니, 그 생각을 멈추고 주님 앞에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여러 가지로 사랑에 넘친 대화를 나누십시오. 그리고 그 대화 중에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의 영광과 또한 그대 자신을 위해 요긴한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씀드리십시오.” 여기에 아빌라의 테레사가 말하는 묵상기도의 본질이 모두 요약되어 있으며, 따라서 아빌라의 테레사의 묵상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사랑 가득한 대화라 함은 핵심을 찌른 말이다.

감각의 정화는, 우리가 앞서 말한 대로, 영혼이 예수께 대한 위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그분을 본받기를 열렬히 바라는 그런 상태에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그 때문에, 정화는 묵상을 동반해야 한다. 묵상의 목적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하는 대로, 바로 그로써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인식을 조금이나마 얻어내기 위한 것 이고, 감각의 정화를 위한 끈질긴 싸움 안에서 그것을 지탱해주는 사랑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다.

 

묵상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실천된다.

우선 교회나 자신의 방 같은, 외부의 번잡함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조심스레 머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정다운 이야기는 멀리 떨어져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아주 큰 소리를 내야 한다면 정다움은 사라질 것이다. 주님과 더불어 사랑에 겨운 대화를 하려는 이도 역시 하나님을 자기 곁에 모셔야 한다. 따라서 묵상기도의 준비는 하나님과 접촉하고 그분 앞에 자기를 두어야 하며, 교회나 자신의 방 또는 우리의 동반자로서 우리와 이야기하고자 부르시는 삼위일체께서 거처하시는 영혼의 지성소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를테면 주님이 우리에게 넘치는 사랑을 드러내신 거룩한 수난을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이신 구세주를 더욱더 사랑하려는 것이다.

거기서 맨 먼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現存), 혹은 우리가 교회 안에 있다면, 교회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현존(現存)에 대한 신덕(信德)의 행위들을 실천해야만 한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現存)과 그분께서 우리를 지배하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분과 친밀하게 사귄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영혼은 어떤 신비(神秘), 즉 하나님의 어떤 특성이나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 주의를 집중해야만 할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영혼은, 자신이 묵상하고자 하는 어떤 신비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등- 을 자신에게 보여주는 어떤 책을 읽음으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십자가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주의를 집중하게 되면, 영혼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께서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영원한 사랑으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영혼은 그 사랑에 사랑을 통해서 응답하고, 예수님과의 대화 안으로 몰입하게 된다. 결국 영혼은 자신의 마음에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그분께 말씀드리게 된다. “예수님, 왜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제 일생을 망치게 되었습니까? 왜 저는 당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도대체 왜 저는 제 죄들로써 당신께 상처를 드리고 있습니까?” 영혼은 이어서 전에는 한 번도 청해 본 적이 없는 것을 청하게 된다. “오 나의 예수님, 당신과 함께 고통 받게 해 주십시오!”

부언하면, 십자가의 성 요한은 아빌라의 테레사처럼 구세주께서 매 맞으시던 참혹한 장면을 자주 묵상한 듯하다. 두 분 다 그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또 그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생각되는 묵상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작은 질문표를 사람들에게 권한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고통 받으시는 분은 누구이신가? 왜 고통 받으시는가? 어떻게 고통 받으시는가?”와 같은 질문에 자연스레 나오는 대답은 확실히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하는 데 적합할 것이다.

그 후에는 대화는 중단되고, 그리스도를 향한 어떤 사랑의 눈길 안에서 영혼은 변모된다. 이 사랑의 눈길에는 종종 사랑의 감명과 눈물이 수반된다. 그러나 이 태도는 여전히 더 영적(靈的)인 것이 되어야만 하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위해서 고통 받고 그분만을 위해서 살아가기를 결심하는, 단호하면서도 평온한 의지(意志) 안에서 스스로 더 변모되어야 한다.

부언하면, 영성생활이 진보함에 따라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의지가 감수성을 강하게 지배하게 되면, 사랑의 감수성이 강한 마음에는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사랑의 표현방법은 그다지 세차지도 요란스럽지도 않게 되며 밖으로는 그다지 드러내지 않으면서 안으로 깊숙이 간직하게 된다. 그렇게 될 때 그 사랑은 매우 고요히 표현되지만 주님께로 행하는 의지의 움직임은 훨씬 강하고 절실해진다. 그때 영혼은 더욱 깊이 사랑을 깨닫게 되느니만큼 하나님과 사람이 되신 말씀을 주시하게 된다. 이때 더는 생각하지도 않고 거듭 탐구하지도 않고 그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이미 깨달았으므로이제는 사랑 때문에 고통 받으셨으며 또한 사랑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직관적인 눈길 안에서 그 탐구의 열매를 맛볼 것이다.

묵상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다만 영혼이 하나님께 말씀드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영혼과 더불어 말씀하신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이 아니고, 영혼에게 빛을 주시어 그로써 하나님이 위대한 분이시며 만물을 초월하여 사랑받으셔야 마땅한 분이심을 똑똑히 깨닫게 해 주신다. 또한 영혼에게는 도움이 되는 사랑의 힘이 주어진다. 이 의지가 하나님께로 깊숙이 향하는 고요하고 차분한 대화, 즉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쏠리는 눈길로써 지탱된 대화야말로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는 묵상기도의 참된 종국 목적이다.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묵상이나 사색의 끝은 하나님으로부터 약간의 사랑과 깨달음을 얻어내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우리 영혼 안에 주입시키기를 원하는 인식과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이다.

 

 

2-4 묵상기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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