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능동적 관상기도

 

 

관상이라는 영적 쉼에 다다르기 위해서 영혼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이제까지 해오던 방식, 즉 추리나 묵상을 포기한다. 그러나 초기 관상이라는 미묘함 때문에 이 시기를 알아차리기는 어려우며 모르고 지나칠 위험이 다분히 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이 사랑 가득한 깨달음이 초보자들에게 매우 미묘하고 섬세하고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이 완전히 감각적이라고 하는 묵상의 수련 방법에 익숙해져 있으면서 이미 순수한 정신에게 속하는 느껴지지 않는 새로움을 거의 느끼지 못하거나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묵상을 마쳐야 할 시기에 대해 알아보자.

십자가의 요한은 하나님께 가기 위해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려면 제때에 묵상과 사색을 포기해야 한다고 한다. 이 포기 시기에 대하여 징표 셋을 제시한다.

첫째로 자신 안에서 보게 되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상상력과 함께 사색을 하거나 묵상을 할 수 없으며, 전에 그랬던 것과 같은 맛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

둘째로 영혼이 안과 밖을 가릴 것 없이 특별한 일들에 감각이나 상상력을 끌어들일 의욕이 전혀 없음을 보게 될 때이다. 영혼이 다른 것들에 의도적으로 상상력을 적용하는 것이 싫어진다는 것이다.

셋째로 영혼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스러운 집중을 하게 되면서 아무런 특별한 생각이 없이 내적인 평화와 고요함과 쉼 속에 혼자 있는 것이 좋아진다. 여기에서는 다만 사랑이 가득한 전체적인 깨달음과 집중만이 있을 따름이다.

기억해야 할 일은 첫째 징표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반드시 둘째 징표가 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셋째 징표를 함께 볼 수 없다면 첫째와 둘째 징표를 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 우울증이나 심장, 혹은 뇌로부터 오는 기분이 언짢음으로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이나 기분이 언짢음은 감각 안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무엇을 생각할 의욕도 없이 만들면서 분명한 침울함과 포기상태를 가져다주고 달콤한 황홀경에 있으려는 충동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반드시 확인하여 평화 안에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가득한 집중과 깨달음이라는 셋째 징표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묵상과 사색을 포기하기 위하여 깨달을 것은 감각적 능력들과 함께 수고를 하는 것은 묵상과 사색이며, 영적인 능력들 안에서 이미 묵상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받아들여진 것은 관상이다. 묵상에는 물론이요 관상에도 마음을 쓰지 않고 게으르게 있었다면 어느 모로 보든지 영혼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강조하고 싶다.

묵상의 방법을 고집하면 할수록 비참해질 것이다. 영혼은 영적인 평화로부터 자꾸 밖으로 끌어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걸어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즉 이미 이룬 것을 다시 하기 원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상상이나 상상이 이루는 것에는 아무것도 내주지 않는 가운데 고요함 안에서 사랑스러운 집중과 주의를 기울여 하나님 안에 머무르기를 배우라고 말해주고 싶다.

감각을 통해서 양식을 얻고 사랑에 빠지기 위해 이런 생각들이나 형상들, 묵상들의 방법이 초보자들에게는 필요하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런 것들은 영혼들이 자신의 목적과 영적인 휴식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 통상적으로 거쳐야 하지만 항상 묵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 방법으로는 절대로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때가 되기도 전에 묵상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영혼이 고요하게 있는 것에 습관이 많이 들어 있었다면 그만큼 많이 평화 안에서 항상 성숙될 것이며, 영혼이 다른 것들에서 느끼는 것보다 훨씬 좋아하게 될 하나님의 전체적이며 사랑이 가득한 깨달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고요하게 있는 것에 습관이 많이 들어 있는 영혼에게 아무런 수고도 없이 기쁨과 맛과 쉼과 평화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묵상을 실천하고 묵상을 통한 모든 노력의 결과인 이 예수께로 향하는 사랑의 눈길에 쉽게 도달할 수 있게 된 사람은 묵상에 있어서, 즉 책을 읽고 특정한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 뜻밖의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또한 동시에 예수님께 대한 총괄적이고 사랑에 가득 찬 이 눈길 안에서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새로운 영적인 맛을 체험할 수도 있게 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씀에 따르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눈길때문이다. “처음에 영혼은 특별한 인식에 대한 묵상에서 피곤을 느끼면서 이 사랑의 눈길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 사랑의 눈길은 그 영혼 안에서 습관이 된다.” 그래서 영혼이 하나님 앞에 있게 되자마자, 그 영혼은 사랑이 가득하고, 평화스럽고, 고요한 깨달음(인식, 認識)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지혜와 사랑과 기쁨을 음미하게 된다.”

기도를 시작하면서 마치 물에 다다른 사람이 수고할 것 없이 가볍게 마시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이제부터는 묵상을 통해서 힘들게 얻어낼 필요 없이 가볍게 사랑 가득한 깨달음을 얻어낼 수 있다.

그 때문에 십자가의 요한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 내적인 체험에 다다른 영혼은 특별한 주제들에 대해 읽거나 깊이 생각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게 되고, 실행 -즉 그 물과 열매의 알맹이를 얻기 위해서 그때까지는 그렇게 필요했던 행동방식-을 전적으로 포기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이제부터는 영혼은 곧장 사랑으로 가득 찬 침묵 안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이 침묵은 온갖 추리나 부질없는 이야기들보다 더 그를 예수님께로 일치시키게 된다.

이 기도는 추리적 묵상과 수동적 관상 사이에 걸쳐 있기 때문에, ‘능동적 관상이라고 불린다.

모든 영혼들은 진정으로 성실하게 항구히 묵상을 한다면, 이 단계에 도달할 수 있고, 또 도달해야만 한다.

 

 

  2-5 능동적 관상기도.pdf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