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감각의 수동적 정화

 

 

영혼이 피조물들에로 향하는 모든 애착을 스스로 정화시키고 오로지 믿음의 덕(信德) 안에서만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것을 실천했음을 하나님께서 보시면, 당신께서는 영혼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당신 친히 영혼을 정화시키러 오신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중요시하시는 모든 것들을 위해서 가장 깊고 무미건조한 심연 속으로 영혼을 던지시고, 영혼으로부터 모든 위로를 거두신다.

이 무미건조함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전에는 영혼이 열성적으로, 그러면서도 쉽게 기도를 했으나, 이 때는 오히려 영혼은 단 한 가지의 생각도, 또 하나님을 향하는 단 한 가지의 애정도 만들 수 없게 된다.

전에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총들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스스로 즐거워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자신이 비참하고 죄스러운 존재이며 업신여김을 받아 마땅한 존재로만 보이게 된다.

또 전에는 자신의 의무나 사랑의 덕(愛德) 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이 이룰 수 있었던 선행들에 대해서 기뻐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자신이 쓸모없고 비겁한 인간으로 느껴지게 된다.

이런 내적인 변화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거나, 우리가 앞서 말한 그 무미건조함에 의해 직접적으로 일어나거나, 혹은 질병과 같은 고통스런 사건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어떤 실패나 혹은 또 다른 불행한 사건들 때문에 일어난다. 이렇게 해서, 영혼은 심하게 또 고통스럽게 피조물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애착으로부터 억지로 떨어지게 된다. 이 때 영혼은 실재에 대한 어떤 새로운 시각, 새로운 비전(vision)을 자신에게 요구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하나님만이 문제가 된다.

처음에는 이 체험이 대단히 고통스럽고 또 여기에 도달할 때 영혼은 정말 대단히 놀라게 된다. 피조물들 안에서 얻고 있던 위안을, 여러 해 동안 끊어버리려고 애써온 그 위안들을, 영혼 자신이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돌아선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가! 확실히 이 체험은 영혼으로서는 알아볼 수 없는 수동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 체험은 조금씩 조금씩 영혼이 전에는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내적인 위로와 빛의 근원이 된다.

성인은 이렇게 설명한다. “영혼이 하나님께 충실하도록 결단을 내린 뒤에는 하나님께서는 늘 정신 안에서 영혼을 키워주시며 기쁘게 해주신다. 이는 마치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가 연약한 어린애에게 하듯이, 즉 어머니가 가슴의 열기로 아이를 따뜻하게 해주고, 맛있는 것과 부드럽고 달콤한 음식으로 아이를 키우고, 팔로 안아주고, 기쁘게 해주듯이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그렇게 해 주신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자라남에 따라서 어머니는 선물을 줄여나가고, 부드러운 사랑을 감추면서 달콤한 젖꼭지에는 쓴맛이 나는 것을 바르고, 팔에서 아이를 내려놓으면서 자기 발로 걷게 하는데, 이는 어린이의 습성을 버리면서 더 중요하고 실속 있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도 영혼이 새로운 열정과 뜨거움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일을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처럼 한다. 하나님께서는 가냘픈 어린이에게 하는 것처럼(벧전 2:2-3) 부드럽고 좋은 사랑의 가슴을 영혼에게 주신다.

이 시련을 겪어낸 영혼도 마치 그 아이처럼 모든 의지할 곳을 잃게 된다. 영혼은 어머니 팔의 도움이 없이, 즉 전에 자신이 즐기던 하나님의 위로들 없이, 또 아직 연약하고 걸을 능력이 없는 자신의 두 다리의 도움도 없이, 자신 안에서 모든 감성적 위로를 고갈시키는 혼란스럽고 괴로운 상태 안에 있게 된다.

영혼이 사랑의 거룩한 일치에 도달하기 위해서(모든 이들이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통상적으로 매우 적은 숫자만 도달함) 더욱 무거운 정신의 정화와 밤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감각적 유혹과 대단한 고생이 동반된다. 각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동반되는 기간이 길다. 어떤 영혼들에게는 간음의 영이라고 하는 사탄의 전달자(고후 12:7)가 다가와서 강하면서도 혐오스러운 유혹으로 그들의 감각을 묶어놓고, 상상에서 분명하게 보이는 현시들과 더러운 생각을 지니고 영혼들을 슬프게 하는데 이는 마치 죽음보다 더 엄청난 고통을 영혼에게 가져다준다. 또 다른 것이 다가온다면 모독의 영이라는 것인데 영혼의 생각과 지니고 있는 모든 개념들에서 참을 수 없는 모독을 저지르게 한다. 가끔 이 모독이 상상 안에서 어찌나 강하게 일어나는지 거의 말로 표현하게 할 정도이기 때문에 영혼에게는 엄청난 고통이다. 또 다른 경우는 혼돈의 영(19:14, 사특한 마음)이라 부르는 혐오스러운 영이 다가오는데 이것은 영혼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수련을 시키려는 것이다. 영혼의 감각을 흐리게 하면서 판단을 하는 데 있어서도 엄청난 세심증과 복잡한 당혹스러움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어떤 것에서도 만족을 찾을 수 없으며, 판단을 하는 데 있어서도 영혼이 어떤 개념이나 조언에 기댈 수도 없게 만든다. 이것은 이 감각의 밤에 나타나는 것들 가운데 가장 커다란 자극이며 공포이기 때문에 정신의 밤(감각의 수동적 정화)에 일어나는 것과 아주 가까운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일반적으로 오랫동안 계속되는 심각한 감각의 유혹과 영혼의 모든 개념과 상상들을 꿰뚫는 불경스러운 영의 유혹을(그런 것들을 발설해버릴 것만 같은 그런 힘과 함께) 동반하거나, 또 어떤 때에는 영혼이 세심증과 의심 따위, 이 밤의 공포를 더 심하게 하는 그런 것들로 가득 채워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의 영적 권고들에서,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행위들을 실천함으로써 이 유혹들에 대항할 것을 암시한다. “우리가 육욕이나 분노나 조바심이나 복수심 따위의 무슨 악심의 첫 충동 혹은 첫째 공격을 받으면, 그와 반대되는 덕행으로 저항하지 않고, 다만 그것을 느끼자마자 우리 마음을 하나님과의 일치에로 들어 높이면서 사랑의 움직임과 행위로 그것을 대면해야 한다. 사실 영혼은 그런 위험한 상태에서 멀리 떠나 하나님 앞에 서게 되기 때문에, 이 영혼의 들어 높임덕분으로 영혼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게 되고, 유혹은 잠잠해지고 원수는 낙담한 채로 다시는 공격할 상대를 얻지 못하게 된다.”

 

이 정화시키는 무미건조함은 주로 기도 중에 나타난다. 전에는 영혼이 거룩한 일들을 생각하면서 기쁨 중에 묵상을 잘 할 수 있었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결과인 감동을 얻어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영혼이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영적인 명상조차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다.

 

이 시험(메마름) 앞에서 영혼은,

피조물들이 그에게 제공하는 위로들에로 되돌아가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일들에서 아무런 위로나 기쁨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피조물들에게서도 역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감각적 욕구에서 정화시키고 닦아내기 위해 어두운 밤에 넣어 주셨기 때문에 영혼이 무엇에 유혹을 느끼거나 기쁨을 찾지 못하게 하신다. 그러나 영혼이 기쁨을 찾으려는 대상이 이 세상 것들은 물론이요 하늘의 것에도 해당된다면 우울증이거나, 준비가 부족하기 때문에 오는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다음 두 번째 징표를 확인해야 한다.

모든 일들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갈망하게 되며, (영혼이 그 안에서 고통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처럼 그 일을 실행하지 못함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에), “영혼이 하나님께 대한 기억을 살려내기 위하여 마음을 쓰게 되고 고통스러운 근심과 함께 이루어지는데 마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옛날의 결함들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생각되면서 하나님의 일들에서조차 아무런 느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메마름의 원인은 하나님께서 감각이 지니고 있던 힘과 감각이 느끼던 행복을 정신의 몫으로 돌려주시기 때문이다. 이때에 영혼의 감각적인 부분은 정신이 느끼는 행복과 힘을 받아들일 만한 능력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메마르고, 텅 빈 것같이 느끼는 것이다. 영혼의 감각적인 부분은 순수한 정신이 지니고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은 기쁨을 느끼지만 육체는 맛을 잃어버리는 일을 하기에는 너무 나약해진다. 그러나 정신은 푸짐한 음식을 받아먹으면서 힘이 세지고, 방심하지 않고, 전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훨씬 더 열심히 한다.”

관상이란 기도를 하는 사람 자신에게조차 은밀하고 감춰진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감각을 비우고 메마르게 하면서 영혼에게는 혼자 조용히 있으려는 갈망과 이끌림을 남긴다. 결국 영혼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무엇을 생각하려는 욕심도 없어진다. 그러므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 영혼은 내적으로는 물론이요 외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포기하고 거기에서 무엇을 해결하려 하지 말고 고요하게 머무를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을 쓰지 않고 한가하게 있는 가운데 영혼은 즉시 내면으로부터 어떤 힘이 솟아오름을 아주 미묘하게 느낄 것이다. 관상이란 영혼이 애를 쓰지 않거나 한가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공기와 같아서 손으로 움켜쥐려 한다면 어느덧 빠져 나간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영혼을 만드시기 위해 말씀하신다.

계속 규칙적으로 또 열심히 기도에 열중하게 된다. 그런데도 무미건조함이 그대로 계속된다면, 그것은 그 시련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증거이고, 따라서 그것은 새롭고 더욱 완전한 하나님과의 관계에로 영혼을 인도하는, 축복받은 무미건조함,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수동적 관상의 무미건조함이라는 증거가 된다.

영혼이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서 무엇을 해보려고 한들 상상의 감각 안에서는 더 이상 사색을 할 수도 묵상을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전에는 개념들을 종합하거나 분석하는 사색을 통해서 하던 것처럼 감각을 통해서 영혼을 사귀셨으나 이제는 더 이상 감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정신을 통해서 사귀신다. 여기에서 영혼은 사색에 들어가지도 않고 점진적으로 단순한 관상행위를 통해 하나님과 사귀게 된다. 이제 영혼의 낮은 부분의 내적이고 외적인 감각들로는 관상에 이를 수가 없다. 결과적으로 상상이나 환상은 어떤 생각을 하기 위해 더 이상 기댈 곳이라고는 없으며 더 이상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지 못할 것이다.”

감각의 정화에서는 뒤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관상기도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영혼은 감관의 능력들을 가지고는 절대로 사색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더욱더 열심히 관상기도에 머무르려고 애를 써야 하며 감각적인 일에서는 손을 떼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이들을 수련시키기 위해, 낮춰주시기 위해, 욕구를 바로잡아주시기 위해 이 정화의 밤에 넣어주시는데 그들이 영적인 일들에 있어서는 더 이상 더러운 달콤한 맛에 매달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관상의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관상이라고 하는 정신의 삶에 그들을 넣어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감각의 수동적 정화는 우리 생활을 위한 계획의 근원이 이기심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 단계에서 우리가 만족을 원하는 욕망들을 떠나보내고 나면, 우리는 영구한 평화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이때에도 흥분시키는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이것들은 더 이상 감정적인 혼란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우리 감정의 계획이 좌절될 때마다 타올랐던 고통스런 감정들을 참아내기 위해서 쏟아내던 큰 에너지들을, 이제는 우리와 함께 살고 있고 또 우리가 봉사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전이(轉移)

 

한 영혼이 감각의 밤감각의 수동적 정화를 벗어나면,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은 영혼을 훨씬 더 끔찍한 정화인 영의 수동적 정화안에 두시기 전에, 영혼에게 매우 긴 안식과 위로를 허락하신다. 이 단계를 전이(轉移)’라 한다.

이 전이는 여러 해 동안 지속될 수 있고, 그동안 영혼은 골똘히 생각함으로써 지치는 일도 없이 아주 쉽게 고요하고 사랑 가득한 관상 안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 내적인 즐거움은 영혼이 이 단계에 머무르는 동안 자신의 영 안에서 맛보게 되는데, 이 내적인 즐거움은 감각들에까지 미치게 되고, 이 감각들은 전보다 더욱 정화되면서 내적인 맛들을 더 쉽게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도 아직 정화가 불완전한 상태(영의 수동적 정화가 결핍된 상태)이기 때문에 영혼은 여러 가지 시련들과 무미건조함, 유혹들과 어두움들, 그리고 때로는 전에 당했던 것보다도 더 심한 괴로움들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들은 겨우 몇 시간 혹은 며칠 동안 계속되면서, 앞으로 닥쳐올 영의 수동적 정화를 예고해줄 뿐이다.

이 시기 동안 영혼은, 하나님과의 일치의 길에서 자신을 엄청나게 후퇴시킬 수도 있는 치명적인 잘못인 이제는 자기가 성인이라고 착각하는 환상에 떨어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성 요한이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들과 그때까지의 일상적인 은혜들이 하나님과의 일치에 있어서 사랑의 순수함 안에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음을 상기시키면서, 냉혹하리만큼 강하게 영혼을 현실에로 되부르는 이유이다. 영혼의 온갖 노력들과 영혼이 받은 갖가지 은혜들은 가장 큰 장애물들을 제거시킴으로써, 소극적인 방식으로 영혼을 하나님과의 일치에로 준비시킬 뿐이다.

실제로 감각의 수동적 밤안에서 감각적인 집착들은 겉으로만 정화되었을 뿐, 영혼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집착의 깊은 뿌리들은 아직 남겨두고 있다. 피조물들에서 연유한 즐거움에 대한 온갖 집착의 가지들을 갑자기 다시 움트게 할 수 있는 이 뿌리들은, 이제 곧 이어질 대단히 끔찍스러운 영의 수동적 밤에 의해서만 완전히 뽑힐 수 있는 것이다.

이 시기 동안에 많은 영혼들은, 영의 현시(現示, vision)나 그분들과의 교통(交通, communication)에 지배되는 경우가 있는데, 물론 때로는 사실일 수도 있으나, 더 많은 경우에 이런 체험은 악마로부터 혹은 자신의 상상으로부터 오는 유혹이다. 이 유혹에 빠지는 영적 결함에 유의해야 한다.

십자가의 요한은 나아간 이들이 지니는 두 가지 결함을 말한다. 하나는 습관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시적인 것이다.

습관적인 것들은 마치 깊은 뿌리처럼 감각의 정화가 이루어질 때 제거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아직도 정신()에 남아 있는 불완전한 습관이고 애착들이다. 감각과 영의 정화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차이라면 깊은 뿌리를 뽑아내느냐 혹은 가지만 치느냐에 달려 있고, 또는 이제 막 묻은 얼룩을 지우느냐 혹은 오래되어서 아주 찌들어버린 얼룩까지도 지우느냐에 달려있다. 감각의 정화는 영의 정화를 위한 관상기도의 시작이며 문일 뿐이다. 감각의 정화란 감각을 영에 맞추는 것보다 영을 하나님께 일치시키는 데 더 유익하다. 더 나아가서 본인이 느끼지 못하거나 볼 수도 없겠지만 영에는 아직도 낡은 인간의 얼룩이 남아 있다. 그래서 만일 이 밤의 정화라는 강한 표백제나 비누를 통해서 지우지 않는다면 영이 거룩한 일치의 순수함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나아간 이들에게서도 역시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죄로부터 오는 습관적 결함들, 즉 마음이 무뎌짐과 본래의 거칢, 그리고 영의 산만함과 집중하지 못함을 보게 된다. 나아간 이들이 머물러야 하는 밤을 거치지 않는 모든 이들이 이런 습관적 결함들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결점들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사랑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치의 완전한 일치에 머물 수 없다.

나아간 이들이 모두 한결같이 같은 방법으로 일시적인 결함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감각으로부터 아주 쉽게, 즉 밖으로부터 손쉽게 영적 보화들을 가져오려는 이들은 초보자들이 빠지기 쉬운 위험에 빠지고 커다란 장애물을 만난다. 이들은 영이나 감각으로 일종의 영적인 지각들과 영적인 은총들을 많이 얻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또한 영적이고 상상적인 많은 현시들을 보게 된다. 달콤한 감각들을 즐기면서 나아간 이들의 대열에 들어가려는 이들이 이러한 현상들에 자주 빠지게 된다. 그래서 이런 영혼들에게 악마와 자기 환상(착각)은 아주 쉽게 눈속임이 되기도 한다. 이런 때에 악마는 아주 커다란 기쁨을 가지고 앞서 말한 환상과 환청들을 느끼게 하고 충동질을 한다. 더 나아가서 이런 이들은 이런 환청이나 환시들에 대해 강하게 신앙 안에서 자신을 보호하거나 그러한 것들을 단념할 수 있는 아무런 신중함(원칙)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악마들은 아주 쉽게 이들을 황홀경에 빠지게 하고 속인다.

이런 때에 악마는 많은 이들에게 헛된 보임과 거짓된 예언들을 믿게 한다. 이런 상태에 놓이게 된다면 악마는 이들에게 이런 환청과 환상들이 마치 성인들이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받아들이게 하려고 애를 쓰며, 자신의 환상을 믿도록 하려고 힘을 쓴다. 여기에서 악마는 이들을 자부심과 교만으로 잔뜩 부풀게 한다. 이런 헛됨과 우쭐함에 빠진 이들은 마치 탈혼에 빠지거나 다른 어떤 발현이라도 본 것처럼 자신들의 외적인 행동이 거룩함에서부터 오는 것으로 보이도록 하려고 외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고 감행한다. 이들은 결국 모든 덕들의 파수꾼이며 열쇠인 거룩한 두려움을 잃어버린 채 하나님께 대담하게 행동을 한다.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엄청난 날조와 속임수를 만들어 내며 올바른 정신과 덕에서 비롯되는 순수한 길을 따라가는 것을 의심스럽게 할 정도로 자신을 망쳐버린다. 이들이 이런 영적인 감각들과 느낌들을 틀림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자신의 여정을 시작할 때에 결국 이들은 초라하게 되고 말 것이다.

나아간 이들이 지니는 결함에 대해서라면 말할 것이 무척 많고, 또한 이들이 몇 가지 환각들을 체험하면서 자신들이야말로 처음보다 훨씬 더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얼마나 치유되기가 힘든지 말해야 하지만 그냥 두고 싶다.”고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말한다.

 

유혹에 넘어가서, 이제는 성인이라는 환상은 영혼들 안에서 더 강해지고, 인간미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리는 지경에까지 영혼들을 끌고 간다. 그런데 사실상 이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야말로 모든 덕들의 열쇠이자 보호자이다.

이러한 현상들 앞에서 올바르게 처신하는 방법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우리에게 가르멜의 산길’ 2권에서 싫증이 날 정도로 되풀이하는 바로 그 방법이고, “영혼이 받게 되는 무엇이든지, 그 방법이 무엇이 될지라도, 즉 초자연적인 방법이 될지라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단순하게, 그리고 즉시 영적 지도자에게 말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영적지도자들에게 의지하는 방법이다.

영적 지도자들은 영혼들이 저 초자연적인 것들로부터 눈을 돌리도록 좋게 타이르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면, 그런 것들에 대한 욕심이나 마음을 어떻게 비워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주면서 신앙 안으로 영혼들을 이끌고 가야 한다. 그리고 이런 초자연적 현상들을 체험한다는 것이 무슨 공로가 되거나 흠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늘에서 주어지는 수많은 초자연적 현시(계시)들과 그리고 은총들을 가질 수 있는 것보다 애덕으로 실천하는 의지의 행위나 노력이 하나님의 눈에는 훨씬 더 고귀하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영적 지도자들은 이런 사실들에 대하여 아무 상관없는 수많은 영혼들이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체험한 영혼들에 비해, 아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앞으로 많이 나아간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가르멜의 산길’ 3권에서 또 이렇게 덧붙인다. “영혼은 상상적이건 다른 종류의 지각들이건, 혹은 현시들, 환청들, 영적인 느낌들, 혹은 계시들이건 상관없이 위로부터 오는 모든 지각들 안에서 영혼이 애써야 하는 것은 단지 자신에게 내적으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영혼은 이 지각들에 대해서 글자 하나나 껍질까지도 문제를 삼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무슨 뜻이 담겨 있고, 무엇을 가르쳐주려는 것이며, 무엇을 알게 해주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아무런 기쁨도 부러움도 형상도 없는 영적인 느낌들에 끼어들지 말고 단지 영혼에게 가져다주는 사랑의 느낌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지금 바로 (, Nada)와 전(, Todo)’의 한가운데에 와 있다. 참으로 단순하고도 적나라한 믿음의 덕소망의 덕사랑의 덕의 훈련 한가운데에 와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른 것들은 모두 가치가 없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당신께서 영혼을 그가 영의 수동적 정화라는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에 이 지점에 다다르도록 이끌어주시고, 여기서 하나님은 유일한 안내자인 -영혼에게는 어둡게 보이지만 사실상 아주 확실한- 신앙의 등불을 영혼에게 남겨주신다.

 

  2-6 감각의 수동적 정화.pdf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