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영의 수동적 정화

 

 

영의 수동적 정화는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혼이 지니고 있는 영적이며 본성적이고 습관적인 결함들과 무지들로부터 영혼을 정화시키는 것이다.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주부적 관상혹은 신비신학이라고 부른다. 이 주부적 관상에서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은밀하게, 그리고 사랑의 완전함 안에서 가르치시는데 이 관상이 없이는 영혼은 아무것도 못하고 어떻게 되어지는지 깨닫지도 못한다. 이 주부적 관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지혜인데 영혼에게서 두 가지 근본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그 이유는 정화시키면서, 그리고 빛을 비춰주면서 하나님과 사랑의 일치를 위해 영혼을 준비시키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영혼들을 비춰주면서 정화시키는 바로 그 사랑의 지혜가 이 세상에서 영혼을 정화시키고 영혼에게 빛을 비춰주는 것이다.”

감각의 수동적 정화를 거치는 동안에 영혼은, 감각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완전히 무미건조함 안에 있었지만, 영 안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고 또 자기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깊은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영혼을 영의 수동적 정화에 두기로 결정하시는 때에는, 그 영혼 안에 남아 있는 마지막 위로까지 떼어내시고 정화시키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의식마저도 그 영혼에게서 빼앗아버리신다. 이는 마음이 습관적으로 산만해지는 현상이라든지 문화적 조건화의 잔재라든지 영적 자부심 같은 거짓자아의 찌꺼기 들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해서 그 영혼에게 지극히 순수한 사랑, 당신과의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그런 사랑을 갖출 수 있게 하신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감각의 정화 혹은 감각의 밤은 감각에게 매우 고통스럽고 지독하다. 영의 밤은 여기에 비교할 수가 없이 더하다. 이 영의 정화가 영에게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섭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영혼을 정화시키고 비춰주는 거룩한 빛을 어둔 밤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거룩한 빛이 가져다주는 거룩한 지혜가 영혼에게 단순히 밤이나 암흑만이 아니라 고통이고 태풍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첫째로 영혼의 능력을 뛰어넘는 거룩한 지혜의 높음 때문에 영혼에게 암흑이라고 한다(암흑). 엄청난 초자연적인 빛으로 말미암아 정화되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한 영혼이 지니고 있는 지적이며 본성적인 힘이 굴복하고 결국 그 힘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아직 변화되지 않은 영혼에게 자신의 은밀한 지혜의 환한 빛을 영혼에게 비추신다면 영혼의 지성은 어두운 암흑이 되고 말 것이다.

둘째로 영혼의 불순함과 낮음 때문에 영혼에게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이며, 또한 어두운 것이다. 영혼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본성적이며 윤리적이고 영적인 연약함 때문에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어 이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고 말할 것이다.

영혼을 짓누르는 무게와 힘으로 말미암아 영혼은 이제는 하나님의 총애를 받던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가끔 기댈 것들을 찾던 것도 다 끝나버렸고, 아무도 동정해 주는 이가 없다고 느끼게 된다(고통태풍).

하나님께서는 영혼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주시는 것도, 그 위에 올라앉는 것도 아니시고 단지 어루만지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불순함과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아주 부드럽고 고우신 하나님의 손길을 영혼이 그렇게 무겁고 거슬리게 느낀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도 영혼에게 은총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지 벌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영의 정화는, 감각의 정화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나 -감각의 정화 이후에도 감각적인 집착의 뿌리들이 남아 있다- 하나님과의 전적인 일치에 있어서 큰 장애물인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영혼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을 느끼고 자신이 당연히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받는다는 것을 느끼며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내쫓김을 당해 영원히 그분을 모실 수 없다는 것을 느끼는 이 체험은, 마치 지옥의 고통과도 같은 엄청난 아픔이다.

셋째로 수난과 고통은 두 가지 극단적인 것에서 오는데 거룩한 것과 인간적인 것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요나의 고통). 여기서 거룩한 것은 정화를 시키는 관상이고, 인간적인 것은 영혼의 주체를 말하는 것이다. 영혼을 새롭게 하고,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영혼에게서 습관적인 애착들과 낡은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벗겨내면서 거룩한 것이 영혼을 감싼다. 이때에 영혼은 거룩한 것과 매우 일치되고, 밀착되고, 순응한다. 이런 방법으로 관상은 영적인 실체를 깨끗하게 하고 얽힌 것을 풀어낸다. 이때에 관상은 영혼을 심오하고 깊은 암흑 속으로 끌어들이면서 영혼으로 하여금 정신의 처참한 죽음과 함께 자신의 초라함을 보게 하고, 얼굴은 망가지고 몸은 녹초가 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이것을 비유하면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체험한 것(2:1-3)과 같은 고통일 것이다.

넷째로 위엄과 위대함이라는 어두운 관상의 또 다른 탁월함이 영혼에게 고통을 가져다준다(지성과 의지의 정화). 이런 특성이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 안에 대단히 궁색함과 초라함이 있다는 또 다른 극단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정화에서 영혼이 겪어야 하는 근본적인 것들이다. 영혼은 자신에게 기쁨을 주던 시간적이고 자연적이며 영적인 이 세 가지 차원에서 심각한 공허함과 궁색함을 자신 안에서 느끼게 된다. 그 이유는 영혼이 철저하게 선한 것들에게 반대되는 악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영혼이 결함들의 초라함을 보게 되고, 감관의 능력들에서 지각능력이 비워지고 메말라 있음을, 그리고 암흑 속에 영혼이 버려져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영혼이 지니고 있는 감각적이고 영적인 실체에 따라서, 그리고 내적이고 외적인 감관의 능력에 따라서 영혼을 정화시키시는데 이로 말미암아 영혼은 모든 부분에서 비워지고, 가난해지고, 버림을 받고 암흑과 건조함에 머물게 된다. 감각의 부분은 메마름에 의해, 감관의 능력들은 지각의 비워짐에 의해, 그리고 영혼은 어두운 암흑에 의해 정화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어두운 관상을 통해 이루신다. 관상 안에서 영혼은 지각이 이루어지지 않음과 비워짐은 물론이요 자연적인 기댈 곳이 없어짐과 비워짐을 겪는다. 더 나아가서 영혼이 정화된다는 것은 마치 불로 쇠의 녹을 녹여 없애버리는 것처럼 영혼이 늘 간직하고 있는 모든 습관적 결함들과 애착들을 영혼 안에서 다 빼앗는 것이고, 다 소멸시키고 비워 놓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영혼의 실체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자연적이고 영적인 비움과 압박감 이외에도 엄청난 파멸과 내적인 태풍을 겪게 된다.

게다가 이 어두운 밤이 가져다주는 고독과 버려짐 때문에 영혼은 어떤 가르침에서는 물론이요 어느 영적 지도자들에게서도 위로나 기댈 곳을 찾지 못한다.

주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영혼을 정화시키는 일을 끝내실 때까지 어떤 방법도, 어떤 구제책도 영혼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영혼 스스로도 자기 고통을 위해 무엇을 이용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혼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마치 감옥에서 손발이 묶여 있는 사람과 같은 처지이다. 이런 상황은 영혼이 겸손해지고, 부드러워지고, 정화되고, 예민해지고, 단순해지며, 가벼워질 때까지 지속된다. 이때에 비로소 영혼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가 될 수 있는데, 이것도 하나님의 자비가 영혼에게 사랑의 일치를 허락하는 정도에 따라 이루어지며, 이에 따라 정화의 세기와 기간이 결정된다. 정화가 비록 강하게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제대로 정화되기 위해서는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가끔 고통이 줄어드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정화시키는 방법이나 형태에 있어서 어두운 관상으로 덮쳐버리는 것을 제쳐놓고 가끔 하나님께서 배려를 해주시면서 영혼을 밝고 사랑스럽게 비춰주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빛이 비춰짐은 영혼에게 정화가 이루어지면서 얻는 구원의 징표이며, 기다리던 풍요로움에 대한 징조이다. 이러한 일이 자주 있기도 하는데 이때에는 영혼에게는 정화가 거의 다 이루어지고 있으며 고통이 거의 끝났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영혼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영적일 때는 악이 다 사라져 버린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영적인 축복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섯 번째로 아직도 영혼을 괴롭히고 불안하게 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기억의 정화). 이 밤이 영혼으로 하여금 애착이나 감관의 능력들을 모두 닫아버리도록 하기 때문에 영혼은 하나님께로 마음을 들어 올릴 수 없고, 하나님께 아무것도 청(기도)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영혼에게 아주 수동적으로 당신의 일을 해 나가시기 때문에 영혼은 아무것도 모른다. 어디에서 기도를 해야 하고, 어떻게 거룩한 일들에 집중하면서 참여해야 할지도 모른다. 세상의 다른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뿐만이 아니라 심각한 기억 상실에 빠지기도 하며 실신하기가 일쑤이다. 이런 상태는 한참 진행되기도 하는데, 이때에 영혼이 무엇인가를 하고 싶지만 그동안 무엇이 있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도대체 모르고, 그리고 자기가 처해 있는 상태에서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조차도 모른다.

여기에서 단지 이성이 스스로 빛이 되려는 것과 의지가 지니고 있는 애착만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지니고 있는 사색과 이미 지니고 있는 깨달음까지 정화된다. 이런 기억상실과 실신은 내적인 잠심(기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여기에서 관상의 영혼을 빨아들인다. 영혼이 사랑의 거룩한 일치를 위하여 자신의 감관의 능력들과 함께 거룩한 것에 익숙해지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우선 관상의 영적이며 어둡고 거룩한 빛으로 지성과 의지와 기억에 해당되는 모든 것을 없애버릴 필요가 있으며, 동시에 피조물들에 대한 모든 애착과 지각을 벗어버려야 한다. 이 모든 정화작용의 기간은 오직 관상의 빛이 지니는 강도에 따라 결정된다. 영혼이 순수함과 밝음을 많이 지닐수록 초자연적이며 거룩한 빛이 영혼을 더욱 어둡게 하고, 그 밝음과 순수함이 적을수록 영혼이 덜 어두워진다.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면, 초월적인 일들이 더욱 밝고 분명할수록 우리 지성에게는 어두운 것이다.

영혼 안에서 관상의 거룩한 빛이 하는 일은 영혼을 감싸는데 이는 영혼의 자연적인 빛을 초월하며, 이로 말미암아 영혼을 어둡게 하고 전에 자연적인 빛을 통해 깨달았던 모든 본성적인 애착들과 깨달음들을 없앤다. 단지 영혼을 어둡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와 감관의 능력의 본성적이며 영적인 것까지 모두 비워버린다.

이 영적인 빛이 아주 단순하고 보편적인 것이고, 알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자연적이건 거룩한 것이건 그 어떤 특별한 지적인 것에 감염되지 않고 부분적인 것에 매여 있지 않기 때문에 영혼의 감관의 능력들을 비우고 없애버린다. 여기에서 영혼은 아주 쉽게 자기에게 주어지는 하늘의 것이나 세상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라도 꿰뚫어보고 알게 된다. 이것이 모든 특별한 애착들과 지성에 대해 비워지고 정화된 영혼의 고유한 특성이다. 여기에서 영혼은 이제 아무것도 즐기려 하지 않고 특별한 것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어둔 밤은 특별히 좋아할 만한 선물이고, 하나님께서는 이 선물을 통해서 마치 불이 녹을 태워 없애듯이 영혼을 태워버리고 영혼을 비우고, 온갖 집착과 평생 간직해온 불완전한 버릇들로부터 영혼을 정화(淨化)시키신다.

그리고 이 집착들은 영혼의 중심에 아직 남아 있고 영혼과 뒤섞여 있기 때문에, 마치 용광로 속에 있는 금처럼 영혼 자신이 타 없어지고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피한 일이다.

이와 같은 고통들로써 하나님은 영혼을 대단히 겸손해지게 하시는데, 이는 오로지 영혼을 더 높이 들어 올리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더 높이 들어올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만큼 그 영혼을 더 겸손해지게 하신다.

다행히도 이 어두운 관상은 위로의 순간들에 의해서 중단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영혼은 그런 상태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위로의 순간들조차도 영혼에게는 양심 -그 역시 제 안에 더러움의 기초를 가지고 있는 양심- 때문에, 이 재빨리 되돌아와서 영혼이 고통을 받게 만들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역시 괴로운 것이다. 실제로 영혼은 이 길에 얼마나 많은 산꼭대기와 골짜기들이 있는지를 보게 될 것이고(84:5-7), 자신이 누린 성공 다음에 뜻밖의 혼란 상태와 괴로움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요함의 경지에 도달하기까지의 관상의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수련이며 일상적인 상태이다. 그러나 영혼이 이런 상태에서 항상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르락내리락 한다(28: 12-13, 야곱의 사다리 참조).

이런 이유는 완덕의 단계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자신을 업신여김에 있다.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두 가지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완덕의 단계에 머무를 수 없다. 우선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수련을 받고, 자신을 아는 것에 수련을 받을 필요가 있다. 영혼은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기쁨을 찾고 크게 성숙되며, 자신을 아는 것에 대해 시험을 받으면서 낮아지는 것인데 완전한 습관들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 이러한 것이 계속 이어진다.

관상은 사랑의 학문이요, 관상은 사랑스러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깨달음이며, 이로 인해 영혼은 빛을 받으면서 동시에 사랑에 빠지는데 자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오를 때까지 단계적으로 지속된다. 오직 사랑만이 영혼을 하나님께 일치시키고 합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은 대담한 용기와 사랑을 필요로 하고, 순결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순결함은 피조물들에 대한 헐벗음과 뼈아픈 절제(mor­ tification) 없이는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어둔 관상이 영혼 안에서 모든 자존심을 말끔히 걷어내고 모든 이기적인 만족으로부터 영혼을 깨끗이 비움에 따라, 당연히 하나님은 더욱 친밀하게 영혼 안에 깊이 들어오시고 영혼을 당신 안에서 변형시키신다.

영혼은 자신의 새로운 상태를 자각하게 되고, 그것을 마음으로 누리게 된다. 그러나 영혼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 체험은 감각을 통해서도 지성을 통해서도 인지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다만 열매들을 느낄 수 있을 뿐이고,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영혼이 만족했고, 고요했으며, 기뻤었다고 말할 정도이고, 하나님을 느꼈다거나 참 좋았었다고 표현할 뿐이다. 일반적인 말로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있는 적합한 단어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영혼이 느낀 것들이 현시나 감각적인 것처럼 특별한 것이라면 조금 다르다. 이런 것들은 흔히 감각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종류의 것들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고, 다른 유사한 것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순수한 관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관상에서 오는 것이라면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비밀스럽다고 한다.

신비신학의 빛이 없이는 그런 체험들에 대해 아무리 지혜롭고 유식하게 말한다 할지라도 자연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그 자체를 느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을 정도를 불가능한 것이다. 통상적이고 인간적인 용어로는 설명할 수 없고, 도달할 수도 없는 진실을 지혜의 빛을 통해 보면 비밀스럽다. 이것은 거룩한 관상이 자연적 능력을 초월하고 비밀스러운 특성을 지니는 것은 단지 초자연적인 것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일치라는 완덕의 단계로 영혼을 데려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인간적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가운데, 그리고 거룩한 차원에서도 무지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것들은 수련을 하고 찾는 동안에 깨닫거나 아는 것이 아니라 이미 수련이 다 끝난 뒤에 찾을 때 알고 깨닫는 것이다.

오직 인격적인 체험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완전성을 인식하게 하고 맛볼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완전성은 그 자체 그대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맛봄으로써 혹은 체험함으로써만 알아듣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 편에서는 과거에 해온 대로 믿음 소망 사랑의 실천을 계속하기만 하면 된다. 어둔 밤 사랑에 찬 관상안에서는, 이 덕들이 영혼의 유일한 발판이 되고, 영혼의 유일한 내적 활동이 된다.

그리고 이 덕들은 영혼이 세 원수들 하나님께서 가끔씩, 영혼을 즉시 들어 높이기 위해서 허락하시는 마귀 세속 육신- 에게 더 이상 사로잡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항상 영혼이 하나님의 눈에 더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한다.

영혼이 악마의 속임수를 속이고 자유롭게 이 관상의 어두운 밤을 지날 수 있었던 것은 주부적 관상 덕택이었다. 주부적 관상이란 영혼의 감각적 부분의 내외적인 능력들이나 오관을 끌어들이지 않고 수동적으로 비밀스러이 영혼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영혼이 단지 감관의 능력들이 지닌 본성적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영혼에게 끼치는 훼방으로부터 자유롭게 숨어서 간 것뿐만 아니라 악마로부터 자유롭게 숨어서 간다. 악마란 감각적 부분의 감관의 능력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영혼 안에 있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도, 그에 도달할 수도 없다. 영혼에게 주어지는 은총이 더욱 영적이면서 내적일수록, 그리고 오관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만큼 악마는 더욱더 알 수가 없다.

영혼의 안전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내적인 사귐이 감각의 낮은 부분에는 캄캄하고, 알지도 못하게 하고, 도달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첫째로, 정신의 자유를 감각적 부분의 연약함이 방해하지 않으면서 영적인 은총이 풍요로워질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둘째로 영혼이 악마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서 안전하게 나가야 한다(6:3 참조,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즉 영혼의 감각적이며 낮은 부분이 모르게 해야 하고, 도달하지 않게 해서 오직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비밀로 남겨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악마는 영혼 안에서 영적인 은총이 주어질 때 감관의 능력들과 감각에서 생기는 침묵과 긴 시간의 휴식을 통해 알아차리는 경우가 있다. 이때에 악마가 영혼의 깊은 곳에 도달할 수도 없고, 반대되는 무엇을 할 수도 없음을 보게 되면서 영혼의 감각적 부분을 교란시키거나 어지럽게 한다. 영혼의 감각적 부분이란 악마가 도달할 수 있는 곳이라서 악마는 그곳에 고통과 공포와 두려움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악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기뻐할 수 있는 영혼의 영적이며 높은 부분에 두려움을 가져다주면서 불안하게 하고 교란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어두운 관상의 은총이 오직 영혼을 순수하게 비춰주고 영혼에게 힘을 줄 때 악마는 자신의 민첩함을 가지고 영혼을 교란시키는 일에 관여할 수가 없고, 오히려 영혼이 이때에는 새로운 유익한 것을 얻게 되고 대단히 안전한 평화를 누리게 된다. 여기에서 정말 놀라운 것이 있다. 영혼은 원수가 자기가 교란시키려는 모습을 느끼면서도 어떻게 되는지 알지도 못하고, 또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내면 깊숙이 더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에 영혼은 원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숨어 있음을 느끼는 확실한 피난처에 들어왔음을 알아차리면서 거기에서 악마가 방해하고자 하는 그 평화와 기쁨을 오히려 더 많이 느끼게 된다. 여기에서 영혼에게 다가오던 모든 두려움은 밖으로 내던져졌다. 그리고 영혼은 세상도 악마도 닿지 않고, 부숴버릴 수 없는 곳에 숨어 계신 신랑의 그윽한 맛과 고요한 평화를 안전하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면서 쉬게 된다. 또한 영혼은 아가서의 신부가 말하는 진리를 느끼게 된다.

다른 경우에, 즉 영혼에게 영적인 은총이 많이 주어지지 않고 감각이 참여하게 될 때 악마는 아주 쉽게 영혼을 교란시키며 많은 공포와 감각을 통해 영혼을 놀라게 한다. 이때에 악마가 영혼 안에 엄청난 고통과 폭풍을 일으키는데 어떤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영적인 것들(영혼과 악마) 사이에 적나라하게 이루어지는 일이라서 좋은 것 안에 나쁜 것이 들어오면서 견딜 수 없는 공포가 스며든다.

또 다른 경우에 악마의 소행을 본다면, 하나님께서 선한 천사를 시켜서 영혼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은총을 악마가 엿보는 경우가 있다. 일반적으로 착한 천사를 시켜서 보내주시는 이 은총을 오히려 적들이 알아차리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데,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악마가 정당하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은총에 맞서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악마는 영혼을 정복할 수 있는 틈을 자기에게 주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마치 욥이 그랬던 것처럼(1:9-11, 2:4-9)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영혼이 승리하고 유혹의 항구에서 버틸 수 있다면 더욱 커다란 보상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영혼을 데려가시고 사랑해 주시는 것과 같은 방법과 형태로 악마도 역시 영혼에게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진정한 현시는 일반적으로 선한 천사를 통해 체험된다. 현시에서 비록 그리스도가 보였다고 할지라도 그분은 절대로 실체의 당신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선한 천사를 통해 진정한 현시를 체험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악한 천사에게도 똑같은 모양으로 영혼에게 거짓 현시를 체험하게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신다. 영혼이 전에도 숱하게 겪었지만, 이때에 악한 천사가 제시해주는 이 거짓 현시에게 속은 것인지 아닌지 영혼이 쉽게 구분할 수 없다(: 7:11-12, 19-22, 8:6-7).

육체적인 현시에 대한 것에서뿐만 아니라 악마는 온갖 높은 것을 보기 때문에(41:25) 영적인 은총들에 있어서도 선한 천사들이 하는 방법을 악마도 비슷하게 흉내를 내고 끼어든다. 현시들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형상이나 어떤 모습은 갖추지 않으므로 악마가 어떤 모습이나 다른 무엇으로 제시할 수 있는 형상을 만들거나 비슷하게 흉내 낼 수는 없다. 그러나 악마는 영혼을 공격하기 위해 영혼이 체험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영혼에게 영적인 두려움을 보인다. 이는 곧 영적인 것을 영적인 것으로 공격하고 망쳐놓으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선한 천사가 영적인 관상을 영혼에게 전해 주려고 할 때 같이 일어난다면 영혼은 악마에게 드러나지 않는 관상의 방이나 숨을 곳으로 들어갈 수가 없고, 악마는 영적인 교란과 공포를 가지고 영혼에게 눈에 띄게 접근하여 가끔은 엄청난 고통을 주기도 한다. 악마의 공포와 함께 악마가 영혼 안에 어떤 흔적을 남길 수 없도록 얼른 피할 수가 있다. 그리고 선한 천사가 준 영적인 은총의 효과로 말미암아 자기 안에 머무를 수도 있다.

또 다른 경우는 악마가 우세해서 영혼에게 교란과 공포를 덮어씌우기도 한다. 이때에는 영혼에게 이 세상의 어떤 폭풍과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엄청난 고통이 영혼에게 주어진다. 이 무서운 은총이 육체적인 것을 확실히 벗어나서 영에서 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특히 감각에 대단한 고통이 스며든다. 이 고통이 영혼 안에 지속되기도 하는데 많이는 아니다. 이제 영혼은 대단한 고통이 넘칠 수밖에 없었다는 기억이 남을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은 영혼에게 수동적으로 이루어진다. 영혼은 이에 대하여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악마가 영적인 공포를 가지고 쉽게 영혼에게 접근하는 것을 선한 천사가 허락할 때에는 영적인 은총과 대단한 축제를 위해 영혼을 정화시키려는 것이고 영적인 깨어 있음과 함께 영혼을 준비시키려는 것이다. 선한 천사는 절대로 영혼에게 고통을 안겨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생명을 주기를 원하며, 낮추기보다는 높여주기를 원한다(삼상 2:6-7 참조).

여기서 말하는 영적 현시들은 이 세상의 일이라기보다는 다른 삶의 것이다. 그런 것이 보인다면 다른 삶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영혼을 방문하실 때에는 원수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완전하게 어둠 속에서 영혼이 하나님의 영적인 은총을 받는다. 이 은총은 하나님께서 직접 영혼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거룩한 것이며 최상의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 영혼 사이의 거룩한 일치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어루만지심이다(1:1). 이 실체적 어루만지심은 의로운 사람에게만 하나님과 함께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영혼은 대단히 초조한 욕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영혼은 지존하신 분의 어루만지심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해주시는 다른 어떤 은총들보다 더 끔찍하게 생각하고, 기다리고, 욕심을 낸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홀로 영혼에게 건네주시는 은총은,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필요가 없고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영혼이 정신의 자유를 누리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일로서 영혼이 은밀하고 달콤한 평화 안에서 누리는 행복을 감각적인 부분이 방해하지 못하고, 악마도 감각적 부분을 통하여 저항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때에는 악마가 덤빌 수도 없고, 끼어들 수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실체와 영혼의 실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만남(어루만지심)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만일 피조물이 모든 것으로부터 정화되든지, 다 벗어버리든지, 그리고 영적인 은신처에 들어가든지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이런 행복에 이르지 못한다.

영혼의 높은 부분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영적이므로 감각적 부분에는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영혼은 점점 온전히 영적으로 변화되면서 일치를 이루는 관상의 은신처 안에서, 즉 최고 높은 단계에 이르게 된다면 영적 욕구들과 감정들이 없어진다.

 

실체적인 접촉들 덕분으로, 영혼이 정화되고, 고요해지고, 힘을 얻고, 안정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아들과 영혼 사이에 이루어지는 거룩한 약혼이라는 일치를 확실하게 얻기 위한 것이다. 이제 사랑하는 님과의 일치를 항구히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 정화의 밤에 얻는 좋은 특성 세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는 이 행복한 관상의 밤에 하나님께서는 관상의 아주 고독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영혼을 감각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데려가신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 밤의 영적인 암흑 때문에 영혼의 높은 부분에 있는 모든 감관의 능력들이 어두워진다는 것이다.

셋째는 비록 영혼이 이 고상한 여정에서 밤에 만족감을 얻기 위해 외적인 인도자나 지성의 내적인 어떤 특별한 빛에 의존하지 않고 간다고 할지라도, 어두운 암흑이 이러한 모든 것들이 주는 만족감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이때에 사랑은 홀로 타오르고 있으며 마음은 신랑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때에 신랑은 영혼을 안내하고 움직이시는 분이시며, 고독의 길을 통해서 영혼을 당신의 하나님께로 날아가게 하신다. 영혼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알지도 못한다.

 

  2-7 영의 수동적 정화.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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