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와 다른 재해를 즐거워하기"
                        C. K. 체스터턴

     시골에 있느라 내가 없는 사이, 런던에 홍수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약간의 시샘이 났다 [6월 30일 하루 동안 폭우가 쏟아져 런던과 인근 지역에 뜻하지 않은 홍수가 났다. ] 내가 살고 있는 바터씨(Banersea)는 특별히 물을 만나 특혜를 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두말할 필요 없이 바터씨는 인간이 사는 곳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이제 물로 인한 장관이 하나 더 가세하여 낭만적인 마을 풍경은 비교할 데가 없다. 바터씨는 베니스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도살장에서 고기를 싣고 나오는 배가 곤돌라처럼 은색 잔물결을 일으키며 부드럽게 지나가는 광경을 연출한다. 래츠미어 가(결)의 변두리에 배추를 운반하는 야채 상인들은 곤돌라 선원에게서 세상적이지 않은 은혜로 노 젓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런 풍경처럼 완벽하게 시적인 것은 없다. 한 지역이 홍수를 만나면 그 지역은 군도(群島)가 된다

불편함의 기쁨

     혹자는 홍수나 화재에 대한 낭만적인 견해를 현실감이 턱없이 부족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런 불편함에 대한 낭만적인 견해는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실제적이다 그런 일에서 즐거움의 기회를 보는 참된 낙관주의자는 그런 일에서 불평의 기회를 찾는 평범한 '화난 납세자' 보다더 논리적이고 더 분별력이 있다. 스미스필드(메리 여왕 때 개신교 신자들을 화형시킨 곳에서 화형 당하는 고통이나 치통으로 인한 고통이나 진정한 고통은 긍정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지지할 수는 있지만 즐기기는 어렵다. 결국 스미스 필드에서의 화형이 예외적인 것처럼 우리의 치통도 예외적이다. 이것은 아주 오랜 시간 끝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남자를 맹세하게 하고 여자를 울게 만드는 그런 불편함은 참으로 감상적이고 상상에 달린 것이다. 모든 것이 마음의 일이다.

기차를 기다림

     예를 들어, 우리는 종종 역에서 기적 소리나 열차를 기다리는 것 때문에 다 큰 어른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듣는다. 어린아이들이 기적 소리 때문에 혹은 열차를 기다리면서 불평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없을 것이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역 안에 있는 것이 경이의 동굴이나 시적 즐거움이 가득한 궁전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는 파란신호등과 빨간 신호등이 마치 새로운 태양이나 달과 같다. 나무로 만든 긴 신호대가 갑자기 떨어지는 것은 경주를 시작하도록 왕이 홀을 내려 신호를 보내는 것같이 느껴진다. 나에게도 이런 상상을 하는 습관이 있다. 그들의 묵상은 풍성하고 열매를 맺는 것이리라.
     내가 말해 왔듯이, 모든 불편함은 감정적인 견해에 의존하고 있다. 여러분도 이 실험을 최근의 일상생활에서 전형적인 불편함으로 여겨지는 모든 일에 안심하고 적용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코믹한 피조물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모자 뒤를 쫓아 달리는 것은 불쾌하다는 인상을 준다 왜 이런 일은 질서 잡히고 경건한 마음의 소유자에게 불쾌한 일이 될까? 모자가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달리기가 사람을 지치게 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같은 사람이라도 놀이나 경기에 임하면 훨씬 더 빨리 달린다 같은 사람이라도 멋있는 비단모자를 좇아 달리는 것보다 시시하더라도 공을 따라 달릴 때 더 열심히 달린다. 그러나 모자를 좇아 다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부끄러운 일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여긴다. 확실히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원래 매우 코믹한 피조물이다. 인간이 하는 거의 모든 일은 다 코믹하다 예를 들어서 먹는 일이 그렇다 가장 코믹한 일은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사랑하는 일이 그렇다). 모자를 좇아 달리는 사람은 아내를 좇아 달리는 사람에 비하면 반도 못 미치게 웃기는 것이다

바람 부는 날 모자 뺏기

     이제 이 문제를 바르게 이해했다면 그 사람은 명백한 열정과 가장 성스러운 기쁨으로 자기 모자를 찾아 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맹수를 쫓는 명랑한 사냥꾼쯤으로 여길 것이다. 사실 나는 바람 부는 날 모자 뺏기가 미래에 상류층의 스포츠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돌풍이 부는 날 아침 높은 언덕에서 신사 숙녀가 회합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은 프로
선수들이 이런 저런 숲에서 모자 뺏기를 시작했다는 소식이나 모자 뺏기 기술 용어에 관해 듣게 될 것이다. 이 스포츠가 가장 최고의 수준에서 인본주의를 겸한 운동이 될 것이다. 잔인한 스포츠이기 때문에 양심 문제로 참가할 수 없다고 느끼는 많은 사람들에게 모자 뺏기 경기는 양심을 완화시켜 줄 것이다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모자는 살아 있는 원수처럼 감질나
게 하면서도 악마적인 모습까지 지니고 있다. 모자는 산토끼처럼 빨리 달릴 수 있다. 모자는 수사슴처럼 될 수도 있다 모자는 초원의 사자같이 마음대로 방향을 바꿔 달릴 수 있다. 그러나 모자를 쫓는 사람들은 모자를 추적하는 동안 사나운 솜씨와 난폭한 다양성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실제로는 고통을 입히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현대 철학자들은 모자에게 감정이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현대 철학자들이 이 문제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 해도, 사람에 관한 것보다는 그래도 뭔가 더 알고 있을 것이다. 여전히 그들은 자신들이 고통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고 느낄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은 구경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쾌락을, 풍부하고 아주 재미있는 쾌락을 주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나는 하이드 공원에서 모자를 좇아 달리는 한 노인에게, 그의 모든 몸짓과 태도가 관중들에게 보여지는 순간 얻게 되는 진실한 쾌락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의 인정 많은 가슴이 평화와 감사로 채워져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안 빠지는 서랍

     같은 원리가 전형적인 가정에서의 근심에도 적용될 수 있다. 우유에 빠진 파리를 꺼내려 하거나 포도주 병에서 마개를 빼려는 남자는 종종 신경질을 내는 자신을 본다. 잠시 어두운 연못가에 앉아 기다리는 낚시꾼의 인내를 생각해 보자. 그의 영혼을 즉각적으로 희열과 휴식으로 빛나게 해보라_
     한편, 나는 고통으로 인해 교리적인 중요성을 갖지 않은 신학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매우 현대적인 견해를 가진 몇 사람을 안다 단지 서랍이 너무 빡빡해서 빠지지 않기 때문에 교리적인 중요성이 없어진 것이다. 내 친구 하나가 이런 식으로 특별히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 그의 서랍은 매일 끼었고, 결과적으로 다른 것도 매일 그것에 운율을 맞추는 그 무엇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잘못된 것에 대한 이런 느낌은 참으로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며, 전적으로 그 서랍은 쉽게 빠질 수 있으며, 빠져야하며, 빠지게 되리라는 가정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러나 강력하고 포악한 원수에게 대항하여 당기고 있는 당신 자신을 상상해 보시오. 그 투쟁은 흥미로운 일이 지 노여운 일이 아닐 게요. 당신이 바다에서 생명의 배를 노 젓고 있다고 상상해 보시오. 알프스의 갈라진 틈에서 당신 동료를 밧줄로 묶는다고 상상해 보시오. 자신을 소년이라고 생각하고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몸싸움을 한다고 생각해 보시오."
     이 말을 하고 나는 곧 자리를 떴다. 그러나 나는 내 말이 최선의 열매를 맺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제 그는 매일 상기된 얼굴과 투쟁으로 빛나는 눈으로 서랍 고리를 잡아당 것이다. 자신에게 격려의 외침을 들려주며, 칭찬의 종소리를 들려주게 될 것이다.

불편함이 바르게 인식되다

     그래서 나는 심지어 런던의 홍수마저도 시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기쁨을 줄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허황되거나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불편함을 넘어서는 그 무엇도 불편함 때문에 야기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말했듯이 불편함은 단지 한 측면, 즉 참으로 낭만적인 상황의 가장 시적이지 않고 부수적인 측면에 불과하다 불편함이란 단지 그릇
인식된 모험이다. 다르게 보면 불편함은 모험이 될 수도 있다.  
     런던의 가옥들과 상점들을 에워쌌던 물은, 만약 있었다면, 이전의 마법과 경이를 증가시킬 뿐이다. 로마 가톨릭 사제가 "포도주는 물 빼고는 다른 모든 것과 어울린다'고 말했지만, 같은 원리로 물은 포도주 빼고는 다른 모든 것과 어울린다. 지난 주에 우리는 거대한 규모의 절대 금주회를 가진 셈이다. 물을 가진다는 것, 온 천지에 물을 가진다는 것, 그러면서도 마실 물이 한 방울도 없다는 것 내게는 이 사실이 물을 정확히 바른 사용법에 놓은 것으로 보인다. '물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 가장 적게 물을 마신다'는 원리를 보여 준 것이다. 어부, 선원, 잠수부, 그 밖의 사람들은 자신의 밖에는 많은 물이 있지만 안에는 없다는 생각에 따라 살고 있다.

시적인 사건

     폭풍우의 가장 실제적인 영향은 대홍수를 떠올리게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를테면, 피카딜리의 꼭대기에 거대한 방주가 건조되어 제사 드릴 모든 짐승들이 쌍으로 방주에 들어가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누군가는 본능적으로 마차의 말도 제사에 합당한 짐승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많은 사람의 견해에 따르떤, 런던의 마부들도 제사에 합당한 짐승이다. 혹은 제사가 아닌 그 무엇에 합당한 짐승이다. 마차소유자들, 마차를 소유한후작들과 부자들에 대해 갖는 첫인상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제사 칼 때문에 소리를 지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상상하는 것은 제사의 본래 원리에 대해 오해하는 것이다 제사에 맞는 짐승은 흠이 없고 건강하고 완전해야 한다. 이런 원리는 좀처럼 마차의 말에 적용하기 어렵고, 마부에게는 거의 가능하지 않고, 소유주에게는 절대로(어떤 실제적인 목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원래의 대홍수와 너무 많은 비교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이 우체부를 보냈으나 돌아오지 않아서 경찰을 보냈더니 그가 감람나무 줄기를 입에 물고 돌아오는 모습을 상상하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먼 미래에 아이들이 점 박힌 마차 말과 밝은 색의 주 의회 의원의 모습과 방주를 나무로 만들어 이 홍수를 기념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런던에 일어났던 긴 홍수는 아마도 내게는 가장 시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내가 거기 있지 않아서 홍수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나를 비탄에 잠기게 하기에 충분하다. 대단히 충분하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뜻밖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런 상황을 은혜로 여기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성 훈련 1
     폭풍, 물난리, 정전 등과 같은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자. 이런 사건들이 유쾌한 기분을 갖게 한 적은 없는가?



말씀묵상 1
     마태복음8:23-27


...................................................................................... 체스터턴(G. K. Chesterton,1874-1936)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은 작가. 언론인. 만화가. 기독교 변증가이다. 런던에서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중류 가정에 태어난 그는 런던 슬레이드 애술 학교
(London's Slade School of Art)를 다녔고, 후에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 (University
College)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체스터턴의 작품은 그의 사상의 변천과 함께 눈에 띄는 변화를 보인다. 초기에는 낭만적이고 직관적인 작가였다. 그러나 후에는 이 초기 작품들을 거부하고 파괴했다.
     그는 1901년 프랜시스 블록(Frances Blogg)과 결혼했다. 이즈음에 언론 삽화가로서 명
성을 얻어 』Daily News, illustrated London News, G, K, S Weekly 에 두루 기고했다. 독특한 복장으로도 유명했던 그는 소매 없는 망토. 멕시코 중절모. 칼을 장치한 지팡이를 들고 다녔다.
     체스터턴은 수많은 도발적인 글들을 쓴 후 기독교 변증론으로 관심을 옮겨서 책 두께만큼 긴 글로 정통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였다 그의 신앙은 아주 전통적이었지만 그의 논증
방법은 신선하고 독창적이었다.
     1914년경. 너무 소진된 그는 침체기를 겪다가 1918년 형제 세실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 그 후 1922년에 로마 가톨릭 교인이 되었다.
     체스터턴의 작품은 형식적이거나 학문적이지 않지만 그는 생각이 깊은 사상가로 평가된다. 그는 다작을 하면서도 말년에 매주 라디오 방송을 하였다. 19Ef년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를 '신앙의 수호자' 라고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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