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과의 만남』
                                 칼 라너

나의 일상생활 속에 계신 하나님

     오, 주여, 저의 일상생활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당신을 빼둔 채 많은 일로 가득 찬 길고 지루했던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온유하신 하나님, 이런 우리의 일상생활을 한번 보십시오.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생활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우리 인간들을 보십시오. 당신의 사랑의 긍휼로 제 영혼을 보시고, 끌려가는 도망자들의 끝없는 행렬로 붐비는 도로, 헤아릴 수 없는 사소한 일들과 의미 없는 대화와 행위, 안일한 호기심과 우스꽝스러운 가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앞으로 밀려가는 고속도로를 보십시오.
     당신과 당신의 완벽한 진실 앞에 설 때, 제 정신은 마치 전 세계에서 몰려온 고물 장수들이 이 세상의 비속한 부를 팔기 위해 모여든 시장터 같지 않습니까? 그 정신은 저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저속한 장신구를 불안하게 밀려드는 군중에게 진열하는 시끄러운 장터 같지 않습니까?

내 영혼의 창고

     제가 '철학자' 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초등학생 시절에, 저는 영혼이 모든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오, 하나님, 고상하게 들렸던 그 말의 의미가 어떻게 이렇게 바뀌어 버렸습니까! 트럭이 아무런 계획이나 구분 없이 짐을 옳기고, 어설프게 징을 쌓고, 결국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시시하고 진부하고 무의미한 일상의 잡동사니로 가득 차게 되는 거대한 창고가 되어버린 제 영혼은 지금 얼마나 변했는지요!
     사랑하는 하나님, 제 삶이 이런 모양으로 계속된다면 저는 어떻게 됩니까? 모든 짐이 갑자기 창고에서 쓸어버려질 때 저에게는 어떤 일이 생기겠습니까? 제가 죽는 그 순간에 제 기분은 어떻겠습니까? 그때는 더는 '일상' 이 없겠지요. 그때 저는 지금 이 세상에서 일상을 가득 채우는 모든 것들로부터 갑자기 버림받게 되겠지요?

마지막 소출은 무엇인가?

      그리고 오직 저 외에는 아무것도 없게 된 그때 저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평생 동안 저는 평범한 일상, 일과 행위, 공허한 소리와 의미 있는 분노로 가득 찬 사막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죽음의 그 묵직한 무게가 제 삶을 내리누르고 저 모든 날과 세월로부터 참되고 지속적인 내용물을 쥐어짜 버리는 때에, 마지막 소출은 무엇입니까?
     그 마지막 부름의 시간에, 시시하게 소비해 버린 세속적 삶에 대한 모든 환상을 대신할 깨달음이 제게 찾아 올 때, 오 하나님, 진실하지 못했던 제 삶이 그나마 거둔 참된 소출은 당신의 은혜로 빛나고 생명력 있게 된 몇 번의 축복된 순간이 전부일 것입니다. 이것도 아마 당신이 제게 지금까지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아마도 그때 저는, 나의 매일의 일상을 채우는 중고 물품들 사이로 당신의 은혜가 내 삶의 어두운 구석으로 몰래 들어오신 그 몇 번의 소중한 순간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의 유배로부터의 탈출

     이러한 못나고 따분한 말을 어떻게 하면 회복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만족스러운 한 가지 일과 당신을 향해 저의 방향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이 일상의 감옥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탈출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께서 저를 구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저의 진정한 삶이 당신을 향해 방향이 정해져야 함을 인식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저는 이미 유배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세속적인 일상의 무게 아래 질식당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 저는 이미 유치한 일상의 관심사에 깊이 사로잡혀 있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저의 창조주가 아니십니까? 당신이 저를 인간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까? 인간은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자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당신의 무한함을 갈망하는 존재가 아닙니까? 인간은 저 멀리 떨어진 당신의 별을 향해 달려가고 싶은 욕구에 굴복하고, 이 세상의 모든 고속도로와 갓길을 달리면서까지 추적을 계속합니다. 그러나 결국 인간은 당신의 별이 여전히 그 고요한 질서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며, 여전히 멀리 있음을 알게 되는 존재가 아닙니까?

무엇이 나를 구원해 줄 것인가?

     내가 카투르지오 수사(Carthusian)가 되어 하루 종일 당신의 거룩한 임재에 대해 침묵으로 찬미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알기로 하으로써 저의 일상으로부터 탈출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저의 문제를 해결해 줄까요? 그것이 정말 저를 이러한 일상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해 줄까요?
     그렇지 못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저 거룩한 행위로도 이 세상의 영혼에서 나는 썩은 먼지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제단에서 보낸 시간들이나 제 기도서에 있는 모든 공적 기도문을 외우는데 보낸 시간들에 대해 생각해 보면, 내 삶을 이렇게 한심하게 만든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이 세상의 일들 때문에 저의 나날들이 진부하고 무의미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제 스스로 그러한 구덩이를 판 것입니다. 저 자신의 태도를 통해서 거룩한 사건들을 따분한 일상의 우울함과 지루함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나의 나날들이 나를 지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반대인 것입니다.

당신에게 가는 길

     바로 그런 이유로 저는, 당신에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은 내 일상적인 생활의 한가운데를 질러가는 길임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만약 다른 길로 당신께 도망가려 한다면, 저는 사실 저 자신을 뒤에 남겨 둔 채 가는 것이 되며.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아무런 결과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일상생활을 통해 당신께로 가는 길이 있습니까? 이 길이 당신으로부터 오히려 더 멀리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은 나를 말없는 하나님인 당신이 사시지 않는 곳인 세속적 행위의 공허한 소음 속에 더욱 깊이 빠뜨리는 것은 아닙니까?
     어린 '정신과 마음에는 그렇게도 중요하게 보였던 뜨거운 행위에 우리는 점차 싫증이 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도덕적인 철학가들이 말하는 '지루한 인생(taedium vitae)' 과 성경에서 야곱의 열두 아들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경험하는 삶에 대한 포만감도 점점 더 저의 운명이 되어 갈 것입니다. 저의 일상은 자동적으로 삶의 무거운 우울 속으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일상은 이 세속적 공허함의 다른 쪽인 당신께로 나를 간접적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알 수 있습니다. 이교도들도 그 사실을 알지 않습니까? 제 일상이 당신께로 인도하는 길이 이 길입니까? 일상의 삶이 그 진정한 얼굴을 제게 내보였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은 허무하고 비참한 것이라 인정하며 당신의 임재로 나아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당신께로 가는 길이 아니라 절망으로 가는 길 아닙니까? 지친 사람의 가슴이 이전에는 안식을 주었던 일들로부터 기쁨을 조금도 발견하지 못하고, 따분하고 공허할 때마다 그것을 이기기 위해 찾곤 하던 일상적인 삶의 단순한 일들이 이제는 그에게 아무 맛도 없게 되었을 때, 그것은 영광스러운 승리 아닙니까?

기쁨과 실망

     지치고 환멸을 느낀 마음이 젊고 행복한 마음보다 당신께 조금더 가까이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단순한 기쁨도, 일상적인 슬픔도 당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지 못할 때. 우리는 어디서 당신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까? 실로 우리의 매일의 기쁨은 당신을 잊게 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며, 우리의 매일의 실망 역시 그렇습니다. 이런 기쁨과 실망은 우리의 가슴을 너무나 아프고 씁쓸하게 만들어 우리는 당신을 찾기 위해 가졌던 기술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는 모든 일에서 당신을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예배드릴 때에도, 조용한 방에서도, 심지어는 삶에 대한각성 조차도 이러한 위험에서 우리를 충분히 지켜 주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신성한, 비일상적인 일들이 결국에는 우리의 일상에 속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일상은 내 인생의 일부분, 아니 삶의 전체임이 분
명합니다. 매일이 '똑같은 나날' 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일상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이 나에게 필요한 유일한 한 가지인 나의 하나님을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 발견하기

     그러나 만일 제가 모든 일 속에서 당신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제가 모든 것에서 당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만일 제가 도망하여 당신을 확실히 찾을 수 있는 곳을 당신이 하나도 주시지 않았다면, 만일 제가 하는 모든 일이 당신의 상실을 의미한다면, 저는 모든 곳 그리고 제가 하는 모든 일 속에서 당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는 전혀 당신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며 이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당신 없이 저는 존재하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모든 일에서 당신을 구해야합니다. 매일이 '똑같은 나날' 이라면, 그 똑같은 나날은 당신의 날이며 매 시간은 당신의 은혜의 시간입니다.
     모든 것은 '똑같은 나날'과 당신의 날을 합한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하나님, 언제나 알아 왔던 진리를 새삼 이해합니다. 진리가 다시 제 마음 속에서 살아났으며, 이것은 이미 제 이성이 종종 제게 말해 준 사실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생명이 되지 못하는 이성의 진리는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찾아오신다

     저는 잛지만 무척 소중한 한 구절을 적어 둔 자은 공책을 수시로 꺼내봐야 합니다. 그 글은 여러 해 전 루스브로윅이 쓴 것입니다. 저는 제 마음이 그 말을 이해하도록 그 글을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참으로 신실한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느꼈던 생각을 재발견할 때 언제나 저는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일상생활로 여러 해를 보낸 지금도 이 말을 여전히 사랑한다는 사실은 제게는 당신이 언젠가는 저의 평범한 행동도 축복해 줄것이라는 거룩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그리고 간접적으로 계속 찾아오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과 즐거움 모두를 요구하시며 그 중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해 방해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게 하신다. 따라서 내적인 사랑은 이 두 가지, 즉 행동을 하면서 그리고 또 안식을 취하면서 자신의 삶을 소유한다. 그리고 그는 행위와 기쁨에서 각각 완전한 일체다. 왜냐하면 그가 기쁘게 안식할 때 그는 완전히 하나님 안에 거하며, 그가 능동적으로
사랑할 때 그는 완전히 자기 자신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내적인 사람은 안식과 일 모두를 새롭게 하라는 하나님의 도전과 훈계를 끊임없이 받는다. 따라서 그는 의를 발견한다. 그래서 그는 진지한 사랑과 지속적인 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는 영원의 안식에 대한 쾌락적인 성향을 통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거할 때 그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 안에서, 미덕과 의 안에서 모든 피조물에게나아간다. 그것이 바로 내적인 삶의 최고 단계다.
     안식과 일을 하나의 동일한 행위로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이런 의를 얻지 못한 사람이다. 의로운 사람은 내적 사색을 할 때 방해받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행위를 할 때만큼 사색을 할 때에도 쾌락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양면을 비추어 주는 이중 거울과 같다. 그의 영혼의 높은 부분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모든 은사를 받는다. 그 영혼의 낮은 부분에서는 감각을 통해 유형적 이미지를 받아들인다.

똑같은 나날과 당신의 날

     "똑같은 나날" 과 당신의 날을 같이 사는 법을 배워야겠습니다. 이 세상의 일에 나를 바칠 때, 모든 일에서 나를 당신에게 드리고, 유일하신 분인 당신을 소유하는 법을 배워야겠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오로지 하나님 당신을 통해서만 할 수 있습니다. 오직 당신의 도움으로만 저는 이 많고 다양한 일상적인 일 가운데서도 '내적인'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세상의 일과 함께하기 위해 나 자신 밖으로 나갈 때, 오직 당신을 통해서만 저는 당신과 함께 나 자신 속에 계속 거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세상 것들에게 빠지지 않도록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걱정도 아니며 비존재도 아니며, 심지어 죽음도 아닙니다. 근대 철학자도 그것은 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당신의 사랑만이 저를 구원해 줄 수 있고, 모든 일의 목적이며 힘이신 당신에 대한 사랑이 저를 구원해 줄 수 있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당신 자신에게까지도 충분하신 당신만이 만족이고 충족입니다. 오직 무한하신 하나님, 당신에 대한사랑만이 모든 것의 심장을 뚫고,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초월하며 당신의 존재의 무한한 영역을 향해 높이 올라가, 세상의 모든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고 그것을 당신의 무한함을 찬양하는 찬송가로 바꾸어 줄 수 있습니다.

당신께 돌아오며

     당신 앞에서는 모든 복잡한 것이 하나가 됩니다. 당신 안에 있을 때 흩어졌던 모든 것이 모입니다. 당신의 사랑 안에 단순히 외적이던 모든 것이 다시 진실하고 진정한 것이 됩니다. 당신의 사랑 안에 하루의 자질구레한 일들로 인해 산만해졌던 내가 다시 당신의 연합, 영원한 생명의 전야로 귀향합니다.
     제 일상을 일상으로 남겨 두면서 당신께로의 귀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이러한 사랑은 오직 당신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매일의 일상을 당신 앞에 내려놓으며 이제 당신께 제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입니까? 제가 구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가장 평범하고 가장 숭고한 선물, 즉 당신의 사랑의 은혜입니다.
     주님이시여, 이러한 은혜로 나의 가슴을 감동시켜 주소서. 제가 기쁨이나 슬픔으로 당신에게 손을 뻗으며 이 세상의 것을 달라고 할 때, 그것을 통해 창조자이시며 궁극적 고향인 당신을 알고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사랑 그 자체인 주님이시여 마침내 저의 나날이 텅 비어 당신의 영원한 생명 안에 거하는 하루하루가 될 수 있도록 사랑의 은혜를 부어 주소서.  당신을 주소서.




묵상을 위한 질문 1
     매일이 지겹도록 똑 같은 나날로 느껴지는 것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이것을 섬김의 훈련과 어떻게 연관지을 수 있을까?


영성 훈련 1
     매일의 일상생활을 하나님께 드리라 이것은 약속을 적은 수첩이나 달력에 대해 기도함으로 할 수도 있고 다른 방식으로도 할 수 있다.


말씀묵상 1
     시편127:1-2






........................................................................................ 칼 라너 (Ka.1 Rahne.,1904-1984)

     칼 라너는 20세기 주요 기독교 신학자 중 한 사람이자 제2차 바티칸 공회의 (Second
Vatican Council)를 세운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는 1922년에 예수회에 들어가 1932년에 사제로 임명받고. 마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밑에서 공부한 후 1936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그는 비엔나에서 교수 생활과 사역을 했다 그리고 종전 후 인스부르크. 윈헨. 윈스터의 대학에서 교리 신학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글을 많이 쓴 작가였으며 편집인으로 일했다. 그의 ftrofogi'rdfJuvrrfigofioHr(신학적 고찰)은 14권의 책으로 된 대작이며 . 인쇄된 것만3.000편이 넘는 기사를 썼다.
     라너의 사고(와 참여)는 제2차 바티칸의 문서에 사용된 언어와 내용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비전은 세계를 포괄했으며, 모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고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열린 태도와 대화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에 신학적 근거를 제공했다.
     라너의 저술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는 근대성과 진보성으로 칭송 받았다. 지금은 오랜 신학적 전통에서 그의 입지가 얼마나 공고한지 알 수 있다.
     또 칼 라너는 강렬한 영성의 소유자였다. 그가 일평생 남긴 엄청난 다작을 간과하더라도 그가 섬김의 훈련을 실천한 사람임은 쉽게 알 수 있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