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의 서약
                               (토마스 R. 켈리)



잃어버린 순종을 찾는 목자

    우리 앞에는 분노하고 싸우고 고전하고 또 죽어가는 인간과 국가들의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다. 요즘 이러한 비극적인 드라마 속에서 우리의 눈은 모두 초조한 경계와 기도 속에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 영혼의 침묵 안에는 영원한 드라마가 끊임없이 상연되고 있다. 그 드라마는 이전에도 공연되었고 지금도 공연되고 있다. 이 내적 드라마의 결과에 궁극적으로 역사의 외적 연출이 있다. 그것은 불안과 외로움 속에서 힘없이 황야를 배회하는 길 잃은 양에 대한 드라마다. 양이 배회하고 있을 때 선한 목자가 산을 넘어오고 있다. 하나님의 마음은 실로 목자의 마음이며, 그분은 당신의 양을 품 안에 안을 때까지 염려하신다.
     이 내적 드라마의 한 장면, 목자가 양을 찾아낸 그 장면에 주의를 집중하자, 그것은 절대적이고 완벽한 그리고 거룩한 순종의 삶이다. 그러나 시종일관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 창조주이신 하나님, 공격하시는 하나님 , 찾으시는 하나님,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하나님, 우리의 순종의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 , 우리에게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중심에 있는부드럽고설득력 있는사랑

      이런 거룩한 순종의 삶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대해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놀라울 정도로 즉시 인간을 만나 주시는 영혼 내면의 성소로 들어가 보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장중으로 떨어지는 것, 그의 임재로 인해 자신의 존재의 깊은 나락까지 공격을 받은 것, 아무 경고 없이 모든 안전함과 확실성이 송두리째 뿌리 뽑히는 것, 그리고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당당한 자아를 완전히 그리고 철저히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 결국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시 42 :7)라고 외칠 수밖에 없게 하는 놀라운 힘의 폭풍에 날아가게 되는 것은 실로 압도적인 체험이다. 그런 체험을 하고 나면 영혼은 형용할 수 없이 부드러운 '사랑의 중심' 에 빠져들게 된다. 여기에 표현할 수없는 평화와 걷잡을 수 없는 기쁨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야 파스칼이 그 엄위한 순간의 중심에서 '불' 이라고 쓴 단 한마디의 말을 이해하게된다.
     여기에서는 싸움과 죄로 가득하고 눈이 먼 인간과 국가들의 세계 식물과 동물과 회전하는 천체의 별들의 세계가 모두 새로워져서 부드럽고 설득력 있는 '중심의 사랑' 에 밀려드는 것이다. 여기에는 수세기의 성인들이 있고, 그들의 마음이 눈 안에 들어온다. 보라, 그들이 가슴이 곧 우리의 가슴이며 그들의 가슴이 영원하신 절대자의 가슴이다. 놀라운 위엄
속에 거룩하신 절대자는 모든 것 안에서 사랑을 주고 무한히 참고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존재하신다. 영화의 징표가 모든 것에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 모양이며 피에 젖어 있다. 그 옛날 확신을 갖게 된 도마처럼 우리는 고백한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 :29). 우리는 감히 눈을 들어 볼 수 있을까? 아니, 어디를 보든 그분을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밭에도 강에도 사람이 들끓는 거리에도 그분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모세가 알고 있던 것처럼 누구든 하나님을 보는 자는 살지 못할 것이다. 옛 자아가 살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죽음은 온다. 축복의 죽음, 분리시키는 의지의 죽음은 온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이 말한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 :20)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순종에 들어가기

     그렇게 영혼을 뒤흔드는 사랑의 공격을 받은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좀 더 정상적인 의식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 후 이 세상을 영원히 사랑하시는 자는 철저히 실제적이며, 그 후로부터 삶은 바로 그 실제로 존재하는 자에 의해 영원히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성 어거스틴처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좀 더 확실하게 알게 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안에서 확고해지기만을 구하게 된다. 하나님 안에 진정한 중심이 있고 우리는 무(無)가 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이다.
     자아는 하나님 안에 들어가 비워지고 하나님이 그 안을 채우신다. 기쁘고도 경이로운 겸손으로 우리는 그에게 믿음의 순종, 곧고 평안하고 웃음이 나오는 기쁨 속에서 우리의 작은 삶을 위탁한다 그리고 우리는 시편 작가와 함께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40 :7-8). 하늘과 땅 그 어느 곳에도 하나님의 뜻과 작은 소망과 그의 희미한 호흡만큼이라도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룩한 순종이 들어오게 되는데 그것은 그림자만큼이나 민감하고 순종적이며 이기심이 없다. 우리는 달려가도 피곤치 않을 것 같은 기세로 그분의 명령에 기쁘고도 절박하게 그리고 즉시 응한다.

수동적인가 능동적인가?

     나를 오해하지 말라. 우리의 관심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은혜로 몇 명의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의 삶에 있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들의 놀라운 체험은 영원한 앙금, 즉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에 사로잡힌 의지를 남겼다. 의식이 파동을 친다. 시각은 희미해진다. 그러나 거룩하게 귀를 기울이며, 민첩하게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자극을 받은 삶의 속과 껍질처럼,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는 매일의 삶의 계속되는 패턴으로 남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거의 수동적인 길을 통해 완전한 순종의 상태로 들어간다. 하나님 한 분만이 주인공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움직임에 따라 완벽하게 움직여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의 의지는 용해되어 하나님 안에 굳게 고정되고, 하나님의 의지는 우리 안에 굳게 고정된다.
     그러나 완전한 순종으로 하는 수동적인 방법과는 반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 니콜라스 그루(Jean-Nicholas Grou)가 말한 '능동적 방법'을 따라야 한다. 그 길 안에서 우리는 분투해야 한다. 옛날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새벽이 올 때까지는 적극적으로 천사와 씨름해야 한다. 그러한 능동적 방법 안에서 의지는 하나님의 뜻에 조금씩, 차츰차츰 복종하게 된다


불타는 환상

     하지만 순종으로 가는 첫째 단계는 그런 삶에 대한 경이로운 불타는 환상이다. 그 환상은 성인들의 전기를 통해서, 폭스(Fox)의 일기와 초기 '형제회 (Friends)' 를 통해서, 우리 눈앞에 보이는 삶을 통해서, 그리고 시편에 자주 나오는 구절-"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시 73 :25)-을 통해서, 예수님의 놀라운 삶과 죽음에 대한 명상을 통해서, 번뜩이는 빛을 통해서, 폭스의 말처럼 '위대한 열림' 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가끔씩 보는 환상이다. 우리 안에 우리를 올려 주는 힘의 무한한 원천이 있어 눈부신 환상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만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 속으로 들어오신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다 거룩하다 상상력이여, 우리의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실체' 의 관문이여!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삶으로 오라고 애타게 부르신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시작하라

     일단 환상을 갖게 되면, 거룩한 순종으로 가는 다음 단계는 이것이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시작하라. 지금 순종하라. 지금 감당할 수 있는 작은 순종부터 하라. 그것이 겨자씨만할지라도.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시작하라. 현재의 순간을 살라 지금 앉아 있는 그 의자에서, 바로 지긍 이 순간에 하나님을 향한 완전하고 철저한 순종과 열린 마음으로 시작하라.
귀를 밖으로 돌려 이 말들을 듣되, 안으로는 홀로 영원하신 절대자이신 사랑의 하나님과 함께하는 당신 삶의 깊은 곳에서 계속 침묵 기도를 하라. "내 삶을 열어 주소서 . 제가 떨쳐 버리지 못하는 제 생각을 인도하소서. 하나님이 하시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리이다. " 친구들과 거리를 걸으며 잡담을 하면서도 당신 자신을 계속되는 순종에 드리라.
     나는 이러한 내적이며 지속적인 기도의 삶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낮에도 밤에도, 바쁜 업무 중에서도,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할 수 있다. 그러한 순종의 기도는 간단할 수도 있다 한 문장을 사용해서 여러 번 계속해도 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저의 의지가 되어 주소서 하나님이 저의 의지가 되어 주소서" 또는 "당신 앞에 나를 여나이다. 당신 앞에 나를 여나이다" 또는 "하늘을 통해 땅을 보소서 하늘을 통해 땅을 보소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은밀한 기도의 삶은 얼마지나지 않아 말이나 구절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 하나님, 나의 거룩하신 절대자, 내 사랑" 혹은 우파니샤드의 칭송처럼 '오 아름다워라, 오 아름다워라, 오 아름다워라"와 같은 감탄의 말이 될 수도 있다. 말이 멈춰지고 우리는 서 있든지 앉아 있든지 누워 있든지 말없는 찬양과 순종과 기쁨과 희열과 영광의 상태로 있게 된다.

다시 시작하고 마음을 편히 가지라

     거룩한 순종의 셋째 단계는 이것이다. 만약 실수로 한 시간 정도 하나님을 잊었다면, 고통스러운 후회나 자기 비난에 시간을 너무 많이 보내지 말고 자신의 자만을 시인하고 지혜에 의지하여 다시 시작하라. 바로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거룩한 순종의 넷째 단계는 이것이다.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쥐며 "난 할 거야! 난 할거야!" 하지 말라. 마음을 편히 가지라. 그냥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라. 수동적인 목소리로 하지 말라. 삶이 당신을 통해서(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라 "난 할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순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묵상을 위한 질문
     토마스켈 리가 말한 '거룩한순종'으로 가는 단계들이 당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현실 가능성 없는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영성 훈련
     그룹을 만들어 원으로 둘러앉게하고 침묵으로 기도를 시작한다. 각 사람이 성령님이 움직이는 대로 말하되 꼭 교대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말라. 성령님이 감동을 주시기를 기도하고 하나님이 가슴속에서 활동하시도록 하라. 침묵이 길어져도 그대로 두고 많은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지 말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맡기라. 각 사람이 자연스럽게 모임을 떠나게 하면서 마친다.




말씀묵상
     시편23편






토마스 R. 켈리(Thomas R. felly,1893-1941).................................................................

     토마스 레이먼드 켈리는 오하어오 주, 칠리코스 근방에 자리잡은 독실한 퀘이커 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가 죽어서 어린 켈리는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누이를 도와 농장 일을 하면서 성장했다. 1903년에 그의 가족은 오하이오 주 월밍턴으로 이사했고.
이로 인해 켈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작은 궤이커 학교인 월밍턴 대학에 다닐 수 있었다. 켈리는 헤이버포드 대학 장학금을 받게 되었는데 거기서 의미 깊은 그의 순례 여행이 시작되었다.
     원래 과학에 관심이 있었던 켈리는 철학과 종교에 끌리게 되었다. 루퍼스 존스(Ruffs
Jones)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켈리는 이전에 중서부 지방에 알려졌던 궤이커교와는 다른. 신비주의적 삶을 강조하는 궤이커교를 만나게 되었다. 곧 그는 신비주의 퀘이커적 삶이 조지 폭스(George Fox)가 품었던 원래의 견해에 더 가깝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신비주의적 체험은 그를 피해 갔다.
     여러 해 동안 교육과 연구 생활을 하면서 하버드 대학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알프래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의 지도 하에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켈리는 인정을 받기 위해 분투했다. 그는 궤이커교 내에 있는 차이점들 때문에 괴로워했고. 건강이 나빠 고통을 받았으며 하버드 대학으로부터 계속 박사 학위를 거절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 치명적인 실패와 고통을 통해서 마침내 단순하고 어린이와 같은 순종과 신뢰로 하나님의 은혜 속에 진정한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새롭게 변화된 그는 가르침과 삶으로 폭넓은 이목을 끌게 되었다 그러나 켈리의 작품은 모두 간단하고 순수하며 헌신적인 소명을 위해 노력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