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 사탄이 욥을 시험하다.               주제: 50. 시험.  2019. 4. 28.


서론  : 욥에게 닥친 두 번째 재난. (2:1-13)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포기하게 하려는 사단의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다.

사단의 주장과는 달리(1:9-11), 욥은 순식간에 모든 소유물을 빼앗기고 자녀들까지 잃어버렸지만

    그로 인해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거나 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의 주권을 찬양함으로써 신앙을 고백했다(10-22).

사단은 포기하지 않고 욥의 몸을 침으로써 다시 시험하려 했다.

    욥의 순전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두 번째 시험을 허락하심으로써 욥은 온 몸에 악창이 나는 질병으로 심한 고통을 겪는다.

    본문의 내용은 '욥에게 닥친 두 번째 재난'(2:1-13)이다.

 

1. 욥에 대한 사단의 두 번째 고소이다. (1-6) :

첫 번째 시험이 실패로 끝난 이후에 사단은 하나님 앞에서 다시 욥을 참소했다.

소유로는 그의 순전함을 알 수 없으니 "뼈와 살", 곧 그의 몸을 치면 정녕 욥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욕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욥의 순전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시험을 다시 허락하셨다.

1) 다시 하나님 앞에 선 사단. (1-2)

사단이 다시 하나님 앞에 섰다. (1) "또 하루는"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들" 곧 천상의 무리가

    각자 맡은 사명과 관련해서 하나님께 보고하기 위해 모였을 것이다.

이날 사단도 참여했다. 사단은 지난번에 시험과 관련해서(1:6-12) 하나님과 대화할 기회를 찾으려고

    즉 사단은 욥을 다시 참소하기 위해 그 자리에 나타났던 것이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2). 하나님께서 질문하셨다. 이는 첫 번째 질문과 똑같다(1:7).

    하나님의 이 질문은 욥의 문제를 언급하기 위한 예비적인 질문이었다.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2). 사단의 답변 역시 첫 번째의 답변과 같다(1:7).

     이 사실은,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들과는 달리 하나님께 일정한 사명을 받은 바 없이

     제 마음대로 지상의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사단의 행동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독단적인 생각에 따라 온 땅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은

    믿는 자들을 참소하거나 비방할 꺼리를 찾아 실족시키기 위함이다. (벧전 5:8; 3:1)

2) 욥에 대한 하나님의 칭찬. (3)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사단에게 욥에 관해 말씀하셨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유의하여 보았느냐"는 말은, "주목해서 자세히 살펴보았느냐?"라는 의미이다.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1:8) 사단 앞에서 욥을 칭찬했다. 공중 권세 잡은 자로서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단에게 이 말씀은 강력한 도전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단이 아무리 그를 시험한다고 해도 욥의 경건한 신앙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일어난 첫 번째 재난(1:13-22)과 관련하여 사단을 정죄하고 욥을 칭찬했다.

이전에 사단은 욥에 대해 고소하기를, 그가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1:9).

    욥이 분명 그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에게 주어진 풍부한 소유 때문이라고 했다(1:10). 그러므로

    욥의 소유물을 모두 제거한다면, 욥은 분명 하나님을 배반하고 욕할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1:11).

    그러나 사단의 말대로 욥의 소유물을 모두 제거해 버린 결과는 사단의 고소가 근거 없는 비방이었음을 드러 내 주었을 뿐이다.

모든 소유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욥의 경건함은 변함이 없었다.

    '사단이 무고(誣告)로 하나님을 격동하여 까닭 없이 욥을 치도록 했'는 이 표현은,

   ① 욥에게 닥친 재난은 "까닭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② 재난을 통하여 "욥의 온전함"이 분명히 드러난 것이다. (5:3-4; 10:36; 1:2-4)

3) 욥에 대한 사단의 비방과 고소. (4-5)

사단은 실폐한 첫 번째 시도보다 더욱 간교한 제안으로 욥을 다시 시험하고자 했다. (4)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는 표현의 의미는, 어떤 물건을 그것과 동일한 가치를 가진 다른 물건과 바꾼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다는 것과 유사한 표현.

사단이 이러한 경구를 욥에게 적용시킨 이유는?

    사단은 욥의 경건함이 이기적이고 불순한 동기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4).

    사단의 이 말은 '재산은 물론, 종이나 자녀까지 잃을지라도 견뎌내겠는가'라는 것이다.

"가죽으로는 가죽을" 바꾸어야 하는 법인데, 욥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서는 그의 소유가 아니라 그의 목숨이 위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단의 본심은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5).

    사단의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께 대한 욥의 신앙의 순수성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뼈와 살을 쳐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의 역사에서 사악한 자들은 육신에 고통을 가하는 고문으로써 인간성을 포기하게 만들어왔다.

 

묵상 및 적용

    : 하나님과 사단의 대화에서 주목할 것은 사단이 욥의 뼈와 살을 치고 싶어할지라도 그의 의지와 결정만으로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의 범위 내에서만 자신의 사악함을 실행에 옮길 뿐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악한 자의 역사로 어떤 고난에 처한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뜻만이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4) 하나님께서 욥에 대한 사단의 시험을 재차 혀락하셨다. (6)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사악한 의도를 아셨지만 그러한 악한 의도까지도 그분의 섭리 아래 두셨다.

     그래서 사단의 두 번째 시험을 허락하시고 욥을 그의 손에 붙였다. (6)

사단은 단 한 가지 조건 곧 욥의 생명만은 다치게 하지 않는 한에서 욥의 몸에 어떠한 고통이든 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로써 욥은 죽음보다 더한 육신의 고통을 당하게 된다.

     살아 있는 것을 한탄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2. 음에 대한 사단의 두 번패 공격이다. (7-10)

욥에 대한 두 번째 시험에 관한 허락을 받자마자 사단은 지체하지 않고 욥을 쳤다.

    첫 번째 시험이 욥의 소유물 곧 그의 재산, 가축, , 자녀 등을 대상으로 삼은 데 비해,

    두 번째 시험은 직접적으로 욥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사단은 인간이 육신적으로 얼마나 무력하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욥을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사단은 욥의 온 몸에 악창이 나게 했고(7), 욥의 아내까지 부추겨 욥을 몰아쳤다. 그러나

    욥은 첫 번째의 시험 때와 마찬가지로(1:20-22) 이 일로 인해 범죄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1) 사단이 욥의 몸을 침. (7)

욥의 몸을 칠 권한을 허락받은 사단은 욥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했다.

"종기(악창)"은 사단이 욥의 뼈와 살을 치는 공격의 도구로 삼은 악창은 '불타듯 뜨겁다'라는 의미를 지닌 말로,

     심한 열을 동반한 병임을 암시해 준다.

     본문의 증세를 보면, 욥의 종기는 많은 현대의 의사들이 증언하듯 문둥병의 일종인 '엘레판티아시스'(Elephantiasis)

     '상피병'(象皮病)   으로 추정된다.

중동 지방에서 특히 발병률이 높은 이 병은

   ① 처음에는 머리가 빠지고 얼굴이 붓고 일그러지면서 목이 쉬는데, 악화되면 전신의 살갗에 심한 가려움증을 동반하는 반점이나

      종기로 뒤덮이게 된다.

   ② 처음에는 붉은 색을 띠지만 병이 진전됨에 따라 검게 변하면서 궤양이 되고 고름이 흘러나오고 나중에는 전신의 피부가 코

       끼리 피부처럼 된다.

주목할 것은, 사단이 왜 하필이면 이 같은 병으로 욥을 쳤는가 하는 것이다.

      문둥병의 일종인 이 병은 그 형태야 어떻든 전염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하나님의 저주인 천형(天刑)으로 간주 되었다. 따라서

     욥이 이병에 걸렀다는 것은, 욥이 하나님께 버림받고 저주를 받은 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사단은 욥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버리고 저주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2) 두 번째 재난으로 인한 욥의 극심한 고통. (8-9)

온몸에 난 종기로 욥은 사람들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몰골이 망가졌을 뿐 아니라 몸도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8)

"재 가운데 앉아서" 이것은 큰 비탄의 표현으로 고대 사회에서는 슬픔을 당한 사람들이 스스로 수치스럽게 만들기 위해 행하던 관습이었다.

     이는 자신이 다 타버리고 남은 재와 같이 하찮은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재 위에 앉은 욥은 깨진 질그릇 조각을 취하여 자신의 몸을 긁고 있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이같은 욥의 행동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가려움 때문이다.

     욥은 가려움을 참을 수 없어 곪은 종기들이 만들어 낸 상처를 질그릇 조각으로 긁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욥의 고통은 육신적인 아픔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사단은 욥의 아내까지 부추겨 욥에게 정신적, 영적인 고통까지 주었다. (9)

놀랍게도 욥의 아내의 말은 사단의 의도와 정확하게 일치되고 있다(1:11; 2:5).

    욥의 아내는 사단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사단은 어떻게 해서든 욥으로 그의 신앙을 저버리도록 해야 했는데 그의 아내가 바로 이 일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욥의 아내로 하여금 욥에게 그런 고통을 당하고 있느니 차라리 하나님을 향해 욕하고 죽는 것이 낫다고 충동질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심각한 위협을 받는 고통 중에서 욥은 자신의 아내에게서 위로는커녕

    오히려 조롱을 당함으로써 가혹한 정신적, 영적 고통까지 받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욥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의 최정점에 놓여 있었다.

 

묵상 및 적용 : 가장 큰 유혹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을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도록 한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였다.

     이처럼 사단은 항상 가장 가까운 자를 통해 믿는 자들을 시험한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말하는 자가 누구인가보다는 그 말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시말해 언제든 판단의 초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16:22-23; 21: 10-14)

묵상 및 적용 : 시련 가운데서 가장 큰 시련은 시련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시련을 하나님의

    저주로 여기는 주변의 시선이다. 즉 시련 당하는 자를 향해 까닭 없는 고통이 없다고 말하면서 정죄하고 조롱하는 것이다.

    이같은 태도는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판단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나타난 현상만으로 고통당하는 자를 정죄함으로써

    그 영혼을 파멸케 하는 엄청난 죄악이다. (27:38-40)

3) 두 번째 재난에 대한 욥의 반응. (10)

욥은 자기 몸에 닥친 고통과 아내의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았다. (10)

"어리석다"는 말은 마음과 정신이 어두워지고 타락함으로써 불경건하고 죄악된 상태를 의미.

    성경에서 ''(혹은 불경건)'어리석음'동의어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욥은 아내가 자신에게 한 말을 불경한 죄악의 말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어지는

    욥의 신앙 고백은 사단의 악한 의도를 단번에 무산시키는 동시에 그의 순전함을 확실히 선포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 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그는 참으로 가혹한 시련을 당한 고통 중에서 지난 날의 큰 축복을 기억했다.

    그는 지금까지의 삶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임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있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때에 자기 삶에서 가장 축복된 시절을 기억하고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욥은 사단의 시험에 빠져들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첫 번째 재난의 결론과 똑같은 표현이 다시 반복된다. (1:22)

 

묵상 및 적용 : 시험을 이기는 강력한 무기 중 하나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기억과 감사이다.

     극심한 고통중에 있다고 해도 그 가운데서 지난날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기억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다.

     사단의 유혹의 시작은 믿는 자로 하여금 불만을 갖게 하고 불평을 터뜨리게 하는 것이다.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다면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된다.

           (5:20-21; 4:6-7; 3:15)

 

3. 욥을 위로하기 위해 방문한 세 친구들. (2:11-13)

이 책의 발단과 전개를 연결해 주는 본문은 욥의 세 친구들이 그를 방문함으로써 사건의 발단 부분(1:1-2:10)이 막을 내리고,

    욥과 그 친구들 사이에 본격적인 긴 변론(3:1~37:24)이 펼쳐지게 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욥이 큰 재앙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세 친구들은 날을 잡아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러나 직접 목격한 욥의 상태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비참했기에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함께 7일 주야를 울었다.

1) 세 친구의 위로 방문. (11)

명예와 부를 누리고 많은 이들로부터 존귀한 자로 여김을 받던 욥에게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욥을 방문한 세 친구들은 특히 가까운 친구들이었을 것이다.

   고난에 처한 욥을 위로하기 위해 방문한 친구들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이다.

욥의 재난에 관한 소식을 들은 이 친구들은 서로 연락을 취하여 한 날을 정해 욥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욥과 상당히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욥이 두 번째로 재난을 당한 때와 그들이 욥을 방문한 시기 사이에는 오랜 세월이 경과된 듯하다.

    욥과 세 친구들의 변론 중에 욥이 벌써 "여러 달째" 육체의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7:3)

2) 새 친구의 애도와 침묵. (12-13)

함께 모여 욥이 살고 있는 우스 땅을 향해 오던 세 친구들은 끔찍한 질병을 않으며 재 위에 앉아 있는

    욥의 모습을 멀리서 보고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해버린 친구의 처지에

    "소리 질러 울며, 겉못을 찢음,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의 머리에 뿌림"과 같이 극도의 슬픔을 표시했다.

세 친구들의 이같은 행위는 고대 중근동의 사람들이 큰 슬픔을 표현하는 통상적인 방식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충격을 대성통곡으로 표현하며, 스스로 비천하게 만듦으로써 애통한 마음을 나타냈다.

    이런 상태로 세 친구들은 칠일 칠야를 욥과 함께 앉아 그의 고난에 동참했다.

고대에서 "칠 주야"는 죽은 자를 위한 애도의 기간이다. 그러므로 욥의 친구들이 칠주야를 애도를 표했다는 것은

    당시 욥의 상태가 거의 죽은 자를 방불케 할 만큼 비참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묵상 및 적용 : 고통에 처한 욥을 위로하기 위해 먼 길을 찾아온 그의 세 친구들이 보인 태도는 욥의 상황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짐작케 하는 동시에 고통에 처한 자에게 '위로'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위로의 말이라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 만큼의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말없이 슬픔과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 최상의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때로는 위로를 위한 말들이 오히려 고통 중에 있는 자에게 더 아픔을 줄 수도 있다.

그저 말없이 함께 아픔을 나누는 것밖에는 위로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섣부른 위로의 말들은 더 큰 고통이 된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결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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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