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기도의 장단점과 전통

                                                                                                  박 노 열 (고려수도원)

                                                                                                                                                    http://www.koabbey.com

 

 

 

항상, 언제나, 모든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언제나 거기에는 따르는 위험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관상기도의 장점을 간단히 소개하고 잠재하는 위험에 대한 이해와 전통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 영광”

 

 

1. 관상의 중요한 장점

 

관상의 전통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많은 장점들을 가져옵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만을 살펴보겠습니다.

 

1). “처음 사랑”(계 2:4 에베소 교회)의 불길에 지속적인 부채질을 한다.

이것은 관상의 가장 기본적인 공헌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너는 마음-사랑 밖에 가진 것이 없다.” 관상적 생활은 우리를 항상 우리의 처음으로 부르고, 항상 뿌리를 찾도록 하고, 항상 우리의 기초를 상기시켜 준다. 우리에게‘예수님과 거듭 거듭 거듭해서 사랑에 빠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처음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2). 지성적으로 믿는 종교를 넘어서도록 인도한다.

지성적 공식화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끈질기게 강조합니다.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은‘관상적인 사람은… 위험을 각오하고서 자신의 마음을 언어와 관념 너머의 사막에 내어 놓은 사람이다. 그 사막에서 우리는 벌거벗은 순수한 신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듯이, 그것들로 인해 우리의 마음을 옥죄이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기 위해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미완성을 포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강조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는 대개 믿음을 우리에게서 조금 멀리하려는 영속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 가까이하면 우리의 객관성과 시각을 잃을 수 있습니다.

 

3). 기도의 중심을 강조한다.

관상적인 사람들은 기도가 선한 것이거나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필수적인 것, 곧 제1순위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방교회의 은자(隱者) 테오판은 이 사실을 잘 표현하고 있다.“만일 기도가 올바르면 모든 것이 올바르다.”

하지만 관상의 전통은 기도의 중추적 성격만을 강조하는 것 이상을 제안한다. 기도를 바라보는 특이한 시각을 제안한다. 관상의 전통은 ①침묵을 강조하고 ②쉬지 않는 기도를 말한다.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의 임재를 실천하는 일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토머스 머튼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지속적으로 거하는 일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기 위하여 저는 중보기도 외에는 모든 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저는 그저 단순하게 사랑으로 저의 시선을 하나님께만 두고 삽니다. 그것은 실제적이고 끊임이 없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제 영혼의 은밀한 체험입니다.’

 

4).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고독을 강조한다.

고독은 개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역할에 한계가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의 역사를 써 가는 것은 나의 책임이다. 또한 당신도 마찬가지다. 다른 이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의 중요성을 확인하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또한 은혜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분량의 고독이 필요함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험하고 사막 같은 영성이다. 우리는 영혼의 황폐하고 메마른 땅을 탐험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 땅은 악몽 속에서 억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하려고 애쓰는 곳이다. 그 곳은 우리가 진정한 소망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 소망은 절망과 소망이 얼마나 비슷한지를 안 후에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 곳은 십자가가 잔혹이 아니라 긍휼을 의미하는 것이며,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의미하는 것임을 발견하는 곳이다. 이것들은 관상의 전통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내용의 일부입니다.

 

5). “성화의 길로 이끄는 도구”가 된다.

“관상이란 우리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시는 성령의 기도에 동의함으로써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이다.”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 안에서의 쉼”이라고 한다.

 

전통적으로 관상기도는 거룩한 독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듣고, 묵상하며, 그 결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가 깊어지면 관상의 상태(거룩한 독서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동방교회에서 주로 시행하는 “예수기도” 있으며, 우리가 말하는 관상기도에도 습득식 관상기도와 주부식 관상기도가 있습니다.

관상기도는 우리의 외적 내면적 욕구를 버리는 작업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의 결함도 고쳐야 한다. 이것을 정화라고 하는데 정화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은혜로 관상에 이르는 사람은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바로 이 정화의 과정이 성화의 과정이다. 관상기도는 내면의 훈련이다. 이 훈련을 통하여 성도님들의 내면의 변화를 일으킴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좋은 이미지를 창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외적이고 외면의 성장에 대한 프로그램이 많지만 내면의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이 없는 실정에서 이 관상기도는 성도의 특별한 성화의 길로 이끄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마 6:8,32). 하나님 앞에 조용히 나아가서 용기를 가지고 기도할 수 있는 근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의 핵심은 그 원리나 조직에 있지 않고 내적수련에 있으며, 내적수련의 중심은 관상기도입니다. 적어도 저의 경험으로는 그렇습니다. 한국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에 대해 알려 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깊게 체험하는 관상기도를 통하여 성화의 꼭대기로 힘차게 나아가길 소원합니다.

 

 

2. 잠재하는 위험에 대한 이해

 

관상의 전통의 모든 것들이 긍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모든 운동들에는 고난과 위험들이 있고, 관상기도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사전 경고를 받게 되면 우리는 미리 무장을 하고, 위험과 고난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위험들은 전통이 왜곡된 데서 나오는 것이지 전통의 본질적인 요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분리” 되는 경향이다.

이 분야에 대한 대부분의 책들을 수도사들이 저술했다는 사실은 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듭니다. 사막의 수도사들은 먹고사는 일이나, 가정을 돌보는 일이나, 친목회 모임에 참석하는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았는가. 오늘날 우리들 중에도 다른 사람들과 동떨어진 삶을 살며 관상적인 삶을 열정적으로 표현하라는 부르심을 받는 사람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들과 가정과 직장과 이웃들과 친구들과 지내는 중에 하나님과의 교제의 역사를 쌓아간다. 우리에게는 모든 일상의 삶이 기도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개발해야 하는 장소요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신성한 장소들’입니다.

교회 출석과 성경 읽기와 또 다른‘종교적’활동들이 우리의 전체 경험 중 일부를 차지하겠지만 진정한 성스러운 장소는 우리의 사무실이나 작업대, 우리 자녀들과 함께 지내는 놀이터, 배우자나 아니면(미혼이라면) 깊은 고독 가운데서 지내는 우리 집이나 아파트의 조용한 지성소입니다.

 

형태는 미묘하지만 동일한 위험은 관상적인 생활에 열정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일부 사람들은 현재의 사회 문제들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도와 경건이 우리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도구로 쓰여질 때, 우리는 이 비뚤어지고 일그러진 영성이 사기꾼임을 폭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은 깨어지고 피 흘리는 인류에 대한 관심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진정한 기도 생활은 우리를 타락한 세상의 고통과 아픔과 부정과 연결시켜 준다.

 

2). “지나친 금욕주의” 이다.

금욕주의(asceticism)는 단순히 말하면 ‘훈련’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영적인 삶 가운데서 훈련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이 운동에 지나치게 빠지듯 ‘영적 포식’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도 있다.

현대인들은 이런 유혹의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드물다. 오히려 우리는 이와는 반대의 유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위험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았다. 예를 들자면, 유명한 이집트인

‘기둥 성자’시므온 스틸리테스는 30년 동안 18미터 높이의 기둥에서 살았다. 그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기둥에 자신의 몸을 묶었다.‘밧줄이 그의 살을 파고들어 그 주위가 썩어 악취가 나고 구더기들이 우글거렸다. 시므온은 상처 부위에서 떨어진 구더기들을 주워 상처 위에 다시 놓으며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것을 먹으라.”고 벌레들에게 말했다.

유럽과 영국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지나친 금욕주의의 예들을 볼 수 있다. 모든 행태들이 이전 것에 비해 훨씬 더했다. 시아란 성자는 빵을 모래와 섞어 먹었다. 케빈 성자는 7년 동안을 서 있었다. 핀추아 성자는 7년 동안 철 족쇄로 겨드랑이를 채우고 공중에 매달려 지냈다. 이테 성자는 딱정벌레들이 그의 몸을 뜯어먹도록 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지나친 모습에 질겁을 한다. 물론 질겁할 일들이었다. 이와 같이 지나친 금욕주의와 과도한 운동은 같은 집착에서 비롯된 극과 극이다.

금욕적인 실행의 진정한 목적과 올바른 위치를 이해함으로써 지나친 금욕주의를 피할 수 있다. 영적인 삶에서의 훈련을 통해 올바르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단지 금식을 위해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기는 잔치를 배우기 위해 금식하는 것이다. 영적인 삶의 훈련들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영원히 즐기는 것이다. 목적은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 :17). 목적은 자유롭게 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과의 즐겁고 유쾌한 사랑 관계이다.

 

3). “반 지성주의 경향” 이다.

믿음을 명료하게 표현하려는 지적인 노력의 가치를 감소시키려는 경향이다. 이것은 때로 반 지성주의에 가까워지게(혹은 적대심으로 빠져 들게) 된다. 이런 경향을 확고한 신학에서 벗어난 여러 가지 신비주의 종파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이 전통에 충실한 정통 작가들도 마음 - 믿음을 강조하려다가 고의는 아니지만 이 문제에 한 몫을 더하게 된다.

 

왜 이런 위험이 나타났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우리들은 모두 의지를 끌어들이지 못하거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차갑고 둔감한 신학을 보아 왔습니다. 하지만 생명이 없는 지성주의를 바로잡는다고 해서 올바른 합리와 명확한 생각의 결여를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지성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이 둘은 분리해서는 안 된다. 이 위험은 많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4). “믿음의 공동체를 무시” 하는 경향이다.

많은 관상적인 이들은 사랑이 가득하고 양육하는 책임을 지는 모범을 보일 의도를 가진 공동체들에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의 가장 큰 강점은 심각한 약점이 될 잠재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관상적인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고독을 강조하지만, 우리가 절대적으로 귀 기울여야 할 그 메시지가 특히 서구 문화에 물들어진 우리들은‘하나님과 나’만을 생각하는 개인주의로 인도될 수 있습니다. 특정 신비주의적 표현들, 특히 반(反)제도적 정신에 물든 것들은 이 위험에 빠지기 쉽다. 때로는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반 지성주의와 연결되어, 사람들이 과거에 활발했던 신학 저술들을 외면하게 만든다. 그 결과는, 빈번하게 무지한 이단을 낳는 교리적 순진함이다.

 

우리에게 관계가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 때로 엘리야나 세례 요한을 부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예외는 규칙을 증명해 줄 뿐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의 믿음을 고립되어 행하지 않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몸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고 격려하고 자신의 통찰을 전해 주는 형제자매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과거의 천국의 공동체 -‘성도들의 친교’- 와 연결되어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공부하고, 그들의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용기에서 힘을 얻고, 그들의 실수를 통해 배우고, 그들의 가르침으로 인도받음으로써 우리는 능력을 받는다.

 

 

3. 관상의 전통(觀想의 傳統)

관상의 전통

주목할 인물 나사렛 예수 중요한 운동

(BC 4 - 약 AD 29)

사도 요한(1C)

 

 

 

이집트의 안토니우스(약 251-356)

 

 

사막의 수사와 수녀들(4C)

 

 

 

 

누르시아의 베네딕트(약 480-547)

 

 

베네딕토회 수도사(6C-현재)

 

 

 

 

 

1000

동방교회 (예수기도의 발전)

 

 

 

 

아시시의 클레어(약 1193-1253)

 

 

가난한 클레어 수녀회(13C-현재)

 

 

 

 

라도네주의 세르기우스(1314-1392)

 

 

공동생활 형제자매회(14-15C)

노리지의 줄리안(약 1342-1413)

 

 

 

 

 

 

무지의 구름(14C후반-15C),

부정의 기도

닐 소르스키(1433-1508)

 

 

모라비아주의 운동(16C-현재)

* 마틴 루터(1483-1546)

 

1517

 

종교개혁(츠빙글리: 1484-1531

존 칼빈 : 1509-1564)

로욜라의 이냐시오(1491?-1556)

 

 

예수회(제수잇) 가톨릭 최대교단. (역개혁=도덕주의․절대론.충성맹세)

아빌라의 테레사(1515-1582)

 

 

갈멜 수도회(개혁)

십자가의 요한(1542-1591)

 

 

 

 

 

 

로렌스 형제(1611-1691)

 

 

경건주의 운동(17C-현재)

귀용 부인(1648-1717)

 

 

 

 

 

토머스 머튼(1915-1968)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 줄리안

헨리 나우웬(1932-1996)

 

 

 

 

 

 

 

관상의 전통 : 누구나 할 수 있는 관상기도, 박노열, p.45.

 

안토니우스 : 관상기도의 모범

베네딕토 : 베네딕토 수도회. 수도원 규칙. 거룩한 독서.

동방교회 : 예수기도 발전

무지의 구름 : 부정의 기도(주부적 관상기도)

마틴루터 : 종교개혁

이냐시오 : 예수회. 습득적 관상기도

(역개혁 : 절대론. 도적주의. 충성맹세)

십자가의 요한 : 갈멜수도회 (개혁). 주부적 관상기도.

토미스 머턴 : 주부적 관상기도

 

우리 모두는 기도로 충만한 삶과 보다 풍성하고, 보다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를 갈망한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믿음에 대한 관상의 전통의 강물이 우리에게 하나님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는 길을 보여준다. 이 현실은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2010. 6. 28.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