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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프리칭  http://www.paa.co.kr/preaching/main.asp 

 

 

기도는 겸손한 순종을 요구 한다

 

 

주님! 글을 어디에서 시작해서 무엇을 써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도와주소서! 혹시라도 비방하지 말고, 티끌 같은 자랑을 하지 않도록 겸손하게 하소서! 아멘

나는 나를 자랑하고 싶고 두러내고 싶다. 내 속사람은 나를 겸손하라고 한다. 이것이 나의 현실이다. 필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수도원을 시작했고, 관상기도를 시작한 사람으로써의 내 자신임을 먼저 고백하면서 혹이라도 겸손하지 못한 부분이 있거든 내 밖의 사람이 한 짓으로 아시고 내 속사람이 한 일이 아니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 밖의 사람은 교회, 교단, 성도의 현실이나 저와 여러분은 똑같습니다. 그러기에 용서를 빕니다.

기도에 대해서 생각하려니 나는 언제 기도를 시작했는가? 되돌아보게 됩니다. 약 30여년전 중동 지역에서 근무할 때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외롭고 쓸쓸하면 캠프 밖으로 나가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며 묵상하든 때가 그립기도 합니다. 그리하고 있노라면 주님의 손길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귀국해서 신학교를 가게 되었고 2학년 때 산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조금씩 그리고 학교를 다니면서 3년간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삼각산이 발이 닳도록 올라 다녔습니다. 때로는 작정기도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금식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큰 아이가 고등학교 작은 아이가 중학교를 다닐 때 필자도 신학교를 다니자니 정말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포기하려고 몇 번을 하였습니다. 그 때마다 주님은 나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강도사 고시가 어렵다기에 고시는 보지만 떨어지면 그만두기로 하고 재시는 보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강도사 고시에 합격하고 바로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목사님들이야 다 이런 경험을 치루셨겠지만 저로서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이런 과정 중에 일어난 몇 가지를 간단히 설명하고자 먼저 긴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만 간증하고자합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강도사 고시를 포기하려고 할 때 삼각산을 오르며 작정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데로 한다고~~~.

마지막 날 아침 기도를 마칠 때 위에서 여인들의 왁자지껄 떠들며 내려오기에 내가 먼저 내려가려고 나오는데 어느 사이 내 앞에 이르러 내게 하는 말 “목사님!” “나는 목사가 아닙니다.” 그녀들은 이구동성으로 “내가보니 목사님인데요!” 얼른 내려오다가 너무 조용해서 뒤돌아보니 사람들이 없어졌습니다. 불과 10m도 내려오지 않았는데, 이상해서 주위를 돌아보아도 사람이 내려갈 만한 길은 없었습니다. 되돌아갔을까 하고 위로 올라가보아도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유난히도 말고 청명한 음색의 여인들이 어디로 사라졌을까? 하늘보고 땅을 보고 찾아보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가끔 사건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개척되었으나 사람이 오지 않고 전도를 나가도 시원치 않고 다른 사람들의 말대로 나도 교회 성장에 눈이 빨개졌습니다. 그래서 신학교 다닐 때부터 제자훈련에 관심이 많아서 제자훈련을 받은 것을 실천하려는데 사람이 있어야 제자훈련을 하지! 그래서 40일 금식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때는 40일 금식을 세 번째 할 때의 일입니다. 주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천명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눈앞의 일인 줄 알고 기뻐하며 금식을 마치고 교회로 돌아와서 열심히 하였습니다만 수년이 지나도 등록하는 성도가 한쪽 손으로 헤아리고 남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해합니다. 관상기도를 주로 전하고 실천하려는 홈의 회원이 지금 약 칠백명이 되니 곧 천명이 될 것입니다. 결국 20년 후에 일어날 일을 필자는 당시에 일어날 일이 안 일어나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성장을 위해서 이곳저곳을 쫓아다니기도 했습니다. 그 때 필자가 제일 보기 싫었든 것은 어느 교회버스였습니다. 필자가 개척한 교회 입구에 매주일 아침 교회 버스를 세워놓고 기다리니 도로에 있는 버스를 비켜라 할 수도 없고 화가 나서 주일 아침은 지상으로 올라가지 않았든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하필이면 개척교회 입구에~~~~

그래서 분이나 더 더욱 성장을 위해 이런일 저런일 해 보았습니다. 제자훈련, 그 이후에 종말론을 배우러 다녔습니다. 종말론을 하는 교회가 성장했지요. 하다가 보니 적어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영성훈련이 유행할 때였습니다. 저도 시류에 따라 병고치고 귀신 쫓으면 교회가 성장 할 줄 알았습니다. 큰 교회와 같이 어떤 프로그램을 도입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기에 수년을 쫓아다니며 배웠습니다. 거기서 쓰러지는 일, 입신하는 일들을 보고 배웠습니다. 귀신을 쫓는 일도 배웠습니다. 실제로 교회에서 그런 사람을 몇 명 치료해 보았습니다. 그들이 병 고침을 받고서는 모두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저의 짐작으로는 자존심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도와 금식 외에는 교회 성장 할 일이 없다는 필자의 생각에 기도와 금식을 계속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기도할 때 일어난 일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금식 기도할 때 일어난 일들 중 첫 번째 금식 기도 때, 기도 중 먹음직스러운 큰 밥상이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예수이름으로 물러가라” 했더니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40일 금식을 일곱 차례 하여도 배고파 허덕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개척시작하고 목사 안수 받은 직후에 이 몸을 주께 드린다는 의미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때 위에서 말한 천명을 주겠다했습니다.

그리고 산기도를 작정했는데(그냥 기도해 보니 이리저리 마음이 약해져서) 40일 기도를 마칠 때쯤 어느 여름밤이었습니다. 전과같이 장마 때라 비 맞지 않으려고 비니루를 덮어서고 서서기도를 하는데 어느 사이에 아침이 되었습니다. 아침이면 항상 잠에서 깨어나듯 의식이 돌아옵니다. 내려오면서 보니 길도 끊어졌고, 계곡 물이 콸콸 내려오고 좀 이상했습니다. 그래 집에 왔더니 집사람이 화가 나서 난리였습니다. 밤새 뭣하고 이제 오느냐고요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화가 나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고 따졌습니다. 알 턱이 없지오. 왜 그러냐고 다시 물으니 텔레비전을 보랍니다. 뉴스가 계속되는데 간밤에 일어난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밤새껏 난리를 했답니다. 사라호 이후에 가장 큰 태풍이라고 했습니다. 서울시에 곳곳에 전기가 끊어지고 전주가 넘어지고 통신선이 끊어졌고 어디가 무너지고 붕괴되고.... 계속됩니다. 나는 참 이상했습니다. 마치 귀신에게라도 홀렸나 하고 자신을 꼬집어 모았습니다만 분명히 현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산 정상부분의 바위 위에 서 있었습니다. 정말로 천둥소리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번갯빛도 보지 못했습니다. 내 옷은 뽀송뽀송합니다. 내 신발도 젖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불면 너무 시끄러운 비니루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신비스러운 일들이 저에게 여러번 있었으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신비주의에 빠졌다거나 헛것을 보았다거나 거짓말이라고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혼자만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내가 신비에 빠졌는가? 하고 마음 속에만 큰 비밀로 품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일에 대해 알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말 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함께 하셨고 내 귀와 눈 모두를 막으셨다고 아니 덮으셨다고 말하겠습니다. 이상한 세 여인들이 천사였다고 당당히 말합니다. 주님 찬송합니다.

다시 돌아가서 관상기도를 하게 된 이유를 밝혀야 겠습니다. 교회성장을 위해 발버둥 칠 때 영성훈련을 오래 했습니다. 그 때 가르치시는 분의 책을 보면 기도의 종류 중에 관상기도라는 것이 포함 되어 있어서 질문 했습니다. 이런저런 설명이 잘 안되니 기도 중에 최고 좋은 기도인데 자기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내가 찾아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옛 종로서적 등 서점을 다니면서 관상기도를 찾았으나 그러한 내용의 글을 찾지 못하고 청계천 고서점으로 찾아가서 뒤지어 보았으나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 궁금증은 늘어나고 최고 좋은 기도라면 나도 해 보아야겠기에 관상기도를 알려고 무척 애를 썻습니다. 몇몇 목사님들께 물어 보아도 관상기도가 뭐냐고 핀잔을 주기만 했습니다. 그 즈음에 필자도 인터넷을 가입했습니다. 그리고 관상기도하고 찾았더니 주루룩 쏟아져 나오는데 나는 참으로 인터넷이 신기하고 좋았습니다. 수많은 책들을 다 뽑아보니 8~90권이 되었습니다. 모두 가톨릭쪽이라 조금은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가톨릭이라도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많은 책 다 구매할 수는 없고 이 중에는 좋은 책도 나쁜 책도 있을 터이니 내게 책 다섯권만 선택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구매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지금 보아도 좋은 책들이었습니다. 주께서 인도하셨습니다. 그 책을 읽고 보니 관상기도가 어슴프레 이해됐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책들을 하나씩 구입해서 읽기 시작해서 약 80권의 책을 읽고나니 관상기도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지난날의 내가 신비주의에 빠질까 걱정하고 남에게 욕먹을까 두려워하든 일들이 다 정상이라는 것이 확인 되었고, 그것들이 바로 관상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관상기도에 대해 전연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인도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약 200권의 책을 가지고 있지만 요즈음은 다 읽지 않습니다. 대충 넘겨보면 눈에 들어오니까요. 그러나 어떤 책은 일일이 꼼꼼히 챙겨 읽기도 합니다만 시력이 나빠지고 몸이 피곤해서 많이 읽지 못합니다.

저의 목회에서 수도원을 시작한 이유도 말해야 겠습니다. 2000년에 장래를 위해 계획을 세울 때 2007년까지의 설교 계획만 세우고 2008년은 은퇴해서 수도원을 열겠다고 계획하고 “주님의 뜻이면 그리되게 하소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몇 번 수도원을 가기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만 실패했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나 봅니다. 그 동안 “수도원 같은 교회, 수사 같은 성도” 라는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며 목회를 했습니다만 뜻밖의 일이 생겼습니다. 2008년 1월 우리교회의 나아갈 길에 대해서 의논하고 3개월 정도 기도한 후에 결정하자고 했습니다. 기도하며 고심하든 결과 이때가 수도원을 열어야 할 때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2008년 4월 고난 주일에 교회 해산을 발표했습니다. 각자가 가까운 교회로 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수도원을 하겠다고 하고 다음주일은 부활주일이니 각자가 정한 교회로 가서 부활의 은총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리하여 2008년 5월 1일부터 고려수도원으로 개명하고 지금까지 수도하고 있습니다. 고려수도원에서는 매월 첫 주일이 지난 월요일 기초과정을, 매주 목요일은 심화과정을 그리고 관상아카데미를 통하여 지도자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관상기도에 대한 자료로서 “관상기도”라는 자료집을 출판했고 지난해(2009년)는 우리 수도원에서 사용하는 교제를 보완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관상기도”를 출판하여 지금 교보문고 외 대형기독서점에서 판매되고 있습니다.

위에서 중단 된 부분을 이어가겠습니다. 저는 교회성장을 위해서 초기부터 교회에서 14~15년을 교회 강단에서 자면서 기도해 왔습니다. 그러든 중 어느 날 강단에서 울부짖으며 기도하는데 누군가가 아멘. 아멘 하는 데 그 음성이 언젠가 들었던 음성같이 말고 깨끗하고 옥구슬이 굴러가는 소리같이 이 귀로 듣는 것보다 더 똑똑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음성은 내가 산에서 기도할 때 만났던 새 천사의 음성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신기해서 눈을 떠 보았습니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주위에 사람이 있나 살펴보았으나 사람의 그림자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 다시 기도를 이어가는데 역시 아멘, 아멘 합니다. 나는 천사의 소리로 알고 너무 기뻤습니다. 그리고 몇일이 지난 후에 새벽예배를 마치고 기도를 하는데 교회입구에 들것을 들고 조그마한 사람들(마귀의 사자)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내 앞으로 오다가는 화장실 입구의 자리로 가더니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앉으시는 집사님 댁에 혹시나 하고 전화를 했더니 남편이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했답니다. 심방을 하고 왔는데 다음날 소천하셨지오.

이런 가운데 저는 교회가 성장되지 않아서 주님께 따져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주님 얼굴 좀 내밀어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내가 주님 만나서 목사가 되라고 할 때는 언제이고 교회를 세우고 나니 교회는 텅비어 있는데 내가 정말 목회를 계속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 접어야 하는지 따져보기로 하고 수년간 졸랐습니다. 그리고 관상기도를 하면서도, 주님의 얼굴을 대하고 말하고 싶어서 기도했는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전과 같이 방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오매불망 주님이 나타나셨건만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두 손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고 저는 아무 말 못하고 울기만 했습니다.

이제 수도원을 개원해 놓고 수도원 이전에 교회에서 진행하든 관상기도 수도를 계속했습니다. 지금부터 약 38개월 전에 관상기도 기초과정을 마련하고 함께 수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개척교회를 할 때는 항상 돈에 쪼달려 마음 아파해 왔는데 교회를 해산하고 수도원을 개원하고 부터는 돈 걱정을 들었습니다. 수백만원을 드려서 시설하려고 하면 돈이 생겼습니다.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 채워주셨습니다. 수도원에서 수도하는 모든 이에게 점심을 무료로 대접하고 교제를 재공하고 모든 것은 무료로 함에도 불구하고 돈이 부족하여 하지 못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처음에 교회를 해산하고 굶어죽을 것이 두려워 마음은 원했지만 선듯 할 수가 없었는데 날이 차니 두려움이 사라진 듯합니다. 주님 뜻을 받들어 수도원을 열었드니 돈 걱정하지 않아 행복합니다. 저는 평소에도 시찰이 모이거나 동료가 모이면 나이 60이 되면 목회를 그만두고 수도원을 하겠다고 공언해 왔는데 그 꿈이 완성은 아니지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힘이 들어도 저는 이 일이 너무 좋습니다. 아마 지금 큰 교회 오라해도 안갈 것입니다(오라는 곳도 없겠지만). 혹 강의를 하라면 몰라도......

저는 생각합니다. 기도는 무섭다. 기도의 한 마디의 말은 꼭 이루어진다. 다만 우리가 급해서 안 이루어지는 줄로 알지만 주님의 때에 주께서 주님의 방법으로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 수도원에서 관상기도를 가르치는 장님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내가 관상기도를 하는 중에 일어난 일 몇 가지를 소개하려 합니다.

저는 2002년 5월 인터넷에서 재가수도원을 세우고 고려수도원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수도원을 세워주시기를 바라고 기도했습니다. 몇 년 전에 기도하는 시간에(알람시계를 한 시간에 맞추고 기도함)이라서 기도를 시작하면 눈물이 쏟아집니다. 마치 마른 날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그 눈물이 기도가 끝나는 시간이 되면 멈춥니다. 이러기를 수개월 지속되었습니다. 그것이 혹 눈에 이상이 있나하고 병원을 가보았지만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왜 그럴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기도 시간에 이것은 「“내 안에서 한 없이 탄식하며 간구하시는 성령님의 눈물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라 “아! 그렇구나. 주님 감사합니다.”하는 그 순간 눈물이 그치고 지금까지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내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나 때문에 이 처럼 성령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도록 하는 나쁜자로다. 주님은 그 처럼 위로 해 주실 뿐 아니라 하나 되어 주십니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저와 하나 되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는 목사님들로부터 관상기도는 어렵고, 모든 것을 버리려면 수도원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인천의 어느 목사님은 5년간 관상기도를 했는데 아내를 버릴려고 아무리 생각해도 못버리겠고, 아이들을 고아원 보낼 일을 생각하니 도저히 할 수 없고, 교회도 떠날 수가 없어 관상기도를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절대로 관상기도 하지 말라고 한다는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사로 부르신 것 같이 수도원에 들어가서 정주하며 수도할 사람은 그리 부르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리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즉 생활 가운데서 수도하여 관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진정한 금욕주의는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세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능들을 활용하는 것을 배우고 세상의 좋은 것들을 이기심의 표현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여 이것들을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금욕은 우리 인간 발달 단계에 있는 선한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각 수준에서의 진정한 가치를 다음수준으로 융합해 가는 것입니다. 융합이란 경험을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과의 관계성을 새로운 시점에서 바라보면서 그 이전에 가졌던 모든 것을 합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융합의 형태는 정신 자아적 의식 수준을 지나, 그 이상의 인간 발달단계까지 지속됩니다. 우리의 영적 여정을 시작할 때에 적절했던 좋은 것들이 의미 있는 가치를 가지지만, 우리가 좀 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나아갈 때에는 그것들을 떠나보내도록 요구합니다. 초기에 있었던 영적 위로, 위안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더 이상 의존하지 않게 되며 그 위안이 없어지더라도 그 이전에 했던 것처럼 반응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장에서 현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여 수덕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관상기도를 아무리 한다해도 그에 따라 겸손히 순종하여 수덕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면 통성기도나 관상기도나 아무것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 예를 들어 본다면 필자가 아는 어떤 사람은 텔레비전은 약15년 전 구매한 것 지금도 사용하는데 그는 8시 혹은 9시 뉴스 외에는 거의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문은 국민일보 하나만 봅니다. 국민일보를 보되 제목만 읽어보고 그기에 특별한 기사만 보고 그 외는 접어둡니다. 2~3년전 누가 차가 낡았으니(하긴 17년간 탄 프린스이니) 그랜저를 사라고 돈을 주었답니다. 그의 생각으로는 비경제적입니다. 그래서 SM5(가스사용)를 구매했답니다. 지난해 누가 백화점에서 구매하라고 양복 값을 주었는데, 가보니 너무 비싸고, 도깨비시장에 가보니 너무 싸지만 마음에 들지 않고 해서 동네 매장에 가서 좋은 것으로 골라보니 백화점에서 한 벌 구매할 것으로 다섯벌을 구매할 수 있는 가격이라서 동네에서 구매했었는데 아주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러한 것을 단순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었으므로 모든 것이 이처럼 수덕적으로 사는가하면 그렇지는 못합니다. 앞으로 점점 그리 되어갈 줄 압니다. 그가 주님과의 합일이 깊어질수록 더 더욱 수덕적인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수덕적 삶 혹은 단순한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말하려는 의도뿐입니다. 수많은 삶 중에 한두가지 실천한 것뿐이니 자랑꺼리가 못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현제의 일터에서 자기 가정에서 교회에서 수덕적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입니다. 속담에 “스님이 고기 맛을 보면 빈데도 안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누구라도 정주 수도원에 들어가서 살아가 보십시오. 어느 정도까지는 정화가 되고 욕(慾)을 벌릴 수 있겠지만 그곳에서 안보니까 그렇지 어쩌다 도시로 내려오면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자기는 마치 원시인 같아 보이면서 갈등을 하게 되고 마침내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정주 수도원에서 수도하시는 것보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교회에서 하는 것이 어렵기는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그런 은사를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에는 베드로가, 이방에는 바울이 있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 되어 주시면 이런 경험도 하실 수가 있답니다. 탈혼, 혹은 이탈 이라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사모하지는 마십시오. 고차원적인 수덕생활을 하며 관상적인 삶을 살아갈 때에 주께서 그런 은사를 베푸시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차원에는 아직 꿈과 같습니다만,

주님의 은총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가보았는데 그렇게도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죽음의 행복이라고 합니다. 간증하면 2008년 8월 11일 밤 1시간의 기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자 곧 온몸이 얼어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의식은 전과 똑 같은데 몸이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갑자기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일어나려고 한동안 발버둥치다가 보니 어느 순간에 일어나졌습니다. 일어나 보니 방안은 새벽같이 훤하고, 죽는다는 것이 두렵거나 하지 않고 마음이 너무 평안했습니다. 시계를 보니 불과 11시를 조금 지났습니다. 그래서 다시 누웠습니다. 눕자마자 또다시 몸이 굳어 오는데 처음에는 냉동 생선같이 얼어오더니 이번에는 몸이 돌같이 굳어 옵니다. 이리 저리 움직이려고 해 보아도 움직이지 않았고, 마음으로 이제는 참으로 죽는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내 마음에 강같은 평화가 떠오릅니다. 이왕 죽을 것인데 안타까운 것이 있었습니다. 200여권이 되는 책과 논문, 기타 자료들을 그냥 버리기에 아깝고 컴퓨터에 수없이 많이 입력된 자료가 아까워서 유서라도 쓰고자 했더니 벌떡 일어나집니다. 몸이 가볍고 마치 날아갈 것같이 가벼웠습니다. 빨리 죽어야 하기 때문에 컴을 켜서 기록하기는 시간이 없어서 그냥 A4용지 한 장을 꺼내어 볼펜으로 유서를 쓰는데 손이 굳어서 글이 되지 않습니다. 손이 잘 움직여 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적었습니다. 그런데 왠일인지 쓰고 글을 읽어보니 평소에 필적 그대로입니다. 내용은 수도원은 누구에게 맡기고, 관상기도 책과 자료들을 누구에게 주고 컴퓨터는 누구에게 주고, ....... 아이들에게는 줄 것이 없어 미안하구나! 내가 천국서 기도해주마. 이것이 유언이었답니다. 그리고는 너무 행복해서 내 죽은 후에 모습이 추하지 않길 바라서 샤워는 했으니 옷을 갈아입고, 이불을 바로 펴고 그 속으로 죽으러 들어갔습니다. 아! 이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은데... 1분, 2분, 5분 이 지나도 죽지 않고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보니 불을 켜지 않아도 방이 새벽같이 훤하고 맑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의식을 차리고 보니 무의식 중에 일어난 일들이었습니다. 나는 여기 살고 싶었습니다. 지금 그 방에서 이글을 쓰고 있습니다.

지금 이런 수덕적인 삶을 소개하는 것은 통성기도, 관상기도를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그의 삶이 수덕적이지 못하면 다시 말씀드려서 겸손한 순종이 없으면 다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내 밖의 사람이 변하지 않은 것이 기도를 안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그의 나라를 구하지 않고 내 뜻을 반영시키려하고, 그분에게 겸손하게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의 핵심은 그 원리나 조직에 있지 않고 내적수련에 있으며, 내적 수련의 중심은 관상기도라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내재하는 하나님과 합일하기를 원하시면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내재하신 하나님의 은혜 은총으로 관상을 이루고 관상적인 삶을 누리기를 원하신다면 모든 가면을 벗어버리십시요.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수도란 결국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과 하나님과의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세속적인 것을 내려놓고 수도의 세계로 입문하는 것은 균형을 잃는 것입니다. 길거리에서도 시장 바닥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없이 시장바닥에서도 살 수 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더라도 시장바닥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거기가 시장입니다. 생각은 어디를 가나 따라다닙니다. 수도원으로 가나 산으로 가나 어디를 가든지 나는 나 자신과 함께 갈 뿐입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도피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먼저 내면을 바꾸십시오. 외면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쉬운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면에 집중하십시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 6:33; 눅 12:31)

수도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정화의 단계입니다. 이는 외면을 정화, 감각의 정화입니다. 욕(慾)을 버려야 합니다. 결함도 버려야 합니다. 다음은 조명의 단계입니다. 이는 내면의 정화입니다. 이 두 과정을 한마디로 정화의 과정 다시 말해서 성화(조직신학에서)의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마치고 합일의 상태에 이르면 내면적인 것조차도 외면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변형일치 하는 관상가가 되면 자신의 마음조차도 외면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합일을 이루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이 나의 것이 됩니다.

차분히 현제 있는 곳에서 시간과 여유와 갈망을 가지고 시작하십시오. 직장에서 가정에서 삶의 터에서~~~~ 이는 주 예수께서 원하십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요 17:21)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11)

주님 글을 마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찬양합니다. 아멘.

 

2009. 12. 4.

고려수도원 박노열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