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십자가의 요한을 따른 관상의 실천,  서울가르멜 여자 수도원 역   (기쁜소식,  2011)  에서 발췌함


   

관상의 비밀, 이미지, 내용 



    

                                                               1. 관상의 비밀                        3

                                                               2. 관상의 이미지(心象)     13

                                                                3. 관상의 내용                        26

                                                                    

    



 

1. 관상의 비밀

 

      

앞선 장()들에서 우리는 관상의 실제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몇 가지 쟁점들을 고려해보았다. 이번 장에서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관상에 대한 가르침을 그의 관상의 비밀과 함께 공부하기 시작해보자.

요한은 어둔 밤 I권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감각의 수동적 밤에 대한 보고서"라고 제목 붙이고 "이 어두운 밤을 정화의 관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고 덧붙였다. 어둔 밤이란 말은 기억, 이성, 의지가 어둡고 비게 된다는 의미이다. , 실제 밤이 눈을 어둡고 보이지 않게 만들 듯, 어두운 관상도 우리의 기억, 이성, 의지를 어둡고 무능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감각의 수동적 어둔 밤이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주시기 시작하시지만 그전처럼 감성을 통하지 않고 순수 영을 통하여 (주시며)- 이제는 추리의 지속이 없는 순수관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 지성은 본래 감각 지식으로써만 자연스레 작용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존을 경험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연에서 앎의 방식에 문을 닫을 때에만 우리 자신을 신적 지식의 직접주입에 개방할 수 있다. 이것이 어둔 밤이 관상의 시초에 필요한 이유이며, 어둠과 비움이 십자가의 요한의 관상의 비밀이 되는 까닭이다.

기도의 일반적인 체험을 떠올려 보자. 여러 해 동안 묵상수련을 한 이후, 우리의 기도는 보다 단순해진다. 우리를 채우는 매력적인 생각이나 용기를 북돋워주는 자연발생적인 정감은 물론이고, 단순한 사랑으로 예수님 발치에 앉아있다는 느낌조차 없다. 명료한 생각도, 뚜렷한 형상도, 두드러진 열성도 없다. 아무것도 되지 않는 듯이 보이는 까닭에, 좌절감을 느끼고 혼란스러워지며, 기도 생활은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한 때에 깨닫지 못했던 것은, 우리의 기도 생활이 자연스럽게 발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우리의 체험은 추리의 지적 기도에서 더 정감적인 기도로, 더 단순한 기도로, 그러고는 고요하고 수동적인 기도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진보를 따르는 중이었다.

그런 어둡고 불만스런 기도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었다. 요한은 기도의 이 단계가 꼭 필요함을 우리가 알기를 바란다. 그런 기도단계 없이는 더 나아가지를 못한다. 요한 자신의 표현을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묵상으로부터) 훨씬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시어 하나님을‥‥ 보다 높은 법으로 (사랑)하도록 이끄신다. ‥‥그들이 한껏 하나님과의 사귐을 푸지게 갖도록..." 그의 요점은 이 어둔 밤이 지성을 모호함에로 인도하며 예전의 묵상 방법의 문을 닫아서, 하나님께서 영혼에게 새롭고 하늘스런 빛을 선사하시게 된다는 것이다.

 

(이 어두운 관상은) 우선 자연의 빛을 씻어 없애고 어두운 관상의 힘으로 당장 어둠 속에다 이성을 집어넣어야 한다. 이 어둠은 영혼이 오랫동안 제 나름으로 인식하느라 자리가 잡힌 그 습성을 없애고 그 대신 신스러운 빛을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된다.

 

거듭하여 요한은 관상을 수행하는 초보자들에게, 모든 감각적 상()과 이성적 사고와 추리묵상을 끊고, "일체 깨끗이 비워마음이 아주 홑지고 가난하게" 되어야 한다고 주의시킨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관상의 흘러듦을 방해하는 모든 자연적 묵상활동을 그침으로써 "영으로 가난하게" 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든 자연의 묵상 행위를 그치게 될 때에만 하나님께 단순히 개방되고 주의 깊고, 수용적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관상에 진보함에 따라, 감각과 지성은 더욱더 텅 비고 어둡고 공허하게 되어 -, 영적으로 가난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그 영혼 안에서 자유로이 일하실 수 있다.

왜 관상으로 대체시키기 위해서 그 모든 자연적 행위들을 그쳐야만 하는가? 그 이유는 관상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새롭고 초월적인 길이고, 자연의 앎의 길과는 상반되어 "한 주체 안에 양립할 수 없는 이율배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요한의 관상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그는 관상의 시초를 위한 필요조건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용어를 사용한다. 그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는 "어둔 밤"이다. 때로는 "영의 가난"이라고 한다. "영혼은 우선 비움과 영의 가난에 있어야 하고, 일체 자연적인 의존이나 위로, 이해받음 등에서 말끔 씻겨져야 한다. ‥‥ 그 비움은 실로 영의 가난이며‥‥ 그럼으로써 하나님과의 합일이 준비된다." 요한은 자주 "비움"에 대해 말한다. "영혼은 비워지고 가난해지고 모든 부분이 허탈해져서 바삭바삭하고‥‥ 어둠 속에 버려져 있어야한다." 그는 이런 종류의 용어들을 거의 같은 뜻으로 간주한다. "비움과 어둠과 모든 것을 벗음 또는 마음의 가난(이것들은 통틀어 하나임)" 그리고 이 용어들이 함께 다루어질 때에는 관상에 대한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의 열쇠가 된다. 이 모두가 십자가의 요한이 영성신학에 세운 큰 공헌, , 어둔 밤은 기도의 진보에서 과도기적인 부분이라는 면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훨씬 더 구체적으로 볼 수도 있다. 요한에게 어둔 밤은 주요한 개념이며, 관상의 시초에 대한 그의 가르침 전체의 주된 주제(leitmotif)이다. 그는 어둠, 텅 빔, 우리 자연적 기능의 가난이야말로 관상을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이 능력들은‥‥ 캄캄해져야 한다. ‥‥ 왜 그런가 하면‥‥ 일함에 있어‥‥ 그 저열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버림으로써 신적 및 초자연적인 것을 높고 훤칠하게 받고 느끼고 맛보도록 준비 조절되어야하기 때문인데 이러기 위해서는 묵은 인간이 먼저 죽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요한은, 비워짐이 그리고 자연적 추리에 의해 방해받지 않음이 하나님의 주입적 지식을 받기 위해 요구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텅 비고 걸림이 없는 영혼(하나님의 힘을 입으려면 이래야 되는 영혼)을 하나님께서는 어두운‥‥ 관상의 밤을 통하여 초자연적으로 가르치시니" 그는 이 어둔 밤이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짐을 우리가 알게 되기를 바란다.

 

이 복된 밤을 두고 여기 할 말이 더 있다면, 비록 영을 어둡게 할지라도 오직 일체의 사상에 대한 빛을 주고자 함이라는 것이다. ‥‥ 가난하게 만들어 자연의 모든 것과 정에서 비워놓음도‥‥ 저승과 이승의 일체 사상을 영묘하게 맛보고 즐기라 함이다.

 

결론적으로, 십자가의 요한은 일단 우리가 보통의 묵상의 모든 감각적 형상과 통상적인 추리묵상을 비울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 몫을 하시리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준다. "영혼이 모든 것을 끊고, 비워지고, 아무런 소유도 없는 상태에 이를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 편에서 영혼에게, 적어도 은밀히 고요히 당신을 교통하지 않으실 수 없다."

그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이 본성의 것을 떨어 버리자 그 안에는 하나님 것이 자연 초자연스럽게 내리는데, 빈 곳이란 응당 채워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 이 이미지는 진공포장 커피 캔에 친숙한 오늘날에 특히 설득력이 있다. 우리가 그 뚜껑에 구멍을 내자마자 쉭 소리와 함께 공기가 빨려 들어가 외부의 공기로 빈 공간이 채워진다. 비슷한 방식으로 우리 기도에서 모든 감각적 상, 지성적 생각을 비우자마자, 비로소 신적인 평화와 하나님 현존의 고요함이 초자연적으로 흘러들어 텅 빈 곳을 채우리니, "빈 곳이란 응당 채워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요한에게 관상의 비밀이며 열쇠는, 기도에서 모든 감각적인 상과 지성적인 생각이 비워지면, 하나님께서 은밀하고 고요하게나마 당신 자신을 직접 우리에게 교통하시리라는 점이다.

이 책 전체에서 사용할 접근 방법에 대해 여기서 덧붙여 보겠다. 이 책은 관상의 비밀을 설명하는데 있어 십자가의 요한의 방법을 따를 것이다. 그의 방법이란 이 비밀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때로 여러 각도와 여러 가지 역점으로 이 주제에 접근하는 것이다. 분명히, 그는 관상의 시초에 대한 골자를 세우기 위해 이런 식의 반복이 거의 필수적이라고 확신하는데, 왜냐하면 그런 어둠과 비움의 실행이 자연적인 방법인 묵상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관상에서 취해야 할 행동 방식에 대한 요한의 중대한 가르침과, 또한 이 어둔 밤 안에서 자신감을 가지라고 격려하는 그의 말들은 물론, 관상에 대한 그의 비밀을 이따금 반복하려 한다. 나 자신은 그의 반복되는 어떤 권고들을 그것들이 마침내 마음에 새겨질 때까지 재삼재사 읽고 기도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남은 몇 장()에서도 몇 번이고 거듭될 그런 반복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양해를 구한다. 바라건대, 그 결정적인 생각의 반복과 그것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여러 가지 강조점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그토록 이질적으로 보이는 이런 형태의 기도를 실천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깊이 깨닫게 해 줄 것이다.

 

요한의 관상의 세 가지 표징

 

요한이 가르멜의 산길 II권에서 영의 능동적 밤에 들었음을 알게 되는 세 가지 표징을 준다는 사실에 우선 주목하자. 이는 묵상이 더 어둡고 단순해지고 있을 때 우리가 묵상을 그치기 시작해도 되게끔 안내해 주는 표징들이다. "묵상하기를 어느 때 그쳐야 좋은가를 (이 세 가지 표가 보여준다)-영성인의 정신 상태로 보아 너무 일러도 더디어도 안 되니" 거기서 요한의 모든 논법은 능동적 묵상에서의 나중 단계를 다룬다.

그러나 요한이 어둔 밤 lI권에서 감각의 수동적 밤을 다루기 시작하면서는, 우리가 기도에서 정기적으로 관상을 실천해야 함을 알려주는 실제적 도움으로써 세 가지 표징을 제시한다. 이 두 벌의 표징들이 비슷해 보여도, 그것들은 서로 다른 경우와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는 감각의 수동적 밤을 표시하는 세 가지 표징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 세 가지 표징은 정확히 우리의 지금 주제인 관상의 시초에 초점을 둔다.

 

첫째는 하나님의 일들에서 맛과 위로를 얻지 못하는 것처럼 피조물에서도 아무런 낙을 못 얻는 그것이다. ‥‥ 하나님께서 어느 것에든 빠지거나 맛들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어떠한 감각의 쾌락도 참으로 전처럼 우리를 만족시켜 주지는 못하며, 우리는 아무것에서도 만족을 찾아내지 못하고, 더 이상 기도에서도 위로를 얻지 못함을 뜻한다. 요한이 여기서 내적 기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외적인 생활 전체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는 데에 주목하라.

 

둘째 표징은 이러하니, 하나님의 일에서 맛을 못 느끼더라도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서 퇴보함이라 믿고 행여 하나님을 잊을세라 애타게 찾음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관심이 전반적으로 하나님께 집중된다.

우리는 그분을 실망시켜드리지 않으려는 열망을 품고, 그분을 섬겨야 할 필요를 스스로 깨닫는다. 우리는 전에 민첩하게 척척해냈던 일이 지금의 메마르고 텅 빈 상태에서는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셋째 표징은 아무리 자기편에서 할 일을 다 해도 그전처럼 상상의 감각으로 묵상이나 추리를 도무지 할 수 없는 그것이다. ‥‥ 여기서부터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주시기 시작하시지만‥‥ 순수 영을 통하여 하시기 때문이다. ‥‥ 따라서 상상이나 환상 따위는 이 관상의 어느 상념에도 기댈 수가 없고 이를 바탕 삼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

 

여기에서 묵상의 어려움은 훨씬 커지며, 곧 단순한 기도의 준비단계보다 더 절대적인, 계속되는 무기력함이 있다. 묵상이라는 예전 방식들은 더 이상 소용이 없고, 반면 관상이라는 새 방식은 아주 차츰차츰 다가와 아주 희미하며 혼란을 준다. 우리는 자주 기도가 공허함을 느끼며, 우리의 개인적인 행동들은 줄어들어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이 새로운 지각은, 하나님께 대한 뭐라 표현할 길 없는 친밀함이다. 그 지각은 최대한 나쁘게 보면 공허일 뿐이고, 최대로 좋게 보았댔자 아주 가녀리고 경미해서 그 실재가 의심스럽다. 당분간은 더 가까워지지도 명확해지지도 않을 것 같은, 밤의 희미한 빛만이 있다. 우리는 자만심을 정말로 포기하고 하나님의 미묘한 업적에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기를 오로지 천천히 배울 따름이다.

 

 

기도를 위한 제안

 

요한복음에서, 위로자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다섯 가지 말씀이 우리를 주입된 관상으로 안내하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즉 요 14:16-17; 14:25-26; 15:26-27; 16:8-11; 16:12-13). 왜냐하면 위로자 성령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의 주된 핵심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리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와 함께 머무르시며, 모든 진리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이런 사실은 확실히 진리의 영의 주입된 지혜를 제외시키지 않는데, 그분은 우리가 배워 알 수 있는 가장 탁월하고 완전한 지식이시다. 주입된 지식은 오직 우리 안에 계시는 진리의 영에 의해서만 주어지게 된다. 위로자 성령의 이러한 모든 작용은 기도, 특별히 관상기도 동안에 활발하며 효과적이다. 매번 관상기도 시작에, 예수님의 이 놀랄만한 약속들을 기억하며 크나큰 확신으로 기도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

이 예수님의 약속들은 관상 중에 어두움, 나약, 메마름을 만나게 될 때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관상기도의 본질적 성령의 주입된 지혜에 수동적이고 의존적이기에, 바로 그 특성이 우리를 성령께 의탁하도록 이끈다. 십자가의 요한은 관상 시초의 이 기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모사하였다.

 

이 관상은 이성 및 다른 능력들의 작용이 캄캄한 채 비밀리에 진행된다. 말하자면 저 능력들이 미치지 못하므로 오직 성령께서 지혜를 영혼 안에 부어주시고 차려주시는 것으로서‥‥ 영혼은 알지도 못하고 어찌됨인지 깨닫지 못하기에 비밀이라 이른다.

 

  

 

    

2. 관상의 이미지(心象)

 

      

십자가의 요한의 저술들에 아주 친숙하지는 않은 이들은 그가 관상이라는 체험을 설명하기 위해 무수한 이미지와 비유들을, 게다가 시()를 계속 이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놀랄지도 모른다. 그는 그 체험이 말로 표현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아주 확신한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를 도와줄 다양한 이미지들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시를 계속 이용한다. 따라서, 여덟 연으로 이루어진 한 편의 시가 어둔 밤 두 권 뿐 아니라 가르멜의 산길 세 권의 근간을 이룬다. 또한 영적찬가 책 전체에서는 40개의 찬가 또는 시에 대해서 한 줄씩 보여주며 주해를 한다.

이 각각의 시들은, 십자가의 요한이 관상기도를 설명하는 데 계속하여 언급하는 비유와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이 시적 이미지들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추상적인 생각들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지성을 끌어들인다. "감각과 영의 어둔 밤" 그리고 "신부와 신랑" 같은 그의 어떤 비유들은 상당히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시적 이미지들은 자연 경관의 끝없는 나열을 망라하니, 나무와 덤불들, 언덕과 풀밭들, 골짜기와 바위굴들, 포도밭과 꽃들, 여우와 사자들, 상처 난 사슴과 흰 비둘기, 포도주와 과일 등이다. 예를 들어, 조명의 길에 대한 영적찬가 13-21노래, 그리고 합일의 길에 대한 제22-35노래를 보라. 이 노래들은 그런 시적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한마디로, 무수히 많은 관련된 이미지들은 관상이라는 형언할 수 없는 체험에 어느 정도 명확함과 호소력을 부여해준다.

그러면, 십자가의 요한의 방식을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관상을 시작하는 이들이 "하나님께 고요하고 사랑겨운 주의를 기울이게" 도와 줄 다양한 비유와 이미지들을 제시할 것이다. 우리는 유일하게 필요한 태도가 이 주의를 기울임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감성의 이 밤에서 영성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절대로 묵상이나 추리를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인데, 때가 이미 그럴 때가 아니라 영혼을 정적 속에 다 버려두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표면상으로는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시간만 낭비하는 것 같이 여길지라도‥‥ 염려를 놓고 다만 하나님 안에서 고요하고 사랑겨운 주의를 기울임에 만족하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맛보고 느끼려는 의지도 욕망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더 이상 감각적 상(), 상상력, 이성적 생각, 정감들을 이용해 묵상하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의 자연 능력들과 계속 싸우지 말고 "하나님께 고요하고 사랑겨운 주의를 기울이며" "쉼과 고요 속에 머물러야 한다." , 우리는 기도할 때 수동적이 되는 데에 만족해야 하고, 우리의 유일한 활동을 주의를 기울임이라는 두 낱말로 요약할 수 있다. 감각적으로 앎을 얻는 모든 방식을 쉬게 할 때에만, 이 직접 주입된, 하나님께 대한 체험이 들어설 자리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모든 노력은 이 하나님 현존의 새로운 체험에 대해 조용하고 평화로이,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상태로 머무르는 일이다. "영혼은 개별적인 다른 행위 없이 하나님께로 사랑겨운 단순한 집중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는 스스로는 작은 노력도 함이 없이‥‥ 아주 단순한 사랑겨운 시선으로 처신해야 한다."

다음에 오는 이미지들은 대체로 십자가의 요한의 것들이며, 특히 관상을 시작하는 이들을 위해서 적절하다. 우리는 요한이 진보된 관상과 관련지은 그런 이미지들이 아니라, 초기 관상을 설명하기 위해 선택한 것들만을 이용하려 한다.

 

1. 어둔 밤

 

십자가의 요한이 사용한 가장 유명한 비유는 어둔 밤의 비유이다. 어둔 밤 l권은 "감각의 수동적 밤에 대한 보고서"라고 불린다. 요한은 말한다. "이 어두운 밤을 정화의 관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의 말은 기억, 이성, 의지가 어둡고 비었다는 뜻이다. , 실제의 밤이 눈을 어둡고 보이지 않게 하듯이 어두운 관상도 우리의 기억, 이성, 의지를 어둡고 무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는 이를 감각의 수동적 어둔 밤이라 부르는데, 왜냐하면, "여기서부터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주시기 시작하시지만 그전처럼 감성을 통하여 하지 않고 순수 영을 통하여 하시기 때문이다. ‥‥ 이제는 추리의 지속이 없는 순수 관상을 하게 되어 하나님께서는 이 순수 관상의 길로 당신을 주시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 감각의 어둔 밤에 대한 체험을 자못 격려한다. 그는 묵상에 아주 무능한 이 상태가 관상의 시초를 위한 필요조건임을 알려주고자 한다.

 

감성의 밤 - 하나님께서 영혼을 감성의 생활에서 영성의 생활, 즉 묵상에서 관상으로 옮겨주셔서 영혼은 제 능력으로 하나님 일을 추리할 수조차 없게 되는-그러한 밤의 메마름.

 

말하자면, 우리 지성은 감각의 지식에 의해서만 자연스레 일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존을 체험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자연의 앎의 방식을 정지시켜야만 신적 지식의 직접적인 주입에 우리 자신을 열어놓게 된다. 이것이 어둔 밤이 관상의 시초에 필요한 까닭이며, 어둠과 비움이 십자가의 요한에게 관상의 보증이 되는 이유이다.

 

 

2. 문을 닫음

 

한 번 더, 기도의 일반적 체험을 떠올려보자. 여러 해 동안 묵상 수련을 한 이후, 우리의 기도는 더 단순해진다. 우리를 채우는 매력적인 생각 또는 용기를 북돋워주는 자연발생적인 정감은 물론이고, 단순한 사랑으로 예수님 발치에 앉아있다는 느낌조차 없다. 명료한 생각도, 뚜렷한 형상도, 두드러진 열성도 없다.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에, 좌절감을 느끼고 혼란스러워지며, 기도 생활은 어디론가 가버린 듯하고, 내면생활이 닫힌 문에,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고 느낀다. 그러한 때에 깨닫지 못했던 것은, 우리의 기도 생활이 자연스럽고 긍정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 체험은 추리의 지적 기도에서 더 정감적인 기도로, 더 단순한 기도로, 그러고는 고요하고 수동적인 기도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진보를 따르는 중이었다.

그렇게 어둡고 불만족스러운 기도는 닫힌 문이 아니었으며, 벽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요한은 이 단계의 기도가 대단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를 바라니, 그런 기도 없이 우리는 더 나아가지 못한다. 이는 실로 십자가의 요한이 그리스도교 영성에 미친 지대한 공헌이다.

"아마도 그리스도교가 십자가의 요한에게 진 가장 큰 빛은 그가 영혼의 어둔 밤이 무의미한 손실이 아니라‥‥ 기도가 발전하는 데 과도기적인 부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 점이다." 요한 자신의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보다 높은 법으로 (사랑)하도록 이끄신다. ‥‥ 추리와 감성의 급 낮은 공부를 벗어나‥‥ 그들이 한껏 하나님과의 사귐을 푸지게 갖도록 (하신다)" "여태까지 그들은‥‥ 연약하기 때문에 문이 닫혀지지 않았으나 이제는 어둠속에 버려져‥‥ 어찌할 바를 모르게된다. ‥‥ 이미 내관이 밤 속에 깊이 잠겨든지라"

말하자면, 이 어둔 밤이 우리 지성을 불확실함 안으로 이끌어가며 묵상이라는 이전의 우리의 방식으로 통하는 문을 받아버림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자유로이 새로운 신적 빛을 내려주시게 된다.

 

우선 자연의 빛을 씻어 없애고 어두운 관상의 힘으로 당장 어둠 속에다 이성을 집어넣어야 한다. 이 어둠은 영혼이 오랫동안 제 나름으로 인식하느라 자리가 잡힌 그 습성을 없애고 그 대신 신스러운 빛을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한다.

 

 

3. 팔에 안긴 젖먹이처럼

 

요한은 관상의 시초에 대해, 안겨 다니는 작은 아이라는 이미지를 하나 건넨다. 허나, 그는 그것을 반항이라는 구도 안에서 제시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자기를 맡기어 스스로를 돕는 대신, 철없는 짓과 반항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막아버린다. 그들은 어린이들과 같다. 어린이들을 어머니가 붙안고 가려 할 때, 발버둥을 치며 울어대면서 제 발로 제가 가겠다고 억지를 쓴다. 그 바람에 어머니도 걸음을 걷지 못하고 걷는대야 어린애의 걸음발타는 본새가 되어버린다.

 

요한은 우리가 저항하지 않고, 무력하고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태에 만족한 채, 평화롭고 조용하게 하나님 손 안에 머무르기를 바란다.

 

이러한 영혼은 제 모든 능력의 활동이 정지되는 것을 고려하지 말고, 도리어 빨리 꺼져버리는 것을 달갑게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리시는 (주입된)관상을 고요한 속에서 가장 풍요롭게 받게 되고‥‥ 관상이란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밀하고 평화롭고 사랑겨운 내리심인 까닭이다.

 

요한은 관상 시초의, 이 묵상할 힘이 없는 상태에 대해 몇 번이고 언급한다. "(하나님께서 영혼을) 묵상에서 관상으로 옮겨주셔서 영혼은 제 능력으로 하나님 일을 추리할 수조차 없게 된다‥‥" 이 무력함이 새로운 형태의 기도로 향하는 바로 그 길이기 때문에, 요한은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 팔에 안겨 가기를 바란다.

나는 팔에 안긴 젖먹이의 이 무력함을 설명할 다양한 이미지 제시하겠다. 아마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것들이 기도에 도움이 될 것이다. 1) 우리가 이 정원에 물을 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비록 묵상이라는 우물에서 양동이를 끌어 올리더라도 그 안에는 양식이 될 물이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입된 관상이라는 물을 보내신다. 2) 우리가 모든 노력을 다해도 직접적인 하나님 체험으로 통하는 이 문을 열지 못하며, 우리에게 가능한 일이란 대개 모든 장애물을 옆으로 치우는 정도이다. 3) 우리는 자신이 희박한 공기 속에 있음을 알게 되며, 우리에게는 숨을 쉬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영께서 주시는 순수한 산소만이 이 높은 곳에서 우리를 지탱시켜줄 터이다. 4) 우리는 물이라는 이 실체 안에, 키보다 훨씬 깊은 이곳에 있다. 떠다니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려가시도록 기다리는 일이 우리에게 가능한 전부이다

 

 

4. 빈 그릇

 

요한이 관상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제공하는 또 다른 이미지는 빈 그릇이다. ‥‥‥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질 때까지 영혼은 채워지기를 바라는 빈 그릇과 같고‥‥ 의지할 곳 없이 공중에 매달린 사람과 같다." 어둔 밤에, 그러한 텅 빔은 관상을 위해 필요한 준비가 된다.

 

우선 영혼이 마음의 진공과 청빈을 말끔히 씻어야 묵은 인간을 벗고, 진공 무위가 되고, 이 밤을 힘입어 얻어지는 저 새로운 진복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니 그것이 곧 하나님과의 합일의 상태다.

 

이 빈 그릇이라는 이미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몫을 하시리라는, 그의 가장 고무적인 확신으로 요한을 이끈다. "영혼이 모든 것을 끊고, 비워진‥‥ 상태에 이를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편에서 영혼에게, 적어도 은밀히 고요히 당신을 교통하지 않으실 수 없다." 또한, "영혼이 본성의 것을 떨어 버리자 그 안에는 하나님 것이 자연 초자연스럽게 내려지는데, 빈 곳이란 응당 채워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이미지는 우리 시대에 특별히 설득력이 있다. 우리는 진공포장 커피 캔에 익숙하다. 그것은 뚜껑에 구멍을 내자마자 쉭 소리와 함께 공기가 빨려 들어가 외부의 공기로 빈 공간이 채워진다. 비슷한 방식으로 영혼에서 자연적인 것들-감각 지식, 이미지들, 추리, 정감들-을 비워내자마자, 신적인 평화와 하나님 현존의 고요함이 초자연적으로 흘러들어 텅 빈 곳을 채우리니, "빈 곳이란 응당 채워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5. 늘 빛나는 태양

 

또 다른 요한의 비유는 하나님께서 늘 빛나는 태양과 같으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혼에게 당신을 교통해 주시기 위해 태양처럼 계신다. 태양이 첫 새벽부터 떠서 그대의 방을 두드리는 것을 보라. 창문을 열면 확실히 그대의 방에 들어오리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비어있는 영혼 안에 들어오시어 당신 보화로 채워주실 것이다."

말하자면, 태양이 높은 하늘에서 늘 빛나듯이, 일단 우리들의 영혼에서 소란함을 비워내고 먼지를 깨끗이 하면 그 안에 하나님께서 언제라도 빛을 낼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그는 설명한다.

 

은밀하고도 평화롭게 영혼 안에 사랑겨운 인식을 조금씩 부어주시는 주 대변인(代辯人)이신 하나님‥‥ 영혼은 개별적인 다른 행위 없이 하나님께로 사랑겨운 단순한 집중으로 만족해야 한다. ‥‥ 영혼은 스스로는 작은 노력도 함이 없이‥‥ 아주 단순하고 사랑겨운 시선으로 처신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완전히 현실적이 되도록 유의해야만 한다. 십자가의 요한에 따르면, 관상의 시초는 조명의 길, 즉 진보자들의 길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어둔 밤이며 그 안에서 지성과 의지라는 자연의 기능들은 어둡다. 그러나 모든 사고를 넘어서는 준수 체험적 직접 접촉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교통하기 시작하시어, 영혼은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조용하고 은밀하게" 하나님 그분을 체험하고 맛보게 된다. 초기에는, 하나님 체험이 가녀리고 경미할지도 모르며, 하나님께서는 신적인 빛으로 우리 지성을 건드리시거나 사랑으로 우리의 의지를 불태우시기도 하지만, 어떤 형태이든 그것은 "영혼에게 끼치는 하나님의 한 작용으로‥‥ 주부적 관상‥‥이라한다." 이것은 우리와의 준 체험적 직접 접촉 안에서 교통하시는, 태양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기 시작하는 방식이다. 제 때가되면, 하나님의 편안하고 사랑겨운 현존 덕분에, 이 체험은 우리 자신을 온통 더욱 밝히 비추어주고 전부 흡수해 버린다.

 

 

6. 주 대변인(代辯人), 안내자, 주동자

 

"관상에서 감각과 추리적 사고의 활동은 멈추고, 하나님 홀로‥‥ 고요한 영혼에‥‥ 은밀히 말씀하시며(관상의 시초에) 주 대변인이요 안내자이며 주동자는 성령이시며‥‥ 성령께서는 결코 영혼들 돌보기를 그치지 않으신다." 여기에서 요한은 자신의 이성적인 기능과 노력 대신에, 모든 관상기도에서 주 대변인, 안내자, 주동자이신 성령의 주입된 지혜에 의지하라고 우리에게 촉구한다. "(어두운 관상의 이 교통은) 이성 및 다른 능력들의 작용이 캄캄한 채 비밀리에 진행된다. 말하자면 저 능력들이 미치지 못하므로 오직 성령께서 ‥‥ 영혼 안에 부어주시고 차려주시는 것‥‥"

영혼에게 "주 대변인, 안내자, 주동자"이신 성령에 대한 언급은 예수님의 제자들 안의 성령의 작용에 대한 요한복음의 내용과 흡사하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시려 하던 때에, 그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그들과 언제나 함께 계실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4:18). "~내 아버지께서 ()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에게 가서 (거처)()와 함께 하리라"(14:23)이며, "진리의 영"(14:17)이신 그분은 "영원히 너희와 함께"(14:16) 계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16:13),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14:26). 여기서 예수님은 그분의 추종자들 안에 성령의 모든 작용을 위한 기초를 놓으신다. 이 성령께서는 그들 각 사람 안에서 개별적으로, 예수님의 새로운 현존으로서 영원히 그들과 함께 거처하신다. 성령의 영향은 일상적인 은총과 기도에 한정되지 않는다. 확실히 이 "모든 것""모든 진리"에서 주입된 관상은 제외되지 않는다.

이 예수님의 약속들이, 성령께서 "주 대변인, 안내자, 주동자"이시라는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과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를 보라.

주 대변인 :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다"(14:16-17).

안내자 :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14:26).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16:13).

주동자 : "성령께서 ‥‥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4:26). 그것을 수행하도록 너희를 도와주실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하나님의 영께서 스승이며 안내자라는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시리라는 사실을 확신시켜준다. 우리는 이제 평화로이 그리고 하나님의 친밀한 현존을 인식하며 머물러야만 한다. 이 관상기도에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영만이 주도하시어, 하나님 현존의 감각을 부어주시며 우리를 직접적인 지식과 하나님의 사랑에로 인도하신다.

 

 

요한의 이미지들로 기도하기

 

이는 관상의 시초에 요한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몇몇 이미지들이다. 영적찬가사랑의 산 불꽃에서의 시와 설명들은 또한 진보된 관상(합일의 길)을 위한 비유들을 한없이 제공한다. 원컨대, 이 장()에서 제시된 이미지들은 상상력을 자극하여 우리 지성을 관상에 도움이 되는 방식에 전념하도록 해줄 것이다. 이미지들 중 어느 것을 기도를 시작할 때 사용하여 기도에 집중하는 데 도움을 받게 되며, 또는 관상 안에서 사용하여, 우리 기분이 텅 비고 무력할지라도 성령의 힘 안에서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의 고요와 평화가‥‥ 차츰차츰 그러나 신속하게 영혼 안에 내려질 것이다‥‥ 모든 것(즉 안팎 모든 것)에서 너희 자신을 비우기를 배우라. 그제야 내가 하나님인 줄을 보고 알리라."


   

    

3. 관상의 내용

    

기도시간 동안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십자가의 요한은 상당히 명백하고 실제적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한 가지 곤란한 질문이 있다. 관상의 실제 내용은 무엇인가?감각적상, 정감, 상상과 추리들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부정이라는 방식으로 관상을 설명하는 일은 별도로 하고, 긍정으로는 어떻게 관상을 설명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이 새로운 형태의 기도 안에서 긍정적으로는 어떤 경험을 하는가? 나는 관상에서 하나님의 직접 주입의 네 가지 형태에 대한 십자가의 요한의 설명들로써, 가능한 가장 좋은 답변을 하려 한다. 그는 이 형태들을 특히 어둔 밤 l13장과 사랑의 산 불꽃, 셋째 노래 46-49에서 설명한다. 사랑의 산 불꽃에서 그의 가르침을 볼 때, 우리는 요한이 막 관상을 시작한 이들을 지도하는 영적 지도자들에게 여기서 권고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셋째노래 30-60항에서 요한은 한 가지 상황에 초점을 둔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젖떼기 시작하시고 관상의 상태에 놓으신다. 이제 이 상태에서는 하나님은 주 대변인(代辯人)이시고 영혼은 수동자이다." 그래서 이 부분의 인용은 우리의 논제인 관상의 시초에 아주 요긴하다.

첫 번째 형태는 준() 체헝적인 하나님과의 직접 접촉으로, 모든 사고를 뛰어넘는 그 안에서는 명확한 이성이나 사랑 없이 하나님 그 자신을 체험하고 맛보게 된다. "하나님은 영혼과 은밀하고도 고요하게 교통하신다."라고 요한은 확언한다. 토머스머튼은 관상을 이런 식으로 정의한다. "순수한 관상이란‥‥ 모든 사고를 뛰어넘는, 즉 개념들의 중재 없이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준 체험적인 접촉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희미하기는 하지만, 활동하며 그분의 현존을 보여주시기 시작하신다. 하나님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게 당신 자신을 우리 영혼에 부어주셔서 그분의 현존인식의 새로운 수준을 깨우쳐주신다.

두 번째 형태는 하나님께 대한 존경과 열망이며, 지성의 이해를 떠난, 의지 안의 끈질긴 사랑의 갈구이다. 우리의 의지의 자연적 작용은 지성이 이해하는 것만을 사랑할 수 있음이 사실인 반면, 관상 안에 하나님은 지성 안의 지식 없이도 영혼에 그분의 사랑을 직접 부어주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성을 비추어주시지 않고서도 사랑의 불로 접촉하시어 의지를 불붙여 주실 수 있다." 요한은 관상의 시초에 의지와 정감이 지성보다 더 자주 불타오른다고 설명한다. "지성 안에서 이해의 접촉을 느낌보다는 의지 안에서 사랑의 타오름의 접촉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세 번째 관상의 형태는 지성에 신비적 지식을 전달함이다. 이따금 하나님께서 지성을 신적 빛과 이해로 건드리시어, 이제 지성은 하나님께서 부어 주신 신적 예지로써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영혼을 은밀히 가르치시고 사랑의 완덕으로 길러주셔도 영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부적 관상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이따금 관상은 사랑의 실제 합일 없이 의지를 메마름 속에 버려둔 채 지성에 신비적 지식을 전달한다.

후에 사랑의 산 불꽃에서 요한은 적어둔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기능에는 안 하시면서 한 기능 안에만 당신을 교통해 주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인식이 사랑보다 더 느껴지고 어떤 때는 반대로 사랑이 이성보다 더 우세하다. 하나님은 이성을 비추어주시지 않으시고도 사랑의 불로 접촉하시어 의지를 불붙여주실 수 있고 어떤 때는 이성만 비추어져 의지는 사랑 없이 머물거나 아니면 의지만 사랑하고 이성은 빛이 없이 머문다."

이 단계에서 말하는 관상의 네 번째 형태는 지성과 의지에 함께 작용한다.

 

"때때로 이 관상은 이성과 의지 안에 동시에 작용하기도 하는데 아주 숭고하고 부드러이 그리고 강압적으로 영혼 안에 사랑을 불태우기도 한다. 이성이 정화되면 될수록 하나님과 일치되고 이성과 의지가 둘 다 정화되는 정도대로 하나님과의 일치의 질과 양은 더욱 더 완전하고 깊어진다."

 

이 네 가지 형태들은 초기 단계의 관상의 내용에 대해 얼마간의 감()을 익혀준다. 모든 관상에서 새로운 사적계시에 대해 말하지는 않으며, 우리는 신앙에 의해 계시 전체를 이미 안다는 사실을 여기에 적어두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활동들과 관상의 신비들에 관해서, 신학의 어떤 새로운 항목의 계시가 아니라, 더 가까운 친밀함속의 현존체험을 발견한다. 만일 우리가 관상기도의 모든 내용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과 사랑에 대한 주입된 인식이 이따금 따르는, 우리 내면 깊은 곳의 하나님 체험이다. 우리는 명료한 지성과 신학적 통찰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친밀하게 빨려듦을 추구한다. 관상의 시작 단계에서, 경험 그 자체는 보통 아주 미모하고 포착하기 어렵다. 그러나 일정 기간이 지나면 하나님을 체험하는 이 새로운 방식은 점차 어느 정도 명료해진다. 하나님은 이 길에서 우리의 능력과 충실함에 따라 당신의 빛을 더해 주실 뿐이다. 요한이 정의하였듯이, "관상이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은밀하고도 평화롭고 사랑겨운 내리심인 까닭이다. 그것은 사랑의 영안에서 영혼이 불타게 하는 것이다."

 

 

기도를 위한 제안

 

우리가 관상 안에서 개방되고, 주의 깊고, 수용적이 되는 한 가지 방법은 요한복음의 이 예수님 말씀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 보혜사‥‥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실 것이다"(14:16-18,26; 16:13).

 

주님, 당신이 사도들을 위해 계셨듯이, 당신의 성령께서 지금 저를 위해 계십니다. 당신의 성령이 지금 영원한 스승으로, 그리고 기도 안에서 당신을 따르는 데 안내자로 제 안에 계심을 저는 믿습니다. 저는 이 어둠 안에 쉬며 그분의 감도에 주의를 기울이는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렵니다. 저 혼자는 텅 비고 무력합니다. 그러나 지혜와 사랑의 성령께서 저의 보혜사요 안내자이시기에 저는 지극히 자신만만합니다. 성령께서 제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완전히 새로운 길에서 저를 비추시어 모든 진리에로 저를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상()들이나 추리라는 중개자 없이 하나님의 지식과 사랑에로 저를 이끄십니다. 성령과 함께, 저는 모든 자연의 사물에 대해 기꺼이 비워져, 모든 진리 안으로 계속 인도되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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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