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김남준,  "가톨릭사상사" Vol 29. (대구가톨릭 대학교, 2003). p.255-296

                * 학술논문.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학과 교수. 

수정 :  용어 일부 및 개정성경 등 일부는 수정 되었으며 (대부분은 원 저자의 글을 가급적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붉은색 부분 2곳은 미수정 되었습니다



완덕의 여정에 있어서

관상과 덕의 상호관계성

(예수의 데레사를 중심으로)

 

 

목 차

 

머리말                                                                                            3

I. 관상에 대한 일반적 고찰                                   5

   1.1. 관상의 정의

   1.2. 관상의 특징

   1.3. 완덕을 향한 여정에 있어서의 관상의 필요성

II. 덕과 관상의 상호관계성                                                   31

    2.1. 덕에서 관상으로

    2.2. 관상에서 덕으로

III. 관상의 궁극적인 목표와 효과                                      39

   3.1. 관상의 궁극적 목표

   3.2. 관상의 효과

나오는 말                                                                                       46

                                                                                                          48

 

 

 

머리말

 

1차 바티칸공의회는 순수하게 이성과 일치하여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말한 바가 있다(계시를 배제하여서). 그러나 창조의 첫 순간에서부터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 자신과 통교(교통)하도록 부르셨기 때문에 그분은 언제나 은총으로써 인간을 향하여 계셨고 또 은총으로 인간을 초자연적인 상태로 들어 높이셨다. 따라서 인간은 그의 존재의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에 대하여 순수히 자연적인 인식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할 문제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만 토론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하기 위하여 순수히 이성적 노력만으로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이 소 논문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 확실하다. 은총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는 기도를 든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분과의 일치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기도의 방법에 대하여 예수의 데레사는 우리의 좋은 스승이 되어 줄 것이다.

성녀 데레사는 기도의 왕도와 하나님과의 통교(교통)에 대하여 우리에게 가르첬다. 기도에 관한 그녀의 교의는 하나님을 향한 왕도이다. 다른 모든 길들은 오솔길이다. 그러나 이 오솔길들은 만일 이것이 우리를 큰길로 이끌지 않으면 아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들이 왕도로 돌아올 것을 바라신다. 이것은 기도이며 하나님과의 통교(교통)이며 내적 삶인 것이다. 이것이 교회박사인 대 데레사 성녀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만일 어떤 이가 아직도 관상보다 활동에다가 그 수위권을 부여한다면 데레사의 증언이 도움이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이들이 신비 수덕 신학으로 분류되는 신학의 어떤 분야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데레사 성녀의 자서전은 이것들을 직접적으로 논박하게 될 것이다. 만일 오늘날 사회갸 우주적인 폭력의 극치에서 살고 있다면 성녀의 책은 달콤한 부성적이고 약혼자의 말로써 자비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의미를 전해 줄 것이다.

 

한편 오늘날 많은 이들이 기도와 덕들에 대하여 말을 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기도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덕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을 한다. 가끔 우리들에겐 이러한 말들이 마치 관상과 덕 사이가 무관한 관계 또는 대립 관계에 놓여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둘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거나 아예 이 두 갸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비추어볼 때 예수의 테레사의 체험적인 신앙은 기도의 본질이 무엇이며 또 기도와 덕들 상호간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아는데 우리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테레사 성녀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기도와 덕들의 상호관계성, 구체적으로는 관상과 덕의 상호관계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I. 관상에 대한 일반적 고찰

 

1.1 관상의 정의

 

1.1.1. 일반적 정의

 

성 토마스는 관상생활은 일종의 안식이거나 쉼이라고 썼다(신학대전 11-11, 182; 1; 3).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도달하기를 갈망하고 그분에게 자신의 영혼을 희생제물로써 바치는(182, 2,ad 3) 영의 자유(182, 1 ad. 2)라고 썼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사랑 안에 그것의 원리와 목적을 갖는 것이다(180, 1; 7, c.e ad. 1)

하나님에 대한 관상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열망인데 이는 윤리덕들과 활동생활의 일과 비교할 때 어떤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덕들과 일들을 수단으로 하거나 규정들로 상아서 나아가야 되는 목적인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관상을 비활동으로 묘사한다(사랑의 불꽃, str. 3, v. 3). 그러나 성 토마스는 관상을 최 상위의 활동으로 기술한다(신학대전 IIa - IIae, q. 179 e 180).

또한 관상은 사랑의 지혜이다. 이는 성 요한이 말하기를 비밀스러운 지혜인데 그것은 사랑으로부터 영혼에 주입된 것이고 통교(교통)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에서 나오고 사랑의 진보에 따라서 성장하고 사랑을 통하여 실현되는 일치 안에서 그 완성이 이루어지는 사랑스럽고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집중인 것이다.

대 데레사는 관상에 대한 그녀의 책에서 거둠의 기도, 고요의 기도, 일치의 기도 등의 이름으로 기술된 기도의 단계와 상태들이 있다고 기술한다. 그녀의 의견으로는 이렇게 구분되는 신비적인 기도의 여러 단계들은 일종의 고리들을 만드는데 그 고리들은 지속적인 성장을 하고, 특히 관상적 영혼이 달려온 길의 여러 단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기도의 공통된 성격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어떤 활동의 형식을 인식하게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영혼은 성녀에 의하여 기술된 신비적인 기도들 사이의 첫 번째인 관상적인 거둠의 기도에서보다는 일치의 기도에서 더욱 더 잘 인식되는 것이다 (영혼의 성: 4, 3, 3: 영혼의 내밀한 곳에서 달콤한 거둠의 이 기도를 알아차리게 된다).

프리드리꼬 루이지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관상은 단순히 기도의 형태가 아니라 모든 것들의 뿌리이다. 그것은 신학적인 태도이며 기도하는 실재이다. 많은 신자들에게는 영적인 탄생과 영의 생활에의 탄생의 결정적인 순간인 것이다."

 

1.1.2. 습득적 관상과 주부적 관상

 

관상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하여 습득적 관상과 주부적 관상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어떤 이들은 관상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누고 또 어떤 이들은 이 두 가지로 나누지 않기도 한다. 먼저 이들 각자의 의견을 비교하고 데레사가 말하는 관상의 의미를 살펴보기로하자.

먼저 가톨릭 백과사전에서 설명하는 관상에 대하여 살펴보자. 많은 이들이 주부적 관상과 습득적인 관상에 대하여 말을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은 두 가지 종류의 관상을 활동적이고 수동적일 형태의 관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용어상의 큰 혼란이 있다. 즉 모든 관상 기도 심지어 가장 초보적인 관상까지 아니 묵상 자체까지도 은총의 도움이 없이 그리고 상존적이고 초자연적인 주부 없이 또 성령의 선물들의 활동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것들은 적어도 주입의 초보적인 단계에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정확히 학적으로 말해서 순수하게 습득적인 관상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또 순수하게 수동적인 관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 결혼의 최고의 높이에서조차도 은총의 격류 속에 인간의 기능들의 완전한 수동성이 주어지지도 않고 주어질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습득적 관상과 주부적 관상의 일반적인 정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습득적 관상은 지성적이고 애정적인 활동들과 단순화가 심리적인 법칙들의 상황을 통하여 은총에 의하여 도움을 받은 우리 자신의 활동으로 야기되는 관상 기도이다.

주부적 관상은 지성적이고 애정적인 활동들의 단순화가 영혼 안에서 신적인 활동으로 야기되는 관상 기도인데 그것은 심리적인 질서의 단순한 원인들이 야기 시킬지 모르는 모든 것들과 초자연적인 덕으로부터 유래된 우리들의 활동의 열매들, 이 모든 것들을 넘어서는 것이다.

 

 

1.2. 관상의 특성

 

1.2.1. 수동성

 

데레사 성녀가 겪은 주부적인 관상을 살펴보자, 데레사 성녀가 그녀의 신비적인 기도 초기에 대하여 말할 때마다 기본적으로 신적인 인격의 현존(임재),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나는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은총의 첫 이삭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맛보는 은총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내가 말한 그 방법으로 주님 곁에 머물도록 힘쓰고 있는 동안, 때로는 독서를 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하나님 현존(임재)의 내적 느낌이 일어나 하나님이 내 안에 와 계시거나 아니면 내가 하나님 안에 온전히 잠겨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이 은총은 현시의 한 종류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비신학 이라고 불리는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자서전: 10,1).

 

잠시 성녀 데레사가 끈질기게 지적한 기준을 살펴보자. 그녀는 초자연적인 기도들에 대한 정의를 하였다. 우리가 우리들의 노력이나 근면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 것을 초자연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이때는 만일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다면(이러한 호의를 베부시는 것) 보속이나 기도나 다른 여러 가지들을 억지로 하는 것은 전혀 유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참조: 자서전 14).

또 성녀는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 편에서 하는 수고는 아주 적은 것이므로 오래 계속되어도 피로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성은 여기서 퍽 고요히 활동합니다. 그래도 팔의 힘으로 우물에서 물을 길을 때보다 훨씬 많은 양의 물을 긷습니다. 이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눈물이 기분 좋게 흘러내립니다. 사람은 그것을 틀림없이 느끼나 결코 스스로 구한 것은 아닙니다"(자서전 14, 4).

 

데레사 성녀는 수동성, 경험, 내면성의 성격을 엄마가 입에 젖을 짜 줌으로써 힘들지 않게 젖을 빠는(완덕의 길: 31. 9) 어린 아기와 연결시킨다. 그리고 아울러 샘 위에 설치된 대야에 물이 조용하게 차게 되는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상의 물은 깊은 곳, 즉 영혼의 중심부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영혼의 성: 4, 2. 4-6). 의지의 더욱 깊은 곳에서 단맛을 즐기게 되는데(완덕의 길: 31, 10), 영혼은 이러한 만족감이 어떤 경로로 해서 오는지 또 어떤 형태인지 모르는 채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자서전: 14, 6).

따라서 참되고 고유한 관상기도에 대하여 말할 때 그것은 인간의 활동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오는 주부적인 것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영혼은 받게 되고 여러 단계로 경험을 한다. 이러한 데레사의 가르침은 언제나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다. 즉 이 권위는 영성신학자들이나 영혼의 지도자들이 많이 다루었던 그러한 것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다.

 

1.2.2. 현존(임재)

 

데레사의 관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그녀가 기도 초기부터 항상 소홀히 하지 않았던 현존(임재)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교리상으로는 하나님의 무소부재에 대하여 알려져 있지만 데레사에계 있어서 하나님의 현존(임재)은 단순히 교리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체험적인 것이다. 그것은 기도 초기부터 시작하여 신비적인 일치에 도달할 때까지 내내 그녀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쪽 현존(임재)하신 하나님과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되는가 하는 것이 관상의 목표였다. 데레사는 하나님의 현존(임재)에 대한 초기 체험을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초기에,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안에 실제로 계신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내 영혼에 있어서 이렇게 그윽한 친밀감을 느끼는 현존(임재)은 불가능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한편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내가 뚜렷이 깨쳤다고 생각되었던 바에 따르면 하나님은 진정 당신 친히 겨기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배움이 많지 못한 분들은 하나님은 은총으로써만 영혼 안에 계신다고 내게 일러 주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분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고민하고 있었던 무렵 영광스러운 성 도밍고회의 깊은 학식을 구비한 한 분의 수사가 나를 이 의혹에서 건져주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셨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어떻게 사귀시는가를 설명해 주셔서 나는 크게 위안을 받았습니다"(자서전: 18, 15).

 

모든 인간은 그분의 모상과 형상으로서 창조되었는데 그분의 거처가 된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통교(교통)와 대화에로 개방되었다. 창조주이시고 생명의 수여자이신 주님은 자기의 피조물들 안에 현존(임재)하시는데 이는 그 거처가 황폐해지고 인간 편에서의 무지와 사악함 때문에 거울이 어둠으로 덮여져서 그 모상이 변형되고 통교(교통)가 단절된 죄인 안에서조차 하나님은 거주하시는 것이다(참조, 영혼의 성: 1, 1-2).

이와 같이 관상기도에 있어서 두 번째의 특성은 그리스도의 현존(임재)이라고 하겠다. 사실 데레사의 모든 기도는 주님의 현존(임재)과 연결되어있다. 주님의 현존(임재)을 체험하고 현존(임재)하실 주님과 일치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그녀의 기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데레사는 그녀의 기도 방법은 대단히 단순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본질상 자기 가까이에 계시거나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그분께 말씀드리는 것이다. 이어서 이러한 표현의 정화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한마디로 데레사의 기도 수행 방법은 그녀 안에 계시는 선 자체이신 주넘을 현존(임재)시키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자서전: 4, 7). 데레사는 하나님을 찾기 위하여 그녀의 영혼의 심부를 향해 나아간다. 데레사의 모든 영성은 하나님과 완전하게 합일하기 위하여 혼흔 안에 현존(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움직임에 있는 것이다.

마침내 그녀는 영혼의 내밀한 곳에서 삼위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성녀는 이러한 경험을 아주 섬세한 필치로 서술하였다. 하나님을 향한 그녀의 여정의 어떤 순간에 주님은 그녀의 영혼의 중심 궁방에서 그녀에게 심위일체의 세 위격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그녀의 눈에서 비늘을 떼어 주신다. 여기에서 삼위는 그녀와 통교(교통)를 하고 말씀을 하기도 하신다 (참조, 영혼의 성: 7, 1, 6. Relazione: 16, 1571, 5, 29).

 

"이 궁실로 들어서게 된 영혼은 지성의 보임, 그 어떤 진리의 표상을 통하여 지성하신 삼위일체, 그 세 위 전부가 번쩍이는 구름처럼 먼저 그 정신을 불태우면서 나타나 보이십니댜. 세 위가 똑똑히 구별 지워져 보이시면, 영혼은 그 받은 묘한 인식으로 세 위가 다 하나의 실체, 하나의 앎,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심을 더 참될 수 없이 깨우치게 됩니다"(영혼의 성 : 7, 1, 6).

 

데레사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임재)의 경험은 최고의 정상에 도달할 때까지 성장하게 된다. "나는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모든 것이 그분 안에 있다는 것을 결코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스폰지가 물로 적셔지고 잠기는 것 같이 내가 신성 안에 잠기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나의 영혼이 그 신성으로 가득 차는 것처럼 보입니다"(Relazione; 18).

 

1.2.3, 그리스도 중심

 

관상의 세 번째 특성은 관상의 목표는 바로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다. 만일 관상이 그리스도와 연관되지 않는다면 또 그분과의 일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관상은 의심할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라면 마땅히 관상의 목표 역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데레사 성녀의 영적 여정이 기도의 여정임을 감안 한다면 데레사의 기도의 여정 즉 관상을 향한 그녀의 영적 여정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결코 우연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이고 오히려 시작이고 완성인 것이다. 실지로 그녀의 기도의 첫 출발을 가능케 하였던 회개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가능해진 것이었다.

 

"그런 생활에서 내 영혼은 기진맥진하여 쉼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몸에 배인 좋지 못한 습관 때문에 그것을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소에 들어가니 수도원에서 어떤 축일을 지내려고 가져다 놓은 상이 그 날을 기다리며, 거기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것은 상처투성이인 그리스도를 표상한 것이었는데, 우리를 위해 곤욕을 참아 견디신 주님의 모습이 너무도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본 나는 내 넋의 맨 밑바닥부터 뒤흔들릴 듯한 강렬하고 경건한 열정을 느꼈습니다. 그 상처가 말해 주는 헤아릴 길 없는 사랑에 나는 그 얼마나 온당치 못한 보답을 해 왔는가를 생각할 때, 너무나 격심한 슬픔에 짓눌려 내 마음은 산산이 부서지는 듯했습니다. 나는 나의 구세주의 발밑에 엎드려 폭포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제발 주님의 마음을 상해 드리지 않게 힘을 주십사고 애원하였습니다"(자서전: 9, 1)

 

데레사의 기도의 절정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분명하다. 관상의 최고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영적 결혼의 대상도 역시 그리스도 자신 이었댜. 영적 혼인의 은총으로 최고의 신비적 경험의 그리스도적인 순간은 15721118일 이었습니다, 그곳은 육화의 수도원이었는데 그곳은 데레사가 자기의 의지에 반하여 주님의 명령에 따라 간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그러한 영웅적인 행동을 한데 대해서 주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보상해 주신다. 그때는 영성체 순간이었는데 비록 오래 전부터 그 순간은 강렬하였지만 그때 계약의 은총이 주어진 것이다. 즉 주님이 그녀에게 당신을 신랑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또한 데레사 역시 교회인 신부로 들여 높여진 것이다.

그 장면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데레사에게 성체의 조그마한 조각을 영해 준 것이다. 그 이유는 성녀가 커다란 성체를 모시기를 너무나 갈망했기 때문에 성인이 그녀를 고행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 순간에 주님의 말씀이 있었다.

 

"딸아 두려워하지 마라. 그 어떤 것도 너를 나에게서 떼어놓지 못할 것이다. 그 다음, 이미 여러 번 있어 온 것처럼 상상적 보임을 통하여 영혼의 더 깊은 내밀 속에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못을 보아라, 이것은 오늘부터 네가 나의 신부가 되는 표가 된다. 지금까지 이 은총은 너에게 합당하지 않았으나 이제부터 너는 나의 영광에 신경을 쓰게 될 것인데, 이는 내가 단순히 너의 하나님이고 너의 임금이고 너의 창조주이기 때문이 아니라 네가 나의 진정한 배우자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나의 영예는 너의 것이고 너의 영예는 나의 것이다"(참조, Relazione: 35).

 

이처럼 개인적으로 데레사와 통교(교통)한 하나님은 데례사를 그리스도화 시키고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고, 그녀로 하여금 적절히 교회에 봉사하게 하기 위하여 그녀가 교회를 더욱 잘 알게 한다. 이것이 신비체험의 최종적인 목표인 것이다. 신비가 무엇에 유용한가? 하나님과의 통교(교통)와 그리스도인의 생활 또 성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데레사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이 세상에 많은 은총을 베푸시는 동기에 대하여 말씀드리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의 나약함을 강화시킬 당신의 사랑스런 아들의 삶과 일치시킬 삶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리하여 큰 고통 가운데에서 그분을 닮기를 알게 하는 것보다 더 큰 호의를 베푸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영혼의 성: 7, 4. 4).

 

1.2.4. 관상과 구원

 

데레사에게 있어서 관상이란 하나님에 대한 구원의 체험인데 이는 먼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다시 삼위일체를 만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구원의 여정과 동일하다. 즉 데레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구원을 체험하는 것이다.

예수의 테레사에게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의 개인적인 통교(교통)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적인 신비적 경험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삼위일체의 신비에로까지 가는 것이다. 이러한 통교(교통)는 그녀의 삶 전부를 통하여 강렬하게 주관적으로 경험되고 지각된다. 다시 말해서 데레사의 신비경험은 우리가 확언한 바와 같이 관상적인 은총은 자기 배우자와 통교(교통)하고 증여하고 그 다음 교회를 위한 통교(교통)와 증여의 동일한 신비 안에 자기 배우자를 끌어 드리는 하나님의 구원적인 경험인 것이다. 즉 테레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전 과정의 인식이란 구체적인 인간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현현의 구체화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닌 것이다.

데레사는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경험을 구원의 신비 혹은 구원 역사로서 나타내 보인다. 즉 그녀가 경험한 하나님은 구세주이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하신 통교(교통)는 참된 은총인데 이는 용서와 구원과 성화인 것이다. 그녀의 자서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러한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데레사 성녀의 고백은 진정 영광송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데레사를 위한 그의 자비로운 사랑의 현현 안에서 찬미 받으셔야 하기 때문이다. (참조, Epil: 3-4).

 

 

1.3. 완덕을 향한 여정얘 있어서의 관상의 필요성

 

1.3.1. 관상의 보편성

 

신학자들은 모든 이들이 관상에로 불려졌다고 말을 한다. 이들은 우리에게 이러한 부르심이 사랑의 완성에로의 부르심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어느 날에 가까이 와 일어야 할 멀리서의 부르심인 것이다. 모든 이들에 대한 부르심은 멀러서의 부르심이다. 그리고 이 부르심에 응답함에 있어서 부족하지 않기 위하여서 끊임없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사실 세례성사(세례식)는 성화에로의 성소를 주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유일한 서원이며 그 서원들에 다른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완덕에로의 성소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적인 것이고 모든 이들은 사랑의 완성에로 향할 의무를 갖게 된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 역시 모든 영혼들이 신비적인 생확에로 불림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예를 들어서 사랑의 불꽃(Fiamma Viva)에 이러한 글을 썼다, 여기에서 그는 소수만이 이러한 높은 단계에(하나님과의 일치)까지 도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분명하지만 하나님은 단지 소수만이 높여 들러지기를 바라시는 것은 아니다. 그분은 모든 이들이 거기에 도달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러나 소수 사람에게서만이 그렇게 높고 놀라운 일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성녀 데레사 역시 관상의 보편적인 부르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래도 이 궁방의 문까지 다다르는 것만도, 하나님의 크신 자비로 되는 일입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4)하지 않습니까? 아주 털어놓고 말해 봅시다. 가르멜의 수도복을 입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기도와 관상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처음부터 있는 제도이고 우리는 저 가르멜 산의 거룩한 아버지들, 깊은 고요 속에서 속세를 등지고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 값진 보배를 찾으시던 그 사부님들의 후예입니다"(영혼의 성: 5,1. 2).

 

누구에게도 그것을 갈망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이들이 그것을 바라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먼젓번 장에서 내가 한 말이 그 전에 내가 하던 말과 늘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이는 관상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을 위로해 줄 양으로 그때 제가 말하기를 주께서 여러 가지 길을 마련하셨으므로, 사람들은 그 길들을 거쳐서 당신께 가고, 그러기에 '거처할 곳이 많다' (참조, 14:2)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생수를 마시기 시작했을 때 주께서 중단시키지 않고 되려 깊은 데까지 잠기게 하신 것을 보면, 주께서는 아무에게도 은혜를 끝지 아니 하시고 큰 소리로 공번되게 우리를 다 부르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무한히 어지시므로 우리에게 강요하시는 일이 없고,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마시는 법을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시어 누구도 섭섭하거나 갈증으로 죽는 일이 없게 해주십니다. 푸짐한 이 샘에서는 크고 작은, 때로는 실낱같은 물줄기가 흘러내립니다."

 

그러면 왜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러한 높은 단계에 들여 높여 졌는가? 비록 데레사가 관상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유로운 의향에 따라 자유롭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가르치시고 영혼은 그것을 자신의 활동으로 얻거나 생산할 수 없다고 가르쳤지만 하나님은 자유로우시고 그분의 기꺼운 사랑 안에서 여기에 맞게 준비된 사람에게 이 선물을 주신다고 분명히 확언한다. 생기 찬 샘물을 상상하는 것이 이를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보십시오. 주님은 모든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당신은 진리 자체이시므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공번된 잔치가 아니라면 주께서 우리를 다 부르시지 않을 것이요, 부르시더라도 '너희에게 마실 것을 주리라'(참조, 7:37)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대신 '모두들 오너라, 손해는 없으리라.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조건이 없이 당신이 말씀하신대로 모든 사람을 다 부르시는 것이니, 누구든지 가다가 멈추지 않는 한, 생수를 얻지 못할 리 없다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요약을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완성과 관상이라는 논문을 쓴 가리구 라그랑제의 말을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주입적인 관상은 비록 그것이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거룩함의 일반적인 길 안에 있다. 아니 모든 그리스도인이 육체의 분리 후에 하나님께 서원하시는 근본적인 질서 안으로 그리고 잠시 동안이라도 고통스러이 지복직관을 박탈당하지 않기 위하여 지옥을 피하기 위하여 가져야하는 성성인 것이다."

 

1.3.2. 완덕에 이르는 두 가지 관상

 

완덕에 도달하기 위하여 관상이 필요한가 그러하지 않은가에 대하여 수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이 논제에 대하여 살펴보자. 신비적인 문제에 대하여 공부를 하면서 아주 단순하게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은사 적인 것에 속하는 모든 것과 함께 주입적인 것이며 수동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관상적 신비적인 기도 또는 관상은 순전히 비상적이고 희귀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보다 높은 완덕에 도달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 아니지 않는가? 아니면 신비적 관상기도는 희귀한 은총이나 충만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적 완덕에 통상적으로 필요하고 정상적인 것인가? 아니면 더욱 단순하게 말하여서 신비적인 은총과 완덕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모든 영혼들이 이론적으로 신비적인 생활과 관상에 도달할 수 있는가?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는 확실히 이 질문에 대하여 긍정적인 응답을 할 수 있다. 사실 신비적인 생활과 관상은 세례성사(세례식)가 각 영혼에게 주는 것 이외의 다른 능력들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능력은 주입관상이며 성령의 선물들이다. 세례성사(세례식)에서 일곱 가지 선물은 각 영혼은 하나님에 의해 움직여지고 그에 의해서 초자연적인인 관상을 포함한 신비적인 삶의 충만함에로 갈 수 있는 것이다,

몬시뇰 산드로와 다른 사람들은 교부적, 스콜라적이고 역시 토미스트적인 신학적인 전통에 호소하면서 이 문제에 대하여 두드러진 신학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들에 의하면 사변적, 연역적인 신학적인 방법에서는 원리적인 말을 사용하는데, 더욱 고대의 크리스찬 신학적인 전통은 습득적, 활동적인 관상과 신비적, 주입적, 수동적인 관상 사이의 구별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비적인 생활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정상적이고 통상적이고 필요한 발전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비적인 삶은 완덕 자체와 동일시된 것이다. 누가 완전하다면 역시 신비 전문가인 것이다,

관대한 영혼에게 있어서 관상은 공통적인 은총이다. 그리고 이는 이미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알지 못하거나 아니면 잘 지도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성사(세례식)를 통하여 관상의 활기찬 샘물이 솟아 나오는 성화은총과 성령의 선물로 풍요해졌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을 갈망하는 것은 부적합하거나 비합법적이지는 않다. 단지 관상을 겸손으로 청하고 하님께 의지를 포기하기만 하면 가능한 것이다.

몬시뇰 뿔렝에 따르면 습득적이고 활동적인 관상과 주입적이고 수동적인 관상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경험이 가르쳐 주는 것처럼 주입적인 관상과 수동적인 관상이 희귀하고 비상한 은총이고 영성생활에서 정상적인 것이 아니므로 그것은 완덕에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때문에 두 가지 완덕 즉 수덕적이고 신비적인 것 즉 하나는 일반적이고 다른 하나는 비상한 것으로 나눌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가브리일 신부는(1953) 고대 전통파 가르멜 가족의 영성에 도움을 받아서 신비적인 주제들에 대하여 많은 글을 남겼다. 우리는 그의 생각을 살펴보기로 한다. 가르멜 수도자들은 우리들의 연구에서 두 가지 방법을 동시에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사변적 - 신학적인 것과 경험적 심리학적인 것이다.

이들은 두 가지 관상으로 구별하였다. 이러한 구별은 그들의 영성학교의 오래된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신비적이고 주입적이고 수동적인 관상은 그리스도인의 완덕의 정상적이고 통상적인 길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완덕과 필수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가르멜 수도자들은 원칙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완덕의 길에서 관상적 신비적인 것이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것이라고 가르치는 도미니꼬 수도자들과 몬시뇰 산도로와 일치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필요성을 허용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도미니꼬 수도자들과 차이가 있다.) 가르멜 수도자들은 서술적이고 신비적인 것, 습득적이고 주입적인 것, 활동적이고 수동적인 이 두 개개 관상을 가르치는 예수회 회원들과 뿔렝(PouIain)과 일치하는 것이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가브리엘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성화에 있어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한 수단들이 부족하시지는 않다. 그리고 그분은 너그러운 영혼들을 신비적인 경험적인 기도의 길을 거치게 하시지 않고서도 큰 성화에로 이끄실 줄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비적인 기도를 거치지 않고서도 충만한 성성에로 이끄는 길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이 활동적인 생활로 직접적으로 이끄는 길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말이기도 하다.

성녀 데레사도 이에 대하여 찬성하는 듯한 말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집에 있는 사람 전부가 기도에 힘쓰며 산다고 해서 전부가 관상가가 되라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될래야 될 수 없는 일일 뿐 아니라. 이 사실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아주 처참할 것입니다. 관상은 주님이 내리시는 것이지만 구령에 필요한 것도 아니요, 천당 복의 조건으로 요구 당할 것도 아니요, 누구도 우리한테 요구할 것도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완덕의 길: 172 ).

 

1.3.3. 관상의 필요성

 

앞에서 많은 이들이 완덕에 도달하기 위하여 관상의 불필요성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이 결코 인간이 하나님과 일치하기 위하여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가능하다는 말과 동일화 해서는안 될 것이다. 또한 관상의 불필요성을 문자 그대로 너무 쉽게 받아들여서도 안 될 것이댜.

그 이유를 살펴보자.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르면 관상은 성령의 길에서 전진하는 진보자의 영혼을 드러내는 보편적인 특색이다. 묵상으로 하나님께 가는 자는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르면 초보이다. 그는 묵상을 멸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관상의 준비로 여겼다. 묵상 안에서 영혼은 감각성이 필요한데 이 영혼들은 신비들을 상상으로 나타내고 마음의 감동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감각성을 영성적 수련에 있어서 초심자들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수많은 불완전함과 주름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보통의 길에서도 공로들만의 열매는 아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자비로운 개입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의지의 일치는 단순히 영혼만의 노력에 달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통상적인 길 역시 절대적 수덕적인 길로서 고려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성녀 데레사에게 있어서 실지로 영혼의 작업은 단순히 하나님의 의지에 완전히 일치하기 위하여 필요한 준비를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바로 우리 집이시고, 우리 자신이 거기에 들기 위해서 집을 짓는다고 말하다 보니, 마치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보내드리거나 덜어 드리기나 할 수 있는 듯이 생각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한테서 무엇을 빼앗거나 당신께 보탬이될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저 누에처럼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을 없애고 없던 것이 생기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은총의 일에 있어 할 수 있는 것을 미처 다하기도 전에, 아무것도 아닌 이 하찮은 노력에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대하신 힘을 합쳐 주시고 엄청난 가치를 붙여 주시면, 당신이 바로 우리가 하는 일의 갚음이 됩니다. 이리하여 우리의 일을 거의 도맡아서 하신 당신은 하찮은 우리의 수고를 당신이 치르신 그 엄청난 고통과 합쳐서 하나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영혼의 성: 5, 2).

 

한 마디로 관상이 없이는 이러한 정상에 도달할 수는 없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들의 개인적인 노력의 열매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덕들의 인간적인 방식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가 원할 때 가지지 못한다. 그것은 특별한 은총과 영적인 도움으로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의 선물들이 우리를 순응케 하는 겸손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그것을 원할 때 갖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받을 준비를 갖출 수가 있으며 그것을 요청할 수는 있다. 사실 은총 지위에 있는 모든 영혼은 사랑으로 향상되는 성령의 선물들을 받았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성령은 우리를 상존적인 순응성의 단계에 따라서 우리를 움직인다.

마르땡에 의하면 하나님 안에서의 완전한 변AH는 모든 이들이 불림을 받은 목적이다. 이는 신비적인 길의 정화 없이 그리고 성령의 선물들의 상존적인 체제 아래에서의 통과 없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1.3.4. 성녀 데레사의 관점(두 가지의 종합)

 

많은 이들이 관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세례성사(세례식) 때 밭은 은총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이 관상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관상에 도달하기 위하여 특별한 체험이 따르는 비상한 은총이 아니라는 것이지 관상적 은총 자체의 불필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비록 비상한 은총이 따르지 않더라도 관상에 들어갈 수 있으며 이러한 비상한 체험 없이 성화 될 수 있다고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택에 있어서도, 당신의 표현에 있어서도 완전히 자유로우시다. 그 때문에 진실로 모든 것이 은총이다. 그리고 세례성사(세례식)는 하나님의 각자의 자녀를 구원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레사 성녀는 "비록 필수적이지는 않더라도 관상은 성화에 더욱 신속히 다가갈 수 일고 성화에로 이끌게 하는 효과적인 은총이다"라고 확언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영원한 생명의 상대적인 앞당김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신비적인 은총 없이 열매들을 얻어내는 것은 가능한가? 아니면 능력의 정지 없이 의지의 일치에 도달하는 것은 가능한가? 성녀 데레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신비적인 은총은 지름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들에게 열려진 공통적인 길이 존재한다. 일치의 이러한 종류에 있어서 내가 말한 능력의 정지는 필요하지 않다. 주님은 전능하시다. 그분은 많은 길을 통하여 영혼을 풍요롭게 하실 수가 있다. 그리고 내가 말한 지름길 없이도 이 궁방에 도달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참조, 영혼의 성: 5, 2). 데레사는 이렇게 말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랑들을 여러 가지 길로 가멸게 하시니, 내가 이야기한 이 지름길 아닌 다른 길로, 많은 사람들을 이 궁방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영혼의 성: 5, 3. 4).

이렇게 데레사는 관상을 천국에 드는 필수적인 조건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으면서 그것의 유용성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되플이 말하지만 테레사에게 있어서 관상 자체를 거부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신비적인 체험이 따르는 관상을 강조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데레사에게 있어서 완덕의 상태 즉 관상의 상태에 들어가기 위하여서는 신비적인 체험이 따르는 관상이외의 다른 길 즉 하나님의 뜻과의 일치라는 또 하나의 길이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 궁방에 드는 것이 크게 유익하므로 아직 초자연적 은혜를 주님께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도 희망이 전혀 없지 않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진정한 합일이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쫓는데 마음을 두고 그렇게만 힘써 나아가면 주님이 도우시어서 거뜬히 얻어지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람들을 여러 가지 길로 가멸지게 하시니, 내가 이야기한 이 지름길 아닌 다른 길로, 많은 사람들을 이 궁방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영혼의 성: 5, 3. 3).

 

성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정말 합일이 되었으면, 의심할 여지없이 승리는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평생을 두고 바라는 합일이요, 이것이 바로 내가 항상 우리 주께 비는 합일입니다. 이것이 가장 분명하고 안전한 길입니다"(영혼의성: 5, 3. 5).

 

"이웃 사랑만 잘 지켜 나가면 내가 이미 말한 합일을 주님께 받을 수 있으리라고 나는 단언합니다. 하지란 이것에 결함이 있을 경우에 제 아무리 경건의 정을 느끼고 합일에 도달했다 싶어도, 희열, 고요의 기도 중에서 정신 능력의 정지 같은 것을 경험해도 -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지만 - 여러분은 아직 합일에 미치지 못한 것이니 내 말을 믿어 주십시오, 그리고 이웃을 완전히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주님께 빌면서 일체를 그분께 맡기십시오"(영혼의 성: 5, 3. 12).

 

성성은 하나이며 진실한 것이다. 그러나 선물들은 다양하다! 모든 이들이 일치와 사랑의 충만함에로 불림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상으로 이끄는 길은 서로가 먼 곳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양태들을 나타낸다. 덕과 선물들은 다양하고 거룩함에 있어서도 다양한 것이다. 셩녀 데레사는 하늘에 다양한 궁방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다양한 길로 영혼을 이끄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영혼들은 그들의 여정에서 진보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감미로운 관상을 얻지는 못한다. 그러나 주님은 만일 그들이 충실하다면 살아 있는 물의 샘에서 마실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성녀 데레사의 이러한 말로써 우리는 모든 영혼들이 성녀 데레사가 경험한 관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살아 있는 물을 마실 수 있는 관상적인 상태에 들어가는 가능성은 배제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관상적인 생활(감미로운 경험이 따르건 그렇지 않거나 간에)이라고 불려지는 완덕에로 도달해야 하고 할 수 있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우리는 관상의 상태는 감미로운 현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덕들과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하여 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다. 관상은 본질상 그 안에 희귀한 현상을 반드시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모든 이들은 갸르멜 산길을 오르기 위하여서는 관상적인 은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해야 될 것이다. 데레사가 그의 저서들에서 관상의 필요성에 대하여 상반된 듯한 입장을 보인 것은 지나치게 비상한 체험을 중시하고 그것과 관상을 연결시키는 위험을 피하기 위한 교육자적인 태도로 이해되는 것이다. 결국 데레사는 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르기 위하여 비록 길은 다르지만 관상의 은총의 필요성에 동의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II. 덕과 관상의 상호관계성

 

2.1 덕에서 관상으로

 

관상에로 나아가기 위하여 덕은 필수적이다. 사실 세례성사(세례식)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신학적인 삼덕의 성장 없이 관상은 불가능하다. 한편 관상 역시 이 세 가지 덕의 성장을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선물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고백록에서 이러한 여정을 찾을 수 있다. 아우구스티노에 의하면 하나님의 관상에 이르기 위하여 상승하고 정화될 필요가 있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지식과 철학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수덕적이고 신비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관상 즉 "하나님을 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정화시키는 신앙과 희망과 사랑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분별, 정의, 용기, 절제의 사추덕도 필요하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사람이 이것이 인간의 노력의 열매 만 일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알 때만이 이루어진다.

관상에 도달하기 위하여 신앙과 희망과 사랑 이 삼덕이 필요하다. 관상이 지성적인 관조이기는 하지만 결코 사랑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관상적인 삶은 이성적인 행위에 있다. 비록 본질적으로는 지성적인 행위이기는 하지만 관상은 의지적인 활동 즉 사랑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사랑스러운 의지는 원인적인 원리로서 그리고 목적으로서 관상에 영향을 미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성과 의지가 함께 나아가고 서로 존재의 완성을 향해서 도와주는 것처럼 신앙과 사랑도 그들 사이에 긴밀히 관계되어 있어셔 서로 영향을 준다고 분명히 확인했다(2 N 13, 3). 신앙은 사랑을 탄원하고 촉진하고 사랑은 신앙을 분명히 해준다. 사랑하면서 생동하고 약동하는 신앙에 도달한다. 그리고 순수한 신앙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화시킨다. 사람이 신앙 안에서 뛰어나게 되면 그만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주입적 사랑도 뛰어나게 된다. 더 큰사랑을 소유하게 되면 될수록 그만큼 하나님은 그를 비추시고 그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시는데 이는 사랑이 그러한 퉁교의 수단이고 원인이기 때문이다(참조. 2 S 29, 6).

덕들은 애덕 안에서 피어오르고 향유한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기초되고 보존된다. 애덕은 덕들을 연결시키는 중심이다. 또 그것들을 배양시키는 영양물이며 그것들을 분출시키는 힘이다. 사랑은 영혼 안에서 덕들을 묶고 견고케 한다. 그리고 바울 사도가 애덕은 완덕의 끈이라고 말했듯이 그것들을 지원하다(요수정, 고린토: 3, 14. 완덕의 길: 30, 9).

데레사는 자기 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리고 애덕이 열렬하면 열렬할수록 그리고 매일 그분에 대한 영예와 영광의 갈망이 자라날수록 그분을 보고 싶다는 갈망은 강렬해지고 가끔 미친 듯한 충동을 갖게 되고 커다란 걱정과 사랑의 특별한 효과들과 함께 죽고 싶다는 갈망을 갖게 되었다.

또한 데레사는 늘상 더 큰 완덕의 길을 따르고 싶어 하고 열렬하게 우리에게 아주 작은 의지적인 죄까지도 짓지 못하도록 설득하였다. 이와 같이 관상에 도달하기 위하여 신학적인 삼덕 즉 믿음, 소망, 사랑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윤리덕도 갖추어야 한다. 실지로 토마스 자신도 관상에 있어서 윤리덕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윤리덕들은 준비로서 관상생활에 들어간다. 본질적으로 관상생활을 구성하는 관상의 활동은 영혼의 집중을 지성적인 것에서부터 감각적인 것으로 불러내는 정열들의 폭력에 의해 방해를 받게 된다. 그리고 외부적인 동요에 의해서 방해를 받게 된다. 그래서 도덕적인 덕들은 열정의 복력을 제거하고 외부적인 일들의 동요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덕들은 관상생활의 준비에 속하게 된다.

성녀는 기도의 성장에 있어서 그리고 특별히 보다 높은 단계로 올라가는데 있어서 겸손의 부족만큼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성녀는 관상을 위한 필수적 준비로써 그리고 참됨의 적절한 기준으로써 겸손을 제시한다. 또한 성녀는 완덕을 향한 비약에 있어서 아량성과 항구함에 대하여도 이야기한다.

 

"겸손이야말로 기도에서 가장 큰 구실을 하는 것으로서, 이미 말할 바와 같이 어떻게 하면 이 덕을 잘 딱을 수 있는지를 알아두는 것이 긴요할뿐더러, 기도에 힘쓰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것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 겸손한 사람 같으면 관상에 도달하는 이들만큼이나 자기가 정말 거룩하다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주께서 여러분을 이 길로 인도하려 하신다면 스스로 준비나 잘 하여둘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특히 요구되는 것이 겸손입니다"(완덕의 길: 17, 1). "그러나 겸손과 극기와 이탈, 그리고 다른 덕들이야말로 항상 틀림이 없습니다. 겁낼 것은 조금도 없으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니 여러분도 훌륭한 관상가들처럼 완덕에 나아가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완덕의 길 : 17, 4).

 

아우구스티노 역시 관상에 도달하기 위하여 정화의 과정 속에서 윤리적인 덕을 닦을 필요성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정화 작업은 아우구스티노적인 언어로써 세 가지 영역을 향하여 도식적으로 방향 지워진다. 우리는 이것들을 고행, 집중, 겸손으로 부를 수 있다. 이 세 가지 형태를 심화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노의 모든 수덕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녀 데레사의 글을 통해서 성화의 과정을 보게 되는데 먼저 수덕의 길을 걷게 되고 그 다음 모든 경험의 여정을 도와주신 주님과의 만남을 완수하기 위하여 신비적인 길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다른 운동들을 관찰하게 된다(참조, 영혼의 성: 6, 7궁방). 이 전에 영혼은 그의 상층부로 올라가도록 불림을 받았다. 지금은 그의 중심부에 들어가도록 불림을 받는다. 첫 번째 움직임은 수덕과 고행, 정화가 이루어진다. 두 번째 움직임은 통교(교통), 친밀함 평화이다(참조, 영혼의 성: 7, 1. 5).

한 마디로 데레사의 확언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만일 그에게 우리 자신을 완전히 내어 주지 않는다면 그분 역시 당신 자신을 완전히 내어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하는 자신의 완전한 선물은 데레사가 가르친 여러 덕들에 의하여 실현될 것이다.

 

2.2. 관상에서 덕으로

 

먼저 관상에 도달하기 위한 준비로써 신학적인 덕들과 윤리적인 덕의 필요성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이제는 관상이 이들 덕들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 가에 대하여 살펴보자. 성녀 데레사가 모든 감각에 있어서 그리고 내적인 영역에 있어서 영혼 안에 생산된 효과들의 기술에서 그리고 관상의 여러 단계들에 대하여 그녀가 한 찬사에서 그녀는 관상을 영적 생활의 성장을 위한 효과적인 요인이라고 분명하게 강조하였다. (참조, 자서전: 19, 5; 21, 1; 25, 12; 33, 5: Relazione 2,3; 3. 8; 4, 5).

하나님과의 통교(교통)는 신앙의 인식적인 풍요를 가져다주고 계시된 자료의 이해 그리고 신학과 경험의 조명 그리고 신비적인 통찰이 가능해진다. 데레사는 환시의 열매로써 살아 있는 신앙에 대하여 자주 말한다.

 

"당신의 온갖 은총은 그에게는 너무나 과분하고도 아낌없이 주신 은혜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이승에서 몸을 둘 곳조차도 없는 불초한 자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체치 않고 성사들에 의지합니다. 당신께서 거기에 두신 효능을 발견할 때 싱싱한 믿음이 솟아납니다. 이 상태에 있어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서 목숨이나 명예를 잃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신하들과 한층 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할 의무를 지닌 임금님들에게 그건 얼마만한 보물입니까? 그분들이야말로 다른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니 말입니다. 믿음을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아가게 하며 이단자들에게 얼마간이라고 빛을 주기 위해서 그들은 천개의 왕국이라도 희생할 각오를 가질 것입니다"(자서전: 19. 5, 21, 25. 12).

 

그리스도인의 희망 역시 하나님과의 통교(교통)에서 발생된 성장 안에서 아주 정확한 특징을 갖게 된다. 자서전에 나오는 데레사의 신비적인 첫 경험을 읽을 때면 강한 인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보려고 하는 주체할 수 없는 갈망이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하나님 왕국의 봉사를 위하여 활동적인 기다림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만일 영혼들의 선을 위해서라면 종말론적인 것보다는 이 땅에서 건설적이고 희망의 성격의 형태로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고자 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참조, 자서전: 40, 20. 23, 왈덕의길: 38-'39. Relazione, 6, 9).

신학적인 사랑 역시 하나님과의 통교(교통)의 제왕적 선물로써 마음 안에서 강하게 분출된다. 데레사는 많은 그의 글에서 자기 안에 하나님 사랑의 성장의 사실을 아주 강하게 설명하는데 이러한 사랑이 선물이면서 새로운 것임과 힘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성녀는 영적 성장에 있어서 기도의 단계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그것들 각각이 영혼 안에 생산하는 효과들에 대하여 기꺼이 설명한다. 특별히 덕의 성장과 움직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정적의 기도에 대하여 자서전(14, 5-615, 14)에서 그리고 영혼의 성(4, 3, 9)에서 강조되었다. 그것은 지상적인 위안으로부터 분리 그리고 보속할 마음(X), 자신에 대해 낮추는 의견, 그리고 노예적인 두려움의 상실 그리고 마지막 구원의 신뢰 등이다. 그리고 동시에 영혼은 넓어지고 하나님께 봉사하는데 있어서의 그의 에너지가 성장한다.

영혼의 성 마지막 부분에서 데레사는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오는 효과가 어떤 것인가를 기술한다. 여기에서 데레사는 거룩함의 특징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하나님께 침잠해 있는 영혼은 덕을 갖추게 되는데 자기를 잊고 하나님을 향하여 신학적인 덕들을 위하여 방향 지워진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적인 덕들은 6궁방의 정화와 조명의 도가니를 거친 것이다. "첫째는 나의 잊음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습니다만, 정말 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잊음입니다. 둘째 결과는 괴로움을 많이 당하겠다는 욕망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영혼들은 박해를 당할 때 몹시 마음이 기뻐지고, 위에서 말한 것보다 훤씬 더한 평화를 간직하게 됩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원수처럼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 줍니다"(참조, 영혼의 성 7, 3).

또한 하나님이 그녀 안에서 많은 일을 하심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녀 자신은 자기에 대하여 낮게 평가하였다. 비록 그녀의 병약함에도 불구하고 주방에서 일을 하였고 스스로를 집에서 비천한 자로 여기고 천한 일을 하였다.

 

 

      

 

III. 관상의 궁극적인 목표와 효과

 

3.1. 관상의 궁극적 목표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표를 말하자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할 수 있겠다. 하나는 예수님과의 일치이며 또 다른 하나는 사랑이신 하나님과의 일치인데 사실 이 두 가지는 하나이지만 필요에 따라서 예수님과의 일치와 애덕의 완성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관상생활의 첫 번째 목표는 예수님과의 일치이다. 데레사는 영혼의 성 마지막 궁방에서 예수님과 신비로운 일치를 이룬다. 주님은 영혼을 영혼 자신의 중심부인 그의 궁방으로 인도한다. 이 궁방은 하나님께만 유보된 곳으로서 그 누구도 그 곳에 올 수 없는 곳이다. 그곳에서 인간의 인격과 존재의 전부를 포용하게 된다. 영적 결혼일수록 더욱 그래야 하니, 이 신비로운 합일은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영혼의 가장 그윽한 중심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참조, 영혼의 성: 7, 2, 3: 7, 3, 10)

신비적인 통교(교통)의 명백한 효과들은 내부에서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에게 일치시키는 태도들인 것이다. 그것은 겸손, 가난, 용기, 수난을 겪을 갈망 그리고 봉사하는 것이다.(영혼의 성: 7, 4.8). 이것은 그리스도의 상에 동화시키는 존재의 완전한 재구성인 것이다. 하나님과의 통교(교통)와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항상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신비적인 은총의 목표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분과 비슷하게 되는 것이다.

데레사의 경우에서 평가해 볼 수 있듯이 모든 신비적인 경험에서 데레사는 결정적인 목표로서 예수님과의 순응을 든다. 그리고 그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인데 이로써 인간을 내적으로 고치고 그를 강화시키고 힘을 북돋운다. 그리고 특별히 신학적 덕 안에서 증거를 통한 교회의 봉사와 하나님 왕국의 건설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데레사는 하나님이 영혼을 회개시키고 덕을 실천하게 강화하고 관상 안에서 영혼을 비추기 위하여 하나님이 뿌리신 모든 은총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성성을 순수한 영예로 여겼다. 데레사에게 있어서 성성은 오로지 하나님과의 일치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아버지에게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자들을 위하여 청하였듯이 완덕은 우리 안이 하나님과 생명의 실현에 있는 것이다.

데레사가 그녀의 경험으로써 영성신학의 기본적인 요점들의 하나에 도달한 가장 중요한 측면은 그리스도와의 배우자적인 일치가 의미하는 것은 정확하게 인간적인 인격의 혁신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모상 즉 모상의 모상으로 바뀌는 것이다. 인간적인 영은 이러한 모상에 따라서 형성된다. 그것은 그 모상에 따라서 조형되는 것이다.

두 번째 관상생활의 목표는 애덕의 완성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일치한다고 할 때 구체적인 삶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말은 무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애덕이 관상의 최고의 목표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성 토마스는 애덕 안에서 완덕이 있다고 말한다. 신적인 사랑의 완덕은 모든 이들에게 질서 지워져 있다. 이것은 즉시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그 조건에 따라서 이루어 내어야 할 목표인 것이다. 사랑의 일치, 사랑의 변형 일치는 십자가의 성 요한에 의하면 영적인 행진의 최고의 목표인데 이는 완전한 영적인 생활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인이 분명히 밝힌 바대로 모든 이들이 이리로 오기를 바라시는 것이다(사랑의 불꽃: 2, 27).

십자가의 성 요한이 완덕의 정상에 대하며 말하였듯이 모든 법의 성취는 애덕 안에 있다. 사랑 안에서 사는 자는 저 높은 곳에서 산다. 그는 모든 법으로부터 해방된다. 왜냐하면 애덕은 제한된 일시적인 요소들로부터 둘러싸이거나 제한될 수 없는 공간들을 향한 그의 지평을 그만큼 넓혀 주기 때문이다.

 

3.2 관상의 효과

 

3.2.1, 관상과 수난하신 예수님과의 일치

 

관상이 완덕에 필수적인가 아닌가의 논쟁을 떠나써 관상의 효과에 대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관상 자체가 주는 효과를 무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관상이 주는 효과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면 관상의 중요성은 당연히 따라오게 될 것이다. 데레사 성녀는 관상의 효과로서 세상 구원에 대한 관심을 든다. 관상의 효과로서 주님을 닮게 되는 데 주님은 구세주이시다. 따라서 구세주이신 주님의 일에 당연히 참여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주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만큼 그분의 고통을 더욱 닮게 된다(참조, 영혼의 성: 74, 5.14). 그리고 구원을 위한 그의 일에 그만큼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신비적인 기도의 더 높은 기도의 단계는 세상의 구원에 가장 효과적인 참여가 된다(참조, 영혼의 성: 5. 2. 12).

성녀 데레사가 5 궁방에서 말하는 봉인은 매우 선명하게 영혼 안에 인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봉인은 십자가의 형태를 갖는다. "여러분들은 진정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 십자가의 낙인이 찍힌 종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자유를 고스란히 바쳐서, 바로 주께서 하신 그대로 전 인류의 노예로 자기를 팔아 잡수소서 하는 것입니다"(영혼의 성: 74, 8).

영적결혼의 상징성은 이렇게 그것의 최고의 의미에 도달하게 된다. 신랑과 신부의 일치는 교회와 세상을 위한 생명의 열매를 가져오게 되고 풍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데레사는 복음과 애덕의 역동성 그리고 교회의 성장을 위한 성령의 필요한 활동을 믿는다. 데레사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 편입되는 그녀의 딸들의 성화와 성령의 활동을 통한 왕국의 발전을 위한 신적인 선물이 되는 성화를 믿는다. 이와같이 관상 즉 하나님과의 일치에 의해서 이루어진 성화는 교회 안에서, 보다 순수한 활동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통교(교통)의 열매는 다른 사람들 안에서의 삶이며 증여이며 봉사이다(영혼의 성: 6, 8, 4). 사랑의 봉사는 그리스도 안에셔의 생활이 환각이 아님을 인증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형제들과의 만남에서의 겸손의 봉사인 것이다. 그것은 찬양이 되는 겸손이며 하나님이 모든 살아 있는 것으로부터 찬미를 받기를 바라는 것이다(영혼의 성: 6, 8. 4; 7, 3, 5; 5, 3, 8. 11; 5, 4. 9). 이제 영혼은 하나님을 그 자신 때문에 사랑하게 되고 자신의 행복보다는 영혼의 구원과 그분의 영광에 더욱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3.2.2. 관상과 사도적 활동

 

혼인에 있어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에서처럼 두 사람의 역사는 한 운명을 실현시키기 위하며 하나가 된다. 한 사람의 삶은 다른 사람의 삶과 엮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영적인 혼인에 있어서도 주님과 인간은 한 삶으로 엮어지게 되는 것이고 한 운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 "네 것과 내 것을 바꿀 때가 바야흐로 왔다. 나는 네 일을 내 일처럼 보살피리다" 하시고 표현보다 차라리 느꺼운 말씀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영혼의 성: 7, 2, 1).

데레사의 신비적인 정상이란 우리가 말했듯이 삼위의 생명 안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주실 때 선물의 다른 모든 가능성이 성취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데레사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그대신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Relazione: 25)

데레사는 성부를 위한 봉사를 위하여 그녀의 신비적인 체험 중에 굳셈과 용기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교섭하는 능력의 특별한 은총들로써 내적으로 능력을 받게 됨을 느끼게 된다. 그녀 안에서 교회는 신적이고 인간적으로 살아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언제나 교회와 함께 하신다. 데레사는 그의 신랑을 위하여 살고 일하는, 배우자인 교회의 신비를 살고 육화한다.

데레사는 주님과의 영적 결혼 전에 맞선을 볼 때 주님을 바라보는 결과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자 이러한 바라봄의 첫 번째 열매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 하려는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에게 자신을 선물로 내어 주는 것입니다"(참조, 영혼의 성: 5, 4. 6).

또 데레사는 관상의 최고 단계에 이르게 되면 사도적 효과가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단 하나의 영혼을 쓰심으로서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당신께 끌어들이시는가. 우리는 저 순교자들 그리고 저성녀 우르술라와 같은 처녀 하나로 해서 몇 천 명이 회심했다는 사실을 두고 얼마나 주님을 찬미해야 되겠습터까? 악마는 성 도미니꼬와 성 프란치스꼬, 그리고 다른 대수도회 창설자들 때문에 무수한 영혼을 잃었을 테고, 예수회를 창립하신 이냐시오 신부님으로 해서 아직도 잃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어른들은, 우리가 그 전기를 통해서 아는 바와 같이, 모두가 하나님의 그 은혜를 받으신 것이 확실합니다"(영혼의 성: 6. 4. 9).

 

성 요셉 수도원의 조그마한 그룹에 처음에 제시한 이상은 종말론적인 관상이다. 신비의 첫 단꼐 10년의 은총들은 그녀 안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자서전: 29, 9-13; 38, 5-6) 하나님을 뵙고자 준비하는 갈망과의 긴장감을 가지면서 성녀를 오직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그리고 천상 세계와의 관계만으로 향하게 하였다(자서전: 38, 1; 영혼의 성: 6, 5, 7). 그러나 완덕의 순간에는 신비적인 몸을 관상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었다. 교회를 위해 사는 것,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 그리고 교회를 방어하는 것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거룩하게 되는 것이 바로 데레사가 모두에게 완덕의 길을 허락하는 동기이다(완덕의 길: 1, 2; 3).

테레사에게 있어서 사도적인 활동은 단순히 외적인 활동이 아니라 기도를 통한 사도직 활동이다. 즉 자신이 받은 성소 안예서 머물면서 사도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데레사에게 있어서 루터교의 피해가 교회를 위하여 일하려는 촉매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지 외적인 활동에 매달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참에 내게 들려오는 소식은 프랑스가 루터 교인들로부터 폐해를 당하고 있으며 가련한 그 종파가 날로 번져 나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여간 걱정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또 무엇이나 할 수 있는 것처럼 주 대전에 울며 그 막중한 불행에서 구해 주시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죽어 가는 그 숱한 영혼들 중에 단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나는 천 번이라도 목숨을 내놓을 것 같았던 것입니다‥‥ 드디어 나는 작기는 할망정 내 안에 있는 것을 가지고 일을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것은 힘닿는 데까지 복음적 교훈을 깔축없이 지키고 이 집에 사는 소수의 수녀들이 이 길을 걸어가게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데레사가 관상과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하여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활동할 결심을 하였지만 무작정 활동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구원을 위한 기도 군사를 모집하고 이들 각자가 자기의 본분을 열심히 지키고 충실히 기도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회적인 봉사는 보편적인 것이고 구체적이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기도로써 많은 도움을 주는 것 외에는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덕을 입히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저 함께 사는 이들에게나 잘하려 힘쓰십시오. 본분 상으로도 더욱 그래야 하는 만큼 이것이 가치로운 일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 놀라운 겸손과 인욕, 차별 없이 수녀들을 섬기고 아낌없이 사랑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불꽃으로 그들을 뜨겁게 해서 덕으로 그들을 깨우쳐 주는 것이 작은 소득이라고 보십니까? 크나큰 소득일뿐더러 주께서 매우 기뻐하시는 성김일것입니다."

    

 

 

나오는 말

 

학자들에 따라서 그리고 각 영성 학파에 따라서 관상에 대한 정의가 다양하다. 그러나 어쨌든 관상은 지도의 최고의 단계임을 모두가 인정하였다. 영성생활에 있어서 관상이 필요하던 그러하지 않던 간에 모든 이가 완성에 도달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완덕에 있는 것이다. 사실 데레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완덕에 있는 것이다, 데레사가 관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면 이는 관상이 완덕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데레사 자신이 체험한 관상은 완덕에 도달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길이었다. 그녀 자신도 말했지만 모든 이가 그녀가 경험한 관상의 상태를 경험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록 이러한 데레사적 체험이 따르는 관상은 아니라 하더라도 모두가 관상에 초대를 받은 것이다.

관상에 도달한 이들의 특징은 덕의 완성에 있다. 만일 덕의 완성이 따르지 않는 관상이라면 그것은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데레사는 관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완덕에 도달하는데 있어서 다른 수많은 길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의지의 일치를 통하여 나아가는 평범한 길이다. 의지의 일치를 통하여 나아가는 이 길은 덕의 완성에로 향한 길이다. 즉 기도를 실천한다는 것은 기쁨을 향유하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힘을 갖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제 덕과 관상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의 성녀 데레사 자신의 말로써 끝맺고자 한다.

 

"따님들이여, 기도란 결국 이것을 위한 것입니다. 영적 결혼도 이것을 위한 것이고, 이 결혼에서는 언제나 실행, 실행, 실행이 생겨나는 것입니다"(영혼의 성: 7, 4, 6).

"다시 말하거니와 이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기초를 다만 기도와 관상에다 두어서는 안 됩니다. 덕 닦기를 힘쓰지 아니하면 여러분은 항상 난쟁이로 남을 뿐, 그러나 자라지 않는 것뿐이라면 차라리 낫겠지만 아시다시피 자라지 않는 것은 곧 쪼그라드는 게 아닙니까? 사랑이란 늘 같은 상태에 있으면서 만족할 수 없으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영혼의 성: 7,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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