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사상

올리버 데이비스. 이창훈 역

 

 

목차

 

1. 합일의 신학

2. 합일의 표상

3. 합일의 영성

  

1. 합일의 신학

 

 

 

여기서는 엑카르트 사상의 체계를 심도 있게 살펴볼 것이다. 서문에서 언급한, 엑카르트 작품에 나타나는 분석과 체험 간의 비판적 균형이 가시화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는 철학자나 교수 신학자의 작품을, 해명하고 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저술은 사상가들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진행해 나가는 그만큼 추론적이고 분석적이다. 건전한 원리와 설득력 있는 논증의 토대 위에 확립된 지식 체계로 완성된 그 작품들은,고딕식 대성당처럼 높고 정교한 건축물에 비할 만하다. 천칭의 한쪽 끝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머문, 그분에 의해 도취되고 변형되고 거룩해진 의식영역으로 인도하는 신비가 존재한다. 영혼은 시를 읊거나 춤이나 눈물, 노래를 통해 내면을 표현할 것이다.

 

엑카르트는 많은 수련을 쌓았고 매우 박식했지만 본질적으로 후자에 속한다. 그는 하나님과 깊은 일체감을 맛보고 그 체험을 다른 이들에게 감동적으로 전하는 신비가의 영혼을 지닌다. 본디부터 그는 노래하는 신비가이고 신학은 그의 노래다. 그 노래의 본질을 심층에서부터 이해하려면, 엑카르트가 작품을 통해 당시의 신학 주제를 차용하고 각색하는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대단히 중요하고 전문적인 분야인 유비(analogy)로씨 이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다.

 

 

 

엑카르트의 유비 이론

논리학의 범주에 따르면, 단 하나의 의미를 가지는 단어는 (하나 이상의 대상에 그 의미가 적용되더라도) 일의적(univocal)이다. 반면에 다양한 의미를 지닌 단어는 다의적(equivocal)이라고 한다. 그런데 세 번째 범주가 있다. 의미는 구별되지만 서로 공통되는 부분을 지닌 단어에 적용되는 범주로, 이러한 관계 유형을 우리는 '유비'라고 부른다. 하나님과 인간에게 '선하다'라는 형용사를 사용할 때 이 말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일의적).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이 매우 다른 실재이기 때문에 '선하다'라는 말이 양측에 똑같은 의미를 지닐 수 없다(다의적)고 주장할 수 있다. 셋째, '선하다'가 하나님과 사람들과 관련하여 의미가 서로 다르지만, 그럼에도 양측에 모두 해당되고 또 적용될 때는 어느 정도 공통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유비 관계다.

유비의 본성에 관한 기술적 논의는 중세 신학에서 극히 중요한 영역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약간 생소할 수 있다. 유비가 현대 관심사들과는 아주 무관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세기에 창조주와 피조물 간 관계의 본성을 설명하는 데는 유비가 중요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실제로 어느 정도나 알 수 있을까? 피조물의 언어('선하다' 같은)를 창조주이신 그분에게 적용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더 중요하게는, 하나님 존재와 피조물 존재의 관계는 무엇일까? 존재가 단지 하나님께만 속하는 것이 합당하다면 피조물은 사라지고 만다. 반대로, 존재가 하나님께 속하는 만큼 피조물에게도 속한다면 하나님이 피조물과 구별되는 초월성이 훼손당한다. 이 점에 관해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려면 그의 13세기 동료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점을 먼저 개략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점은 도미니코회에서 규범이 되었을 뿐 아니라 가톨릭교회 전반에도 크게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비

유비의 체계는 보통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이름과 연관되지만, 실은 그 못지않게 카예타누스의 영향이 크다. 카예타누스(Thomas de Vio Cajetanus) 추기경은 격동의 15-16세기에 유비의 본성에 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양한 진술이 지닌 복잡한 영역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 한 도미니코회 신학자다. 그는 이름의 유비(De nominum anaIogia. 1498)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세 가지 유비 유형을 밝혔는데, 첫째를 '불평등 유비'(analogy of inequality)라고 칭했다. '(, genus)에 포함된 종(, species)들이 유의 완전성을 불평등하게 공유하는 것'이다. 사람과 개는 둘 다 동물이지만 사람은 개보다 완전한 동물이다. 이런 형태의 유비는 둘째 유형에서는 덜 중요시된다. 중요한 것은 카예타누스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귀속 유비'(analogy of attribution)와 동일시하는 둘째 유형의 유비다. 여기서 그가 제시한 보기는, 사람과 약과 오줌에 관한 '건강하다'라는 형용사다. '건강'이라는 특질은 실로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건강하다'라는 형용사를 정신이 만들어 내는 연상에 의해서만 다른 두 가지에 적용한다고 카예타누스는 주장한다. 약이나 오줌 어느 것에도 '건강'이라는 의미가 부합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우리는 건강을 외적으로 그 사람의 약(건강의 원인)과 오줌(건강의 표징)에 귀속시킨다는 것이다. 셋째 유형의 유비는 '비례 유비'(analogy of proportionality). 이 경우 "고려 대상이 되는 것은 다양한 실재가 아니라 완전히 동일한 실재의 다양한 존재 양태다" 여기서는 눈으로뿐 아니라 지성으로도 '본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보기로 든다. 원리는 같지만 맥락이 다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에서, 하나님에 대해 언어를 사용할 수 있고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탐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셋째 유형이라고 카예타누스는 주장한다.

대체로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카예타누스의 체계적 해석은 여러 세기에 걸처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오래지 않아 의견을 달리하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등장했다. 스페인의 예수회 신학자 수아레즈(Suarez)가 카예타누스의 두 가지 '오류'를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첫째, 카예타누스가 '비례 유비'라고 부른 것은 실은 은유이므로(눈에 '보이는 것'은 지성에 대해서는 은유적으로만 사용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피조물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시하면서 사용한 의미일 수 없다. 카예타누스의 '비례 유비'가 하나님은 참으로 존재하지만 피조물은 은유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 반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초월을 수호하면서 동시에 피조물의 지위를 보호하고자 항상 노력했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는 그 자신이 '내적 귀속 유비'(analogy of intrinsic attribution) 라고 칭한 유비를 사용한다고 수아레즈는 주장한다. 이는 존재(와 그 밖의 특질들)이 하나님의 피조물보다는 하나님에게 더욱 완전하게 귀속될 수 있지만, 피조물 또한 존재를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피조물의 존재의 원천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피조물은 참다운 의미에서 존재 자체를 소유한다는 것이다.

현대 해석자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비 학설을 다루면서, 카예타누스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 체계로 만든 것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제 생각은 다소 다르다는 점에서 수아레즈와 뜻을 같이한다. 부각되는 핵심적 유비 형태는 '내적 귀속'에 대한 '일 대 일' 관계다. '일 대 일'이란 하나님과 그분 피조물이 제3의 용어에 기대어 연관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적 귀속'이란 인과율에 토대를 둔, 하나님과 그분 피조물 간의 유사함이다. 우리의 창조주는 우리를 당신과 닮게 만드셨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귀속'관계다. 이는 우리가 참으로 소유하는 그 존재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고 하나님께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적 귀속 유비는 일차적 유비자(ana1ogate(하나님)와 이차적 유비자(피조물) 사이에 유사함이 있을 뿐 아니라 이차적 유비자는 일차적 유비자의 불완전한 모방이라는 것을 표상할 수 있다." 따라서 토마스주의의 유비 체계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적용될 때의 장점은 그것이 피조물의 실재를 보증하면서도 창조주의 초월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유비 이른

지혜서 주해 Expositio Libri Sapient에 이런 구절이 있다.

 

"구별해야 할 것은 이들 셋, "일의적인 것과 다의적인 것 그리고 유비적인 것이다. 다의적인 것은 표상되는 다양한 사물에 따라 구분되며, 일의적인 것은 (동일한) 사물의 다양한 차이에 따라 구분된다". 유비적 사물은 사물에 따라서 구별되지 않고 사물의 차이를 통해서도 구별되지 않지만, 하나이며 똑같고 단일한 사물의 "(존재) 양태에 따라" 구별된다. 예를 들어 동물에 있는, 하나이고 동일한 건강은 음식물과 (그 동물의) 오줌에 있는 그것이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이는 돌에 건강이 없듯이 음식물과 오줌에 건강이 없는 것과 같은 방식에서다"

 

따옴표로 묶은 구절의 출처는 토마스 아퀴나스(in Sent I, d.22, q.1, a.3, ad 2)지만, 엑카르트가 의미하는 바와의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유비에 다양한 '존재 양태'가 있다는 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엑카르트는 일치하지만, 마지막 문장은 엑카르트가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와는 전연 다른 어떤 것을 이해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비례 유비나 내적 귀속유비에 있어서 유비의 이차적 유비자는,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관련되는 특질을 그 자체 안에 실제로 지닌다. 그러나 엑카르트에게서는 그렇지 않다. "돌에 건강이 없는 것처럼 음식물과 오줌에는 건강이 없다"는 것이다. 그다음 언급에서도 부연한다. '오줌''건강'하다고 말하는 것은, 오로지 오줌이 그 동물에게 속한, 동일한 양의 건강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포도주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둥근 화환이 포도주를 (상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건강한 오줌의 징표라는 특성은 인과율적으로 그 사람의 건강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독일의 선술집 밖에 걸려 있던) 화환의 경우에는 그런 관련이 전혀 없다. 여기서 엑카르트는 유비 명제의 첫째 영역(일차적 유비자)의 속성은 합당하게 둘째 영역(이차적 유비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넘겨씌우기(轉嫁,전가)에 의해 둘째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관점은 쟁점이 되는 초월적 특성(, ,지혜, 존재)이 유비적 빈사(資辭)의 첫째 부분(하나님)에서만 합당하게 존재한다고 진술하는 다음 두 단락에서 더 잘 드러난다.

 

[이차적] 유비자는 유비자 그 자체로 실제 형태를 띠면서 유비적으로 질서있게 뿌리를 두고 있는 바로 그 형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모든 창조된 존재는 실존과 진리와 선에서 저마다 유비적으로 하나님께 질서 지어져 있다. 그러므로 창조된 모든 존재는 저마다 그 자체로가 아닌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그분 안에서 실존과 생명과 지혜를 절대적으로 소유한다.

 

존재자 혹은 존재, 모든 완전성, 특히 존재 · 하나임(oneness) · 진리 · · · 의 같은 보편적 표현은 하나님과 피조물을 유비적으로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따라서 (피조물의) 선과 의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들은 전적으로 그들이 유비적 관계에 있는 그들 밖의 어떤 것, 즉 하나님으로부터 그것들을 완전히 가진다.

 

같은 개념이 라틴어 설교에서도 상세히 언급된다.

 

만물이 하나님을 섬길 태세가 되어 있음을 다시 한 번 주지해야 한다. 인과의 유비 관계에서는 그 (존재) 양태에 따라서만 차이가 나는 유일한 것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이것이 유비가 의미하는 바다. 유일한 무엇이 여기도 저기도 존재하지만 방법에 있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환이 포도주의 존재를 알림으로써 도움이 되는 것, 또 오줌이 그 자체로는 동물의 건강과 하등의 상관이 없지만 동물의 건강을 알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피조물은 하나님을 섬긴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표징이며 자신을 만드신 그분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고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말이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소위 초월적 속성들(, , 지혜, 일치, 존재) 중 어느 것도 피조물 스스로 소유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엑카르트는 거듭 강조한다. 그 특성은하나님이 피조물에게 빌려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선을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라 빌려 주신다. 태양이 대기를 덥히는 것도 다만 대기에 빛을 빌려 주는 것이다. 태양이 지면 빛은 사라지지만 열은 대기에 남는다. 열은 대기가 지니도록 주어진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피조물의 존재가 하나님에게서 온 선물로서 언제라도 그분이 되가져 갈 수 있는 것이라면, 엑카르트에게 존재는 피조물에게 대여 중이며 결코 합당하게 피조물의 소유가 되지 않는다는 요제프 코흐의 말은 매우 적확하다.

엑카르트는 앞서 제시한 유형을 설명하면서, 피조물이 그 자체로는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실재를 나타내지 못한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하나님은 존재하지만 피조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실존이 하나님에 의해 직접 피조물에게 주어지고 그 실존은 여전히 하나님 안에 머물며, 피조물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실존 말고는 어떠한 실존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요한복음 주해축복의 서에서 유비를 니케아 신경(信經)낳음(generatio)의 패러다임으로 의도적으로 대체함으로써 이와 같은 관넘을 구명해 나간다. 니케아 신경에 따르면 이 패러다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적용되는 직접적 낳음의 모델이다. 이것은 엑카르트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존재하는 원리와 개별 피조물에 존재하는 초월적 특성이 지니는 관계의 직접성을 강조하는 더한층 놀라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게 해 준다.

먼저 '아버지에게서 아들의 남음'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하자. 엑카르트는 이 주제를 요한 복음 주해에서 다룬다. 여기서 그는 유비 모델을 명백히 배격한다. 유비 모델이 삼위일체의 제1위와 제2위 간의 존재 또는 본성의 동일성을 표현하지 못하리라는 이유에서다.

 

아들/말씀은 아버지/원리이신 분과 동일하다. ‥‥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유비적 관계에서 산출되는 것은 그 원천으로부터 유래하지만, 그럼에도 원리 아래 있을 뿐 원리와 함께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또 다른 본성에 관한 것이지 원리 자체는 아니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 '하나님 아래에'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하지 않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말한다. '하나님과 함께'라는 구절은 일종의 동등성을 나타낸다. 유비적 사물에 있어서, 산출되는 것은 그 원천에 비해 언제나 열등하고, 등급이 낮으며, 덜 완전하다는 것이다. 일의적 사물에 있어서, 산출되는 것은 언제나 그 원천과 같다. 똑같은 본성에 참여할 뿐 아니라 단일하고 전체적이며 동등한 방식으로 그 원천으로부터 모든 본성을 받는다. 그리하여 ‥‥ 발출하는 것은 그 원천의 아들이다. 아들은 위격으로는 타자이나 본성으로는 타자가 아니다.

 

엑카르트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인과율에 입각한) 유비 모델을 배격한다. 삼위일체 안에서 남음의 개념은 삼위일체 사이를 지배하는 본질의 동일성을 전달해야 한다. 그리하여 엑카르트는 말씀의 '낳음'이라는 이 원리를, 피조물에서 가시적 형태로 존재하는 완전한 것들과 하나님에게 있는, 그것들의 원천 간의 관계에 적용한다. 다음 단락의'의로움''의인'은 모든 초월적 완전성을 표상한다.

 

의인은 의로움에서 나오며 의로움이 의인을 낳는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로써 의인은 의로움과 구별된다. 그 무엇도 자신을 낳을 수는 없다. 본성상 의인은 의로움과 다르지 않다. '희다'가 하양의 특질만을 표상하듯 '의롭다''의로움'만을 표상한다. 의로움의 본성이 장소에 따라 바뀐다면 의로움은 아무도 의롭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하양이 누군가를 검게 만들지 못하고, 문법이 사람을 음악적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로써 분명한 것은 ‥‥ 의인은 의로움의 자손이며 아들이라는 것이다. 하나(One)는 본성으로서 타자가 아니라 인격으로서 타자가 된다는 점에서 아들이 되며 아들이라고 불린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10:30). 우리는 인격으로는 구별된다. 그 무엇도 자신을 낳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성으로는 하나다. 그렇지 않다면 의로움은 의인을 낳지 못할 것이고, 아버지는 인격으로 타자가 된 아들을 낳지 못할 것이며, 낳음이 일의적이 되지도 못할 것이다. ‥‥ 아버지와 아들, 의로움과 의인이 본성에 있어서 하나이고 동일하다면 ‥‥ 의인은 의로움과 동등하며 의로움보다 못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아들도 아버지보다 못하지 많다.

 

여기서 엑카르트는 하나님과 그분 피조물 의로움과 의인 사이의 한 가지 형상적 구별을 언급한다. 의인의 의로움은 '낳아지는' 대상이지 '낳는'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원리로서의 의로움과 의인의 의로움은 동일하다. 그렇다면 엑카르트에게 하나님과 그분 피조물 사이의 진짜 구별은, 의인이 의로운 한에서(inquantum 의인과 의로움이 동일하다는 사실에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온전히 선하시고 의로우시며 지혜로우시지만, 우리는 단지 부분적으로만 그러하다는 것이다. 라틴어 작품 가운데 명제집 서문(protogi in Opus propositionum)은 엑카르트가 피조물의 완전성이 창조주 자신의 실체에 속한다고 간주한 방식의 사례를 다수 제공한다. 그러나 이런 개념이 가장 일관되게 표현된 곳은 독일어로 된 신적 위로의 서고귀한 사람이다.

 

선은 창조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태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선이 선한 사람을 낳는다. 그리고 선한 사람은 그가 선한 한 만들어진 것도 창조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태어나며, 선의 아들이다. 선은 선한 사람에게서 선 자체를 그리고 선인 모든 것을 낳는다.

 

'‥‥ 인 한의 원리'에서 일치와 구분이라는 더욱 중요한 원리가 나온다. 본디 초월적인 것이나 '완전한 것'은 일치라는 조건으로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 그분에게는 구분이 없지만 진리와 선과 존재는 불가분리적 일치를 이룬다. 그러나 그 초월적 특성을 유한한 비율로 소유할 따름인 피조물에는 필연적으로 구분이 있다. 따라서 엑카르트에게 하나님은 당신 피조물의 다양성과 구별되는 절대 일치의 원리(the principle of absolute unity)를 의미한다.

 

자체로 풍요로음" 첫째이자 상위에 있는 것의 본성은 자신의 속성을 지닌 하위의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작용한다. 그 속성 가운데 '일치''구분할 수 없음'이 있다. 하위의 것에서 구분되는 것은 상위의 것에서는 언제나 하나이며 구분되지 않는다. 이로씨 상위의 것은 결코 하위의 것에서는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그러나 구분되지 않은 채 머무르면서도 상위의 것은 하위의 것에서 구분되어 있는 것을 모으고 일치시킨다.

 

 

하나님과 존재

 

하나님으로서의 존재

중세의 무수한 신학자가 그러했듯이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존재, 존재의 본질, 존재의 기원 문제에 매료당한다. 하지만 오늘날 실존주의 철학에서의 일반적 경우와 달리 엑카르트에게 존재란 그 자채 현상으로 여겨지기보다는 오로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된다. 이 관계에 대한 엑카르트의 진술 가운데 역설적으로 드러날 것들로 인해 범신론(pantheism)이라고 고발당하기도 했다. (그리스도인에게) 법신론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구별을 없애는 일종의 신학적 오류다. 하지만 두 가지만 분명히 유념한다면 하나님과 존재에 관한 엑카르트의 가르침은 한결 수월해진다.

 

첫째, 애초부터 하나님과 존재에 대한 엑카르트의 가르침은, 앞서 논의한 유비론의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선행하는 초월적 속성(그중 하나가 존재다)이 하나님과 사물 모두에 존재한다. 그것들이 하나님에게는 무한히 존재하고 피조물에게는 ("인 한의 원리'에 따라) 유한하거나 부분적으로 존재한다는 엑카르트의 믿음을 이해하게 되면, 존재에 관한 그의 진술들이 자연스레 들어맞을 것이다.

둘째, 엑카르트가 "존재는 하나님이다(Esse est Deus)"라고 거듭 말하는 뜻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은 그의 삼부작(Opus triptirtitum) 서문 전체에서 드러난다. '존재는 하나님이다'가 때로 '하나님은 존재다'라는 의미로 이해되기도 했지만, 이 진술은 엑카르트가 하나님에 관해서가 아니라 존재에 관해서 무언가를 간절히 말하고자 했음을 드러낸다는 칼 알베르트(Karl Albert)의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

말하자면 엑카르트는 존재에 두 가지 유형이 있음을 알려 준다. 그는 첫째 유형을 '존재'(esse), '절대 존재'(esse absolutum), '단순 존재'(esse simpliciter) '존재 자체'(esse ipsum)라고 부른다. 둘째 유형은 '이러저러한 존재'(esse hoc et hoc; esse hoc aut aliud; esse hoc aut aliut; esse huius, '그렇고 그런 존재'(esse tale), '특정 존재'(esse determinatum)라고 부른다. 첫째 유형은 하나님의 존재로, 무한하고 어떤 혼합에 의해서도 더럽혀지지 않는다면, 둘째 유형은 세상 안에 있는 실체들의 한정되고 제약된 존재다.

 

하나님 홀로 합당한 의미에서 존재이고, 하나이고, 진실하고, 선하다. 다른 모든 것은 이런 존재(예컨대 돌, 사자, 사람), 이런 하나, 이런 진실함, 이런 선함(예컨대 선한 마음, 선한 천사)이다.

우리는 절대 존재와 이러저러한 존재에 관해 달리 판단해야 한다. '하나', '진실하다', '선하다' 같은 용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하나의 존재가 있을 뿐이며 이것이 하나님이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존재는 많다.

1) 하나님 홀로 합당하게 존재이고, 하나이고, 진실하고, 선하다.

2) 만물은 그분으로부터 존재하고, 하나이고, 진실하고, 선하다.

3) 만물이 존재하고, 하나이고, 진실하고, 선하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그분 덕이다.

4) 이런 존재, 이런 하나, 저런 하나, 이러저러하게 진실하고, 이러저러하게 선하다고 말할 때, '이런' 또는 '저런'은 존재, 하나, 진실하다, 선하다에 결코 아무것도 보태지 않으며 실체, 일치, 진리, 선을 더하지도 않는다.

"존재는 하나님이다"라는 명확한 진술은 엑카르트가 '존재'라는 말을 하나님과 피조물 둘 다에 일의적(같은 의미를 지닌으로 적용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는 무한한 반면 피조물의 존재는 유한하고 특정하다는 사실로써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구별이 견지됨을 제시한다. 이는 엑카르트 유비 이론의 '인 한 원리'와 철저히 부합한다.

미완성의 삼부작 서문에서 개관하고 있는 엑카르트의 형이상학적 관점에서는 한정되고 제약된 각양각색 사물의 존재와, 자유롭고 변함 없으며 '더럽혀지지 않은' 하나님의 존재 사이의 이러한 구별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물론 창조된 다양한 상태로 피조물에 존재하는 모든 초월적 속성은 하나님에게도 존재한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신적 본성의 특성인 절대적 하나임(一性, oneness)이라는 조건으로 존재한다. 엑카르트는 하나님 본성을 지칭하는 미묘한 방식을 발견하여, 하나님 본성을 존재의 '순수함'(puritas) '충만함'(plenitude), '부정의 부정'(negatio negationis), '하나', '지성', '순전한 무'(nihtes niht)로 다양하게 부른다. (엑카르트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따온 문구인) 존재의 '순수함'은 하나님 본성이 온전히 단일하며 아무런 보탬이 없다는 뜻이다. 반면에 '부정의 부정'은 하나님의 무한함을 표현한다. 창조된 무언가의 본성을 규정하는 것은 동시에 그것이 무엇이 아닌지를 말하는 데 반해, 창조되지 않은 분인 하나님의 본성을 규정하면서 우리는 부정의 원리 자체를 부정한다. 그리하여 부정의 부정은 "하나님에게 적용되면서 가장 순수한 형태의 긍정"이 된다. 그러나 엑카르트의 풍부하고 융통성 있는 용어 구사에도 불구하고 어떤 주제들은 동일성을 유지한다. 하나님에 관한 엑카르트의 사유 전체가 양극을 오간다. 한쪽이 피조물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온전한 초월을 나타낸다면, 다른 한쪽은 하나님의 내재를 나타낸다. 이 하나님은 피조물의 존재, 곧 우리 존재의 바로 그 토대다.

 

 

지성으로서의 하나님

엑카르트가 하나님과 존재의 관계에서 아주 상이한 관점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는 무수히 많다. 그의 삼부작에서도 이 점이 드러난다. 삼부작에서 엑카르트는 '절대 존재', '단순존재', '존재의 순수함'으로서의 하나님과 '특정 존재', '이러저러한 존재'로서의 당신 피조물을 구별한다.

 

그는 파리 토론집(Quaestiones Parisienses)에서 '지식'으로서의 하나님과 '존재'로서의 피조물을 간단히 대치시킨다. '존재'인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라 그분의 피조물일 뿐이다. 유비와 낳음(generatio)에 대한 엑카르트의 이론 체계가 일종의 내재신학(theology of immanence)에 담긴 하나님과 피조물간 연속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면, 삼부작파리 토론집 서문에서는 하나님이 피조물을 초월하는 그 정도를 더욱 강조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엑카르트 사유의 발전 과정보다는 내재와 초월의 균형 있는 변증법을 유지하려는 시도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우선 파리 토론집의 첫째 토론에서, 하나님에게서 '존재''지식'의 관계에 대한 엑카르트의 통찰을 고찰하도록 하자. 엑카르트가 말하는 지식이란 '배운 것'이라기보다는 '이해'(understanding)이거나 실로 그 자체로 깨어있는 '인식"(knowing)을 의미한다. 그는 존재와 지식이 실제로는 동일하다는 진술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지성이며 이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해는 그분 실존의 근저다.' 그러나 논증을 펼처 나가면서 엑카르트는 지식 / 이해와 존재 간의 근본적 분리를 깨달았음이 분명해진다. "나의 첫 주장은 이해가 실존보다 우위에 있으며 다른 질서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엑카르트는 우주의 지적 질서와 요한복음 머리글을 거론한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이는 전적으로 지성과 연관된다." 더욱 중요하게는 "피조물의 으뜸은 실존이다"라는 (프로클로스의) 개념을 인용한다. 존재의 원인인 하나님은 존재에 앞서야 한다는 의미다. 엑카르트는 삼부작, 축복의 서, 요한복음 주해에서 그토록 광범위하게 다룬 인과율 모델, 즉 원인은 자신과 닮은 것을 낳는다. [(the Good)은 선함(goodness)의 원인이다]는 견해를 포기하는 대신, 원인이 그 결과와 다르거나 결과보다 우위에 있다는 모델을 채택한다. 이 둘째 인과율 이론을 설명하고자 엑카르트는 점()에서 비롯된 선()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점이 결코 선이 아닌 것처럼, 원리는 원리에서 비롯되는 것과 결코 같지 않다." 하지만 엑카르트는 이해가 하나님의 존재 방식임을 강조하면서 여전히 하나님 안에서 이해와 존재를 화해시키고자 한다. 그는 "실존이 아니라 실존의 순수함이 하나님에게 있다"면서, "물론 여러분이 이해를 실존으로 부르고 싶어 한다면 나는 괘념치 않는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파리 토론집의 둘째 토론은, 첫째 토론에서보다 이해와 존재 간의 한층 더 날카로운 구별을 다룬다. 비록 엑카르트가 그 주제를 천사들과 관련해 논하기는 하지만, 하나님뿐 아니라 인간 지성과도 관련되는 그의 사상적 발전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내용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지성이 '어떠한 것과도 혼합되지 않으며', '공통되는 바가 없어', '온갖 것을 알' 수 있다는 취지에서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 내린다. "지성이 다만 지성인 한 아무것도 아니라면, 이해 역시 실존이 아니다." 앞서 엑카르트가 '절대 존재'의 불확정성이 절대 존재라는 용어를 하나님에게 귀속시키는 데 중요하다고 본 것처럼, 이제 그의 흥미를 끄는 것은 지성의 불확정성, 지성의 '비실존'이다. "지성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있는 것도 아니며, 확정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모든 존재나 실존은 한정된 유()와 종()으로 있다. 따라서 지성은 존재가 아니며 실존을 지니지도 않는다." 이 내용은 다음의 독일어 설교로 이어진다.

 

어리석은 교사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순수한 존재라고 한다. 최고 천사가 한 마리 모기보다 우월하듯이 하나님은 존재 저 위에 있다. 내가 하나님을 존재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태양을 창백하다거나 검다고 부르는 것처럼 잘못된 것이다. ‥‥ 존재 안에서 하나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분의 거처 앞마당에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때 그분은 당신 성전 어디에 계시며 거룩함의 어디에 나타나시는가? 지성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이 당신 성전에서보다 참으로 거처하시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다른 스승의 말로 표현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지성 자체에 대한 지식만으로 사는 지성이며, 그 자체 안에 머무르는 지성이다. 그곳에서는 그 무엇도 지성을 건드리지 못한다. 그곳에서 지성은 지성의 고요 속에 혼자이기 때문이다. 자기 인식에서도, 하나님은 당신 안에서 당신 자신을 인지하신다.

 

이런 내용은 또 다른 (라틴어)설교에서도 메아리친다.

 

지성은 분명 하나님께 속하며, 하나님은 하나다'. 따라서 지성과 지성적인 것을 알게 되는 만큼 하나님과 하나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합일적 실존'(One-existence)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하나님은 단 하나의 지성이며 지성은 단 하나의 하나님이다. 지성이 아니고는 그 어디에서도 우리는 결코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

 

 

하나이자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하나님

마지막 두 인용문은 지성으로서의 하나님 개념이 엑카르트에게 하나님의 유일성(unicity) / 하나임(oneness)을 얼마만큼 확증하는지 보여 준다. 이는 엑카르트 사유의 중요한 측면이라, 그는 이 내용을 거듭 언급한다. 그중에는 모든 초월적 완전성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존재한다는 논증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모든 완전함은 하나다. 그분 안에서 완전함의 수량이란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자기 자신을 통해, 즉 다른 사물이나 어떤 매개체가 아닌 자기 본질을 통해 하나님 자체를 보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단 하나의 완전함을 보게 될 것이다. 모든 완전함을 통해서 그 단 하나의 완전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완전함 안에서 그리고 그 완전함을 통해서 모든 완전함을 보게 될 것이다‥‥ 누군가 자신이 보는 그것에, 그것을 통해서, 그것 안에서 이름을 부여하고자 한다면 그 이름은 필시 '하나'일 것이다.

 

엑카르트는 파리 토론집 첫째 토론에서 앞서 본 지식과 존재의 동일시를 상기시키면서 "하나(the one)와 존재(being)는 서로 바뀔 수 있다", '하나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은 실존에서 떨어져 나온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그는 "구분이란, 그것이 하나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인 한, 실존의, 하나의, 그리고 선함의 상실이다"라고 진술하면서, 다른 곳에서는 "실존은 언제나 하나에 머물며, 그러한 한 다수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지성''존재'로서의 하나님을 다루었을 때와 같은 용어 사용의 융통성을 발휘하여, 하나는 그 자체로 존재를 넘어선다고 단언한다.

하나로서의 하나님에 관한 엑카르트의 언급은, 지성으로서의 하나님과 존재로서의 피조물이라는 패러다임의 경우에서 보다 하나님과 피조물 간의 더욱 철저한 단절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초월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내재로써 균형을 이룬다. 엑카르트는 하나님의 절대적 유일성을 탐구하여 신플라들주의적 유출(emanation) 구조의 변증법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변증법을 확립한다. 만물이 유출에 의해 하나로부터 '내려'오지만 그럼에도 하나에 계속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으뜸이 되며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존재, 자신의 형이상학적 우위(metaphysical priority)를 통해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하나님의 존재는, 자신을 만물로부터 그리고 세상 모든 존재로부터 면밀히 구별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엄밀하게도 어떠한 피조물과도 구별되지 않음으로써 모든 피조물과 구별된다. 복잡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이 정식(定式)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넘어서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동일한 변증법적 형식을, 유일성에 대한 신플라들주의 형이상학 용어로 재진술한 것이다. 바로 이 같은 변증법적 형식으로 엑카르트는 자신의 신론에서 유비와 '지성''존재'를 다루었던 것이다.

엑카르트는 하나님을 하나라고 부르는 데 대체로 만족하면서도, '부정의 부정'이라는 또 다른 관점에서 하나님의 하나임이라는 주제를 상술하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엑카르트는 '하나'가 하나님에 대한 그 어떤 것도 긍정적으로 언명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이것이 하나님에게 무언가를 '보태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참된 본성을 가리는 경향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분 자체로 계신 것이다.

 

바울 사도는 '한 분 하나님'을 말한다. 하나는 선함이나 진리보다 순수한 어떤 것이다. 선함과 진리는 아무것도 보태지 않으면서도 사고를 보탠다. 사고할 때 무언가 보태지는 것이다. '하나이신 분'은 아무것도 보태지 않으며, 거기에서 그분은 아들과 성령에게로 흘러들기 이전에 그분 자체로 계시다. 그분은 "벗이여, 더 높이 오르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스승은 "하나는 부정의 부정이다"라고 말한다. 내가 하나님은 선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보태는 것이다. 하나는 부정의 부정이며 부인(否認)의 부인이다. 하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무것도 보태지지 않은 것이다. 영혼은 아무런 보템이나 어떠한 사고도 없이 그 자체로 정화되면서 신성을 받아들인다. 하나는 부정의 한 부정이다. 모든 피조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부정을 지닌다. 하나는 다른 하나가 아님으로써 부정하는 것이다. 한 천사는 다른 천사가 아님으로써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정을 부정한다. 그분은 하나이며 다른 모든 것을 부정한다. 하나님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W 97).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하나는 하나님을 언급하는 부정적 방식으로 부각 된다. 그럼에도 이 방식은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긍정적이다. 어떤 피조물을 규정함으로써 동시에 그 피조물이 무엇이 아닌지를 언명한다는 것이 엑카르트의 견해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정의 부정'으로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어떠한 것도 보태지 않고 (그리하여 그분의 참된 본성을 가리지 않고)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는 용어로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대목에서 엑카르트는 하나님을 '하나'라고 언급하는 것이 실제로는 그분에게 어떤 것을 '보태는' 것이라는 모순된 견해를 제시한다.

 

그러나 존재와 선함과 진리는 동일하게 펼쳐져 있다. 존재가 펼쳐지는 한 그것은 선하고 또한 진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선함을 취해서 그것을 존재에 덧댄다. 선함이 존재를 감싸고 존재에 껍질이 된다. 그것은 보태진 어떤 것이다. 또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분은 진리라고 여긴다. 존재는 진리인가? 그렇다. 진리는 존재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은 모세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3:14)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우구스터누스는 말한다. "진리는 아버지 안에 있는 아들이다. 진리는 존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존재는 진리인가? 그대가 허다한 스승에게 묻는다면, 그들은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내게 묻는다면, 전에는 "그렇다"라고 대답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진리 또한 보태진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분은 하나라고 여긴다. 하나는 합쳐진 것보다도 진실로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으로부터 다른 모든 것이 제거된 것이다. 그런데 제거된 것도 엄밀히 보면 보태진 어떤 것이다. 그것은 별개의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하나님이 선함도 아니요 존재도 아니며 진리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라면, 과연 그분은 무엇인가? 그분은 순수한 무다. 그분은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니다. 그대가 그분을, 그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분은 그것이 아니다(W 54).

 

이런 대목들은 엑카르트가 철저한 부정의 언어로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 준다. 따라서 그분에게는 아무것도 '보태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드러내기보다는 감추는, 하나님의 이름과 긍정적 언어를 사용하는 부적절성은 언어상의 과정 자체를 파괴하는 듯한 부정적 진술을 사용함으로써 어느 정도 해결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순수한 무'가 되며, '고독'' '광야'(einὄe/wiiestunge(W 66)가 된다. 또 그분은 "알려지지 않는, 전혀 알려진 바 없는, 결코 알려지지 않을 영원한 신성의 감추어진 어둠"(W 53)이다.

 

 

결론

엑카르트는 하나님을 존재, 존재의 순수함, 지성, 하나이자 절대 무성(絶對無性, abso1ute nothingness)으로 본다. 그가 하나님의 정체를 이 네 가지 중 하나로 단언하고 있는 각 대목들에는, 이 특정 용어가 하나님께 적용될 수 있음을 그가 구체적으로 부정하는 또 다른 구절들이 있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전적인 초월을 드러내 주는 넷째 용어조차도,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이 당신 본질을 인간 영혼에 부어 주신다는 (하나님 탄생'에 관한 가르침에서 표현되는) 엑카르트의 견해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만 여기서 엑카르트가 용어들을 혼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남득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석자가 엑카르트 작품에서 어떤 체계를 구축함과 동시에 같은 작품에서 또 하나의 (완전히 다른) 체계를 구축할 수도 있다는 취지로 에터엔 질송(Etienne Gilson)이 논평한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같은 혼동은 대부분 우리가 근거 없는 가정으로 엑카르트에게 접근하는 경우가 찾은 데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스콜라철학(어쩌면 대부분의 철학)은 사고나 체험에서 비롯된 구상을 통해서 고정된 준칙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사상가들에게 명료함과 정밀함을 요구할 뿐 아니라, 그들이 전체적 구도에서 틀과 목적을 제시하는 확고한 입장을 고수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한 철학을 정지 화면으로 세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로 본다면, 엑카르트의 사유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동영상이다. 이는 그 자체로 역동적이고 생산적이며 통찰력 있는 그의 진리관을 의미한다. 엑카르트에게 진리란, 새로운 형태의 의식(awareness)이나 인식 존재로의 '돌파'. 엑카르트는 하나의 명제(가령 '존재는 하나님이다')를 취하는 즉시 그 핵심에 이르기 위해 명제를 무너뜨려 전복시킨다. 그리하여 정신은 피조물의 존재로부터 하나님 안에서의 존재의 순수함이나 충만함으로, 하나님 안에서의 존재에 앞서는 정신이나 유일성의 원리로 이끌린다. 또 거기에서부터, 개념이나 말로는 도달할 수 없는 순전한 무이며 부정인 하나님에게로 이끌린다. 창조된 우주와 사유와 언어가 지니는 질서 정연한 구조가 바로 그 창조라는 한계에 부딪혀 무너지고 그 속으로 사라지고 말 일종의 형이상학적 블랙홀을 창조하는 데 엑카르트의 의도가 있다. 엑카르트의 존재론은 형이상학적 여정이다. 통상의 피조물 존재에서 출발하여 (언어와 개념을 전복함으로써) '신성의 감춰진 심층'에서 이 여정은 끝난다.

이런 과정은 불가피하게도 숱한 역설과 용어 변화와 외견상의 비일관성을 포함한다. 이를테면 존재관이 극적 변화를 겪는다. 피조물에게 존재는 신적 생명의 표지이지만(하나님을 드러내지만), 신격(divinity)에서 존재는 신적 본성을 가린다(감춘다). 외연(ad extra)으로, 즉 피조물의 관점에서 볼 때 존재는 하나님이다. 우리의 정신이 존재를 통해 신성 자체로 올라간다면 그때 존재는 신적 본성이었던 것으로 보이기는 커넘 오히려 지성, 광야, 어둠과 더 유사한 초본질적 근저(superessential ground)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는 하나님 '안에' 있지만 하나님 밖의 피조물에게 보일 수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과 합일함으로써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존재는 하나님을 드러냄과 동시에 숨기는, 그분의 겉옷이다. 존재는 하나님이 거처하시는 '성소의 '앞뜰'이다.

엑카르트의 사유를 알리고 형성하는 또 다른 결정적 요소는 변증법 요소다. 즉 우리를 무한히 넘어서면서도 우리 안에서 끝없이 현존하는 원리를 따르는 일치와 대당의 구조다. 실로 초월과 내재라는 두 주제는 엑카르트 사유의 양극을 규정한다. 우리 존재가 하나님이라면, 다만 참으로 존재를 소유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지성이며 존재를 무한히 넘어선다면, 그때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성인 한 지성의 능력을 소유하며 하나님과 하나일 수 있다. 하나님이 모든 말과 개념을 넘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감추어져 계시다면, 그때 우리 안 영혼의 근저에서 자신을 낳는 분은 바로 같은 하나님이다. 과연 엑카르트는 자신의 작품에 담긴 변증법의 충만한 의미를 출애굽기 주해(Expositio tihri Exodi)에서 요약한다. "창조주와 피조물만큼 서로 닮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는 반대로, 창조주와 피조물만큼 서로 닮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는 '실존 자체'인 하나님은 특정하게 존재하는 여하한 사물과도 구별된다는 이유에서 전자의 진술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피조물이 자신의 실존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는 이유로 후자를 정당화하면서 묻는다. "자신이 그 무엇과 맺는 관계나 질서로부터 자신의 총체적 실존을 얻어 소유하는 것만큼 그 무엇과 유사한 것이 있을까?"

엑카르트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무한히 넘어서시면서 동시에 우리 안에 친밀히 현존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그 말 자체를 뛰어넘어 깊은 신비를 가리키는 복잡하고 모순된 진리다. 엑카르트에게서 드러나는 이 진리에 놀라워할 필요는 없다. 변증법적 사고(여기서 변증법은 보다 깊고 파악하기 어려운 진리를 위해 분명히 모순되는 두 가지 진리를 함께 고수하려는 창조적 사유의 한 유형을 의미한다)는 그리스도교 교리나 체험에 적절한 사유 형태인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일치 안의 삼위(Trinity in Unity)라든가, ()이 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라든가, 자기 생명을 잃는 이는 생명을 얻으리라는 식의 역설적 표현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 '닮았'으되 '담지 않았다'는 개념에서도 힘을 얻는다. 4차 라데라노 공의회 진술로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더 멀어진다. 따라서 그 자체로 '인간적인 것''신적인 것'의 상호 관통인 근본적 그리스도교 신비에 토대를 두고 있는 엑카르트 사유의 변증법적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엑카르트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 실패하고 말 것이다. 이 신비는 엑카르트 자신의 체험 한가운데로부터 빛을 발하면서, 그의 지적 세계에서 비롯된 정규 신학을 그 내적 동인에 부합하게 '맞추도록' 도와준다. 그리하여 스콜라신학은 엑카르트에게서, 드 세르토가 표현 방식(maniUre de parler)이라고 칭한 대로 하나님과의 일치를 위한 인격적 · 신비적 통찰의 표현수단이 된다.

 

 

창조주 하나님

중세인들을 매료시킨 또 다른 영역을 고찰하지 않고는 엑카르트의 기초신학 탐구를 마무리할 수 없다. 창조에 관한 의문은 예민한 문제였다. 세상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영원으로부터(from all etemity) 존재했다고 가르친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이 재조명되어 크나큰 명성과 영향력을 발취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유대 · 그리스도교 전통과 명백히 충돌하는 사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서구에 처음 도입한 일부 아랍 사상가들도 영원으로부터의 세계 존재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따랐다. 1272년 파리의 주교 스데판 탕피에는 세상이 영원으로부터 존재했다는 명제를 비롯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급진적 명제를 단죄했다. 창조 원리를 저해하는 듯한 내용이면 무엇이든 민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맥락에서, 창조 교리에 관한 엑카르트의 가르침도 주요 단죄대상 중 하나가 되었다. 도미니코회 땅에 첫 세 조항은 엑카르트가 세상이 영원으로부터 존재한다고 가르쳤음을 시사하지만 실상은 절대 그렇지 않다. 맥락에서 벗어난 일부 진술이 그렇게 비춰졌을 뿐이다. 엑카르트는 창조에 관해 언급하면서 하나님이 '영원으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기꺼이 진술한다. 하나님 자신이 시간 밖에 계시는 분이기에 그분이 하시는 어떤 일도 시간 안에 있는 것으로 여길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이러한 의미에서 영원으로부터 있다. 세상이 영원으로부터 있다고 가르쳤다는 비난에 대해 그가 변론에서 언급한 내용을 보면 아주 명백해진다.

 

창조를 비롯한 하나님의 모든 활동은 바로 하나님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영원으로부터 창조하셨다고 해서, 세상도 영원으로부터 존재한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창조된 것 자체가 영원하지 않듯이 창조는 영원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창조는 과거에 발생하여 그 결과가 현재에 이르는 어떤 것이 아니라 실제로 계속되는 것이라고 엑카르트는 주장한다. 이런 취지에서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주님, 당신께서 우리를 만들지 않으셨다면 그 어떤 길로 우리 안에 존재와 생명이 흘러들었겠나이까"라는 구절을 즐겨 인용한다. 엑카르트의 창조 해석을 요약하면서 아르망 모러(Armand Maurer)는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만물을 창조하셨지만 창조는 언제나 현재에 이루어진다. 창조 행위는 과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늘 생겨나고 진행 중이며 새롭다."

이러한 사상에 관한 훌륭한 예는, 엑카르트가 지혜서 주해에서 '나를 먹는 이들은 더욱 배고프고'(집회 24:21)라는 성경 구절을 해석하여, 존재의 매개로서 창조를 유비에 관한 자신의 사유 맥락 안에 확고히 하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온갖 존재는 그리고 존재 축에 드는 온갖 것은 자신이 갈망하는 실존을 그 자체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위로부터 소유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실존은 고정된 것도, 타고난 것도 아니며, 그 원천이 자신에게 있지도 않다. 또 개념상일지라도, 상위가 없을 때는 남아 있지 못한다. 이것이 존재가 언제나 상위의 현존을 갈망하는 이유다. 존재는 실존 자체를 확고하게 또는 처음 그대로 지닌다기보다는 계속 실존을 부여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낫거나 적절하다.

 

 

피조물의 무

하나님으로부터 존재를 부단히 유입함으로써 피조물이 실존을 유지한다는 창조신학을 명확히 전개하면서도, 엑카르트가 피조물의 순전한 무성(無性)을 언급하는 곳은 무수히 많다.

 

모든 피조물은 순수한 무다. 단지 그것들이 보잘것없다거나 특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존재가 없는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창조된 온갖 것은 무의 그림자를 지닌다.

그리하여 창조된 온갖 것은 본질적으로 무로부터 있으며 무다.

 

마지막 인용구는 이 진술에 담긴 엑카르트의 의도를 암시하면서, 아비뇽의 엑카르트 제판관들이 피조물의 무에 관한 명제를 단죄 조항 26번에 포함시키는 오류를 범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엑카르트는 출애굽기 주해의 한 대목에서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고자 히에로니무스도(Hieronymus)를 인용하는데, 거기에서는 피조물의 무가 하나님 존재와 비교되어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의 실존은 하나님의 실존과 비교되지 않는다." 그리고 같은 곳에서 엑카르트는 이것이 자신이 뜻하는 바임을 아주 분명히 한다.

 

어째서 하나님과 피조물을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한지에 대해 어쩌면 더욱 미묘한 이유들이 제시될 수 있겠다. 비교란 최소한 두 가지 대상을 필요로 하며 그것들이 구별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어떠한 것도 그 자체와 비교될 수 없으며 그 자체와 닮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자제로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되어 별개라고 여겨지는 온갖 창조된 존재는 하나의 존재(a being)가 아니라 무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구별되는 것은 실존으로부터 분리되고 구별된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으로부터 있고, 하나님을 통해서 있고,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1 합일의 신학.hwp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