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합일의 표상

 

 

 

앞 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합일에 대한 엑카르트의 통찰이 그의 형이상학과 기초신학의 틀을 형성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이러한 직관이 어떻게 그의 신비신학을 결정하고 제시하는지를 볼 것이다. 우리가 다룰 특징 전략을 개념시(槪念詩, conceptual poetry)라고 칭할 수 있다. 이는 추상적 이미지를 교묘히 처리한 것으로, 케리그마의 표현력을 높이기 위해, 곧 하나님과 우리의 관련성(relatedness)의 가장 깊은 영역을 구명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영혼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다. 이 관련성에는 두 가지 중요한 차원이 있다. 첫째는 우리 안의 신적 형상에 대한 가르침이고, 둘째는 영혼 속 하나님 탄생에 관한 가르침이다. 두 이미지 모두에서 엑카르트는 전통에 속하는 많은 것을 이용하면서 동시에 그 나름의 특별한 강조점을 창안해 낸다.

엑카르트의 존재론을 다루면서 우리는 그의 라틴어 저작에 의존했다. 라틴어 작품에서 그는 초월적 속성(존재, , 일치 등)과 유비를 다룬 중요한 논제들에 관해서 자신의 생각을 아주 명확히 표현한다. 이 장에서는 독일어 설교를 훨씬 많이 참고할 터인데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준 직관을 전달하고자 엑카르트가 가장 정성을 쏟은 설교가 행해진 곳이 바로 라인 지방 교회와 수도원들이다. 그는 설교를 통해, 단지 신성과의 신비로운 합일 가능성에 대해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거나 그 의미를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말한 바로 그 가능성을 청중에게 일깨우려 했다. 청중을 뒤흔들어 억측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그리고 일종의 형이상학적 충격'을 전하고자 엑카르트는 이러저러한 장치를 이용한다. 이는 엑카르트가 독일어 설교에서 사용한 언어가 고도로 융통성 있게 표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의 라틴어 논문에서 이미 확인한 것들이다. 설교는 모두 그 나름대로 역동적이고 화려한 특성을 지녔으며, 하나님 이름 짓기의 불가능함', '우리 앞 하나님 현존의 직접성', '인간 영혼의 초월적 잠재력' 등을 다룬 엑카르트의 핵심을 전달하기 위한 예리한 비유로 가득하다(일부는 불필요하지만 일부는 매우 효과적이다). 그런데 라틴어 본문과는 달리 독일어 설교는 전달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접하는 설교들 하나하나가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실제 가르침을 정확하게 전달한다고는 확신하기 어렵다. 실제로 그가 독일어 설교를 작성한 것이 아니라 보고문(reportationes) 형태, 말하자면 그 설교를 들은 당시 청중이 작성한 기록의 형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사정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비판본으로 발행된 약 100편의 설교는 그 형태와 내용에 있어서 대단히 정확하고 진실되다고 안심할 만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허점이 있고 오류의 가능성이 늘 존재한다.

 

 

 

 

I. 하나님의 형상

 

 

전통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련성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해석은 뚜렷한 두 전통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첫째는 히브리 전승으로,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image, 성경에는 '모습'. 이하 문맥에 따라 '형상'으로 번역하거나 '이미지' 그대로 사용 -옮긴이)으로, 하나님과 '닮게'(in likeness) 만들어졌다는 창세기의 진술(1:26 참조)에서 유래한다. 이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모두에서 변함없이 채택되는 주제이며, 우리 안에서 이 형상과 닮음을 이루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사유에도 큰 자극이 되었다. 초기 그리스 신학자들 가운데 이레네우스(Irenaeus)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 Alexandrinus)는 이 창세기 구절을 영적 인간학의 토대, 그리스도교 계시의 빛으로 본 인간 본성 이해의 토대로 삼았다. '형상'이란 우리의 자연적 존재인 데 반해, '닮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순응, 즉 우리가 성화되고 하나님 본성에 보다 가까이 이끌리는 과정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이런 견해는 특별히 영향력 있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한편 오리게네스(Ohgenes), 창세기 126절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영적 자아가 창조된 것과 관련되지만, 하나님이 "의 먼지로 사람을 빛으셨다"는 창세기 27절은 우리의 현세적 · 물질적 자아 창조와 관련된다고 주장했다. 다른 그리스 교부들에게는 형상, 지고한 정신(nous)관상(態想,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 평정심(apatheia,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세례(포티케의 디아도쿠스) 등으로 성립된다. 라틴 교부들도 우리 안에서 참으로 형상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부딪혔다. 3세기 신학자 데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에게 형상은 우리 자유의지이자 피조물에 대한 지배권이라면, 카르타고의 치프리아누스에게는 인내를 발취하는 능력이다. 다른 교부들에게 그것은 덕이나 영혼의 불멸성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과 우리의 자연스러운 관계(형상)와 은총 · 정화 · 수덕 실천을 통한 하나님에의 순응(닮음) 간의 그리스식 식별에 의지한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안에서 삼위일체의 표지가 정신 자체의 작용과 구성(기억, 지력, 의지)에서 드러나며,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알고 사랑할 때 그 형상이 우리 안에서 가장 충만히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초기 논쟁 중 일부가 중세기 동안 지속 되었지만, 대체로 (특히 보나벤투라로 대표되는) 프란치스코 학파는 우리 안 형상의 현존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본성적 사랑과 응답의 관점에서 보았다. 반면에 도미니코 학파,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와 엑카르트는 우리 안에서 형상을 이루고 또 우리를 하나님과 가장 닮게 만드는 그것을 존재로 인식하는 우리 고유한 능력의 특성을 즐겨 강조했다.

엑카르트가 부분적으로 전수받은 그리스 교부 전통은 인간 본연의 특성을 하나님의 형상 자체인 아들 그리스도와 관련지어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존재로 여겼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기도 한 하나님의 원형상(archetypal Image)에 참여하여 통합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완전해진다. 실제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필로(Philo)의 로고스 신학(Logos theology)에서 유래한 이 사상은 오리게네스와 고백자 막시무스(Maximus Confessor)의 작품에도 나타나며, 엑카르트에 이르러 한층 두드러진다.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에 관한 둘째 전통은 고대 그리스철학에서 연유하며, 엑카르트에게는 주로 신플라톤주의 사상으로 전해진다. 여기서 우리와 신적 존재가 특별히 닮은 점은 이성(理性) 또는 사유 능력이다. 이 점을 암시하는 첫 징후는 소크라레스 이전 철학자들(특히 아낙사고라스와 아플로니아의 디오게네스) 작품에서 발견된다. 고대 철학에서 천지창조를 다룬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Aimaios)에 실려 있다(그 일부가 중세 그리스도교 시대 때에도 남아있었다). 여기서 신의 '지도 원리'(to hegoumenon)를 인간에게 주입시키는 이는 데미우르고스(dmiourgos). 후대의 신플라톤주의 전통도 이와 같은 기본 관념을 담고 있다. 가령 플로티노스에게서 인간 정신은 신적 정신과 의심할 여지 없는 유사성을 지니는데, 이것이 플로티노스가 일자(一者, the One)라고 부르는 최고 원리의 첫 유출이다. 우리 안의 신적 형상이 우리의 지적 본성이라는 생각의 또 다른 중요 원천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Metaphysica)에서 신성(神性, deity)'자기반성적 정신'(noesis noeteos)이라고 모호하게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심리학 체계에 따르면 우리 존재의 최고 속성은 지적 본성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리의 고유한 내적 원리이자 세계의 응집 원리이기도 한 '로고스'(logos) 개념을 크게 발전시킴으로써 고대 후기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엑카르트가 물려받은 전통은 히브리 성경과 그리스 사상을 동시에 반영한다. 전자가 형이라는 개념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련성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내적 존재를 파악하는 능력에 가치를 둔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와 '신적인 것'과의 유사성을 가장 잘 반영할 터였다. 이제 엑카르트 이전의 전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그의 저작에서 이러저러한 형태로 부각되는 몇 가지 다른 개념을 살펴보자.

첫째는 '능동 지성'(active intellect)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엑카르트의 신플라톤주의 배경을 논하면서 간략히 다루었다. 이 개념의 원천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De anima) 35장의 어렵기로 유명한 대목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 안에는 온전히 능동적이며 그 자체로 가지성(可知性, intelligibility)원인인 무언가가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곳과 몇몇 다른 곳에서 이 '능동 지성'을 단독적이며 불멸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과연 후대 주석가들은 능동 지성의 이런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마침내 아랍인 아베로에스(Averroes)가 보편적이고 불멸하는 '능동 지성'의 존재를 추론해 냈다. 보편적이고 불멸하는 '능동지성은 모든 앎의 원천이며, 인간 정신은 살아 있는 동안에만 이 지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12-13세기 서구 라틴 세계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얻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 그가 '능동 지성'을 온전한 개별 인간 안에 확고히 자리매김한 것이다.

둘째 핵심 주제는 '영혼의 근저'(ground of the soul). 이는 말하자면 우리 존재의 초월적 본질이다. 소크라데스 이전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온갖 길을 돌아다녀도 그대는 영혼의 한계를 찾지 못할 것이다. 영혼의 가치는 그처럼 심오하다"고 기술했다. 니사의 그레고러우스와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Johannes Scotus Eriugena)도 헤아릴 수 없이 심오한 신성(神性) 같은 것이 우리 안에 있다고 상정했다. 하지만 엑카르트에게 이 용어의 직접적 원천은 라틴어 fundus animae(영혼의 근저) / abditum animae(영혼의 심층)이다. 이 말은 본디 프라이베르크의 디트리히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차용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fundus(근저)memoria(기억)이며, 그는 이를 우리 의식에 즉각 나타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지식을 담지하는 정신의 놀라운 능력이라고 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X, 8)에서 이 개념을 빼어난 솜씨로 구사했다. 그는 프로이트 이래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알아 온 인간 정신의 어떤 기능들에 우리 주의를 돌리게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앞 장에서 라인 지방 학파를 다를 때 보았듯이, 도미니코 학파의 탁월한 업적 중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능동 지성''영혼의 근저'와 동일시함으로써 인간 영혼의 본질은 그 자체로 지성적이라는 관점을 확립한 것이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가장 깊은 본질에 있어서는 우리 자신이 곧 정신이다.

더불어 논의해야 할 또 한 가지 주제는 '영혼의 불꽃' (synderesis)이다. 이 개념은 본디 4세기 학자 히에로니무스에게서 유래한다. 히에로니무스는 에스겔서 첫 장 주해에서 에스겔의 환시에 나오는 네 동물을 영혼의 네 부분에 관한 플라톤의 학설에 비추어 해석했다. 그는 처음 셋을 이성(togikon), 의지(thumikon), 욕정(epithumikon)이라 부르고, 넷째는 그리스인들의 표현을 빌려 synderesis라고 부른다. 이것은 카인의 마음에서조차 사그라지지 않은 '양심의 불꽃'이다. 그런데 이 말은 그리스어 사전에 나오는 말이 아니라서 '양심'을 뜻하는 syneiesis의 오기(誤記)라는 주장이 있었다. 오기일망정 영향력이 있었기에 이 단어는 중세에 이르러 본격 토론에 부처졌다. 엑카르트에게 고유한 '영혼의 불꽃'의 일차적 원천은 바로 이 '양심의 불꽃'이다. 이것은 우리의 고유한 지성적 본질에 관해 앞서 개관한 주제들과 섞여 윤리적 의미보다는 오히려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띤다.

 

 

영혼의 근저

인간 영혼의 본성에 대한 엑카르트의 논의는 광범하고 다양하다. 여기서 많은 문제가 제기된다. 단지 엑카르트의 개념이 복잡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용어 구사가 변화무쌍한 까닭이다. 그리고 이것은 엑카르트만의 독특한 방식이다. 엑카르트가 사용하는 다양한 이미지와 표현을 확인하고나서, 그가 논하는 보다 심도 있는 구조들을 새삼 통찰할 필요가 있다. 엑카르트 입장의 근간이 되는 일관성과 통일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형상으로서의 인간 영혼은 하나님 형상인 아들과 관련하여 창조된다는 엑카르트의 언명으로 시작하자. 엑카르트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제4 복음서 저자를 따라서 만물이 아들을 통해 창조된다고 믿는다. "천상 아버지께서는 한 말씀을 영원토록 말씀하신다. 그 말씀으로 그분은 당신의 모든 권능을 펼처 보이시며, 당신의 완전한 신적 본성과 모든 피조물을 발설하신다"(W 35). 그런데 하나님 형상으로서, '모든 피조물'과 인간 영혼 간에는 차이가 있다. '그분은 영혼 안에서만 비옥하시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흔적이기는 하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자연적 형상이기 때문이다"(W 2).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은 영혼을 "당신 안의 형상과 닮게 또는 당신으로부터 나오는, 당신 속성인 그 무엇과 닮게 만드셨을 뿐 아니라, 당신 자신과 닮게, 실제로 당신이신 온갖 것(당신의 본성, 당신의 본질, 유출하고 내재하는 당신의 활동 등)과 닮게 만드셨다"(W92). 엑카르트는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영혼과 아들과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거론하여 사실상 (물론 수사적으로) 그 둘이 동일한 원천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다. 그런데 스승들은 아들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영혼은 그 형상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다고 말한다. 나는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아들은 모든 형상 위에 있는 하나님 형상이며, 하나님의 감추어진 신성의 형상이라고, 그리고 아들이 하나님의 형상인 그곳, 아들 형상의 각인으로부터 영혼은 자신의 형상을 받는다고…‥.(W 95)

 

여기서는 엑카르트의 의도가 도드라지지만 다른 대목에서는 좀 더 진지한 입장을 취한다. 그는 하나님 '말씀'의 세 형태를 제시하면서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 영혼(여기서는 정신으로 그려짐)이 피조물과 아들의 증간 지위를 차지한다고 진술한다.

 

발설된 한 가지 말이 있다: 천사요 사람이며 모든 피조물이다. 생각되었으되 발설되지 않은 또 다른 말이 있으며, 그 말을 통해 내가 상상하는 어떤 것이 드러날 수 있다. 그런데 발설되지도 않고 생각되지도 않은 또 하나의 말이 있다. 그 말은 결코 드러나지 않으며 그것을 말씀하시는 그분 안에 영원히 있다(W 67).

 

이미 살펴본 대로, 인간 안에서 신적 형상을 이루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여러 세기에 걸쳐 다양했다. 엑카르트는 전통적 답변들(그 형상이 우리의 덕, , 세례, 자유의지라는 식의)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신적 형상의 주제는 그에게서 매우 깊고 풍부하게 나타난다. 게다가 엑카르트가 다양한 형상에서 탐구하는 주제는 시적으로 여겨지기 쉽다. 그가 거듭 되돌아가는 핵심은 영혼의 '근저''불꽃'이라는 이미지다. 실제로 엑카르트는 설교에서 동일한 초월적 실재를 표현하기 위해 자신이 채택한 서로 다른 이름들에 대해 설명한다.

 

영혼에는 홀로 자유로운 능력이 있다고 종종 나는 말했다. 때로는 그것을 영의 파수꾼이라고, 때로는 영의 빛이라고 불렀으며, 작은 불꽃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능력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늘이 땅 위에 있는 것보다 '이것''저것'에 대해 더욱 높은 데 있는 어떤 것이다(W8).

 

엑카르트는 자신이 포착하려는 그 실패가 실로 대단히 신비로울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인간의 개념이나 말로는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이제 나는 그것의 이름을 이전보다 더욱 고귀하게 붙이려 하지만, 그것은 고귀한 그 이름과 양식을 거부한다. 이름이나 양식을 초월하는 그것은 모든 이름에서 자유롭고 어떠한 형태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무 제약도 받지 않으며 온전히 자유롭다. 이는 하나님 당신 자체가 제약당하지 않고 자유로우신 것과 같다. 하나님이 한 분이며 단일하듯이 그것도 완전히 하나이고 단일하다. 그 누구도 결코 그것을 일별조차 할 수 없다(같은 곳).

 

그러므로 영혼의 신적 요소에 대한 엑카르트의 모든 논의는 그 신적 요소의 신비에 비추어, 그리고 그 신적 요소의 초월적 특성에 적합한 언어를 찾기가 어렵다는 점을 감안해서 보아야 한다. 과연 엑카르트가 그 신적 요소를 위해 찾아내는 이름들이 다양하다는 것 자체는, 그 신적 요소가 자신을 담아내고 규정하려는 우리의 어떠한 시도도 허용하지 않는 그 어떤 것임을 강하게 상기시켜 준다. 여기서 엑카르트는 앞서 언급한 전통과 가깝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와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에게서 나타나며, 인간 영혼의 깊이와 법이 그리고 그 신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찬탄과 경이에서 최고로 표현되는 바로 그 전통이다.

앞의 인용문에서 엑카르트는 영혼 안의 신적 존재인 '불꽃'의 본성에 관해 엄밀한 정의를 내리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른 대목에서는 비록 자신의 설명이 비일관성으로 가득 차 있을망정 당당하게 정의하고 싶어 한다. 형상을 함께 이루고 있는 영혼 안의 두 능력인 지성과 의지를 언급하는 곳도 있다. 의지에 대해서 "하나님은 열화와 같으시며, 당신의 지극한 풍요로움과 당신의 지극한 달콤함과 당신의 지극한 환희로 달아오르신다"(W 8)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체로 엑카르트는 의지에 대한 지성의 우위를 고수한다.10 지성만이 형상이라고 그는 자주 언급한다. "영혼은 자신 안에 결코 죽지 않는 어떤 것, 지성의 불꽃을 지닌다. 그리고 우리는 정신의 정점에 있는 이 불꽃에 영혼의 형을 둔다"(W7).

바로 여기서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것은 엑카르트에게서 '지성'이라는 말이 지니는 의미와 관련된다. 인간 심리에 대한 엑카르트의 14세기식 이해와 우리의 20세기식 이해 사이에 부인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엑카르트 자신이 용어들을 사용하는 데 일관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에도 직면한다. '지성'이라는 말이 진리를 식별하는 능력을 가리킨적도 있기는 하다. 그가 우리의 '자연적' 이해를 '변덕스럽고' '변화하는' 그 무엇이라고 언급할 때가 그러하다W90). 이때 오늘날 사용하는 '지성''이해'라는 의미와 가장 근접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데서 그는 '지성'"멀리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으며", "바다 저편에 있거나 구만리나 떨어져 있는" 것들조차 그것에 충만하게 존재하는 그런 능력이라고 말한다(W 24a; W 11 참조). 이는 오늘날 시각적 상상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과 더욱 가까워 보일 것이다. 지성만이 당신의 순수한 본질로 계시는 하나님을 찾아낼 수 있다는 이유로 엑카르트가 '지성'을 우리 안의 하나님 형상과 명시적으로 동일시하는 구절이 여러 군데 있다. "지성은 벌거벗은 하나님을 취하며, 거기에서 하나님은 선함과 존재를 벗는다"(W 67). 이런 용어에 상응하는 현대 용어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우나, 이런 능력을 '영적 직관'이나 '영적 지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엑카르트가 '자연적'이고 '외적'인 지성을 '영적'이고 '내적인 지성과 구별하고자 한 것은, 적어도 자기 스스로 이런 혼동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W7). 또 다른 대목에서는 인식의 세 유형, 즉 감각의 인식과 우리 안에 있는 두 '지성'의 인식을 명백히 구별한다. 그런데 여기서 엑카르트는 이제 '탐구' 영역을 자연적 지성에 적용함으로써 인식 체계를 바꾸고, 영적 지성에 관해서는 그것이 지극히 부도적(不動的)이라고 말한다.

 

한 스승은 (하늘로부터의) 이 빛으로 영혼의 모든 능력, 곧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외적 감각과 사고라고 부르는 내적 감각이 들어 높여진다고 말한다. 이런 것들이 미치는 범위와 깊이는 놀라울 정도다. 바다 저편에 있는 무언가를 지척에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 내게는 수월하다. 사고 위에는 끊임없이 추구하는 지성이 있다. 지성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집었다 놓았다 하며 돌아다닌다. 그러나 추구하는 지성 위에는 추구하지 않는 지성, 자신의 순수하고 단일한 존재 안에 머무르며 빛에 둘러싸인 또 하나의 지성이 있다(W 19).

 

보편적으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의지와 지성 둘 다에 앞서는 존재로서 영혼 안의 신적 형상에 관해 언급한다. 의지와 지성은 자신들의 원천으로부터 솟아 나오듯이 거기에서도 '솟아 나온다'(W 72; W 14a 참조).

 

어떤 스승은 그것(은총)이 아는 데 있다 하고, 어떤 이는 사랑하는 데 있다 한다. 다른 이들은 그것이 아는데와 사랑하는 데 있다면서 이 편이 더 낫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아는 데 있지도 않고 사랑하는 데 있지도 않다고 말한다. 지식과 사랑, 둘 다 흘러나오는 그 무엇이 영혼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 자체는 영혼의 능력이 행하는 방식으로 알거나 사랑하지는 않는다(W 87).

 

앞의 인용문들에서 명백한 것은, 인간 안의 신적 형상에 관한 엑카르트의 교설 전반에 접근하면서 당혹스러우리만치 많은 형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는 점이다. 그중 일부는 모순되어 보이지만, 그것들 모두 우리 안의 초월적 실재에 대해 똑같은 의미를 전하고 있다. 그런데 그 형상들 모두에는 하나의 근간을 이루는 일관성이 있다. 엑카르트는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는 영혼 안의 '그 무엇'세상 안의 구채적 존재의 차원을 넘어 존재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것이 하나님과의 직접적 관계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엑카르트의 다양한 표상은 본질적으로 이 두 진리를 충실히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엑카르트가 이해하는) 인간 '지성' 개념이 이를 전달하는 데 얼마만큼 이상적인 수단인가 하는 문제는, 엑카르트가 '지성'의 다섯 가지 속성이나 가능태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 첫째는 '지금' 그리고 '여기'서부터의 자유다.

 

그것(지성)은 지금 그리고 여기서부터 이탈한다. '지금' 그리고 '여기'란 시간과 장소를 뜻한다. 지금은 시간의 최솟값이지, 시간의 한 조각이거나 한 부분이 아니다. 다만 시간의 맛, 시간의 일각, 시간의 끝이다. 작다고는 하나 '지금'은 사라지고 만다. 다시, 그것(지성)여기서부터 이탈한다. '여기'란 장소를 뜻한다. 내가 서 있는 장소는 작다. 하지만 아무리 작다 해도 내가 하나님을 보는 그날까지 '여기'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

 

둘째, '지성은 다른 어떤 것과도 공통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아무것과도 같지 않다. 어떤 스승은 하나님을 일컬어, 아무것과도 같지 않고 아무것도 그분과 같아질 수 없는 그러한 존재라고 말한다. 그런데 요한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요일 3:1)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무것과도 같지 않은 존재라는 말은 어찌 된 것인가?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아무것과도 같지 않은 덕에, 이 능력은 하나님과 같다. 하나님이 아무것과도 같지 않기에, 이 능력은 하나님과 같다.

 

셋째, '지성'은 자신에게 낮선 것은 아무것도 닮지 않는다.

 

그것은 순수하며 섞이지 않는다. 본성상 하나님은 어떠한 섞임이나 혼합도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능력도 아무런 섞임이나 혼합이 없다. 그 안에는 낯선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어떠한 낯선 것도 거기에 침입할 수 없다.

 

넷째, '지성'은 스스로를 반성한다.

 

그것은 언제나 내적으로 추구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머무르는 그런 존재다. 그러므로 지성은 항상 안에서 추구한다. 하지만 의지는 자신이 사랑하는 바를 추구하기 위하여 밖으로 나간다.

 

마지막으로, 인간 '지성'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하나님과 합일해 있다고 엑카르트는 말한다.

 

잘 새겨 명심하라. 이것이 설교 전체의 핵심이다. 형상과 형상은 완전히 하나로 결합해 있기에 아무런 차이도 식별할 수 없다. 우리는 열 없는 불, 불 없는 열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빛 없는 태양, 태양 없는 빛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형상과 형상 간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을 따라 형성된 형상이 소멸해야 한다면, 하나님의 형상 또한 사라질 것이다(W42).

 

통상 부정신학의 전통에서는 하나님께만 유보되어 있고 자신이 신성을 거론할 때 풍부하게 사용하는 그 용어들을, 엑카르트가 인간 '지성'(영혼 안의 '그 무엇'이라고 부르기도하는)에도 적용하고 있음을 이 대목들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지성''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는 구체적 존재로부터 자유로우며, 다른 어떤 것과도 전혀 공통되는 바가 없고, 그 자체 안에서 완전히 일치해 있으며 자신을 내적으로 반성한다. 이러한 것들이 엑카르트가 라틴어 저작에서 하나님에게 매우 엄격히 적용했고, 이제는 인간 '지성'과 관련해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이어지는 대목에는 엑카르트가 하나님에게 적용했고 이제는 '지성'을 묘사하는 데 사용하는 부차적 표상이 등장한다. 이것들은 주로 '창조되지 않음', '이름 지을 수 없음', '신의 근저와 광야의 개념'이다.

 

‥‥ 피조물에게 진리는 없다. 거기에는 영혼이라는 창조된 존재를 초월하는, 아무것도 아닌 피조물과는 접촉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천사조차도 그것은 가지지 못한다. 천사는 순수하고 광대하며 분명한 존재를 지니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건드리지 못한다. 그것은 신성의 본성과 유사하다. 그 자체로 하나이고 어떠한 것과도 공통되는 바가 없다. 식견 있는 성직자 다수에게 그것은 장애물이다. 그것은 이상하고 황량한 장소이며, 이름이 있다기보다는 이름이 없으며, 알려진 것 이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W 17).

 

 

요약

파리 토론집에서 엑카르트가 하나님을 지성이나 (intelligere)과 동일시하고 있다면, 독일어 설교에서는 통상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용어를 자신이 '지성' 자체라고 부르는 것에 적용한다. 그리하여 엑카르트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정신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정신을 신격화한다. 그의 목적은 우리 존재의 본질과 신적 존재의 본질 사이의 깊은 상호성, 보다 역동적인 상호성을 조화롭게 확립하는 데 있다.

이런 정식이 피조물과 창조주 간 구별을 모호하게 하는 듯 보여 우려스럽다면, 엑카르트가 자신의 유비 이론에서 '·인 한 원리'(우리가 '선한' 한 우리의 '선함'은 하나님의 '선함'이라는 식의)를 사용해 이러한 비난에 맞서 신중하게 자신을 옹호한다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근본적으로 그는 영혼의 신적 '근저''불꽃'과 관련해 그와 같은 원리를 적용한다. 따라서 우리가 '지성'인 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지성' 아닌 것이 많다는 걸 엑카르트도 잘 알고 있다. 다음 글도 같은 맥락이다. "영혼에는 능력이 있고, 그것에 관해서는 내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만일 영혼 전체가 그것과 같다면, 영혼은 창조되지 않았을 것이고 또 창조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그것과 같지 않다"(W 24a). 우리와 하나님과의 합일에 관해 엑카르트가 언급한 모든 내용이 때로는 화려하게 과장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하나님과 피조물 간의 동일함과 구별에 적용되는 유비 관계를 다룬 그의 분병한 가르침에 비추어서 보아야 한다.

주목해야 할 둘째 요점은, 엑카르트가 지성으로서의 하나님과 인간 '지성'을 명백히 동일시하는 방식을 펼쳐 나간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특정한 표상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엑카르트는 하나님을 '하나'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과연 그 신적 형상을 '성채', '불꽃', '영혼', 파수꾼', '' 또는 무엇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때로는 만족해한다. 우선적으로 그는 세상 안에 있는 여하한 형태의 존재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근본적 초월을 강조하고 싶어 한다. 그다음으로 이 초월하는 신성이 직접 우리에게 현존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엑카르트가 저 변증법적 메시지들을 전달하는 특정 용어는 친숙한 개념과 표상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엑카르트가 주의를 쏟은 것은 '지성'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지성'으로서의 우리 자신의 가장 높고 신비스러운 가능태에 대한 관념이다. 엑카르트가 물려받은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에 따르면, '더 상위의' 지성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접촉되지 않으며 시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지성은 비물질적이며 순수한 활동이다. 그것은 아무것과도 섞이지 않고 순수하고 최고이며 멀리 있지만, 어디든 관통하며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엑카르트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들에 가장 적합하다고 증명된 역동적 이미지를, 자신이 물려받은 지성 개념에서 찾아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II. 성화

 

 

 

우리 안 신적 형상의 본성에 대한 엑카르트의 가르침은 교부 시대나 중세신학의 다양한 맥락에 비춰 보아야 한다. 엑카르트의 지적 유산 형성에 그들도 함께 기여하고 있는 까닭이다. 엑카르트의 성화(聖化)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마이스터 엑카르트 이전에 교회가 이 주제에 임해 온 다양한 방식을 대강이나마 훑어보는 것이 새삼 중요하다. 이로써 우리는 엑카르트가 다른 사상가들에게서 받은 도움을 식별하고, 그의 독창성의 기원을 확인할 수 있다.

 

 

전통

여러 세기에 걸쳐 그리스도 교회는 우리의 성화 과정을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 왔다. 이 방식들은 간혹 기교적이면서도 체계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 문제 전반을 신학적으로 성찰하기란 너무나 난해하기 때문에 그냥 놔두는 게 상책이라 여겨도 무방하다. 여기서는 다만 교부학자들과 중세 신학자들이 이 문제와 씨름한 방식들을 맛보기로 제시하고자 한다.

의로운 신앙인이 어떤 방식으로, 실제로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될 수 있다거나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상이 성경에는 자주 등장한다(참조: 고전 13:12; 요일 3:2; 고전 15:52; 벧후 1:4). 신화(神化)에 관한 신학이 아직 체계를 갖추지는 않았지만, 그리스 교부들은 충분한 단서를 확보해 이 주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들이 부딪힌 문제 중 하나는 그리스 언어와 문화가 이미 플라톤과 스토아학파 그리고 영지주의 신화 및 비의(秘儀) 관념에 젖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그리스도교 계시의 핵심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초기 알렉산드리아학파 신학자들은 그리스도를 조명자로 보는 견해(클레엔스의 경우)나 신화적(神化的) 관상 개념(오리게네스의 경우)에 입각하여 하나님과의 합일을 특별히 사변적으로 이해했다. 다른 그리스 교부들(이레네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은 신화의 원리를 강생이라는 맥락에서 더욱 확고히 하고자 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기에 사람도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깊은 영향력을 지닌 이 사상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강생을 통해 우리 인간 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성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신화 개념은 바실리우스 마뉴스(Basilius Magnus)의 성령론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령의 기능이 우리를 신화시키는 것이라면 성령 자체가 신적이어야 하며, 따라서 성삼위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에게 똑같이 속한다고 바실리우스는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그리스 교부들은 당대에 발전하고 있던 성사신학을 통해 신화라는 주제를 확립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cyrilus Alexandrmus) ()디오니시우스, 고백자 막시무스는 신화에서 성사, 특히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의 역할을 강조했다.

신화 개념은 그리스어권 신학자들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엑카르트와 거의 동시대 인물인)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Gregorius Palamas)는 영성신학의 견고한 토대를 인간 영혼과 하나님의 '능력' / '에너지'의 합일에 두었다. 그런데 서방 라틴 세계는 더 신중하면서 덜 사변적이었다. 데르툴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Ambrosius), 아우구스티누스가 신화라는 주제를 다루기는 했지만, 그 윤리적 함의와 교회적 맥락을 훨씬 더 강조했다. 신화를 뜻하는 그리스어 theosistheopoiein이 그리스어권 신학자들 사이에 뿌리를 둔 것과 달리 서방 전통에서 라틴어 deificatio는 뿌리가 없다.

서방에서는 은총 개념이 더 중요했다. 다시 말하지만 풍부한 성경 구절들이 궁극의 원천이다. 그런데 신학자들이 성화(聖化, sanctification)에 대해, 그리고 특별히 회심 체험에 대해 성찰하게 되면서 은총은 교회의 자기 이해에 있어 핵심 요소로 부상했다. 이런 흐름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에서 가장 큰 힘을 얻었다. '은총 박사'로 알려진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의 본성에 관해 오랜 세월 깊이 숙고했다. 이것은 한편으로 마니교에서 회심한 개인적 체험의 결과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펠라기우스(Pelagius) 사상과 대립한 결과였다. 펠라기우스는 성화 과정에서 우리 자신의 노력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한 것보다 월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본 인물이다. 후대 서구 사상은 대체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기존 입장을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 아래) 발전시키고 체계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스콜라신학자들은 주로 중세 신학 교과서인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명제집을 언급하면서 은총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피력했다. 페트루스 롬바르두스는 상반된 두 견해를 제시한다. 은총을 우리 안의 성령과 같게 두면서도 우리 본성이 신화할 수 있음은 부인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 대해 후대 비평가들은 은총과 내재하는 성령을 무턱대고 같다고 여기지 않으면서 성화 은총의 창조된 특성을 강조했다. 프란치스코회 신학자인 헤일스의 알렉산더와 그의 학파는, 은총이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동화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들 초기 프란치스코회원들은 또한 은총이 영혼의 '능력'이 아니라 본질에 상응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위대한 프란치스코회 신학자 보나벤투라(Bonaven -tura)는 은총신학을 매우 세련된 체계로 발전시켰다. 그에게 은총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겸손을 보여 주는 것으로, 하나님의 고유한 본성이 우리 안에 주입되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 자신에게 맞추게끔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보나벤투라는 은총을 통해 이루어지는 우리의 성화 과정에서 프란치스코회원의 특징인 의지의 역할을 강조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신화라는 용어가 부각된다. 은총은 우리를 '하나님의 모습'(deiform)으로 변모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방 신학자들은 범신론이라는 비난을 피하고자, 변모시키고 신화시키는 은총마저도 창조된 것이라고 철저히 강조한다(설사 그것이 창조된 모든 것 가운데 최고라 할지라도)

도미니코회원들도 지성을 강조하는 자기네 고유 특성을 보태어 은총신학을 세련되게 발전시켰다. 알베르투스 마뉴스에게 은총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빛처럼) 우리를 안에서부터 변모시킨다. 은총은 일종의 습성(habitus)이나 지속적 성향으로 우리 안에 머무른다. 은총은 하나님의 고유한 본성을 반영하며,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본질적 무를 의식하게 해 준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창조된 은총은 우리 영혼에 내재하여 우리를 신성에 참여하도록 해 주는, 하나님의 닮은꼴(similitude)이다. 그에게는 은총의 상이한 '유형'(선행revenient 은총, 상존abitual 은총, 조력actual 은총)이나 우리가 삶에서 체험하는 은총의 다양한 방식이 확연히 구별된다.

성화에서 은총의 역할에 관한 중세의 논의는 당대의 성령 논의를 무색케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성령의 내재'라는 주제는 스콜라신학자들에게서 틀임없이 나타난다. 그들이 채택한 교부 전통은 초기 교회를 고무시킨 오순절 체험에 바탕을 둔다. 바실리우스 마뉴스에게 성령은 우리를 신화시키는 존재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성령은 생명력을 주는 아버지와 아들간 사랑의 원리이며, 이 원리는 동시에 우리가 삼위일체 신비에 통합되고 교회에 속하게 해 주는 토대다. 삼위일체 신비를 체험한 기욤 드 생터에리(Guillaume de St. Thierry)나 얀 반 라위스브룩(Jan van Ruusbroec(Ruysbroek))같은 중세 신비신학자들이 성령의 역할을 특히 강조했다. 그들에게 성령은 우리를 삼위일체 안에 묶어 주는 사랑의 영이었다.

중세에는 성령칠은(聖靈七恩)이 대단히 중요시되었다. 우리로 하여금 의로운 삶을 살게 해 주는 성령의 특별한 은총이다. 불가타 역 이사야서 112-3절은 "지혜와 깨달음의 영, 의견과 굳셈의 영, 지식과 경건함의 영, 주님을 두려워함의 영"이라고 표현했다. 이 은총들은 대다수 중세 성인전의 큰 특징을 형성한다. 성령의 선물과 성령의 덕을 처음으로 구별한 사람은 1235년 필리페(Philippe le Chancelier)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작에서 이 선물들은 영혼이 성령의 영향에 반응하도록 하는 데 특별한 역할을 한다.

중세 신비신학의 중심을 점하는 또 한 가지는 이른바 대신덕(對神德, 믿음, 희망, 사랑)이다. 은총 생활의 토대로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지니는 우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13세기 기욤 드 오세르(Guillaume d'Auxerre)가 처음으로 이 말을 사용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1)그 대상이 하나님이며, 2)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고, 3) 하나님만이 그것을 우리 안에 주입시키며, 4) 그 원천은 성경의 계시에 있다는 점에서 다른 덕들과 다르다.

성화에 대한 이러한 개념적 성찰 외에 더욱 형상주의(形象主義, imagism)적 색채를 띠는 것들도 있다. 스콜라신학자들에게 은총의 근본 기능 중 하나는, 이를테면 입양으로써 우리를 하나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다. 자녀됨(filiation)이라 부르는 이것은 바울 사도와 요한 사도의 영성을 반영한다.

그리스도가 본성상 하나님의 친자(親子)라면, 우리는 은총을 통해 그분과 일치하며 그분의 양자(養子)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시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저술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영향력 있는 주제 가운데 하나로, 신화(神化)라는 주제가 (논쟁적으로 약화되고) 변형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마스쿠스의 요한(Ioannes Damascenus)올바른 신앙에 관한 해설(Expositio Fidei, De Fide orthodoxa)을 통해 서방에 대중화시킨, "하나님이 본성상 갖추고 계신 것을 우리는 은총에 의해 갖추게 된다"는 그리스어 신앙고백에서도 드러나는 내용이다.

성삼위의 거주(inhabitation)내재(indwelling)라는 주제도 언급해야 한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성삼위가 우리 안에 들어와 성화 원리가 됨으로써 은총은 영혼을 준비시킨다. (우리야 어떻게 느끼든) 스콜라신학자들은 이 교설의 역동성에 매료되었다.

마지막으로, 엑카르트에게 큰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신비주의 이미지는 영혼 속 하나님 탄생(본질적으로 자녀 됨이라는 주제의 변형)이다. 우리 안의 하나님 탄생 개념은 초세기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부터 나타나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벤스와 이레네우스에게서도 나타난다. 교부 시대에 이 주제를 천착 · 발전시킨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또 다른 신학자 오리게네스다. 이 주제는 오리게네스에게서 카파도키아의 신학자들에게, 그리고 고백자 막시무스에게 전해진다. 탄생이란 주제는 아우구스티누스,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 생빅토르의 리카르두스(Richardus de St. Victor),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를 통해 중세 서방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보나벤투라는 직접이에 관한 논고를 집필했다.

그리스도 교회는 엑카르트 이전부터 성화라는 신비로운 과정에 대해 수 많은 방식으로 접근해 왔다. 대단히 복잡한 이 주제의 특성에 비해 우리의 개관은 터무니없이 간략했다. 특히 우리는 동방과 서방 가틀릭교회의 성사신학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성사는 강력한 '은총의 수단'(트리엔트 공의회)이자 그리스도인 각자가 그리스도와 만나는 중요하고 규법적인 길이다. 또 오늘 날에 비해 중세에 더욱 만연했던 영적 환시 분야나 그 환시의 부산물인 영적 감각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토록 상이한 성화 모델들을 종합하려는 시도는 부질없는 욕심이다. 우리 안 성령의 활동과 은총의 활동, 창조된 것과 창조되지 않은 것, 성삼위에의 동화와 성삼위의 거주, 이들 사이의 관계를 확립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성화는 본디 하나의 일치된 현상이며 단일하고 단순한 행위지만, 그것을 성찰하려는 많은 시도를 통해 오히려 우리 고유한 본성의 다양성이 증명된다는 것을 깨닫는 편이 어쩌면 더 현명할 것이다.

 

 

영혼 속 하나님 탄생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저작을 거의 알지 못하는 이들이라도 이 특정 주제가 그의 이름과 연관된다는 것쯤은 알 것이다. '영혼 속 하나님 탄생'은 말하자면 엑카르트의 '등록상표'. 하지만 이것이 그가 성화신학(theology of sanctification)에서 탐구하는 유일한 신비주의 주제라고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엑카르트가 이 신비에 관해 언급하는 방법은 실로 가지가지다.

신화(神化)부터 시작하자. 엑카르트는 이 주제를 거듭 언급하며, 때로는 우리 자신의 신화와 아들의 강생을 명시적으로 연결시킨다. "그분(하나님)은 그대를 유일한 아들로 낳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W 18).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 본성을 취하셨다고 언급하기도 한다(W4792).

신화 원리를 성령으로 표현하는 구절이 많다. 이때 엑카르트의 로고스 신비주의가 삼위일체를 구현하는 구절과 우리를 성화시키고 신성으로 끌어올리는 주체가 성령으로 표현되는 구절을 구별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라, 성령은 사랑의 원리와 연결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사랑으로 "아들에게서 아버지에게로 끊임없이 꽃을 피우며"(W 88) '썽혼은 성령의 열기, 성령의 빛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W 66). 성령은 영혼을 아버지께 끌어올리는 사랑의 행동 원리다.

 

성령의 능력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미묘하고 가장 고귀한 것, 곧 영혼의 불꽃을 취하여 지극히 높은 곳에서 사랑의 표시로 그것을 낳듯이, 나무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 태양의 능력이, 가장 순수하고 미묘한 것을 나무 뿌리에서 취한 다음 가지로 곧장 끌어올리면 거기에서 꽃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온갖 방식으로 영혼의 불꽃은 그 빛과 성령 안에서 지탱되며 제1 원인으로 곧장 옮겨진다 (W32b; 54 참조).

 

성화 은총은 엑카르트 사유의 두드러진 요소다. 그는 은총이 영혼의 본질 자체와 접촉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하나님의 주된 목표는 낳음이다. 우리 안에서 당신 아들을 낳으시기까지 그분은 결코 만족하지 않으신다. 영혼 역시도 자신 안에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기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은총이 솟아난다. 그로써 은총은 주입된다. 은총은 일하지 않는다. 은총의 일은 은총이 되는 것이다. 은총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흘러나와 영혼의 본질로 흘러들 뿐, 영혼의 능력으로 흘러들지는 않는다(W68).

 

은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분과 짧게 한다고 엑카르트는 강조한다.

 

하나님의 은총이 영혼에 들어가지 않는 한 어떠한 영혼도 무죄할 수 없다. 영혼이 모든 신적 활동에 즉시 순응하도록 하는 것이 은총의 역할이다. 은총은 신적 원천에서 흘러나온다. 은총은 하나님과의 닮음이며, 하나님을 맛보고, 영혼을 하나님과 닮게 만든다(W81).

 

그런데 엑카르트는 우리의 성화에서 은총의 영역을 제한하기도 한다. 은총이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인용문에서 엑카르트는 영혼의 '불꽃'을 통한 우리와 하나님과의 궁극적 합일은 (창조된) 은총이 미치지 못하는 그 무엇임을 시사한다.

 

어떤 스승은 이것(불꽃)이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설 수 없을 만큼 하나님 가까이에 있으며, 하나님은 언제나 불꽃 앞에 그리고 불꽃 안에 계시다고 말한다. 나는 하나님이 영원으로부터 언제나 쉼 없이 그 안에 계셔 왔으며, 인간이 여기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데는 아무런 은총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은총은 창조된 것이며 피조물에게는 그에 관한 아무런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W92).

 

스콜라철학이 은총을 모든 피조물 중 최고로 규정했다손 치더라도 은총의 창조된 본성이 엑카르트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분명하다. 엑카르트에게 창조된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인 '지성'은 이런 영역을 초월한다고 그는 늘 강조했다. 그러한 한 지성은 '창조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엑카르트는 최상의 일치 차원을 위한 다른 형상을 찾아야 했다. 그는 빛의 이미지에 주목한다.

 

우리는 은총 안에서 도약하며 크게 성장해야 한다. 은총 안에서 성장하는 한 그것은 은총이면서 동시에 미소한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은총을 멀리 내다본다. 그런데 저 높은 데서 은총이 완전해지면 그것은 더 이상 은총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신적 빛이 된다(W41).

 

엑카르트는 신화(神化), 성령의 활동, 성화은총의 본성을 논하면서 신학적 논의의 중심이 되는 신비 개념을 그리고 있다. 그런 그가 우리의 성화를 한층 더 형상적으로 표현하는 곳도 있다. 앞에서처럼, 변형시키는 빛을 논하는 것도 그러한 경우다.

 

흘러나온 빛은 그 빛이 향하는 쪽을 비춘다. 흔히 인간이 비추임을 받는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별 의미가 없다. 터져 나오는 빛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영혼을 돌파한 빛은 힘닿는 한 영혼을 하나님처럼 신적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영혼을 안에서부터 비춘다. 이 내적 비추임으로써 영혼은 그 신적 빛을 향해 도약한다(W48).

 

이때의 빛을 은총의 빛으로 생각할 수 있다. 혹은 '지성'의 빛(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빛)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용문 앞 대목에서 엑카르트는 은총과 '지성'의 빛을 명백히 구분한다. 변형시키는 은총과 '지성'의 빛이 구별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구절도 있다. "은총의 유입에서 지성의 빛은 즉시 상승하며, 거기에서 하나님은 꺼지지 않는 빛으로 반짝인다"(W 20). 그런데 엑카르트가 빛을 은총과, 또 삼위일체의 제2위와 명백히 동일시하는 구절도 있다. "그곳(하나님의 마음속)에 들어가려면 우리는 자연의 빛에서 은총의 빛으로 올라가야 하며, 거기에서 성장하여 아들이신 그 빛이 되어야 한다"(W 88). 결국 빛은 엑카르트가 하나님과 우리의 합일이라는 가장깊은 영역을 구명하기 위해 관심을 쏟은 이미지다. 그러나 그 이미지가 정확히 가리키는 대상은 없는 듯하다.

합일의 다른 형상으로 '혼인의 신비'라는 이미지를 주목하자. 이를 중세기에 대중화하는 데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의 저술이 크게 기여했다. 여기서는 영혼을 신부와, 그리스도를 신랑과 동일시한다. 이는 아가서에서 영감을 받은 신비적 표상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영혼을 창조하실 때, 그분은 당신 자신의 가장 완전한 본성에 따라 영혼을 창조하셨다. 영혼이 당신 외아들의 신부가 되게 하려 하심이다. 이를 충분히 알고 있는 아들은 자기가 영원으로부터 말없이 잠들어 있던 영원한 부성(父性)이라는 독방에서 나오기로 결심한다‥‥ 그는 젊은 수사슴처럼 뛰처나왔고 사랑의 아픔을 겪었다. 그는 자기 신부와 함께 그 방으로 돌아갈 요량이었다. 방은 신비로운 부성의 침묵하는 어둠이다. 그가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서 나왔을 때, 그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신성의 감추어진 신비를 신부에게 보여 주고자 했다. 그곳은 그 자신은 물론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휴식하는 곳이다(W53).

 

엑카르트가 이따금 언급하는 '입맞춤'도 신부의 표상에 속한다.

 

영혼의 입은 영혼의 가장 높은 지체다. "그분은 당신 말씀을 내 입에 넣으셨다"라는 말의 의미는 이러하다: 그것은 영혼의 입맞춤이다. 입과 입이 맞추어지는 영혼 안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낳으시는 것이다(W 23; 51 참조).

 

언제나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고취시키는 하나님의 '접촉'에 대해 엑카르트가 언급하는 구절들도 아가서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본질적으로 제3 위격의 신학에 토대를 둔다. "영혼이 창조되지 않고 또 창조될 수 없도록 하나님이 접촉하셨고 또 계속 접촉하시는 그 첫 접촉에서, 하나님의 접촉을 통해 영혼은 하나님 자신처럼 숭고하다"(W 66).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그분 안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구명하고자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일련의 상이한 주제와 이미지를 활용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많은 구절은 '영혼 속 하나님 탄생'이라는 주제에 대한 엑카르트의 사유 전체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이미지와 관련된다.

'영혼 속 하나님 탄생'은 본디 두 가지 요인, 곧 하나님의 본성과 영혼의 '근저' / '불꽃'의 본성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후자는 우리 안의 하나님 형상이다. 엑카르트는 하나님이 늘 낳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풍요로운 본성에 대한 근본임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남게 한다. 그분의 근저 전체, 그분의 본질과 그분의 존재가 아버지로 하여금 낳게 한다"(W59). 실로 아버지의 풍요가 너무나 크기에 엑카르트는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 것을 우리 안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 것과 연결시킨다.

 

 

'아버지'라는 말은 순수한 낳음을 암시하며 만물의 생명을 의미한다. 아버지는 영원한 지성 안에서 아들을 낳으신다. 그분은 자신의 고유한 본성 안에서 당신 아들을 낳으실 뿐 아니라 영혼 안에서도 낳으신다. 영혼 안에서 아들을 자신의 소유로서 낳으시는 것이다. 아버지가 낳으려 하시든 말든, 영혼 안에서 아들을 낳으시는 것이야말로 그분의 본질이다(W40).

 

하나님 안의 탄생과 우리 안의 탄생은 하나다. "전에도 가끔 말한 것을 다시 되풀이하거니와, 이 영원으로부터의 탄생은 영원 안에서 일어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영혼 안에서 일어나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탄생은 같은 것이며, 영혼의 본질과 근저에서 일어난다"(W2). 그런데 하나님의 본성이 영혼의 풍요라면, 그 탄생을 맞아들이는 것은 영혼의 본성이요 바람이다. '하나님의 주된 목표는 낳음이다. 그분은 우리 안에 당신 아들을 낳기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혼도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 안에 태어나기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W68).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는 것과 동일한 풍요가 영혼의 근저에 반영되었으며, 그 탄생은 여기, 신적 형상에서 일어난다.

 

나는 시간이나 육체와는 관계하지 않는 능력이 영혼 안에 있다고 선언하곤 했다. 그것은 영으로부터 흘러나와 영 안에 머무르며 완전히 영적이다. 이 능력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 안에 있을 때만큼이나 지극한 기쁨과 영광 가운데 푸르디푸른 꽃을 활짝 피운다. 기쁨과 환희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며,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그 기쁨에 대해서는 누구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영원한 아버지가 이 능력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아들을 언제나 낳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능력은 아버지의 고유한 능력 안에서 같은 아들을 낳고, 몸소 그 아들이 된다(W8).

 

엑카르트는 하나님이 거처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은 영혼의 본질이 지니는 형상 없는(imageless) 특성이라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지 않는 피조물은 이것(영원으로부터의 탄생)을 받아 들이지 못한다. 영혼의 형상은 특별히 이 영원으로부터의 탄생과 관련되는 까닭이다. 이 영원으로부터의 탄생은 참으로 특별하게 영혼 안에서 일어난다. 어떤 형상도 빛을 비추지 못하고 (영혼의) 어떤 능력도 꿰뚫어 보지 못한 영혼의 근저, 가장 내밀한 곳에서 아버지가 낳아 주신다(W2).

 

형상은 창조된 것이기에 자신이 본뜬 그 대상을 가리킨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형상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에서만 일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그대는 영혼의 본질과 근저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형상에 의지함 없이 당신의 단일한 본질로 그대를 건드리실 것이다. 어떤 형상도 자기 자신을 표상하지 못한다. 형상은 언제나 자신이 본뜬 대상을 가리킨다‥‥ 거기에는 침묵과 고요가 있어야 한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말씀하시고 당신 아들을 낳으시며 모든 형상으로부터 자유로운 가운데 당신 업적을 이루신다(Wl).

 

탄생은 또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창조된 영역 너머에서 일어난다.

 

탄생이 시작되면 시간은 사라져야 한다. 시간과 피조물이야말로 탄생을 방해하는 것들이다. 본성상 시간은 하나님이나 영혼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 진리다. 시간에 영향을 받는 영혼은 이미 영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시간에 구애받는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영혼이 시간에 구애받는다면 하나님은 결코 영혼 안에서 태어나실 수 없으며, 영혼은 결코 하나님 안에서 태어날 수 없다. 하나님이 영혼 안에서 탄생하려면, 모든 시간이 영혼에서 떨어져 나가거나 영혼이 의지나 원의와 함께 시간에서 떨어져 나가야 한다(W29)

 

시간을 초월하여 발생한 천지창조 사건이 영원하듯이, 그 탄생도 영원하다. "이 탄생은 일 년에 한 번이나 한 달에 한 번, 하루에 한 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늘 일어난다. 지금 여기도 아니고 본성도 사고(思考)도 아닌 공간에서 시간을 초월하여 일어난다"(W31).

그 탄생은 우리가 형상들로부터 자유로울 때만 일어날 수 있다. 탄생이 일어나도록 하려면 우리 자신이 내적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엑카르트는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갈라진 능력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초월적 존재의 중심이 되는 일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탄생이 일어나는 자리인 영혼은 절대적으로 순수하고, 고귀하고 침착하고, 완전히 내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오감을 통해 다양한 피조물에게로 흘러나가서는 안 된다. 차분히 안에 머물러야 하며, 침착하고 가장 깨끗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Wl).

 

엑카르트는 우리가 고요해지기 위해 영혼의 다양한 기능을 멈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진실로 그대가 이 고귀한 탄생을 찾고자 한다면, 군중을 떠나 그대의 원천과 근저로 돌아가야 한다. 영혼의 모든 기능과 활동, 이것이 바로 군중이다. 기억과 이성과 의지, 그것들은 모두 그대를 흩뜨린다. 이런 이유로 그대는 모든 것, 곧 감각과 상상, 그대의 마음과 눈 속에 담아 두었던 모든 것에서 떠나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그대는 이 탄생을 찾아낼 것이다. 그렇지않고는 찾을 수 없을지니, 그대는 내 말을 믿으라!(W 4).

 

탄생에서 우리 역할은 완전히 수동적인 것으로서, 우리의 본질적 무()와 공()을 포용하는 데 바탕을 둔다는 점을 엑카르트는 특별히 강조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것이 필요하다. 그대는 아무것도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대 자신을 놓아 버리고 하나님이 당신 뜻하시는 대로 그대와 함께 그대 안에서 행동하시게 하라. 이 일은 그분의 일이고, 이 말씀은 그분의 말씀이며, 이 탄생은 그분의 탄생이니, 실로 그대를 이루는 온갖 것 하나하나가 그분의 것이다. 그대는 자아를 포기했으며, 그대(영혼)의 능력과 활동, 그대 개인의 본성을 떠났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대의 존재와 능력 속으로 반드시 들어오신다. 그대는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을 잃고 광야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3:3)라고 기록된 바와 같다. 이 영원한 소리가 그대 안에서 외치고 싶은 대로 외치게 하라. 그리고 그대 자신과 온갖 것에 대해 광야이게 하라(W 3).

 

영혼이 모든 피조물과 형상을 비움으로써 준비를 마치자마자, 하나님은 반드시 영혼의 근저에 들어와 거기에서 탄생하신다. 이것은 엑카르트가 특히 선호하는 주제다.

 

진실을 다해 영원하고 항구한 진실로써 선언하노니, 자아를 낮추어 자신의 근저에 내맡기는 사람 누구에게나,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지극한 권능으로 당신의 전 자아를 쏟아 부으신다. 너무나 철저하게 쏟아 부으시어, 당신의 생명, 당신의 존재, 당신의 본성, 당신의 전 신성에 이르기까지 그 무엇도 되돌리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께 내맡겨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에게 그 모든 풍성한 결실을 쏟아 부으신다(W 60).

 

엑카르트는 이 중심 개념을 파격적 수사로 표현한다.

 

내키면 일하고 내키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 목수처럼, 하나님을 당신 뜻에 따라서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는 분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그대가 준비되어 있음을 보실 때마다, 하나님은 반드시 행동으로 옮기시고 자신을 그대에게 부어 넣으신다. 이것은 공기가 맑고 깨끗할 때 햇볕이 자신을 공기 속으로 부어 넣는 것과 같은 이치다(W 4)

 

땅은 결코 낮은 곳으로 달아날 수 없으며, 땅이 원하든 원치 않든 하늘은 땅으로 흘러들어 땅에 능력을 각인시키고 열매 맺게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다. 갈라진 틈이나 후미진 구석구석 할 것 없이 온갖 데가 하나님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도망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품으로 뛰어든다. 그대가 좋아하든 말든 하나님은 그대 안에서 당신 외아들을 남으신다. 그대가 잠을 자든 깨어 있든 하나님은 당신 일을 하신다(W53).

 

엑카르트가 '영혼 속 하나님 탄생'을 때로는 형이상학적 용어로 묘사한다고 해서, 이 하나님 탄생이 우리의 윤리적 삶과 관련하여 일종의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진다고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 엑카르트는 그 탄생이 '하나님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만 알려진다고 강조한다.

 

이 탄생에 대해서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완전해진 영혼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말씀을 들려주실 때마다 우리 안에서 이 탄생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고 덕스러운 영혼 안에서 완성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길을 걸어왔고 지금도 걷고 있는 선하고 완전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따라서 수양을 쌓지 않고 제멋대로인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이 탄생으로부터 완전히 멀리 있으면서 이에 대해 전혀 무지하다(W l).

 

이 탄생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유입과 더불어 그 모든 선물을 나누어 가지게 될 것"(W 2)이라고 엑카르트는 말한다. 그 선물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언급하는 구절이 있다. "하나님은 영혼 안에 말씀을 낳으시고, 그 말씀을 품은 영혼은 소망이나 선한 지향, 사랑, 감사 이외에도 그대에게 가 닿을수 있는 어떤 형태로든 그 말씀을 자신의 능력 안에 받아들인다"(W 3). 또 다른 탄생은 온갖 의로운 행위의 토대가 된다. "아버지는 의인에게서 아들을 낳고 아들에게서 의인을 낳는다. 의인의 온갖 덕과 그에 따른 모든 행위는 다름 아닌 아버지가 낳은 아들로 인한 것이다"(W 59).

이 탄생은 초탈(다음 장에서 상론)로 귀결된다. 엑카르트는 그 탄생이 우리 안에서 일어났음을 알려 주는 요긴한 표지 넷을 열거한다. 우리 안에 현존하는 사랑, 하나님 뜻에 대한 순응, 그분과의 돈독한 자녀 관계다. 따라서 엑카르트가 이 탄생을 온통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그리고 있을지언정 그탄생이 깊은 윤리적 의미를 지닌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들이려면 먼저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 아버지 없이 그 누구도 아들일 수 없고, 아들을 두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아버지가 아니다. ‥‥ 모든 일을 사랑 때문에 하는 사람이 진정한 아들이다. 사람이 아들이 되는 데 둘째로 중요한 것은 평정이다. 그는 건강이건 질병이건 흔쾌히 받아들인다.‥‥ 셋째로 아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께 머리 숙일 수 있어야 한다(W ll).

 

 

요약

'영혼 속 하나님 탄생'과 우리 성화의 여타 측면 간 관계가 엑카르트 작품에서 늘 일관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원칙이 분명하게 부각된다. 하나님이 신앙인 각자의 영혼 안에서 탄생하실 때 바로 당신의 생명과 본질을 주신다는 점이다(W 89). 이것은 우리 안의 하나님 형상과 우리 안의 하나님 탄생 간의 유사성을 상기시켜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엑카르트에게는 형상과 탄생 둘 다 우리 자신과 하나님과의 동일성을 어느 정도 드러내 준다. 그런데 형상이 대체로 잠재적이면서 영구적이라면, 탄생은 대개 실제적이고 실현 폭이 다양하다. 다시 말해 형상 / 탄생의 구별은 고전적 그리스도교 전통의 형상 / 닮음의 구별을 엑카르트식으로 설명했다고 보는 것이 좋다. 탄생(또는 닮음)은 우리 안의 신적 원형이 회복되고 실현되는 정도를 나타낸다.

엑카르트가 (형상론에서와 마찬가지로) 탄생론에서 시사하는 하나님과의 동일성에는 한 가지 요소가 더 부각 된다. 형상과 탄생에 관한 그의 가르침이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유비적 관계에 대한 이해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살핀 바와 같이 이 관계 공식을 낳음(generation)존재의 동일성(identity of being)으로 제시한 것은 니케아 신경이다. 그리고 우리 안의 하나님 형상과 우리 안의 하나님 탄생에 관한 엑카르트의 가르침도 본질의 동일성(identity of essence)이라는 같은 원리가 지배하고 있다. 후자는 전자에 있는 하나님의 무한한 풍요에 토대를 둔 신적 자기 증여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무조건 동화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 '· 인 한의 원리'를 거듭 환기해야 한다.

영혼 속 하나님 탄생에 관한 엑카르트의 가르침이 형상 /닮음의 대당에서 '닮음' 영역으로 여겨질 수 있다면, 표현은 독창적일망정 하나님 탄생교리에서 전통적 스콜라 은총신학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여기에 모든 필요한 요소가 있다. 그 탄생은 온전히 자주적이며 자유롭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교통(자기 본질을 나누어 줌)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성화되고 하나님을 닮아 가면서 우리 안에 있는 윤리 덕의 질서를 세운다. 그런데 엑카르트는 여기서 본질적으로 은총신학을 제시하면서도, 전통적 용어 사용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는 은총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닮게' 만든다고 하는데(W 81) 이는 순전한 정통 스콜라철학이다. 반면에 그는 은총의 역할을 단호히 배제하기도 한다. 은총은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W 92). 엑카르트의 신론(神論) 신적 형이상학은 창조된 것은 모두 제한된 존재를 가지며, (제한되지 않은 존재인) 하나님과 일치함으로써 우리가 초월하는 것은 분명 이 제한된 존재라는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엑카르트는 '창조되지 않은' 또 다른 하나님과의 '닮음'을 찾아내는 것 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그는 이것을 관념적으로 영혼 속 하나님 탄생이라는 형상에서 찾아낸 것이다.

 

 

결론: 합일의 표상

엑카르트의 독일어 저작을 깊이 들여다볼수록 점점 분명해지는 것은, 그가 '과학적'이고 설명적이기보다는 '시적'이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으로 자신의 주요 표상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확실히 그는 모순되는 입장을 취한다. 영혼의 '근저'Synderesis 와 동일하다고 말하다가도(W 32a) 동일하지 않다고도 한다(W 32b). 그것은 지성이면서(W 42) 지성이 아니다(W 72). 하나님과 우리의 합일의 궁극적 패러다임은 사랑이 아니라 지식이거니(W 72)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기도 하다(W 77). 어떤 구절에서는 '탄생'이 은총과 동일시되지만(W 68) 다른 구절에서는 그렇지 않다(W 41). '탄생''근저'가 합당하게 준비된 이들에게만 일어나는 그 무엇이라고 말하다가도(W l)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서 항상 일어나는 그 무엇 [따라서 내적 준비란 그 탄생의 혜택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W 2)]이라고 밝히는 구절도 있다. 그렇다고 엑카르트를 '혼돈의 사상가'로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엑카르트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구조가 겉보기에 변덕스럽기는 하지만 실은 주목할 만하다. 엑카르트는 대단히 절충을 좋아하는 사상가로서, 다른 사상가들의 주제와 관념을 자신의 방식에 도입하곤 했다. 하나님을 언급하는 경우에는 형상과 관념이 뒤섞여,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하나님의 총체적 초월에 대한 관심사에 묻혀 버릴 정도다.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완전히 부적절하다는 것을 엑카르트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자 한다. 이와 같은 기교를 지닌 그 무엇을 우리 안의 신적 요소의 형상들(불꽃, 성채, 왕관)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엑카르트가 사용하는 영혼의 '근저''영혼 속 하나님 탄생'이라는 형상에는 상이한 특징이 있다. 여기서 그는 많은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초월을 분명히 하기보다는 그러한 주제와 부합하는 우리 삶의 측면을 다룸으로써 특정 관념을 인간의 체험 세계 안에 확고히 하는 데 관심을 둔다. 따라서 '근저''탄생'이라는 두 가지 중심 형상은 엑카르트가 인간 체험의 다양한 영역을 담을 수 있는 '자루'역할을 한다. 전자의 경우, 그 영역은 교부학과 중세 신학이 우리 안의 하나님 형으로 존재한다고 특권을 부여한 우리 안의 요소다. 후자의 영역은 성화은총이 작용하는 다양한 형태다. 이 다양성은 더 이상 표상되는 것(the signified)의 초월을 끌어내고자 표상하는 것(the signifier)을 다양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제 표상되는 것이 다양하다는 의미로, 이는 표상하는 것을 매우 풍요롭고 유연하며 폭넓은 형상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이 형상은 다채로운 표현력을 통해서 기능하기 시작하며, 우리는 이를 대개 시적 이미지가 지니는 환기성과 연관 짓는다.

엑카르트가 자신의 은총신학과 우리 안의 신적 생명에서 완전히 새로운 무엇을 말하고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사실상 그의 메시지는 당대의 스콜라학자들의 메시지와 매우 유사하다. 그러면서도 분명 새롭고 두드러진다. 말과 이미지에서 풍기는 풍부한 표현력, 자유로이 떠다니는 역동적 이미지들로 정신을 사로잡는 엑카르트의 능력 덕분이다. 그 이미지들이 이제 무한한 에너지를 지닌 개인의 영적 통찰력에 대한 지각을 전하는 것이다. 이 이미지들은 신학이라기보다는 개념시에 가깝다. 중세 신비신학 전반에 걸쳐 울림을 주면서도, 배우지 못한 청중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만큼 단순하고 환기적이다. '근저''불꽃'이 인간 영혼과 영혼의 초월이 지니는 심오한 신비를 전달한다면, '탄생'은 하나님의 무한한 풍요와 역동성을 포착한다. 하나님의 변형시키는 은총 앞에 우리의 완전한 수동성을 제시하면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합일이 지니는 직접성을 우리 앞에 제시하는, 주목하고 기억할 만한 이미지다.

 

  2 합일의 표상.hwp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