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합일의 영성

 

 

 

신성과의 합일에 대한 엑카르트의 의식이 어떻게 그의 형이상학적 신학을 관통해 들어가 그것을 신비롭고도 실존적인 그 무엇으로 만드는지를 고찰했다. 이와같은 직관이 엑카르트의 신비적 합일의 신학을 형성하는 과정도 보았다. 이에 따르면, 하나님은 영혼의 바로 그 심층에 몸소 현존하신다. 이제 논의해야 할 엑카르트 '체계'의 셋째 영역은 그의 영성이다. 이 장에서 우리는 엑카르트의 합일의 신학과 합일의 표상이 세상에서 구체적 생활양식으로 이어지는 방식을 검토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인간 실존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복잡한 체험이 강조된다.

 

 

전통

엑카르트의 '영혼 속 하나님 탄생'의 배경을 논하면서, 은총의 신화(神化)와 우리 안의 성령에 대한 교부들과 중세 신학자들의 이해를 다루었다. 중세에는 성령칠은(지혜, 통찰, 의견, 용기, 지식, 공경, 외경)이 크게 강조되었다. 여기에다 우리 삶의 토대를 하나님에 두게 하는 '대신덕'(theological virtues) / 초월벽(transcendental virtues), 즉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보탤 수 있다.

엑카르트의 영적 스승은 대개가 수도승 작가들이다. 중세를 통틀어 영성생활의 실제 모습에 가장 관심을 보인 이들은 수도승들이다. 수도승이된다는 것은 특별한 영적 가치를 따르는 고유한 생활양식을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했다. 이 가치는 중세 영성 문학에서 논의되고 해석되었다. 영성 문학은 수도승 작가들의 펜 끝에서 나온 것이 단연 압도적이다.

초기 수도승들은 금욕을 통한 절제와 우리를 동물과 구별해 주는 이성(理性)을 매우 중시했다. 이따금 영성생활은 육체의 욕구에 부단히 맞서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나아가 사랑과 겸손은 현세 삶에서 우리의 영적 소명을 수행하는 주요한 방식으로 부각된다. 이 두 가지 모두 베네딕도 수도 규칙 7장에서 각별히 강조된다. 여기서 베네딕도는 요한 카시아누스(joannes Cassianus)의 영향을 받았다. 요한 카시아누스는 초기 그리스 수도승 영성의 상당 부분을 서방세계에 전한 인물로 제도집(Institutiones) 11장에서 겸손과 사랑의 주제를 폭넓게 다룬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나 기욤 드 생터에리 같은 후대의 수도승 저술가들도 베네딕도를 본받아 사랑과 겸손을 토대로 제각기 세련된 영성을 전개했다. 베르나르두스는 (사실상 베네덕도 수도 규칙 주해인) 겸손과 교만의 등급(De gradibus humititatis et superbiae)에서 겸손과 사랑이야말로 영성생활의 핵심 비전임을 제시한다. 12세기 카르투지오회의 귀고(Guigo) 2세는 묵상(Meditationes)에서 겸손을 으뜸으로 쳤고, 후세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몸소 삶의 모법을 통해 가난과 겸손과 사랑이라는 주제를 고귀한 반열에 올려놓았다. 서방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성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생택토르의 리카르두스는 ()벤야민(Benjamin Minor)에서, 영혼이 사랑을 통해 하나님께 오르는 모습을 고전적이고 신학적으로 표현했다.

서방 그리스도교의 영성적 가치는 물론 동방의 그것과 가깝지만 특징적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현세의 영성생활 개념이 한층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이었다. 그들에게 덕스러운 삶이란 인간이 하나님의 특성에 참여한다는 관점에서 쉽게 이해되었다. 가장 오래되고 영향력 있는 한 가지 개념은 아파데이아(apatheia) '마음의 평정'으로, 그리스 교부들이 거듭 되돌아온 곳이 바로 여기였다. 스토아철학자들에게서 유래한 이 말은 그들이 바라던 내적 평정 상태를 의미했다.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이를 선뜻 받아들였다. 안티오키아의 이냐티우스(Ignatius Antiochenus)는 이 용어를 영광을 받은 그리스도에게 적용했고, 아데나고라스(Athenagoras)는 하나님에게 사용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에게는 영적 여정의 마지막에 성취하는, 그리고 하나님과의 '동등'을 이루는 무감(無感, impassibility)의 경지를 의미하기에 이른다. 클레멘스에 따르면, 완전해진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격정이나 감정에도 방해받지 않는, 하나님 같은 평온 상태에 머무른다. 수도승 작가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Evagrius Ponticus)에게 아파데이아는 명상의 종착지다. 온갖 격정과 이미지와 사고를 초월하여 무형한 신성에 대한 직관에 들어갈 때, 아파데이아는 우리에게 온다. 다른 그리스 교부들은 더욱 실용적인 견해를 취하면서, 그리스도인 삼의 여타 뛰어난 덕들 그리고 영육 간 투쟁이라는 맥락에 아파테이아를 두었다. 아타나시우스에게는 그것이 당신 아들의 강생 공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인 반면,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에게 아파데이아는 원죄로 인한 타락 이전의 인간 본연의 상태이기에 교회에서의 회개와 세례로써 원래 모습을 회복해야 했다. 서방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7세기의 위대한 교부 고백자 막시무스에게 아파데이아는 영성생활의 토대이며 절제와 사랑 두 가지 모두의 결실이다. 아파데이아라는 용어는 그리스 교부들에게서 폭넓게 사용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양한 맥락에서 여러 의미를 포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엑카르트가 사용하는 초탈(abegescheienheit)이라는 용어도 유사한 부분이 많다. '마음의 평정'처럼 '초탈'도 광범한 개념이다. 게다가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 차원과 윤리 / 수덕적 차원 모두에 걸쳐 있다. 따라서 엑카르트의 이 용어는 그를 주류 서방 작가들과 구별하는 역할을 한다. 그들에게 윤리의 형이상학적 차원은 명시적이기 보다는 묵시적인 데 반해, 엑카르트의 초탈은 겸손과 복종과 사랑에 대한 전통적 강조를 포용한다고도 볼 수 있다. 겸손과 복종과 사랑은 수덕적 이상의 토대다.

 

 

초탈과 형이상학

엑카르트는 세상에서 우리 자신이 '초탈한' 존재인 것과 영혼 안에서 하나님이 형이상학적으로 탄생하시는 것 사이에 분명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에서 우리는 우리 안의 하나님 탄생이 곧 하나님 안으로 되돌아가는 우리의 탄생임을 확인한다.

 

영혼이 지금 현재에 있다면, 아버지는 영혼 안에서 당신 외아들을 낳으신다. 그 동일한 탄생으로 영혼은 하나님 안으로 되돌아간다. 그것은 하나의 탄생이다. 영혼이 하나님 안으로 되돌아가 탄생하는 만큼 빈번히 아버지는 영혼 안에서 당신 외아들을 남으시는 것이다(W 66; 79 참조).

 

이는 "하나님은 당신 밖에서 당신 안으로 당신 자신을 낳으시면서 당신 자신을 당신 안으로 다시 낳으신다"(W 79)는 간략한 표현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영혼의 세상 밖으로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이중으로 탄생한다. 하나는 세상 안으로의 탄생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 밖으로의 탄생이다. 세상 밖으로의 탄생은 영적 탄생이며 하나님 안으로의 탄생이다"(W 7).

엑카르트는 참된 초탈이란 영이 창조된 영역을 초월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단호히 주장한다. "우리의 모든 완전성과 온갖 천상 행복은 우리가 모든 피조물과 존재를 가로지르고 초월하여 근저 없는 근저로 들어가느냐에 달려 있다"(W 80). 그런데 엑카르트는 영혼이 한곳에서 참다운 초탈을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 가지 상태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첫째, 영혼이 산만하고 통일되어 있지 못할 때다. 영혼은 피조물에 끌릴 때 통일되지 못한다. 둘째, 영혼이 현세 사물들과 관계하고 있을 때다. 셋째, 영혼이 육체를 향할 때다. 이때 영혼은 하나님과 일치할 수 없다(W 85).

 

엑카르트가 초탈을 얼마나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지를 잘 드러내 주는 구절이다. 세 가지 모두 우리가 반드시 벗어나야 하는, 인간 실존의 구체적 육체성과 관련된다. 육체의 감각을 통해 영은 피조물의 차원에 붙들려 있으며, 자신의 고유한 잠재력을 실현하는 데 자유롭지 못하다. 영혼은 그 참된 본성이 무형이고 (따라서) 신적이지만, 형상들을 통해 세상과 연계됨으로씨 제약과 속박을 받는다. 영혼은 고유한 무형의 (따라서 '창조되지 않은') 본성을 실현하기 위해 자유로워야 함에도 (창조된) 형상들로 차 있다. 신성을 받아들이는 '초탈'의 과정은 동시에 신하(神化) 과정이다. "죽임을 당해 완전히 죽고, 자아가 없고, 무엇과도 닮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참으로 하나님처럼 된다. 누구와도 비할 데 없고 같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특성,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이다"(W 16). 신화에 대한 같은 견해가 초탈에 관하여라는 논고에서도 명확하게 제시된다.

 

이제 그대는 물으리라, 그 자체로 그토록 고귀한 초랄이란 무엇이냐고 ‥‥ 참된 초탈이란 이러하다. 거대한 납덩이가 미풍에 꿈찍도 않듯이, 기쁨이나 슬픔, 영예, 굴욕, 부끄러움이 한꺼번에 공격해 와도 영은 꿈쩍하지 않는다. 꿈적 않는 초탈이야말로 사람을 하나님과 가장 담게 해 준다. 하나님이 정녕 하나님일진대, 하나님은 그 초탈을 당신의 꿈적 않는 초탈로부터 지니고 있으며, 이 초랄로부터 하나님은 당신의 순수성과 단순성과 불변성을 지닌다(DW V, 411f).

 

이 관점에 따르면, 영혼의 '능력'은 세상과 영혼이 연관되어 있음을 드러내며, 그 능력은 하나님을 닮은 영혼의 '본질'과 대조된다. 영혼의 본질은 모든 활동과 모든 창조된 표상을 넘어선다.

 

그것이 무엇이든 영혼은 자신의 능력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한다. 영혼이 무엇을 이해하는 것은 지성으로써 이해하는 것이다. 영혼이 무엇을 기억하는 것은 기억으로써 기억하는 것이다. 영혼이 사랑한다면 의지로써 그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은 자신의 본질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써 작용한다. 모든 외적 행위는 수단과 결부되어 있다. 시력은 눈을 통해서만 작용한다. 눈이 아니라면 시력은 무용하다. 다른 모든 감각도 마찬가지다. 영혼의 온갖 외적 행위는 수단의 영향이다. 그러나 영혼의 본질에는 아무런 활동도 없다. 영혼의 능력은 존재의 근저로부터 나온다. 그 근저에 고요한 '중심'이 자리한다. 이곳에서는 탄생과 행위를 거행하고 휴식할 뿐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당신 말씀을 말씀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곳은 본성상, 매개 없는 신적 본질 말고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W l).

 

근저와 능력을 양분한 엑카르트는 우리의 감각 활동, 오감을 통한 세상과 피조물 인식은 근저의 초월과 반대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 말고는 누구도 영혼의 근저에 닿을 수 없다. 어떤 피조물도 영혼의 근저에 들 수 없으며, 반드시 바같의 '능력'에서 멈춰야 한다. 안에서, 영혼은 피조물을 끌어들여 거처로 삼은 그 형상을 또렷이 본다. 영혼의 능력이 피조물과 접촉할 때마다 그 능력은 피조물과 닮은 형상을 만들어 흡수한다. 영혼의 능력은 이런 방식으로 피조물을 인식한다. 어떤 피조물도 이보다 더 가까이 영혼에 다가올 수 없다. 또 영혼은 먼저 자발적으로 피조물의 형상을 자신 안에 취하지 않고서는 결코 피조물에 다가가지 않는다(W 1).

 

'근저'의 영성은 의식의 중심이 감각과 표상으로부터 물러나 세상을 초월하는, 영혼의 그곳으로 들어가는 데 토대를 둔다. 엑카르트 신비주의 핵심이 바로 이 초월 영성이다.

 

능력이 모든 활동과 형상으로부터 완전히 물러나면, 그제야 말씀이 발설된다. ‥‥ 그대가 그대의 능력으로 더 완전하게 일치에 다가갈수록, 그대가 흡수한 모든 형상을 더욱더 잊어 갈수록, 또 그대가 피조물의 형상들로부터 점차 멀어질수록 그대는 말씀과 더 가까이 있게 되고 말씀을 더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W l).

 

엑카르트는 하나님 당신이 아무것도 아니듯이 우리도 '' (nothing)가 되라고 도처에서 촉구한다. '하나님의 본성은 어느 누구와도 같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과 똑같은 본성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W 7). 우리는 시간과 장소라는 영역을 떠나야 한다. 이 영역들은 우리 존재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것들로서 하나님의 초월성과는 이질적이다.

 

영혼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데 시간과 장소만 한 것이 없다. 시간과 장소가 파편이라면 하나님은 하나. 영혼이 하나님을 알려면 시간과 장소를 넘어서야 한다. 하나님은 잡다한 사물들처럼 이러저러하지 않다. 하나님은 하나다(W 69).

 

엑카르트는 우리가 구체적('이러저러한') 존재에서 벗어나 벌거벗은 보편적 인간 본성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성과 인간은 다르다. 인간성은 그 자체로 매우 고귀하고 그 정점은 천사들과 동등하며 하나님과 비슷하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이루신 가장 긴밀한 합일, 나도 그것을 이룰 수 있다. 이러저러한 것에서 벗어남으로써만 나의 인간성을 실현할 수 있다(W 10).

 

그리스도께서 취하시고 신화(神火)하신 것은 보편적 인간 본성이다. 따라서 우리의 본성에서 '우유적'(偶有的, accident)이거나 이차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이 보편적 인간 본성에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일치한다.

 

아들이 되기 위해, 그대 안에서 구별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버리고 떠나야 한다. 인간은 본성상 '우유적'이다. 그러니 그대에게서 우유적인 것은 모두 없이하고 나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자유로 그대 자신을 취하라. 그대가 취한 본성을 영원한 말씀이 취함으로써 그 본성이 영원한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기에, 하나님이 되신 그 본성으로 그대 자신을 취함으로써 그대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 그러므로 그대는 자신을 이러저러한 사람으로서 취하지 말고 그대의 자유롭고 나뉠 수 없는 인간 본성에 따라서 취하라(W 47).

 

우리는 자신의 구체적 본성이 지닌 확정성(廓正性, determinacy)을 깨뜨림으로써 일종의 보편 의식을 얻는다.

 

이러저러한 것은 모든 것이 아니다. 내가 이러저러하거나 또는 이러저러한 것을 가지고 있는 한, 나는 모든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이러저러한 것이기를 그치고 이러저러한 것을 가지기를 멈추라. 그러면 그대는 모든 것으로서 모든 것을 가지며, 여기에도 있지 않고 저기에도 있지 않으며 도처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닌 온갖 것이다(W 49).

 

 

초탈과 덕

엑카르트는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적 범주에서 초탈을 다루고 있지만 초탈의 윤리성을 언급하는 구절도 많다. 다음에서 보편적 존재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특정한 윤리적 입장으로 이어진다.

 

한층 더 어려운 것이 있다. 모든 매개로부터 자유롭게 벌거벗은 본성으로 존재하려면 모든 인격적 차별을 버려야 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다 저편 사람에게도 가까운 친구 대하듯 호의적이어야 한다. 그대가 본 적 없는 그 사람보다 그대 자신의 인격만 귀하게 여기는 한 그대는 결코 옳지 못하며, 단 한순간도 이 순일한 근저를 들여다보지 못할 것이다(W 13b; 74 참조).

 

여기서 엑카르트는 우리 의식의 불특정성, 우리 구체적 존재(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우유')의 발산을 우리가 다른 이들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촉구하는 토대로 이용한다.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초탈하여 단 하나의 사랑을 가진다면, 나는 만물을 똑같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W 74). 이를 행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확실한 표징이다.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다. 이웃의 기쁨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그의 영예를 자기 영예만큼 바라며, 낯선 이를 자기 자신인 양 사랑하게 마련이다‥‥ 다른 이의 영예보다 그대 자신의 영예에서 더 기쁨을 얻는 것은 진정 잘못임을 알아야한다(W 40).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우리는 더더욱 다른 이들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존재로서의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제각기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당신 자신을 쏟아 부으신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전부로써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사랑하라는 훌륭한 교훈이다. 어떤 사람이 친분이나 우정으로 자연히 우리와 더 가깝더라도 우리는 동일한 선과 관련한 신적 사랑으로 모든 피조물에게 한결같이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 ‥‥ 이렇게 하나님은 온갖 피조물을 똑같이 사랑하시며 당신 존재로 그들을 채우신다. 우리 역시 모든 피조물에게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쏟아 부어야 한다(W 88).

 

무엇보다도 초탈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모든 이를 똑같이 사랑하게 해 주고, 그다음으로는 겸손을 실천하게 해 준다. 엑카르트는 형이상학적 초탈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고전적 겸손이라는 한결 윤리적인 관점에서 우리 자신의 비움을 수차례 언급한다.

 

천상의 능력은 지상의 제아무리 낮은 곳이더라도 그곳에서 가장 많은 기회를 얻어 효과적으로 활동할 수 있듯이, 하나님은 크나큰 활동과 당신 닮은 모습을 겸손한 마음에서 찾아내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참다운 겸손과 참다운 벌거벗음의 근저로 들어가라고, 또 우리가 본디 소유하지 않은 온갖 것(죄와 결점)과 본디 소유했더라도 애착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죄다 버리라고 가르치신다(W 46).

 

엑카르트는 겸손에 따른 비움의 이미지를 충만한 하나님 현존에 대한 기대로 제시하기도 한다.

 

이는 모든 피조물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선하신 하나님은 거두어들이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그 사람 안에 충만히 쏟아부으신다. 하나님은 이러하시지 않을 수 없기에 반드시 이를 행하시는 분이다.

 

엑카르트가 우리와 하나님과의 합일의 토대로 겸손을 내세우는 구절이 이어진다. 여기서 겸손은 본질적으로 초탈과 같은 의미다.

 

진실로 겸손한 사람 안에서 만사가 성취될 것이라고 나는 파리 대학에서 밝힌 바 있다. 태양은 하나님을 상징한다. 헤아릴 길 없는 신성을 지닌 지극히 높으신 분이 깊은 겸손으로 가장 낮은 데에 임하시는 것이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무언가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없다. 그는 하나님께 명령할 수 있다. 마카메오 공동체에서 말했듯이 지고한 신성이란 깊은 겸손을 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에게 그분 못지않은 능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천사들에게 있는 것이라면 겸손한 사람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일은 곧 겸손한 사람의 일이며, 하나님에게 해당하는 것이면 그에게도 해당한다. 같은 생명, 같은 존재인 것이다(W 50).

 

겸손이 여러 덕 중에서도 탁월하며 엑카르트의 초탈에 가깝다는 점이 명확히 드러나는 글이 이어진다. "겸손이라는 덕은 신성의 근저에 뿌리를 두었기에, 그 덕은 그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오로지 영원하신 한 분 안에 심어 두었다"(W 51). 마지막으로, 우리의 '창조된' 영역의 형이상학적 초월은 동시에 우리의 물리적 욕구의 극복이라는 점을 엑카르트가 분명히 밝히는 구절을 소개한다.

 

사람이 지닌 동물의 욕정과 갈망은 영혼의 지고한 능력 안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영혼이 피조물 위로 들어 높여지지 않는한, 성령이 영혼 안으로 들어오거나 그 안에서 활동할 수 없다.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모든 신적활동을, 그는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어 영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물질은 신적 유입을 더럽히는 까닭이다. 영적 피조물에 쏟아지는 신적 빛은 생명을 낳는다. 그러나 물질에 비치면 빛은 꺼지고 완전히 소멸할 것이다(W 75).

 

 

초탈과 인간 체험

일상에서 초탈 과정은 자기 의지를 포기하는 데서 시작된다. 동료 도미니코회원들을 위해 쓴 강화에서 엑카르트는 순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기 것을 순명으로 버릴 때, 하나님은 반드시 다시 들어오신다.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생각하시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 사람을 생각하신다. 내 의지를 장상 손에 맡기고 나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나를 기억하신다. 그분이 내게 소홀히 하시는 것은 곧 당신 자신에게 소홀히 하시는 것이다(DW V, 187).

 

과연 자신의 의지를 버림으로써만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소유하신다고 확신할 수 있다.

 

자신의 의지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당신 의지를 답례로 주신다. 너무나 송두리째, 너무나 진실로 그러하시기에 하나님의 의지는 그 사람의 의지가 되며, 그의 의지가 아닌 것은 행하지 않으리라고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걸고 맹세하셨다. 하나님은 먼저 당신 소유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코 소유되지 않으신다(W 10).

 

인간적 의지를 버리는 것은 사물을 소유하려는 의식을 버리는 것이다. 이 소유 의식은 자아에서 나온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선물에서 우리의 자의식을 없애는 법을,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법을, 이익 · 기쁨 · 영성 · 단맛 · 보상 · 천국 · 의지에 이르기까지 그 무엇도 추구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의 의지 없이 그 누군가의 의지에 따라 그에게 들어가신 적이 결코 없다. 그분은 당신 자신의 뜻이 드러나는 데마다 당신을 내주시며 온전한 당신으로 들어가신다. 자신을 벗으면 벗을수록 우리는 그분에 가까워진다(DW V, 281).

 

따라서 엑카르트는 어떠한 것도 영구히 우리 소유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환기 시킨다.

 

우리는 사물을 지닐 때 얻은 것이 아니라 빌린 것처럼 여겨야 한다. 육체 · 정신 · 감각 · 기능 · 패물 · 영예 · 친구 · 친척 · · 땅 모두 마찬가지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가 무엇이며, 그토록 바라시는 바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 당신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유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분이 온전히 뜻하시고 바라시는 바다. 여기에 그분의 모든 갈망과 기쁨이 있다. 이를 더욱 충만하고 완전하게 성취하실수록 그분의 천상 행복과 기쁨은 커져만 간다. 다른 것들을 많이 소유할수록 우리는 그분을 적게 소유하게 된다. 다른 것들을 적게 사랑할수록 그분이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모든 것과 함께 그분을 더 많이 소유하게 된다(DW V, 295f)

 

엑카르트식 초탈은 완전한 자아 포기다. 여기서 자아 포기와 자아 의식 포기, 소유 의식 포기는 한가지다.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대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말라! 그대 자신을 놓아주고 하나님께서 그대와 함께 그대 안에서 당신이 뜻하시는 대로 행동하시게 하라. 이 행위가 그분 것이고, 이 말이 그분 것이며, 이 탄생이 그분 것이니 과연 그대에게 속한 하나하나가 전부 그러하다. 그대는 자아를 포기함으로써 그대 (영혼의) 능력과 활동, 그대 개인의 본성으로부터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대의 존재와 능력 안으로 들어오신다.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광야가 되어 버린 그대에게로 (W 3).

 

피조물의 무와 초탈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으로 엑카르트는 행위를 철저히 비판한다. 행위는 너무나 쉽사리 소유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의인은 자신의 행위에서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행위에서 무언가를 추구하거나 어떤 '이유' 때문에 행위를 하는 사람은 노예나 삯꾼이다. 따라서 그대가 의()로 충만하여 의롭게 변모하고자 한다면, 행위에 딴목적을 두지 말고, 시간과 영원, 보상과 축복, 이것과 저것에 관해 어떤 '이유'도 달지 말라. 진실로 그와 같은 행위는 죽은 것이다(W 59).

 

엑카르트는 행위가 구체적 시공간에 속한다고 본다. 따라서 행위는 생겨나자마자 소멸한다. 행위에는 지속할 아무런 것이 없다.

 

행위는 그 자체로 소멸하는 것이라 존재를 소유하지 않고, 행위가 발생하는 그 시간을 소유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행위는 선하거나 거룩하거나 복되지 않다. 행위의 열매를 시간이나 업적이 아닌 좋은 습성으로 간직한 사람이 오히려 복되다. 영이 그 자체로 영원하듯이 좋은 습성은 영과 함께 영원하며 영 그 자체다(W 15).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기보다 자신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선하다면 우리 행위는 빛을 발할 것이다. 우리가 의롭다면 우리 행위도 의로울 것이다.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존재이냐에 성성(聖性)의 토대를 두어야 한다. 행위가 우리를 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위를 성화시키는 것이다(DW V, 197f).

 

엑카르트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과 하나님 자체를 혼동하지 말라고 타이르면서, 영적 · 수덕적 성취에 대한 자만을 경고한다.

 

난롯가나 마구간에서보다 묵상과 신심 행위, 무아경, 특별한 은총을 통해 하나님을 더 많이 체험할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 머리에 망토를 덮어씌우고 그분을 의자 밑으로 밀어 넣는 셈이다.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찾으려 하다가는 그분을 놓치고 만다. 하나님은 숨어 계시다. 특별한 궁리 없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만이 그분을 만난다.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과 더불어 산다. 그리고 그는 생명 자체다(W 13b).

 

따라서 특별한 신심 행위가 우리와 하나님과의 합일을 방해한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을 버리라는 엑카르트의 주장은 놀라울 것이 없다. 외적 실천은 내적 실패로 대체된다. "실로 내적 훈련이 잘되어 있다면, 모든 외적 훈련을 단호히 버려라"(W 3). 엑카르트는 여기서 모든 영적 실천의 궁극적 내면성을 제시하면서도, 행위가 영성생활에 필수 불가결하다는 점도 애써 강조하고 있다.

 

행위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단언컨대 결코 그리될 수 없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나서 선을 행하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우리 주님 발치에 않아 배우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막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훗날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가시고, 마리아는 성령을 받은 다음 봉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바다 건너까지 다니며 설교하고 가르쳤다(W 9).

 

엑카르트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셔야 한다고 하나님께 청함으로써 기도를 '행위'의 우상으로 변질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대가 하나님께 피조물을 청하는 것은 그대 자신에게 해악(害惡)을 청하는 것이다. 피조물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 안에 비통, 고뇌, , 걱정거리를 지니기 때문이다"(W ll). 나아가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단연코 하나님께 무언가 주십사 기도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에 대해 그분을 찬양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받을 자격이 있게 해 주십사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고, 틀림없이 주시고야 마는 본성과 본질을 지니신 분이기에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같은 곳).

그런데 엑카르트는 일상생활에서 고난에 응답하는 방식을 통해 초탈의 원리가 우리 안에 작용한다고 본다. 그는 우리가 인생의 영고성쇠 저 너머 평온한 곳에 도달해야 한다고 단호히 주장한다.

 

인간의 모든 완전성은 피조물에게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모든 일에 한결같이 응답하며, 역경에 위축되거나 성공에 동요하지 않고, 어떤 및에 유독기때하지도 놀라지도 슬퍼하지도 않는 것이다(LW IV, 694).

 

"모든 일에서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변하지 않고 흔들림 없으며 영원토록 견고하신"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W 49) "부요하거나 가난하거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라. 유혹이 있거나 없거나, 고통이 있거나 없거나 똑같이 그분을 사랑하라"(W 18).

그러나 엑카르트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초탈을 깨달아 심화시키는 기회가 고난에 있다고 본다. 그는 우리의 여정에서 부딪히는 물리적 · 외적 고난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인상 깊게 서술한다.

 

자신의 영혼, 밀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밭에 뿌리고 그것이 썩어 많은 결실을 맺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육체적인 방법, 다음은 영적인 방법이다. 육체적인 방법은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제아무리 허기와 갈증, 추위, 더위, 부당한 조롱과 고난을 겪는다 해도, 또 하나님께서 어떤 시련을 주시더라도 흔쾌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창조하신 것은 그가 고난과 불편과 수고를 견디어 내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으며, 하늘과 땅에서 그 무엇도 바라지 않게 하기 위함인 듯하다. 또 그가 자신의 모든 고난을 하찮은 것으로, 거친 바다에 떨어진 물 한 방울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큰 고난에 비추어 그대의 모든 고난을 보아야 하는 방식이다. 그때에야 그 낟알, 그대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라는 숭고한 맡에서 풍성한 결실을 맺고 썩어 없어져 온통 자아를 잊게 될 것이다.

 

하나님 뜻에 대한 이 철저한 순명은 내적 영역에서도 필수적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더욱 미묘한 고난과 마주친다.

 

이제 영, 밀알이 풍부한 결실을 맺는 둘째 방법을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시는 모든 영적 굶주림과 쓰라림을 참고 견뎌야 할 것이다. 그는 내 · 외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을 수행하고 나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멸절시키거나 지옥에 던져 버리려 하실지라도 하나님께 살려 달라거나 지옥에서 구해 달라고 청해서는 안 된다. 자기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대와 더불어 하시고자 하는 바, 하나님이 뜻하시는 바를 도와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의 창조되지 않은 본성 안에서 절대적이듯이 그대의 모든 것 안에서 절대적이어야 한다.

 

엑카르트는 우리가 영적 합일이라는 달콤한 위안에 빠져 하나님을 향한 여정에서 꾸물거리지 않도록 거듭 주의를 환기 시킨다. 그것이 우리를 방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2세기 뒤 십자가의 성 요한도 그와 유사한 가르침을 남겼다.

 

그대가 지녀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하나님이 그대를 내적 가난에서 해방시켜 내면의 부와 은총을 주시고 그대 영혼이 견디어 낼 수 있는 한 그대를 당신 자신과 일치시키려 하신다 해도, 그대는 이런 부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만 영광을 드려야 한다. 그대 영혼이 텅 비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그곳에서 그대 영혼을 무엇인가로 창조하지 않으셨던가(W 89).

 

 

결론

엑카르트가 제시하는 '영혼의 불꽃'과 영혼속 하나님 탄생' 개념이 일련의 형이상학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인상적 은유라면, 초탈이라는 표현도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같은 의미의 주제와 문제 전반을 살펴보았다. 초탈은 곧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닮음이자 피조물로서 우리의 무이며, 하나님 뜻에 우리를 내맡김, 모든 사람에 대한 똑같은 사랑, 겸손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초탈은 형이상학적 영역과 윤리적 영역 둘 다에 걸쳐 있는 용어로, 엑카르트 가르침의 매우 독특한 색조를 반영한다. 엑카르트 이전과 이후의 서구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수덕신학에서 형이상학에 대해 그다지 깊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엑카르트에게서 윤리 활동 체계의 결정적이고 확고한 형이상학적 관점이 드러난다. 엑카르트에게 초탈은 '영혼 속 하나님 탄생', 그리고 우리 내면의 하나님을 닮은 본질의 현실화에서 기인하는 삶의 형태다. 따라서 진심어린 의미에서 '초탈한' 방식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것이다(17장 참조). 그러나 초탈과 실존(또는 '일상')이라는 두 경험의 범주는 균형이 유지되어야 한다. 초탈한 삶에 관한 엑카르트의 일부 견해가 다분히 이상적일지라도 형이상학적 차원은 인간의 실제 삶에서 끊임없이 검증된다. 현실 세계의 투쟁과 덕행의 삶을 실천하지 않고도 우리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일치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엑카르트를 대단히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가 이러한 투쟁을 깊이 다루지는 않았더라도 그의 저작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동시에 엑카르트는 우리의 성화가 외적 문제라거나 우리 자신의 에너지와 능력을 통해 실현할 문제라는 관념에 도전을 제기한다. 윤리적이고 수덕적인 모든 진보는 우리 존재의 심층에 있는 하나님의 지고하고도 은총 가득한 개입, '영혼 속 하나님 탄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견해를 그토록 체계적이고 명백하게 단언한 교회 스승은 드물다. 엑카르트는 자신의 모든 수덕적 가르침에서 이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그러면서 "이질적이고 부도덕한 것들로부터 인간을 지키고 보호해 주는"(W 3) 행위 역시 간과하지 않는다.

 


3 합일의 영성.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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