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자아 거짓 자아

 

True Se[f / Fatse Setf

내적 정신의 탐구

배절 페닝린 ocso 지음

서한규 옳김

      

 

목 차

 

1. 경청하는 존재

2. 거짓 자아의 형성

3. 참 자아

4. 인간 의식의 발달

5. 기억의 치유

6. 살아있는 유산

7. 하나님의 말쓸에 의해서

8. 작별 인사 :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1장 경청하는 존재

 

"나는 그렇게 듣지 않았어!"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하는 말에 그런 식으로 반응할까? ,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은 후에 자주 그런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 네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의 정확성에 대해 논쟁하는 것도 바로 이런 문제 때문이다. 복음사가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이야기했다. 그 상세한 설명이 과장되거나 틀린 것은 아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입을 빌어 사용한 말은 각기 다르다. 각기 강조하는 바가 다른 것이다. 이 복음서에서는 이런 면이, 저 복음서에서는 저런 면이 강조된 것이다. 인간의 경험도 바로 그렇다.

 

두 사람이 교통사고를 목격했다고 치자. 그들의 말은 본질적으로는 같겠지만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다를 수 있다. 그들이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목격자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내적인 문제이다. 실제로 그것은 어떤 색깔을 더 좋아하는지의 문제뿐일 수도 있다. 한 목격자는 파란색을 좋아하고 빨간색을 싫어한다. 그래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호감이 가는 파란색 차의 편을 든다. 그렇지만 단순히 색깔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경청하는 존재라는 것은 매우 복잡한 것이다. 그것은 일생 동안 쌓아온 경험의 결과이다.

 

내가 여기에서 '경청'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듣는 능력에 대해서만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 존재로 듣고 있다. 내가 귀로 소리를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눈으로는 색깔을 듣고, 코로는 냄새를, 입으로는 모든 종류의 맛을 듣는다. 나의 내적 능력이 감정, 느낌, 기억과 생각을 들을 때 몸 전체는 그 접촉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나는 내 위주로 듣고 내 위주로 받아들인다.

 

잘난 체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기념비적인 작품 '신학 대전 (Summa Theologiae)'에서 내가 기억하는 라틴어 문장을 인용해 보고자 한다. Quiquid recipitur per modumrecipientis recipitur.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에 달려있다.)

 

내가 이런 어려운 말을 쓸 때, 여러분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반응을 할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그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라틴어는 그저 자기와 상관없는, 어려운 말일 뿐이다. 어떤 이들은 의기양양할 것이다. 어렵사리 배웠던 라틴어가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기억 속에서 깨어났다. 우줄해진다. 그 단어 하나하나가 특별한 감흥을 준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은 매우 드물 것이다. 아마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허영에 찬 학식을 자랑하면 흠 잡히기 쉽다. 또한 이 뛰어난 성인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하거나 가톨릭 신학에 지성적 무미건조함을 초래했다며 비난하려는 경향 등, 이 공경하올 교회 박사에 대한 반응도 엇갈린다. 이 모든 태도나 인식이나 감정들은 우리의 견해를 형성하는 특성 중의 하나이다.

 

우리의 견해는 소위 특정한 형태를 가진다. 귀나 눈을 통해서건, 입이나 코를 통해서건, 다른 방법으로건, 우리는 가장 친숙한 방법을 통해서 지각한다. 그 조건에 들어맞는 것은 이해되고 지각될 수 있지만 그 조건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무시되거나 지각될 수 없을 것이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겠지만.

 

엄격한 사람들, 융통성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거의 지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강한 편견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적어도 어느 정도 부적절한 자만과 교만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에 대해 모두 알고있다!" "나는 그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알고 있다!" 그들은 이미 사고가 굳어져서 더 넓은 생각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다. 그들은 매우 완고해져서 유연함이 전혀 없다.

 

반면에, 더 개방적인 사람들은, 어느 정도 훈련을 받았다면, 상호간에 경청함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도 받아들일 수있다.

아쉽게도, 나도 많은 편견들을 가지고 자라났다. 물론 우리 모두 그럴 것이다. 우리가 가진 편견들은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다. 우리는 어느 정도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 모든 편견들을 살펴서 우리 안에 있는 그 편협한 편견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찾는 것은 일생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내가 가졌던 편견들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은 유대인과 흑인들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다. 나는 '유대인들은 이렇다, 유대인들은 저렇다.'라는 말을 계속해서 들어왔는데, 분명히 호의적인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웃 중에 흑인이 전혀 없었음에도 흑인들에 대해서도 거의 똑같은 말을 들었다. 이런 편견들을 일적 깨닫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더구나 내가 아주 훌륭한 유대인들이나 흑인들을 알게 되고 그 나쁜 편견을 제거 할 수 있게 해 주신 것도 감사드린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어린 시절의 이런 편견의 찌꺼기들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다. 또 다른 편견들도 있다. 양배추를 싫어하고 아스파라거스를 좋아하는 것과 같이 사소하고 간단한 것일 수도, 친미주의와 같이 도발적인 것일 수도 있다.

 

개개인의 견해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는 없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어떤 경위를 통해 지금의 견해를 가지게 되었는지 분별해볼 필요는 있다. 그런 분별을 하게 되면 우리는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열린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견해를 변화시키고 식견을 넓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아닐 수도 있다. 한 순간에 우리의 식견이 더 넓어질 수도 있다. 그것이 내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내가 어느 정도 내 위주로 듣는다는 것을 깨달을 때, 나의

참 자아를 받아들이는 여정의 첫 발을 내얻는 것이다. 내 견해가 참 자아와 가까이 있든 아득히 멀리 있든 그것이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 서 있다는 자체가 가능성과 희망을 준다. 나는 거짓 자아를 뒤에 남겨 두고 이 출발점에서부터 참된 자아를 찾아 나아갈 수 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나는 훨씬 더 참된 나를 찾을 수 있다.

 

내가 내 위주로 듣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나의 특별한 견해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또 다른 견해들이있다. 다른 사람들의 풍부한 견해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나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다시 희망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각자가 어우러져 공동체의 통찰력과 깨달음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단체 활동이나 위원회 등에 열심히 참여하게 된다. 이런 깨달음은 즐거운 일이다. 이런 깨달음으로 나는 성 베네덕토 수도 규칙서(Rule ofSt. Benedict)를 준수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이 지혜롭고 거룩한 규칙서를 만든 성 베네딕토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아빠스는 모든 형제들을 회의에 참석시키고, 사소한 문제들은 원로회의를 소집해서 협의하라.' 고 말했다.

 

우리 각자는 나름대로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 각자가 독특하다는 것은 기뻐할 일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특별한 공헌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는 성장한다.

 

 

2장 거짓 자아의 형성

    

우리의 견해는 이미 만들어진 시각의 산물이다. 그것은 일생동안 형성된 것이고 결코 완성되지 못한 자아상의 결과이다. 향심기도나 그와 비슷한 형태의 관상기도를 할 때, 우리는 참으로 모든 조건들을 버리고 하나님과의 변형적 일치를 맛보기 위해 우리 자신을 완전히 개방한다. 이것은 순수한 마음의 열매이고 그것을 이룬 사람은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경험을 한 선지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런 경험을 완전하게 하는 것은 여전히 하늘나라로 가는 여정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드문 일이고 경험을 한다고 해도 순식간에 지나가므로 우리는 너무나 빨리 더욱 무미건조함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 경험에만 매달려 있으면 불행하게도 자의식은 거짓 자아의 산물을 만들어 내서 우리의 견해를 왜곡한다. 그 과정은 이미 자궁 안에서 시작된다. 대체로 어머니의 자궁은 거의 완벽한 환경이고 그 안의 작은 생명체는 아주 만족스러운 보호를 받는다. 그 작은 생명체가 이렇게 24시간 보호를 받는 목가적 세계로부터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되면서 곤란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아기는 공기, , 음식, 따뜻함 그리고 편안함과 같은 기본적인 것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배고픔 때문이건 엉덩이를 찌르는 주사바늘 때문이건, 아기는 아주 큰 울음이라는 단 하나의 방법으로만 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아기를 사랑어린 마음으로 돌봐주는 사람은 아기가 왜 우는지 알고 아기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다. 더 미묘한 것도 있다. 우리는 현대 심리학 덕분에 아기들이 만져주고 껴안아 주고 말을 걸어주고 부드럽고 편안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더 잘 알게 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이의 첫 경험은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욕구가 채워질 때, 아기들은 행복해하고 만족스러워 하며 안심하고 편안한 느낌을 가진다.

 

갓난아기는 부모나 유모 등, 필요한 욕구를 채워주는 사람을 금방 알아차린다. 어린 아기는 곧 그 사람과 일체감을 갖고 그 사람이 가까이에 있을 때 비교적 만족하거나 안심하고, 욕구가 생기면 그들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렇게 돌봐주는 사람과의 좋은 관계는 본능적인 동기가 된다. 그리고 이 관계는 훌륭한 자녀양육이라는 소임으로 이어진다.

여기, 부모가 깨달아야할 역할이 있다.

 

부모의 사랑은 가장 하나님과 닮은 것이다. 부모는 하나님과 함께 이 작은 아기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부모의 사랑은 완전히 무조건적이다. 그 작은아기는 그런 사랑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전혀 없다. 그래서 이 무조건적인 사랑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다. 조카사위 중 하나가 생각난다. 더그는 덩치도 크고 키도 크고 잘 생기고 농구도 아주 잘하는 유망한 운동선수이다. 첫 딸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않아 (지금 그들은 아이가 셋이 있는데) 커다란 손에 어린 것을 안아들고 의자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우연히 본 적이 있다. 그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넘쳐흐르는 사랑이 뿜어져 나왔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저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무조건적인 사랑을 듬뿍 받는다면, 그 아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될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와는 반대의 상황이 펼쳐진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면 자신이 성공한 것이고 공부를 못하면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의 성적에 웃고 우는 부모들은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해야만 많은 사랑을 주었다고 착각한다. 그들은 아이에게 말한다. 실제로 말로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행동을 통해서 말한다. "엄마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네가 ‥‥ 시금치를 먹지 않으면, 예쁜 꼬마 숙녀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언니에게 잘 하지 않으면‥‥‥ 아빠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네가‥‥ 장난감을 치우지 않으면, 야구시합에서 홈런을 치지 못한다면, 우등상을 받지못하면‥‥‥

 

이런 상황에 부및히면 그 아이는 자신이 그다지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아이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잘했던 일 때문에 사랑을 받고, 칭찬 받을 만한 행동을 할 때만 존중받고 사랑을 받는다는 생각을하게 된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는 더하다. 누가 인기가 있는 어린이일까? 아주 어릴 때에는 오락기, 컴퓨터, 자전거 등 어떤 특별한 것을 가진 녀석이 인기가 있을 것이다. 더 자라면 어떤 것을 할 수있는 아이가 인기를 얻을 것이다. 야구를 잘하거나 춤을 잘 추거나 공부를 잘 하거나‥‥

 

어른이 되면 선택의 폭이 그렇게 넓지 않다. 재산이 많거나 좋은 직업을 가졌거나 (사실이건 아니건) 다른 사람들이 좋은 평가를 내리면 자신이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본다. 또한 자신도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기 시작한다. 이것은 거짓 자아의 산물이다. 거짓 자아의 산물은 나의 재산, 나의 직업,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의해 만들어진다.

 

선진 사회일수록 남자들은 그런 것에서 우월감을 가진다. 한 남자가 자신을 소개할 때 얼마나 자주 직업을 말하는가! "나는 김 아무개입니다. S 그룹의 부사장입니다." "나는 이 아무개입니다. Y 대학교 교수입니다." 만약 처음 만난 사람이 자기소개를 하는데, 이런 직책을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곧바로 되물어볼 것이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은퇴를 두려워한다. 그것은 실제로 죽음의 조종(弔鑛)으로 받아들여진다. 40년 동안 "나는 이 아무개입니다. 나는 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던 사람이 갑자기 "나는 이 아무개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직업과 자신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그것을 거짓 자아의 축으로 만들어 왔기 때문에, 은퇴를 하면 실제로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얻은 명예에 만족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편안히 쉴 때, 그는 품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또 다른 거짓 자아를 만들어 낸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자신의 직업에 그다지 많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여자들이 했던 일은 그다지 명예로워 보이지 않는 역할인 가정을 돌보고 아이를 키우는 일이었다. 그래서 여성들은 옷, 보석, 머리 스타일, 몸매 등 자신이 가진 것을 더욱 강조 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오늘날 S 그룹의 사장은 메어리 존스일 수도 있다. 귀걸이를한 남자들도 있다. 몇 년 간 나는 홍콩 근처의 란타우 섬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창립을 도와 일한 적이 있었다. 손님들과 우리는 섬과 본토를 오갈 때 작은 배를 이용했다. 처음에 우리를 실어 나르던 몇사람은 점점 더 많은 배를 가지게되었고 가족도 뱃일에 뛰어들었다. 시간이 흐르자 그의 자식과 또 손자들까지 그 일을 하게 되었었다. 어린 아이들이 처음으로푼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에는 얇은 터셔츠를 입고 슬리퍼를 신고일을 했다. 그러나 돈을 좀 벌게 되자 금 목걸이와 금팔찌와 옥을 즐기게 되었다. 번쩍거리는 보석들이 휘황찬란하다. 나는 그 무거운 장신구 때문에 배가 가라앉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다.

그것은 모두 계산과 직업과 다른 이들의 평가에 대한 거짓 자아의 산물이다.

 

잠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내 자신을 어떻게 소개 할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아주었으면 하는가? 그것은 나의 재산이나 직업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나는 누구라고 말해야 하는가? 나에게‥‥ 다른 이들에게.? 진실로 나는 누구인가?

 

이 거짓 자아는 종교에서도 나타난다. 그곳에는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 어떤 분이 있다. 나는 내가 원하고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나 종교라는 것은 아주 제한적인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새로워지기가 힘들다. 이전에는 주일 미사에 꼭 참례했으며 금요일에 금육을 하며 하나님과 잘 지내왔다.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오늘날에 와서 금요일에 고기를 먹으며 주일 미사를 빠지는 것이 더 이상 그렇게 대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사회 정의나 빈민 구제와 같은 일에 참여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잘 지내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정말로 하나님과 인간적인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

사도 바울(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몸소 모범으로 가르치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세 가지 유혹 이야기를 보자. 예수님은 거짓 자아에서 비롯된 유혹에 단호히 아니라고 말하면서 거짓 자아에 대처하는 법을 가르처주신다.

 

40주야를 단식하신 후에 예수님은 매우 허기지셨다. 유혹자는 빵을 만들어 보라고 제안했다. 후일 빵 다섯 덩어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분에게 몇 조각의 돌을 가지고 군침이 도는 식사를 만드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더 좋은 양식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면 다른 사람의 눈에 뛰어난 것처럼 보임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는 것은 어떤가? 유혹자는 예수님을 이끌고 거룩한도시의 성전 꼭대기로 갔다. 마당에는 신앙심 깊은 신도들로 가득했다. 사람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갑자기 공중에서 내려온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진짜 누구인지 알고서 보내는 환호는 필요치 않으셨다. 그러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가? 세상의 모든 나라와 도시를 지배하는 권력이란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온 세상을지배한다면, 그는 확실히 대단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분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아셨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의 정체성을 능력이나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혹은 가진 것에서 찾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그리고 하나님 안에 계신 분이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 행복한 세상이 아넘에도 거짓 자아의 세상에서 산다. , 우리는 훨씬 더 많이 얻고, 훨씬 더 많이 하고,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고(사제나 수도승 조차도 그렇게 하려고 한다.) 계속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달래려고 한다. 그러나 평온한 순간들은 여간해선 오지 않고, 오히려 우리 모두는 필요한 것을 확실히 얻기 위해서 다른 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여전히 불쌍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과 직면한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 쉽게 능력을 상실할 수 있고 계산을 잃어버릴 수 있고 사회적 지위를 상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런 일을 경험해야만 하는 어려운 시간도 있다. , 어떻게 대통령 후보나 여당의 지도자와 같이 그렇게 강한 사람들이 한순간에 쓰러질 수 있을까?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아주 변하기 쉽다.

 

그렇다, 이 거짓 자아의 세계에서 사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또한 우리는 이 경쟁적인 세상에서 위험한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방어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재산을 불리기위해 열심히 일하고, 또 그 재산을 너무나 가치 있게 생각하지만, 그런 것이 없어도 충분히 행복한 사람들이 있다.

 

거짓 자아의 세계는 외로운 장소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결코 너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야만 한다. 우리의 재산과 우리의 행위 뒤에서 항상 바라기만 하며 자신이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들킬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거짓 자아가 형성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우리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거들어서, 우리 모두는 너무나 빠르게 우리 자신을 재산이나 직업이나 다른 사람의 평가와 동일시한다. 이 거짓 자아를 증대시키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것을 보호하는 일이 일생의 과업이 되었다. 두려움이나 위험이나 외로움만 없다면, 부분적으로나마 그 상황을 즐길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행복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신경 안정제를 복용하거나 정신과를 찾아간다. 또한 우리는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전쟁과 같은 것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예수님은 우리 자신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 거짓 자아이다. 우리가 만들어줬지만 오히려 우리를 옭아매고 온갖 방법으로 그것을 섬기게 하는 것이 바로 이 거짓 자아인 것이다. 우리는 거짓 자아의 가치를 조장하는데 전념하는 우리의 초자아(무의식적 양심)와 사회를 통해 우리에게 가해지는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런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거짓 자아가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자아라면 어떻게 거짓 자아에 대해서 죽을 수 있을까? 우리가 거짓 자아를 버리지만 참 자아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3장 참 자아

     

거짓 자아를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향심기도와 같이 한 기도를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짓 자아를 견고하게 쌓아왔고, 어리석게도 우리 자신을 우리의 직업이나 재산이나 다른 사람의 평가와 동일시 해 왔음을 깨닫는다면, 자유를 향한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거짓 자아는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주인이다. 우리는 삶의 모든 에너지를 이 신기루와도 같은 존재를 보호하고 육성하는데 바쳐 왔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거짓 자아는 모든 불행의 근원이다. 여러분이 불행할 때 마다 자신에게 되물어 보시오. 나는 왜 불행할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없어서인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을 쓰고 있는가? 아마도 궁극적으로 이 세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거짓 자아는 불행의 동반자이다. 불가(佛家)에서도 우리에게 모든 욕망을 버리라고 가르친다.

 

소위 직업이나 재산을 우리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면, 우리는 거짓 자아를 마주칠 때마다 그것을 무시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좋은 직업이나 많은 계산을 가지거나 남들에게 좋은 평판을 들으면 그 사람을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훨씬 더 어리석은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런 우리를 부러워하면, 우리는 더 중요한 존재가 된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빌 게이츠가 수천억 달러의 재산을 가졌기 때문에 더 훌륭한 사람일까? 아니면 마르코스 부인이 3000켤레의 구두를 가졌기 때문에 더 훌륭한 사람일까? 그래서 그들이 더 행복할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성공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과연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의 재산은 욕망으로 현혹된 눈에 비치는 신기루 같은 것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재산에 마음을 쓰면서 그 재산의 노예가 되어 자아를 잃어버리고 만다.

 

무언가 근사한 일을 하면서 나를 중요한 존재로 만들려는 노력을 멈추고, 거짓 자아를 무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새로운 자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무엇이 되려고 할 필요가 없다. 나는 나다. 중요한 사람이 되려면, 이 자동차, 이 집을 가져야 하고 이곳에서 휴가를 즐기고 심지어 이 과자를 먹어야 한다고 떠들어대는 광고에 어떻게 굴복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방송은 교묘하고 강렬하며 인상적이며 우리 대부분은 유감스럽게도 방송 매체가 주입하는 가치 체계를 따르며 살고 있다. 거짓 자아가 가짜라는 것을 깨달을 때 조차도 거짓 자아의 산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쉽지 않다. 자신을 무시할 수 있는 능력은 커다란 장점이다.

 

우리가 향심 기도와 같은 기도를 할 때, 어떻게 이 거짓 자아를 효과적으로 버릴 수 있을까? 우리가 마음 한 가운데에까지 내려가서 기도를 할 때, 무엇을 하는 것일까? 본질적으로 아무 것도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호흡을 지켜보거나 기도문을 암송하는 등의 무언가를 하는 묵상 방법과는 달리, 향심 기도에서 우리는 그냥 단순히 있을 뿐이다. 생각하고, 기억하고, 느끼는 등 다시 무언가 하기 위해 되돌아간다고 깨닫는 그 순간에만 우리는 기도 단어, 말하자면 거룩한 단어를 사용한다. 그때 우리는 단순한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거룩한 단어를 사용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존재하시고 하나님의 실체가 우리의 본성 안에서 나타나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것을 하지 않는다. 당신 말씀대로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여기에서는 무언가 함으로써 자아의 거짓된 모습이 형성될 기회는 거의 없다.

 

우리가 기도 하면서 밝아 있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약간 돌았거나 좀 엉뚱한 짓을 하고 있거나 시간 낭비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의 거짓 자아는 이런 평가를 내리며 다시 무언가를 하라고 부추긴다. "일어나서 가라! 무언가 해라! 너는 왜 시간 낭비를 하는가? 왜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는가! 너는 왜 바보가 되려고 하는가?" 등등,

많은 사람들, 심지어 의과대학 교수나 정신과 의사들조차도 묵상의 진가를 인정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좋은 점도 있고 나쁜점도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묵상은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을 하는 행위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묵상에서 무엇인가 얻을 수 있다. 그것은 훌륭하고 지혜롭기까지 한 행동이다.' 그러므로 내가 무언가를 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을 할 때, 묵상은 거짓 자아에 의해 남용되기 쉽다. 거짓 자아는 여지만 있으면 어디든지 뛰어들기 때문이다.

 

향심 기도를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우리는 결코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것을 제거하더라도 자신의 생각만은 남아 있다. 우리 시대의 유해한 철학자인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하며, 춤추고 놀고 기도한다' 향심 기도와 같은 순수한 기도에서는 나의 생각조차도 포기한다. 나는 아무 것에도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심지어 무()조차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분명히 나는 어떤 것을 가짐으로 나를 드러내 보이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기도를 한다. 그리고 나는 기도 중에 다시 나의 사고로 끊임없이 돌아가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계속해서 거룩한 단어를 사용해야만 한다. 그 사고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며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거짓 자아의 구조물인 나의 행동이나 직업과 같은 것이다. 나의 뛰어난 사고력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거짓 자아는 살아남기 위해서 집요하게 어떤 것이라도 붙잡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로잡으시고 하나님의 본성을 닮은 우리의 참 자아를 드러내 주시는 그 더 없이 행복한 순간에 머무르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 중에 이 모든 어리석음을 뒤에 남겨 두도록 거룩한 단어를 반복해서 부드럽게 사용한다. 이때 조차도 우리는 무엇을 하기 위해서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그것은 단지 흘러가게 내 버려두는 것이고 홀로 참 자아를 창조하시는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것이어야만 한다.

 

거짓 자아를 버리는 것은 실로 커다란 도전이다. 아직 우리의 참 자아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큰 도전이다. 우리가 거짓자아를 버렸는데 아직 참 자아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의 참 자아는 어디에 있을까?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자신이 온갖 것을 필요로 하는 보잘 것 없고 가련한 존재라고 느끼며 의식적인 여정을 시작한다. 우리는 자신이 완전히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초기의 생각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원죄라고 말하는 것의 표현이다. 그것은 하나님 부재의 느낌이며, 세심히 배려하고 애정을 부어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느낌이다.

 

본질은 무엇일까?

 

어떤 이들은 창조에 대해서 말할 때, 마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고 나서 그것이 독자적으로 진화하도록 우주 공간에 던져 놓으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매 순간, 하나님의 무한하고 창조적인 사랑으로 창조가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힘이 피조물에 완전히 미치지 않는 순간은 없다. 그런 순간이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해서 하나님의 생명과 행복을 함께 나누어 받게 되어 있다.

 

실제로 우리는 자궁 안에서 생성되고 세상에 태어났을 때, 단지 절대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보잘 것 없는 아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우리 존재의 중심과 그 본성 안에는 매 순간 우리를 사랑으로 낳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어린 창조의 힘이 있다. 우리가 성심성의껏 단순한 기도를 하고, 기꺼이 모든 것을 뒤에 남겨 두고 중심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이 하나님 현존 체험을 할 수 있다. 사실 하나님 현존 체험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때와 방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판단과 자유에 달려 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7:7)" 우리는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사랑을 간절히 청하면서 우리의 중심에서 자신을 열어 보인다. 이성의 불완전한 한계를 넘어서는 방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을 알게 되고, 그 창조적사랑 안에서 우리와 일치를 이루는 다른 모든 사람을 알게 된다.

 

신학적으로 우리는 창조의 절정이며 중심이며 직접적인 근원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으로부터 생겨났다고 배웠다. "그분을 통해 모든 것이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생명을 얻었다."고 배웠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사랑이신 성령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 돌아온다. 우리는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파악할 수없다. 우리는 계시를 그대로 받아 들여야만 한다. 우리는 단지 예시들을 통해 어렴풋이 그것을 이해한다. 이성을 넘어서는 사랑의 식견 안에서 신앙의 빛을 받을 때, 우리는 그 계시를 이해하게 될것이다. 우리는 성령으로부터 오는 지혜의 왕국에 있다.

 

이런 체험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어떤 말을 해도 부질 없는 표현일 뿐이다. 절대로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성 베르나르도가 반복적으로 가르쳤던 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 내가 여정을 시작했을 때, 무척이나 나를 괴롭히곤 했던 가르침이다. "이것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경험을 하도록 노력하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알게 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아직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라도 그 사실을 믿어 보자. 일단 이런 경험을 하면, 의식의 "변형"이 우리 안에서 일어난다. 기본적이고 변치 않는 우리 의식의"형태""변화"된다. 나는 더 이상 직업이나 재산이나 다른 사람들의 평가 등으로 만들어진 날조된 거짓 자아가 아니다. 나는 이제 "나는 존재한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적 힘 안에 존재하며 거기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힘을 받는다. 그곳에는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자유가 있고 권능이 있고 생명이 있고 사랑이 있다.

 

일단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에 사로잡히면, 사랑 그 자체이시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신 '사랑이신 분'께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나는 확실히 다른 사람의 평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내 자아를 다시는 보지 않게 된다. 내가 다른 사람의 평가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쓴다면, 그것은 내 자아와의 관계가 신앙 안에 머무르며 거짓에 기초한 것이 아닌 참된 관계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그리고 완전히 만들어주시는 이 경험을 통해, 사도 바울은 확신에 차서 선언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3)."

 

그러면 나는 더 이상 다른 어떤 것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요(7:7)." 다시 한 번 거룩한 사도의 말을 인용하자면 "~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2~23)."

 

놀라운 자유와 기쁨과 평화, 이것이 참 자아의 영역이다. 우리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2:20)."라는 그리스도교적 선문답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성부께서 영원하고 완전한 자기표현으로 성자를 발하셨듯이, 하나님의 창조적인 힘은 육화하신 성자, 만물의 으뜸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각자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거짓 자아의 껍데기를 드러내기 위하여 많은 연습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갖가지 방법을 통해 자신의 참 자아를 잠깐은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통해 우리의 참 자아를 알게 되며 참 자유에 이르게 되는 바로 그곳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유로이 주시는 체험을 통해서만 그럴 수 있다.

 

삶의 가장 커다란 경험 중의 하나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최초의 경험이다. 물론, 우리 부모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부모넘은 자식을 사랑해야만 하고 그럴 것이다. 또 형제들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아름답고 사랑스럽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누군가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경험을 처음으로 하게 되면, 우리는 너무나 기뻐서 어절 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통해 우리 자신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참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비치는 자신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아름다움을 완전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관상기도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바로 이런 체험을 하게 된다.

 

자신의 참 자아를 알 때 조차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인간공동체에서 우리의 사회적 역할을 인식해야만 하지만 그것이 단지 역할이라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이제 그 역할은 우리와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어 나가는데 하나님과 우리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협력하는 수단이 된다. 그러므로 내가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업의 한 부분으로써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적 힘을 무시하고 내가 얻을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하다. 내가 가진 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업을 위해서 사용될 때에만 소중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 가치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크다. 이미 말했듯이, 나와 나의 참 자아의 참된 관계를 진리의 빛으로 이해하고 하나님 안에서의 일치와 친교의 본질을 이해하고 기뻐할 때에만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기 또 다른것이 있다. 하나님 안에서 참 자아를 발견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다른 모든 이들도 발견하게 된다. 실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인성에서 모든 사람들과 진실로 하나 되는 경험을 하게 되고, 나아가 인류의 머리인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삶에 작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 속으로 깊이 이끌려 들어간다. 그곳에는 일치와 친교가 있다. 우리는 참된 자아로써 진실로 이옷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은 당신 선물의 주인으로써 원하시면 언제든지 이런 체험을 주실 수 있지만, 우리가 중심에 도달했다고 해서 이런 하나님 체험과 참 자아를 인식하는 체험이 항상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심에 여러 번 도달했다고 해서 항상 그런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런 체험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보통 그것은 서서히 진행되는 체험이다. 우리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등의 열매를 맺게 하는 성령의 활동 속에서 하나님을 잠깐씩 느낌으로써 하나님을 인식한다. 조급하게 조금씩 밖에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고 조금이나마 주시는 성령께 감사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몇 달 혹은 몇 년간 묵상을 해 왔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했어요. 내가 하는 게 옳은 방법인지 알 수가 없고, 내가 관상기도를 할수 있는 사람인지도 알 수가 없어요.' 조금 대화를 나누고 나면 그들은 나보다 자신들이 기본적으로 더 평화스럽고 더 행복하고 더 인내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활동 중에서 가장 소중한 열매는 그들이 수련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는 우리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기 위해서 규칙적으로 시간을 내어 일상에서 물러날 수 있는 지혜를 가지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가! 그들은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자체가 기도의 놀라운 열매이다.

 

성 베르나르도가 "말씀의 방문"이라고 말한 그 충만한 체험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그 첫 순간, 우리의 전 존재는 말한다. "몇 년 동안의 묵상은 아주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묵상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지난 몇 년 동안은 가치가 있었습니다. 남은 여생동안 나는 정기적으로 중심으로 내려갈 겁니다." 사실, 규칙적으로 하던 묵상시간을 놓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실 시간인데‥‥ 말씀께서 오실 텐데‥‥'라는 초조함을 느낀다. 만약 계속 충실히 수련을 한다면, 우리가 영원히 변치 않을 현존을 느낄 때까지 이 방문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기도 전에, 이 세상에서 살아오면서 전혀 몰랐던 무한한 기쁨을 알게 된다.

 

하나님 안에 있는 참 자아를 더 명확히 인식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이 경이로운 면모에 눈이 부실 따름이다. 동시에 완전히 우리 자신을 낮추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가 우리 삶에 들어온다. 죄와 함께 머무르면, 하나님을 닮은 우리에게는 심한 상처 자국이 남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창조적 에너지를 경험하지 못하거나, 우리를 치유해주며 완전하게 만드는 바로 그 사랑이신 하나님의 구원적인 힘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행복은 깨져버리거나 심하게 손상될 것이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사랑 이상의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자비'이다. "하나님의 '자비'가 바로 하나님의 본성이다. '사랑'은 선을 알아채고 그것에 응답한다. 선의 결핍이 죄이다. '자비'는 그 죄를 알아채고 우리를 선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사랑' 을 받아 안을 수 있게 해준다.

 

향심기도와 같은 관상기도는 근원적인 치유이다. 이 부분에 대해 더 살펴보도록 하겠지만 그에 앞서 관상기도와 참 자아를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즉 인간 의식의 발달이라는 전체적 인 정황에서 살펴보겠다.

    

 

4장 인간 의식의 발달

 

현대의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인간 의식의 발달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위대한 비잔틴 교회 교부인,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을 따랐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우리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들과 잘 어울리는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선은 저절로 퍼지기 쉽다.'고 아퀴나스는 말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이나 본성, 그리고 넘치는 기쁨을 나누어주시겠다고 마음먹으시면, 순수한 영이신 하나님은 정반대의 짓인 순수한 물질에까지 손을 뻗으시고 창조하실 수 있다고 현대신학은 말한다. 이 위대하고 거룩한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창조적 에너지가 피조물 안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현대 분자 과학 덕분에 우리는 보다 명확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고정된 물체처럼 보이는 것은 에너지의 상호 작용에 의해 어느 정도 질서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응축되어 있는 혼란스러운 에너지이다. 여러분이 손에 들고 있는 책은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만약 그 안의 에너지가 갑자기 풀려나면, 이 세상에 종말을 가져 올 수도 있다. 피조물 안의 강렬한 에너지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적 에너지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이성적 존재의 진화를 준비하면서 200억년 동안 피조물들을 성장시켜왔다.

 

우리 우주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이전에 존재했던 우주의 잔해에서 비롯된 것인지, 우리 우주가 생성된 그 원 자극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과학은 말해주지 못한다. 그 모든 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창조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친절하게도 우리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셨다고 믿는다. 모든 과학자가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화론에서는 이성을 가진 존재의 출현에 커다란 공백이 있다. 계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인간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말해준다.

 

인간이 처음으로 인간 노릇을 하기 시작한 그 시점의 진화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있다. 정확하게 입증된 자료는 아니고 가설들이다. 우리는 유사 이전의 첫 번째 시기를 '알파 시기(Alpha Period)'라고 부른다. 토마스 키팅 신부는 켄 월버(Ken Wilber)이 주장한 신화적 명칭을 따라 이것을 '파충류(우로보릭) 시기(Uroboric Period)'라고 불렀다. 다른 사람의 식견을 참조는 하겠지만, 이교적 신화보다는 과학과 계시에 근거한 관점으로 살펴보겠다.

 

인간이 의식을 가지기 시작하는 알파 시기에, 하나님과 같이되는 완전한 잠재력이 이미 인간의 영혼 안에 주어졌겠지만, 인간과 (인간으로 진화하게 된) 오스트랄로피레쿠스와 같은 인류 이전의 존재를 구별할 수 있는 분명한 차이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인간 의식의 아주 희미한 불빛이 거주, 섭생, 번식 등 생존의 문제라는 기본적 영역에서 발견되었을 것이다. 동물의 왕국에서와 같이 이때에는 생존이 열쇠이다.

 

하나님의 창조적 에너지의 작용을 통해서 진화는 인간의 영혼을 자극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그 두 번째 시기를 '베타시기(Beta Period)'라고 부르는데, 토마스 키팅 신부는 이 시기를 어깨에 100마리의 용이 있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신화적 산물인 '티폰(Typhon, Typhaon)적 시기'라고 한다. 인간이 이 베타 시기에 접어들면서, 육체적 자아를 깨닫고 동물 왕국에서 다른 동물들보다 우월함을 알게 되었다. 창조 설화를 보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라고 하셨다. 그것은 아담에게 그 동물들의 지배권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아담은 다른 어떤 동물도 그와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담은 동물보다 훨씬 더 중요한 존재였다.

 

이 시기에 인간은 더 이상 생존에 필요한 기초적인 것의 곤란을 겪지 않게 된다. 또한 불을 사용하는 능력과 동물을 이용하는 능력 때문에 나머지 피조물의 섬김을 받는 존재, 더욱 인간답고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불을 마음대로 사용하게 되면서 인간은 깊은 동굴 속에 더 안전한 거주지를 찾았다. 거기에서 동물 가죽을 몸에 걸치고 타오르는 불빛에 비춰 생생한 프레스코화를 벽에 그리며 숯불에 구운 고기를 먹게 되었다. 인간 의식이 육체에 집중하던 베타시기였지만 풍요로운 삶이었다. 생존을 넘어, 인간 생활의 가장 원시적인 유희를 찾고 즐기기 시작했다.

 

진화의 베타 시기를 통해, 인간은 사냥꾼과 약탈자로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이동했다. 농경 생활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시기가 동터 올랐다. 이것은 진화하는 인간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어떤 이들은 이 시기에 의식의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농경생활로 우리 선조들은 안정적으로 식량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일정량의 땅을 관리하고 경작하고 방어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래서 권력구조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이 시기에 무기와 전쟁이 등장하게 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는, 대지와 같이 새로운 생명을 낳는 여성이 중심이며 지배자였다. 그러나 무기와 전쟁의 발달로 지배자로 등장한 것은 땅을 지키는 남성이었다. 여성은 집에 머물며 아이들을 기르고 집안일을 하게 되었다.

 

키팅 신부는 이것을 '신화적 공동체 시기 (Mythic Membership Period)'라고 부르며, 진화의 매우 중요한 단계라고 강조한다. 안전한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삶을 이끌어가고, 종종 깊은 유대감으로 땅을 지키면서 인간은 이제 공동체 안에서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하지만 개인으로서의 자아의 관넘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인간은 매우 근본적이고 본능적인 방식으로 공동체 속에서 공동체와 함께 공동체를 위하여 살았다. 우리는 이것을 '감마 시기Gamma Period'라고 부른다.

 

그 전에도 그랬지만 이 감마 시기 동안에도 인간 두뇌는 발달해 왔다. 뱀의 뇌에 비길 정도의 작은 두뇌(인간의 뇌 구조에서 '기초 뇌'의 형태로 그 흔적이 남아 있는)가 지속적으로 발달하고 성장해왔다. 인간은 영혼에 점점 더 어울리는 기관을 가지게되었다. 인간 두뇌의 충분한 발달로 우리는 공동체인 '우리'로부터 개인인 ''가 출현하는 '아이오타 시기(lota Period)'로 가게된다. 이성(그래서 키팅 신부는 이것을 '이성적 자아 시기(Rational-Egoic Period)'라고 불렸다.)이라는 선물 덕분에 우리 인간은 자신에 대해 깊이 알 수 있게 되었고 자유롭게 단호한 선택,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받은 선택을 할수 있게 되었다.

 

인간이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은, (어떤 공동체에서는 좀 더 이른 시기이겠지만) 3000년 쯤 전에 지평을 열었던 아이오타시기였다. 여기서 끝났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 시기에는 모든 면에 걸쳐서 친교와 공동체와 일치를 위한 개인적인 열망이 있었다. 인간은 각자 안에 있는 남성다움이나 여성다움을 잘 파악하여 그것을 융화시키려는 발전적인 열망이 있다. 인간은 자신을 넘어서는 식견인 직관적이고 지혜롭고 관상적인 특징의 도움을 받는 논리적인 지성이 점점 더 필요하다고 깨닫는다. 인간은 공동체와 융화와 초월의 시대인 '타우 시기(Tau Period)'로 가려고 한다.

 

역사적 기록이나 신화 등, 우리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모든 진화 과정을 통해, 인간 진화의 현재상태를 넘어 피안의 세계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었던 '선지자'들이 있었다. 인도의 리쉬스, 중국의 노자(老子),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다른 예언자들이 있었다. 마침내 우리에게 궁극적인 운명을 알려주신, 육화하신 하나님이시며 인류의 영예이신 주 예수님이 계신다. 우리의 궁극적인 운명은 성령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친교를 나누는 것이다. 그것은 본체로는 하나이시며 위격으로는 삼위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진화가 완성되는 '오메가 시기(Omega Period)', 아니 기간이라기 보다는 한 순간이 더 어울릴 오메가 시점이다.

 

이미 말했듯이 우리는 아이오타 시기에 살고 있다. 아주 중요한 시기다. 우리는 융화와 초월과 완성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있다. 혹은 되돌아가서 생존과 쾌락과 권력 등 그 이전 시기의 문제들 속에서 만족을 찾으려고 할 수도 있다. 우리 주위에서는 온갖 분쟁들이 일어나고 있다. 세계적인 규모의 엄청난 전쟁도 보아왔다. 히틀러는 정복적인 힘을 만들어 내기 위해, 합리적인 아이오타 의식을 가진 독일 사람들을 위대한 아리안 족이라는 신화적 공동체 의식의 감마시기로 되돌아가게 했다. 일본 사람들도 자신들을 신의 자녀로 생각하고, 그래서 일왕(日王)을 지지하며 더 정확히 말하면, 첨단무기들로 무장하려는 일왕의 장군들을 지지함으로써 여전히 의식의 감마 수준에 머물러 있다. 레이건 대통령도 이런 원시적 수준의 의식에 호소하려고 했다. 과장된 미국 우월주의 때문에 (미국이 세계 제일의 채권국에서 세계 제일의 채무국이 되었지만) 미국 사람들은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 줄 수도 있었던 아주 값비싼 쓰레기 더미에 불과한) 터무니없는 스타워즈 정책 덕분에 레이건이 퇴임한 이후에도 안전을 보장받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국민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

 

선택의 순간이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우리 각자는 전체적인 발전을 이루는 개인적 완성과 묵상을 통해 초월성을 추구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우러를 누룩이라고 말씀하셨다.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1%의 사람들이 묵상을 한다면 우리는 평화를 이룩할 것입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대단한 선견지명을 가진 소수의 조용하지만 헌신적인 노력으로 평화를 이룩했다. 그 평화가 오래도록 보존되기를 빈다. 그러나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인류 가족의 발전과 융화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권력과 쾌락과 생존만을 추구할 때, 이 세상에는 고통스러운 커다란 혼란이 엄청나게 늘어나게 된다. 우리 각자는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는 문제를 일으키는 편에 설 수도 있고 문제를 해결하는 편에 설 수도 있다. 우리는 방관자일 수는 없다. 발전과 완성을 위한 힘이 강력하게 존계하는 것처럼, 내부나 외부로부터의 힘들은 우리를 끌어내린다. 죄 많은 곳에 은총은 더 많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은총에 마음을 열고 묵상이나 관상을 통해 초월에 이르고자 할 자유를 가진다. 혹은 즐거움이나 권력으로 욕구를 만족시킬 자유도 가진다. 이제 조금만 더 자세히 개인을 들여다보자.

 

요약

< 순수한 물질로부터 하나님의 성령까지 >

알파시기 : 인간의식의 여명기 (파충류)

베타시기 : 육체적 의식 (반인 반수)

감마시기 : 집단적 의식 (신화적 공동체)

아이오타 시기 : 개인적 의식 (이성적 자아)

타우 시기 : 초월 의식 (융화, 공동체)

오메가 시기 : 일치적 의식 (광대무변한 그리스도)

 

진화 이론을 받아들일 수 없는 독자들은 잠시 생각을 돌리고, 지금까지 설명했던 것에 주의를 기울이자. 즉 우리가 친교와 초월의 경험을 하도록 초대받을 때 조차도, 쾌락적 행동을 하도록 우리를 끌어내리려고 하는 힘들이 우리 안에 있다. 힘에 의존해서 개인적이거나 국가적, 혹은 민족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끝없이 파괴적인 분쟁만을 가져올 뿐이다. 우리는 인류 가족으로서 서로 배려하는 가운데 이 창조사업에 동참한다는, 즉 우리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5장 기억의 치유

 

  

실제로 치유가 될 때

치유의 본질이 있습니다.

 

인류 가족의 여정은 우리 각자가 개인으로서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여정이다. 어머니 배 속에 있다가 세상에 태어나면, 우리는 완전히 생존경쟁에 뛰어 들게 된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필요하며 그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안정감도 필요하다. 자궁 안에서는 거의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세상에 태어나면, 우리는 다른사람들에게 의존해야만 한다.

 

계속 성장하면서 우리는 '미운 세살'이라고 부르는 시기로 접어든다. 세 살짜리가 만지고 놀면 안 되는 것이 있다면, 그 녀석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 놓는 게 좋을 것이다. 그 시기는 위대한 발견의 시기이며 엄청난 발달의 시기다. 모든 것은 탐구와 놀이의 대상이다. 그 시기는 가장 놀라운 시기이며 매우 즐거운 시기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네 살, 다섯 살, 여섯 살‥‥ 우리는 이제 가족의 일원임을 알게 된다. 아빠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고, 엄마는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다. 나의 큰 형이나 삼촌은 동네에서 가장 싸움을 잘 한다. 우리는 가족이라고 부르는 이 특별한 공동체에 속함으로써 힘을 가지게 된다. 내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우리 가족은 다른 가족들보다 그것을 더 잘 제공해줄 것이고 모든 면에서 나를 지지해줄 것이다.

이 견고한 배경에서 우리는 이제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인간으로서 ""가 될 준비를 하게 된다. 두뇌의 발달과 정신의 성장으로 우리는 사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성적이 되고 자신의 삶에 관한 결정을 내 리게 된다.

 

이제 우리는 안전을 보장받고 권한을 부여 받고 즐거움을 발견하는 사회나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공헌하는 일원이 될 준비를 한다. 나는 바로 몇 주 전에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의 운명을 개선할 수 있는 대규모 운동에 앞장서는 젊은 십대들의 신문 기사를 기쁜 마음으로 읽은 적이 있다.

 

젊은이들은 최선을 다해서 복음 전파를 하도록 불림 받고 있다. 만약 우리 그리스도교의 풍부한 유산을 접하게 된다면, 그들은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치유와 일치로 들어 갈 수 있는 그런 방법도 같이 나누게 될 것이다. 그들은 교리서나 신경(Credo)에서 뿐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소명을 알게 될 것이다. 너무나 경이로운 여정의 정점이 눈에 보인다. 그것은 오메가 시기인 그리스도, 광대무변한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걸어가야만 하는 여정이다.

 

안타깝게도 어느 누구도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이 여정을 마칠 수는 없다. 완성으로 가는 가장 커다란 발걸음 중 하나는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부모님들도 비천하고 나약하고 어리석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들이 아무리 우리를 사랑했어도 우리가 그들의 보호 아래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낙태가 쉽고 빠르게 이루어지는 시대에서 우리는 태어난 사실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해야 하며, 그 선물에 대해 아무리 감사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모님과 모든 선조들이 물려준 유산으로부터 고통을 받아 왔다. 또한 우리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과 인류 가족으로부터도 고통을 받아 왔다.

 

훌륭한 산부인과 의사는 오늘날 자궁 안에 있는 아이가 어떤 영향을 받는지 잘 알고 있다. 4, 5개월 된 태아의 부모들은 자궁안에 있는 아이에게 사랑스럽게 말을 건네고 노래를 불러주고 기도를 해 주는 것이 좋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아이는 출생의 충격을 완화 시킬 수 있는 어머니 태내에서 들어왔던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반대로 부모의 싸우는 소리와 같이 크고 거친 외침, 말다툼 소리, 더 나아가 쇼크나 매질은 아이에게 공포감을 심어줄 수 있다. 산아 제한과 낙태가 만연한 이 시대에 아이들에게 정말로 해로운 환경이 자궁까지도 침범해서 자라나고 있는 태아를 감염시키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그리고 출생이 온다. 얼마나 놀라운 경험인가! 우리가 태어났을 때에는 더욱 그렇지 않은가! 태어난다는 것은 필요한 것이 완전히 제공되고 편안함이 주어지는 자궁에서 바깥 세상으로 강제로 좇겨나는 것이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처음으로 접하는 세상은 차갑고 눈이 부시는 삭막한 분만실이다. 거꾸로 들린 채 울음을 터뜨릴 때까지 우리는 누군가에게 찰싹 찰싹 맞는다. 그러고나서 요람에 뉘어져 응애응애 울고 있는 다른 녀석들이 가득한 방으로 옮겨진다. 그리고 거기에서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채 눕혀져 있다. 다행히 오늘날에는 그래도 상황이 개선되고 있다. 분만실은 따뜻하고 어두침침하며 부드러운 음악이 흐른다. 태어날 때 우리는 아빠의 따뜻한 가슴에 놓여 그 친숙한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우리는 엄마의 가슴 사이에 아늑하게 놓여 다시 친숙한 그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듣는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개선되었음에도 탄생은 충격적인 경험이다. 그리고 그 충격은 계속된다. 자궁 안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주어졌지만, 지금은 부모가 아주 정성스럽게 돌보아 주어도 자궁 속에서처럼 필요한 것을 24시간 내내 완전하게 제공 받을 수가 없다. 그것은 굴주림이나 체내 가스나 불결한 기저귀의 불편한 습기의 고통뿐만이 아니다. 핀에 찔려서 울 수도 있고 숨쉬기 힘들 정도로 기저귀가 꽉 조여져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팔다리를 바둥거리며 울 수밖에 없고, 때때로 그것조차도 할 수가 없을 때가 있다. 그리고 너무나 안타깝게도 아이가 아동 학대라는 공포를 경험할 수도 있다.

 

어떤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되면, 그 사건 자체뿐만이 아니라 그 주변 상황에 대한 느낌까지 모두 저장이 된다. 소위 기억 레이프가 암호화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면, 그 자체의 감정적인 충격도 받고 기억 속에서 그와 비슷한 감정적 내용이 튀어 나온다. 이런 끔책한 경험을 하게 되면, 우리는 그 감정적 부산물을 처리하면서 살아남기 위해서 안전함을 추구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안전을 찾으려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작은 경험을 해도 그것은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으로 기록될 수 있고, 그러면 그 기억 레이프가 작동한다. 그래서 남들이 생각하기에는 우리의 감정이 조금 상하게한 것 같은데, 우리는 죽일듯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작은 사건이라도 생존을 위협하는 것으로 인지되면 모든 생존 테이프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살아남았다. 이제 우리는 놀랍고 흥미로운 세 살로 향하고 있다. 그것은 모험과 발견의 시기다.

 

어린 죠니는 자기가 손가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날이 온다. 엄마와 아빠는 아주 기뻐한다. 내 조카는 어린 아이가 고무젖꼭지를 빼고 엄지를 입에 물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리고 어린 죠니는 발가락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가지고 즐겁게 놀곤 했다. 그러면 엄마도 다시 기뻐한다. 그리고 어린 죠니는 생식기를 발견하고 거기서 느껴지는 자극을 즐기기 시작한다. 그러면 엄마는 깜짝 놀란다. 찰싹 찰싹 때리면서 '거긴 만지면 안 돼! 더러워!'라고 말한다.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는 감각적인 것을 찾을 뿐이고 아주 원초적인 방법으로 성욕을 찾고, 아마 더 정확하게는 생식기 만족을 찾았던 것뿐이다. 그런데 이제 그것은 더럽고 금지되는 것으로 입력된다.

 

유감스럽게도 그 뒤를 이어 공포스러운 화장실 훈련이 이어진다. 배설이 건강하고 즐거운 경험이 되어야만 하는데 불합리한 꾸중과 매질과 섞여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훈육이 되곤 한다.

 

그리고 많은 것을 박탈한다. 만져서는 안 되고 맛봐서는 안 되고 보아서는 안 되고 경험해서는 안 되는 이런 저런 것들이 생긴다. 그리고 이런 금지된 것에 접근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는 사람에게 훈육 받은 바에 따라, 우리는 안전을 위협받고 배척받는다는 불쾌감을 가지게 된다. 이 모든 것은 그 감정과 함께 기억에 각인되고, 기억 테이프에 입력된다. 그래서 우리는 감각적이고 생식기적 즐거움과 가장 비슷한, 그리고 커다란 즐거움을 주는 것에 대한 욕구가 발달한다.

 

우리의 진화는 계속 된다. 우리는 가능성뿐만 아니라 커다란 위험도 지닌 아주 넓은 세상을 알게 된다. 동시에 우리는 가족이라는 아주 특수한 집단에 속해 있음도 더 잘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위험에 맞서며 세상의 풍부한 잠재력을 만끽할 수 있는 안전한 힘을 가족 안에서, 특히 아버지에게서 발견하고자 한다. 그런데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오늘날 우리 아버지들은 대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아버지들은 육체적으로는 존재할지 모르지만, 무엇인가 하거나 얻음으로써 거짓 자아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이 다른 일을 하는데 너무나 바빠서 감정적으로나 관계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불행히도 오늘날 너무나 자주, 어머니들도 그렇다. 아버지는 오히려 권한을 부여하는 존재로써, 위협적인 권력자로 존재하는 일 또한 있다. "아버지가 집에 오실 때까지 기다려라. 아버지가 결정을 하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거나 우리의 안전한 삶을 위협할 수 있는 탑처럼 거대한 어른 앞에 서 있는 작은 아이가 된다. 우리 삶에는 힘의 공백이 있고 그것을 채우려는 필사적인 욕구가 있다. 그리고 다시, 이 모든 것은 감정의 고리를 따라 기억 속에 각인된다. 우리 안에는 권력을 위한 엄청난 욕구가 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의 두 발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른의 문택에 서 있다. 우리는 심사숙고해서 책임 있는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기본적인 생존과 안전, 쾌락, 소속감과 권력을 위한 감정이 실린 욕구의 혼란스러운 퇴적물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사람은 누구일까? 보통의 경우에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부모에게 갈 수도 없다. 부모들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분들이다. 어떤 경우에 부모들은 그 문제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처럼 혼란을 겪고 있는 미숙한 동료, 혹은 친구들과 이야기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훨씬 더 깊은 혼란으로 이끌 뿐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의 젊은이들은 교회 공동체에 크게 실망하게 되고 결국에는 우리 자신도 실망하게 된다. 우리의 미래가 위험에 빠지고 심지어는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대가족제도가 있어서 좋았다. 우리가 현명하고 온화한 조부모나 숙모나 삼촌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그들이 공감을 하며 우리의 말을 들어 줄 수가 있었다. 학교에 가면, 오늘날에도 우리의 말을 들어주고 도와줄 준비가 된 선생님들이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선생님들은 너무 바쁘거나 혹은 학생들과의 그런 개인적인 관계에 마음을 열 때 벌어질 수 있는 결과를 두려워한다. 교회 공동체는 열린 마음으로 기꺼이 함께 시간을 보내 줄 주위의 현명하고 인정 많은 어르신들과 우리의 젊은이들이 어울릴 수 있는 (그들이 보통 강하게 이끌리는 쇼핑몰이나 더 나쁜 장소들 보다는 훨씬 좋은) 공간을 더욱 개방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젊은이들은 이 모든 혼란스러운 감정적 욕구를 다스릴 수 있는 도움들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가 새로 일어서는 ""에게 공동체나 심지어 그리스도, 완전한 그리스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을 찾는 공동체를 알려줄까? 교회 공동체는 우리가 모든 꿈을 실현하고 진정한 소속감을 느끼고 권한을 부여받고 안전한 삶과 영원한 삶, 죽음이라는 궁극적인 두려움까지 넘어서는 살을 찾는 곳이다. 우리가 젊은이들을 건강하고 위안을 주는 공동체로 이끌 수 없다면, 혼란을 겪는 젊은이들은 충동적이고 무책임한 섹스, 마약, 음주 등에서 즐거움을 찾으며 패거 리 문화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권한을 부여받고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도 만족하지 못한다면, 젊은이들은 흔히 그러하듯이, 다른 이들에게 복수의 화살을 돌림으로써 분노를 표현하거나 결국에는 과다한 약물 복용이나 자살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것은 여러 사람들의 삶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기억 데이프에 암호화되어 저장된 이 깊은 감정적 욕구가 자신의 삶에서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종종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알지 못한다. 믿음의 선물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궁극적인 운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조차도 종종, 무의식적인 행동 양식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다른 식으로는 행동하지 못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아니면 우리는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어쩔 수 없는 희생물이어야만 할까?

 

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확실히 안전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고 나서 암시적인 말로 그 사람의 기억 데이프를 가동시키면, 그 테이프는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며 저장되어 있던 감정적 긴장의 원인은 느슨해지고 흩어지고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프로이드는 발견했다.

 

향심기도와 같은 관상기도에서, 우리는 믿음과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지고의 사랑이신 분의 안전한 손에 의탁한다. 우리가 중심에 계신 하나님 안에서 깊이 쉴 때, 기억들은 표면으로 자유롭게 떠오른다. 그 기억들이 자유롭게 떠오르는 것을 알아차리게되면, 우리는 단순하고 부드럽게 중심에 계신 주님께 돌아가고 그것들을 흐르는 대로 놓아둔다. 우리가 그것을 다루려고 하면 그것은 다시 암호화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 기억들이 흘러갈 때, 우리를 감싸고 있던 감정의 쓰레기 더미들도 함께 떠내려간다. 서서히 안전과 생존과 쾌락과 소속감과 권력에 대한 감정적 욕구들은 사라지고 기 억들은 치유된다. 우리는 새로운 자유에 이르게된다. 어떤 위협이 가해져도 우리는 안전과 생존에 대한 필사적인 욕구를 느끼지 않는다. 감각적이고 성적인 즐거움이나 힘에 의존하려는 감각적인 욕구는 줄어든다. 신앙이 승리하기 시작한다. 하나님 체험을 통해 우리는 더 깊고 더 크고 영원한 즐거움과 영적인 기쁨을 알게 된다. 우리를 강하게 만드시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우리 모두는 힘든 여정을 가고 있다. 그러나 기억이 치유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는 오메가 단계에 참여할 수있다는 희망에 찬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열정적으로 나아갈 수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으로 이 치유가이루어질 때, 우리의 희망은 점점 더 강해진다.

 

최상의 경지가 앞에 있다. 우리는 그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6장 살아 있는 유산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들은 큰 무리라

- 시편 68:11 -

 

위대한 지혜의 전통은 특별한 사람이나 사람들의 체험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이런 현자들 중, '크리슈나'''과 같은 사람은 신화로 완전히 포장되어 있다. 부처, 아브라함, 모세와 같이 어느 정도 신화로 포장되어 생기를 주며 자신의 역사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위대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 살을 취하여 육화하신 지혜는 당신이 태어나셨던 풍요로운 유대 문화의 유산을 초월적이고 변형적인 사랑을 통해 새로운 완성으로 이끄셨다. 4세기, 콘스탄터누스 대제의 개종 이후, 종교 자유의 물결 때문에 이 유산이 세속적으로 휩쓸릴 위기에 처했을 때, 많은 위대한 스승들이 사막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진정한 구도자들은 사막의 스승들을 찾아 모여 들었고, 그들의 지혜는 교회의 살아있는 조직 안으로, 특히 수도회를 통해 다시 돌아 왔다.

이 부유한 유산은 계속 이어져 내려와 우리 시대의 위대한

영적 스승인 게쎄마니 수도원의 루이스 신부, 토마스 머튼에게 이르렀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토회에 입회했을 때,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진 머튼은 '사랑의 학교'인 시토회의 사부,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는 베르나르도로부터 참 자아와 거짓 자아에 대한 통찰력 있는 가르침을 받았다. 머튼은 첫 번째 출판 작품인 단순함의 영성에서 성 베르나르도가 참 자아와 거짓 자아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는지 설명했다.

 

머튼은 매우 방어적이고 이념적인 트리엔트식 교회의 배경에서 살았다. 영적 가르침은 너무나 쉽게 거짓 자아에 투사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화 되었다. 소위 영적 지도자들은 그 제자들을 산위까지 단계적으로 이끌어 가거나 혹은 영혼의 성()에 있는 궁방들을 차례로 지나가도록 안내했다. 그 과정은 분명하게 도식화되었다. 그것은 아주 특별한 기술을 요하는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스승들, 위대한 영적 사부들은 뛰어난 시를 통해서나 직관적 지식을 쉽게 설명해 줌으로써 여전히 그들의 지혜를 나누어 줄 수 있었다.

 

머톤은 그의 시에서 이런 지혜를 되살렸다. 그는 장상의 엄격한 권위에 순명하려고 했다. 그는 중증의 신경 쇠약은 아니지만 일시적으로 글을 쓸수가 없었다. 머튼은 그것을 극복했고 성 베르나르도에게 영감을 받아서 그의 책 새로운 사람에서 이 풍부한 전통을 아주 훌륭하게 신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이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이다. 오래 전에, 활기차고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이로써, 머튼은 거의 완전히 거짓 자아의 삶을 살았다. 캠브리지에서 방황하던 시절로부터 그는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가의 거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통찰력 있었고, 또한 하나님의 은총의 덕분으로 그 공허함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장 깊은 본성의 갈증을 충족시켜줄 진실을 추구했다.

 

이 시절, 그는 전혀 반대되는 두 가지 다른 방법으로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다. 캐서린 드 휴그(Cathrine de Hueck)에 감명을 받아, 그는 뉴욕시의 슬럼가에 가서 억압받는 사람들과 같이 살며 그들에게 봉사함으로써 사회적 의식을 고양시켰다. 같은 기간, 게쎄마니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방문함으로써 머튼은 관상 생활의 아름다움에도 마음을 빼앗겼다. 이처럼 이분화된 거짓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거짓 자아의 오만한 요구에서 자유롭게 되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그는 작가적 재능을 사용하여 사회적 의식 고양에 많은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개인의 관상이 효과적인 누룩으로 전 인류 가족의 의식을 고양시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머튼은 "내 자신이 잘 살아야만 모든 인류의 행복과 모든 사람들의 운명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머튼은 또한 관상 공동체는 그 증거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삶이 사회적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토마스 머튼이 할렘의 슬럼가에 있는 우정의 집에서 캐서린 드 휴그와 함께 일하면서 가난하고 인종차별을 당하는 이들을 위한 증거와 봉사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면, 과연 그가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 있는 대중들의 사회적 의식을 고양하도록 그렇게 탁월한 작가적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극심한 고뇌 끝에 머튼은 시토회의 삶을 선택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순수한 마음에서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사실 머튼이 수도생활을 하게 된 것은 그 당시에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할렘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징집 면제 사유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머튼은 전쟁이 일어난 다음날, 수도원에 들어간 것이 결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머튼은 작가로서, 특히 시인으로 이름을 떨치고자 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머튼은 작품들을 처분하는 중에, 몇 작품은 친구 마크 밴 도렌에게 맡겨 두었고 (그것이 발표될 날이 올 것이다.) 시들은 수도원에 가지고 갔다. 이것은 우리에게 씁쓸한 미소를 짓게 한다.

 

머튼은 수련 생활을 시작한 후, 어느 날 그의 시 모음을 후일 유타 주의 삼위일체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아빠스가 된 그의 고해신부 로버트 맥간에게 보여주었다. 머튼이 방에 들어갔을 때, 후일 제네시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아빠스가 된 부원장 월터 신부도 거기에 있었다. 주저하면서 머튼은 그의 소중한 작품들을 스승의 책상 위에 놓았다. "신부님이 제 시를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가벼운 축복 후에 그 수련자가 방에서 나갔다. 문이 닫히자 수련장은 외쳤다. "도대체 시라니!" 그리고 그 작품들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다행히 머튼의 아빠스는 그의 어머니처럼 오하이오 주의 문학자 집안 출신이었다. 이 현명하고 거룩한 사람은 시토회가 풍성한 문학 작품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많은 초기 시토회의 사부들은 훌륭한 작가들이 아니었는가! 이 훌룹한 아빠스는 머튼의 문학적 계능이 시토회의 삶에 녹아들 수 있도록 단계적으로 머튼을 도왔다. 그래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시토회문학 작품 중의 하나인 칠층산이 탄생하게 되었다.

 

입회 동기가 순수했던, 순수하지 않았던, 확실히 이 젊은 구도자는 성심성의를 다해 시토회의 삶을 추구했다. 그러나 끝없이 교활한 거짓 자아는 그렇게 쉽사리 패배하지 않았다. 곧 이 젊은 지원자의 모든 에너지는 완벽한 수도승이라는 새로운 거짓 자아의 산물을 만들어냈다. 머튼에게 완전한 영성을 지닌 수도자가되어야 한다고 몰아댄 것은 그 거짓 자아였다. 금욕적인 젊은 수도승의 초기 이미지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를 생각나게 한다. 17년 후에야 커다란 발전이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잘못된 지도를 받았다고 해도, 항상 충분한 보상을 해 주시기 때문이다. "찾아라, 그러면 구할 것이다."

 

머튼은 편지를 통해서 이 비약적인 발전에 대해 아주 자세히 설명했다. 진정으로 머튼을 알고자 한다면, 그 편지들을 반드시 읽어야만 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 내용들은 모두 아주 훌륭한 것이다. 칠층산의 영국 판에 관해 머톤과 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후, 그래엄 그린(권력과 영광, 공포의 성, 3의 사나이 등의 저자)은 그 젊은 수도승에게 다른 글은 쓰지 말고 편지쓰기에만 전념하라고 강하게 권고했다.

 

그의 편지는 작은 타자기를 도구로, 그의 마음으로부터 직접 수취인에게 날아갔다. 편지는 일기들과는 달리 출판을 위한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수취인과 더 깊이 영적인 친근감을 느끼고, 또 수취인이 멀리 있을수록 머튼은 자신을 더 잘 완전히 드러낼 수 있었다.

 

머튼이 아주 중요한 문제에 가장 개방적으로 친교를 나눈 것은 지하 조직을 통해서 몇 달이 지나야 지구 반대편의 수취인에게 편지를 전달할 수 있었던 보리스 파스레르나크(닥터 지바고의 저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였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거의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그 이야기를 듣게된 네 번째 사람입니다. 우리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당신에게까지 숨기고 싶은 것은 없습니다. 어느날(1958228) 나는 열네 살이나 열다섯 살 정도의 아주 어린 유대인 소녀와 함께 앉아 있었는데 그 소녀가 갑자기 매우 깊은 애정을 표현하며 나를 껴안아서 나는 영혼 깊숙이 감동을 받았던 꿈을 꾸었습니다. 그 소녀의 이름은 '프라버브(Proverb-잠언)' 였는데, 나는 그 이름이 아주 소박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그녀는 성녀 안나와 한 가족이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그 이름에 대해 말했는데, 그녀는 자기 이름에 자부심을 가지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소녀들이 그 이름을 가지고 놀렸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이름이 아주 아름답다고 말해 주었고 거기에서 꿈이 끝났습니다. 며칠 후 내가 우연히 가까운 도시에 (318일에 루이빌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수도승에게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를 걷고 었었는데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프라버브로 보였습니다. 그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부끄럽게 여길지라도 그들 모두는 프라버브의 뛰어난 아름다움과 순수함과 수줍음으로 빛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시야 안에서 놀며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로씨 자신의 참된 자아를 알지 못했습니다.

 

머튼은 해학적인 말을 덧붙였다. "그리하여 당신은 한 소녀, 그것도 유대인 소녀와 사랑에 빠진 한 수도승의 불명예스러운 비밀을 전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수도승들에게서 많은 것을 기대할수 없습니다. 과거의 영웅적인 금욕 생활은 더 이상 없습니다."

 

해학은 종종 진실을 감춘다. 머튼은 더 이상 영웅적 금욕주의 자, 본보기적 수도승이 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불명예가 된다고 하여도 사랑과 연민과 매력을 가진 사람이 되고자 했다. 머튼은 '유죄한 방관자의 추측'에서 이것을 더 냉정하고 덜 사적인 표현으로 설명했다.

 

루이빌에 있는 4번가와 월넛 가가 만나는 모퉁이, 쇼핑구역 한가운데에서, 내가 모든 사람들을 사랑했다는 깨딸음으로 나는 갑자기 당황스러웠다. 그들은 나의 것이고 나는 그들의 것이다. 우리 모두가 전혀 낯선 사람들일지라도 우리는 서로에게 이방인 일 수 없다. 그것은 외딴 곳에 혼자 떨어져 있고 싶은 꿈, 특수한 세상, 모든 것을 버렸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속으로 만들어낸 거룩한 세상에 안주하는 거짓된 자기 고립의 꿈에서 깨어난 것과 같았다.

 

그리고 머튼은 그 경험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계속 말한다.

 

거짓으로부터 벗어난 이런 자유로운 느낌으로 나는 큰 소리로 웃을 수 있는 그런 커다란 위안과 기쁨을 얻었다. 그리고 나는 그 행복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가 다른 사람들과 같고, 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임을 감사합니다." 이것이 순수한 환상이라고 심각하게 받아들이기까지 16, 17년 정도 걸렸을 것이다.

 

인류의 한 일원이 되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제 나는 우리 모두가 어떤 존재인지 깨달았다.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깨달을 수 었다면! 그러나 그것은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태양처럼 빛을 내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는 것을 말해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들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볼 수만 었다면. 우리가 항상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볼 수만 었다면. 더 이상 전쟁도 증오도 잔인함도 탐욕도 없을 텐데‥‥ 우리가 서로 쓰러뜨리고 숭배하려는 것이 큰 문제다. 그러나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선물에 의해 믿고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 존재의 중심에는 죄나 환상에 물들지 않는 무의 지점, 순수한 진리의 지점이 있다. 그곳은 우리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처분하시는 곳이며 우리 마음의 환상이나 우리 의지의 잔인성의 영향을 받지 않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하는 불꽃이 이는 지점이다. 완전히 아무 것도 없는 이 작은 지점이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순수한 영광이다. 그곳에는 우리의 가난으로, 궁핍으로, 신뢰로, 자녀다움으로 당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마치 하늘나라의 보이지 않는 빛으로 반짝이는 순수한 금강석과 같다. 그것은 모든 이들 안에 있다. 만약 그것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태양과 같이 빛나는 수십억의 얼굴에서 삶의 모든 어두움과 잔인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것은 오직 주어질 뿐이며 하늘나라로 가는 계단은 모든 곳에 있다.

 

이 심오하고 의미심장한 경험을 하고 난 후, 머톤 신부는 새 관상의 씨(New Seed of Contemplation)에서 다음과 같이 쓸수 있었다.

 

나에게는 성인이 된다는 것이 내 자신이 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화와 구원의 문제는 사실 내가 누구인지를 찾는 문제이고 나의 참 자아를 발견하는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무와 동물들의 의견을 듣지 않으시고 그것들을 만드시지만 그것들은 아무 불만도 없이 완전히 만족하고 있다. 우리는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될 수 있도록 자유를 주셨다. 우리는 원하는대로 될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실제적이 될 자유도 있고 가상적이 될 자유가 있다. 우리는 참될 수도 있고 거짓될 수도 있다. 선택은 우리의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가면을 쓸 수도 있고 저 가면을 쓸 수도 있으며 아무 가면도 쓰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원하면 우리의 참된 얼굴을 드러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원인은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가 자신에게나 다른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우리가 진리와 실제를 원하게 될 때 그것을 찾으리라는 기대를 할 수가 없다. 거짓의 길을 선택한다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진리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진리가 우리를 외면하게 된다 하여도 놀라지 말아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참된 신원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하나님과 함께 하도록 불림을 받았다.

 

참 자아를 칭찬하며, 머튼은 이제 거짓 자아에 대해서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거짓 자아, 외적이고 피상적이고 사회적인 자아는 편견과 변덕과 과시와 위선적 자기 염려와 거짓 봉헌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짓 자아는 이기심으로 만들어지고 우리를 진실에서부터의 밀어지게 한다. 그것은 우리의 참된 모습도 아니고 하나님의 모습도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이 아니므로 우리의 거짓 자아는 실제로는 공허한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를 경험할 수 없다.

 

이런 경험을 함으로써 머튼 신부는 새로운 자유와 기쁨을 알게 되었다. 그는 참 자아의 충만함 속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의 작품에는 새로운 확신이 있었다. 시토회의 풍부한 유산은 이제 새로운 방법으로 그의 것이 되었고, 머튼은 그것을 새로운 사람에서 현대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새로운 사람에서 머튼은 참 자아와 거짓 자아라는 전문 용어를 사용하는 대신 오히려 성 베르나르도의 생각을 따라 '형상과 형상'이라는 좀 더 성경적인 용어를 사용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하나님과 전혀 다른 세상으로 가고 있다. 우리는 타고난 참된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야만 한다.

 

머톤은 후일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 변화는 우리 자신 안의 가장 깊고 가장 근원적이며 더 개인적인 것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해주는‥‥ 쇄신을 위한, 또 창조적 힘의 해방을 위한‥‥ 본능이 우리 안에 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에서 머튼은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외적인 명성이나, 자신의 여권 사진 등에 기분이 좌우되는 것은 영적 재난이다. 그의 참이 단지 지문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인가? 자신의 이름이 '명사 인명록'에 있다고 해서 그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일요판 신문에 사진이 실려 있다고 해서 그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될까? 그런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죽은 것이다. 그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는 더 이상 살아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사회에 떠 넘겼을 뿐이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직면하기보다, 그는 거리를 걷고 있을 때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지 않는다면 우려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린 모두에게 본성적으로 존재하는 이런 하나님의 형상은 실로 이성적 추론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자신의 신원에 대한 참된 경험을 주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관계없이)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존재하고 었는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활동과 육체적 즐거움을 위한 능력을 자연스럽게 깨닫도록 노력해야만 하는것처럼,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영성과 영혼의 힘을 자연스럽고 생생하게 다시 깨닫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우리의 영혼은 육체나 감각만으로 결코 알 수 없는 심오하고 숨겨진 가치를 경험하며 생명에 이를 수 있다. 이 영성은 우리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동일시 될 수 있다. 우리가 이 형상을 깨달으려면 우리 자신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본성적 영성으로 하나님과 닮을 수 있다고 깨닫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잠재력은 현실화되어야 한다. 어떻게? 알고 사랑함으로서! 더 정확히 말한다면 사랑의 체험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님을 앎으로써

 

종교적 의미에서 자각은 자신을 깨닫는다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 깊은 곳에서 우리를 끌어 들이는 하나님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우리가 실제적이 되고 우리의 실제(責在)를 경험하려면, 개별적인 존재로씨 자신의 자아에 대한 성찰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을 초월하고 성찰을 넘어서서 우리의 생명이신 하나님께 영혼을 온전히 집중해야 한다. 즉 우리는 개별적인 우리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모든 인식을 넘어서는 오직 하나 뿐이신 하나님을 알 때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 모든 존재를 무한히 넘어 존재하시는 분, 그래서 모든 존재들과 완전히 "다른" 당신을 알 때, 우리는 자신을 진정으로 알게 된다. 우리의 자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장막과 무덤으로부터 벗어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알 때,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에게 충만한 생명을 가져다준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12:25)'는 구절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은, 적어도 우리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완전히 새로운 존재방식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고, 우리가 알고자 하는 대상과 방식이 변함으로씨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었다. 하나님은 말로 정의 내릴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그에 반해서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거울을 통해 하나님을 신비적으로 알게 될 때, 하나님도 신비로운 방법으로 우리를 알게 되신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나는 내가 알려진 만큼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안다. 우리는 지복직관으로 (저 세상에서) 완전히 깨닫게 될 진리를 이 현세에서도 관상을 통해 불완전하게나마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 딴 우리의 참 자아를 알아본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알려지고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라. 그것은 영적으로 심오하게 보이는 자기 인식의 문제와는 완전히 다르다. 다른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갑자기 알게 될 때, 그 사람 안에서 피어오르는 생명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어떤 종류의 영적인 깨달음과도 완전히 다르다. 이런 인간적인 깨달음은 우리 영혼 안의 그 형상이 본성을 회복하고,하나님께 '보여지고' '사랑받는'다는 것을 깨닫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수반되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비롭게 사랑하신다는 내적 깨달음이 없으면, 그 형상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땅속에) 묻혀버리고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채 단지 잠제적인 형상으로만 남게 된다.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자비를 경험하고 우리가 잃어버렸던 사랑이신 당신의 형상을 다시 찾기 시작할 때 그 형상은 활력을 받는다.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시는 것은 우리의 영혼 안에 그 분의 형상 -마음에 그리는 것 이상의 형상- 이 현존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작용으로 우리의 영혼과 결합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랑에 의해 무엇보다도 탁월하며 상상도 할 수 없는 자유의 무한한 영역으로 '옳겨'지고 '끌어 당겨'지고 있다는 느낌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우리의 참된 신원으로 우리를 만들어 내시는 성령에 의해, 성자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영적으로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머튼의 책의 제목이 가리키듯이, 이 모든 것은 바울의 말씀에 대한 설명이다.

여러분은 미망과 욕망에 사로잡힌 옛 생활의 낡은 자아를 벗어던지고 성령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참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로운 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 형상의 정의와 거룩함은 진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머튼 신부는 그것을 매우 간단하게 말했다. "우리는 자신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받는' 것을 완전히 인정할 때 진정한 우리 자신이 된다."

 

1968년 방콕에서 머튼이 갑작스럽고 비극적인 죽음으로써 이 위대한 영혼 안에서 이루어진 이 지혜로운 전통의 발전은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계속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교의와 가르침은 또 다른 위대한 시토회 스승인 스펜서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명예 아빠스인 토마스 키팅 신부에 의해 발전 되었다. 토마스 키팅 신부는 그의 영적 여정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 시대에 커다란 발전을 이룬 행동 과학의 지혜와 식견을 빌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지혜들이 이작은 책에 반영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머튼 신부는 내가 다루지 않은, 거짓 자아를 흘려보내는 고통스러운 면을 강조했다.

 

거짓으로부터 진실의 산에 힘겹게 올라가는 것은 지혜와 통찰력의 즐거운 진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에 깊이 새겨져, 2의 피부보다 더 단단히 들러붙어 있는 거것말 덩어리를 고통스럽게 때어 내는 작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두려운 마음으로 아무 것도 없는 우리의 중심으로 내려갈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의 은총과 지도로 우리 자신을 잊고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께 이끌려 갈 수 있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하나님 현존의 저항할 수도 없는 순수한 빛에 의해 모든 지식과 창조된 지혜와 즐거움과 분별력과 모든 인간적 희망과 기쁨이 좌절되고 사라지는 깊은 어둠을 지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관상 기도의 길을 선택할 때 많은 고통들이 경감될 것이다. 더 완전하고 직접적인 하나님의 작용으로 변형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참 자아의 실계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성령의 작용으로 그것이 완전히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조용히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직업적인 거짓, 소유물을 과시하는 거짓, 우리의 현혹적이고 비밀스러운 행동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끊임없이 걱정하는 거짓과 직면한다. 우리는 구속되어 있음을 알고 수치를 경험하고 자유를 갈망하며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가 이런 거짓 자아를 만들어 내려는 것을 알아차릴 때마다 자신을 무시하는 해학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훌륭하다. 그러면 우리는 평화롭고 겸손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협조를 받아 그 일을 완성하시고, 영원한 '현재' 안에서 하나님께서 즐기고 계신 그 상상할 수도 없는 아름다운 진리로 우리를 이끌어 가실 것이다. 그런 신뢰와 확신을 가지고 관상의 길을 따르려면 천진난만한 마음이 필요하다. 머튼은 그것을 분명히 알았다. "참 자아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 하나님 안에서 살며 하나님의 눈으로 보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모든 피조물을 연민을 가지고 사랑하도록' 하나님의 내적 현존에 의해 내부로부터 변화됨을 의미한다.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 일을 하신다."

 

그렇다. 그것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것이며 영원히 진행 중인 수행과제이다. 머튼이 너무나 훌릉하게 말했듯이, "완성은 오히려 하나님의 신비 안으로 더 깊이 계속해서 나아가는 여정이며‥‥ 그렇게 추구하다보면 그 자체로 더욱 많은 것을 탐구하려는 자극을 받는다."

      

 

 

7장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구원 사업을 시작하실 때, 행함과 소유와 다른 이들의 평가 속에서 어떻게 거짓 자아가 만들어지도록 유혹을 받으셨는지 이미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께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것을 거절 하셨음도 보았다. 예수님은 당신의 참 자아를 아셨다. 성부 하나님, 아빠와 함께 하는 침묵의 친교 시간은 이로부터 흘러 나왔으며, 동시에 마음에 어떤 의심도 남겨 두지않으셨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14:9)."

 

유혹에 직면하고 유혹자에게 대답을 하셨을 때, 우리의 스승이신 주 예수님은 이성적 차원에서 우리가 거짓 자아의 속임수를 드러낼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악마의 유혹적인 속임수에 대해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말씀으로 대답하셨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4:4)" 예수님께서 뽑으신 사도는 후일 신자들에게 상기시켜 주곤 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여기, 거짓 자아에 대한 또 다른 해결책이 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되고, 자양분을 받고 성장할 때, 우리의 정신과 마음은 진리 안에서 형성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하나씩 거짓 자아의 속임수를 드러내고 벗겨낸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리의 기초를 세우며, 진리의 빛 속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참된 관계 속에 있는 우리의 참된 자아를 식별할 수 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성적인 차원에서 일상적인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있으며 관상 기도 안에서 진리를 경험하게 된다.

 

거짓 자아, 혹은 악마는 모든 것,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그의 교활한 의도에 맞춰 활용한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첫 번째 유혹을 단호히 거절하신 후에, 유혹자는 두 번째 유혹을 던지기 위해서 말씀을 가지고 왔다. "뛰어 내려 보시오, 성경에 '하나님이 천사들을 시켜켜'라고 하지 않았소?(4:6)" 매일 진리의 말씀을 접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 번째 유혹에 대한 대답으로 말씀하신 그 진리를 훨씬 더 확실히 이해하게 된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거짓 자아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네가 섬겨야 할 분이다. (4:1~11)

 

불행히도 우리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매일 말씀을 접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행위에서 우리의 신원을 찾으려고 하면서 거짓 자아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매일 독서를 열심히 함에 따라 우리는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놀라운 식견을 가질수 있다. 우리는 제 때에 어울리는 성경 구절을 떠 올릴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 "내가 바로 그것을, 성경을, 지식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이다." 다시 우리는 소유에 의해 거짓 자아를 세우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려고 노력한다면, 말씀은 거짓 자아의 속임수를 드러내고, 참 자아를 알게 해주며, 그 자아를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 그런데 말씀이 거짓 자아의 속임수를 드러내고, 우리를 양육하고 참 자아를 성장시키려면, 우리가 어떻게 말씀을 받아들이는지가 중요하다.

 

그 전통적인 방법,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살아있는 전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오는 그 방법은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라고 한다.

 

렉시오 디비나는 오늘날 우리가 독서로 이해하는 것 -지면에 표시를 하거나 밑줄을 쳐서 눈을 통해 어떤 생각이나 개념이 우리 정신에 전달되는 것- 과는 완전히 다르다. 렉시오는 개념적 인식을 넘어 실제를 경험하도록 더 완전히 듣는 것이다. "거룩한 독서"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8:3)" 꿋꿋이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고 당신 제자들에게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뒤를 따라야한다고 말씀하신 분, 당신 시대의 권력에 맞서고 온 민족들을 가르치도록 제자들을 파견하신 당신은 우리에게 어린 아이가 되도록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지성은 두 가지로 작용한다. 데이터를 모아서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추론적이거나 경험적인 작용이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자신의 사고방식에 끼워 맞추고 그 대상을 지배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교만을 불러일으키고, 무엇보다도 환경적 재앙을 가져 올 수 있다. 창조된 모든 것을 우리가 지배해야 하는 것으로, 그래서 피조물들의 내적 본성과 창조주의 전체적 계획에 대한 존중 없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용해도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재난을 불러 오게 된다. 인간 정신이 이런식으로 작용할 때, 마치 다른 양식은 불합리하다는 것을 암시하듯이, 그것을 '합리적인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지성은 또한 관상적으로 혹은 직관적으로 혹은 지혜롭게 작용을 한다. 여기에서 지성은 직관과 통찰력으로 데이터를 모으고 상호 관계적 사고를 통해 진행된다. 그 데이터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고에 끼워 맞추려하기 보다는 그 데이터로 우리의 사고가 확장되게 한다. 그런 작용 방식은 겸손을 요구하고 우리는 당연히 겸손하게 된다. 우리가 만들어 낸 합리적인 사고에 끼워 맞추기에는 너무나 큰 그런 진리를 전해주는 신화적인 것들은 여기에서 자신에 어울리는 자리를 찾는다.

 

두뇌와 이성적 기능이 아직 완전히 발달하지 않은 어린이들은 논리적 판단의 방해를 받지 않고 거의 신화적 내용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들을 서슴없이 받아들인다. 어린이들은 의미를 거의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그 이야기를 실제처럼 경험한다. 그 경험이 기억 창고에 저장되는 것처럼, 어린이들의 마음과 상상력과 감정이 형성된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요청하셨을 때, 예수님은 우리가 직관적이고 지혜로운 기능을 사용하도록 부르시는 것이며, 우리가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완전한 계시 진리를 전해주는 이야기들이나 신화에 마음을 열도록 부르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성경의 상징과 이야기들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알려주시며,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바라보는 방법을 알려주신다.

 

열린 마음가짐은 정신세계의 폭을 넓힌다. 열린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평범함을 넘어서 본질로 다가가는 올바른 길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고를 멈추면, 마음이 힘을 낸다."고 말했다. 우리는 교부들이 '사랑의 지식'이라고 부른, 사랑의 직관을 통해 오는 경험적 지식에 대해 마음을 연다. 그렇게 마음을 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우기 위해 영감을 주시는 그 진리를 풍요로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자녀가 신앙 안에서 육성되기를 원하는 현명한 부모들은 처음부터 자녀들이 동화책을 접할 때, 성경 이야기도 접하게 한다. 비디오로도 성경 이야기나 예수님의 생애나 많은 성인전을 보여준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이런 성경적 이야기와 인간이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다른 이야기들, , 삼손이나 유딧이나 예수님의 이야기와 라이언 킹 이야기 등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나 추리 능력이 발달함에 따라, 신앙의 빛을 받은 그 젊은이는 분별력을 가지고 계시 이야기의 상징과 통찰력을 삶의 효과적인 지표로 삼을 수 있다.

 

보통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다가갈 때 어린아이와 같이 되려면, 성경을 통해 오는 계시를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것이 진정한 렉시오의 특징이다.

 

6세기 초에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토는 '수도 규칙서'를 썼다. 오늘날 서방 세계의 대부분의 수도원은 '성 베네딕토 수도 규칙서'를 따른다. 그 수도 규칙서에는 묵상이나 관상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다. 베네딕토는 렉시오에 대한 풍부한 조항을 두었다. 일 년의 대부분, 아침 이른 시간에 두 시간씩, 사순절에는 세 시간씩, 저녁 때는 그보다 조금 더 많이 렉시오를 하도록 규정했다. 교회에 이성적인 스콜라 철학이 널리 퍼지기 시작한 12세기, 카르투시오 회원인 귀고 2세는 렉시오를 네 가지 "단계' -렉시오, 묵상, 기도, 그리고 관상- 로 명확히 구분했다. 이 단계들을 오르면서, 인간의 정신은 렉시오를 통해서 경험한 것을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며, 그것에 대해 곰곰이 숙고한다. 렉시오와 묵상은 숙련이 되면 아주 거룩한 공부가 된다.

 

거룩한 공부는 우리 삶에서 중요한 요소다. 우리는 온 마음으로 주님이신 우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 공부를 통하여 가시와 같은 우리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계시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경 연구 분야는 장족의 발전을 했으나 불행히도 성경 연구라는 미명하에 성경에 대한 매우 터무니없고 무례한 인본주의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그런 것에 관심을 쏟으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참된 마음으로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면, 주님께서 스스로 영감을 주신 책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기를 원하시는 그 계시를 더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매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나 알려드리겠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당신께서 뽑으신 열 두 제자들과 함께 기념하셨던 만찬은 실로 유월절3)을 기념하는 만찬인 세데르(Seder) 만찬4)이었다는 점에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의한다. 예수님과 그 분의 친구들은, 가장 어린 아이로 4가지 질문을 했던 그 어린 시절부터 친숙한, 그 오랜 세월동안 내려오는 거룩한 예식을 따랐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저녁때, 예수님은 이 가장 거룩한 만찬을 새로운 계약의 시작으로 선포하셨다. 그 식탁의 주인으로써 예수님은 빵을 드시고 축복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고는 그 빵을 당신 자신으로 변화시키며 말씀하셨다. "이것은 나의 몸이다."

 

3) 니산달 14, 출애굽 전날 밤.

4) 니산달 15, 유월절 첫날 밤,

가족끼리 하던 특별한 식사

5) 가장은 흔히 흰색 예복을 입고 포도주 잔을 놓고 축복 하는 것으로 예식을 시작한다. 모두 합해서 넉 잔의 포 도주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마신다. 모든 사람이 손을 씻은 다음, 식탁의 주인이 참석한 사람들에게 식초나 소금물에 담근 셀러리, 익히지 않은 야채를 나누어준다. 그런 다음 유월절 양을 상징하는 짐승의 정강이 뼈와 하나님의 자비의 상징인 완전히 익힌 달걀을 세데르 접 시에서 옮기는데, 그동안 모두가 기도문을 암송한다.

두 번째 포도주를 따른 후 가장 어린아이가 이 예식에 관해 4가지 질문을 던진다.

"왜 오늘 밤은 다른 날 밤과 달라요?

다른 날 밤에는 어떤 빵을 먹어도 상관없는데왜 레 오늘 밤에는 누룩 없는 빵만 먹어야해요?

다른 날 밤에는 아무 나물이나 먹어도 되는데, 왜 오늘 밤에는 쓴 나물만 먹어요? 다른날 밤에는 나물을 한 번도 물에 담그지 않아도 되는데, 왜 오늘 밤에는 반드시 2번씩이나 담그나요?

다른 날 밤에는 앉아서 먹든 기대고 먹든 상관이 없는데, 왜 오늘 밤에는 기대고 먹어요?"

이 질문에 모든 사람이 한 목소리로 준비된 대답을 암송한다. 이 대화체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출애굽의 이야기이다.

모든 참석자들은 다시 손을 씻고 누룩 없는 빵과 으깬 과일과 포도주를 섞은 액체에 담근 쓴 나물을 모두 먹는다. 그리고 실제로 식사를 한다. 모든 사람이 식사를 마치고 감사기도를 암송한 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을을 표현하기 위해 3번째로 포도주를 붓는다.

예식이 끝나갈 무렵 참석자들은 한 목소리로 찬양의 시편을 암송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에 대해 경의를 표하기 위해 4번째로 포도주를 붓는다. 어떤 사람들은 미래의 세데르 때에 나타날 메시아의 전조가 될 엘리야를 기리는 의미로 5번째로 포도주를 못는다(마시지는 않음).

 

전례적 만찬(세데르 만찬) 과정에서 잔을 네 번 축복한다. 식탁에 있는 사람들은 주빈(主賓)이 감사기도를 하는 동안 자신의 잔을 잡고 같이 기도하고 나서 자기 잔을 마신다. 이 특별한 만찬에서 예수님은 네 번째 축복을 위한 잔을 드시고 감사기도를 하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제자들은 각자의 잔으로 마시는 대신에 예수님의 잔을 돌렸다. 제자들은 하나의 잔, 예수님의 잔으로 마셨다. 전례적으로 아주 심오하고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하나의 잔, 예수님의 잔으로 마신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다.

 

성경 공부를 하면, 돌과 잡초를 치워버리는 훈련을 통해 우리의 마음은 잘 경작되어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기름진 땅이 된다. 그러나 씨앗을 받아들이고 새 생명이 태어나도록 하는 것은 변함없이 마음을 여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씨앗도 심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다져진 땅과 같이 되거나, 씨앗이 자랄 수도 없는 외골수적인 사고의 돌덩이와 가시덤불과 같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비옥한 토양이 될 수 있도록 공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삶을 이끌어주거나 동기를 부여해줄 '영적' 독서가 필요하고 렉시오에 대한 개방적인 마음과 그 응답을 격려해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공부를 하거나 적극적으로 지성적인 독서를 한다고 해서 저절로 우리의 의식이 변화되거나 거짓 자아를 버리고 참 자아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렉시오가 그런 훈련으로 이용된다면 본래 의미했던 변화의 원동력이 되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렉시오는 다른 종류의 성경 독서나 지성적 노력과는 명백히 구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렉시오를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고, 우리 안에서 작용을 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성 베네딕토는 묵상이나 관상을 구체적으로 언급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성 베네덕토는 독서를 하는 사람들이 말씀에 마음을 열 충분한 시간을 주었고 말씀을 통해 마음속 깊이 내려가고(묵상) 하나님 말씀을 경험적으로 알고 사랑하는데 마음을 열도록(관상) 했다. 그것은 온 몸과 마음으로 말씀과 만나는 것이다.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보면, 우리가 그런 렉시오를 하는데 도움이 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럴 시간이 전혀 없거나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렉시오를 할 수 밖에 없을때, 우리는 생활 속에서 렉시오를 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성경을 접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넓게 마음을 열기를 원하고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그날그날의 일을 할 때, 우리는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고 우리 안에서 계속 활동하기를 -묵상- 원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흘러가도록 놔두며,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말씀이 자유롭고 완전하게 우리를 데려가는 그런시간을 준비한다. 이런 식으로, 가장 활동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관상 생활을 유지하고 향유할 수 있다.

 

렉시오를 할 때, 비록 렉시오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짧더라도, 관상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신앙과 함께갈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여기, 당신 말씀 안에 계신다. 나는 말씀을 다루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분명히 말씀을 지배하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 말씀에 지배를 받고 성장하고 변화되려고 태어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작용, 하나님의 성령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필요가 있다. 교회를 위해 이 말씀들을 기록했던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으신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살고 계시며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시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모든 것을 일깨워 주신다. 우리는 렉시오를 할 때나, 그 밖의 시간이나 삶에서 이 말씀이 실현되도록 항상 겸손하고 열렬한 마음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고 성령께 의지한다.

 

우리는 모든 생각과 말을 제어하고, 우리가 이미 만들어 놓은 구조물에 그것을 끼워 맞추려는 활동적인 정신을 옆으로 밀어둘 필요가 있다. 신학대전을 보고 하나님을 개념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아퀴나스가 가르친 바대로 그 개념은 하나님 자신은 아니다. 렉시오를 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개념적으로 추론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 바로 당신을 원한다. 우리는 개념적으로 이해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적인 식견, 즉 진리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이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인식인 사랑의 식견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아주 충실하게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렉시오는 수동적이지 않다.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정신과 기억과 상상력을 모두 멈추고 완전히 사랑에 몰입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도 생각할 수도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경험으로 우리를 이끄시면, 우리는 춤을 잘 추는 커플과 같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 "눈으로 본적도 없고 귀로 들은 적도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습니다(고전 2:9). 그러나 성령만이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실 수 있습니다.

 

"렉시오는 완전히 관상이다. 렉시오는 그 자체로 우리의 의식을 변하게 해 준다. 거짓 자아는 그 모든 구조물과 함께 뒤에 남겨진다. '가지다'라는 말을 여기서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가 지금 가진 것은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나) 소유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의 호평을 받거나 칭찬을 받았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그렇다. 그것은 우리를 완전히 겸손하게 만들며 완성시켜 주며 행복하게 해준다.

 

나는 항상 가장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참의 원형이 되는 본보기를 성모 마리아에게서 보아 왔다.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그녀의 역할에 동의했던 맨 처음부터 마리아는 진정한 렉시오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수태 고지를 받을 때, 마리아가 무슨 일에 종사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천사가 실제로 어떻게 그녀에게 "나타났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마리아는 엄청난 말씀에 대해 마음을 열고 있다.

 

여기에서 마리아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젊은 아가씨, 어찌면 그녀는 우리에게 소녀의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녀는 자기 마을, 소위 오지와 다를 바 없던 마을을 떠나 본 적이 없다. 흔한 말로,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 그런 마을에서의 삶은 어땠을까? 평범한 일상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일주일에 가장 커다란 행사는 시나고그에 가는 것이다. 여기에서조차 여인들의 역할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격자창 뒤에 모여 있어야 했듯이 억눌려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했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환호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 집에 가져 왔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읽고 쓰는 것을 배운다면 -특히 여인에게는 매우 드문 일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였다.

마리아의 삶은 유대 풍습의 배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잠겼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중심은 무엇일까? 한 분의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 그런데 한 사자(使者)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천사라고 생각되는 이 사자는 그녀가 살아온 유대 전통에서는 그렇게 드문 것은 아니었지만, 과거 역사를 보아도 그녀에게 전달된 메시지와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하나님, 너의 하나님, 너의 조상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의 하나님, 이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자를 낳는다!' 유대 정신이 배어있는 마리아가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 사자는 이 젊은 여인에게 한마디 더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네가 성자의 어머니가 되기를 원하신다.' 고통스러운 인식 과정을 겪지 않고 하나님의 동정녀 딸이 되는 특별한 부르심을 깨닫게 되고, 아주 놀랍게도 그런 소명을 이해하고 동참할 수 있는 남자를 마리아가 찾았다 해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이 젊은 유대인 아가씨가 이 계시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 마리아는 그 계시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녀는 그 계시에 어떻게 협조적으로 대답해야 하는지 잘 몰랐을 뿐이다.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 계시 말씀에 그녀는 온 마음을 열고, 천사가 질문한 것에 완전히 인간적으로 ""라고 대답했다. 본질적으로 보면, 마리아는 우리 그리스도인 신앙의 두 가지 핵심적 신비 삼위일체와 육화강생- 를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는 삼위일체와 육화강생의 신비를 의식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이것은 거짓 자아로부터 참 자아에 이르는 의식 변화가 아니라 "말씀이 삶을 취하시어 우리 가운데에 사셨습니다."라는 살아있는 약속으로부터 순식간에 완성에 이르는 의식의 변화이다.

 

렉시오를 할 때, 우리는 모든 자의적 의식을 흘려보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의식,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준비하면서 마리아처럼 마음을 활짝 열기를 원한다. 우리가 그렇게 끊임없이 진리를 받아들일 때, 거짓 자아의 지배력은 오래 가지 않는다. 하지만 거짓 자아는 그렇게 쉽게 죽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수단을 다해서 싸울 것이고,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하며) '말씀'까지 사용한 것처럼 거짓 자아도 우리를 지배하기 위해서 온갖 책략을 다 사용할 것이다. 거짓 자아는 우리가 렉시오를 할때, '우리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눈에 더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으로 보이고, 인류를 계몽하게 될 것이다.'고 우리를 속이려고 할 것이다. 거짓 자아는 우리가 렉시오를 통해 얻은 것을 우리가 '가진 것'으로 만들고, 우리가 어떤 가치 있는 통찰력을 얻었다고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를 받고 우쭐거리게 한다. "그 사람은 정말로 성경에 해박해."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렉시오의 정신을 가지고 계시된 진리로 계속해서 되돌아 갈 때, 거짓으로 포장된 이 거짓 자아는 시들고 죽을 것이다. 동시에, 진리의 빛으로 우리가 끊임없이 깨끗해진다면, 우리는 진리 안에서 우리의 참 자아와 다른 모든 사람들의 진정한 가치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창조적인 구속 사업 안에서 우리와 일치하는 모든 피조물의 진정한 가치를 볼 수 있다.

 

      

8장 작별인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과학적 발달을 따라가기에도 벅찬 시대에 살고 있다. 20세기 초반의 20년간 보다 지금 1년 동안, 과학적으로 더 큰 발전이 이루어졌다.

 

다마스커스의 요한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위대한 중세 신학자들은 순수한 영이시며 순수한 행위이신 하나님은 정반대의 것인 피조물, 자력으로 활동할 수 없고 잠재력만 지닌 피조물을 창조하셨다고 생각했다. 과학은 이제 피조물의 기본 구조나 인간 의식의 진화가 비활성 물질과 같은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무질서한 에너지에서 비롯된다고 알려준다. 사실 물질은 에너지가 압축되어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에너지가 갑자기 방출되고 통제할 수 없게 된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파괴력을 가진다. 어느 주일 아침에 사람들이 모여든 나가사키의 성당 위에서 끔찍하게도 원자 폭탄이 터졌을 때, 그 사실은 충분히 증명되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문제들이 떠오르는 소위 바다와 같은 이 엄청난 혼돈의 에너지는 끝없이 진화하며, 역동적이고 폭발적인 그 내부로부터 나오는 어떤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체계적으로 이용된다.

 

이런 저런 식으로 이 상황을 접한 고대인들은 당연히 자연의 힘 앞에서 겁에 질려, 거기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힘을 달래려고 했다. 인간의 의식이 발달함에 따라 소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본성'을 점점 더 완전하게 드러내셨다. 시나이 산에서 천둥, 번개가 치던 것은 계시를 처음 받아들이던 고대인들이 하나님 체험으로 인식하기에 쉬웠다. 모든 것의 근원이며 모든 것 안에 존재하는 이 에너지가 사실상 우리의 삶과 움직임과 존재를 가능하게 만드는 사랑과 온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진화의 은총으로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기 시작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은 정해진 때가 되어야만 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이 중요한 것이다. 모든 사랑은 하나님을 나타낸다. 그리고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팔장을 끼고 나무 그늘을 걸으시던 그 계시의 최초의 순간부터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워 주셨다. 하나님의 지혜로운 종 솔로몬이 부른 '아가'서를 문자 그대로 영화로 만든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성인용 영화가 되겠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우리에게 알려주시려고 감각적인 성애시(性愛詩)로 표현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를 완성하심으로써 가장 위대한 사랑의 표징이 이루어졌다. "벗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갈보리 산의 그 비극적인 사건은 모든 피조물들이 영원히 증언해야 할 가장 생생한 사랑의 선언이다.

 

저명하고 신앙심 깊은 유대인 작가 채임 포톡은 그의 작품의 주인공인 아셔 레브를 통해, 그 젊은 예술가가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랑, 그의 아버지를 위해 고통을 인내하는 어머니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선택함으로써 유대인 독자들을 놀라게 했다. 아셔 레브 이야기에서 포톡은 우리 각자가 삶의 기본으로 삼아야 하는 도전 과제를 제시했다. 아셔는 종교적 공동체 안에서 (일반적인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아들의 교육에 전념하면서 그의 완전한 사랑을 실현할 것인지, 그의 안에 있는 놀라운 예술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것인지 결정해야만 했다.

 

결국에 아셔는 아들을 아주 신앙심이 깊은 자신의 아버지와 그 종교 공동체에 내어 주면서, 예술가의 길을 가기로 결정한다. 그 선택을 통해서 그는 우리 안에 있는 원시적인 혼돈의 에너지를 표현하는 그림을 그린다. 그는 비평가들이 거의 이해할 수 없고 혼란스러워하는 그런 그림을 그리도록 이끄는 어떤 힘을 경험한다.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제자를 교육시킬 때, 자신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근원적 힘과의 친교 -그 친교가 관상 기도이다- 안으로 들어가는 단순한 방법을 전해 주었다. 그는 제자에게 하나님의 실재를 의미심장하게 표현하는, 단순하고 한 음절로 된 단어를 선택하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과 사랑이라는 두 가지 예를 제시한다. 삼위의 하나님은 인성(人性)을 초월하신다. 현대 페미니스트 신학은 이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하나님은 남성과 여성, 아버지와 어머니를 초월하신다. 문제는 이런 개념이 하나님과 우리의 개인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데 충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지의 구름을 쓴 신원불명의 이 위대한 관상가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알았고, 피조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에너지는 온갖 혼돈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모든 것을 포용하고 가장 온화하고 자상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예수님께서 착한 목자와 돌아온 탕자의 감동적인 이야기에서 말씀하신 것은 상처받기 쉬운 사랑이다.

전반적으로 그리스도교 환경 속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자란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이미지를 듣고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이 얼마나 놀랐을지 깨닫기는 정말로 어려울 것이다. "아무도 이와 같이 말한 사람은 없었다." 아들에게 자유를 준 후, 아들이 그 자유를 잘못 사용해서 고통을 받는 비통한 아버지로써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은 시나이 산에서의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의 이미지나 솔로몬이 장려한 신전을 지어 바친 엄위로운 하나님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회심할 때, 하나님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많은 걱정을 끼쳤지만 회개하는 죄인뿐만 아니라 독선적이면서 아주 질투심이 많은 아들까지도 마음을 쓰는 하나님의 이런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 되면 우리는 사랑으로 이해되는 아주 혼돈스러운 에너지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최초의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창조적 에너지가 있었고 그 에너지는 오로지 사랑이었다. 그 사랑이 이기심으로 오직 자신만 생각할 때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지만 그 형상은 영원히 남아 있다. 하나님의 창조적 에너지는 우리에게서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형상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더 이상 사랑의 에너지가 아니며 일치와 평화를 가져오는 에너지가 아니다. 그래서 혼돈이 우리의 참과 세계를 지배한다. 세례 때에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도록 성령을 받았다. 그 사랑은 아드님 제 2위격에 대한 아버지 제 1위격의 사랑이고 아버지 제 1위격에 대한 아드님 제 2위격의 사랑이다. 그 사랑은 삼위 하나님을 1체로 묶어준다. 우리가 그 형상을 다시 완전히 되찾을 수 있는 길이 세례를 통해 열렸다. 성령과 영혼의 진정한 일치를 이루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본성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를 이루는 '사랑'이 되는 것이 우리가 이루어야 할 절대 과제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150억 년간의 진화 속에서 150억 개의 은하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창조적 에너지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시키고, 서로 간에 친교를 나누고,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친교를 나누거나 일치할 수 있는 피조물은 우리 인간들뿐이다. 리쉬스, 노자, 부처, 공자, 아브라함, 모세와 같은 고래(古來)로 부터의 위대한 예언자들은 아주 명쾌하게 그 길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육화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를 하신다. 우리는 간디, 마틴 루터 킹, 로사 팍스,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 혼돈의 상태를 지나 최초의 사람들이 누렸던 자유를 찾아 나아가고 있음을 안다.

 

우리 존재의 증심으로 가서 그 중심에 계신 하나님 속으로 들어간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 창조적 에너지를 만날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부들은 흔히 그렇게 가르쳤다. 우리가 사랑에 완전히 동의해서 우리 안의 이 에너지를 풀어 놓으면, 처음에는 무질서한 생각과 기억과 감정과 느낌이 넘쳐흐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현명한 영적 사부들은 이 경험을 차분하게 다루라고 조언한다. 너무 많거나 너무 빠르지 않게. 이 해방을 통해 우리의 무질서한 스트레스들이 조화를 이룬다. 그래서 우리는 내적 평화와 조화를 찾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에너지가 전체 피조물의 일부인 우리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의식의 발달을 자유롭게 장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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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