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일치의 중요 가르침

  

   

1. 자아인식

2. 기도의 어려움 극복 방법

3. 관상과 덕의 상호 관계성

4. 진정한 일치의 의미

 

 

"하나님과의 일치"를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영혼에게 필요한 가르침을 정리해 볼 것이다.

먼저 하나님 앞에 인간의 자기 인식은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기도를 행함에 있어 어려움으로 다가오는 분심, 무미건조의 극복 방법을 살펴볼 것이며, 하나님과의 진정한 일치(합일)의 의미를 정리하기 위해 관상과 덕 실천의 상호 관계성을 정리할 것이다. 이를 통해 성녀 데레사에게 진정한 일치의 의미는 신비적 은총이 따르는 관상과 히나님의 뜻에 일치라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음을 알아보고 이를 행하게 하는 원동력이 바로 '사랑'임을 살펴보겠다.

 

 

1. 자아 인식

 

'하나님과의 일치'로 나아감에 있어 자아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성녀 데레사는 자아 인식(自我認識)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는 누구이고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그리고 하나님은 전부이시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식을 지니게 된다."고 하였다. 이런 인식은 영혼 안에 그 무엇으로도 어지럽힐 수 없는 겸손을 만들어 내고 하나님의 모든 선물을 이끌어 들이는 자세를 지닐 수 있게 한다."

 

다른 궁방으로 옮아서 날아가기에 앞서서 자아 인식의 자리인 이 궁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선 가장 급한 일이니 이것이 바로 제 길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고 힘쓰지 않으면 절대 자아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l2, 9).

보십시오, 자기 안으로 들어감 없이, 즉 자아 인식 없이, 우리의 비참과 아울러 주님께 받은 바를 생각하여 자비하심을 열심히 기도함이 없이 천국만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친 것입니다"(211).

 

이렇게 자아 인식은 영혼이 하나님을 알려고 힘쓸 때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 앞에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미약한지를 아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목적이시고 동시에 자아인식의 근원이시다. 대단히 중요한 이 실질적 표현은 영혼이 하나님께로 향함에 있어 하나님의 표징을 알게 함으로써 영혼으로 하여금 평화와 자유를 얻게 한다. 따라서 '자아 인식'은 적절히 강조되어야 하겠다.

성녀 데레사의 영성을 깊이 연구한 마리 에우젠 신부는 데레사의 '자아 인식''심리적 자아 인식''영성적 자아 인식'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었다. 그는 성녀 데레사가 자아 인식을 이야기할 때 인간적 측면을 무시하지 않고 충분히 설명하고 있지만 거기에만 머물지 않고, 영혼은 자신 안에 갇힌 인식이 아니라 구체적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자기를 보다 더 꿰들어 볼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1) 심리적 자아 인식

첫 번째 기능들의 구별은 성녀 데레사가 "자기 안에 하나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까닭입니다."라고 한 문장에서 살펴볼 수 있겠다. 사람은 복합적이고 활동적이며, 인간의 능력들 역시 여러 가지 감각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작용아래 이 운동의 격렬함은 기도에 있어 번민의 원인이 되었다.

두 번째 구별은 하나님의 활동이 성녀의 영혼 안에 두 가지로 구분되어 나타난다는 점이다. 하나는 외부적인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불안하고 그 안에서 상상력이 활동하고 있으며, 이 상상력은 이미지를 만들어 공급하고 추론하며 지성을 만드는 곳이다. 또 다른 내부적인 것은 내적이고 평화로우며 엄밀한 의미로 지성이 존재하고 영혼의 의지와 은혜의 샘으로 더욱 가까이 가도록 외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더욱 순종적으로 머물게 해 주는 것이다.

이런 외적 · 내적 구분은 '하나님과의 일치'로 나아감에 있어 내적 자세를 지키는 것에 대해 명확한 교훈을 주고 있다. 그것은 영혼의 토대가 하나님에 의해 휩싸일 때 가능하고 지성, 특히 상상력이 동원되는 동안에 일어난다.

 

2) 영성적 자아 인식

심리적 지식들은 영성에 있어서 고통과 어려움들을 피하기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성녀 데레사는 '심리적 자아 인식'보다는 '영성적 자아 인식'에 더 집중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심리적 자아 인식 역시 완덕으로 나아감에 있어 영성적 자아 인식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자아 인식 그 자체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며, 진정한 자아인식의 근원은 모든 덕의 기초인 겸손에 있다. 이런 자아인식은 결국 영혼에게 겸손을 길러 주고, 겸손과 함께 성장한다.

영성적 자아 인식은 '하나님 앞에 있는 우리 자신''초자연적 것에로 초대' 그리고 나쁜 성향들의 해악' 등에 대한 인식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먼저 '하나님 앞에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은 주님은 영원한 존재자이시고, 창조주로서 오셔서 시간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에 의해 존재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무한(無限)과 유한(有限)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이 무한의 심연에 대해 지성은 얼마간의 희미한 빛을 던져 주지만 이에 비해 신앙은 더 큰 빛을 준다. 하나님은 전부이시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 양면성의 인식은 영성 생활에서 기본적인 것으로, 겸손과 함께 발전된다.

두 번째 '자연적 것에로 초대' 인식이란 하나님 앞에 미소한 인간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창조되고 신적 삶에 초대받았다는 것이다. 성녀 데레사는 하나님의 딸(자녀)이라는 것을 인식했으며 그래서 사랑의 신적 사업을 할 수 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려 또한 완전함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하나의 금강석 혹은 '수정'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자신의 품위를 알아야 하며, 영혼의 위대함은 그 누구도 어떤 방법으로도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영혼에 관한 일이라면 항상 깊이와 넓이와 크기를 가지고 생각해야 됩니다. 영혼은 우리가 아무리 높이 평가하더라도 평가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과장이 있을 리없습니다"(I2, 8).

 

세 번째로 '나쁜 성향들의 해악'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모든 영성적 어려움은 성향들에 의해 연유된다는 점이다. 영혼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악의 세력들, 나쁜 성향, 원죄의 결과들은 그것이 경미하다 해도 하나님과의 합일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데, 성녀 데레사는 이런 어려움들을 통해서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싸울 것을 요구한다. 영성적 어려움은 오히려 영혼으로 하여금 고행(금욕)의 필요성을 알게 하고, 나쁜 성향들의 해악을 정확히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의 비참함을 계속 일깨워 줌으로써 영혼으로 하여금 더욱 순수하신 '하나님께로 일치'해 나가도록 부추기게 된다.

 

성녀 데레사는 "아무리 높은 관상이라도 그 기도는 '나를 앎'으로써 시작되고 끝나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곧 하나님께로 향하는 영혼이 하나님의 빛 아래서 자신에 대한 자아 인식의 노력을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고 힘쓰지 않으면 절대 자아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높고 높은 당신을 우러러보노라면 낮고 낮은 우리가 다가오는 것, 당신의 밝으심을 우러러보노라면 우리의 더러움이 보이는 것, 당신의 겸손을 익히 생각하노라면 겸손에서 아득히 먼 자신을 우리는 보는 것입니다"(I2, 9).

 

하나님의 빛 아래 획득된 자아 인식은 역시 하나님을 아는 것과 더불어 발전한다. 자아 인식은 겸손과 구분되지 않고, 인간의 상태가 신적 무한성 앞에 비참함을 드러내 준다. 그리고 자아 인식은 빛을 통해 진리가 증거 되도록 열망하게 한다. 이로써 영혼 안에 괴로운 후회가 자라고 동시에 그의 무능력의 감각과 결단력들은 가장 관대해지며, 사람들은 그것의 진실됨을 알게 된다. 자아 인식은 이렇게 '하나님과의 일치'로 향하는 영혼에게 하나님의 표징을 알게 하고 이 표징은 영혼에게 평화와 자유의 균형을 가져다준다.

 

 

2. 기도의 어려움 극복 방법

 

성녀 데레사는 기도의 초보자에게 분심 잡념과 매마른 상태는 충분히 예상되는 것으로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누구도 기도 여정 안에서 완전히 분심 잡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방법을 제대로 알고 기도해나간다면 그것을 감소시킬 수 있고, 또한 그것과 지지 않고 싸워나감으로써 보다 더 영적 진보를 이를 수 잇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의 초보자로 하여금 어려움들을 적절히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성녀는 자신의 저서들을 통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1) 분심

성녀 데레사는 완덕의 길에서 자신의 경우를 생각하며 분심(分心)으로 산란해진 영혼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세상이 무엇이냐, 일체는 어떻게 끝나느냐 하고 묵상을 합니다. 초탈을 배우자는 일인데도 거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우리는 어느덧 우리가 정붙이고 있는 무엇에 생각을 잠그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생각을 좇으려고 애쓰지마는, 그게 어떻게 되었나, 어떻게 될까, 나는 어떻게 했지, 무얼 해야되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헷갈리게 됩니다"(.19, 7).

 

우리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와 진정한 대화를 하려는 커다란 희망을 갖고 묵상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 것을 깨닫기도 전에 우리는 이러한 산란한 상념(想念)과 기억의 올가미에 걸려들고 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먼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분심을 신중히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대처법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먼저 '의식적 분심'은 고의적으로 끌어들였거나 또는 그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도 호의적(好意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런 의식적 분심은 불충실의 본성과 같기 때문에 분심에서 생각을 거두어 의지를 다시 예수님께로 돌리면 된다. 반면에 무의식적 분심은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그 횟수와 강도를 감소시키는 데 노력해야 하겠다.

분심의 근원은 각양각색으로 외부의 감각, 시각, 기도 준비의 미비, 거둠의 실패, 불완전한 상상, 좋지 못한 건강 상태, 피로 등등이 있다. 이런 분심에 대한 대책으로는 우리 자신의 감각을 더욱 신중하게 경계함으로써 싸워 나갈 수 있다.

내적 원인에 기인하는 분심들은 보다 세밀히 다룰 필요가 있겠다. 먼저 어떤 영혼들은 개인적 기질이 변덕스럽고 상상적경향이 강하다. 이런 이들은 일정 시간 어떤 주제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이들은 묵상기도 자체를 '무기력'하게 여기기도 하고, 묵상기도가 자기를 졸리게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반면에 다른 영혼들은 자신의 잘못이나 실패에 관해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는 경향을 지닌다.

이렇게 다양한 영혼들의 기질에 대한 분심 방책 요령은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 사랑의 열정과 우리 내적 기능에 대한 극기와 그리고 묵상기도의 주제(主題)에 보다 더 강력한 정신 집중을 하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영혼에게 성녀 데레사는 분심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중지하지 말고 의지만은 주님께 두고 꾸준한 기도를 할 것을 권고한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영적 결과를 보지 않으시고 영혼이 주님께 나아가려는 노력과 굳은 결심의 행위를 더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그전에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지성은 우리 영혼이 지니고 있는 능력 중의 하나인데 어찌 그리 침착하지 못한가하는 점이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상상은 곧장 날기가 일부여서 하나님만이 그것을 매어 두실 수 있는 것입니다. () 사실 평생을 두고 당하는 멸시와 고생을 다 합친대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 싸움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믿습니다. () 내가 하도 고생을 해서 그런지, 혹시 여러분도 그렇지 않은가 생각되고, 그렇다 치면 잡념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인 만큼 그 때문에 불안할 것도 괴로워할 것도 없다는 것을 기회가 닿는 대로 알려 드리고 싶었기에 말합니다. 떨걱대는 밀방아야 저 혼자 돌아가게 내버려 둡시다. 우릴랑은 지성과 의지를 쉴 새 없이 써 가며 우리네 방아나 찧읍시다. 이런 어려움은 건강이나 기후에 따라 더하거나 덜합니다. 가엾은 영혼이라, 제 탓이 아니라도 이 고역을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41, 8-13).

"영혼을 이른바 폭력으로 끌고 가는 무리를 하지 말고 가장 큰 진보를 위하여 부드럽고 고요하게 인도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 마음의 메마름이나 흩어짐, 그리고 잡념을 괘념치 않는다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11, 17).

"오랫동안의 고달픈 체험 끝에 내가 찾아낸 단 한 가지 약은 고요의 기도에서 말한 대로 상상력을 미치광이로 보고 제멋대로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17, 7).

 

2) 무미건조

무미건조(無味乾燥)상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데 있어 위안과 열망이 일시적으로 물러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건조 상태의 근원을 제거해야 한다. 영성 생활에 있어 무미건조의 세 가지 근원은 충분한 영적 발전의 결여, 본의 아닌 환경에 의한 것, 하나님에 의한 정화 행위로 구분된다.

첫째, 영성 생활에 있어서의 발전 결여는 그리스도께 우리의 사랑을 강화시키고 진전(達展)시킴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소죄나 미온 상태에 잠겨 있다면 우리는 묵상에서 무미건조함을 느낄 것이다. 이 문제의 해결은 미온적 상태를 극복하는 것이다.

둘째, 본의 아닌 생활환경에서 오는 건조함으로, 이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질병, 육체적 피로, 졸음, 근심, 편견, 오해, 유혹 등은 우리 힘이 미치는 데까지 극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남아 있는 것은 '인내심'으로 감수해야 한다.

셋째, 영혼의 정화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건조는 기도의 높은 단계에 오른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위로와 감각이 따르지 않는 기간을 주심으로써 생긴다. 이 기간은 영혼이 하나님과 더 밀접한 결합을 위해 '영혼의 정화'를 받고 있는 시기이다.

이렇게 세 가지 근원에 의한 무미건조함에 대해 성녀 데레사는 자서전에서 영적 진보를 위한 기도하는 이는 아예 영적위안을 찾지 말 것을 당부하며 그리스도께 대한 사욕(私慾) 없는 사랑을 드러내도록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그분을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바라보며, 사람으로서의 약함과 고통 가운데 계시는 그분을 봅니다. () 그렇다고는 하나 이것도 저것도 다할 수 없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영신적 위로를 찾지 않는 습관을 들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십자가를 얼싸안아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대단한 일입니다"(22, 10). "이 길에서 많은 진보를 얻고 우리의 소망인 궁방들로 올라가기 위하여 중요한 일은, 많이 생각하는 일이 아니고 많이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 아마도 우리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그다지 놀라지 많습니다. 사랑은 맛이 더한 데 있지 많고, 오직 더한 결심에 있습니다. 매사에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결심,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서 당신을 거스르지 않고, 당신 아드님의 크신 영광과 성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비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사랑의 표입니다"(41, 7).

 

'하나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영혼들이 기도의 여정 안에서 어떤 위안도 느끼지 못하는 무미건조함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의 시기를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사랑을 발전시키기 위한 놀라운 기회로 삼는다면 그리 고통스럽지만은 많을 것이다. 오히려 영적 진보의 과정 안에서 더욱 순수한 사랑의 일치로 나아가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3. 관상과 덕의 상오 관계성

 

성녀 데레사는 "비록 필수적이지는 않더라도 관상은 성화에 더욱 신속히 다가갈 수 있고 성화에로 이끌게 하는 효과적인 은총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의 의미는 영원한 생명의 상대적인 앞당김을 가능케 한다는 의미이다.

관상에로 나아가기 위해서 ''은 필수적이다. 사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향주삼덕(向主三德)의 성장 없이 '하나님과의 일치'란 불가능하다. 동시에 초자연적 관상 역시 이 세 가지 덕(믿음, 소망, 사랑의 덕)의 성장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선물이라 할 수 있다.

관상의 궁극적 목표는 '예수님과의 일치'이다. 데레사는 영혼의 성 마지막 궁방에서 예수님과 신비로운 일치를 이야기한다. 이 신비로운 합일은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영혼의 가장 그윽한 중심에서 이루어진다. 신비적인 은총의 목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분과 온전히 하나 되는 것이다.

성녀는 하나님이 영혼을 회개시키고 덕을 실천하도록 강화시키며, 관상 안에서 영혼을 비추기 위하여 뿌리신 모든 은총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성성(聖性)을 순수한 영예로 여겼다. 성녀 데레사에게 성성은 오로지 하나님과의 일치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에게 제자들을 위하여 청하였듯이 완덕은 우리 안에 하나님 생명의 실현에 있는 것이다.

관상의 두 번째 목표는 애덕의 완성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일치한다고 할 때 우리의 삶이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삶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성 토마스 역시 "신적인 사랑의 완덕은 모든 이들에게 질서 지어져 있고 이는 각자가 그 조건에 따라 수행해야 할 목표'라고 하며 '애덕 안에' 완덕이 있음을 말하였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이루어진 성화는 보다 순수한 활동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통은 다른 사람들 안에서의 삶이며 증여이며 봉사이다.

 

정리해 보자면 '하나님과의 일치'에 도달한 이들의 특징은 덕의 완성에 있다는 것이다. 만약 덕의 완성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관상은 착각에 불과하다. 따라서 성녀 데레사는 관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완덕에 도달함에 있어 다른 수많은 길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의지의 일치를 통하여 나아가는 평범한 길로서, 의지의 일치를 통하여 나아가는 이 길은 덕의 완성에로 향한 길이다. 즉 기도를 실천한다는 것은 기쁨을 향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힘을 지니기 위해서인 것이다.

결국 성녀 데레사는 자신의 영적 딸들에게 기도의 기초를 관상에만 두지 말고 덕 닦기에 힘쓰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영적결혼도 결국은 지상에서 성녀 데레사처럼 '사랑'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데레사는 그의 저서에서 기도하는 이에게 덕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덕 닦기를 힘쓰지 아니하면 여러분은 항상 난쟁이로 그냥 남을 뿐, 그나마 자라지 않는 것뿐이라면 차라리 낫겠지만 아시다시피 자라지 않는 것은 곧 쪼그라드는 게 아닙니까? 사랑이란 늘 같은 상태에 있으면서 만족할 수 없으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74, 9).

"할 일을 다하고 완덕을 닦으면서 관상을 위한 준비를 갖추십시오. 여러분의 이탈과 겸손이 순수하다면, 분명 주님께서는 관상을 주시리가 믿습니다"(.17, 7).

 

 

4. 진정한 일치(합일)의 의미

 

성녀 데레사에게 완덕의 상태(관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비적 은총 체험이 따르는 관상''하나님의 뜻에 일치'라는 두 가지 방법의 합일이 있다.

신비적 은총 체험이 따르는 관상은 모든 이들에게 열린 공통적인 길이며 비록 필수적이지는 않더라도 하나님 은총에 의한 가장 바른 지름길이다. 그러나 두 번째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려는 수덕의 노력은 비록 신비 은총이 뒤따르지는 않더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성녀 데레사 또한 두 번째 '하나님 뜻에 일치'라는 길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일치' 상태는 감미로운 현상에서 오는 것만이 아니라 덕 닦음을 통해, 즉 하나님 뜻에 자신의 의지를 일치시켜 나감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되어 완전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혼의 성 5궁방 33절에서 성녀 데레사는 진정한 합일의 뜻을 이렇게 정의한다. '진정한 합일이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는 데 마음을 두고 그렇게만 힘써 나아가면 주님이 도우시어 거뜬히 얻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름은 사랑에서 나오는 전적이고 친밀한 순종과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배하시거나 허락하시는 모든 일에 우려의 뜻을 합치시키는 데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근거는 바로 애덕에 있다고 본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의 뜻을 사랑받는 이의 뜻에 합치시키고, 또 완전한 순종은 우리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종속 시킬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두 가지 계명,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비록 그 표적은 뚜렸하다 해도 정확하게 그것을 알아낼 도리가 없다. 반면에 이웃 사랑은 비교적 잘 알 수 있다. 이웃 사랑을 뜨겁게 할수록 그만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확신해도 좋을 만큼, 이웃사랑만 완전하다면 할 일은 다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성녀 데레사에게 '하나님과의 일치' 척도는 '이웃 사랑의 정도'를 보고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웃 사랑만 잘 지켜 나가면 내가 이미 말한 합일을 주님께 받을 수 있으리라고 단언합니다. 하지만 이것에 결함이 있을 경우에 제아무리 경건의 정을 느끼고 합일에 도달했다 싶어도, 희열, 고요의 기도 중에서 정신 능력의 정지 같은 것을 경험해도 여러분은 아직 합일에 미치지 못한 것이니 내 말을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이웃을 완전히 사랑할 수 었는 은혜를 주님께 빌면서 일체를 그분께 맡기십시오"(53, 12).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숱한 성인들이 끊임없이 응시하고 수덕을 쌓았던 마지막 목표였다. 그들은 이것이야말로 완덕에 이르는 길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성녀 데레사에게도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최대한 깊이 일치하는 것은 '큰 즐거움'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고자 큰 결단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모욕하지 않고 당신 아들의 영예와 칭송이 커지도록 하나님께 청하여 다른 무엇보다 교회의 성장을 위해 전진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녀 데레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강조하였다. "일치된 신비는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권하는 것은 정신없이 황홀한 상태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일치입니다. 일치라는 이름은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치의 중요 가르침.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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