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생활에 관한 가르침

(praktikos)

 

 

 

 

 

1. 여덟가지 생각 (1~14)

2. 치료법 (15-33)

3. 욕정 (34~39)

4. 악령론 (40~53)

5. 수면 중에 일어나는 일 (54~56)

6. 아파테이아에 근접한 상태 (57~62)

7. 아파테이아의 징조 (63~70)

8. 실천적 교리 (71~90)

9. 교부들의 금언 (91~100)

맺음말.

 

  

 

I. 수행론 100

 

 

 

1. 그리스도교는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

침이다. 이 가르침은 '프락티케''쥐시케', 그리고 데올로기 케'로 구성된다.

 

1) 프락티케(praktike) 퓌시케(physike), 테올로기케(theotogike)는 에바그리우스에 따른 영성생활의 세 단계를 나타낸다. 프락티케(수행)는 이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고, 퓌시케는 테올로기케의 앞 단계로서 자연학(snosi!, physike)혹은 피조물에 대한 관상(theoria)이다. 테올로기케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 혹은 학문(신학)이다. 이것은 사변적 신학을 뜻하지 않는다. 뒤 두 단계는 함께 그노스티케(snostike)를 구성한다. 에바그리우스는이 책에서 프락티케에 대해 상론하기 전에 뒤에 나오는 두 장에서 퓌시케와 테올로기케를 정의한다. 여기서 그는 프락티케를 영성생활에 포함시키면서, 그 자체로는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SC 171, 498-9 참조).

 

 

2. 하늘나라는 실재들에 대한 참된 인식과 함께 영혼의 '아파테이아'.

 

2) 에바그리우스는 성경의 동일한 두 표현 '하늘 나라''하나님 나라'를 구분한다. 오리게네스도 '하나님 나라''그리스도의 나라'를 구분했다(Deoratione. 25 참조). 여기서 '하늘 나라'는 수행(praktike)의 목표인 아파테이아를 통해 도달하는 자연학, 혹은 존재들에 대한 학문(인식)이다. 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에서는 "하늘 나라는 존재들에 대한 관상"(KG V, 30)이라고 말한다. 에바그리우스가 여기서 "하늘 나라"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의 나라(왕국)'라고 부른다. '존재들에 대한 인식'은 영적 세계를 목표로 삼기 때문에 '하늘 나라'라는 성경의 표현은 적절하다(SC 171, 499-500 참조)

 

 

3. 하나님 나라는 정신의 능력으로 확대되며, 부패하지 않는 탁월한 능력을 정신에 부여하는 성삼위에 대한 인식이다.

 

3) 증거자 막시무스에 따르면, "사실 하늘 나라'는 피조물의 존재 이유들(λόγοι)에 따라 피조물에 대한 인식을 얻는 일로서 이것은 하나님 안에 미리 있지도 않고 섞여 있지도 않다. 반면, '하나님 나라'는 은총을 통하여 하나님 곁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선에 참여하는 일이다"(Centuries gnostiques II, 90, PG 90, 1168C). 이 세 장을 종합하면 이렇게 정리된다: "그리스도교는 하나님 나라, 다시 말해 성삼위에 대한 인식에로 인도해야한다. 선행하는 두 단계는 프락티케를 통해 얻는 아파테이아와, 존재들에 대한 인식 혹은 하늘 나라다"(SC 171, 503 참조)

 

 

4. 인간은 반드시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자기가 추구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분투한다. 모든 쾌락이 그런 갈망에서 비롯된다면 갈망은 감각에서 생겨난다. 감각에 종속되지 않는 사람은 욕정에서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4) 에바그리우스는 감각을 제일 앞에 두고 시작한다. 감각은 갈망과 다른 모든 욕정을 낳는다. 그러므로 아파테이아에 도달하려면 감각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달리 말하면 은둔(anachoresis: 세상으로부터의 분리)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다음 장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은둔이 악령으로부터의 피난처는 아니다. 따라서 은둔을 실천한다고 해서 욕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SC 171, 503 참조)

 

 

5. 악령들은 독수도승을 거슬러 노골적으로 싸운다. 반면, 수도원이나 공동체 안에서 완덕에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과 맞서 싸울 때는 형제들 가운데 가장 부주의한 이를 무기로 이용한다. 두 번째 싸움은 첫 번째 싸움보다 훨씬 더 수월하다. 지상에서 악령들보다 더 흉포하거나 그들의 모든 악행을 동시에 지지하는 사람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5) 악령들은 독수도승과는 중개자 없이 직접 맞서 싸우는 반면, 회수도승을 거슬러서는 사람들을 매개로 하여 싸운다. 여기서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통해 밝혀진 사막 영성의 근본 개념이 나타난다. "수도승은 고독 속으로 물러나면서 악령과 직접 맞닥뜨린다"는 생각이다. 악령들이 자기 대신 싸우도록 이용하는 사람은 악령 자체보다는 위험스럽지 않다. 어떤 사람이 악령만큼 분노나 악의로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사실 악령이 될 것인데, 에바그리우스의 형이상학에 따르면 이는 인간과 악령이 본성의 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악령들의 과도한 분노와 악의에 의해서 구분되기 때문이다(SC 171 ,505-6 참조).

 

 

 

1. 여덟 가지 생각(1~14)

 

6. 모든 생각을 포함하는 발생학적 생각은 모두 여덟 가지다. 바로 탐식 · 음욕 · 탐욕 · 슬픔 · 분노 · 아케디아헛된 영광 · 교만이다. 이 모든 생각이 영혼을 괴롭히느냐 괴롭히지 않느냐는 우리 능력 밖에 있다. 하지만 그 생각들이 영혼 안에 머무르느냐 머무르지 않느냐, 욕정을 일으키느냐 일으키지 않느냐는 우리에게 달렸다.

 

6) 발생학적(γενικώτατοι)'. 스토아학파가 욕정의 분류에 사용한 형용사로, 가장 일반적인 여덟 가지 생각이 다른 생각들을 낳는다는 뜻이다.

 

 

7. 탐식에 대한 생각은 수도승에게 위, , 비장, 수종(水腫)과 오랜 질병, 생존 수단의 결핍, 그리고 의학적 치료의 부재(不在)에 대한 염려를 불러 일으켜 금욕적 수행을 즉시 포기하도록 유혹한다. 또한 이 고통에 빠진 형제들을 자주 떠올리게 한다. 이따금 이런 고통을 겪는 사람을 설득하여 고행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접근하게 한 후, 자신의 불행을 드러내고 마치 금욕적 수행 때문에 자기가 그렇게 되어 버린 것처럼 이야기하게 한다.

 

7) 여기서 '생각'은 완전히 인격화되고 악령 자체와 동일시된다. 앞의 두 장과 마찬가지로 이 장도 요한 글리마쿠스에 의해 재인용된다(SC 171, 511 참조).

 

 

8. 음욕의 악령은 육체의 다양한 욕망을 자극하며, 고행을 실천하는 사람을 더욱 강하게 공격한다. 이런 고행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고 느끼게 만들어 고행을 중단시키기 위해서다. 이 악령은 영혼을 불순한 종류의 수행에 떨어지게 하고 영혼을 더럽히며, 마치 눈에 보이는 실체가 실재하는 것처럼 영혼에게 뭔가를 말하고 듣게 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9. 탐욕은 긴 노년과 손노동에 있어서의 무능력, 미래의 굶주림과 질병, 궁핍의 고통 그리고 사람들에게 생필품을 받는 데 따르는 수치심을 떠오르게 한다.

 

 

10. 슬픔은 갈망하는 것을 얻지 못한 데서 생기며 이따금 분노를 동반한다. 욕구의 결핍에서 기인한 슬픔은 이렇게 발생한다: 먼저 어떤 생각들이 영혼을 가정과 부모에 대한 기억이나 이전 삶에 대한 기억으로 이끈다. 이런 생각들은 영혼이 저항 없이 그것을 따르며 본성상 정신적 쾌락에만 자신을 내맡기는 것을 보면서, 영혼을 사로잡아 슬픔에 빠지게 한다. 이는 영혼이 탐닉해 있던 이런 생각들이 더는 남아 있지 않은 데서 오는 결과다. 사실 그것들은 영혼의 현재 생활 방식 때문에 실재할 수 없다. 그래서 비참해진 불행한 영혼은 과거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힐수록 그만큼 더 의기소침해진다.

 

10) 요한 카시아누스의 경우 '슬픔''분노' 다음에 오는데, 이 순서는 심리학적 관찰에 토대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서 에바그리우스는 때때로 슬픔이 분노의 결과'라는 점을 단순하게 지적하고 있다.
'어떤 생각들': 여기서 이 생각들은 '악령들'과 동일시된다. 그것들은 연속적으로 작용하면서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첫째 부류는 이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도록 자극하여 '슬픔'을 낳게 한다. 둘째 부류는 또 다른 상황을 야기하는데, '실망'이다(SC 171, 516 참조).

 

 

11. 분노는 가장 격한 욕정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불의를 행했거나 행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 대한 흥분과 영혼의 동요다. 분노는 영혼을 온종일 성나게 하지만, 무엇보다 기도 중에 우리를 슬프게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정신을 빼앗는다. 이따금 오래 지속되고 격노로 바뀌면서 밤에 동요와 체력 소모, 창백함과 위험한 야수들의 습격을 야기한다. 격노가 야기하는 이네 가지 결과는 많은 생각을 동반한다.

 

11) 기도의 순간에 분노가 야기하는 표상들에 관해서는 23장과 여러 악한 생각에 관하여 27, 그리고 기도론 45장을 참조하라. 밤의 공포와 악몽들은 영혼의 정념부의 동요인 분노를 통해서 일어난다. 그리고 체력소모는 두려움의 영향을 받는다(SC 171, 519-20 참조).

 

 

12. '정오의 악령'(91:6 참조)이라고도 부르는 아케디아(akedia)12-1)의 악령은 모든 악령 가운데 가장 사악한 놈이다.12-2) 그는 제4(오전 10)경 수도승을 공격하여 제8(오후 2)까지 수도승의 영혼을 포위한다. 먼저 그는 태양이 더디게 움직이거나 멈추어 버린 것처럼, 마치 하루가 50시간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또 수도승이 시선을 계속 창밖으로 향하도록, 독방에서 밖으로 뛰쳐나가도록, 9(오후 3)12-3)가 됐는지 알려고 태양을 주시하도록, 형제들 가운데 누군가오고 있는지 보려고 두리번거리며 살피도록 부추긴다. 그런 다음 수도승에게 그의 거처와 단조로운 일상, 그리고 손노동에 대한 혐오를12-4) 불러일으킨다. 형제들 사이에 사랑이 사라졌고 자기를 위로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시기에 누군가 그를 슬프게 한다면, 악령은 이것도 혐오를 더하는 기회로 이용한다. 또한 악령은 필요한 것을 쉽게 얻을 수 있고 작은 노력으로 더 큰 수익을 남길 수 있는 다른 일터에 대한 갈망을 수도승 안에 불러일으킨다. 어디서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4:21-24 참조)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장소에 달려 있지 않다고 그를 부추긴다. 악령은 이런 생각에다 부모와 옛 생활 방식에 대한 기억을 결부시킨다. 그는 수도승의 머릿속에 인생은 길고 영적 수행은 수고스럽다는 생각을 불어넣는다. 한마디로 악령은 수도승이 독방을 떠나 이른바 경기장(고전 9:24 참조)12-5)에서 달아나게 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이놈을 따라올 악령은 어디에도 없다. 반면 영혼이 승리하면 영혼 안에 평화와 형언할 수 없는 기쁨(벧전 1:8참조)이 생겨난다.

 

12-1) 아케디아(ἀκηδία)'영적 태만' 혹은 '영적 무기력'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는 독수도승생활에 연결된 영혼의 한 상태다. 이 장은 아케디아에 대해서 언급하는 요한 카시아누스의 제도서 10권뿐 아니라, 요한 클리마쿠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정오의 악령'이라는 표현은 시편 91:6에서 유래한다(SC 171, 521-2 참조)

12-2) 가장 사악한 놈(βαρύτατος): 직역하면 '가장 무거운 놈'이다. 이 표현은 에바그리우스 이래 전통적으로 아케디아의 악령을 특징 짓는다.

12-3) 고대 수도승들은 하루 한 끼 식사했는데 그 시간이 바로 제9시였다(참조: AP, 안토니우스 34, PG 65, 85 D 88 A: AP. 마카리우스 33. PG 65, 276 C). 아케디아에 빠진 수도승은 식사 시간을 기다리며 자주 태양을 주시하곤 했다.

12-4) 손노동에 대한 혐오는 아케디아의 특징적 면모 가운데 하나다. 손노동을 혐오할 때 아케디아는 게으름으로 나타난다. 요한 카시아누스는 이를 제도서 10권에서 더 상세히 언급한다.

12-5) '영적 투쟁'을 의미한다.

 

 

13. 헛된 영광에 대한 생각은 매우 미묘하여 덕스러운 사람에게 쉽게 스며든다. 헛된 영광으로 인해 수도승은 자신의 투쟁을 공적으로 드러내고 사람들에게서 오는 영광을 추구한다. 이것 때문에 수도승은 울부짖는 악령들과 치유된 여성들과 그의 겉옷을 만지는 군중을 상상한다. 또한 그에게 사제직을 예언하고 그를 만나려고 문 두드리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그들이 어떻게 그릇된 길로 빠져 포로가 되는지 보여 준다. 수도승이 이런 식으로 헛된 희망에 사로잡힐 때, 이 악령은 사라지고 그의 희망을 거스르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교만이나 슬픔의 악령에게 그를 넘겨준다. 때로는 수도승이 포로가 되고 거룩한 사제가 되기 직전에 그를 음욕의 악령에게도 넘긴다.

 

13) '사람들에게서 오는 영광'(참조: 살전 2:6; 5:44; PT 머리말 3) 영혼을 사로잡는 이 악령은 자신의 투쟁을 공적으로 드러내고 싶어 하고 영광을 추구한다.
'울부짖는 악령들': 수도승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악령들.
'그의 겉옷을 만지는': 하혈하는 여자가 치유되기 위해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는 행위다(5:27 참조).
'그에게 사제직을 예언하다':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과 다른 수도승 원전들은 겸손 때문에 사제직을 거부하다가 강제로 사제직을 수여받는 수도승들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 가운데는 켈리아의 사제가 된 이삭 압바도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가 에바그리우스를 주교로 축성하기 위해서 그를 데려갔지만, 에바그리우스는 도망쳤다. 이런 행동은 고대 교회에서 하나의 관습으로 널리 정착되었다.
'그를 만나려고 문 두드리는 사람들': 그에게 영적 조언을 구하려고 찾아오는 사람들.
'이 악령은 사라지다': 43장 끝 부분과 같은 표현이다.
'교만의 악령에게 그를 넘겨주다': 헛된 영광과 교만의 악령을 연계하는 문제는 여덟 가지 영 17('헛된 영광의 현존은 교만을 알린다')에서 더 강하게 묘사된다(SC 171, 528-31 참조).

 

 

14. 교만의 악령은 영혼을 가장 심한 타락으로 이끈다. 실제로 이 악령은 영혼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가 선행의 원인이라고 믿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런 면모를 몰라주는 형제들을 어리석은 자로 여겨 그들에게 거만을 떨게 한다. 분노와 슬픔이 이 악령에 뒤따라온다. 마침내 가장 큰 질병이 그에 잇따라 오는데 허공에서 악령의 무리를 보는 정신착란이다.

 

 

 

2. 치료법

) 15-33장은 여덟 가지 주요 악습에 적용할 치료법을 다룬다.

 

15. 독서와 밤샘, 그리고 기도는 산만한 정신을 안정시킨다. 굶주림과 수고와 고독은 불타는 갈망을 잠재운다. 시편 낭송과 인내와 자비는 흥분한 영혼을 진정시킨다. 그러나 이 모든 수행은 적절한 때 적당한 정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극단적으로 무리하게 행해진 것은 잠시밖에 지속되지 못한다. 잠시 지속되는 것들은 오히려 해롭고 무익하다.

 

15) 이 장은 뒤이은 장들에 비해 일반적 특성을 지니고 영혼의 세 부분에 따른 다양한 치료법을 제시한다.
수고(κόπος)'. 손노동뿐 아니라 생활양식의 엄격함이나 불편 등을 뜻한다. 이집트 수도승생활에서 이에 대한 근본적인 언급은 사막교부들의 금언집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수도승생활을 코포스(κόπος)로 정의한다(참조:AP, 난장이 요한 37; 포이멘 44)

 

 

16. 우리 영혼이 다양한 음식을 갈망할 때, 빵과 물의 양을 줄일 것이다.16-1) 포만16-2)은 다양한 음식을 갈망하는데, 허기는 빵만으로 채우는 것을 복되게 여긴다.

 

16-1) '빵과 물을 절제할 것이다'로 이해해도 된다. 스케티스와 켈리아의 수도승들에게 이것은 통상적 관습이었다. 요한 카시아누스의 담화집에는 하루 양식으로 작은 빵 두 개, 즉 한 리브라(libra)로 한정된다(담화집 11,19 참조). 한 리브라는 약 300그램이다. 여기서는 포만을 피하기 위해 소비량을 줄일 것을 권고한다. 포만은 다양한 음식을 갈망하게 하는 탐식의 악령에서 오는 유혹들에 떨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요한 클리마쿠스도 이장을 일부 인용하고 비평한다(천국의 사다리 14 참조).

16-2) 탐식의 치료법은 포만을 피하는 것이다.

 

 

17. 물을 적게 마시는 것은 절제에 큰 도움을 준다. 기드온과 함께 미디안을 정복한 삼백 명의 이스라엘인을 보면 납득이 간다(판관 7:5-7 참조).

 

17) 물을 적게 마시는 것은 음욕의 치료법이기도 하다 수도승을 위한 권고에도 음욕을 피하려면 물을 적게 마시라는 권고가 나온다. "저울에 너의 빵을 달고 네가 마시는 물을 측정하여라. 그러면 음욕의 영이 너에게서 달아날 것이다"(AM 102). 이집트 수도승들의 역사에는 에바그리우스가 방문객들에게 물을 과하게 마시지 말도록 권고했다고 한다. 악령들은 물이 있는 곳에 줄곧 드나들기 때문이다(SC 171, 543 참조)

 

 

18. 삶과 죽음이 한 사람에게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 불가능하듯, 사람에게 사랑과 재물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사랑은 재물의 파괴자일 뿐 아니라 현세 생활 자체의 파괴자이기도 하다.

18) 사랑은 부와 현세 생활의 파괴자이므로 이 단어의 바오로계 의미로 사랑은 일종의 죽음이다. 이 단어를 통하여 우리는 정신의 참된 삶인 '인식'에 도달한다. 사랑은 '인식의 문'이기 때문이다(SC 171, 546-7 참조)

 

 

19. 모든 세속적 쾌락을 멀리하는 사람은 슬픔의 악령이 접근할 수 없는 망루다.19) 슬픔은 실재하거나 갈망하는 쾌락의 결핍이다. 우리가 지상의 어떤 대상들에 애정을 쏟는다면 이 적을 몰아내기란 불가능하다. 우리가 쓰러지는 것을 보면 악령은 바로 거기에 올가미를 놓아 슬픔을 만든다.

 

19) 세상의 쾌락에서 도피하는 것이 바로 슬픔의 치료법이다. 슬픔은 갈망하는 것의 결핍에서 유래한다. 쾌락은 갈망에서 시작된다(PT 4 참조)

 

 

20. 분노와 미움은 증오심을 키운다. 동정과 온유는 있는 증오심조차 감소시킨다.

 

20) 20-26장까지는 분노에 관한 것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이 악습에 큰 비중을 두면서 그 위험성을 보여 준다. 이 장에서 그 이유가 제시된다. , 분노는 영혼의 정념적 요소인 튀모스(thymos)를 증대시키며, 우리를 악령과 같은 상태로 이끄는 효력을 지닌다. 사실 악령은 영혼의 정념부를 지배하는 단순한 이성적 존재다. 온유는 분노에 반대된댜(SC 171, 548-9 참조)

 

 

21. 해 질 때까지 분노를 품고 있지 마라. 이는 밤에 악령들이 다가와 영혼을 공포에 떨게 하거나 다음 날의 전투에서 정신을 더 소심하게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4:26 참조). 영혼의 동요는 자연히 무서운 환상을 일으킨다. 정신을 도망자로 만드는 데 동요하는 영혼보다 나은 것은 없다.

 

21) 안토니우스는 수도승들에게, 바울 사도가 에베소인들에게 말씀하시는바(4:26: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풀고 있지 마십시오")를 계속 묵상하라고 권고한다. 그에게 이 권고는 분노뿐 아니라 모든 일반적 형태의 과오에 대해서도 유효하다(안토니우스의 생애 55 참조). 영혼의 정념부가 방해받으면 정신의 정상적 활동, 곧 관상에 지장을 초래한다(KG V.27 참조)

 

 

22. 영혼의 정념부가 번번이 변명하며 몹시 동요할 때, 악령들은 고독이 아름답다고까지 속삭이며 우리가 슬픔의 원인을 해결하기보다는 동요를 피하도록 유혹한다. 그러나 욕망부가 달궈질 때, 반대로 악령들은 우리가 사교적이 되거나 거칠고 사나워지도록 부추긴다. 이는 우리가 육체의 욕망을 느끼는 동안 육체에 걸려 넘어지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순종하지 말고 오히려 그 반대로 행해야 한다.

 

22) 켈리아의 반()독수도승 에바그리우스는 수도승들에게 고독 속에서도 형제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으라고 권고했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이중의 행동이 권고된다. 어떤 수도승이 분노와 같은 욕정에 시달릴 때는 고독을 추구하는 것이 위험하지만, 반대로 음욕의 악령에게 공격받을 때는 고독으로 나아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이처럼 에바그리우스는 악령이 제시한 것과 반대의 행동을 하라고 권고한다.

 

 

23. 그대를 슬프게 한 사람과 마음으로 다투면서 자신을 분노에 넘기지 마라. 또 계속 쾌락을 꿈꾸면서 음욕에 넘기지도 마라. 그것은 한편으로는 영혼을 어둡게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욕정에 불타도록 영혼을 초대한다. 이 두 경우 모두 그대의 정신을 오염시킨다. 기도 중에 환상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순수한 기도를 바치지 못하면 그대는 즉시 아케디아의 악령에 떨어지게 된다. 이 악령은 무엇보다 이런 상태에서 나타나며, 개의 모습으로 새끼 사슴과 같은 영혼을 갈기갈기 찢는다.

 

23) 분노는 음욕과 마찬가지로 정신을 더럽히고 기도를 방해한다. 분노의 악령을 통해서 아케디아에 떨어지며 기도의 방해물이 생겨난다(기도론 21-27 참조)

 

 

24. 정념부의 본성은 악령과 싸우는 것이며 어떠한 쾌락에도 맞서는 것이다. 따라서 천사들은 영적 쾌락과 그것에 따라오는 지복을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우리의 정념부가 악령과 대적할 것을 권고한다. 반면에 악령은 우리를 세속적 욕망으로 유인하면서 정념부가 본성에서 벗어나 사람들과 다투도록 강요한다. 이는 혼미해진 인식과 쇠퇴한 정신이 덕의 반역자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24) 이 장에서 에바그리우스는 정념부의 자연적 활동과 본성에서 벗어난 활동을 구별하고 있다. 영혼의 욕망부나 육체 자체와 마찬가지로 영혼의 정념부는 본디 선한 것이고, 악령과의 싸움에서 인간을 도와주도록 부여된 것이다. 이 부분은 자연적으로 쾌락을 거슬러 싸운다. 영적 쾌락이란 그노시스(gnosis: 영적 인식 혹은 학문)를 뜻하며, 그 다음에 '지복'이 온다. 이 장은 요한 클리마쿠스의 천국의 사다리(PG 88, 985 A-B)에서도 재론된다(SC 171, 556-7 참조).

 

 

25. 그대 자신을 살펴라(15:9 참조). 이는 그대가 형제들 중 누군가를 화나게 하여 떠나가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그대가 기도할 때 늘 걸림돌이 되는 슬픔의 악령으로 인해 삶에서 도망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25) 오로지 분노를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하는 것에 대해서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하는 것도 기도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6. 선물은 화를 가라앉힌다. 야곱을 보면 알 수 있다. 야곱은 선물로써 장정 사백 명과 함께 자기를 만나러 온에서 아우의 호의를 구하였다(32:7 참조). 그러나 가난한 우리는 식탁으로 결핍을 보충한다.

 

26) 분노의 치료법에 관한 마지막 장이다. 앞 장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분노로 시작하고 있다. '선물은 화를 가라앉힌다'는 구절은 잠 21:14("몰래 주는 선물은 화를 누그러뜨리고 품속에 감춘 뇌물은 거센 분노를 가라앉힌다")에서 영감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여기서의 치료법은 환대다. 환대는 화해하는 데 좋은 수단이 된다(4M 15 참조).

 

 

27. 아케디아의 악령에 떨어질 때 우리는 눈물과 더불어 영혼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하나는 위로하는 부분이요, 다른 하나는 위로받는 부분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좋은 희망을 심고(살후 2:16 참조), 거룩한 다윗과 함께 "내 영혼아, 어찌하여 녹아내리며 내 안에서 신음하느냐? 하나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 나의 구원, 나의 하나님을"(42:6-7)이라고 노래한다.

 

27) 27-29장은 아케디아의 치료법에 관해 논한다. 그 첫째가 '눈물'이다.

 

 

28. 유혹의 순간에 그럴듯한 변명으로 독방을 떠나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항구하게 독방에 앉아 있으면서 모든 공격자, 특히 아케디아의 악령을 용감히 맞아들여 대적해야 한다. 이놈은 모든 공격자 가운데 가장 고약하며, 무엇보다도 영혼을 가장 괴롭힌다. 사실 이 싸움을 멀리하고 여기서 도피하는 것은 정신을 무능하고 비겁한 겁쟁이로 만든다.

 

28) '앉아 있다', 고요히 머물다(καθσθαι)'. 독방을 지키며 헤시키아(hesychia)에 머무는 수도승을 묘사하는 수도승 문학의 고유 용어다(4P, 무릅쓰고 독방에 머물러 있는 수도승의 덕목으로, 아케디아의 치료제다(SC 171, 564 참조)

'무능하': 무능한 이유는 악령을 대적하는 기술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 기술은 체험을 통해 얻는다.

아케디아의 또 다른 치료법은 '독방 안에서의 항구함'이다. 에바그리우스가 12장에서 말한 대로 아케디아의 악령은 외관상 여러 합리적 인 구실들을 꾸며 수도승이 독방에서 나가도록 부추긴다(AM 55 참조) 이 장은 요한 클리마쿠스의 주석에서 인용된다(PG 88, 1104 B 참조)

 

 

29. 거룩하고 매우 실천적인 우리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수도승은 마치 내일 죽을 것처럼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하지만, 마치 오랜 세월 육체와 함께 살아야 하는 것처럼 육체를 사용해야 한다." 그분은 또 말씀하셨다. "전자는 '아케디아'의 생각들을 뿌리 뽑고 수도승을 더욱 열심하게 하며, 후자는 그의 육체를 건강하게 지켜주고 늘 한결같은 고행을 유지시킨다."

 

29) 매우 실천적인(πρακτικώτατος): 프락티케(praktike)를 완수한 사람, '생각'과의 투쟁에서 승리하고 아파테이아에 도달한 사람을 표현하는 말이다. "늘 한결같은 고행"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이런 사람은 사변적 탐욕주의자가 아니다. 에바그리우스는 "매우 실천적인 스승"으로, 주님께서 '택하신 도구'인 이집트의 마카리우스 원로(PT 93 참조)를 상정한다.

아케디아의 또 다른 치료법은 '죽음이 임박했음을 생각하는 것'이다(안토니우스의 생애 l9 참조). 게으른 자가 되지 않으려면 "나는 날마다 죽음을 마주하고 있습니다"(고전 15:31)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유익하다. 실제로 우리가 날마다 죽음을 마주하고 산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아케디아는 수도승에게 "인생이 얼마나 긴지"(pnz) 역설한다. 아케디아를 몰아내고 항구함(ύπομονή) 안에서 견고해지려면 인생의 덧없음을 묵상해야 한다. 안티레티코스(Antirrhetikos) VI, 25에서는 아케디아에 맞서 시 103:15("사람이란 그 세월 풀과 같아 ")를 낭송하라고 한다.

'열심하다': 안토니우스의 생애 19장에 나오는 생각과 동일하다. 거기서 동사 아케디안(άκηδιν)'열성의 부족'이라는 아케디아(άκηδια)의 고전적 의미만 지니며, 에바그리우스적 의미는 없다.

'고행을 유지시킨다': 매일 죽음을 준비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에바그리우스에게 금욕적 수행(askesis)은 육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프락티케의 훈련에 필요한 것이다(SC 171, 566-71 참조)

 

 

30. 헛된 영광의 악령은 피하기 힘들다. 그것을 물리치려고 그대가 행하는 것 자체가 그대에게 헛된 영광의 새로운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올바른 생각에 반대하는 것은 악령만이 아니다. 종종 우리가 빠지는 악습도 그러하다.

 

30) 30-32장은 헛된 영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면 헛된 영광을 치료하기 힘들다.

'그대가 행한 것 자체': 헛된 영광을 쫓아내기 위해서 우리가 드러내는 겸손의 표시도 헛된 영광의 새로운 원인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빠지는 악습': 우리에게 습관을 낳는 악습을 뜻하는 스토아학파의 용어로, 에바그리우스에게 자주 등장한다. 이장의 첫 부분은 금욕적 작품들에서 자주 인용된다(SC 171, 571-2 참조).

 

 

31. 나는 헛된 영광의 악령이 거의 모든 악령에게 쫓긴다는 것과, 자신을 추적하는 악령들이 몰락할 때 넉살 좋게 접근하여 수도승 눈앞에 제 덕행의 위대함을 드러낸다는 것을 깨달았다.

 

31) 헛된 영광의 또 다른 측면이다. 에바그리우스는 '나는 깨달았다'라는 형식을 빌려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표현한다. 헛된 영광에 대한 생각과 다른 생각들, 특히 음욕에 대한 생각은 양립되지 않는다(PT 58 참조).

 

 

32. 인식을 얻고 거기서 기쁨을 얻은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의 모든 쾌락을 제시하는 헛된 영광의 악령의 꾐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사실 무엇이 영적 관상보다 더 큰 것을 그에게 약속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그 인식을 미처 맛보지 못했다면, 하나님 인식에 도달하는 우리의 목표를 위해 우리가 온갖 노력을 다하는 모습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면서 열심히 수행에 전념하자.

 

32) 덕의 진보와 더불어 헛된 영광의 위험이 증가된다면(PT 31 참조). 우리가 인식 혹은 영적 관상에 도달할 때 그것은 결정적으로 물러간다. 영적관상의 달콤함만이 헛된 영광을 물리칠 수 있다. 그러나 프락티케는 그것이 사람들로부터 오는 영광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인식'이라는 자연적 목적을 향해 정향되는 조건에서 헛된 영광을 거슬러 유효하다(SC 171, 574-5 참조)

 

33. 그대의 옛 삶과 과거의 잘못들, 그리고 그대가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어떻게 그리스도의 자비를 통하여 아파테이아로 건너갔는지, 그대가 버리고 떠나온 세상이 얼마나 자주 그대를 비참하게 했는지를 기억하라. 또한 생각하라: 누가 그대를 사막에서 보호했는가? 누가 그대를 거슬러 이를 가는 악령들을 몰아냈는가? 이런 생각들은 겸손을 낳고 교만의 악령을 허용하지 않는다.

 

33) 교만의 치료법은 '과거의 잘못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기억'이다. 옛 삶이란 수도승생활을 시작하기 이전 삶을 말한다(참조: PT 10; 12). 옛 삶에 대한 기억은 슬픔과 아케디아의 원인으로 여겨진다. "그리스도의 자비를 통하여"란 표현은 두 번째 부분에서 생각이 발전됨을 알려 준다. 에바그리우스에게 교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PT 14 참조).

 

 

 

3. 욕정(34~39)

 

34.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욕정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우리가 이전에 그 대상을 욕정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반대로 우리가 욕정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대상은 우리에게 욕정적인 기억을 가지게 할 것이다. 그래서 맹렬히 활동하는 악령을 물리친 자만이 그가 사용하는 수단을 무시한다. 왜냐하면 비물질적 싸움이 물질적 싸움보다 더 어렵기 때문이다.

 

34) 34-39장은 욕정을 일으키는 원인과 구조에 대해 언급한다. 4장에서 에바그리우스는 감각을 욕정의 기원으로 보았는데, 여기서 그것을 명확히 한다. , 욕정의 기원은 사물과의 접촉을 통한 직접적인 것일 수도 있고 기억의 중개를 통한 간접적인 것일 수도 있다. 후자는 주로 신분상 사물과는 거리가 먼(PT 5 참조) 독수도승에게서 나타난다. 그들에게 욕정의 기원은 무엇보다도 그것을 일으키는 생각이다(PT 6 참조)

'욕정적인 기억'은 생각에 소재(素材)를 제공한다. '생각''사물'에 반대된다고 하는 48장을 참조하라. 67장에서는 '사물''기억'이 대립 관계에 있다.

'맹렬히 활동하는 악령': 사물을 매개로 수도승을 죄로 이끌려고 애쓰는 악령을 말한다(PT 48 참조).

'그가 사용하는 수단': 기억을 매개로 악령들이 일으키는 생각.

'왜냐하면 ‥‥ 더 어렵기 때문이다': 이 구절과 앞 구절을 연결하는 생각은 다음과 같다. , 비물질적 싸움(생각과의 싸움)에 직면하기 전에 사물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하는데, 이는 전자가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다. 이 생각은 이미 5장에 나타나며 48장에도 다시 나온다(SC 171, 578-80 참조).

 

 

35. 영혼의 욕정은 사람에게서 오는 반면 육체의 욕정은 육체에서 온다. 육체의 욕정은 고행으로 제거되고, 영혼의 욕정은 영적 사랑으로 근절된다.

 

35) '영혼의 욕정''육체의 욕정'의 구분은 다음 장에도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육체의 욕정'은 육체의 자연적 요구에서 생겨난다. 탐식과 음욕에서 일어나는 이 욕정의 치료법은 고행이다(참조: PT 16; 17).

'영혼의 욕정'은 분노처럼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겨난다(참조: PT 11;23).

 

 

36. 영혼의 욕정을 다스리는 악령들은 죽도록 집요한 반면 육체의 욕정을 다스리는 악령들은 보다 쉽게 물러선다. 뜨고 지는 해와 같은 다른 악령들은 영혼의 한 부분에만 들러붙는 반면, 정오의 악령(91:6 참조)은 보통 영혼 전체에 들러붙어 정신을 억압한다. 이 때문에 독수도승생활은 욕정을 제거한 후에야 감미롭다. 욕정을 제거한 후에는 순수한 기억만 남게 되고, 이제부터 수도승의 전투는 더 이상 싸움이 아닌 싸움 자체에 대한 관상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36) 앞장에서처럼 '영혼의 욕정''육체의 욕정'을 구분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그들 행위의 지속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혼의 욕정을 지배하는 악령은 결코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영혼의 욕망부를 공격하는 악령들은 육체의 욕정을 지배하는 악령이고, 영혼의 정념부를 공격하는 악령은 영혼의 욕정을 지배하는 악령이다.

'정오의 악령': 아케디아를 말한다(PT 12 참조)

'기억': 아파테이아에 도달한 영혼은 그를 괴롭히는 '기억'을 더는 가지지 않는다(PT 67 참조).

'관상으로 나아가다': 욕정에서 자유로워진 영혼은 더는 악령에 맞서 싸우지 않고, '그 싸움의 이유'를 관상할 수 있다(PT 83 참조). 계명 준수는 각 계명에 부합하는 관상을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PT 79 참조). 악령에 맞선 싸움은 영적 전투의 한 부분일 뿐이다(SC 171, 582-3 참조).

 

 

37. 표상이 욕정을 일으키는가, 아니면 욕정이 표상을 일으키는가? 이는 숙고를 요한다. 어떤 사람은 첫째 견해를 취하고, 또 다른 사람은 둘째 견해를 취한다.

 

37) 표상이 욕정을 불러 일으킨다는 이 첫째 견해는 스토아학파의 견해인 듯하다. 욕정이 표상을 일으킨다는 둘째 견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De animd)에 나타난다. 이 두 견해 중 어느 것을 받아들이느냐는 에바그리우스 이전에 이미 논쟁거리였다. 에바그리우스는 이 두 견해를 경우에 따라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SC 171, 584-5 참조)

 

 

38. 욕정은 감각을 통해서 발생한다. 사랑과 고행이 있다면, 욕정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욕정은 그것들이 없을 때 생겨날 것이다. 영혼의 정념부는 욕망부보다 더 많은 치료법을 필요로 한다. 이 때문에 사랑이 위대하다는 것이다(고전 13:13 참조). 사랑은 정념부의 제동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위대한 성인 모세가 자연에 대해 다루는 중에 '오피오마케스'라고 상징적으로 부른 것이다.

 

38) 욕정의 감각적 기원에 대해서는 4장을 참조하라.

'사랑과 고행''. '사랑'은 영혼의 욕정(thymos)에 반대되며, '고행'은 육체의 욕정(épithymiα)에 반대된다(PT 35 참조). 모든 욕정은 영혼의 정념부와 욕망부에서 유래하는데, 이 두 부분은 에바그리우스가 '영혼의 욕정부'라고 칭한 부분을 이룬다. 고행이 욕망부를 치유하듯, 사랑은 정념부를 치유한다(KG III, 35 참조: "인식은 정신을 치유하고, 사랑은 정념부를, 고행은 욕망부를 치유한다"). 욕망부는 보다 빠르게 치유된다(PT 36 참조)

'정념부의 제동기(制動機)': 이 표현은 전통적인 은유다. "영혼은 고행을 통하여 그 욕망부를 억제하며, 온유를 통하여 정념부를 억제한다"(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서간 19). 여기서 '온유''사랑'을 뜻한다. 모세는 탁월한 형태로 이 덕을 소유했다.

오피오마케스(ΟϕιομάΧης, Ophiomakes)'. '뱀과 싸우는 사람'. 11:22에서는 "각종 메뚜기"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필론은 '오피오마케스'를 우의적으로 해석하여, 무절제와 쾌락에 맞서 불굴의 전투와 끝없는 싸움으로 이끄는 고행을 나타내는 데 이 단어를 썼다(SC 171, 586-9 참조)

 

 

39. 악령에게서 악취가 날 때, 영혼은 생각을 거슬러 흥분하는 습관이 있다. 그때 영혼을 괴롭히는 자의 욕정에 영향 받은 영혼은 그가 다가오는 것을 감지한다.

 

39) '악령에게서 나는 악취': 안토니우스의 생애에서도언급된다(안토니우스의 생애 63 참조). 악령은 자신의 악취로 우리 안에 욕정을 일으킨다. 우리는 욕정이 감각(PT 38 참조) 혹은 기억을 통해(PT 34 참조) 일어날 수 있음을 보았다. 이 장에서는 이 둘에 악령이라는 세 번째 것이 부가된다. 에바그리우스는 스켐마타(Skemmata) 59에서 이렇게 말한다. "욕정들 가운데 어떤 것은 기억을 통해서, 다른 것은 감각을 통해서,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악령들을 통해서 생겨난다." 우리가 그런 욕정에 영향 받았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악령의 접근을 감지한다.

'생각을 거슬러 흥분하다': 우리에게 접근한 악령이 제시한 생각을 거슬러 분노로 반응하는 것이다(PT 42 참조).

'영혼을 괴롭히는 자의 욕정': 영혼을 괴롭히는 악령이 통괄하는 욕정을 말한다(SC 171, 590-1 참조).

 

 

 

4. 악령론 (40~53)

) 에바그리우스는 생각에 관한 일련의 장들(6-33)과 욕정에 관한 일련의 장들(34-39)에 이어서 악령에 관한 가르침을 제시한다(40-53).

 

40. 모든 상황에서 일상의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매 순간 주의하고, 받아들인 계명들을 가능한 한 실천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있다. 사실 악령들도 이런 기회를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다. 따라서 악령은 우리를 거스른 욕정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가능한 것을 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행하도록 강요한다. 악령은 병자가 고통에 감사하고 봉사자에게 참을성을 보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또 병자가 쇠약해도 고행을 실천하도록 권고하며, 몸이 무거워도 선 채로 시편을 바치도록 권고한다.

 

40) 규칙(κανών): 기록된 규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 스케티스와 니트리아의 수도승적 환경에서는 기록된 규칙이 없었고, 수도승에게 부과된 삶의 규정만 있었을 뿐이다. 이 지침은 통상 스승들의 가르침과 전통에 의해 정착된 관습들이었다(요한 카시아누스 담화집 11, 18-22 참조). 여기서 제시된 권고, 즉 상황을 고려하면서 규정을 완화하라고 하는 권고는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 나타나는 가르침과 일치한다. 가령, 투병이나 손님 환대 같은 예외적인 경우에는 단식을 중단하는 것을 허락한다. 우리는 팔라디우스를 통해, 에바그리우스 자신이 생애 마지막까지 위장병을 앓고 있었고, 익힌 채소를 섭취하려고 자신의 일상 규정을 변경했음을 알고 있다(HL 38 참조). 에바그리우스는 다른 작품에서, 수도승에게 자신의 능력에 부치는 금욕을 행하도록 강요하는 악령의 유혹에 대해 언급한다(여러악한 생각에 관하여 25: 이 작품은 닐루스(Nilus)의 작품 가운데 편집되었지만, 대부분의 필사본 전통과 동방 전통에서는 에바그리우스의 이름으로 전해진다. 이 작품은 '생각'들의 관계 · 형성 · 발전 · 구조 등에 대한 매우 깊고 풍부한 분석을 담고 있다. 참조: PG 79, 1200D-1233 A; 안티레티코스 I, 37).

 

 

41. 도시나 마을에 얼마간 머물며 세속인들을 가까이해야 할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열심히 절제하도록 하자. 이는 현실 상황으로 인해 무뎌지고 부주의해진 우리 정신이 원하지 않은 무언가를 하게 되고, 악령의 공격을 받아 도망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41) 수도승이 고행을 완화해야할 상황이 있는 반면(PT 40참조) 그것을 강화해야 할 때도 있다.

'도시나 마을에':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을 통해서 우리는 니트리아의 수도승들이 가끔 인근 마을이나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AP, 테오필루스 3 참조). 이집트 수도승들의 역사의 저자는 에바그리우스가 자주 알렉산드리아로 갔다고 전한다.

세속인들(koσμικοί): 수도승들(μοναχί)에 반대된다(PT 48 참조).

'무뎌진': '욕정으로 인해 무뎌진 정신'(기도론 50). 수도승을 위한 권고 48장에도 같은 비유가 나온다: "과도한잠은 정신을 무디게 한다." 에바그리우스에게 이 표현은 은유적인 것이 아니다. 무뎌짐은 정신이 타락한 결과다.

'도망자': 자신의 일, 즉 관상을 포기한 정신(참조: PT 21; 28)에게 적용되는 표현이다(SC 171, 595-6 참조)

 

 

42. 그대가 유혹받을 때 그대를 괴롭힌 놈에게 분노에 찬 말을 하기 전에는 기도하지 마라. 사실 그대 영혼은 생각들을 통해서 영향 받았다. 결과적으로 기도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그러나 그대가 적에게 분노에 찬 말을 한다면, 그대는 그가 제시한 표상을 깨뜨려 사라지게 한다. 이것이 분노의 자연적인 효과이기 때문이다. 좋은 표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42) '그대를 괴롭힌 놈': 싸움꾼에 비유된 악령을 말힌다(PT 72 참조). 여기서 제시된 방법은 '반박'이다.

'분노': 23장에서 정신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겨진 분노가 여기서는 악령이 불러 일으킨 악한 생각을 쫓는다. 이는 분노의 선용(善用)이다. 실제로 악령과 싸우는 것은 영혼의 정념부가 지닌 본성이다(PT 24 참조)

'영향받은': 30장 참조. 영혼이 악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 기도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23장을 참조하라.

'사라지게 한다': 분노는 표상들을 사라지게 한다. 분노가 정신을 어둡게 하기 때문이다(PT 23 참조). 분노를 잘 사용하면 악한 생각에 결부된 것들을 박멸할 수 있다. "모든 악마적 생각은 감각적 사물의 표상을 영혼에 소개한다"(여러 악한 생각에 관하여 2).

 

 

43. 악령들 간의 차이점을 알고 그들이 다가오는 순간에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그 대상을 통해 알게 되는 생각으로써 이를 알게 될 것이다. , 악령들 중 어떤 놈이 가끔씩 오면서도 더 악질적인지, 어떤 놈이 꾸준하면서도 더 약한지, 어떤 놈들이 함께 들이닥쳐 정신이 신성을 모독하도록 유혹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생각이 그 대상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에, 또 우리의 고유한 상태에서 너무 많이 빗나가기 전에 우리가 악령을 거슬러 무슨 말을 하고 누가 현존하는지 알리기 위해 이러한 것들을 알아야 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빨리 진보할 것이며, 우리에게 놀라 분개하는 그 녀석들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43) '그 대상': 악령이 영혼에 소개하는 감각적 대상에 대한 표상을 말하는데, 이것은 육체나 외부 세계에서 유래한다. "생각들 가운데 어떤 것은 밖에서 그 대상을 취하고, 또 어떤 것은 육체에서 음욕의 대상을 취한다"(스켐마타 47).

악령에 효과적으로 대적하기 위해서는 그 정체를 알아야 한다. 악령의 정체는 무엇보다도 그의 행위에서, 그리고 공격 빈도와 방식에서 드러난다. 가장 고질적인 녀석은 아케디아의 악령이다(참조: PT 12; 28). 신성모독의 악령에 관해서는 46장과 51장을 보라. 51장에서는 신속함이 이 악령의 한 특성으로 제시된다. 각 악령의 행위와 습성에 대한 인식은 관찰을 통해서 얻는다(PT 50 참조).

'사라지다': 이것은 악령들에게 고유한 이미지다(PT 13 참조). 이 장과 안토니우스의 생애 22장을 비교해 보라.

 

 

44. 악령이 수도승과 맞서 싸우면서 무력해지면, 약간 물러나 덕들 가운데 어느 것에 소홀한지 살핀다. 그리고 소홀한 부분을 틈타 갑자기 들이닥쳐서 불행한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44) 악령들의 이러한 술책은 기도론 47장에서도 묘사된다. 악령들은 영혼의 약점을 이용한다(PT 19 참조).

'불행한 영혼': 악령의 희생물이 된 영혼이다(PT 10 참조).

 

 

45. 사악한 악령은 자기보다 더 사악한 악령을 불러들여 자기를 돕게 한다. 성질이 서로 반대되는 악령들도 오직 영혼의 파멸을 위해서는 일치한다.

 

45) '사악한 악령': '사악한'은 전통적으로 악령을 묘사하는 형용사다(6:13 참조) 에바그리우스에게 악령은 '사악함'으로 정의되며, 사악함의 정도에 따라 다양한 단계가 있다.

'더 사악한': 11:26에서 무의식적으로 차용한 표현인 듯하다.

'서로 반대되는 악령들': 가령 '영예를 허락하는' 헛된 영광의 악령과 '수치심으로 이끄는' 음욕의 악령과 같은 것이다(PT 58 참조). 악령들이 서로 반대되는 것은 우연이다. 사실상 그들은 일치한다(SC 171, 602-3 참조).

 

 

46. 정신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감히 형언하지 못할) 금지된 것을 상상하도록 유혹하는 불순한 악령에 동요되지도 말고 우리의 열정을 무디게 하지도 말자. 주님은 '마음을 아시는 분'(1:24; 15:8 참조)이시며, 우리가 세상에 있었을 때조차 그러한 광기로 미치지 않았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이 악령의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단념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를 우리 주 하나님 앞에 서 있지 못하게 하고, 우리가 불경한 생각을 했던 분을 향해 감히 손을 펴 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46) 하나님을 모독하도록 유혹하는 악령이 바로 교만의 악령이다. 그리고 금지된 것에 대한 상상은 신성모독의 악령이 제시한 생각이다. 가자의 도로테우스는 신성모독과 교만의 관계를 강조했다.

우리 마음이 정화되지 않았을 때도 우리가 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생각이 우리에게서 오는 것이 아님을 아신다(SC 171, 604-5 참조).

신성모독의 악령은 기도에 반대된다(안티레티코스 VIII, 20 참조)

'서 있는 것''손을 펴 드는것'은 기도의 자세다.

 

 

47. 발설된 말이든 육체의 돌발적 움직임이든, 그것은 영혼 안에 현존하는 욕정의 표징이다. 이 표징을 통해 원수들은 그 생각이 우리 안에 있는지, 우리가 그 생각 때문에 괴로워했는지, 우리 구원을 염려하여 그 생각을 쫓아 버렸는지 감지한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우리 정신을 아시며, 그분이 마음 안에 감추어진 것을 아는 데는 표징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47) 악령은 관찰을 통해서 우리를 안다(P7-44 참조). 한 편지에서 에바그리우스는, 다양한 악령이 그들 각각에 부합하는 욕정이 우리 안에 있는지를 알기 위해 우리 언행을 어떻게 관찰하는지 예를 들어 모사했다(SC 171, 606-7 참조).

 

 

48. 악령은 세속인과는 주로 사물을 통해 싸우지만 수도승과는 생각을 통해 싸우는 경우가 더 잦다. 사실 수도승은 고독으로 인해 맞싸울 사물이 별로 없다. 행동으로보다 내적으로 죄짓는 것이 더 쉬운 만큼, 내적 싸움이 사물을 통해 행해지는 싸움보다 더 어렵다. 정신이란 쉽게 동요되고, 금지된 상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기 힘든 무엇이기 때문이다.

 

48) 세속인(koσμικός)은 수도승(μοναχός)과 반대 개념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에바그리우스에게서 분명하게 드러나며 그 이후에 자주 나타난다(참조: PT 41; AM 34; 78; 113).

'사물 ‥‥ 생각': 이 장에서 에바그리우스는 '사물'을 통한 싸움과 '생각'을 통한 싸움을 엄밀하게 구분한다. '사물'은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는 것이며, '생각'은 무엇보다도 고독을 통하여 '사물'에서 분리된 수도승이 아는 것이다(PT 43 참조). 에바그리우스는 '생각'(PT 43 참조) '기억'(참조: PT 34; 67) 꿈의 환상(PT 64 참조) 같은 감각적 실재(참조: PT: 8; 10; 89)로서의 '사물'에 반대한다.

정신이 '쉽게 동요되는 것'(요한 카시아누스 담화집 VII, 4 참조)이라는 견해는 탈레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철학의 전통적 가르침이다(5C 171, 609-10 참조).

 

 

49. 우리는 일하고 밤샘 기도를 하고 줄곧 단식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 대신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살전 5:17)라는 법이 있다. 사실 영혼의 욕망부를 치유하는 이 명령을 준행하는 데는 육체도 필요하다. 우리 육체는 연약하여 그러한 노고를 넉넉히 감당해 내지 못한다. 그러나 기도는 싸움을 위해 정신을 강하고 순수하게 한다. 정신은 이 육체 없이도 기도하기 위하여 자연적으로 만들어졌고, 또 영혼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악령과 싸우기 때문이다.

 

49) 악령에 맞서 싸울 수 있게 하는 손노동, 철야, 단식 같은 수행들은 대부분 지속적으로 실천될 수 없다. 오직 기도만 지속될 수 있고, 또 사도 바울의 계명(살전 5:17)에 따라 그리되어야 한다.

'영혼의 욕정부'(참조: PT 74; 78; 84): 정념부와 욕망부로 이루어진 총체(PT 38 참조)'

기도를 통해서 강화된 정신': 65장은 정신이 아파테이아의 표지들 중 하나를 드러낼 때 강하다고 말한다.

'기도하기 위하여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정신': "기도는 정신에게 고유한 활동을 수행하도록 해 준다"(기도론 83). 에바그리우스는 영혼이 순수하여 육체 없이도 존재에 대한 관상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KG IV, 70 참조).

'이 육체': 통상적으로 에바그리우스는 우리가 이 지상에서 가지고 있는 육체, 곧 인간 육체를 뜻한다(PT 53 참조).

'악령과 싸우다': 악령에 맞선 싸움은 특히 정념부의 본성에서 일어난다(PT 24 참조). 그러나 '적대 세력에 맞서 작전을 지휘하는 것(참조: PT 89; 73)은 정신의 덕인 현명의 역할이다. '영혼의 모든 능력': 정신 자체뿐 아니라, 영혼의 욕정부라 불리는 정념부와 욕망부도 포함한다(SC 171, 611-3 참조).

 

 

50. 어떤 수도승이 경험을 통해 잔혹한 악령들을 알고 그들의 기교에 익숙해지려면, 그로 하여금 생각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그것이 강렬한지 느슨한지, 뒤섞여 있는지, 언제 일어났다 사라지는지 파악하게 하라. 그래서 어떤 악령이 이런저런 생각을 일으키는지, 어떤 악령이 다른 악령 뒤에 오는지, 어떤 악령이 다른 악령을 따르지 않는지 주목하게 하라. 또 그 이유들을 그리스도에게서 찾게 하라. 사실 악령은 관상적 방법으로 수행에 전념하는 사람을 매우 못마땅해 한다. 그들은 "마음 바른 이들을 어둠 속에서 쏘려"(11,2)하기 때문이다.

 

50) 43장에서처럼 여기서도 에바그리우스는 체험을 통하여, 특히 생각에 대한 관찰을 통하여 악령의 행위를 알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악령들의 기교': 흔히 에바그리우스는 이 말을 '교활한 술책을 행하는 기술'이라는 뜻으로 쓴다 안토니우스의 생애 11장에도 나온다. '어떤 악령이 다른 악령 뒤에 오는지' 예컨대 분노의 악령과 슬픔의 악령은 교만의 악령을 따르지 않고(PT 14 참조), 헛된 영광의 악령은 교만의 악령과 슬픔의 악령에서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PT 13 참조). 그리고 아케디아의 악령은 분노와 음욕에 대한 생각들 뒤를 따르지만, 다른 어떤 악령도 아케디아의 악령을 따르지는 않는다(PT 12 참조).

'그 이유들': 83장과 89장에서처럼 여기서도 로고이(λογοί)그는 철학적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존재 이유들(λογοί)에 대한 관상은 영적 인식을 구성하며(참조: PT 2; 3), 그것은 에바그리우스가 여기서 명확히 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다. 에바그리우스는 '어둠''영혼의 무지', 욕정적인 생각이라고 설명한다(SC 171, 614-6 참조).

 

 

51. 이 관찰을 통하여 그대는 악령들 중 두 놈이 매우 빨라서, 우리 정신의 움직임을 앞지른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들은 음욕의 악령과 우리를 신성모독으로 유혹하는 악령이다. 그러나 둘째 놈은 잠시 지체하는 반면, 첫째 놈은 그가 일으키는 생각들이 욕정으로 자극되지 않는 한, 하나님 인식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51) 악령에 대한 인식은 관찰에 근거한다. "오랜 관찰을 통해서 우리는 천사적인 생각, 인간적인 생각 그리고 악령에게서 오는 생각들 간에 이러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러 악한 생각에 관하여 7).

'우리를 신성모독으로 유혹하는 악령': 43장과 46장에도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생각은 욕정 없이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PT 34 참조). 욕정 없이 생각을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 인식에 이르는 데 필요한 조건인 아파테이아(PT 67 참조)를 소유한다(SC 171, 617-8 참조)

 

 

52. 육체를 영혼에서 분리하는 것은 오직 그것들을 결합한 분에게만 속한다. 그러나 영혼을 육체에서 분리하는 것은 덕을 지향하는 사람에게도 속한다. 우리 교부들은 죽음에 대한 훈련과 육체에서의 탈출을 '아나코레시스'라고 불렀다.

 

52) '그것들을 결합한분': 시리아어판에서 명확히 가리키듯이 이는 '창조주'를 뜻한다. 그분은 영혼으로 전락한 타락한 정신에 육체를 결합했다. 쉰데인(συνδείν)은 육체와 영혼의 결합을 통상적으로 표현하는 동사다(KG I, 58 참조).

'영혼을 육체에서 분리하다': 이는 덕행을 실천함으로써 영혼을 정화하는 것이다. 플라톤 사상에 그 기원을 둔다.

아나코레시스(ἀναχώρησις, anachoresis): 에바그리우스는 일반적으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를 통해서 알려지고 그리스도교 금욕을 나타내는 '철학적'이란 단어를 프락티케의 선행 조건인 아나코레시스로 대체한다(SC 171, 619-21 참조). 아나로레시스는 '은둔' 혹은 '세상에서의 분리'를 뜻한다.

 

 

53. 자신의 육체를 너무 잘 양육하는 우()를 범하는 사람과 육체를 돌보면서 육체의 욕망을 자극하는 사람은 육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책망해야 한다. 이 육체를 수단으로 영혼의 아파테이아를 획득했고, 어느 정도 피조물에 대한 인식을 얻는 사람은 창조주의 은총을 알기 때문이다.

 

53) 타락한 정신에 육체가 주어진 것은 정신의 선을 위한 것이며 정신의 구원을 돕기 위한 것이다. 영혼의 아파테이아를 얻기 위하여 프락티케를 실천하는 육체는 정신에게도 유익하다. 사실 타락한 정신이 영적 인식에 도달하고 어느 정도 피조물에 대한 인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육체 덕분이기도 하다. '이 육체'라는 표현은 에바그리우스가 '인간 육체'를 나타내기 위하여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다(SC 171, 622-3 참조)

 

 

 

5. 수면 중에 일어나는 일 (54~56)

) 제목이 보여 주듯이 54-56장은 꿈에 관한 것이다. 영혼의 건강과 아파테이아와의 관계를 통해서 영혼의 상태를 진단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이 책의 후반부가 시작된다. 에바그리우스는 악령이 생각을 통해 수도승 안에 일으킨 욕정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지 보여 준 다음, 우리가 아파테이아에 도달했는지 알 수 있는 표지들을 언급한다.

 

54. 악령이 수면 중 환영을 통해 영혼의 욕망부를 공격할 때, 그는 우리에게 친구들과의 만남, 친척들과의 연회, 여자들의 가무 그리고 쾌락의 산물인 다른 모든 유사한 광경을 보여 준다. 우리가 이 환영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면, 욕망부에서 우리는 병들고 욕정은 강해진다. 한편 악령이 정념부를 괴롭힐 때, 그들은 우리에게 험한 길을 따라가도록 강요하며, 거기서 무장한 사람과 독성을 지닌 야수와 육식의 맹수들을 만나게 한다. 이런 짐승과 사람들에 놀라 달아날 때, 우리는 영혼의 정념부에 신경을 쓴다. 그리고 밤샘 기도 중에 그리스도께 기도하면서 앞서 언급된 치료제들을 사용한다.

 

54) 탐식의 악령이 제시한 생각들과 비교하라(안티레티코스 I, 36, 39, 40, 41)

'우리는 병든다': 아파테이아가 영혼의 건강이라면 욕정은 영혼의 질병이다(PT 56 참조). 에바그리우스는 욕정을 영혼의 질병에 대입하면서, 육체의 질병을 진단하는 꿈에 관해 히포크라테스가 말한 바를 원용한다.

악몽과 무서운 환영은 분노의 악령이나 슬픔의 악령이 영혼의 정념부를 괴롭할 때 생긴다(참조: PT 11; 21).

수면 중의 환영 앞에서 고요히 머무는 것은 아파테이아의 한증거다(PT 64 참조).

 

 

55. 수면 중에 육체의 자연적 움직임이 환영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 영혼이 어느 정도 건강하다는 뜻이다. 반대로 환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영혼이 건강하지 않다는 표지다. 그것이 불명확한 모습이라면 옛 욕정의 표지로 여기고, 분명한 모습을 띤다면 최근공격의 징후라고 생각하라.

 

55) '육체의 자연적 움직임': 몽정(夢精)을 뜻하며, 요한 카시아누스 담화집 XII, 7에도 같은 의미로 '육체의 자연적 움직임'(naturalis motus camis)이 언급된다.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서도 육체의 세 가지 움직임을 구분하는데, 첫째 자연적 움직임, 둘째 음식과 음료의 과도한 섭취가 일으키는 움직임, 셋째 악령들이 일으키는 움직임이다(참조: AP, 안토니우스 22; 안토니우스의 서간 1,4).

영혼의 건강은 아파테이아 상태를 뜻한다(PT 56 참조). 자연적 움직임이 일어날 때 에로틱한 꿈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혼이 아파테이아에 도달했다는 증거다. 그러나 에바그리우스에게 완전한 아파테이아(PT 60 참조)는 이런움직임을 모른다. '움직임들'의 원인은 두가지다. 첫째, 욕망부의 방탕. 이 경우 움직임은 표상을 동반하며, 여전히 아파테이아에서 거리가 먼 사람의 문제다. 둘째, 몸 안의 지나친 수분. 이 경우 금욕가는 물을 적게 섭취함으로써 치료될 수 있다(PT 17 참조). 요한 카시아누스는 수면 중 에로틱한 표상의 부재(不在)'순결함'의 한 표지라고 말한다(제도서 VI, 10. 22 참조).

 

 

56. 우리는 낮에는 생각을 통해서, 밤에는 꿈을 통해서 아파테이아의 표지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아파테이아를 영혼의 건강이라고 말한다. 반면, 영혼의 양식은 인식인데, 이는 인식만이 우리를 거룩한 능력들에 결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 존재와의 결합은 천사들과 비슷한 자질을 갖춤으로써 자연히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이다.

 

56) 악령들은 주로 생각을 통해서 욕정을 불러 일으키므로(PT 6-39 참조), 낮에는 생각을 통해서, 밤에는 꿈을 통해서 아파테이아가 인정된다. 이는 앞의 두 장에서 전개된 생각이다.

'아파테이아는 영혼의 건강': 욕정이 영혼의 병이라는 개념에 바탕을 둔 스토아학파의 정의다. 아파테이아에 대한 이 정의는 에바그리우스의 용어론에 자주 등장한다(참조: KG I, 41; II, 48; III, 46; VI, 64).

'영혼의 양식은 인식': 인식은 영혼을 아파테이아 상태로 유지하고, 영성생활에 나아가게 한다. 이장의 마지막은, 영적 인식이 우리를 천사들과 일치시키며, 우리가 천사들과 같다는, 다시 말해 완전한 아파테이아 상태에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우리를 거룩한 능력들에 결합시키다': 이 표현은 천사들이 천부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인식에 도달한 사람은 인간의 상태에서 천사의 상태로 건너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SC 171, 631-3 참조).

 

 

 

6. 아파테이아에 근접한 상태 (57~62)

) 57-62장은 아파테이아에 근접한 상태와 낮은 차원의 아파테이아 형태에 대해서 다룬다.

 

57. 영혼의 평화 상태가 둘 있는데, 하나는 자연적인 씨앗들로부터 유래하며, 다른 하나는 악령들이 물러감으로써 온다. 첫째 상태에는 겸손, 통회, 눈물,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열망 그리고 노동에 대한 엄청난 열성이 따른다. 반면, 둘째 상태에는 허영심과 교만이 따르는데, 이는 수도승을 넘어뜨리려던 악령들이 사라질 때 나타난다. 그러므로 첫째 상태에 항구한 수도승은 악령의 습격을 더 재빠르게 알아차릴 것이다.

 

57) '영혼의 평화 상태': 다름 아닌 아파테이아다. 에바그리우스는 여기서 두 종류의 아파테이아를 구분하고 다음 장들에서 그 본성을 규정한다.

'자연적인 씨앗들(원인들)': 덕들을 뜻한다. 에바그리우스는 덕들이 우리 안에 자연적으로 뿌려진 씨앗들이라는 스토아학파의 사상을 받아들인다.

'악령들이 물러감'(PT 44 참조): 다른 악령들이 물러갈 때 교만의 악령을 수반한(PT 13 참조) 헛된 영광의 악령이 다가온다(PT 31 참조)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열망': 기도론 118장에 "분심 없이 기도하는 정신(아파테이아에 도달한 정신:PT 63 참조)은 복되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보다 큰 갈망을 품는다"라는 은유적 표현이 나온다.
'알아차리다': 83장 마지막 부분("아파테이아를 획득한 사람은 적들의 술책을 쉽게 알아차린다")과 비교해 보라. 아파테이아를 얻은 사람은 악령과 '싸우는 이유'를 알기에, 이제부터는 '인식을 가지고 싸운다(PT 50 참조).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참된 아파테이아에 도달한 사람, 즉 덕의 토대위에 굳건하게 서 있는 사람을 뜻한다(SC 171, 635-7 참조)

 

 

58. 헛된 영광의 악령은 음욕의 악령에 대립한다. 둘이 동시에 영혼을 공격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전자는 명예를 약속하고, 후자는 불명예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둘 중 하나가 접근하여 그대를 압박하면, 이에 대립하는 악령에 대해서 생각하라. 그대가 격언처럼 못(걱정)으로 못(걱정)을 쫓아낼 수 있다면, 그대가 아파테이아의 경계에 가까이 있는 줄로 알아라. 그대 정신은 인간적 생각으로 악령의 생각을 사라지게 할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겸손을 통하여 헛된 영광에 대한 생각을 몰아내거나 절제를 통하여 음욕에 대한 생각을 몰아내는 것은 가장 심오한 아파테이아의 증거일 것이다. 서로 대립하는 다른 모든 악령에도 이 방법을 적용하라. 그대가 어느 욕정에 가장 많이 영향을 받는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급적 하나님께 둘째 방법으로 적을 쫓아 달라고 청하여라.

 

58) 여기서는 서로 대립하는 악령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PT 45 참조).

'못으로 못을 쫓아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가 인용한 격언이다. 이 격언은 에바그리우스 이후, 그의 영향 하에 성녀 신클레티카의 생애라우수스의 역사에서 다시 발견된다. 요한 카시아누스도 음탕한 생각을 몰아내기 위해 헛된 영광에 대한 생각을 활용하는 이 방법을 권한다(담화집 V, 12 참조). 그러나 요한 카시아누스는 이교의 지혜에서 취한 이 격언을 사 48:9의 인용으로 대체했을 뿐더러, 에바그리우스의 장에서 본질적인 생각을 제거했다. 에바그리우스에 따르면, 우리가 '인간적 생각으로 악령의 생각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면, 이것은 "아파테이아의 경계에 가깝다"는 한 표지다. 요한 카시아누스는 그것을 표지로서가 아니라 일종의 전술적 과정으로 언급한다.

'그대가 가장 영향을 받다':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욕정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오만한 생각이다. 이 장의 목적은 수도승에게 그가 어느 단계의 아파테이아에 도달해 있는지 알려 주는 생각과 맞서 싸울 기술을 제공하는 것이다(SC 171, 637-9 참조).

 

 

59. 영혼이 진보할수록 그만큼 더 많은 적대자가 영혼을 거슬러 일어난다. 나는 늘 같은 악령이 한 영혼 옆에 머무른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악령의 유혹을 보다 빨리 지각하는 사람과 자기가 획득한 아파테이아가 뒤이은 공격으로 흔들린 것을 보는 사람이 누구보다 이 점을 잘 알 것이다.

 

59) 아파테이아를 향한 영혼의 진보는 영혼을 공격하는 악령의 종류와 힘에서 가늠될 수 있다. 영지적 삶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유혹들에 직면해야 한다.

'나는 믿지 않는다': 에바그리우스의 개인적 체험에서 나온 말이다(SC 171, 639-40 참조).

 

 

60. 완전한 아파테이아는 수행에 반하는 모든 악령

과 싸워 승리한 후에야 영혼 안에 깃든다. 반면, 불완

전한 아파테이아는 여전히 영혼과 싸우는 악령의 능력

과 관련해서 언급된다.

 

60) '수행에 반하는 악령들': 84장에서 제시된 정의에 따라 영혼의 욕정부를 공격하는 악령들을 말한다. 그들은 영지적 활동, 곧 관상에 적대적인 악령들과 구분된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악령의 힘이 셀 경우, 아파테이아는 불완전하다. 반면, 완전한 아파테이아는 절대적이고, 그 정도(定度)를 모르며, 차후 어떤 악령도 영혼을 대적할 힘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점을 가정한다. 다른 곳에서 에바그리우스는 불완전한 아파테이아를 "작은 아파테이아"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완전한 건강'에 반대된다. 이 상태에 있는 수도승은 여전히 헛된 영광이라는 악령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여러 악한 생각에 관하여 15 참조).

 

 

61. 정신이 그 내면을 교정하지 않았다면 진보하지 못할 것이다. 또 이 아름다운 이주(移住)를 완수하여 영적존재의 영역에 도달하지도 못할 것이다. 내적 동요는 정신으로 하여금 자기가 남겨 놓고 떠나온 것들에 습관적으로 되돌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61) '정신이 그 내면을 교정하지 않았다면': "정신이 아파테이아의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면"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아름다운 이주': 영지적 삶으로 들어감을 말한다. 이 표현은 영적 이주에 관한 필론의 주제와 관련된다. 필론이 표상한 것은 아브라함의 이주였다.

'영적 존재의 영역에 도달하다': 영적 관상에 도달함을 뜻한다(KG I. 85 참조).

'되돌아가게 하다': 이 장은 "아파테이아의 경계"(PT 58참조)에 있는 상태를 묘사한다. 아파테이아에 도달한 수도승도 퇴보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도 여전히 내적 동요, 즉 영혼의 욕정부에서 동요를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SC 171, 642-3 참조).

 

 

62. 덕이든 악이든 그것들은 정신을 눈멀게 한다. 덕은 악을, 악은 덕을 보지 못하게 한다.

 

62) 정신이 악에 굴복할 때, 정신은 덕을 보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정신이 자신 안에 덕을 쌓으면, 다시 말해 정신이 아파테이아에 나아가면, 정신은 더 이상 악을 보지 못하고 욕정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무감각해진다(기도론 120 참조: "기도의 숙간에 완전한 '아파테이아'를 얻은 정신은 복되다"). 아파테이아를 통해 도달하는 이 '영적 무지'의 상태는 뒷부분에서 묘사된다. 특히 66장은 무감각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한다. 이 장은 요한 클리마쿠스의 천국의 사다리에서 재인용된다(SC 171, 644-5 참조)

 

 

 

7. 아파테이아의 징조 (63~70)

) 63-70장은 아파테이아의 고차원적 형태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는 정신의 무감각이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된다.

 

63. 정신이 분심 없이 기도하기 시작하면 영혼의 정념부 주변에서는 밤낮으로 온갖 전투가 벌어진다.

 

63) '분심 없이 기도하다': 관용적인 표현으로 69장과 기도론 17-18장에도 나온다: "분심 없는 기도는 지고한 정신 활동이다." 수도승이 더는 생각이나 사물에 대한 기억 때문에 분심 들지 않고 행하는 이 기도는 아파테이아의 한 표지다.

'정념부 주변': 에바그리우스에게 분노는 아파테이아에 도달한 사람, 영적 관상을 누리는 사람을 노리는 주된 유혹이다.

'': 정념부의 동요로 야기된 악몽을 암시한다(참조: PT 11; 54)

 

 

64. 정신이 그 고유의 빛을 보기 시작하고 수면 중에 나타나는 환영 앞에 고요히 머무르며 침착하게 그 사물을 바라보는 것은 아파테이아의 표지다.

 

64) '그 고유의 빛을 보다': 기도의 순간에 정신이 그 고유한 빛으로부터 얻게 되는 시력은 에바그리우스 신비주의의 본질적인 주제다. 이 시력은 여기서 "아파테이아의 증거"로서 제시된다.

'수면 중에 나타나는 환영 앞에서': 54장에서는 악몽 앞에서 고요히 있지 못함은 영혼의 욕정부가 병들었고, 또 그가 여전히 아파테이아의 상태에 있지 못한 하나의 증거로 간주된다(SC 171, 648-9 참조)

 

 

65. 세상 사물들 중 어떤 것에 관해서도 상상하지 않는 기도의 순간에 정신은 활기에 넘친다.

 

65) 분심 없이 기도하는 것(PT 63 참조)은 아파테이아의 한 표지다.

'활기에 넘친다': 자구적인 뜻은 '강화 된다'이다(PT 49 참조). 이는 영혼이 아파테이아에 이를 때 정신은 더 이상 자신의 고유한 활동을 방해받지 않는다는 뜻이다(SC 171, 650 참조).

 

 

66.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수행을 잘 완수하여 인식에 다가간 정신은 영혼의 비이성부를 거의 혹은 전혀 느끼지 않는다. 인식은 정신을 높은 곳으로 데려가 감각적인 것에서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66) '수행을 잘 완수하다'' 인식에 다가가는 데 필요한 조건인 아파테이아에 도달하는 것이다.

'영혼의 비이성부': 에바그리우스는 영혼의 '이성부'(PT 84 참조)에 반대하는 '영혼의 욕정부'에 대해 더 자주 이야기한다.

'거의 느끼지 못하다': 무감각과 관련된다. 인식을 맛본 사람은 세상의 쾌락에 무감각하다(PT 32 참조).

'인식은 정신을 높은 곳으로 데려가다'. 에바그리우스는 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에서 날개의 은유를 사용한다. "영적 인식, 이것은 정신의 날개다"(KG III, 56) 여기서 묘사된 상태는 저차원의 세계에 대한 무감각과 고차원의 세계에 몰입하는 황홀경, 혹은 무감각이다(SC 171, 651 참조).

 

 

67. 아파테이아를 소유한 영혼은 단지 변화하는 사물에만 방해받지 않는 영혼이 아니라 그 사물에 대한 기억 앞에서도 동요되지 않는 영혼이다.

 

67) 이 장은 64장에서 언급된 것을 명확히 한다. 아파테이아는 '침착하게 사물을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기억으로도 동요되지 않는 것이다. 사물과 거기에 부응하는 기억이나 생각 간의 구분에 대해서는 34장과 48장을 참조하라.

동요되지 않는(ἀτάραιος): 아파테이아와 같은 말이다. 타라케(ταραχη)는 영혼의 욕정부의 동요(PT 61 참조). 그리고 더 자주 정념부의 동요(참조: PT 21, 22)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장은 아파테이아에 대해서 다루는 요한 클리마쿠스의 천국의 사다리에도 익명으로 인용된다(PG 88, 1153 B 참조).

 

 

68. 완전한 사람은 고행을 실천하지 않고, 욕정에 초연한 사람은 인내를 훈련하지 않는다. 인내는 욕정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것이고, 고행은 충동으로 고통받는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68) 에바그리우스 사상의 구조에서 고행(encrateia)과 인내(hypomone)는 아파테이아 건너편에 있기 때문에 고행하고 인내하는 아파테이아의 사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SC 171, 653 참조)

 

 

69. 분심 없이 기도하는 것은 위대하다. 그러나 분심없이 시편을 낭송하는 것은 더 위대하다.

 

69) '분심 없이 기도하다': 63장 각주 참조.

'분심 없이 시편을 낭송하다': 이것은 분심 없이 기도하는 것보다 더 큰 아파테이아를 전제한다. 에바그리우스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시편은 여러 형태의 지혜에 속하지만 기도는 영적 인식의 전주곡이다(기도론85). 기도와 시편을 비교하려면 15장과 기도론J 82, 83, 87장을 보라.이 장은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에바그리우스 3에서 인용되었다(SC 171, 654-5 참조)

 

 

70. 자신 안에 덕을 확립하고 그것에 완전히 젖어든 사람은 율법이나 계명, 혹은 형벌에 대해서 더는 기억하지 않고, 탁월한 상태가 그에게 말하는 모든 것을 말하고 행한다.

 

70) 이 장은 68장에서 서술된 생각을 완성하고 명확하게 한다.

'탁월한 상태': 아파테이아를 말한다.

'더는 율법에 대해서 기억하지 않는다': 딤전 1:9("율법이 의인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에서 영감을 받은 듯하다(SC 171 ,656-7 참조)

 

 

 

8. 실천적 고려 (71~90)

) 71-90장도 아파테이아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71. 악령의 노래는 우리 욕망을 자극하고 영혼을 부끄러운 상상 속으로 던져 넣는다. 시편과 찬가와 영가(5:19참조)는 끓어오르는 정념을 식히고 욕망을 잠재우면서 정신을 덕행의 지속적 기억에로 초대한다.

 

71) '악령의 노래': 영혼을 파괴하는 효력을 지닌 악령의 노래는 욕망을 자극한다.

자극하다(κινοσι): 에바그리우스의 전문 용어(PT 6 참조).

'정신을 덕행의 지속적 기억에로 초대하다': 이는 결과적으로 정신을 아파테이아에 머무르게 한다(PT 10 참조).

'끓어오르는': 11장은 분노를 영혼의 '정념부의 폭발'15장은 시편 낭송을 흥분한 영혼의 치료제로 정의한다.

'욕망을 잠재우면서': 15장과 같은 표현이다(SC 171, 658-9 참조)

 

 

72. 공격하고 공격당하는 것이 싸움꾼의 일이라면, 악령이 우리를 거슬러 싸울 때, 우리를 공격하는 그들도 우리의 공격을 받는다. 시편 저자는 "제가 그들을 내리치자 그들은 일어서지 못하고 제 발아래 쓰러졌습니다"(18:39), "악인들이 내 몸을 집어삼키려 달려들지라도 내 적이요 원수인 그들은 비틀거리다 쓰러지리라"(27:2)고 말한다.

 

72) '우리를 거스른 악령의 투쟁'이란 표현은 에바그리우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이미지로서(참조: PT 36; 48; 49; 60) 악령의 영향력을 나타내기 위해(PT 42 참조) 사용된다. 이 장은 에바그리우스에게 있어 매우 흔한 형태인 삼단논법의 형식을 띠고 있다. 여기서 에바그리우스가 보여 주고자하는 바는 두 시편(18:39; 27:2) 인용을 통해 명확해진다(SC 171, 660-1 참조)

 

 

73. 안식은 지혜에 연결되고, 노고는 현명에 연결된다. 전투 없이 지혜를 얻을 수 없고 현명 없이 전투를 잘 이끌 수 없기 때문이다. 영혼의 능력들이 본성에 따라 움직이도록 강요하고 지혜의 길을 준비하면서 악령의 적의(敵意)에 대항하는 것이 현명의 역할이다.

 

73) 덕들 간의 연결, 특히 지혜와 현명과 아파테이아의 연결은 프락티케(수행)의 투쟁을 선에 이르도록 해 주는 덕이다.

안식(άνπαυσις)'. 이것은 프락티케의 노고와 고통에 따라오는 것으로 아파테이아를 뜻한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 언급되듯이 아파테이아 안에서 영혼의 능력들은 본성에 따라 움직인다(PT 86 참조). 현명은 영혼의 각 부분을 올바로 사용하도록 이끄는 덕과 같다(PT 88 참조).

'지혜': 89장에 따르면, 지혜는 육체적 존재와 영적 존재의 이유(창조 목적)를 관상할 수 있게 해 주는 덕이다. 따라서 지혜는 그노스티케의 훈련에 연결된다.

'현명': 89장에 따르면, 현명의 역할은 프락티케의 차원에서 적대자들과의 싸움을 지휘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악령의 적의에 대항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지혜와 현명의 덕에 대한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부합한다. 그에 따르면, 현명은 주로 행위의 덕, 실천의 덕인 반면 지혜는 원리에 대한 인식과 결부된 관상의 덕이다. 수도승을 위한 권고 68장과 비교하면 더 명확해진다(SC 171, 661-3 참조).

 

 

74. 정신을 어둡게 하는 '생각'은 수도승을 유혹한다. 이것은 영혼의 욕망부를 통해서 올라온다.

 

74) 74장과 75장은 유사한 형태이며 상호 보완적이다. 그노스티코스에도 유사한 장들이 있다: "영지의 유혹은 ‥‥ 이다"(GN 144)"영지의 죄는 ‥‥ 이다"(GN 145) 노스티코스에 언급된 영지(gnosis)프락티코스의 이 두 장에서는 '수도승'으로 대체되었다. 유혹에 대한 정의는 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 VI, 53("정신적 악행은 영혼의 욕정부에서 올라오는 악한 생각이다")과 비교하라. 이와 유사하게, 수도승을 위한 권고 70장에도 '수행은 유혹에 저항할 줄 아는 것'이라고 명확히 언급된다.

'정신을 어둡게 하다': 유혹(생각)은 관상을 중단시키기에 충분하다.

 

 

75. 수도승의 죄는 생각이 제시하는 금지된 쾌락에 동의하는 것이다.

 

75) '동의'. 스토아학파의 용어다. 에바그리우스가 죄에 부여하는 정의 는 스토아학파의 이론과 유사성이 없지 않다.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표상은 동의를 통해 행위로 이행된다. 생각(logismos) 자체가 죄의 원인은 아니다(SC 171, 663-4 참조)

 

 

76. 천사는 악이 감소할 때 기뻐하고, 악령은 덕이 감소할 때 기뻐한다. 천사는 자비와 사랑에 봉사하고, 악령은 분노와 증오에 복종한다. 천사는 가까이 다가와 우리를 영적 관상으로 채우고, 악령은 가까이 다가와 영혼을 부끄러운 상상 속에 던져 넣는다.

 

76) 프락히케를 실천하는 사람은 적대적 악령들의 공격을 받지만 천사들이 그를 보호한다(PT 24 참조). 천사들은 고행하는 사람들 때문에 기뻐하지만, 악령들은 흔들리는 사람들 때문에 기뻐한다.

'자비와 사랑 ‥‥ 분노와 증오': 사랑은 아팍테이아와 연결되기 때문에 천사들의 덕이다(PT 81 참조).

'영혼을 부끄러운 상상 속에 던져 넣는다': 71장과 같은 표현이다(SC 171, 664-5 참조)

 

 

77. 덕이 악령의 공격을 멈추게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무사하도록 지켜 줄 수는 있다.

 

77) 덕을 얻은 사람, 즉 아파테이아에 도달한 사람(PT 70참조)은 유혹을 인지하지만(PT 36 참조) 유혹으로 인해 피해를 입지는 않는다(참조: KG V. 31. 82)

 

 

78. 수행은 영혼의 욕정부를 정화하는 영적 방법이다.

 

78) 이 장은 이 책의 목적인 프락티케를 정의한다(PT 1 참조)

'영혼의 욕정부': 튀모스(thymos: 영혼의 욕정)와 에피튀미아(epithymta: 육체의 욕정)를 말한다(참조: PT 38; 49). 영혼의 이 두 부분을 정화하는 것이 바로 프락티케 고유의 목적이다. 또한 프락티케는 영혼의 이 두 부분에서 유래하는 생각들을 억제하면서 정신을 간접적으로 정화한다. "프락티케의 목적은 정신을 정화하여 생각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GN 151).

 

 

79. 단순한 계명 준수만으로는 영혼의 능력들을 온전히 치유할 수 없다. 정신 안에서 일어나고, 각 계명에 부합하는 관상적 활동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79) '치유하다': 아파테이아를 영혼의 건강으로 정의할 때 이 이미지가 사용된다(참조: PT 56; 54장과 55장에도 유사한 표현이 있다). 같은 이미지와 연관되는 에네르게이아(evepveia)도 의학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온전히': 완전한 아파테이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계명 준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계명에 대한 인식을 획득해야 한다. 전자가 의학적 처방전의 맹목적 실행 같은 것이라면 후자는 치료제에 대한 이론적 인식과 같은 것이다(PT 82 참조). 달리 말하면, 에바그리우스가 50장에서 말했듯이 인식과 수행을 겸비해야 한다. 악령들과 싸울 때도, 밤중에 행해지는 전투에서 그 싸움의 이유들(logoi)을 인식하면서(참조: PT 83; 36) 행해지는 전투로 이행해야 한다.

일어나다(διαδεξωνται): 이 동사는 12(마지막 문장)59(첫 문장)에도 비슷하게 사용된다(SC 171, 667-8 참조)

 

 

80. 천사들이 우리 안에 불어넣은 생각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악령들이 불어넣은 생각을 거부하는 것은 가능하다. 전자에는 평화의 상태가 따르고, 후자에는 동요의 상태가 따른다.

80) 프락티케의 과정에서 영혼은 악령이 일으킨 악한 생각의 표적이 된다. 그러나 영혼이 정화될 때, 영혼은 천사가 보내는 좋은 생각, 곧 영적 관상(참조: PT 76; 24)을 받는다. 영혼은 악마적 생각은 모두 물리치지만, 천사적 생각은 반대할 수도 없고 방해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악한 생각에는 동요가 따르지만, 좋은 생각에는 평화가 따른다.

'평화의 상태 ‥‥동요의 상태': 영의 분별에 대한 고전적 가르침을 담은 안토니우스의 생애 35-36장과 비교하라. 천사의 발현은 영혼에 기쁨과 고요를 가져다주지만, 악령의 발현은 영혼을 동요와 혼란 속으로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평화의 상태'란 표현은 12장 끝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언급되었고, 57장에서는 아파테이아를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기도론 3074장과 비교해 보라(SC 171, 668-9 참조).

 

 

81. 사랑은 아파테이아의 자손이다. 아파테이아는 수행의 꽃이다. 수행은 계명 준수로 이루어지며 계명의 파수꾼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인즉, 이는 참된 신앙에서 나온다. 신앙은 일종의 내재적 선으로,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자연적으로 존재한다.

 

81) 이 장을 구성하는 덕의 족보는 머리말 8에서 완성된 형태로 언급되고 에바그리우스의 문체에서 자주 발견되는 구조에 속해 있다(참조: AM 3-6. 67-9). 사랑을 앞에 두고, 또 사랑과 아파테이아와의 밀접한 관계를 제시하기 위하여 여기서는 말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다. 에바그리우스는 사랑이 아파테이아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계명 준수':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두려움이 있는 곳에 계명 준수가 있고, 계명 준수가 있는 곳에 육신의 정화가 있다. 담화 39,8: PG 36, 344 A)고 말한다.

'신앙은 일종의 내재적 선': 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 III, 83에 나오는 이 정의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에게서 유래한다. 에바그리우스도 클레멘스처럼 신앙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 믿음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두려워한다면 그분의 계명을 준수하게 된다. 계명 준수를 통해 우리는 프락티케에 전념한다. 프락티케는 아파테이아로 이끌며, 아파테이아에서 사랑이 생겨난다. 이것은 에데사(Edessa)의 위()데오도루스가 자신의 작품에서(필로칼리아 I, 아테네 1957, 307 참조) 재설정한 관계 사슬의 자연적 순서다(SC 171, 670-1 참조)

 

 

82. 영혼이 육체를 통해 작용하면서 병든 지체를 감지하듯이, 정신도 그 고유 기능을 수행하면서 자기 능력들을 알게 되고, 자기를 방해하는 것을 통하여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계명을 발견한다.

 

82) '그 고유 기능을 수행하다': 정신이 그 고유의 활동을 수행할 능력을 얻게 되면, 즉 아파테이아에 다가가면, 정신은 영혼의 상태에 관해 진단하여 적합한 치료제를 처방할 수 있다.

'알게 되다': 정화된 정신이 얻게 될 분별력을 나타낸다(참조: PT 43; 56; 57; 83)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관상이 충만하게 실행되어도 여전히 일어나는 영혼의 욕정(thymos)과 육체의 욕정(epithymia)을 치유하는 능력을 말한다. 치료법에 비유된 계명에 관해서는 54장 끝 부분과 79장을 보라. 치료법의 예는 15장에 나와 있다(SC 171, 672-3 참조)

 

 

83. 정신은 욕정에 맞서 격렬하게 싸우느라 그 싸움의 이유를 숙고하지 않을 것이다. 정신은 밤에 싸우는 사람과 비슷하다. 그러나 정신이 아파테이아를 획득하면 적들의 술책을 쉽게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83) 악령과의 전투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밤에 이루어지는 전투, 다시 말해 적의 술책에 대한 참된 인식 없이 경험적 형태로 이루어지는 전투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과 더불어 분명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전투다. 전자는 욕정에 얽매인 사람의 일이고, 후자는 아파테이아를 전제하는데, 그것이 피조물의 존재 이유들(logoi)까지 함께 고려하는 영적 관상에 속하기 때문이다. 로고이(logoi)의 의미는 50장 각주를 참조하라. 에바그리우스는 같은 의미로 프락티케의 이유들(logoi)혹은 '계명들의 이유들'이란 표현을 사용한다(SC 171, 673 참조)

 

 

84. 수행의 목표는 사랑이고, 인식의 목표는 신학이다. 수행의 시작은 신앙이고, 인식의 시작은 자연에 대한 관상이다. 영혼의 욕정부를 공격하는 악령은 수행에 반대되고 이성부를 괴롭히는 악령은 온갖 진리의 적이자 관상의 적대자다.

 

84) 이 장에서는 머리말 8에 제시된 구조를 단순화시켜 다시 취한다. 여기서 사용된 용어들은 프락티케와 그노스티케의 이분법적 구분에 따라 재편성되었다. "신앙은 사랑의 계명이다. 그리고 사랑의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인식이다"라고 하는 수도승을 위한 권고 3장과 비교하라.

'사랑': 수행의 결과로 얻는 '아파테이아의 자손'이다(PT 81 참조).

'신학': 하나님에 대한 학문 혹은 관상. 이것은 자연에 대한 관상(자연학)과 더불어 에바그리우스가 말하는 영적 인식(gnosis)을 구성한다(참조: PT 머리말 8; PT 1)

'수행에 반대되는 악령들': 이 악령들은 여덟 가지 생각을 주관하며(PT 60 참조) 특히 수행을 통해서 정화되는(PT 78 참조) 영혼의 욕정부(thymosepithymiα)를 공격한다.

'이성부': 86장과 89장 참조. 영혼의 이성부와 정신의 관계에 대해서는 S C170, 104-5를 참조하라.

 

 

85. 육체를 정화하는 것은 육체가 정화된 후 육체와 함께 남아 있지 않지만, 덕은 다 함께 영혼을 정화하며 정화된 후에도 여전히 영혼 안에 머문다.

 

85) 덕의 역할은 단순히 수행 과정 중 영혼을 정화하는 데만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덕스러운 상태인 아파테이아에 도달한 후에도 영혼 안에 남아 있다(PT 70 참조). 게다가 덕들은 계속 영혼을 지원하며, 악령들의 공격에서 영혼을 보호한다(PT 77 참조).

 

 

86. 이성적인 영혼은 자신의 욕망부가 덕을 열망하고, 정념부가 덕을 위해 싸우고, 이성부가 피조물의 존재 이유를 인식하게 될 때, 그 본성에 따라 움직인다.

 

86) '본성에 따라 움직이다': 에바그리우스는 덕이 본성에 부합하는 활동이라는 플라톤 철학의 개념을 차용하는데, 이 개념은 그리스 교부들 사이에서 널리 유포되었다(안토니우스의 생애 20 참조). 현명의 역할은 수행을 주관하고 아파테이아를 향한 길을 닦는 것으로, 이는 '본성에 따라 행동하도록 영혼의 능력들을 강요하는 것'이다(PT 73 참조). 영혼의 세 부분은 본성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아파테이아에 도달한다. 영혼의 세 부분에 관한 이론은 89장과 SC 170, 104 이하를 참조하라. 이 장은 가자의 도로테우스에 의해서 재인용된다(가르침 XVII, 176 참조).

 

 

87. 수행에서 진보하는 이는 욕정을 감소시킨다. 관상에서 진보하는 이는 무지를 감소시킨다. 욕정은 언젠가 완전히 괴멸될 날이 오겠지만, 무지에는 끝이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고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87) '완전히 괴멸': 영혼의 정념부와 욕망부가 온전히 본성에 따라 작용할 때 악령들은 완전하게 괴멸된다(PT 86 참조).

'무지': 인식과 마찬가지로 무지도 이중적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인식을 피조물에 대한 인식 혹은 자연에 대한 관상(θεωρία ϕυσικη)과 하나님에 대한 인식(ϒνώσις θεου)혹을 신학(θεολοϒία)으로 구분한다(참조: PT 1; 2). 피조물에 대한 인식에 반대되는 무지는 아파테이아가 완전해져서 피조물에 대한 인식이 완전해질 때 끝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무한하며, 하나님이 바로 인식의 대상이다. 따라서 이 인식과 무한한 무지 자체는 상관관계가 있다. 에바그리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인식에 한계가 있다면 그의 무지에도 한계가 있고, 무지가 무한하다면 그의 인식 또한 무한하다"(KG III, 63).

'말하다': 여기서 에바그리우스가 암시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이레네 하우스헤르(I. Hausherr)는 필론과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무엇보다 에바그리우스의 카파도키아 스승들인 바실리우스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로 추정한다(SC 171, 678-80 참조)

 

 

88. 사물들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그것들은 덕과 악의 생산자다. 이 두 목적 중 한 관점에서 사물을 사용하는 것은 현명에 속한다.

 

88) '사물들': 우리는 영혼의 각 부분에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사물들은 그 본성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지 여부에 따라 선용될 수도 악용될 수도 있다(PT 86 참조). 정념부의 선용과 악용에 관해서는 24장 참조.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여기서 에바그리우스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 중립적 사물에 대한 스토아학파의 개념을 재수용한다.

'현명': 영혼의 능력들을 선용하게 하는 것이 현명의 역할이다(PT 13 참조). 이 덕의 역할은 다음 장에서 재론된다(SC 171, 680-1 참조).

 

 

89. 우리의 지혜로운 스승에 따르면 이성적 영혼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덕이 이성부에 있을 때는 현명 · 지성 · 지혜라 부르고, 욕망부에 있을 때는 절제 · 사랑 · 극기라 하며, 정념부에 있을 때는 용기와 인내라 부른다. 영혼 전반을 아우를 때는 정의라 부른다. 현명의 역할은 적대 세력에 맞서서 작전을 지휘하고, 덕을 보호하며, 악에 대항하고, 중립적인 것을 상황에 걸맞게 조절하는 것이다. 지성의 역할은 우리가 목표에 도달하도록 우리를 위해 공헌하는 모든 것을 조화롭게 관리하는 것이다. 지혜의 역할은 육적 사물과 영적 사물의 존재 이유를 관상하는 것이다. 절제의 역할은 이치에 반하는 상상을 일으키는 대상을 초연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사랑의 역할은 악령이 그를 타락시키려 안간힘을 쓸 때도 하나님의 모든 형상에 대해 그 원형(原型)을 대하듯이 행동하는 것이다. 극기의 역할은 입의 모든 쾌락을 단호히 거절하는 것이다. 원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위험 앞에서 용감하고 굳세게 머무는 것은 인내와 용기의 역할이다. 정의의 역할은 영혼의 세 부분 사이에 조화와 일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89) 앞의 장들에서는 아파테이아를 '덕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고, 영혼의 세 부분이 각 본성에 따라서 움직일 때 실현된다고 했다. 이 장은 아파테이아에 할애된 장들의 정점을 이룬다. 여기서는 덕들을 엉혼의 세 부분에 따라 재편하면서 각각을 정의하고 있다. 이로써 에바그리우스는 전통적 이론을 자신의 해석에 적용한다.

'우리의 지혜로운 스승': 에바그리우스가 플라톤이라는 이름 대신 쓴 표현은 실제로 자신의 스승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를 가리킨다(KG VI, 51 참조). 에바그리우스는 그노스티코스 44장에서 덕에 관한 그레고리우스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언급한다. "우리는 의로운 그레고리우스에게서 현명 · 용기 · 극기 · 정의라는 네 가지 덕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앞의 텍스트에서 열거된 네 가지 스토아적 덕이 이 장에서 재등장한다. '현명의 역할': 에바그리우스는 스토아학파가 받아들인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따르면서 무엇보다 현명을 실천적 덕행으로 제시한다(PT 13 참조). 수행은 주로 악령에 맞선 싸움이다. 따라서 그것은 '적대 세력에 맞서서 작전을 지휘하는' 현명에 속한다.

'중립적인 것(τμέσα)'.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을 뜻하는 스토아학파의 용어. 스토아 학파에 따르면, '현명은 나쁜 것과 좋은 것, 그리고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것에 대한 인식이다'. 에바그리우스는 Ps. 37,6에서 이 정의를 문자적으로 재수용한다.

'지성과 지혜': 지성은 스토아 학파의 덕의 구조에 영향을 받아 첨가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덕들 중 첫 번째로 언급되는 현명에 연결된다. 지혜는 가장 높은 덕이며 자연에 대한 관상 훈련에 연결된다(PT 73 참조)

절제(σωϕροσύνη)'. 에바그리우스가 이 단어에 부여하는 의미에 관해서는 17장을 보라.

사랑(ἀγάπη): 이 덕은 아파테이아의 자손이다(PT 81 참조) 에바그리우스는 절제와 극기(ἐγκρατεία)에 이 덕을 덧붙인다. 에바그리우스는 통상 사랑을 정념부에 결부시키지만 여기서는 욕망부에 연결시킨다.

'인내': 프락티케에서 인내가 차지하는 위상에 관해서는 머리말 868장을 보라. 인내는 악령들, 특히 아케디아의 악령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수도승을 독방 수행에 항구하게 하는 덕이다(PT 28 참조).

'정의': 분배정의(分配正義)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 스토아적 개념을 에바그리우스는 여기서 플라톤적 개념으로 대체했다. 영혼 전체의 덕언 정의는 덕들의 정점이다. 따라서 정의는 '아파테이아'에 부합하며 인식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SC 171, 681-9 참조).

 

 

90. 씨앗의 산물은 곡식 단이고 덕의 산물은 인식이다. 씨 뿌리는 노고에 눈물이 따르는 것처럼 곡식 단에는 기쁨이 따라온다(126:5-6 참조).

 

90) '씨앗': 에바그리우스는 스토아 학파에 따라 덕을 자연의 씨앗에 동화시킨다(PT 57 참조), 이 장은 결론이 분명하지 않은 추론에 의존하고 있다. 수행은 눈물을 수반하지만 인식은 기쁨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은 이 책의 결론이기도 하다. 이 결론은 영지적 삶의 기쁨에 관한 전망을 통해서 수행의 고통을 정당화한다(SC 171, 690-1 참조).

 

 

 

9. 교부들의 금언 (91~100)

) 이 마지막 열 개의 장은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에서 가려 뽑은 작은 모음집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자신의 가르침이 수도승 전통으로부터 왔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즉 자기 가르침에 권위와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교부들의 금언을 여기에 덧붙였다(SC 170, 119-20 참조)

 

91. 올바른 방법으로 우리를 앞서 간 수도승들의 길을 살펴보고, 그것을 참조하면서 우리를 올바르게 인도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말하거나 행한 아름다운 것을 많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한 수도승은 이렇게 말하였다. "사랑에 연결된 매우 엄격하고 규칙적인 식이요법은 수도승을 아파테이아의 문으로 더욱 빠르게 인도한다." 그는 밤의 고통에 시달리는 한 형제에게, 단식과 아울러 환자 봉사도 하라고 명령하여 그를 환영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비 말고는 아무것도 이런 유의 욕정을 제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91) '그들이 말하거나 행한 아름다운 것': 원로들의 언행은 '아포프테그마타'의 전통적 자료를 구성한다.

'매우 엄격하고 규칙적인 식이요법': 물을 적게 마시라는 권고(PT 17 참조)와 늘 동일한 극기를 행하라는 권고(PT 29 참조)를 참조하라, 38장에서처럼 극기와 사랑을 통해 아파테이아로 향하게 하는 수단들이 요약된다.

'자비': 정념부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치료제다(참조: PT 15; 20). 정념부의 동요가 야기하는 밤의 환상과 악몽에 대해서는 11장과 12장을 참조하라(SC 171, 692-5 참조)

 

 

92. 한 철학자가 의로운 안토니우스에게 와서 물었다. "오 사부님, 책의 위로가 없는데 어떻게 견디십니까?" 안토니우스가 대답했다. "철학자여, 나의 책은 피조물의 본성이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싶을 때, 책은 거기에 있소."

 

92) 이 금언은 안토니우스의 생애 72-80장과 비교된다. 안토니우스를 보러 사막으로 온 철학자들과 안토니우스가 나눈 대화가 거기 나온다. 그러나 이 장에서 언급하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책의 위로': 안토니우스의 생애는 안토니우스가 글을 배우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피조물의 본성': 책을 통해 지혜를 추구하는 이교 학문에 반대된다. 에바그리우스는 이것을 영적 관상이라 부른다. 그 대상은 피조물에서 분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다(KG I, 14 참조). 이 장은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 인용된다(SC 171, 695-6 참조)

 

 

93. "(주님이) 선택한 그릇"(9:15) 이집트인 원로 마카리우스가 나에게 물었다. "우리는 사람에 대한 나쁜 기억을 간직하면서 영혼의 기억력을 사라지게 하는데, 왜 악령에 대한 나쁜 기억을 간직하면서는 무사합니까?" 나는 대답하기 힘들어서 그에게 이유를 알려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첫째 경우는 정념부의 본성에 반하는 반면, 둘째 경우는 그 본성을 따르기 때문이오."

 

93) '선택한 그릇':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부여한 명칭이다(9:15 참조). 에바그리우스는 그가 가장 위대한 교사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이명칭을 사용했다. 특히 그는 프락터코스 에서 자신이 영지적 삶의 모델로 여겼던 대()마카리우스를 언급하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했다(J. DRISCOLL, the 'Ad Monachos' of Evagrius, Ponticus, 246참조).

'이집트인 원로 마카리우스': 에바그리우스가 29장에서 언급한 이집트인이라고 불린 마카리우스를 말하는데, 그는 스케티스에서 최초로 수도승생활을 시작한 인물이다. 그와 에바그리우스의 관계에 대해서는 SC 170, 25를 참조하라.

'기억력': 정신은 정념부의 동요로 혼미해진다(참조: PT 23; KG III, 90; VI, 63). 하나님에 대한 기억과 정념부의 자세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86장과 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 lV, 73("정신이 언제나 주님께 있고, 정념부가 하나님께 대한 기억의 결과로서 겸손으로 충만하며, 욕망부가 전적으로 주님께 기울어져 있는 사람은 우리 육체 밖에서 돌아다니는 적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을 참조하라.

'본성을 거슬러 ‥‥ 본성에 따라': 악령들을 거슬러 싸우는 것은 정념부의 본성에 따른 것이다(참조: PT 24; 42; 73).

 

 

94. 한낮에 나는 거룩한 사부 마카리우스를 방문했다. 나는 심한 갈증으로 목이 타서 마실 물을 청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늘로 만족하시오. 지금 많은 사람이 물 없이 걷거나 항해 중이오." 내가 극기에 관해 논하자 그가 나에게 말했다. "아들이여, 용기를 가지시오. 나는 꼬박 20년 동안 방도 물도 잠도 충분히 취하지 않았소. 사실 내가 먹은 빵을 달아 보았고, 내가 마신 물을 재 보았으며, 등을 벽에 기대어 선잠을 피하였소."

 

94) '나는 방문했다(παραϐάλλειν)'. 이 동사는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의 안토니우스 17. 19. 34와 아르세니우스 7. 25 등에서 흔히 사용된다. 이 모든 경우에 이 동사는 여기서와 같이 문장의 첫머리에 나온다. '거룩한 사부 마카리우스': 앞서 언급된 이집트인 마카리우스가 아니라, 켈리아 사막의 사제였던 알렉산드리아의 마카리우스일 수 있다. 에바그리우스는 안티레티코스에서도 이 인물에 같은 표현을 쓴다(참조: 안터레티코스 IV, 23. 58; VIII, 26)

'나는 ‥‥ 논했다': 에바그리우스의 인격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 에바그리우스는 바로 이런 태도 때문에 수도승적 환경에서 자주 질책을 받았다. 에바그리우스가 마카리우스의 처신에 반대하자 마카리우스는 자신을 예로들어 훈계한다. 이런 식의 가르침은 아포프데그마타(Apophthegmata)전통에서 자주 나타난다.

'아들이여': 394100세를 일기로 죽은 마카리우스는 에바그리우스보다 약 50세 위였다.

'빵도 물도 잠도': 팔라디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마카리우스가 행한 특별한 금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112-140그램의 방을 먹었고, 물을 많이 마시지 않았으며, 잠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HL 18). 에바그리우스는 이 가르침을 받아들여, "너의 합을 저울로 달고 네가 마시는 물을 측정하여라"(AM 102)고 말한다(참조: PT 16; 17). 이 표현은 에스겔 4:16에서 유래하는 것 같다.

'피하였다': 아르세니우스는 밤샘 기도한 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선잠을 피하였다"(AP, 아르세니우스 14)

 

 

95. 한 수도승이 자기 부친의 부음을 전해 준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 불경스런 말을 하지 마시오. 내 아버지는 영원히 살아 계시오."

 

95) 팔라디우스는 이 수도승이 에바그리우스라고 하지만, 정작 여기서 에바그리우스는 마치 남 말 하듯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것은 에바그리우스를 뜻하는 폰투스 출신의 한 수도승에 대한 요한 카시아누스의 증언과 일치한다(제도서 V, 32 참조). 요한 카시아누스는 그 수도승이 가족의 편지를 받았지만, 읽지 않고 찢어 버렸다고 전한다(SC 171, 701-2 참조)

 

 

96. 어떤 형제가 한 원로에게, 자기 집을 방문할 경우 어머니와 자매들과 함께 식사해도 좋은지 물었다. 원로가 대답했다. "여자와 함께 식사하지 마시오."

 

96) 여성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서 자주 발견된다(참조: AP, 시소에스 3, 마카리우스 3, 포이델 76).

 

 

97. 어떤 형제는 복음서 하나만을 소유했다. 그는 이것을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내주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나는 '너의 계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19:21)라고 나에게 말한 바로 그 책을 팔았소."

 

97) 이 장은 '작은 복음서의 역사'에 대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증거다. 에바그리우스의 이 텍스트는 라우수스의 역사 116장과 비교되며 사막교부들의 금언집에도 나온다(SC 171, 704-5 참조)

 

 

98. 알렉산드리아 인근, '마리아'라는 호수 북단의 섬에 신비가들 중 가장 경험 있는 한 수도승이 살고 있었다. 그는 수도승의 모든 활동이 하나님 · 본성 · 습관 · 필요 · 손노동, 이 다섯 이유 때문에 행해진다고 선언했다. 또 덕은 본성상 하나지만, 그것은 영혼의 개별적 능력 안에서 각각 특별한 형태를 취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햇빛은 형체가 없지만, 그것이 들어오는 창문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체가 생긴다".

 

98) '하나의 섬': 고대 알렉산드리아 남동쪽에 마리아(Maria) 혹은 마레오터스(Mareotis)라는 호수가 있었다. 이 호수에는 여덟 개의 섬이 있었는데, 그중 네 개는 지금도 남아 있다. 팔라디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니트리아로 가기 위해 건넜던 마리아 호수에 대해 언급하지만(L1 참조), 그 섬들에 있는 수도승의 거주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가장 경험 있는 수도승': 악령과의 싸움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노련한 금욕가를 뜻한다(PT 28 참조). '신비가들 중 가장 경험 있는 수도승'이란 표현은 탁월한 금욕가가 된 수도승에게만 적합한 표현이다. 우리는 그를 장님 디디무스(Didymus)로 추정한다. 에바그리우스는 그를 '위대하고 신비적인 작가'라고 부른다(GN 150 참조). 우리는 디디무스가 수도승이었다는 것과, 알렉산드리아 부근의 한 암자에서 연구와 손노동에 전념하며 생활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HL 4참조). 디디무스는 에바그리우스가 죽기 일 년 전인 398년에 사망했다. 그래서 에바그리우스는 디디무스가 여전히 생존해있는 듯 묘사할 수 있었다. 팔라디우스가 켈리아에서 10년을 보내는 동안에 바그리우스는 디디무스를 네 번 방문했다. 우리는 이집트 수도승들의 역사를 통해 에바그리우스가 자주 알렉산드리아로 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에바그리우스가 디디무스와 개인적 친분을 맺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덕은 본성상 하나':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이 받아들인 스토아 학파의 가르침이다. 필론에 따르면, 덕의 종류는 하나지만 여러 측면으로 나뉜다. 영혼의 세 가지 능력에 따라 덕에 부여하는 다양한 이름에 관해서는 89장을 참조하라(SC 171, 706-9 참조).

 

 

99. 또 어떤 수도승이 말했다. "내가 쾌락을 끊어 버리는 것은 정념부의 온갖 구실을 없애기 위해서다. 나는 정념부가 항상 쾌락을 위해 싸운다는 것과 내 정신을 혼란시키고 인식을 쫓아버린다는 것을 안다." 사랑은 음식이나 금고를 지키는 법을 모른다고 말한 원로가 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나는 같은 문제로 두 번씩이나 악령들에게 속았다는 것을 모른다."

 

99) 이 장에서는 익명의 금언 세 개가 나온다. 첫째 것은 에바그리우스에게 친숙한 가르침으로, 정념부는 쾌락을 위해서 싸운다는 것이다(PT 24 참조). 그것은 정신을 혼란시키고 관상을 방해한다(PT 24를 부분 참조).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도 나오는 금언이다(AP IV, 14 참조).

'사랑': 사랑과 재물은 공존이 불가능하다(PT 18 참조).

 

 

100. 모든 형제를 똑같이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러나 원한과 증오에서 자유로워져 모두를 초연하게 만날 수는 있다. 우리는 주님 다음으로 목회자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들은 거룩한 신비로써 우리를 정화하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한다. 우리는 원로들을 천사처럼 공경해야한다. 전투를 위하여 우리에게 기름을 바르고 들짐승에게 물린 상처를 치유하는 이가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100) 이 마지막 장은 수행의 목표가 사랑(PT 84 참조)임을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수도승이 그를 인도하는 사람들, 즉 사제와 원로들에 대해 가져야할 감정이 무엇보다 사랑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아파데이아와 사랑의 관계에 관해서는 81장 참조.

'거룩한 신비': 성체성사. 켈리아의 수도승들은 니트리아와 케터스의 수도승들처럼 토요일과 주일에 함께 모여 전례를 거행했다. 에바그리우스는 켈리아의 사제 알렉산드리아의 마카리우스(PT 94 참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여러 악한 생각에 관하여 27장에 언급된 거룩한 사제였을 것이다. 다소 자유로운 독수도승들 사이에서도 사제는 권위가 있었던 것같다.

'천사처럼': 영적 인식을 얻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천사의 직무를 수행하며, 영적 투쟁에서 그들을 지원한다(G VI, 90 참조). 악령과 맞서는 싸움에서 천사의 역할을 보려면 24장을 참조하라.

'들짐승': 성경에서 유래하는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악령을 의미한다(SC 171, 711-3 참조)

 

 

 

맺음말

 

친애하는 형제 아나틀리우스여, 이것이 지금 수행에 관하여 내가 그대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곧 익어 가는 포도나무에서 성령의 은총을 통하여 우리가 수확한 전부입니다. 그러나 '정의의 태양'(3:20)이 우리 위에 강렬히 빛나고 그 포도송이가 익을 때쯤, 나를 심은 의로운 그레고리우스와 지금 나에게 물을 주는 거룩한 교부들의 기도와 중재를 통하여, 그리고 나를 자라게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러스도의 권능(고전 3:6-7 참조)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104:15)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과 주권이 세세 영원히. 아멘(참조: 벧전 4:11; 1:6)

237. 아나틀리우스에게 보낸 편지의 끝 부분이다

238. '포도나무': 에바그리우스는 성경에서 유래하는 포도나무의 비유를 유사한 형태로 거듭 사용한다.

'정의의 태양': 말라기 3:20에서 취하여 에바그리우스가자주 사용하는 표현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무지는 밤에 비유되며, 악을 상징하는 땅이 태양 빛을 차단함으로써 생긴다. 수행의 효과로 악이 사라질 때 악은 더 이상 '정의의 태양'이 발하는 광선을 방해하지 못한다.

'포도가 익을 것이다': 우리가 아파데이아를 얻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아파데이아 덕분에 우리는 인식의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 인식의 포도주에 관해서는 케팔라이아 그노스터카 V, 32를 참조하라. 이 포도주는 인간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인식은 기쁨을 수반하기 때문이다(PT 90 참조).

'의로운 그레고리우스의 기도와 중계를 통하여': 그레고리우스가 이 무렵에는 이미 죽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표현이다. 에바그리우스와 스승 나지안 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관계에 대해서는 89장과 SC 170, 22를 참조하라. 에바그리우스는 그노스티코스 146장에서 그를 의로운 '그레고리우스' 라고도 부른다.

'나를 심었고 나에게 물을 주었고 나를 자라게 한': 고전 3:6의 구절인데, 에바그리우스도 같은 동사를 사용한다.

'거룩한 교부들': 사막의 수도승들, 에바그리우스는 이 책 마지막 열 개의 장에서 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SC 171, 713-5 참조.)

 



수행론 100장_본문+주석합(완).pdf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