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가를 위한 가르침

(Gnostikos)

 

 

 

 

1. 도입부 (1~3)

2. 관상가의 조건과 덕 (4~11)

3. 대기설법 (12~15)

4. 성경해석 (16~20)

5. 관상가의 자세 (21~36)

6. 관상가의 유혹과 죄 (37~43)

7. 교부들의 가르침 (44~48)

8. 맺음말 (49~50)

 

 

 

1. 도입부 (1~3)

 

1. 수행자는 수행의 이유들을 이해할 것이지만, 관상가는 영지적 대상들을 볼 것이다.

 

1) 그리스어 본문에서 이 첫 장은 삼단논법의 결론처럼 "그러므로 수행자는 "이란 구절이 덧붙여져 2장과 3장 다음에 나온다. 하지만 번역본들은 한결같이 이 세 장을 하나로 묶어 삼단논법식으로 서술하지 않고 이 장을 서두에 두고 있다. 이 장은 프락티코스그노스티코스를 이어 주는 연결부와도 같다.
수행자와 관상가의 대조와 구별은 에바그리우스 작품에서 자주 나타난다. '수행의 이유들': '이유'는 로고스(logos)란 용어의 통상적인 번역이다. 에바그리우스가 자주 사용하는 이 전문용어의 의미는 앞의 해제4('가르침의 내용')를 참조하라.
'이해할 것이지만 ‥‥ 볼 것이다': 이 장의 핵심은 이 두 동사의 대조에 있다. 관상가는 본질적으로 견자(見者), 정관자(靜觀者), 프락터코스(praktikos)거 반대 개념인 테오레티코스(teoretikos)이다.

 

 

2. 수행자는 오로지 영혼의 욕정부에서 아파테이아를 얻은 사람이다.

 

2) 수행자에 대한 이 정의는 프락티코스 78장에서 말하는 수행의 정의와 비교해 보라. "수행은 영혼의 욕정부를 정화하는 영적 방법이다. "통상적으로 수행자는 수행으로 훈련하는 사람이지만, 여기서는 수행의 끝인 아파테이아(평정)에 도달한 사람을 말한다.
'오로지'(monon)': 모든 번역본에는 이 부사가 빠져 있지만 중요한 뉘앙스를 담고 있기 때문에 유지되어야 한다. , 수행자의 목표는 오로지 아파테이아(평정)를 얻는 것이다. 아파테이아는 관상의 길로 들어서는 전제 조건이다. 따라서 수행자의 활동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향하는 반면, 관상가의 활동은 다음 장에서 언급되는 바처럼 다른 사람을 향한다.

 

 

3. 관상가는 불순한자에게는 소금의 역할을, 순수한자에게는 빛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5:13-14참조).

 

3) 리옹의 이레네우스에 따르면, 발렌티누스파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하신 "여러분은 땅의 소금입니다. ‥‥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라는 말씀을 영적 인간에게 적용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도 단순한 신자와는 다른, 영지주의자인 선택된 사람에게 적용했다. 에바그리우스는 그노스티코스에서 소금의 역할과 빛의 역할을 구분한 최초의 인물이다.
관상가에게 적용된 빛의 상징은 에바그리우스의 작품에서 자주 나타난다. 관상가는 본질적으로 교사이자 지도자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는 수행을, 곧 욕정에서 정화되는 법을 가르치고, 필요한 순수성을 얻은 또 다른 사람에게는 영지에 대해 가르친다. 이것이 이 작품의 전체 주제다.

 

 

 

2. 관상가의 조건과 덕 (4~11)

 

4. 밖에서 우리에게 오는 인식은 '존재 이유'(logos)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 사물을 알게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 안에서 오는 인식은 정신에 직접 그 사물을 제시한다. 정신은 그 사물을 바라보면서 그 존재 이유를 파악한다. 첫패 인식에는 오류가 장애가되고, 둘째 인식에는 분노와 격정, 그리고 그것들에서 나오는 것이 장애가된다.

 

4) '밖에서 우리에게 오는 인식': 에바그리우스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으로 이교 학문을 나타낸다.
'분노와 격정': 에바그리우스에게 분노는 관상의 주된 방해물이다. 이 책 5장을 참조하라.
이교 학문과 하나님에게서 오는 영적 관상 간의 대립은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참조: 기도론 63: 게팔라이아 그노스터카 VI,90; VI,22; 그노스티코스 45)

 

 

5. 모든 덕이 관상가에게 길을 활짝 열어 주지만 무엇보다도 분노의 억제를 쉽게 해 준다. 사실 인식에 도달했지만 쉽게 분노하는 사람은 바늘로 자기 눈을 찌르는 사람과 비슷하다.

 

5) 이 장부터 11장까지는 관상가가 전념해야 하는 덕에 관한 것이다. 에바그리우스는 특히 분노가 관상가에게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분노의 억제'(aorgesia): 문자 그대로는 '분노의 부재'를 뜻하는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학파에 기원을 두고 있다(안토니우스의 생애 l7장에도 나타난다). 에바그리우스에게 이 덕은 '정념부의 평정'으로 정의되는 '온유'(Praoutes)와 동일하다. 이 덕은 특히 관상가의 덕으로서 애덕 자체에 가깝다. 에바그리우스는 서간 27에서 '온유''인식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바늘로 자기 눈을 찌르는 사람': 분노가 정신을 잃게 하고 관상을 방해한다는 것은 에바그리우스가 자주 표현하는 개념이다. 결과적으로 분노는 관상가를 가르침에 부적격하게 만든다(10장 참조). 관상가는 특히 가르치면서 분노에 노출된다.

 

 

6. 관상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관용이 습관이 될까 염려하여 관용을 베풀 때 엄격하다. 게다가 그는 모든 덕을 적절한 순서로 똑같이 계속해서 실천하려고 노력하여 자기 안에서도 덕들이 서로서로 뒤따르게 한다. 어떤 덕이 약해지면 정신은 자연히 왜곡되기 때문이다.

 

6) 관상가는 분노에 휩쓸리지 말아야 하지만 지나친 관용에 빠져서도 안 된다.
'관용': 관용은 대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용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관상가 본인이 맡은 사람들에 대한 관용과 관계된다. 일반적으로 관용은 스승에게 요구되는 자세(교부들의 금언 안토니우스 13 참조)지만, 에바그리우스는 관용이 습관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모든 덕을 실천하다': 카트르튄(katrthyn)'잘해 내다'란 뜻을 지닌 스토아학파의 용어다.
'자기 안에서도': 관상가는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안에서도 덕들의 연결 고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지나친 관용은 그 고리를 끊게 할 것이다.

 

 

7. 관상가는 늘 자선을 베풀려고 힘쓸 것이며 선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는 돈이 없다면 자기영혼의 도구를 사용할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자선을 베푸는 것은 그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는 등불을 꺼뜨린 다섯 처녀에게 부족했던 것이다(25:1-13참조).

 

7) '자기 영혼의 도구': 이는 다시 말해서 '자기 몸'을 뜻한다. 에바그리우스는 아리스토델레스 철학에서 유래한 이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참조: 게팔라이아 그노스티카 1,67; II,80; VI, 72).

'자선을 베풀다': 그리스어 엘레에모쉬네(eleemosyne) 혹은 엘레오스(eleos)는 가난한 이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만 아니라 이웃에게 행해진 모든 봉사를 나타낸다. 예컨대, 병자들에 대한 봉사와 같은 것이다(프락터코스 91장 참조). 여기서는 관상가가 가르침 중에 실천하는 애덕과 관계된다.

'다섯 처녀': 동정녀에게 준 권고와 비교해 보라. "자비심 없는 동정녀의 등불은 꺼질 것이며, 그녀는 자기 신랑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43). "곤경에 처한 가난한 이를 물리치지 말라. 그러면 네 등잔에 기름이 마르지 않을 것이다"(17). 이 본문들이 지적하고 있고 또 이 장에서 표현된 바처럼 자비심은 기름을 상징한다. 기름이 등불을 켜는 것처럼 자비심은 빛으로 상징화된 인식을 키우기 때문이다["거룩한 성전에서 빛나는 그 빛은 영적 인식을 상징하며 , 그것은 거룩한 사랑의 기름을 통해서 커진다"(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 IV, 25 참조)]. 일종의 환치법을 통해 기름은 인식 그 자체를, 특히 본질적 인식을 상징하게 된다. 그것은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8. 불의의 희생자이든 불의를 행한 자이든 관상가가 소송 중에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가 불의의 희생자라면 그것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가 불의를 행한 자라면 그것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8) 에바그리우스는 이욕(利慾) 때문에 소송에 연루된 이들을 꾸짖는다. 하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관상가에게 이르는 말이다. 에바그리우스는 포기를 실천하여 인식에 도달하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행하는 과정에서 돈과 재산 때문에 이웃과 자주 소송하여 싸우는 것을 비판한다.

 

 

9. 인식이 유지될 때 , 그것은 거기에 참여한 사람에게 어떻게 인식이 보존되고 증대하는지 가르쳐 준다.

 

9) '인식이 유지될 때': 다시 말해 '관상가가 욕정들, 특히 분노에 빠져 인식을 잃지 않을 때'이다.
'어떻게 인식이 보존되고 증대하는지': 이 장은 또한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도 있다. "유지된 인식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그것이 어떻게 보존되고 성장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10. 관상가가 가르칠 때 분노와 증오, 슬픔, 육체적 고통과 근심에서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10) '분노와 증오, 슬픔': 이 세 욕정의 관계는 프락티코스 ll장과 23장을 참조하라.
'근심': 육체의 욕구와 관련된 걱정, 특별히 의복과 음식에 대한 걱정을 뜻한다. 에바그리우스는 이런 걱정들이 분노의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38장 참조). 분노와 인식의 양립불가능에 관해서는 4장과 5장을 보라. 여기서 에마그리우스는 뒤에 오는 장들의 주제가 될 '가르침 중에 있는 관상가'를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암시하고 있다.

 

 

11. 완전해지기 전에 그대의 정신이 환상으로 가득차지 않을까 염려하여 많은 사람과의 만남과 그들과의 잦은 교제를 피하라.

 

11) 이 장은 앞의 장들(특히 5-8)처럼 관상가의 일반적인 처신에 관한 것이다.
'환상으로 가득 차다': 동정녀에 게 준 권고 6장과 비교하라.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라. 이는 네 영혼 안에 상()이 떠오르지 않게 하여 기도할 때 너에게 장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3. 대기설법 (12~15)

 

12. 수행과 자연학 혹은 신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 가운데 우리 구원에 유익한 것을 죽을 때까지 말하고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들 가운데 대수롭지 않은 것은 말하거나 행해서는 안 된다. 이는 쉽게 충격을 받는 사람들 때문이다.

 

12) 이 장은 관상가가 자신의 가르침에서 주의해야 하는 예방책들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는 최초의 장이다. ,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수행, 자연학, 신학': 에바그리우스에 따른 영성생활의 세 단계(praktiké, physiké, theologiké)에 대해서는 프락티코스 1장을 참조하라. 관상가의 가르침은 수행, 자연학, 신학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죽을 때까지 말하고 행하는 것': 관상가는 자기가 가르치는 모든 것을 부단히 실천해야 한다(프락터코스 68, 70장 참조)

'대수롭지 않은 것': '이익도 손해도 없는 것' 또는 '이롭지도 해롭지도 않은 것'을 뜻한다. 관상가는 자신의 가르침을 듣는 이에게 맞추어야 한다.

 

 

13. 수도승들과 세속인들에게 올바른 생활 방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마땅하고, 자연학과 신학에 관한 가르침은 부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연학과 신학에 대한 가르침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못할 것이다(12:14 참조).

 

13) '수도승들에게': 사본에 따라 모나코이스(monakois)란 말이 다르게 번역된다. 어떤 사본은 '젊은이들에게'로 번역하고, 또 다른 사본은 더 정확하게 '새로이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에게'로 번역한다. 후자가 정확한 번역이다. 여기서는 이 말이 일반적으로 수도승을 나타내지 않고 여전히 수행에 전념하는 사람과 아직 관상가가 되지 못한 사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상가(gnostikos)에 반대되는 수도승(monakos)은 수행자(prakikos)와 동의어다({프락티코스 74-75장 참조), 에바그리우스의 문체에서 종종 모나코스(monakos)가 취하는 특별한 의미는 에바그리우스가 '수도승'이란 표제를 붙인 프락티코스의 제목 자체에서 나타난다. '수도승들과 세속인들'이라는 한 쌍의 용어가 36장에도 나온다. 거기서는 순서가 바뀌어 '세속인들과 젊은이들'이 언급되는데, '젊은이들''수도승들'과 같은 의미다.

'세속인들에게': 모든 필사본이 '청년들에게'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시리아어에서 철자가 비슷한 '청년들''세속인들'의 잦은 혼동으로 인한 오류다.

'올바른 생활방식'(orthe politeia): 이것은 달리 말해 '수행'을 뜻한다. 그리스어 '폴리테이아''시민권', '삶의 한 방식'을 의미한다. 라틴어로는 콘베르사시오(conversatio)로 번역되었다. 이 용어는 장차 수도승생활을 나타내는 전문용어가 된다(허성석 엮음 수도 영성의 기원분도출판사 2015, 62 참조).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 이 인용구를 선택한 이유는 다음 사실로 설명된다. , 에바그리우스에게 자연학과 신학은 하나님 환시로 이어진다.

이 장은 36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4. 사람들이 그대에게 다음에 관해서 질문하면 오직 사제들에게만, 그리고 그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이들에게만 대답하라. , 사제들이 거행하고 내적 인간을 정화하는 신비들과 그 신비들을 받아들이는 그릇들 영혼의 욕정부와 이성부를 나타냄 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또 그것들의 분리할 수 없는 혼합과 그것들 각각의 능력, 그리고 유일한 목적을 위해서 그것들 각각의 활동을 통한 성취에 관한 질문들에 대답하라. 또한 그것들을 완수하는 인물은 누구인지 , 순수한 행위를 방해하는 자들을 그와 함께 몰아내는 이들은 누구인지 그들에게 말하라. 그리고 살아 있는 존재들 가운데 누가 기억력을 지니고 있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 말하라.

 

14) 이 장은 이미 고대 번역가들에게도 매우 난해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여러 번역본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스어 원본이 유실되어 이 장에 대한 완전한 번역과 해석은 불가능하다.

'사제들에게만 ‥‥ 가장 훌륭한 이들에 게만': 자신의 가르침을 각 사람에게 맞추어야 하는 관상가는 사제들에게, 그리고 질문자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이들에게만 사제들이 거행하는 예식의 가장 깊은 의미를 설명해야 한다.

'내적 인간을 정화하는 신비들': 프락티코스 100장과 비교하라. "우리는 주님 다음으로 사제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들은 거룩한 신비로써 우리를 정화한다." '신비'는 분명 이 장에서 그 상징적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성찬례를 뜻한다.

'그 신비들을 받아들이는 그릇들': 어떤 사본은 '이 신비를 받는 영혼의 능력들'로 표현한다. 이 그릇들은 아마도 빵과 포도주를 담는 성구들과 관련 있는 듯하다. 삥과 포도주,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상징주의에 관해서는 수도승에게 준 권고 118-119장을 참조하라." 그리스도의 살은 프락티케의 덕들이고, 그것을 먹는 사람은 욕정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창조된 존재들에 대한 관상이며, 그것을 마시는 사람은 그분에 의해서 지혜로워질 것이다."

'영혼의 이성부': '영혼의 욕정부'와 구분되는 부분이다(프락티코스 84장 참조).

'분리할 수 없는 혼합': 에바그리우스가 다른 곳(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 V, 32)에서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물과 포도주의 혼합이라기보다는 여기서는 사제가 축성된 빵 조각을 성작에 넣는 예식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들 각각의 능력': 여기서 '그것들'은 앞의 '그릇들'이 상징하는 영혼의 부분들과 관련이 있다. '능력'과 관계된 그리스어 크라토스(kratos)'영혼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누를 때', 더 좁게는 '한 부분의 승리'란 뜻을 지닌다.

'유일한 목적을 위해서 그것들 각각의 활동을 통한 성취': 사본마다 다르게 해석된다. 어떤 사본에는 '각각의 활동은 유일한 형태를 이룬다', 또 다른 사본에는 '그것들을 통해서 실현되는 과업의 목표' 또는 단순히 '그것들의 완수를 위해서'라고 되어 있다. 그리 명확하지 않은 이 구절은 아파테이아(평정)의 단계를 묘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영혼의 욕정부를 정화하여 아파테이아에 이르며, 아파테이아 안에서 영혼의 각 부분은 자기 본성에 따라 활동하며 한 가지 유일한 목표인 정신의 고유한 활동, 즉 관상을 위하여 노력한다(프락티코스 6장 참조).

'그것들을 완수하는 인물은 누구인': 여기서는 이 신비를 거행하는 사제를 뜻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순수한 행위를 방해하는 자들': 악령들을 뜻한다(프락티코스 78장 참조).

'그와 함께 몰아내는 이들': 성체성사 거행 때 사제의 보조자로 여겨지는 천사들을 뜻한다.

'살아 있는 존재들 가운데': 아르메니아 사본에는 '말 못하는 동물들 가운데'로 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사람'에 반대되는 '동물'이라는 제한된 의미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라는 넓은 의미로 알아들어야 한다. 이 경우 에바그리우스가 종종 동물들과 동일시하는 악령들과 관계된다.

 

 

15. (각 사람의)상황과 생활 방식과 직업의 이유와 법칙을 배워 알아라. 그러면 그대는 각 사람에게 유익한 것을 그에게 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5) '이유와 법칙'(logos/nomos): 이것은 스토아학파의 용어로 정확히 여기서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많다.

'각 사람에게 유익한 것': 관상가는 각 사람의 구체적 상황을 알고 고려해야 한다. 그는 '존재 이유들'(logoi)을 통해서 그 사물에 대한 경험적 인식만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규명된 인식을 가져야 한다.

'쉽게': 이 단어는 도를 제외한 모든 사본에서 빠져 있다

 

 

 

4. 성경 해석 (16~20)

 

16. 그대는 (성경에서 ) 언급된 바를 설명하는 자료를 가져야하며 또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설사 어떤 부분이 그대의 이해를 벗어난다 하더라도 말이다. 사실 천사들에게는 지상에 있는 것 가운데 이해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삼하 14:20 참조).

 

16) '자료': S2를 제외한 모든 사본은 이 단어를 오히려 '책에서 얻은 증언과 세상 사물에 대한 지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지상에 있는 것 가운데': 자연학(피조물에 대한 관상)의 대상인 창조된 자연계를 말한다.

 

 

17. 사물의 정의(定義) 특히 덕과 악의 정의들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사실상 거기에 인식과 무지의 근원, 하늘나라와 고통의 근원이 있다.

 

17) '정의': 이 장은 앞의 15장과 16장처럼 가르치는 자료, 특별히 여기서는 덕과 악의 정의에 관하여 다룬다. 에바그리우스는 여러 작품에서 이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인식과 무지': 덕과 인식, 악과 무지 사이에도 상관관계가 있다. 이것들은 각기 '하늘나라''형별'로 인도한다. 우리가 악을 통해서 무지를 얻은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덕을 통해서 인식을 얻었다(참조': 시편 주해 138:11; 88:49; 117:19-20; 120:8; 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I,44.46).

 

 

18. 우의적 구절과 문자적 구절이 수행에 관한 것인지 혹은 자연학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신학에 관한 것인지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구절이 수행에 관한 것이라면 정념과 거기서 나오는 것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지 혹은 욕망과 그것을 따르는 것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정신과 그 움직임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 그 구절이 자연학에 관한 것이라면 자연과 그에 관련된 가르침 가운데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신학과 관련된 우의적인 구절이라면 삼위일체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 또 삼위일체가 단순하게 드러나는지 혹은 일치 안에서 드러나는지 가능한 한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이러한 것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면 단순한 관상(현시)이거나 아니면 예언을 의미하는 것이다.

 

18) 이 장부터 21장까지는 성경 주해에 관한 것이다.

'수행 ‥‥ 자연학 ‥‥ 신학': 여기서 주해에 적용된 이 도식에 관해서는 12장과 13장의 각주를 참조하라.

'정념(thymos) 욕망(epithymia) 정신(nous)': 영혼의 이 세 부분에 대해서는, 에바그리우스 프락티코스 허성석 역주, 분도출판사 2011, 35쪽 각주 6453쪽 각주 103을 참조하라.

'정신의 움직임': 정신의 움직임에 관해서는 프락티코스, 48장과 51, 그리고 그 각주들을 참조하라.

'가르침': 13장에서는 이 용어가 도그마(dogma)로 번역되고 있다. 이 용어들이 다시 나타나는 35장도 참조하라.

'예언'(propheteia)'. 이 말은 '이야기'란 의미를 지닌다. 시편 주해 76:21에서 성경의 네 가지 의미에 관한 전개에서 프로페테이아(propheteia)는 토 히스토리콘(to historikon, 이야기)과 일치 한다.

 

 

19. 성경의 관습도 아는 것이 좋고, 가능한 한 증거를 통해 그것을 확증하는 것이 좋다.

 

19) 관습 (ethos/syneheia)': 이 용어는 성경 언어의 관습을 나타내기 위하여 오리게네스와 에바그리우스가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다(참조: 시편 주해 15:9; 64:10; 83:12; 93:5; 142:8).

'증거': 성경에서 취해진 예를 말한다.

 

 

20. 이것도 알아야 한다. , 윤리적 성격을 띤 모든 본문이 윤리적 성격에 대한 관상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며, 자연과 관련된 어떤 본문이 자연에 대한 관상을 수반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윤리적 성격을 띤 본문은 자연에 대한 관상을 수반하며, 자연을 다루는 본문은 윤리에 대한 관상을 수반한다. 신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간음과 예루살렘의 간통(16:15-34 참조), 건조한 땅의 짐승들과 물과 새들, 순결한이와 불결한 이들(11:2-19참조), 뜨고 지고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태양(1:5 참조)에 대해서 언급되는 바는 첫째로 신학에, 둘째로 윤리학에, 셋째로 자연학에 관계된다. 그렇지만 첫째 본문은 윤리학과 관련이 있고, 다른 두 본문은 자연학과 관련이 있다.

 

20) 이 장은 19장보다는 오히려 18장을 따른다.

'윤리적 성격을 띤 모든 본문': 사본에 따라 '모든 권고의 말씀'(S1), '수행에 관해 언급된 한말씀'(S2) 등으로 번역된다. 시리아어 판본들에서 번역된 '말씀'이란 단어는 성경의 한 본문이나 한 구절을 나타내기 위해서 에바그리우스나 오리게네스가 자주 사용하는 용어다.

'관상': 사본에 따라 다르게 번역되는 이 말은 아마도 여기서는 그리스어 본문에 있는 테오리아(theoria)란 용어일 것이다

 

 

 

5. 관상가의 자세 (21~36)

 

21. 비난받을 만한 사람의 말을 우의적으로 해석하지 말라. 그리고 하나님이 발람과 가야바의 경우에서처럼 당신의 신적 계획 때문에 그의 딸을 통해 역사하시지 않았다면 그의 말에서 어떤 영적인 것도 찾지 말라. 하나님은 발람과 가야바에게 역사하시어 전자는 구세주의 탄생을 예언하고(24:17-19 참조), 후자는 그의 죽음을 예언(11:49-51 참조)하게 하셨다.

 

21) '비난받을 만한 사람 ‥‥ 발람': 벧후 2:15-16; 11; 2:14를 통해서 확인된 한 고대 전승에 따르면 발람은 이스라엘을 벗나가게 했던 거짓 교사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이는 그가 비난받을 만한 사람 중 하나로 여겨지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가야바': 11:49-51참조.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가야바의 예언과 그분의 출생에 관한 발람의 예언을 똑같이 대비시키고 있다.

 

 

22. 관상가는 우울해서도, 또 다가가기 어려워서도 안 된다. 사실 전자는 피조물의 존재 이유를 모르는 사람의 태도이며, 후자는 모든 사람이 구원되고 진리를 인식하게 되기를(딤전 2,4 참조) 원하지 않는 사람의 태도이다.

 

22) 그리스어 본문을 보존한 사본들에서는 이 장이 15장 뒤에 나온다.

'우울해서도 또 다가가기 어려워서도 안 된다': 관상가는 우울해해서는 안 되며 더구나 자기에게 오는 사람에 대해 불쾌해해서는 안된다'(Sl; S3). '관상가는 우울해해서는 안 되며 더구나 질문하고 싶어하는 사람을 내쳐서도 안 된다'(S2).

'피조물의 존재 이유를 모르는 사람': 자연에 대한 영적 관상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을 뜻한다. 슬픔은 아직 인식을 맛보지 못했다는 표지다. 인식은 기쁨을 낳기 때문이다(프락티코스 90장 참조). 인식은 기쁨의 원천이다(참조: 프락티코스 24, 32; 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 III, 64; IV, 49).

'진리를 ‥‥ 원하지 않는 사람': 여기서는 딤전 2:4이 부정형으로 인용되고 있다.

 

 

23. 질문하는 사람이 들을 자격이 없기 때문에 때론 모르는 체해야 한다. 그대가 한 육체에 연결되어 있고 지금 사물들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대는 진실 될 것이다.

 

 

24. 성전에서 새끼비둘기들을 파는 사람들처럼 그대도 성소(聖所) 밖으로 쫓겨나지 않도록(21:12-13 참조) 이익이나 편의 혹은 헛된 영광을 위해서, 밝혀서는 안 되는 것들에 관해서 절대 말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24) '새끼비둘기들': 여기서는 단순히 마 21:12과 그 병 행구절들에서 나타나는 '비둘기들'을 말한다기보다 '성령의 열매들', '성령이 뿌린 씨앗들'(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 VI, 60 참조), '관상가가 받은 은밀한 진리들'로 이해해야 한다.

'성소': 여기서는 영지 혹은 영적 관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따라서 관상가가 탐욕이나 헛된 영광의 욕정에 빠지면 영지를 박탈당할 것이다.

'이익': '현자는 자기 가르침의 대가를 받아야 하는가?' 이 문제는 고대인들에게 논쟁거리였다. 사실 우리는 수사학자들이 가르침의 대가로 돈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수도승 세계에서는 놀라운 일일 수 있다. 그럼에도 라우수스의 역사(Historia Lausiaca) 이집트어 비평본에서는 에바그리우스가 자기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온 사람들(아마도 평신도들)에게서 상당한 양의 돈을 받아 자기 당가에게 건네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편의': 문자 그대로는 '좋은 대우를 받기 위해서'.

'주의하라': '자기 자신에 대한 주의'(prosoké) 개념은 수도승 문헌에서 널리 확산된 주요 개념이다(참조: 프락티코스 25: 수도 영성의 기원 42: 아타나시우스 · 안토니우스 사막의 안토니우스 허성석 옮김, 분도출판사 2015, 60; 202; 204).

 

 

25. 모르고서 논쟁하는 사람들에게는 끝이 아니라 처음부터 시작하여 진리에 다가가게 해야 한다. 젊은이들에게는 영지적인 것들에 대해 결코 말해서는 안 되며, 그들이 이런 종류의 책을 접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들은 이 관상이 수반하는 타락들에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여전히 욕정의 공격을 받는 사람들에게 어떤 평화의 말도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이 어떻게 적들과 싸워 이길 것인지를 말해야 한다. 코헬렛이 "전쟁이 일어나면 벗어날 수 없다"(코헬 8:8)고 말하는 바와 같다. 따라서 여전히 욕정의 공격을 받는 사람과 또 육적 존재와 영적 존재의 이유들을 탐구하는 사람은 건강에 관해 논쟁하는 병자와 비슷하다. 영혼은 욕정으로 인해 쉽게 동요되지 않을 때만 이 달콤한 벌집을 맛보는 것이 마땅하다.

 

25) '논쟁하는 사람들': '논쟁하다'(eriksein)라는 동사에 관해서는 26장 각주를 참조하라.

'젊은이에게': 36장에서도 젊은이들이 언급되는데, 13장에서 '수도승들'로 언급된 사람들과 동일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이는 S2"지금 수도승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라는 번역이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런 종류의 책을 접하다': 문자 그대로는 '이런 종류의 책들을 가까이하다'. 이런 종류의 책이란 영지적인 책을 말한다. 영지적 가르침은 오직 관상가에게만 유보된다.

'이 관상': S3는 이 말을 옮겨 적으면서 S1'환시'를 교정하여 테오리아(theoria)라는 그리스어를 보존했다. 영적 관상에 속하는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면 36장에서 말하는 바처럼 추문이나 경멸을 야기할 수 있다.

'평화의 말들': 그리스어 본문은 아마도 로고이(logoi)''말들'과 또 뒤의 구절에서처럼 '이유들'이라는 이중 의미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관상은 '아파테이아(평정)''평화'를 아는 사람에게만 접근 가능하다.

'적들': 안티케이메노이(antikeimenoi)는 에바그리우스가 악령들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통상적 용어다(프락티코스 42장 참조).

'육적 존재와 영적 존재의 이유': 영적 관상의 대상인 가시적 존재와 불가시적 존재들의 존재 이유를 뜻한다. '영혼의 건강''아파테이아(평정)'를 얻은 사람만이 이 영적 관상에 들어갈 수 있다(프락티코스 56장과 각주 참조).

'달콤한 벌집': 에바그리우스는 수도승에게 준 권고 72장에서 "꿀은 감미롭고 벌집은 달콤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그 둘보다도 더 달콤하다"고 말하고 있다. ''은 에바그리우스가 인식을 말할 때 사용하는 상징이다. 꿀 혹은 벌집에 비교하는 것은 성경에 기원을 둔다(참조: 19:11; 119:103; 24:13).

 

 

26. 설명할 때와 토론할 때가 따로 있다. 또 너무 빨리 반대하는 사람은 꾸짖어야 한다. 사실 이것은 이단자와 논객의 습관이다.

 

26) '설명, 토론': 이 말들은 가르침의 두 차원에 부합한다. , 설명은 제자가 오로지 스승의 가르침을 경청해야 하는 예비교육 차원이고, 토론은 진보한 이들에게 유보된 보다 월등한 탐구의 차원이다. 이는 스승과 제자 간에 논쟁의 대상일 수 있는 자유롭고 대수롭지 않은(12장 참조) 문제들과 관련한 토론이나 연구를 가리킨다.

'반대하다': '그 말을 거역하다'(S1), '토론하다'(S2), '그들은 우리에게 그 탐구에서 드러나는 문제들을 제시하면서 우리의 해석을 방해한다'(S2).

'논객': '논쟁하는 사람'(25장 서두 참조) 혹은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뜻한다.

 

 

27. 하나님에 대해서 경솔하게 말하지 말 것이며, 절대로 신성을 정의하지도 말라. 사실 정의(定義)는 피조물에게 고유한 것이다.

 

27) 이 장은 소크라테스가 인용한 부분들 중 첫째 부분이다. 그는 글자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상당히 자유롭게 간접 인용을 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교회사에서 이렇게 인용한다. "에바그리우스는 수도승들에 관한 작품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성급하고 경솔하게 말하지 말라고 하며 신성을 정의하는 것을 절대 금지한다. 그분은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실 정의는 창조된 존재에게 고유한 것이다"(III, 7).
'정의': 단지 피조물에 대한 정의만 있을 뿐이다. 에바그리우스에게는 창조되지 않은 삼위일체는 분석의 대상이 아니다(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 V, 62 참조).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덧붙인 '그분은 단순하기 때문이다'는 에바그리우스의 생각에 완전히 부합한다. '하나님은 단순하고 조성되지 않은 모든 것을 통해서 알려진다.'

 

 

28. 버려짐의 다섯 가지 이유를 명심하라. 그러면 그대는 고통으로 상처받은 소심한 영혼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버려짐을 통해 감추어진 덕이 드러난다. 덕이 소홀히 되었을 때, 버려짐이라는 벌을 통해 감추어진 덕이 회복된다. 그러면 버려짐은 다른 사람을 위한 구원의 원인이 된다. 덕이 탁월해졌을 때, 버려짐은 부분적으로 덕을 소유한 사람에게 겸손을 가르친다. 참으로 악을 경험한 사람은 악을 미워한다. 그래서 그 경험은 버려짐의 결과이며, 이 버려짐은 아파테이아(평정)의 딸이다.

 

28) 이 장의 핵심 단어는 '버려짐'이다. '버려짐'은 하나님께서 때때로 인간을 유혹에 처하게 하면서 방치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내버림'이다. 이 장은 바로 하나님께서 내버리시는 다섯 가지 이유에 관한 것이다. 그 이유들을 알아야 하는 것은 영적 지도자로서 관상가의 역할이다.

'버려짐을 통해 감추어진 덕이 드러난다': 욥이 좋은 예다. 주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의롭게 보인다고 내가 너에게 그것을 다르게 사용했다고 믿지 말아라"(40:8 칠십인역).

'벌을 통해서 ‥‥ 회복하다': 하나님의 도움은 유혹받는 사람에 대한 시험을 통해서든 그가 받는 벌을 통해서든 유혹당할 때 주어진다.

'버려짐은 ‥‥겸손을 가르친다': 버려짐이 겸손을 가르친다는 것은 에바그리우스가 자주 표현하는 개념이다. 그는 시편 주해 89:3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죄 속에 방치하실 때, 바로그때 그분은 인간을 겸손으로 향하게 하신다" 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 구원된 사람이 버려져 자기 본성의 연약함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여덟가지 영 18)라고 말한다. 이런 버려짐은 특히 자신의 덕으로 인해 교만해진 사람에게 일어난다. "교만한 영혼은 하나님께 버려져 악령들의 노리갯감이 된다"(여덟가지 영 17).

'참으로 ‥‥ 사람은 악을 미워한다': '참으로'라는 표현은 에바그리우스가 즐겨 사용하는 논증 형태인 연쇄 추리의 첫마디다.

'아파테이아(평정)의 딸': 이 논증은 연쇄 추리의 형태를 취하므로 여기서 '아파테이아의 딸'은 마지막 말마디다. 아파테이아에 도달한 사람이라도 버려짐을 경험할 수 있다. 이 버려짐의 목적은 그에게 악을 경험하게 하여 더욱 증오하게 하기 위함이며, 이를 통하여 가장 높은 아파테이아에(평정)까지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버려짐'에 적용된 '아파테이아의 딸'이란 표현이 놀라운 것은 아니다. 에바그리우스는 다른 곳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참조:' 프락티코스 머리말 8: 81).

 

 

29. 그대가 가르치는 사람들은 항상 그대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14:10). 위로 올라가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그대는 듣는 이에 의해서 다시 아래로 내려오게 되기 때문이다.

 

29) S1Arm을 제외한 번역본들은 대체로 그리스어 본문에 충실하다. S1"자신의 가르침으로 올라간 후에", Arm은 마지막 구절을 매우 자유롭게 번역하며 "듣는 이에 의해서"를 빠뜨린다. 항상 가르침의 황금률은 '듣는 이의 수준에 머무르는 것''오로지 듣는이가 필요로 하는 바에 따라서 올라가는 것'이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앞서 인용한 누가복음의 구절과 연결되는 문장이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14:9).

 

 

30.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돈을 갈망하는 사람이 인색하다. 집사는 합리적인 돈주머니라고 사람들이 말하기 때문이다.

 

30) '돈을 갈망하는 사람': 이는 '돈을 사랑하고 돈을 얻으려고 갈구하는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색한 자는 돈에 대한 욕심을 가진 사람이다. 그에게 돈은 상황에 따라 사용하는 것이라기보다 획득의 대상이다"(Éthique à Eudéme III, 4, 1232). 아리스토델레스처럼 에바그리우스도 인색한 사람을 반대하는데, 그가 돈을 소유하려고 갈망하기 때문이다.

'집사': 집사의 존재는 니트리아, 켈리아, 스케티스 수도승들 사이에서 확인된다. 팔라디우스의 라우수스의 역사10장에서 팜부스는 집사 하나를 데리고 있었고, 델라니아가 자기에게 준 돈을 그에게 맡기며 가난한 수도원들에 나누어 주라고 말한다. 에바그리우스도 자기와 함께 살았던 집사에게 많은 방문객에게서 받은 돈을 맡겼다.

'합리적인 돈주머니': 이성이 있는 사람을 뜻한다. 집사의 역할은 관리자인 동시에 분배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는 인색하지 않으면서 돈을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 장에서 집사는 관상가를 말한다. 관상가는 인식을 소유하지만, 그것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 V, 33 참조). 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에서 에바그리우스는 "집사는 다른 사람들의 스승이라고 불린다"고 말한다. 잠언 주해에서는 "말을 거부하고 덕으로써 악령을 다스린 사람은 누구나 각 형제에게 그의 상태에 맞는 영적 인식을 나누어 주면서 '하나님 신비들의 집사'(고전 4:1 참조)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잠언 주해 17:2).

 

 

31. 나이 든 이에게는 분노를 다스리도록 권고하고 젊은이에게는 배를 다스리도록 권고하라. 영혼의 악령들은 전자에 맞서 싸우고, 육체의 악령들은 대개 후자에 맞서 싸우기 때문이다.

 

31) 번역본들은 대체로 그리스어 본문에 충실하다. 하지만 S1S3'악령''욕정'으로 바꾸었다. '영혼의 악령''육체의 악령''영혼의 욕정을 주재하는 악령', '육체의 욕정을 주재하는 악령'에 대한 간결한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게 바꿔 쓴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영혼의 욕정''육체의 욕정'의 구분에 관해서는 프락티코스 35장과 그 각주를 참조하라. 에바그리우스는 영혼의 욕정을 정념부에 결부시키고, 육체의 욕정을 여기서 ''로 언급된 욕망부에 결부시킨다(프락티코스 38장 각주 참조). 이 장에서 에바그리우스가 관상가인 영적 지도자에게 하는 이중 권고가 설명된다. 영혼의 욕정을 주재하는 악령은 죽을 때까지 집요한 반면, 육체의 욕정을 주재하는 악령은 비교적 빨리 물러가기 때문이다(프락티코스 36장 참조).

 

 

32. 그대 귀에다 험담하는 사람에게 입을 닫아걸고, 많은 사람이 그대를 비난해도 놀라지 말라. 이것은 악령에게서 오는 유혹이기 때문이다. 사실 관상가는 이것이 자기가 원하는 바가 아닐 때조차 증오와 악에 대한 기억에서 자유로워야한다.

 

32) '그대 귀에다 험담하는 사람': S1'그의 동료를 거슬러'를 덧붙이고는 '그대 앞에서 서로를 비방하는 사람들'로 번역한다.

'자기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그들 자신이 원하지 않다'이다. 필사본들에는 '그 자신이 원하지 않다', '그 마음에 들지 않다'로 쓰여 있다. 아마도 이 장은 오리게네스주의적인 견해 때문에 사막에서 표적의 대상이 되었던 에바그리우스와 그의 동료들에 대한 적대감을 간접적으로 반영한 것 같다. 반박에 응대하지 말고 화를 내지도 말라는 권고는 기도론 l2장에서도 나타난다. 관상가를 중상하는 악령의 유혹은 그를 화나게 하여 관상을 앗아 가려는 것이다(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 III, 90 참조). 관상가가 분노를 경계하는 것에 대해서는 5장과 10장을 보라.

 

 

33. 주님 때문에 사람을 치유하는 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자신도 치유한다. 관상가가 쓰는 약은 가능한 한 자기 이웃을 치유하지만 반드시 그 자신을 치유하기 때문이다.

 

33) '사람을 치유하다': S2는 실제 약으로써가 아니라 관상가가 치유한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가르침을 통하여'를 덧붙이고 있다.

'가능한 한 ‥‥ 반드시': S1S3에는 '그는 가능한 한 이웃을 치유하지만 반드시 자기 영혼(그 자신)을 치유한다'로 되어 있다. S2에는 '그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거나 유익하지 않지만, 부지런히 자기 영혼을 건강하게 한다'로 되어 있다. 관상가는 약에 비유되는데, 이는 그가 영혼의 건강, 즉 아파테이아(평정)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영혼의 질병인 욕정을 치유하는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프락티코스 56장 참조). 관상가는 자기 임무를 수행하면서 '영혼의 약'이라고 말하는 그리스도께 일치된다.

 

 

34. 그대는 비유에 적합한 모든 것을 영적으로 설명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주제에 맞는 것만을 설명해야한다. 그대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요나의 배에 관해서 각각의 선구(船具)를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1:5 참조). 또 그대는 듣는 이에게 유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대 주위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이런저런 선구(船具)를 상기시킬 것이며, 웃음으로써 그대가 잊어버린 것을 그대에게 상기시킬 것이다.

 

34) '비유에 적합한 모든 것': S1'비유에 알맞은 모든 말씀'으로, S3'비유에 연결되는 모든 것'으로, 그리고 S2'신비에 적합한 모든 것'으로 번역 하고 있다.

'각각의 선구': 1:5에서 '선구'는 하물(荷物)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서는 배의 선구를 나타내는 듯하다. 에바그리우스는 21장에서처럼 여기서도 우의적 해석(영적 해석 )의 한계를 제시한다. 성경 본문의 모든 세목을 영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5. 그대에게 오는 수도승에게 윤리에 관해서 이야기하도록 초대하라. 교의에 관해서는, 누가 이 문제들에 전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명되지 않는 한 그렇게 하지 말라.

 

35) '윤리에 관해서': S1에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덕행의 유형에 관해서', S2에는 '신앙에 관해서', S3에는 '권고에 관해서', Arm에는 '습관에 관해서'로 되어 있다.

'이야기하도록': S1'누구나 그대와 함께'를 덧붙이고 있다. 사실 본문은 단체 방문객들보다는 오히려 개별 방문객을 말하고 있다.

'초대하라': S1, S2, S3에는 '설득하라'Arm에는 '그대는 권고할 것이다'로 되어 있다.

'교의에 관해서': 여기서 '교의''하나님 인식에 대한 가르침'(S1)을 뜻한다. 13장에서는 도그마(dogma)란 말로 번역되는 이 '교의'는 신앙 교의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유로운 탐구 대상일 수 있는 자연학과 신학을 통해서 드러나는 가르침을 말한다.

 

 

36. 세속인들과 젊은이들에게는 심판에 관한 고차원적 이유는 밝히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쉽게 경멸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무지에 처해진 이성적 영혼의 고통을 모른다.

 

36) '이유'(logos)': 아직 충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없는 이성적 존재의 운명과 관련된 내용을 말한다. 신적 섭리와 심판의 이유에 관해서는 48장을 참조하라.

'그들은': 영적 인식을 맛보지 못한 초심자들이다. 여기서는 세속인과 젊은이를 말한다.

'무지에 처해진': 이 문장을 '사실 그들은 단죄된 이성적 영혼의 고통이 무지라는 것을 모른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인식이 선인(善人)의 보상인 것처럼 무지는 악인(惡人)의 대가다. 이런 생각은 에바그리우스 작품에서 자주 표현되었다["그리스도의 심판정에서 이성적 존재가 받게 될 것은 영적 몸 혹은 악마적 몸이며, 그들에게 적합한 것은 관상 혹은 무지다"(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 VI,57)]. 그러나 인식이 마련하는 선은 그것을 맛본 사람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다(프락티코스 32장 참조).

 

 

 

6. 관상가의 유혹과 죄 (37~43)

 

37. 성 바오로는 자기 육체를 억압하면서 종속시켰다(고전 9:27 참조). 따라서 그대 생애 동안 단식을 소홀히 하지 말고, 비대해진 육체로 단식을 무시하면서 아파테이아(평정)를 망치지 말라.

 

37) '단식': 여기서 단식이란 '식이요법'의 의미로 알아들어야 한다["사랑에 연결된 매우 엄격하고 규칙적인 식이요법은 수도승을 아파데이아(평정)의 문으로 더욱 빠르게 인도한다." 프락티코스 91장 참조)]

'아파테이아': 영혼의 건강을 뜻한다.

'비대해진 육체로': 이는 '무거운 육체로' 혹은 '제어되지 않은 육체로'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어느 정도의 아파데이아에 도달한 관상가라 하더라도 금욕적 수행, 특히 음식과 관련된 수행에서 면제될 수 없다. 이런 생각은 다음 장에서 다시 나타난다.

 

 

38. 음식과 의복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6:25 참조), 오히려 레위인 아베네르(오벧에돔)를 기억하라. 그는 주님에게서 궤를 받고서 가난했지만 부유하게 되었고 업신여김을 당했으나 영광스럽게 되었다(삼하 6:10-11 참조).

 

38) 음식과 의복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것은 에바그리우스가 이미 수도승생활의 원리 3장과 4장에서 초심자에게 준 권고이다. 이 권고는 관상가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관상가가 그러한 걱정거리에서 자유로워야 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관상가는 여기서 궤로 상징화된 인식을 받고서 그 인식 위에서 모든 것을 받으며 주님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6:33 참조). 궤의 덮개는 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 IV,63에서는 영적 인식을 상징한다.

'아베네르'(Abener): 칠십인역 본문에서 다윗이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승리한 후, 주님의 계약 궤를 예루살램으로 모셔 가던 중 계약궤를 자기집에 모셨던 인물이다. 그는 칠십인역에서는 아랫다라(Abeddara)라 불리고, 히브리 성경과 시리아역 성경에서는 갓사람 오밷에돔이라 불린다. 여기서는 이 인물이 아베네르라 불리는데, 이는 사울의 장수였지만 나중에 다윗에게 가담한 아브네르(아브넬,Abnerd, 삼상 14:50; 삼하 2-3장 참조)와 혼동한 결과다.

 

 

39. 관상가의 양심은 그에게 혹독한 고발자이다. 그는 양심에게 어떤 것도 감출 수 없다. 양심은 그의 마음 속 은밀한 것까지 알기 때문이다.

 

39) '혹독한 고발자': 에바그리우스는 여기서 고대 스토아학파 이후 많은 저자에게 영향을 주었던 전통적인 주제, '고발자인 양심'이란 주제를 다시 취하고 있다.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영혼이 자기가 범한 잘못을 기억할 때 양심이 움직여 마치 그 고유의 바늘로 찌르는 것 같고 양심 자체가 영혼의 고발자이자 원고 측 증인이 된다(참조: SC 252, 384-385). 이 개념은 수도승 문학에서도 나타난다. "수도승은 어떤 일에서도 고발자인 자기 양심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교부들의 금언 아카톤 2).

'그는 양심에게 어떤 것도 감출 수 없다': 세네카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양심이 아니라 여론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는 자는 잘못하는 것이다. 당신이 행하는 바에 대해 두 명의 재판관이 있으니, 곧 당신이 속일 수 없는 당신 자신과 당신이 속일 수 있는 대중이다'(De Beneficiis VI,42).

'양심은 그의 마음속 은밀한 것까지 안다': 에바그리우스는 프락티코스 46장과 47장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그분만이 '마음 안에 숨겨진 것을 아시는 분'이라고 말했던 바를 여기서는 양심 자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양심에 대한 이 개념은 스토아학파의 개념에 더 가까운 듯하다. 에바그리우스는 이 장에서 자기보다 앞선 저자들이 모든 사람의 양심에 대해서 말한 바를 단순히 관상가의 양심에만 결부시키지 않는다. 양심은 관상생활에 들어선 사람에게는 여전히 더 많은 요구를 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 관상가 역시 온갖 소홀함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37, 38장 참조)

 

 

40. 각 피조물의 존재 이유는 단지 하나가 아니라 여렷이며, 각각의 정도에 따라 드러난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천사들(거룩한 능력들)은 사물들의 진정한 존재 이유는 알지만 최초의 존재 이유는 모른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려진다.

 

40) '존재 이유': 그리스어로 로고스(logos)를 말하는데, 이는 모든 피조물의 존재론적 원리를 나타낸다.

이 장에 대한 해석은 쉽지 않고 번역도 여전히 불확실한 채 남아있다. 이 장은 로고이(logoi, 존재 이유들)에 대한 에바그리우스의 가르침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 영적 관상은 피조물을 그 창조 이유(존재 이유) 안에서 알게 해 준다(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 V,40 참조). '로고이'는 말씀이신 로고스(그리스도) 안에 자기 기원을 갖는다. 그리스도만이 각 피조물의 최초 존재 이유를 아신다. 이성적 존재들(logoikoi)과 천사들이 그들의 현 상태에서 알고 있는 존재 이유들은 단지 최초 존재 이유의 부분적인 여러 양상일 뿐이다.

 

 

41. 모든 명제는 술어나 유개념, 또는 특징이나 종개념, 혹은 고유성이나 우유성(偶有性), 또는 이러한 것들로 구성된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삼위에 관해서는 연급된 것들 중 어떤 것도 적합하지 않다. 형언할 수 없는 분은 침묵 중에 흠숭받아 마땅하다!

 

41) 이 장은 소크라테스가 27장에 이어 두 번째로 인용한 장이지만, 약간 다르게 인용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자신이 에바그리우스의 것을 문자 그대로 인용했다고 강조한다. "에바그리우스는 이것 역시 문자 그대로 가르친다." 마지막 형식, "우리가 나중에 말하려는 바는 바로 에바그리우스가 말한 바이다"44-48장에서 인용되는 한 구절을 참조한다. 에바그리우스는 신학자들의 가르침을 인용할 때 "  …가 말했다"라는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성삼위에 관해서는 언급된 것들 중 어떤 것도 적합하지 않다': 이 구절은 S2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그러나 성삼위는 그 모든 것을 능가하며, 우리가 그 주제에 관한 것들 중 어떤 것을 생각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이것은 에바그리우스가 하나님을 정의하는 일을 만류하고 있는 27장과 비슷하다.

'형언할 수 없는 분은 침묵 중에 흠숭받아 마땅하다': 이 결어는 그리스철학 전통, 특히 신플라톤주의에서 널리 확산된 주제를 다시 취하고 있다. 하지만 에바그리우스는 이런 생각을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에게서도 전해 받았을 것이다. 이는 그레고리우스에게 매우 친숙한 주제다.

 

 

42. 관상가의 유혹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아니면 존재하는 것을 실재와 다르게 존재하는 것처럼 정신에게 제시하는 그릇된 견해다.

 

42) 이 장과 다음 장은 쌍을 이루고 있고 프락티코스 74('수도승의 유혹은 ')75('수도승의 죄는 ')과 병행된다. 여기서는 관상가의 고유한 유혹을 말하고 있다. 관상가의 유혹은 그 이성적 성격 때문에 여전히 수행생활을 하고 있는 수도승의 유혹과 구분된다.

 

 

43. 관상가의 죄는 사물들 자체나 그것들의 관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다. 그릇된 인식은 그 어떤 욕정에 의해서 생겨나거나 선을 위해서 사물을 탐구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43) '그릇된 인식': 참된 인식에 반대되는 모든 거짓 교설이나 이단을 나타내기 위하여 에바그리우스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다(수도승에게 준 권고 126. 참조). 타락한 관상가는 이단의 지지자가 된다(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 V, 38 참조). 관상가의 죄는 더 이상 프락티코스 75장에서 말하는 욕정적인 생각이 제시하는 금지된 쾌락에 동의하는 행위나 이성적 성격의 행위가 아니라 오류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오류는 단지 이성의 과실에만 기인하지 않고 관상가가 여전히 욕정에 매여 있는 데서 유래한다. 그 오류는 세상에 대한 사랑에서 생겨난다(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 IV, 25 참조).

 

 

 

7. 교부들의 가르침 (44~48)

 

44. 우리는 의로운 그레고리우스에게서 관상을 위해서는 현명, 웅기, 절제, 정의라는 네 가지 덕이 중요하다는 것도 배웠다. 그는 현명의 역할이 정신적이고 거룩한 능력들(천사들)의 존재 이유와는 상관없이 그것들을 관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것들은 오직 지혜를 통해서만 계시된다고 그는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용기의 역할은 싸움의 순간에도 진리 안에 항구히 머무르는 것이며, 실재하지 않는 것에 모험하지 않는 것이다. 처음에 씨 뿌리는 자에게 씨앗을 받는 것과 나중에 씨 뿌리는 자를 거부하는 것이 절제의 고유 역할이라고 그는 대답한다(13:25 참조). 정의(定義)의 역할은 각 사람에게 그 수준에 따라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 어떤 것들은 모호하게 말하고, 다른 것들은 비유들을 통해 알게 하고, 또 어떤 것들은 단순한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44) 이 장부터 49장까지 신학자들의 말을 인용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집트 수도승에 관한 장에서 이 장 거의 대부분을 보존하고 있다. 이 장들은 소크라테스가 인용한 프락티코스 91-99장 다음에 나오며,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그노스티코스에서 말하는 바이다."

42장과 43장이 프락티코스 74장과 75장에 병행되듯이 이 장은 프락티코스 89장과 병행된다. 여기서도 프락티코스그노스티코스의 관련성이 나타난다.

'우리는 의로운 그레고리우스에게서 배웠다': 에바그리우스는 프락티코스 맺음말에서도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를 '의로운 그레고리우스'라 말하고 있고 그를 항상 자기 스승처럼 소개한다. 프락티코스 89장에서는 그를 명시적으로 거명하지 않고 '우리의 지혜로운 스승'이라 말하고 있다. '우리는 배웠다'. '그는 말하였다'. '그는 대답한다'. 등의 동사들이 보여 주듯이 아마도 구두 가르침을 뜻할 것이다.

'관상을 위해서': 관상생활에 고유한 덕들이 수행생활에 관한 덕들과 짝을 이루고 있다.

'현명, 용기, 절제, 정의': 이 덕들은 프락티코스 89장에서 이미 언급된 스토아학파의 사추덕을 뜻한다. 처음 세 가지 덕은 영혼의 세부분 각각에 연결된 덕들이고, 마지막 덕은 영혼 전체에 관련된다. 그 각각의 역할이 언급되면서 이 덕들이 차례차례 정의되고 있다.

'정신적이고 거룩한 능력들': 천사들을 말한다. 프락티코스 89장에서 "적대 세력에 맞서서 작전을 지휘하는" 현명의 역할과 비교해 보라. 적대 세력이란 악령을 뜻한다.

'오직 지혜를 통해서만': 프락터코스 89장에서 "육체 사물과 영적 사물의 존재 이유를 관상하는" 지혜의 역할과 비교하라.

'진리 안에 항구히 머무르는 것': 프락티코스 89장의 "원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위험 앞에서 용감하고 굳세게 머무르는 것은 인내와용기의 역할이다"와 비교해 보라.

'실재하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오류의 한 형태이다. 42장을 참조하라.

'처음에 씨 뿌리는 자에게서 씨앗을 받는 것': 프랑켄베르크(W. Frankenberg)가 편집한 본문에는 "우리가 하늘의 농부에 의해서 우리 안에 심긴 최초의 씨앗을 받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나중에 씨 뿌리는 자': 이것은 마 13:25에 나오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연상시킨다. '나중에 씨 뿌리는 자''나중에 가라지를 뿌리는 사람' 혹은 '가라지를 뿌리는 또 다른 씨 뿌리는 사람'을 뜻한다.

'절제': 에바그리우스에게 '극기''절제(seosyne)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프락터코스 89장을 참조하라. 관상가에게 절제는 오류를 거부하는 덕이다. 수행자에게 절제가 악한 생각을 억제하는 덕인 것과도 같다(프락티코스 89장 참조).

'정의': 프락티코스 89장에서 에바그리우스는 영혼의 세 부분의 조화를 보장하는 덕으로서 플라톤의 정의 개념을 취한다. 이 장에서는 정의를 관상가의 고유 역할에 적용하면서 분배 정의에 대한 아리스토델레스적이자 스토아적인 개념을 채택하고 있다. , 관상가는 자신의 가르침 중에서 가르침을 구하는 이의 수준에 맞는 가르침을 전해 주어야 한다(참조: 12, 13, 23, 25, 35, 36).

'각 사람에게 그 수준에 따라 가르침을 주는 것': S1에서는 '말씀이든 물건이든 각자에 맞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S3에는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생각을 전해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S2에 따르면, '그가 그것에 합당한지에 따라 각 사람에게 응답하는 것'이다.

'모호하게 ‥‥ 비유들을 통해': 에바그리우스는 여기서 관상가에게 주고 있는 권고를 그 자신도 따랐다(프락티코스 머리말 9 참조). 이 권고를 36장과 비교해 보라.

'단순한 사람들의 유익': 에바그리우스는 성경 본문 해석과 관련해 단순한 사람과 진보한 사람에게 말해야 할 내용을 구분하고 있다.

 

 

45. 진리의 기둥(딤전 3:15) 카파도키아의 바실리우스가 말했다. "사람들로부터 오는 인식은 공부와 꾸준한 훈련을 통해서 강화되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인식은 정의, 분노의 억제, 자비로써 강화된다. 첫째 인식은 여전히 욕정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둘째 인식은 오직 아파테이아(내적 평정)에 이른 사람들만이 얻을 수 있다. 게다가 그들은 기도 중에 자기를 비추는 정신의 고유한 빛을 관상한다."

 

45)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는 이 장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닐루스의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진리의 기둥': 이 표현은 딤전 3:15에서 유래한다. 기둥은 은유적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바실리우스는 특히 주교를 기둥에 비유했다. 에바그리우스는 자신이 젊은 시절부터 알았던 바실리우스에게 이 표현을 적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통 교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카파도키아의 이 위대한 인물이 보여 주었던 이단에 대한 확고한 저항을 암시한다.

'사람들로부터 오는 인식': 공부로 얻은 이교적 인식을 뜻한다. 이 인식은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온 아파테이아를 전제하는 영적 관상과 대조를 이룬다(4장 참조).

'공부와 꾸준한 훈련': 여기서 공부란 '주의 깊은 묵상' 혹은 '주의 깊은 숙고'를 뜻한다.

'정의': 프락티코스 89장을 보면, 정의는 아파테이아 상태의 특성인 영혼의 세 부분의 조화를 보장하는 덕이다. 여기서는 정의가 에바그리우스가 앞장에서 채택한 정의의 또 다른 개념을 뜻한다.

'분노의 억제': 분노는 관상에 큰 장애물이다(4장 참조).따라서 분노를 억제하는 것은 '아파테이아'의 주요 덕들 중 하나다(5장 참조). '자비': 자비는 영혼의 정념부의 문제를 치유하는 치료제와도 같다(참조: 7프락티코스 15).

'첫째 ‥‥ 둘째': S1은 이미 20장에서 언급된 순서에 따라 이 두 용어를 각각 설명한다. '사람에게서 온 인식 ‥‥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인식.' 마찬가지로 S2'첫째 가르침 ‥‥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우리에게 오는 인식'을 언급한다.

'기도 중에 ‥‥ 빛을': 악한 생각은 기도 중에 정신을 비추는 빛을 사라지게 한다. 에바그리우스에게 기도는 순수한 기도, 즉 가장 높은 형태의 기도를 뜻한다. 에바그리우스는 기도론에서 특별히 이런 형태의 기도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참조: 기도론 67; 70; 72; 97). 이 기도 중에 정신은 자신의 고유한 빛을 보게 된다. 프락터코스 64장과 비교해 보라. "정신이 그 고유의 빛을 보기 시작하는 것은 ‥‥ 아파테이아의 표지이다." 정신의 빛에 관해서는 특별히 기도론 73장과 74장을 보라. 이 환시는 아파테이아를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46. 이집트의 거룩한 등불 아타나시우스가 말했다. "모세는 식탁을 북쪽으로 두라는 명령을 받는다(26:35 참조). 관상가는 누가 자기를 거슬러 말하는지 알아야 하며, 모든 유혹에 용감하게 맞서야 하고 나타나 사람들(제자들)을 열성적으로 양육해야 한다."

 

46) '이집트의 거룩한 등불 아타나시우스': 에바그리우스는 자기 스승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가 아타나시우스에 대해 언급한 '교회의 기둥'이라는 표현 대신 '이집트의 거룩한 등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레고리우스는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 이단을 거슬러 오랜 투쟁을 했기에 그를 일컬어 '교회의 기둥'이라고 했다. '등불'은 주교에 게 사용되는 은유적 표현이다.

'관상가는 ‥‥ 알아야 한다': 에바그리우스가 이 절에 부여하는 우의적 해석은 오리게네스가 출애굽기 강해 IX, 4에서 등불에 관해서 해석하는 바를 연상시킨다. 오리게네스는 등불을 남쪽에 두어 북쪽을 바라보고 거기서 오는 사람을 살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항상 깨어 부지런히 악마의 속임수를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는 늘 유혹이 어디에서 오는지, 원수가 어디에서 나타나는지, 적이 어디에서 슬그머니 끼어드는지를 알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에바그리우스는 오리게네스의 이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등불에 관해서가 아니라 식탁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누가 자기를 거슬러 말하는지': 사실 악령(여기서는 북쪽에서 오는 자와 동일시됨)을 효과적으로 대적하기 위해서는 악령을 식별하는 일이 중요하다. 안토니우스의 생애 43장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어떤 환영이 나타나면 당황하지 말고 먼저 용기 있게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이렇게 질문하십시오. '너는 누구고 어디서 왔느냐?'" 악령을 식별하는 것은 단순히 악령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관찰하여 그 악령에게 적절히 응수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참조: 프락티코스 43; 50; 51).

'양육해야 한다': 식탁은 환대의 상징이다(프락티코스 26장 참조). 26:35에서 이 식탁은 제사상을 뜻한다. 이 성경 본문에 대한 오리게네스의 주석에 따르면, 이 빵은 '사도적 말씀'을 나타낸다.

관상가는 가르침에 전념하면서 애덕의 한 형태인 환대를실천한다(7장 참조). 여기서 '나타나는 사람들'은 관상가의 제자들이다. 따라서 그가 살펴야하는 유혹은 무엇보다도 이단이다.

 

 

47. 트무이스(Thmuis) 교회의 천사(2:1,8,12; 3:1,7,

14). 세라피온이 말했다. "정신은 영적 인식을 마셨을 때 완전하게 정화되고, 애덕은 정념으로 불붙은 부분을 치유하며, 나쁜 욕망의 흐름은 고행을 통해 멈추어진다."

 

47) '트무이스 교회의 천사': 요한 계시록(2:1,8,12; 3:1,7,14)에서 따온 표현으로 이곳 교회의 수장을 나타낸다. '천사'란 단어는 아마도 여기서는 세라피온이 트무이스 교회의 주교가 되기 전에 먼저 안토니우스의 제자로, 그 다음 한 수도승 공동체의 장상으로 오랫동안 수도승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 같다. 세라피온은 앞 장에서 인용된 아타나시우스의 친구였다.

'정신은 영적 인식을 마셨을 때': 음료는 영적 인식 혹은 영적 관상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비유다. 수도승에게 준 권고 119("그리스도의 피는 창조된 존재들에 대한 관상이며, 그것을 마시는 사람은 그분에 의해서 지혜로워질 것이다")을 보라. 천사는 사람에게 영적 관상을 가르치라는 임무를 받았다. 아파테이아(내적 평정)를 통해 얻은 정신의 순수함은 영적 관상에 다가가는 조건이지만 동시에 정신의 정화를 완수하는 데도 기여한다.

"이 장을 케팔라이아 그노스티카 III, 35("영적 인식은 정신을, 애덕은 정념을, 그리고 정결은 욕망을 치유 한다")와 비교해 보라. 프락티코스 l5장과 38장과도 비교해 보라. 이 가르침은 세라피온의 다른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48. 위대한 영지적 스승 디디무스(Didimus)가 말했다. "섭리와 심판과 관련된 이유에 관해 끊임없이 묵상하라. 그리고 그 내용을 그대 기억 속에 간직하도록 노력하라. 거의 모든 사람이 이 문제로 인해 넘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육체와 세계의 다양성 안에서 심판과 관련된 이유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악과 무지에서 덕과 인식으로 나아가게 하는 방식들 안에서 섭리와 관련된 이유들을 발견할 것이다.

 

48) 이 장은 소크라테스가 인용한 마지막 장이다. 소크라데스는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장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제시한 에바그리우스의 발췌문들은 이러하다."

'위대한 영지적 스승': 디디무스를 지칭하여 사용하는 표현이다.

'묵상하': 에바그리우스는 여덟 가지 악한 생각을 다루는 다른 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한이 없는 사람은 영적인 문제에 관해 묵상하고 밤 동안에 그 의문에 대한 해결책을 얻는다."

'이 문제로 인해 넘어지다': 섭리와 심판의 이유를 아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은 수도승에게 준 권고 l32["신적 섭리의 이유는 모호하고, 정신이 이해하기 힘든 것은(벧후 3:16 참조) 심판에 대한 관상이다. 그러나 수행자는 그것을 알 것이다"]과 비교하라.

'육체와 세계의 다양성': 여기서 죄의 정도에 따라 원래의 선한 상태에서 다양한 육체를 입고 다양한 세계로 떨어진 타락한 존재들에 관한 오리게네스의 가르침이 암시되어 있다(프락티코스 분도출판사 2011, 33-34 참조). 에바그리우스는 피조물들이 처한 이런 다양한 육체들과 세계들을 바라보고 묵상할 때 심판의 이유들을 알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방식들': 우리를 악과 무지에서 덕과 인식으로 이끄는 다양한 방식들을 묵상하다 보면 거기서 하나님 섭리에 관한 이유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심판과 섭리에 관한 이유들에 대한 묵상은 우리를 악과 무지에서 덕과 인식으로 나아가게 해 준다. 덕과 인식, 악과 무지의 상호관련성에 관해서는 17장을 보라.

 

 

 

8. 맺음말

 

49. 수행의 목적은 정신을 정화하여 욕정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자연학의 목적은 모든 존재 안에 감추어진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을 사물에서 멀어지게 하여 제일원인(第一原因)을 향해 돌아서게 하는 것, 그것은 신학의 한 선물이다.

 

49) 다음 장과 함께 프락티코스그노스티코스 전체의 결론과도 같은 이 장에서 에바그리우스는 프락티코스 1장에서 했던 삼중 구분(12장 각주)을 다시 취하고 있다.

'수행의 목적': 수행은 영혼의 욕정부를 치유하는 결과를 가져온다(참조: 2; 프락티코스 78). 그러나 수행의 목적은 수행을 통해 정신 그 자체를 정화하여 관상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존제': 창조된 존재들을 말한다.

'사물': '모든 지상 사물' 또는 '모든 피조물'을 뜻한다.

'제일원인을 향해': 하나님을 나타내는 이 표현에 대해서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담화 28,13 (ed. Gallay, SC 250, 128)을 참조하라. "모든 이성적 피조물은 제일원인이신 하나님을 갈망한다."

'신학의 한 선물이다': S2'선물' 앞에 '위대한'을 덧붙인다. S2'수행에 대한 가르침의 목적 ‥‥ 자연학에 대한 가르침의 목적' 이라고 번역하면서 이 장의 의미와 존재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한 것처럼 보인다. , 관상가는 어떤 사람에게는 수행을 가르치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영지적 진리를 가르치면서 불순한 자를 정화하고 순수한 자를 비추려 한다(3장 참조). 이는 그들을 신학에 적합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러나 신학에의 접근이 단지 가르침에만 매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은총의 선물이기도 하다.

이 장은 본질적으로 관상가의 가르침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이 책의 가장 훌륭한 결론과도 같다.

 

 

50. 죄인을 구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어떤 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항상 원형(原型)을 바라보면서 형상을 새기려고노력하라."

 

50) '죄인을 구제하다': 관상가는 자기 가르침을 통해 죄인이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최초 상태로 돌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항상 원형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따라서 관상가는 어느 정도 신학자여야 한다(49장 참조). 이 장은 앞장과 함께 이 작품의 멋진 결론과도 같다.

'원형': 제일원인(49장 참조). '프락터코스 89장에서도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 '원형'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르케튀폰(Archetypon)

사용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1:26 참조).

'형상을 새기다': 에바그리우스는 여기서 관상가 자신 안에 신적 유사성을 완성하도록 노력하라고 그를 초대하고 있다. 관상가는 원형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온전한 형상을 자신 안에 새김으로써 자기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 주어야 한다.

 



본문 50장(8과)_주석+본문 합(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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