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의 구름에서의 분심

 

 

그대가 내게 "내가 하나님만을 생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며, 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고 물을 터이나, 내가 할 수 있는 답변은 "나도 모릅니다."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이런 물음으로 내가 그대를 이끌고자 하는 바로 그 어둠 바로 그 무지의 구름 속으로 나를 끌어들인 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 덕분에 다른 모든 것들을 온전히 알 수 있고, 또 그들에 관해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일들까지도 말입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인간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한편으로 치워두고,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을 내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할 것입니다! 왜냐고요? 왜냐하면 그분을 족히 사랑할 수는 있지만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는 그분을 붙들고 차지할 수 있지만 생각으로는 결코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하나님의 자비와 진가에 대해 특별히 생각해 보는 것도 선익할 수 있고 교화작용도 할 수 있으며 관상의 일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 우리 앞에 놓인 일에 있어서는 그것마저도 끌어내려 망각의 구름으로 덮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대의 타오르는 사랑으로 이것들을 단호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짓밟고 올라서서 그대 위에 드리워진 그 어둠을 꿰뚫어 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니 간절한 사랑이라는 날카로운 화살로 두꺼운 무지의 구름을 맞추되, 결코 포기할 생각 따위는 하지 마십시오.

 

 

1). 잡념을 물리치는 법

 

자신의 생각, 특히 호기심이나 본능적인 지식욕에서 비롯되는 생각들을 잡념이라 한다. 이 잡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그대와 어둠 사이에서 어떤 생각이 불쑥 솟아올라 참견하며 그대에게 무엇을 찾고 있느냐, 무엇을 바라느냐고 묻거든, 그대가 바라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라고 대답하십시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분이요, 찾는 것도 그분이다.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그(생각)가 반드시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하고 물을 터인즉. 그분은 그대를 만들고 그대를 구원하고 은총으로 그대를 사랑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이라고 대답하십시오. 그리고 그에게 "너는 그분에 대해 털끝만큼도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하십시오.

이어 "그러니 물러서라." 이르고 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위해 그를 짓밟고 넘어가십시오. 설령 그 같은 생각들이 거룩해 보이고 그대가 하나님을 찾는 데 도움 될 것처럼 생각되더라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가 하나님의 친절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놀랍고 멋진 생각들을 그대의 마음속에 불어넣는가 하면 하나님의 감미로움과 사랑, 은총과 자비를 일깨워 줄 공산도 아주 큽니다. 하지만 그대가 하나님께만 향할 뿐이라면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갈수록 심하게 수다를 떨며,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도록 끈질기게 달라붙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그대에게 보여줄 터인즉, 그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그대가 자기에게 귀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대의 지난날 생활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그 시절의 사악한 참상을 생각함에 따라 그대의 마음이 멀리 벗어나서 지난날 노상 드나들던 그 소굴로 되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그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새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붕괴되고 맙니다. 이유가 무엇이냐고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대가 자유로이 그 생각에 귀를 기울이기로 동의했고, 그 생각에 응답했으며, 그 생각을 받아들였고, 그 생각이 제멋대로 굴러가도록 방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물론 그 생각은 선익하고 성스러웠고 실로 필요한 것이었으니,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남녀를 불문하고 자신의 사악한 참상과 우리 주님의 수난,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위대하신 선과 진가를 주제로 하는 지극히 매혹적인 수많은 묵상들을 토대로 하지 않는 한 관상을 실현하기란 기대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숙련된 일꾼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가로놓인 무지의 구름을 꿰뚫고자 할진대 그런 생각을 중단하고 멀찍이 밀어내어 망각의 구름 속에 깊숙하게 파묻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이 그대를 이 일로 부르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고 그대 자신도 응답을 해드릴 작정이라면 겸허한 사랑으로 그대의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십시오. 그리고 그대를 창조하셨고, 구원하셨고, 은혜로이 이 생활로 불러주신 하나님만을 착실히 생각하십시오. 그분에 대한 그 밖의 생각은 일체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그대의 열망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오로지 하나님만을 향한, 꾸밈없는 의향이면 충분합니다.

만일 그대가 이 의향을 쉽게 기억하기 위해 한마디로 요약하고자한다면 짤막한 낱말(거룩한 단어)을 택하되 가급적이면 한 음절로 된 낱말을 택하십시오. 낱말(단어)은 짧을수록 그만큼 더 성령의 역사(役事)를 닮아서 좋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나 '사랑' 같은 낱말 말입니다. 그대가 좋아하는 낱말을 선택하되, 한 음절로 된 것이라면 다른 낱말을 택해도 됩니다. 그리고 택한 낱말(단어)을 마음속에 단단히 간직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거기에 늘 머물게 하십시오. 그것은 평화시나 전쟁시나 마찬가지로 그대의 방패와 창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대는 이 낱말로 그대 위에서 맴도는 구름과 어둠을 공략하게 됩니다. 그대는 이 낱말로 온갖 생각을 망각의 구름 아래로 내리누르게 됩니다. 자주 그렇듯이 만일 그대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경우, 이 낱말 하나가 충분한 답변이 됩니다. 그리고 만일 그대가 이어서 바로 이 낱말의 의미를 학문적으로 생각하고 분석하려 들거든, 그대 자신에게 이 낱말을 조각이나 부스러기가 아닌 통째로 간직하려 한다고 말해주십시오. 그대가 그 점을 확실히 하면 그 생각은 틀림없이 물러갑니다. 이유가 무엇이냐고요? 이유는 그 생각이 앞서 이야기한 유익한 묵상들을 먹이삼아 자라나지 못하도록 그대가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삶의 두 가지 방식

 

삶의 방식에는 활동생활과 관상생활의 두 방식이 있고 두 방식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지적 호기심과 본능적인 지식욕으로 솟구치는 의문들에 대한 해명이다.

 

그대는 당연히 그대의 생각 속으로 계속 밀고 들어와 참견하는 그것이 선익한 것인지 사악한 것인지 여부를 알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악하다고는 하지만 놀랍게도 신심을 엄청나게 키워준다는 점입니다. 내가 익히 아는 바지만 그것은 때때로 대단한 영감을 불어넣어 대단한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은 나를 감동시켜 그리스도의 수난이나 내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 연민을 느끼도록 만드는가 하면, 어떤 때는 성스럽고 유익한 여타의 이유들로 진심 어린 눈물이 흐르게 만듭니다. 그러기에 나로서는 그런 생각들이 다 사악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만일 이런 생각들이 그처럼 선익하고 유익하다면 당신이 나더러 그것을 망각의 구름 아래에다 파묻어 버리도록 지시하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 아니겠습니까?"

나는 이를 참으로 좋은 지적이라고 받아들이고, 아무리 부족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대답해 보도록 노력할까 합니다. 우선, 만일 그대에게 덤벼들어서 도움을 주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나한테 묻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코 그대의 평상적인 마음의 표현, 곧 그대 영혼의 분별하는 능력이라고 답하겠습니다. 또 그대가 그것이 선하냐 악하냐를 묻고 있는 것이라면 이성(理性)은 존엄한 것인만큼 기본적으로 그것은 항상 선할 수밖에 없다고 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이용하는 목적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습니다. 그대가 은총에 힘입어서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깨닫는다든지, 우리 주님의 수난이나 하나님의 자비와 그분께서 당신의 창조계 안에서 영육 간에 이루시는 놀라운 일들에 눈길을 돌린다면, 그것은 선하고 유익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라면 그대 말마따나 그것이 신심을 크게 키워낸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교만이, 아니면 일례로 일부 성직자들 경우처럼대단한 학식이나 지식이 이성을 우쭐거리게 만들고 있다면 그 이성은 악한 것이 됩니다! 이는 그들을 하나님과 신심에 관계되는 일들에 능력 있는 사람으로 알려지기보다는 오만한 학자들 -악마에게 속한!- 이나 대가들 -허영과 거짓에!- 로 알려지고 싶어 안달하도록 만듭니다. 수도자거나 속세인이거나 모든 남녀들의 경우 평상적인 이성이 그들의 세속적 업적을 자랑하도록 만들 때, 그러니까 그들이 이 현세에서 지위와 소유 · 허영 · 인기를 탐할 때 그것은 악이 됩니다.

이것이 기본적으로는 선할 뿐 아니라 올바로 사용하면 대단히 요긴하고 유익하다면서 왜 망각의 구름 속에다 파묻어 버려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나는 활동생활이요, 다른 하나는 관상생활입니다. 활동은 낮은 단계에 해당하고, 관상은 높은 단계에 해당합니다. 활동생활도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며, 관상생활 역시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 두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들 두 가지 생활방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비록 다르기는 해도 서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활동생활의 높은 단계라고 일컫는 것은 관상생활의 낮은 단계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부분적으로나마 관상적이 되지 않으면 온전한 활동가가 될 수 없으며(적어도 지상에서는), 부분적으로나마 활동적이 되지 않으면 온전한 관상가가가 되지 못합니다. 활동생활은 이승에서 시작하고 끝납니다. 그러나 관상생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관상생활은 이승에서 시작하여 영원토록 이어집니다. 마리아가 선택한 그 몫은 "빼앗기지 않을"(10:42)것 입니다. 활동생활은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합니다." 그러나 관상생활은 평화로이 앉아서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쏟습니다.

활동생활의 낮은 단계는 선하고 올바른 자비와 사랑의 행위들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높은 단계(관상생활의 낮은 단계)는 예를 들어 영적 묵상이나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깨우쳐 아는 깨달음, 애통과 참회,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분의 종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성찰,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계 모든 부문에서 영육 간에 이루시는 일들과 자비와 놀라운 선물들을 두고 그분을 현양하는 감사 등으로 구성됩니다. 하지만 관상의 높은 단계는 -적어도 우리가 이승에서 알기로는- 어둠 속에, 이 무지의 구름 속에 온전히 감싸인 채 사랑의 손길을 내뻗고 계시는 그대로의 하나님이라는 존재, 하나님만을 맹목적으로 더듬어 찾는 단계입니다.

활동생활의 낮은 단계에서 행하는 모든 일은 필연적으로 그 사람 바깥에, 즉 그 사람 아래에 자리합니다. 하지만 높은 단계(관상생활의 낮은 단계)에서는 사람의 행위가 내면으로 향하면서 그 사람 안에 자리하고,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과 같은 높이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관상생활의 높은 단계에 들어가면 사람은 명확히 자신을 초월하며, 따라서 하나님을 빼고는 그 무엇에도 뒤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 자신을 초월하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까닭은 그가 본성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일을 은총으로 성취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영으로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것 사랑과 의지로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것이 그의 지향이 되기 때문입니다.

활동생활의 낮은 단계를 일시 벗어나지 않고서는 높은 단계를 실천하는 일이 (우리의 관점에서는) 불가능한 것처럼 관상생활에서도 낮은 단계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높은 단계에 이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묵상에 매진하는 사람이 '바깥일들' -그가 했던 일이나 해야 할 일로서, 제아무리 거룩한 것이라 할지라도- 에 골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요 불이익이 되듯이, 이 무지의 구름이요 신성한 어둠 속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사랑을 하나님 자신께로 흐르도록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선물이나 자비 또는 창조물들을 생각이나 묵상 속에 끌어들여 자신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게 만드는 것은 -제 아무리 유쾌하고 고무적인 생각들이라 할지라도- 그에 못지않게 바람직스럽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그대에게 이런 미덥잖은 생각들을, 이들이 성스러우며 그대의 목적을 실현시켜 주겠노라고 단단히 약속할 때조차도, 억제하고 두꺼운 망각의 구름 아래다 묻어버리라고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실상 사랑은 이승에서도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은 그렇지 못합니다. 영혼이 이 썩어 부패할 육체 속에 거처하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따라서 우리네 맑은 영적 이해력은 특히 하나님을 그 대상으로 할 때 이런저런 왜곡에 부대끼기 마련인데, 이런 왜곡은 우리가 하는 일들을 불완전하게 만들고 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제쳐놓고 수많은 오류를 유발합니다.

 

 

3). 관상기도와 잡념(기억)

 

관상에서는 모든 기억, 심지어는 더없이 성스러운 일들 에 대한 기억까지도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그대가 이 맹목적 관상에 돌입할 때면 언제고 상상력의 왕성한 활동이 아주 활발하게 일어나는 만큼, 그대도 이를 자주자주 억누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대가 그것을 억누르지 않으면 그것이 그대를 억누르고 맙니다. 그대가 이 어둠 속에 머물러 있고 그대의 마음에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계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문득 그대 자신을 자세히 살펴볼라치면, 그대의 마음이 어둠에 휩싸이기는커녕 하나님보다 못한 어떤 것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경우가 아주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경우에 그것은 일시적이나마 그대의 머리 위에 자리 잡고 그대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아무리 성스럽고 매혹적인 생각들이라 할지라도 모조리 아래로 끌어내리겠다고 마음을 굳히십시오. 나는 그대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그대가 하늘의 천사들과 성인들을 응시하며 관상하고 복된 이들의 행복한 노래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도, 오직 하나님 그분께 내뻗는 이 맹목적 사랑, 무지의 구름 위로 밀어 올리는 이 은밀한 사랑을 간직하되 이를 그대의 영적 품성으로 굳히는 것이 그대 영혼 건강에 더 유익하고, 하나님과 천상 만군에게 더 기쁨이 되고, 더 큰 가치를 지닙니다. 그리고 그대의 영육간의 친구에게 더 큰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고 놀라지는 마십시오. 일단 그것을 알아보고 (그대는 은총 덕분에 그럴 수 있습니다.) 이해하고 느끼십시오. 그러면 늘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이승에서는 하나님의 맑은 영상을 결코 목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총으로 흔연하게 허락하시면 그분에 대한 깨달음은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의 사랑을 이 구름으로 들어 올리십시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대의 사랑을 이 구름으로 끌어올리시게 만드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그 밖의 모든 것은 잊도록 노력하십시오.

만일 그대의 마음에 저절로 떠오르는 전혀 별 볼일 없는 간단한 생각이 그렇지 않았을 때에 비해 그대를 하나님에게서 멀리 떼어놓는 구실을 한다면 (이것은 그대의 길을 가로막고 그대가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 체험을 방해합니다.) 고의로 반갑게 맞아들이고 부추기는 생각은 얼마나 지독한 장애물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대가 성인들이나 다른 손색없는 영적 대상을 생각할 때도 사정이 이러하다면, 하물며 이 비참한 세상에 몸담고 있는 평범한 인간들이나 그 밖의 물질적 · 세속적 사물들을 생각할 때는 얼마나 더 심한 지장이 있겠습니까?

내 말은, 그대의 의지와 마음에 주의를 끄는 선익한 영적 사물과 관련해서 저절로 불쑥 떠오르는 생각이나, 그대가 신심을 강화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떠올린 생각이 방해물이 되는 까닭에 사악하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대가 내 말을 그렇게 이해하지 말도록 금하고 계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것이 더없이 선익하고 성스러운 생각일지라도 관상을 추구하는 동안에는 도움을 주기보다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분명한 것은 온전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라면 천상의 어떤 성인이나 천사에 관한 생각에 전적으로 안주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그릇된 생각과 치명적 죄악

 

자신의 생각이 죄가 되는 것인지 아닌지, 만약 죄가 된다면 그 죄가 용서 받을 수 잇는 죄인지 어떤 죄인지를 알아내는 방법을 말한다. (아래 주석을 꼭 읽어보길 바랍니다)

 

어떤 살아 있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생각 하나 하나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청하지 않았음에도 무의식적으로 마음에 떠오르는 자연스런 생각은 죄로 단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대의 온갖 생각을 지배하는 힘을 앗아가는 원죄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죄가 된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세례를 받으면서 원죄의 죄과는 이미 씻겨나갔습니다. 이것이 죄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같은 갑작스런 충동을 재빨리 가라앉히지 않을 경우뿐인데, 이유는 그러다 보면 사람의 자연스런 관심은 그것에 미혹 당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그것이란 그대가 좋아하는 무엇 또는 그대를 즐겁게 해주거나 과거에 즐겁게 해주었던 어떤 것일 수도 있고, 그대를 슬프게 하거나 과거에 슬프게 했던 무엇에 대한 불평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대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이같은 관심은 치명적인 죄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대를 위시하여 속세를 진정으로 버리고 교회(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물질에 매이지 않는)에 복종하며 경건하게 살아가며 자신의 의지나 지식이 아닌 수도장상이나 속세 어른들의 의지나 지식에 따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이런 자연스런 기호(嗜好)나 불평은 기껏해야 소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유는 그대가 지금처럼 분별있는 어떤 목회자의 지식과 지도에 부응하는 그런 상태에 처음 진입했을 때에는 그대의 의향이 하나님께 근거를 두고 뿌리내리기 마련인 까닭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천성적으로 좋아하거나 불평하는 이런 일에 여지를 허락하고 견책하려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끝내 그대의 의지가 동의하는 가운데 그대의 가장 내밀한 존재와 의지 속에 뿌리를 내리고 맙니다. 그것이 바로 대죄입니다. 이런 일은 그대나 내가 지금껏 이야기해 온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가, 어떤 사랑이나 사물 또는 그 밖의 것에 대한 기억을 고의로 떠올릴 때마다 발생합니다. 만약 이것이 그대를 가슴 아프게 하거나 가슴 아프게 했던 일에 분통을 터뜨리며 복수를 할 생각이 있다면 이는 다름 아닌 '분노'입니다. 또는 그것을 경멸하고 지긋지긋해하면서 냉혹하고 악의적으로 생각하게 된다면 이는 '질투'입니다. 또는 정신과 육체를 선하게 간직하는 일에 피로와 싫증을 느낀다면 이는 곧 '나태'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현재나 과거에 겪은 즐거운 일이라면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대는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일시적인 기쁨을 맛봅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곰곰이 되새기게 되고, 끝내는 그대의 마음과 의지를 거기에다 얽어매며 먹을거리로 삼기에 이릅니다. 그대는 그럴 때마다 이런 기쁜 일로 평화롭고 조용하게 살면 더 이상 원이 없겠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대가 고의로 떠올리거나 품거나 애착심을 가지고 매달리는 이 생각이 천부적인 가치나 지식, 매력이나 지위, 호의 또는 아름다움이라면 이는 '교만'이 됩니다. 만일 그것이 속세의 재물이나 부. 재산, 소유권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이는 곧 '탐욕'이 됩니다. 만일 그것이 최고급 음식과 음료나 여타의 맛 좋은 요리와 관련된 일이라면 이는 곧 '폭식'이 됩니다. 만일 그것이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을 상대로 하는 아첨과 아양, 희희덕거림, 쾌락 또는 애정이라면 이는 곧 '정욕'이 됩니다.

 

 

5). 생각의 분별

 

생각과 충동은 하나하나 평가해야 하고, 작은 죄를 가볍게 여기는 무모함도 피해야한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대나 내가 지금껏 이야기해 온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가 이 같은 죄들을 범했고 그리하여 이런 죄들로 족쇄가 채워져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쪼록 그대가 이런 생각과 충동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저울질하고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어 죄를 범할 기회를 제공하는 그 즉시 이를 분쇄하기 위해 힘껏 노력해 주기 바라는 소망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그대에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맨 처음 생각이 떠오를 때 이를 저울질하지 않거나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사람은, 설령 그것들이 죄 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소죄를 범하는 경거망동을 피하지는 못합니다. 물론 이 사멸할 인생에서 소죄를 완전히 모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완덕을 추구하는 참된 제자들은 누구나 항상 소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가는 그들이 이내 대죄를 범하게 된다 하더라도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6). 관상기도 수련은 죄를 물리치고 덕을 창출한다.


그러므로 넘어지지 않고 서 있으려면 그대의 확고한 의지를 절대 꺾지 마십시오. 그대와 하나님 사이에 자리하는 이 무지의 구름에다 뜨거운 사랑이라는 날카로운 화살을 날리십시오. 하나님보다 못한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생각하지 말고, 그대를 이 목표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피하십시오. 그래야만 그대는 죄의 토대와 뿌리를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그대가 그야말로 자주 단식하고, 오래도록 철야기도를 바치고, 동이 트자마자 일어나고, 널빤지에서 잠자며 쇠사슬로 몸을 칭칭 감는다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그대가 합법적으로(물론 합법적이지 않지만!) 그대 자신의 눈알을 빼내고, 혀를 뽑고, 코와 귀를 틀어막고, 팔다리를 절단하는 등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방법으로 그대의 육신을 괴롭힌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죄의 자극과 충동은 여전히 그대에게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대가 자신의 죄나 그리스도의 고난을 슬퍼하며 제아무리 크게 통곡한다 한들, 아니면 그대가 천상의 환희들을 제아무리 많이 생각한다 한들 그것이 과연 그대에게 무슨 선익이 되겠습니까? 물론 상당한 선익이 되고, 상당한 도움이 되고, 상당한 이익이 되고, 상당한 은총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맹목적인 사랑의 발산에 비하면, 사랑이 없이는 그런 것이 할 수 있는 일은 실로 너무나 보잘것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바로 마리아가 선택한 '가장 좋은 몫'입니다(5:48). 이것 없이 나머지는 사실상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점에서는 죄의 토대와 뿌리를 파괴하며, 적극적인 점에서는 성덕을 거두어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이 진실로 존재하는 곳에는 다른 모든 성덕도 진실로, 온전히 그리고 충만히 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확고한 의지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물론 사람은 이것 없이도 자신이 바라는 만큼 많은 성덕을 지닐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성덕들은 하나하나가 때 묻고 뒤틀리기 마련이며, 따라서 그만큼 불완전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덕이란 오로지 하나님만을 위해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정돈되고 분별 있는 애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러냐고요? 하나님 스스로가 곧 모든 성덕의 고결한 대의(大義)이신 까닭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복합적인 동기에서 특정한 성덕을 추구하고 나선다면, 비록 그의 주된 동기가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그 성덕은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본보기로 한두 가지 성덕을 택해서 살펴보면 이 점을 알게 됩니다. 사랑과 겸손이라는 두 가지 성덕을 꼽아보는 것이 아주 바람직합니다. 왜냐하면 이 성덕들을 확실하게 갖춘 사람은 누구나 더 이상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입니다.

 

  참고 3-1 무지의 구름_분심 0612.hwp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