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도란 무엇인가?

 

 

필자가 조사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한국 교회 교인들 중 60% 이상이 기도를 생활화하고 있다. 기도를 신앙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기도 생활을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절반도 자신의 기도생활에 대해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 불만족의 요소 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기도를 통해서 내적인 성장이나 하나님과 관계 형성에 있어서 진보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저 동일한 내용이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듯한 느낌이 그들의 기도 생활의 효용성을 의심케 하였다.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기도의 목적은 매우 단순하다.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청원적인 성격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성숙한 그리스도인일수록 청원의 내용이 변화되고 있다. 물질적인 풍요나 건강 등의 개인적인 안녕이나 욕구보다는 하나님과 깊은 내적 교제나 평화로운 관계에 대한 욕구가 커지고 있다. 한국 교회 교인들은 통성 기도에 익숙하고 그것을 선호한다고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개인적인 기도 형태를 물었을 때 침묵 기도를 압도적으로 선호한다고 말하고 있다(설문자의 76.3%). 예상과 다른 결과에 대해서 추론해 보건대 통성 기도는 공동 기도 모임에서 인도자와 함께 기도할 때 주로 선호하는 기도 형해이며, 개인 기도에서는 거의 침묵 기도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환경적인 요인도 있고 개인적인 취향도 포함되어있다.

통성 기도의 습성은 성령 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익숙해졌다. 한국의 성령 운동은 갑작스럽게 변화되어 가는 사회와 경제 구조에 대처하지 못한 채, 고통 받고 억압받았던 사람들을 지탱해 주고 치유하는 과정에서 자라났다. 이 때 기도 내용은 주로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것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기도 형태도 통성 기도에 의존했다. 그러나 그러한 성향은 점점 달라지고 있다. 기도 내용 자체도 보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욕구와 관련되어 있고, 기도의 형태도 보다 내면적이고 침묵적인 분위기를 선호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표면적으로는 열심이 줄어들고 영적인 욕구가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 기도의 성향이나 양태가 변화되고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안에서 기도에 대한 보다 다양한 이해와 다양한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 없다면 보다 성숙한 기도 생활과 신앙 생활로 발돋움을 기약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기도가 가져다주는 영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1)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통로다.

(2)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통로다.

(3) 기도는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통로다.

(4) 기도는 관점을 변화시키는 통로다.

 

일반적으로 첫 번째의 요소를 가장 무난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정의는 예수님께서 구하기 전에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신다고 가르쳐 주셨음("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대답하고 그들이 아직 말하고 있을 때 내가 응답하리라", 65:24; 6:8) 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근거를 제시해 주는 정의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필요가 없지만 그분은 기도를 원하신다고 성경은 말한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이 그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성경의 하나님 이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곧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서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기를 원하신다. 기도를 하게 하면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신다. 미리 아신다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모순처럼 보이는 기도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준다. 사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이미 그분이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큰 신뢰를 가지게 하며, 동시에 더욱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자극을 받는다. 그러한 과정에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더욱 강력하게 드러내신다.

두 번째 요소는 첫 번째와 중첩되는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만, 보다 세분하여 기도를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 보편적으로 잘 받아들이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왜 우리의 많은 기도가 천재지변이나 비참한 전쟁을 막을 수 없는가? 그것은 거시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뜻 안에 포함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기도로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인가? 그렇다. 그러나 막을 수 없는 천계지변이나 비참한 전쟁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변개할 수는 없으나 그 뜻을 이루는 방법은 매우 다양할 수 있기에 기도가 결코 무기력하게 되지 않는다.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과 질병, 그리고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등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실행하시는 동안에도 인간에게 저항의 자유를 허락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저항도 하나님의 뜻 안에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자유로운 인간의 투쟁 가운데서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어떤 사건을 진행시키는 데 있어서, 인간의 저항과 투쟁, 그리고 복종 등이 모두 하나님의 뜻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는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포함하여 마침내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결말에 이를 때, 하나님께서 받으신 기도로 완성된다.

회의론자는 끊임없이 ''라고 묻는다. 일관성 없는 인간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인간사에 과연 개입하시는가? 개입하신다면 그분은 신뢰할 수 없는 분,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분이다. 시편, 전도서, 예레미야애가, 특히 욥기 등에는 회의론자가 갖가지 물음을 제기한다. 뒤죽박죽 엉키고 설킨 세상사에 대한 깊은 고민과 의문을 표출하고 있다. 상처와 배신, 짙은 안개 속에서 한 치의 앞을 볼 수 없는 인생사의 문제와 불의한 힘 앞에서 과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묻는다.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같이 느껴지는 상황 앞에서 절규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회의론자는 그러한 상황에서 그저 고민과 불만과 원망 외에 할 일이 없다. 그러나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한 고통스러운 갈등과 의문을 기도로 드러내고 있다. 언제까지입니까? 왜입니까? 그 때 주어진 하나님의 음성은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와 함께 한다. 너는 내 것이다." 끝까지 신뢰를 저버리지 않을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러한 음성을 받아들일 때 사실 그들의 물음과 불평과 답답함 그 자체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부르짖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신뢰로부터 이미 답을 얻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4:6)고 한다. 여기에 인내와 믿음을 요구한다.

세 번째 정의에 있어서도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기도 안에서 변화하도록 하나님이 어떻게 개입하시는가라는 물음이 있다. 무슨 내용의 기도를 했을지라도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시는가? 아니면 인간 자신이 스스로에게 말하는 심리적인 효과인가? 기도가 하나님의 현존을 전제한다면 그것은 결코 자의적인 결단이나 심리적인 효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기도하는 사람은 정직해진다. 기도는 외부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들어 매어 둔 수치심과 후회스러운 일들을 열어 가는 통로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된다. 여기서부터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 갈 용기를 얻게된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기도의 역할이란 바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개입을 전제하는 말이다.

네 번째, 기도가 가져다주는 효과는 사물을 보는 관점을 변화시킨다. 기도는 흐트러진 인간의 관점과 질서를 계조정해 가는 과정을 제공한다. 우주적 관점의 시야를 열어 가게 하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과 자신을 볼 수 있는 시각을 얻게 해 준다. 주변 환경에 의해서 왜곡된 진리를 회복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42:1-4). 성경에서 보여 주고 있는 기도와 응답사이에는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신뢰를 전제로 한다. 기도 자체가 신뢰의 표현이며, 그리고 믿음과 희망 가운데서 응답을 이미 받고 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벗어나게 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이미 그 곳에서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23). 그것이 곧 응답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응답에는 언제나 "이미 그러나 아직도"(already but not yet)가 적용된다. 이것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다.

 

1) 기도와 욕구

기도의 가장 기본적인 동기는 인간의 욕구이다. 이 욕구는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이다. 그러한 내면적인 욕구가 기도 속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된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 심리학자 울라노브(Ulanov)는 기도는 제일의 언어(Primary spee -ch) 라고 했다. 이 말은 기도가 인간 실존의 가장 밑바닥을 드러내는 정직한 언어라는 의미이다. 제일의 언어는 명료화된 언어로 출발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겪는 본능과 감정과 표상(images)의 언어와 같다. 때로 그것은 후천적으로 습득된 언어와 표상과 감정의 언어로 섞여나타난다. 기도는 마치 어린아이들이 경험하는 세련되지 못한 감정에 대한 일련의 반응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보통 기도를 시작할 때 자신의 어두운 부분, 거짖된 모습, 가장된 모습으로부터 비롯되는 자아를 경험한다. 제일의 언어를 향하여 흘러가는 기도 속에서 자기 자신이 흘러가도록 그대로두면서 조용히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인다면 기도는 우리 존재로부터 들어주기를 바라는 솟구치는 욕구라는 것을 경험한다. 이 과정을 통해 제일의 언어에 도달하게 된다. 이 제일의 언어는 세련된 언어가 아니기에 외적인 언어가 제일 언어에다가 옷을 입힌다. 그러므로 기도가 우리의 욕구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매우 합리적이다.

우리는 그러한 욕구로부터 출발된 기도를 자주 환상으로 물들여 버린다. 즉 자기 만족과 자기도취를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으로 잘못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우리 자신의 거짖된 욕망이나 어리석음, 게으름 등으로부터 비롯된 우리의 왜곡된 모습을 배우기 전에, 어떤 마술 같은 인물이 무슨 방법으로 뜻하지 않은 선물을 안겨 주리라는 엉뚱한 기대로 우리의 욕구를 분출함으로써 기도의 진실성을 상실케 한다. 기도 속에서 쉽사리 그리고 속히 그 욕구에 대한 만족감과 안위함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맹목적인 욕구가 될 것이다. 맹목적인 욕구란 비인격적인 간구에 불과하다. 그 맹목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기도는 어떤 인격적인 관계도 추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하나님과의 관계 형성을 개의하지 않는 자기 욕구에 대한 성취에 집착하기에 그것을 비인격적이라고 한다. 기도 속에서 일어나는 자기 집착은 자기의 한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오히려 그 약한 부분을 보완하여 자신의 능력을 과시해 보려는 또 다른 교만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을 수 있다.

기도는 자기 연약함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 연약함 속에서 절대적인 신뢰와 순종을 나타냄으로써 역설적인 강함을 체험하게 된다. 신뢰와 순종이 없는 자기 욕구에 집착한 기도는 자기 암시적인 효과를 주기 때문에 때로 부정적인 방향으로 인격 형성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따라서 자신이 인식하든지 못 하든지 스스로에 대해서 정직하지 못하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지 못한 자세를 취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아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구상하여 그것을 하나님으로 인격화시킨다. 이 이미지는 우리의 욕구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고 보장해 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욕구의 분출로부터 비롯된 하나님의 이미지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이다. 이러한 자기 투사(Projection)적인 기도는 영성 형성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기도는 표면적으로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거나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표현처럼 보이나, 실상은 원초적인 언어를 발설함으로써 자신이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주의를 기울여 듣는 동안 우리 내면에 있는 소리나 심지어 잠재의식 속에 있는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욕구가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자신의 충동적인 욕구를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누구인가를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안에서 넘쳐나는 욕구에 직면하면서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무릎을 끊게 된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떠오르는 환상이 아무리 우리를 고통스럽고 혼란스럽게 할지라도 그것을 무시하지 말고 용기 있게 직면하면 우리는 정직한 자기 자신 앞에 서게 된다. 동시에 그 환상을 직시하면서 그 환상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그 속에 깊이 빠져들어가지 말고 그 환상을 그대로 허락한다. 그러고 그 환상이 우리를 소유하지 못하게 한다면 우리 영혼은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을 처리하는 가장 현명한 길은 기도 속에서 그 환상을 하나님께로 가져가 하나님께서 그것을 처리하시도록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한다. 그러므로 기도에서 추구해야 할 중요한 과정은 환상을 어떻게 소유하고(기도의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함), 또 그것들로부터 어떻게 초연할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것(환상과 자아와의 탈동일시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감)이다.

그렇게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는 욕구를 따라 기도하노라면 그 곳에서 하나님이 활동하고 계시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은 하나님이 이미 그 욕구를 우리 안에서 드러내고 충동하고 계시다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의 요청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우리가 기도 속에서 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만들어 놓으신 것을 더듬어 찾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 기도를 따라가노라면 하나님이 깊고 강한 힘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을 느낀다(2:13).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들을 필요가 없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우리 내면의 욕구를 주의해 보고, 그것을 하나님께로 가져가서, 하나님이 그것을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를 주목해 보도록 하신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기도 속에서 드러난 우리의 욕구가 어떻게 진전되고, 개방되고, 설명되고, 채워져 가는가를 바라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때로 원하는 것이 폐기되기도 한다. 우리의 욕구는 또 다른 욕구로 확장되고 승화되어 간다. 거기서 우리는 또 다른 자아와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것을 용납하고, 사랑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간다. 기도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욕구를 받아들일 때까지 우리의 욕구를 넓혀가는 능력이다. 우리의 욕구가 하나님 자신에게 도달될 때까지 우리의 욕구는 계속해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그것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동기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 자신의 것으로 경험하는 욕구와 함께 시작되지만, 그 욕구 자체도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기도가 발전된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의 욕구를 만난다면 그 순간 살아계신 성령 하나님을 경험한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욕구를 다른 대체적인 요소로 만족시키고 그 욕구를 감소시킨다면(예를 들면 물질적인 만족이나 쾌락적인 만족), 우리의 기도는 죽어 가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은 가능하지 않게 된다.

기도의 역할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 생각한다면 하나는 청원응답의 효과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관계 형성의 효과이다. 미국의 종교 심리학자 제임스 프래트(James Pratt)는 전자를 가리켜서 '주관적 기도', 후자를 가리켜서 '객관적 기도'라고 불렀다. 객관적인 기도는 기도의 초점이 기도드리는 그분에게 맞추어져 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궁극적인 존재로 믿고, 그분의 뜻을 찾아 그분의 뜻에 자기 자신을 적응시키기 위해서 기도를 드리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주관적인 기도란 그 초점이 자기 자신에게 맞추어져 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분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지닌다. 그러므로 여기서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을 빚으면서 일어나는 모순과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주 자기 암시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자기 환상으로 그 기도를 물들여 놓는다. 그러나 객관적인 기도는 내적으로 혼란과 모순과 충돌이 일어날 때 그분을 향한 하나의 핵심적인 목적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건강하게 통합되고,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고 역동적인 힘을 얻게 된다. 그래서 성숙한 사람일수록 주관적인 기도에서 객관적인 기도로 음겨 가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욕구에 따라 시작된 기도가 점차로 그 욕구를 하나님이 취하시도록 함으로써 그 욕구는 보다 건강하게 승화되어 간다. 그래서 그 기도는 욕구충족의 결과보다는 하나님과 깊은 사귐의 결과로 발전되어 간다.

 

2) 기도는 누구의 일인가?

파스칼(Blaise Pascal)은 인간이 이미 경험하고 맛보지 못한 하나님을 결코 갈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독교 기도가 단순히 종교적인 본능에 충실한 반응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교제로의 초청이라고 한다면, 이미 알려진 분을 부르는 것이 기도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출발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즉 하나님은 기도를 주시는 분이고,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원하도록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간절히 원하신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무엇을 구하기 전에 이미 갖가지 은혜를 경험한다. 그 중에서 기도의 결정적인 동기는 성육신 사건이다.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고, 당신 자신을 내주셨다. 그 희생으로 하나님의 양자 된 우리를 하나님은 다시 기도에로 초대하신다.

시나이의 그레고리(St. Gregory of Sinai)"기도는 하니님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이 이미 기도의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을 말함이다. 고백자 맥시무스(St. Maximus the Confessor)"인간의 본질이 신성화될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한 확실하고 분명한 근거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된 것이다. 그 성육신 사건(Incarnation)은 인간도 하나님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위대한 하나님의 사건이다."라고 했다. 기도를 통해서 신의성품에 참여한다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두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하나님의 참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여 주신 가장 효과적인 모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도 이 말에 동의하고 있다. "그의 신성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우리를 하나님처럼 만들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이 되셨다." 이상과 같은 성육신에 대한 통찰력으로부터 기도는 성육신을 내면화하는 내적인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로, 인간이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운동 즉 만남의 행위이다. 이렇게 기도는 위로부터 아래로의 운동인 성육신의 원리에 대한 역으로 반응하는 운동이다. 즉 우리의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성부 하나님께 드린 기도에 대한 응답이다.

포사이스는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금을 울리실 때 기뻐 진동하는 영혼의 선율이다."라고 했다. 만일 우리 기도가 하나님께 도달되어 그를 움직이면, 그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손을 뻗치시어 우리 마음을 움직이셨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권면하실 때, 기도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기도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오신 하나님이 우리를 기도로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 기도는 우리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기도는 우리의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갈망을 일으켜 주웠고, 그 갈망에 대한 응답은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 갈망을 실현해 가는 동기로 기도가 일어난다. 그러한 갈망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기도의 성향이 달라진다. 만일 내적인 갈망이 외적인 어떤 성취를 통해서 만족케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의 기도는 틀림없이 외향적인 성취를 지향할 것이다. 반면에 그 갈망이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기도의 지향도 내향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관계는 대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성적인 갈망의 근본적인 지향점은 하나님과의 관계적 차원이요,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삶에 포함시키려는 몸부림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기도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기도는 무엇보다도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능동적인 수단이기에 앞서, 자발적이고 수동적인 본능 중의 하나이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총이다.

 

3) 기도와 응답

외적인 결핍으로 인하여 시작된 기도는 우리의 내적 의식을 타오르게 하며 기도에 대한 완전한 응답은 하나님 자신이심을 알게 한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협력하고 또한 하나님을 수용한다. 여기서 '수용'이란 영원한 하나님의 신성한 능력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의 힘은 고갈되기에 끈질기게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수용을 말한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성한 능력의 에너지를 공급받게 된다.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을 수용하는 기도는 결코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기도는 자기 과장이라는 긴장을 완화시키고, 분명한 영적 비전(vision)을 보게 한다. 기도를 통해 어리석음이 깨우침을 받고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되며, 이전에 보지 못했던 문제를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더 이상 우리 자신은 홀로가 아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된다. 이 부르심에 정직하게 반응할 때 하나님과 참된 교제는 이루어진다. 기도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할지라도, 그 기도는 자신을 초월하여 기도하는 사람을 하나님과 타인에게로 인도한다. 이처럼 사적인 기도가 점점 공동의 기도로 변하게 되는데, 이것이 기도의 본질이다. 마침내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요, 그분의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기도하는 사람은 깨닫게 된다. 기도 중에 하나님이 오시고 있다는 증거로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도사려 있는 이기주의를 극복하게 되고, 그 결과 타인으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키지 않고 타인을 외인이 아니라 형제와 자매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형제를 위한 선행과 희생을 가능케 하므로 기도는 사랑의 교제 행위가 된다.

인간 편에서 기도를 볼 때 기도는 강렬한 욕구 혹은 체념과 탄원으로써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뜻에 굴복하게 하든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것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자주 직면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기도가 어찌할 수 없는 수동성과 의존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면, 인간은 기도하면서 언제나 패배감을 맛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의지를 꺾으려 하시는 듯한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유로운 의지에 기초한 행동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 안에서 인간의 불순한 탄원도 허락하신다. 그러한 탄원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대처를 하도록 인도받게 되고, 처음 이기적인 동기로부터 비롯된 기도는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역할이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기도의 응답에 대한 회의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질서 잡힌 규칙성"을 중지하거나 방해함이 없이, 어떤 방향으로도 사물을 움직이도록 영향을 미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일정한 질서 안에서도 얼마든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변개시키지 않으시면서도 인간의 의향에 맞추어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다. 즉 인간의 탄원은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와 구원의 의지를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섬세한 의향을 바꿀 수 있다.

기도에 대한 또 다른 응답은 또 다른 기도이다. 더 많은 기도, 더 많은 대화, 더 많은 들음의 기회, 듣기 위한 더 많은 노력 등이 수동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이끌려 기도하게 되고, 갖가지 훈련의 요청을 느끼고 받아들인다. 전통적인 신비주의자는 기도 응답의 유형을 정화, 조명, 연합이라는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기도에 헌신된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이다. 정화의 단계에서는 기도를 하는 동안 악의 실체를 만나고, 그것과 투쟁을 겪으면서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을 하게 된다. 조명의 단계에서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영혼의 정체성의 항구에 다다르는 내적인 평화를 알게 된다. 그리고 고양된 정신으로 더 깊은 기도로 나아가게 되고, 내적인 소동이나 격정으로부터 해방을 얻는다. 이 과정적인 응답의 결과로 더 많은 기도를 얻게 된다.

그리고 연합의 단계로 나아가면서 현저하게 자아가 고양되고 확장되는 것을 느끼며, 사랑의 의식이 충만하게 된다. 여기서 기도자는 언어를 초월하여 영이라는 언어에 도달하게 되고, 복잡다단한 논리와의 싸움을 멈추게 된다. 탄원 기도 중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고통의 제거보다는 고통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장소임을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자신의 고통을 포착하고 그것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즉 이러한 의미의 기도를 말한다. "저의 기도는 당신의 뜻이옵니다. 당신께서는 내 안에 기도를 창조하셨나이다. 기도는 내 것이라기보다는 당신의 것이옵나이다. 당신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려고 하는 의지도 당신의 뜻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나의 간구를 당신께서 성취해 주셔서 하나님의 뜻에 합하게 하옵소서."

신약과 구약을 막론하고 도움을 구하는 기도자들이 가장 자주 듣게 되는 하나님의 구원과 응답의 소리는 "두려워하지 말라.""내가 너의 구원자이다."라는 말씀이다. 밀러(Patrick D. Miller)는 이 하나님의 응답의 언어를 '구원의 신탁' 이라고 부른다. 이 구원의 신탁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절망과 불평 속에 포로기를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응답으로 주어졌던 이사야의 예언(40-55)이다. 직접적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구원의 신탁으로서 하나님의 응답이 갖는 성격을 잘 보여 준 내용이다. 구약 전반에 드러난 구원의 신탁이 일관된 틀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밀러는 구원의 신탁의 일반적인 특성을 이사야 41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전형적인 신탁의 내용은 구약의 전반에 걸처 나타난다. 모세오경, 예언서, 시편 등에 걸쳐서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응답으로서 구원의 신탁은 창세기로부터 출발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5:1-6) 앞으로 전개되는 어떠한 일에서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구원의 신탁은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아브라함에게 전달되었고,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와 미래에 대한 약속을 견고하게 한다. 출애굽 시 추격해 오는 애굽 군대로 인해 두려워하고 불평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도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신탁을 통해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게 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14:13). 이 신탁의 말씀 안에는 이미 부르짖는 이들의 비탄과 불평에 대한 어떤 내용을 암시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들이 과거 어느 때 하나님으로부터 거절을 당하였다는 것을 상기하고 있다(5:22 참고). 또한 그들이 다시 하나님에 의해서 치유되고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암시를 하고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구원의 신탁의 말씀이 그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관계가 계속된다는 것(내가 너와 함께 한다)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돕고 구원할 의도가 있다(내가 너를 도울 것이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 구원의 신탁이 그들에게 응답으로 작용하기 위해서 부르짖는 자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요청한다.

미래적 약속으로 주어진 이러한 구원의 신탁이 도움을 구하는 이들에게 실제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는가? 성경은 그들의 실제적인 삶의 자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 모양으로 기록하고 있다. 임신이 불가능했던 부모는 아이를 갖게 되었으며(아브라함, 사라, 한나), 심한 갈증으로 죽어 가던 이들이 구원하는 생수를 얻었다(하갈, 삼손, 광야의 백성들). 돌림병이 창궐할 때 히스기야와 유대인들은 구원을 얻었으며, 적들을 격파하는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했다(아사, 여호사밧, 이스라엘 백성들). 병든자는 고침을 받았고(미리암, 히스기야, 엘리야를 돌본 과부의 아들, 시편의 탄원자),죽은 자는 살아났으며(수넴 여인의 아들, 다비다), 죽음의 두려움을 경험했던 이들은 생명을 보존했다(기드온, 바룩, 시편 기자). 이렇게 기도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났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행동은 인간을 통해 중재되기도 한다. 삼손이 힘을 되찾자 다곤 신전을 단숨에 무너뜨렸고, 솔로몬은 지혜를 받아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슬기롭게 다스렸다. 하나님은 나라와 백성들에게 신적인 섭리를 보이셨으며,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용서를 위하며 심판을 보류하기도 하셨다.

그런데 밀러가 이 구원 신탁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구원 신탁에 대한 실제적인 증언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만은 아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와 신적인 응답 사이의 진밀한 연관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관심이다. 성경에 나타난 구원 신탁은 특정한 사건과 개인의 사정과 연결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행동이라는 입장에서 보편성을 지닌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응답하기도 하시지만, 많은 경우 상식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적 상황에 개입하신다. 인간적인 상식과 지식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방법을 동원하기도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으로 제시하신 이 보편적인 구원 신탁이 사유화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행동하심에 대해 철저한 신뢰가 일어난다면, 이미 그 신탁은 미래적 사건이 아니고 현재적으로 누릴 수 있는 응답이 된다. 그리고 부르짖음의 환경에서 이미 그분이 어떻게 활동하시는지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기도 응답의 가장 확실한 근거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제시하신 구원의 신탁의 말씀이며 그것에 대한 절대적 신뢰이다. 그 절대적 신뢰는 기도 안에서 그 구원 신탁을 계속적으로 듣고, 그것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에 대한 또 다른 응답으로서 기도란 기도의 응답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4) 기도와 성령

바울 서신에서는 기도와 성령은 불가분리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다. 서신서 몇 군데에서 그 관계를 명확히 하고 있는데, 에베소서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말한다(6:18). 기도한다는 것은 곧 성령의 현존을 전제한다. 만일 성령과 상관없는 단순한 종교적 욕구로부터 비롯된 기도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기독교 안에서의 기도라고 할 수는 없다.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의 두 가지 유형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보여 주는 대로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감사와 찬송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고전 14:15-16). 다른 하나는 로마서 8장에서 보여 주는 대로 성령이 우리의 기도를 도우신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8:26-27 ) 즉 성령은 "우리 연약함"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이해하건대, 우리는 사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는 무능력한 사람이든지, 외부의 유혹에 쉽게 영향을 받는 존재이든지 성령께서는 탄식하시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신다.

아직 완전히 구속받지 못한 인간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마땅한 간구가 되는지 모른다. 기도는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언어는 하나님에게 알려야 하는 모든 것을 말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기도가 가능하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셔야 한다. 그래서 로마서 8:26"성령이 우리를 돕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변하신다. "고 말한다. 이렇게 성령은 인간의 불완전함에 매여 있다.그리고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개인적인 욕구나 종교적 동기가 결코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기도를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성령께서 탄식하시면서 우리를 도우심으로 우리의 부르짖음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가 되도록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종교적인 욕구나 개인적인 욕구가 동기가 되어 열심을 내는 기도라면 그것을 반드시 기독교적 기도라고 할 수는 없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기도한다는 행위 이전에 기도하는 사람의 존재 방식이 무엇이냐가 더 중요한 일이다. 바울은 이 점에 대해서도 매우 상세하게서술하고 있다. 로마서 8장은 기도자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8:14-15). 즉 기도할 때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은 성령인데, 그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거하신다. 그러므로 기도는 기도자가 성령과 깊은 관계적 존재일 때 가능한 것이며,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 기도할 때 "아바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그것은 기도자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4:6). 성령은 우리의 기도 안에서 그분 스스로가 말함으로써 그의 현존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기도 가운데 성령이 현존한다는 말은 한편으로는 성령이 우리에게 자신의 현존을 알린다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이러한 성령의 현존에서 기도에 대한 응답을 찾아야 하고 또 찾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완전히 구속받지 못한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는 우리의 일이기 전에 성령의 일이며,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기도 가운데서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실존임을 고백하는 순간이다.

 

 

 

4-1 기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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