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관상 기도란 무엇인가?

 

 

1) 관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관상 기도를 말하기 전에 관상이란 말이 담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자. 관상이란 말은 어떤 방법을 지칭하는 말이기보다는 어떤 상태나 태도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래서 '관상'이라는 명사적 형태보다는 '관상적'(contemplative)이라는 형용사적 형태를 먼저 이해할 때 관상 기도, 관상수도회, 관상적 태도라는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관상적'이라는 말은 관계적인 용어이다. 즉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정도가 자기 몰입적인가 혹은 자기 초월적인가에 따라서 관상적이냐 그렇지 않느냐를 가늠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관계에는 나와 너(그것)의 관계를 말한다. 즉 나와 사물의 관계,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 나와 하나님의 관계 등으로 확대해 갈 수 있다. 내가 자연을 감상하거나 음악을 감상한다고 할 때 관상적 태도로 접근할 수도 있고, 이 태도와 정반대로 자기 몰입적 태도로 접근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자기 몰입적 태도로 자연을 감상한다고 하자. 이 때 자연을 감상하는 자신은 감상하는 주체가 되고, 자연은 감상을 당하는 객체가 된다. 여기에서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식의 주체는 인식의 대상을 분석하고 판단함으로써 이해한다. 음악을 감상할 때도 음악을 감상하는 나라는 주체가 있고, 감상의 대상인 음악이 있다. 여기서도 음악 감상자는 음악을 대상으로 접근하며,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선지식을 통해서 그 음악을 분석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론에서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간격을 결코 극복할 수 없기에 그러한 과정을 통해 얻은 지식은 자주 회의론에 빠지게 된다.

반면에 관상적 태도로 자연과 음악에 접근한다면 나와 자연, 나와 음악이라는 이원론적 태도로부터 자기를 대상에게 넘겨주어 주체와 대상이 하나 되는 자기 초월적 태도를 지니게 된다. 내가 자연이나 음악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주체자가 아니고, 자연이나 음악이 스스로 말을 걸어오고 나는 그것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태도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마침내 어느 시점에서는 나와 자연, 나와 음악이 하나 되는 단계에 이른다. 내가 대상을 통제하는 주체자로 머물러 있는 동안 그 대상을 이해할 수 있을 뿐 결코 하나 됨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을 넘겨주는 초월적 태도를 취한다면 대상을 이성적으로 명료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즐기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지식을 경험론적 지식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가 극복된 하나 됨의 결과이다. 우리는 엘리엇(T. S. Eliot)의 작품인 '사중주'의 드라이설베이지즈(The Dry Salvages)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만난다. "음악이 깊게 들리네, 더 이상 음악이 들리지 않네, 음악이 곧 나인걸."(Musicheard so deeply/ That it is not heard at all, but you are the music)이라는 구절이 있다. 첫 구절에서는 나와 음악이라는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있는 상태이다. 내가 음악을 듣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점점 음악을 통제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감상자와 음악이라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가 극복됨으로 관상적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때 음악을 듣는 자의 입장에서 관상적 체험을 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전혀 다른 대상으로 접근해 갈 수 있다. 우리는 자주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을 기존에 알고 있는 어떤 사람으로 분류하려는 경향이 있다. "저 사람은 누구와 같다."든지 "누구처럼 생겼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상대방이 나에게 말하기보다 내가 먼저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을 가지고 접근해 간다. 이러한 태도를 자기 몰입형적 태도라고 한다. 그러한 태도로는 다른 사람과 진실한 만남이 가능하지 않다. 상대방을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자기중심대로 이해하기 때문에 아무리 가까워도 주체와 객체라는 거리는 좁힐 수 없다. 반면에 나 자신을 상대방에게 넘겨주면서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일 때는 판단 없이 상대방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상대방을 누구와 같은 사람으로 접근하지 않고, 그 사람 자신에게로 다가간다. 이러한 상태를 관상적 태도라고 한다. 나라는 주체와 대상이라는 객체가 하나 되는 것을 지향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가 원숙하게 될 때 비로소 관상적 체험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관상적 태도를 하나님과 관계로 확장시켜 간다면 관상 기도가 무엇인지를 보다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나와 하나님을 주체와 대상으로 인식함으로써 하나님을 인식의 대상으로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리감으로 표현한다. 물론 하나님의 초월적 속성을 말할 때 하나님은 절대 타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와 하나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 그러한 경우 하나님과 간격을 좁힐래야 좁힐 수가 없다. 그저 인식 차원에서 가깝다 멀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에는 내재적 속성이 있다. 이 때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근거를 이루고 계신다. 결코 주체와 객체로 분리해낼 수 없는 분이다. 분리된다고 할 때 벌써 나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기독교 영성사에 나타난 탁월한 영성가들은 하나님과 하나됨을 끊임없이 추구했다. 하나님과 하나 됨을 이루는 순간 자신의 존재 의식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남으로 자기 자신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를 그들은 자주 신부와 신랑으로 비유하면서 둘이면서 둘일 수 없는 상태로 설명하였다.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와 하나 됨의 경험도 전통적인 영성가들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중요한 예이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2:20)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상적 체험의 극치이다.

 

2) 관상 기도라는 말의 회자 배경

최근 한국 교회에서는 관상 기도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회자되고 있다. 그말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도 다양하다. 기도에 있어서 무슨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혹시 비성경적인 어떤 방법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닌가 하여 의혹에 찬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둘 모두는 오해로부터 비롯된 관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기도는 다 관상 기도라고 말해야 한다. 기도가 무엇인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만남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기도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형성을 제일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 친밀성을 이루어 가는 동안 주체와 객체의 간격을 극복해 가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기도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태도를 지닌다면 그것이 관상적 태도이고 그것이 또한 관상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과 친밀한 만남을 전제하지 않는 기도가 있을 수 있는가? 만약 그러한 기도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형식상의 기도일 뿐이지,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기도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관상적이 아닌 기도 행위는 엄밀히 말해서 기도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오늘 교회 지도자뿐만 아니라 평신도 가운데서도 관상 기도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높아 가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기도 생활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 교회의 성도들의 기도 생활에 대한 열정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기도 생활에 대한 만족도는 많이 떨어지고 있다. 그 불만족의 원인이 예상과는 달리 기복적인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있다는 것을 설문에서 보여 주고 있다. 반복되는 자신들의 기도가 하나님과의 소통과 친밀한 관계 형성에 도달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즉 이 연구 보고서는 그들이 습관적이고 반복적으로 기도를 이어 가고 있지만, 그 기도가 하나님과의 관계적 변화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독백적 기도에 불과하다는 것에 대해 깊은 의혹과 실망감을 드러내고 있다.

왜 기도가 하나님과 교제라고 하는데 독백적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기도자의 태도와 드리는 기도 내용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일상 생활 속에서 드리는 기도의 일반적인 주제는 현안 문제나 자신의 내면의 욕구에 집중되어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기도를 하는 동안 그 현안 문제나 내면의 욕구가 어떻게 해소되느냐에 집종할 수밖에 없다. 이 때 기도자의 일차적인 초점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자. 그는 하나님 자신을 알고자 하는 열방보다는 자신의 현안 문제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물론 그러한 문제 해결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나님과 관계적 소통을 모색하기는 하지만, 그 기도에 있어서 그 관계 모색이 직접적인 관심거리는 아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기도 중에 하나님과의 친밀감은 맛볼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지속적인 기도 생활 가운데서도 답답함과 영적인 메마름을 해소할 수 없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관상 기도라는 말이 기도에 대한 새로운 해법처럼 등장했다. 그러므로 관상 기도를 말할 때 우선적으로 방법의 문제보다는 태도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그 다음에 방법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관상기도란 새로운 방법의 기도가 아니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형성을 위한 기도로 돌아가고자 하는 기도 쇄신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성경에는 관상 기도라는 용어가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관상 기도는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 영성사에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사건(10:38-42)에서 관상적 전통을 찾곤 한다. 전통적으로 마리아를 관상적 사람의 대표적 유형으로 꼽는다. 그 이유는 마리아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주변의 일거리나 당면한 문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발전시키려 하지 않고, 현존하시는 예수님 그 자신에게 전적으로 관심을 쏟아부음으로써 직접적으로 그 관계를 발전시키려 하고 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그러한 태도를 기뻐하셨다. 이것이 관상 기도의 태도이며 목적이다. 관상 기도는 주장하지 않고 순종하는 태도이다. 관상 기도는 서둘러 말하지 않고 잠잠히 기다리며 듣고자 하며 정직하게 반응하고자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주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갈망한다. 그러한 과정이 거듭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지와 우리 자신의 의지가 하나로 일치되는 경험을 하며, 보다 성숙한 신앙의 단계로 발돋움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관상 기도는 오늘 현재 행해지고 있는 기도 생활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이며, 자기 몰입적 신앙 태도로부터 자기 초월을 향한 하나님 자신에게로 다가오라는 하나님의 초청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4-2 관상기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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