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관상의 역사적 전통

 

 

1) 플라톤 철학의 관상

영성사에서 관상(contemplation)이라는 말은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 왔으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자각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일치 경험을 말한다. 관상이라는 말은 기독교 영성에서 사용되기 전에 헬라 철학에서 이미 사용되기 시작했다.

플라톤 철학에서도 관상이라는 의미는 매우 중요했다. 그에게 있어서 육체를 지닌 인간은 늘 불안하고 방황하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은 만물을 아름답게 하는 절대선을 항구적으로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절대선은 관상(theoria)을 통해서 항구적으로 성취된다. 즉 관상은 사랑과 지식을 통한 고양된 정화의 열매이며, 영혼 안에 있는 신적인 요소인 이성(nous)이 고귀한 원천과 동화될 때 비로소 그 관상의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플라톤의 관상 이해 뒤에는 현상 세계와 이데아 세계, 표면적인 지식과 진정한 지식, 한시적인 것과 불변하는 영원성 등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관상이란 덧없는 세상에서 유리 방황하는 인간 이성(nous)이 절대자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 현상 세계에 숨겨진 이데아의 세계를 발견하고 마침내 이두 영역이 하나로 연합되는 상태를 설명하는 말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철학적 관상은 필로(Phillo, B.C. 20-A.D. 50), 플로터누스(Plotinus 205-270), 프로클루스(Proklos, 410- 485)에게 전승되면서 철학으로부터 종교적 차원이 현저하게 강조되였다. 그리고 그들의 사상은 후기 교부 시대와 서방기독교의 관상적 전통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플라톤에게서 시작된 관상적 경건이라는 이상은 프로클루스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플라톤이나 플로티누스처럼 프로클루스는 인간이 신으로 복귀가 가능한 것은 영혼에 있는 신적인 것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플로티누스와는 달리 그는 영혼이 전적으로 타락하였으며 일자(一者)의 영역에 조금도 참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참여 불가능한 일자에 대한 지식과 관련해서 부정의 길(apophatic way)을 선택한다. 영혼은 불가능한 그 탁월한 지식을 향하여 올라간다. 인간의 영혼은 그 본성을 향하여 열망하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이 그 일자에로 동참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자와 공존해야 한다. 일자와의 공존하는 길로서 우리는 다른 모든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이러한 상태를 일종의 관상이라고 지칭하는데 그것은 부정의 부정을 통해 도달한다. "이러므로 파르메니데스는 하나의 부정에 의해서 모든 부정을 제거하였다. 그는 일자에 대한 관상을 침묵으로 마친다." 이러한 부정의 길은 그 이후 기독교의 위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의 관상적 신비주의에 영향을 미친다.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헬라 철학에서는 활동(Pra- xis)과 관상(theoria)의 관계를 논할 때 관상을 활동에 대해서 더 탁월한 위치에 두곤 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의 완성을 영의 완성 혹은 삶의 비물질화와 영성화 안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활동(Praxis)이란 육체적인 일이든 정신적 인 일이든 외적 활동과 관련된 일을 의미한다. 반면에 관상(theoria)은 영원한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지적 인지를 말한다. 이 둘의 영역은 실제적으로는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플라톤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이 기독교 신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활동은 비실재하는 감각적인 세계를 향하고 있지만, 이데아의 비전은 순전히 영적 세계와 지고선(至高善) 자체를 향하고 있다. 이러한 지고의 지적 비전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비실재적인 감각적 세계에 대해서는 완전한 무정넘(apatheia)에 이르러야 한다. 그것은 철저한 금욕 수련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이 초기 교부들에게 기독교적 금욕 수련의 이론적 원척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 교부들에게 있어서 활동(Praxis)은 더 이상 외적인 활동을 의미하기보다는 도덕적이고 금욕적인추구, 그리고 덕성과 완덕을 이루고자 하는 투쟁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독교적 덕목을 이루기 위한 실천적 활동은 관상을 위한 필요한 선결 조건이라고 믿었다.

 

2) 동방교회의 활동과 관상

로마 가톨릭적인 입장에서 활동적인 생활이란 가르침이나 설교 혹은 사회사업에 종사하는 삶을 의미하며, 관상 생활이란 카르투시오 수도회와 같은 봉쇄 수도자들을 의미했다. 초기 동방 교부들의 저서에서 이 두 영역의 의미는 서방교회와 조금 달랐다. 활동적인 생활이란 덕을 획득하고 정욕을 극복하기 위한 금욕적인 노력을 의미하며, 관상 생활이란 하나님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동방 교부들의 견해에 따르면 봉쇄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도 활동적 삶에 종사할 수 있으며, 세상에서 완전히 외적인 봉사에 헌신하고 있는 의사나 사회사업가도 내적인 기도를 실천하며 마음의 침묵을 획득했다면 관상 생활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동방 교부 중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기독교 플라톤주의자이면서 기독교적 관상 전통을 세워 주는 데 큰 영향을 미친 두 인물은 오리겐(Origen)과 그의 영향을 받은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를 들 수 있다. 그리고 관상과 활동의 조화로운 관계를 발전시킨 사람은 역시 오리겐의 영향을 받은 플라톤주의자인 폰타쿠스의 에바그리우스(Evagirus of Ponticus, 346-399)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오리겐은 닛사의 그레고리의 관상의 길을 앞서 열어 놓은 선구자라고할 수 있다. 오리겐은 창세기 말씀인 하나님의 형상(image)과 하나님의 모양(likeness, 1:26)을 언급하면서, 타락이란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모양은 상실한 상태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하나님의 모양을 회복하는 것이며, 관상의 원래적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완전한 관상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점차적인 진보를 세 단계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 단계는 점차적인 진보를 이루어 가고 있는 사람이 도덕적 정화를 통해 새로운 단계의 영적 진보를 준비한다. 오리겐은 이러한 기독교적 덕목을 실천하고 죄악과의 투쟁을 활동(Praxis)이라고 말한다. 다음 단계로는 그 덕목이 실현되고 그래서 변화를 겪은 영혼은 하나님 안에 있는 피조 세계를 보게 된다. 헬라 철학적인 용어로 지적인 관상(theoria)에 이른다. 그러나 오리겐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과 사랑의 일치로 들어가는 관상을 말한다. 그것을 신학(theologia)이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신학이란 교부들에게 있어서는 사변적 반추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사랑으로 가득 찬 정서적 응시 혹은 일치를 말한다. 그래서 오리겐은 가장 차원 높은 관상적 상태를 아가서에서 찾고 있다. 오리겐은 활동적인 참에 비해서 관상적인 삶에 더 우선권을 부여한다. 그에게 있어서 활동적인 삶이란 정화적 활동이며 관상을 위한 준비 작업이다. 어떤 측면에서 관상은 영혼에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비전이기 때문에 관상이 활동에 우선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닛사의 그레고리모세의 생애라는 저서에서 세 가지 차원에서 관상의 단계를 언급하고 있다.

첫 번째 단계로 불타고 있는 떨기나무 숲에서 하나님의 빛을 경험한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위해서 두 번의 시내산을 오를 때마다 모세는 하나님을 보고자 하지만 깊은 어두움으로 휩싸인다. 그레고리는 이 모세의 경험을 통해서 인간의 부분적인 하나님 경험은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을 받을 수 없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을 봄으로써 더 보고자 하는 열망으로 타오른다. 하나님께 오르는 그 열망은 끝이 없다. 오리겐과 그레고리의 관상의 경험은 무엇인가 본 것으로 시작하여 아무것도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으로 진행해 가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영적 여정을 활동적인 생활(Praxis, Prakti -ke)과 관상 생활(theoria)로 나누어 구분했다. 에바그리스우스는 이 구조를 보다 정교하게 발전시킨다. 즉 활동적인 생활, 자연에 대한 관상(Physike), 하나님에 대한 관상(theoria)으로 보다 세분화한다. 그에게 있어서 관상 생활은 소위 활동적인 생활인 회개와 더불어 시작된다. 회개란 단지 죄로 인해 애통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 즉 근본적인 회심, 삶 전체의 중심을 다시 하나님께 두는 것을 말한다. 이 단계에서 구도자는 자신의 인간적 본성을 왜곡시키는 뿌리 깊은 정욕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정욕'(pathos)이란 질투, 육욕, 억제되지 않는 분노 등처럼 영혼을 거세게 지배하는 무질서한 충동을 의미했다. 그러나 정욕 자체가 죄악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악용하는 것이 죄악이다. 영적 구도자는 자기 마음으로 돌아와 지속적으로 그것을 지켜보는 동안 자각이 증대되면서 절제와 분별력을 획득한다. 활동적인 생활의 최종적인 목표는 무정넘(apatheia)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대적인 의미의 무관심(apathy)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된 욕망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롭고 보다 선한 에너지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감정의 부재 상태가 아니라 재통합과 영적 자유의 상태이다. 이러한 사상이 서방교회에 전달되면서 카시안(369-435)은 무정념(apatheia)을 마음의 청결(Puhtas Cor -dis)이라고 번역했다. 에바그리우스는 무정념을 사랑과 연결시키면서 "아가페(Agape)는 무정념(apatheia)의 소산이다."라고 했다.

두 번째 관상 생활로 자연적 관상(Physike)을 말한다. 만물 안에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 안에서 만물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각각의 사물을 하나의 성례로 취급하는 것이며, 자연 전체를 하나님의 책으로 보는 것이다. 그 시대의 한 지혜자로부터 사막의 안토니가 "당신은 책으로부터 위로를 박탈당하고서 어떻게 지내십니까?" 질문을 받았을 때, 안토니는 "철학자여, 피조된 자연이 나의 책이며, 나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싶어할 때마다 그 책은 바로 내 옆에 있다오."라고 대답했다. 이 자연적 관상을 '첫 번째 자연적 관상''두 번째 자연적 관상'으로 나눈다. 전자는 육체의 감각에 의해서 감지되는 물질 세계이고, 후자는 영적 실재인 신적인 영역을 지향한다. 즉 자연적 관상의 중요한 목적은 성경의 내적 의미를 묵상하는 것이다.

세 번째 관상생활은 하나님에 대한 관상(Theoria)이다. 더 이상 피조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매개적인 사랑의 연합 안에서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직접 하나님을 만난다. 신성은 말과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이므로 이러한 관상을 하는 동안 인간의 정신은 단순히 응시하거나 접촉에 의해 하나님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개념과 말과 형상을(추론적인 사유의 차원) 초월한다. 에바그리우스는 이러한 상태를 이렇게 묘사한다. "기도할 때, 당신의 내면에 신성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당신의 마음에 어떤 형태의 인상도 남기지 말며, 비물질적인 방법으로 비물질적인 분에게 다가가라‥‥ 기도는 모든 생각을 벗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하는 동안 감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지성은 복되도다. " 이것은 관상이 보다 높은 단계에 이르게 되면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는 의식은 희미해질 뿐만 아니라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신 모든 것을 포용하는 통일성에 대한 의식은 고양되는 것을 의미한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모세의 생애에서 구름에 둘러싸인 시내산에 오른 모세의 관상적 상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 여기에서는(구름에 둘러싸인 산 정상) 더 이상 인간의 지성으로 만들어 낸 형상이나 개념으로 하나님을 배우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만들며, 하나님 자신을 선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념과 형상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실재보다는 신성에 대한 인간의 개념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형상적이고 비추론적인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그리스어 원전에서는 종종 평정과 내면의 고요를 의미하는 헤지키아(hesychia)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이것은 경청하는 태도라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침묵을 의미한다. 더 자세한 것은 후에 더 논의하겠다.

이상과 같은 에바그리우스가 제시하고 있는 세 단계 영적 여정의 구도는 이렇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첫째, 이 단계는 마치 연속적인 단계인 듯하지만, 사실은 서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존하는 세 개의 심화되어 가는 차원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는 영혼의 정욕이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는 누구도 첫째 단계 또는 활동적 단계를 완전히 초월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둘째, 에바그리우스의 구조에서 사랑은 지식(gnosis)보다 낮은 차원에 두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닛사의 그레고리가 이 관점을 뒤집어 "지식은 변형되어 사랑이 된다."고 했다.

 

 

3) 서방교회의 활동과 관상

서방교회에서는 베네덕도 수도회가 관상과 활동의 관계성을 정립해 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의 수도적 삶의 총체적인 특징인 '하나님의 일'(Opus Dei)이라는 표어와 '기도하고 노동하라'(Ora et Labora)는 표어를 통해서 베네덕도 수도회의 관상과 활동의 이상적인 조화를 들여다볼 수 있다. 이 말은 기도와 일을 동일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도가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은 기도는 하나님이 수도자에게 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온몸과 마음을 바치는 심정으로 기도에 참여했기에 그것을 성무일도라고 했다. 반면에 노동이 수도 생활에 맞도록 선택되고 조정되면서 관상적 생활에 일부가 된다는 의미에서 노동은 하나님의 일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기도와 일은 수도 생활의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을 이루고 있다.

베네덕도 수도회는 수도자들의 하루를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즉 성무일도,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육체 노동이다. 이 세 가지가 균형을 유지하도록 시간을 정해 놓았지만, 기후와 계절에 따라서 유연성을 허락하기도 했다. 예를들면 겨울에는 들일이 적기 때문에 독서 시간을 더 많게 하고, 여름에는 그 반대로 행하기도 했다. 형식상 베네딕도 수도 생활은 기도와 노동의 균형을 매우 소중히 여긴 것처럼 보이나 실제적으로 기도를 하든지 노동을 하든지 그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봄(vision)에 있었다. 베네택도 수도 생활 규칙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기도를 하든지 노동을 하든지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 즉 활동(Praxis)이고, 그 활동이 지향하는 목표는 더 이상 일이 아닌 관상(theoria)이다. 그러므로 형식적으로 볼 때는 활동이 관상의 선행 조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베네딕도 수도회가 지향하고 있는 삶의 유형은 활동의 결과로 얻은 관상이 다시 활동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활동 중의 관상 생활에 이르는 것이다. 그 관상이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완전한 관상을 지향해 가는 과정에서 활동 중의 관상을 누리게 된다. 그럴 때 비로소 그것을 하나님의 일(Opus Dei)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는 세상과 유리된 소위 관상 수도회에서 보여 주고 있는 활동과 관상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후기 증세에 이르러 탁발 수도회 즉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코라는 계속 수도회가 탄생하면서 활동과 관상의 유형이 새롭게 발전하였다. 그것은 관상과 활동의 통합적 유형인 사도적 활동이다. 도미니코회의 대표적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고대 헬라 철학과 교부 시대의 이상을 통합하고 있다. 즉 활동이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외적인 활동을 지칭할뿐만 아니라, 도덕적 정화의 활동을 말한다. 반면에 관상이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통찰을 의미하며, 하나님 그 자신을 바라보는 삶을 말한다. 그러나 토마스의 관상은 헬라적 관상 이해와는 달리 순전히 지성적(혹은 철학적) 관상이 아니고, 개인의 믿음과 사랑의 행위와 관련된 신앙적 관상이다. 기독교적 관상이 순전히 지성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몰가치적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관상과 활동은 자연스럽게 완덕을 추구한다. 사랑이 관상적인 삶과 활동적인 삶의 동기요 원천이다. 사랑과 관련하여 관상적 삶과 활동적인 삶을 이렇게 구분할 수 있다.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관상적인 삶이고, 이웃을 향한 사랑이라면 그것은 활동적인 삶이다. 여기서 관상과 활동이란 그들이 서로 완덕을 이루는 데 기여한다는 의미에서 보다 더 높은 상호활동으로 발전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탁발 수도회의 수도자들은 기도와 성무일과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지향하고, 제한된 수도원의 공간을 뛰어넘어 낮에는 이웃 사랑과 복음 선포 등의 사도적 활동을 실천했다.

 

 

  4-3 관상의 역사적 전통.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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