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다양한 관상의 길

 

 

1) 관상의 단계

기도를 보다 심도 깊게 하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오늘날 명상 기도(meditation), 관상 기도(contemplation)라는 말이 자주 언급된다. 기도의 주체자인 자기 자신이 기도를 끌어가지 않고, 기도를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기도의 주체자가 되시도록 하는 기도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나온 용어이다. 이 용어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관상 기도를 명상 기도의 한 부류이거나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여 관상이라는 라틴어인 'contemplatio''meditatio'라는 말과 동일하게 '명상'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흔하다. 물론 관상이나 명상이 음성(vocal prayer)기도와 구분된다는 의미에서 같은 부류로 취급하는 것은 크게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적인 전통에 따르면 명상과 관상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그 의미를 지나치게 희석시킬 수 있다. 명상 기도에서는 일반적으로 어떤 주제에 대한 이성적인 추리를 통해 하나님과의 대화를 추구한다.

전통적으로 음성 기도와 명상 기도와 관상 기도는 그 심도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우르반 홈즈(Urban Holms)는 기도의 종류는 기도 하는자 편에서 볼 때 집중하고 있는 그 지향성의 연속체(a continuum of focused intentionality)에 따라서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성숙한 기도의 성향은 집중하는 농도의 정도가 점점 희박해진다는 의미이다. 고전적으로 관상 및 하나님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기도가 그렇다. 성 빅토르 리처드 (RichardofVictor, 1173년 사망)는 관상을 "지혜의 나타남에 대해 놀라움으로 정지된, 마음의 자유롭고 보다 통찰적인 응시"라고 정의한다. 그는 다시 명상과 대조하여 "관상은 지각된 사물 안으로 확장된 통찰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응시인 반면에, 명상은 사물에 대해서 열심히 추구하는 마음(지성)의 주목이며, 진리를 열심히 추구하기 위해서 사용된 영혼의 주의 깊은 응시"라고 정의한다. 교회사에 나타난 영성가들이 자주 하나님과의 영성적인 관계를 결혼의 유비로 설명하고 있는데, 기도의 심도도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 초기신랑과 신부와의 만남은 대화로부터 시작된다. 서로 간에 알지 못하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탐구하기 위하여 많은 말이 오간다. 그러나 점차 관계가 무르익으면서 많은 말이 하나의 표정이나 느낌으로 전달된다. 그 친밀감의 정도에 따라서 그 표정이나 느낌이나 상징적인 행동 안에 그만큼 많은 말과 의미가 담겨지게 된다. 결국 오랜 결혼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교제의 수단은 주로 침묵과 느낌이다. 기도의 성숙도를 이런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관계성 속에서 침묵은 매우 풍부한 마음의 교류라고 할 수 있다.

성숙한 기도에 이를수록 그 희구하는 의도성의 농도가 점점 희박한 쪽으로 기울어지는데, 그 이유는 주장하는 기도가 아니라 듣는 상대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이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말하는데 있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알려지게 될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음성과 그분의 뜻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관상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내면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자유롭게 자신을 열어 놓는 상태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신비가 자기 자신의 내면에 부딪혀 옴으로써 기도의 주체자와 객체자가 하나가 되는 일치 경험 상태이다. 그 상태는 지성적인 냉랭함이 아니고 가슴으로 느끼는(heartfelt) 경험이요, 정감적인(affective)인 경험이요, 분석적인 경험이 아니요, 직관적인 경험이다. 보나벤투라는 이러한 체험의 상태에 대해서 그것은 "가르침이 아니고 은총이요, 이해가 아니고 열망이요, 부지런한 독서가 아니라 열렬한 기도요, 선생이 아니고 배우자요, 명료함이 아니고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요 불"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영성가들은 관상을 하나님과의 관계적 상태를 묘사하는 말로 사용하기를 좋아했다. 즉 영적 여정의 극치 즉 하나님과의 관계적 일치의 정도에 따라서 그 상태를 다양하게 나누어 묘사하곤 했다. 신비신학을 최초로 종합시킨 알바레즈 데 파즈(Alvarez de Paz)는 묵상 기도를 네 가지 기본형으로 나눈다. 즉 추리적 묵상(discursive me -ditation), 정감 기도(affective prayer), 불완전한 관상(in -choat contemplation), 완전 관상(perfect contemplation) 등이다.

추리적 묵상은 초자연적 진리를 꿰뚫어보고, 그것을 사랑하며 은총의 도움으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그것에로 마음을 돌려 추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추리가 끝나면 묵상은 끝나게 된다. 이 과정을 거쳐 정감적 기도나 명상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묵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성이 제시하는 초자연진리에 대한 의지적 사랑의 행위이다. 아빌라의 데레사(Teresa of Avila)는 묵상은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많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의지가 사랑의 행위로 부풀어 오를 때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친밀한 접촉이 이루어지고, 그 때 비로소 영혼은 참으로 기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추리 작용은 단순히 사랑을 일으킬 준비에 불과하다.

정감의 기도란 의지 작용이 지성의 추리 작용보다 우세한 형태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즉 지성보다 사랑이 우세한 단순화된 묵상이다. 추리에서 의지의 활동으로 옮겨지게 된다. 추리적 묵상과 영적 독서는 정감 기도 실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여기서 의지의 행위를 자극하는 자료를 얻게 된다. 정감 기도의 실천은 묵상 재료를 하나하나 고찰해 나가다가 의지의 정감이 유발되는 매순간 추리 묵상을 잠시 멈춤으로써 가장 잘 수행되어 나간다. 정감의 기도를 적절히 활용하면 많은 영적 유익을 얻는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정감 기도는 추리적 묵상에서 오는 무미건조함에서 잠시 벗어나 쉬게 한다. 정감 기도는 지나친 내적 성찰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아니면 우리 자신의 노력에 너무 의탁하지 않게 한다. 정감 기도는 본질상 의지의 작용이고 따라서 사랑의 행위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깊은 일치를 갖게 도와준다. 그것이 주는 마음의 위로와 감미로움 때문에 기독교적인 실천에 큰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불완전 관상은 지극히 단순화된 수덕적 기도의 한 형태이다. 먼저 묵상에서 사용된 추리는 이제 단순한 지적 응시로 바뀌고, 정감 기도에서 체험한 정감은 하나님께 대한 단순한 애정 어린 관심과 합일된다. 이 기도는수덕 기도와 신비적 기도 간의 다리 노릇을 한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은사가 수동적으로 영혼 안에 작용하기 직전의 최종적 단계이다. 그렇기에 이 단순함의 기도에서는 습득적(active) 요소와 주부적(infused) 요소가 혼합됨을 흔히 체험하게 된다. 습득적 관상에서 이미 하나님의 은총이 작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기도자가 충실하면, 주부적 요소는 점차 증가되어 마침내 기도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관상 기도에 있어서 습득적 요소가 점차로 줄어들어 가고 주부적 요소가 확대되어 가면서 기도자는 수동적인 상태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기도자는 추리적 지식이나 탐구적 지식보다는, 직관적이면서 사랑에 찬 지식을 맛보게 된다. 그 맛은 즐거움과 찬탄과 감격이다. 특별히 지성적인 활동보다는 사랑의 정감이 활발하게 작용하는데, 그 사랑의 활동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강렬하게 경험함으로부터 비롯된다. 그 사랑은 집착에서 자유롭고 오히려 사랑하는 분을 향하여 자신을 내어 주는 활동이다. 이러한 관상의 좋은 본보기로는 자연에서 경험되는 미적 경험이다. 자연을 바라볼 때 자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이기적인 혜택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자연 그 자체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에 매료될 때 그것을 바로 관상적인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심리적으로 볼 때 하나님과의 일치 체험과 자연에서 경험하는 관상 체험이 매우 유사하다. 오먼(Jordan Aumann)은 주부적 관상(완전 관상)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다.

(1) 하나님 현존의 체험이 현저하다.

(2) 영혼 안에 초자연적인 것이 엄습하는 느낌을 받는 다.

(3) 본성적인 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체험을 할 수 있 다.

(4) 능동적이기 보다 훨씬 수동적이다.

(5) 하나님에 대한 체험적 지식은 명확하거나 뚜렷하지 못하고 모호하고 혼잡스러울 수 있다.

(6) 관상자는 하나님의 활동 아래 있다는 안정감과 확신 을 받는다.

(7) 관상자는 은총 상태에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

(8) 그 체험의 서술이 매우 어렵다.

(9) 하나님과의 일치의 체험과 동시에 존재적 변화를 가 져온다.

(10)실천적 삶에 대한 큰 충동을 느낀다.

 

 

2) 두 종류의 관상의 길

교회는 전통적으로 관상에 이르는 두 종류의 모형을 가르치고 있다. 첫 번째는 일체의 영상이나 이미지를 부정하고 순수 어두움의 상태에서 하나님과 일치 체험을 보다 진정성 있는 일치라고 믿는 모형이다. 관상 경험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체의 상상력이나 이미지를 끊임없이 제거하여 감각의 어두움과 영의 어두움에 이르게 된다. 다른 하나는 상상력이나 갖가지 이미지가 관상 체험에 이르는 중요한 매게체가 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전통이다. 기독교 영성사에서 이러한 두 가지 모형의 관상의 길을 태동시키는 데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위 디오니시우스(Pseudo- Diony -sius)이다. 그는 5세기 후반에 시리아 기독교와 신플라톤적인 분위기 아래에서 바울의 측근 중한 사람인 아레오바고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Areopagite, 17:34)라는 아명으로 저술 활동을 한 동방교회의 한 수도자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신플라톤적인 형이상학과 성경의 가르침과 구도자의 내면세계를 잘 통합시켜 영적 여정의 한 패러다임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는 신플라톤적 창조론과 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 '아래로의 산출'(the procession downward)'위로의 복귀'(the return upward)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신플라톤적 창조론인 산출과 복귀의 형태를 받아들이면서 전자를 긍정의 길(via affirmativa)이라고 하고, 후자를 부정의 길(via negativa)이라고 하는 관상의 길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신학적 방법론으로 받아들여서 전자를 '긍정신학'(affirmative theology), 후자를 '부정신학' (negative theology)이라고 칭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 혹은 이미지는 그것이 아무리 차원 높은 고상한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아무리 고상한 개념이나 이미지일지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부여하신 그만큼 유사성을 지니고 있지만, 반면에 그분에게만 속한 무한한 속성에 대해서는 비교할 수 없는 비유사성이 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유사성을 접촉점으로 하여 하나님과 만남의 길을 추구하는 것을 긍정신학 혹은 유념의 길(kataphatic way)이라고 한다. 인간의 것과는 전혀 접촉점을 찾을 수 없는 비유사성을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것을 부정신학 혹은 무념의 길(apophatic way)이라고 한다. 전자를 선택 할 때 그 이론적 기초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하찮은 피조물일지라도 그것을 깊이 관상한다면 그 곳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하다고 본다. 피조물이 지니고 있는 가장 하찮은 속성으로부터 한 단계 한 단계씩 상승하면서 관상해 간다면 피조물이 지닌 가장 고상한 속성에까지 이르게 되고, 이를 통해 할 수 있는 만큼 하나님이 지닌 거룩하고 가장 고상한 속성을 맛보게 된다. 단순히 생명을 보존하려고 꿈틀거리는 벌레에게서도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그 능력을 엿볼 수 있다. 자연을 아름답게 수놓는 갖가지 수목에서도 하나님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인간의 희생적인 사랑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만난다. 모든 만물을 변함없이 보존하시고 보호하심은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과 그 선하심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유념의 길로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추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피조물이나 인간이 지닌 가장 고상한 이미지나 속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견줄 수 없고, 조화할 수 없는 비유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비유사성을 제거할 때만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성취할 수 있다. 그것은 피조물과 인간의 개념이나 이미지 안에서 도저히 유추해 낼 수 없는 그 곳에 이르기 위해서 유추 가능한 모든 이미지나 속성을 하나씩 하나씩 부정해 가는 방법밖에 없다. 그것을 무념적 방법이라고 한다. 하나님에게 가장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속성이나 개념으로부터 부정하면서 위로 올라가게 된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 '태양 같은 하나님의 의()' 등의 가장 고상한 속성처럼 보이는 이미지까지도 부적합한 것으로 여기고 부정한다. 끊임없는 부정의 길을 달려갈 때 결국 인간의 모든 개념이나 언어는 잠을 자게 되고 깊은 침묵의 심연으로 들어간다. 이 깊은 심연은 결코 감각적으로도 지적인 인식 작용으로도 포착할 수 없는 순전한 영의 세계요 절대적인 세계이다. 이 순수한 세계 속에서 개념화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맛본다.

하나님의 절대 타자성에 대한 넘을 수 없는 질적인 차이 때문에 인간의 어떠한 느낌이나 감각 기관으로도 순수한 하나님 체험은 가능하지 않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가장 좋은 환경은 인간이 지닌 일체의 개념이나 느낌이나 이미지 등에 집착하지 않고 초연함으로써 순수한 영혼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한 질적인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순수한 하나님 체험 이전에 인간은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는다. 그 변화의 과정을 위 디오니시우스는 정화, 조명, 일치라는 삼중적인 단계로 제시한다.

정화의 단계란 우리가 자유의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속해 있는 우리 존재의 정화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5:8)고 하셨다. 회심 자체가 매우 급작스럽게 혹은 매우 감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정화의 작업은 지속적인 의지적 노력으로 수행해 가는 과정이다. 이 단계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와 내주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비우기를 힘쓴다. 정화의 단계에서는 외적 감각의 정화, 내적 감각의 정화, 정욕의 정화, 지성의 정화, 의지의 정화 등이 있다. 인간의 욕망과 유혹은 인간의 감각 기관을 통해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영성 생활에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다. 내면의 정화가 이루어지면, 우리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본성이 알려지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 대한 깨달음이 오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조명의 단계에 접어든다.

조명의 단계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깊게 자각한다. 이 단계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은총의 능력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죄악의 길로 다시 빠질 수도 없고 모든 문제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밝고 밝은 내적인 평화 상태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과는 정반대인 내적 소동을 경험하게 된다. 전에는 결코 생각하지도 못했던 범죄와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더 민감하게 눈을 뜨게 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내적인 비전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다 선명하게 인식하며 여전히 그 길을 걷는 데 많은 장애물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지속적인 자기 부인과 자기 포기를 요구받는 경험을 한다. 이러한 경험은 곧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새로운 인격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자기 부인은 자기 자신의 의지로 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을 더욱 정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행하시는 것이다. 정화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정화가 능동적인 것이라면, 이 조명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정화는 수동적인 것이라할 수 있다. 기도자들은 그들의 내면에서 자신의 존재보다 더욱 큰 힘이 작용하고 있으며, 그 힘이 그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이 상태는 구름한 점 없는 여름철이라기보다 취약하지만 생동력이 넘치는 폭풍우 후에 피어나는 봄날 아침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조명의 단계를 거쳐서 우리는 하나님과 일치의 삶으로 나아간다. 조명의 단계를 지나는 자아는 더욱 고양되고 확장되면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주의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현존 안에 깊이 거하며,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자신이 머물고 있음을 깨닫는다. 여기서 비로소 일치의 단계(union)혹은 완성의 단계(Perfection)에 이른다. 완성의 단계에 대한 위 디오니시우스의 원래의 가르침은 하나님과의 신비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영적 지식의 온전함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후기 중세에 이르러 하나님과의 신비적인 연합 관계의 의미로 발전되어 사용되었다. 후기중세의 영성가들이 이어받은 완성의 단계 혹은 일치의 단계는 '관상 체험'에서 성취되는데, 이 때 얻는 영적 지식이란 모든 감각과 인식 작용이 멈춘 침묵의 심연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3) 관상적 체험의 다양성

관상적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일치 체험의 주체는 누구인가? 관상적 체험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러 오신 하나님의 일인가? 혹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 일인가? 이 논란은 이론적인 차원에서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이론적인 차원에서라면 양쪽 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영적 경험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면 그것은 동시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미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할 수 없다. 우리가 그분 앞에 먼저 나아가지 않을 때, 그분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께 먼저 나아가야 한다. 예레미야 33:3"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쪽도 생각할 수 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할지라도 그분이 먼저 그 곳에서 기다림이 없었다면 우리의 나아감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다림이 우리의 나아감보다 우선이다. 요한복음 6: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3:20에서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다"고 한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은 무엇이 먼저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동시적인 사건이다. 이것은 경험적 차원에서의 논리이다.

그렇다면 상징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의 장소가 있다고 해도 좋을듯하다. 하나님이 기다리는 곳이 있을 것이고 우리가 나아갈 곳이 있다는 말이다. 영성사에서는 이 만남의 장소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중세 영성가의 대표자로 알려진 성 프란체스코의 유형이다. 그는 그 만남의 장소를 다른 무엇보다 자연에 두기를 좋아했다. 두 번째로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뱅이나 루터는 그 만남의 장소를 성경에 두고 있다. 세 번째로 종교개혁 당시의 또 다른 영성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 장소를 '어두운 밤'이라고 했다.

성 프란체스코는 자연을 자신의 한 부분처럼 사랑했다. 자연 그 자체를 사랑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자체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우정과 사랑에 찬 자연의 관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에게 자연은 자신의 형제요, 자매요, 친구였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한다면, 자연의 만물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을 수 있다면, 자연 안에서 역시 '형상'(imago)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흔적' (vestigo) 혹은 하나님의 '발자취'를 느낄 수는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자연 사랑의 마음을 담은 '해양의 노래'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가장 고귀하고 전능하시며 선하신 하나님

모든 찬송과 영광과 존귀와 축복이

지극히 높으신 오직 당신 한 분께만 합당하나이다!

또한 어떤 인간도 당신을 논할 가치가 없나이다.

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주님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 특히 매양 형제를 인하여!

그를 통해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하루의 빛을 주셨으니

그는 커다란 광채와 더불어 눈부시도록 빛나고 아름답도다!

오 가장 높으신 주님, 그는 곧 당신의 상징이십니다!

 

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주님, 달과 별 자매들을 인하여!

당신께서 지으신 그들은 하늘에서 밝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나이다.

 

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주님, 바람 형제를 인하여!

또한 대기와 구름과 모든 날씨를 인하여!

이들에 의하여 당신께서는 피조물들에게 음식물을 주시나이다.

 

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주님, 물 자매를 인하여!

그녀는 매우 유용하고 겸손하며, 사랑스럽고 정숙하나이다.

 

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주님, 불 형제를 인하여!

그를 통해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빛과 열을 주시나니

그는 매우 아름답고 명랑하며, 힘이 세고 강하나이다.

 

찬양을 받으소서, 나의 주님, 우리의 어머니인 대지를 인하여!

그는 우리를 지배하고 유지해 주며

아름다운 꽃과 잎과 열매를 맺나이다.

 

………

 

나의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과 축복을 돌릴지어다.

또한 거룩한 순종과 겸손으로 그를 섬길지어다!

 

이 해양의 노래를 통해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성 프란체스코와 그의 제자들은 자연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을 만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배웠다는 것이다. 즉 겸손과 사랑과 정의와 정숙과 기쁨과 순종과 찬양을 배웠다. 프란체스코는 끊임없이 가난을 강조했다. 자기 자신은 '가난'(Lady Poverty)과 결혼했다고 선언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이들에게도 철저히 가난을 강조했다. 그것은 감상적인 고행주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내적으로 외적으로 비울 때만이 자연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부요를 맛볼 수 있으며, 부유하신 그분과의 풍성한 만남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가난한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 지극했다. 그에게 있어서 가난은 곧 풍요였다. 그렇게 프란체스코가 자연에서 경험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각성된 심령의 노래가 곧 '평화의 노래'로 알려져 있다.

 

주여, 나를 당신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미움이 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었는 곳에 기쁨을

주여, 위로를 구하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을 구하기보다는 사랑하게 해 주소서.

자기를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잊음으로써 찾으며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고

죽음으로씨 영생으로 부활하리니.

 

이 아름다운 노래는 성 프란체스코의 내면의 영성이 자연으로 인해서 얼마나 풍성해지고, 또 그 안에서 얼마나 풍요로운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맛보고 있었는가를 대변해 주고 있다.

두 번째로 종교개혁자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를 생각해 보자. 칼뱅은 프란체스코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만남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는다. 자연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역 장소이므로 그 곳에서 하나님이 계심과 그의 엄위하심과 지혜를 알 수 있는 곳으로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 위에 영광의 명백한 표적을 새겨 놓으셨으며 그것은 너무나 뚜렷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아무리 무식하고 둔한 사람이라 해도 무지를 구실로 삼을 수 없다."고 했다. 특히 그는 자연의 시각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모든 인간은 "창조된 세계의 관객으로 만들어졌으며, 이토록 아름다운 연출을 감상하고 나면, 그 작가에게로 이끌리지 않을 수 없는 눈이 주어져 있다."고 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작품을 통해 그 작가에게 도달함으로써 유익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작품을 즐기는 것보다 우리의 눈을 빼내어 버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 속에 나타난 명백한 하나님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 자연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지식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을 인식할 수 있는 자리가 이성인데, "우리 정신 속의 모든 것들은 부패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은 자연을 보는 데 심각한 제한성과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자연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며, 확실하고 견고한 어떠한 지식도 주기 어렵다는 것이 칼뱅의 또 다른 입장이다. 심지어 인간은 그 자연 속에서 스며나오는 하나님의 속성을 느끼고 맛보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연 자체를 하나의 ''으로 왜곡시키는 어리석음과 무지함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철학자 중에서 종교성이 가장 풍요로운 플라톤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그는 만물을 하나님과 혼돈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헬라의 시인 버질의 시를 인용하면서 자연을 보는 인간의 눈이 얼마나 부패하고 어리석은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꿀벌은 하늘나라 마음의 한 부분

천상에서 어떤 힘을 빨아들인다.

그것은

신이 땅과 바다와 하늘

그리고 만물에 편재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양과 소

사람, 짐승들이 태어날 때

실낱 같은 생명을 받는다.

그리고 만물이 그에게로 돌아가서 해소되고

또 회복된다.

다시는 죽음이 없다.

그러나 별 많은 하늘나라 높이 올라가 거기서 살리라.

 

이 시의 어리석음은 여기에 있다. 우주에 드러난 하나님의 지혜와 그 능력에 대해서 초월적인 하나님께 드려야 할 마땅한 경건을 범신론적인 속성으로 바꾸어 마치 인간도 그 한 부분인 양 왜곡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칼뱅은 자연을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보는 것에 대해서 인색해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칼뱅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인간 구원에 관한 문제였다. 어느 정도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 체험이 가능하다할지라도 그곳에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 이 물음을 제기한다. 물롬 칼뱅에게 있어서 그 대답은 절대 불가이다. 성경은 이미 자연 속에서 보여줄 수 있는 하나님의 자취를 오해 없이 계시하고 있으며, 성육신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확실한 지식을 계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영혼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만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장소라는 것이 칼뱅의 입장이다.

세 번째로 십자가 성 요한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어둔 밤'이라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영성 생활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며, 사랑의 사귐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 사랑의 속삭임은 '고요한 밤, 새벽이 떠오르는 때, 소리 없는 음악, 우렁찬 적막'에서 이루어진다. 소리 없는 침묵과 적막으로 우리 자신이 인도될 때 비로소 진리의 빛, 사랑의 불꽃과 부딪히게 된다. ''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감각이 잠든 상태를 의미한다. 감각은 언제나 제한된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상상하게 하고, 그 결과 불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고상한 것일지라도 감각의 세계에서 구성된 하나님의 이미지란 그분 자신에게 이르기에 너무나 큰 간격이 있다. 인간의 감각적인 세계로 하나님을 그려보고 이해한 것이 아무리 최상의 것일지라도 하나님 그 자신과 비교할 매 유사성보다는 비유사성이 훨씬 더 많다. 모든 피조된 존재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그 존재에 비할 때 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무한하신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 사랑의 사귐에 이르려면 감각의 세계는 닫혀야한다. 이것이 '어둔 밤'이다. 즉 감각이 닫힌 영혼의 세계이다. 이 어두움의 세계를 성 요한은 이렇게 표현한다.

 

모든 것에서 만족하려면 아무것도 만족하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가지려면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려면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려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맛보지 못한 기쁨을 맛보려면 기쁨이 없는 곳으로 가라.

알지 못한 것을 알려면 아는 것이 없는 곳으로 가랄.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려면 가진 것이 없는 곳으로 가라.

네가 아닌 것이 되려면 네가 없는 곳으로 가라.

모든 것에서 방해를 받지 않는 방법

 

무엇에 마음이 머물게 될 때는 모든 것에 덤벼들기를 포기하라.

모든 것을 다 가지려면 모든 것에 대해서 모든 것 안에서 다 부정하라.

모든 것을 다 갖게 될 때는 아무것도 원하지지 않으면서 가져라.

모든 것에서 무엇을 가지려면 하나님 안에 있는 너의 순수한 보물을 갖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각각 다른 세 장소를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그 다른 장소를 서로 상충된 개념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강조점이 다르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세 영의 사람들은 결코 어느 하나를 배타적으로 보기 위해서 자신의 주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 세 가지의 다른 길을 통해 보다 조화로운 영성 생활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온 세계에 충만하게 임하여 계신다. 어디에도 제외될 수는 없다. 동방교회에서 주장하는 바대로 온 피조 세계에는 하나님의 본질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에너지가 충만해 있다. 그 에너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흔적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그러한 경험이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칼뱅이 주장한 대로 성경이 바로 그러한 눈을 가지도록 인도하며, 성경으로 말미암아 정화된 영혼이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이다. 프란체스코는하나님이 허락하신 풍성한 피조물의 세계를 맛보기 위해서 스스로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마음이 철저히 가난한 사람은 자연을 통해 하나님과의 풍요로운 교제를 누릴 수 있다. 동시에 그 풍요로움을 맛보는 자는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될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 정화된 영혼의 과정과 상태를 어두운 밤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왜곡된 감각이 정화될 때 감각의 밤을 맞이하게 되고, 영혼의 기능인 기억, 이해, 의지 등이 정화되어 하나님께 향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영혼의 밤을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감각과 영혼이 성경으로 말미암아 정화되어 있다면 자연은 우리의 영성을 일깨워 주는 가장 훌륭한 장소가 될 수 있다.

 

4-4 다양한 관상의 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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