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의 세계에서의 관상

                                                         토마스 머튼의 기도 1 (Merton Prayer 1)                            

                   - 토마스 머튼

 

기도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반대 방향에 중점을 두는 듯하다.

이것은 다른 하나를 희생시키고 하나를 강조하려는 경향의 일예라 하겠다.

즉 "...과...둘 다"가 아니다.

"…이나 ... 중의 하나"로 생각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토마스 머톤은 [SISTER’S TODAY]에서 발췌한 이 기사에서 적절한 비례로 문제들을 다룬다. 
이 기사에서 내가 의도하는 바는 의미의 기본 문제들을 검토하려는 것이다.

관상생활이니 기도생활이니, 고독이니 고요니, 묵상이니 하는 것들은 원자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들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이미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인가? 

내가 말하는 관상생활이란 단순히 수도회의 봉쇄생활, 조직화한 기도생활이 아니다.

그 자체에 특별한 문제가 있다.

봉쇄 관상수도회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현대세계에 아무런 의의도 없다고 솔직하게 드러내서 말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요즘은 많다.

 

나는 이에 대해서 논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만을 말하고 지나가겠다.

나는 어느 단체나 수도회의 사상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외적이며 쓸데 없이 지나치게 분주한 생활과는 양립할 수 없는 인간다운 완전한 발전, 내적 기율과 경험이라는 특별한 면에 대하여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그와 같은 내적인 기율과 경험이 활동, 창조적 활동, 헌신적 사랑과 양립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이들은 모두 함께 병행하는 것이다.

결실 풍부한 활동을 위해서는 내적 경험의 깊이가 그 토대로써 필요하다.

인간 존재의 내적 기초를 위한 탐구로부터 나오는 보다 깊은 인간의 이해없이는 사랑은 피상적이며 기만적인 것이 될 것이다.

 

전통적으로 기도와 묵상과 관상은 개개인의 인격적 삶의 이 깊이와 또한 남을 이해하고 남에제 봉사하는 능력의 이 확장과 관련되어 왔다. 
기도와 묵상과 관상이 한 때는 어디서나 인간 생활의 중요한 실재로 인정 되었었다 하더라도 이제는 그렇지가

않다라는 하나의 기정(旣定) 사실로 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하자.

신자들까지도 기도니 묵상이니 관상이니 하는 것들을 제2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듯하고 중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이루는" 것인 듯하다.

 

기도란 단지 "암송(暗誦)"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묵상이란 이해할 수 없는 아리숭한 과정으로 생각한다.

설령 유용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생활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상에 대해서는 소위 "관상생활"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의심스럽게 생각한다.

만일 관상생활을 하는 사람들 자신이 관상을 두려워한다면, 일반 평신도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활동과 관상 사이의 전통적인 논쟁에서, [관상]생활의 현대 지지자들은 실용적인 입장에서, 즉 활동과 효력이라는 말로써 관상을 옹호한다.

달리 말하자면, 봉쇄 수도자나 수녀는 영신적 활동에서 매우 효율적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무용"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게으르고 느린 것이 아니라, "이루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비로운 방법으로 볼 수 없는 영신적인 방법으로 기도로써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사물과 사람에게 활동하는 대신, 그들은 기도로써 하느님께 직접 활동한다.

이것은 사실 일종의 "보다 높은 활동"이며 "최고의 효력"인 것이나 사람들이 보지를 못한다.

그것은 믿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무얼 증명하려는 의사는 없다.

다만 현대인들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느냐 하는 점만을 다루겠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는 모르는 체 "신앙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에서 이것을 믿는 사람들이 확실히 많이 있다.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지도 않고 남이 말했다고 해서 그냥 받아들인다.

그와 같은 논법은 그들에게 아무런 매력도 돼지 못한다.

마음의 불편을 주겠지만, 그것에 대하여 어떻게 헤야할지를 그들은 모른다.

그들은 시간이 없어서 검토하지 못하는 다른 것들과 함께 그것도 뒷전으로 밀어둔다. 
관상생활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부분적으로는 옳지만 완전하지는 않은 것으로서, 간청의 기도와 전구(傳求)와 대신 받는 희생과 고통을, 봉쇄생활의 일과 활동과 "이루어 놓은 그 무엇"으로서 많이 강조한다.

또한 관상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기도와 희생이 숨은 방법이긴 하지만 어떤 일정한 효과를 산출한다는 생각을 강조한다.

 

그들은 "은총을 산출"하며, 또한 어떤 방법으로 신적 개입을 "일으킨다".

이리하여 수술전야(前夜), 소송의 경우, 개인과 가정의 문제가 있을 때, 병들었을 때, 각종 어려움이 있을 때 기도를 요청하는 편지가 수도원과 수녀원에 많이 배달되는 것이다.

분명 가톨릭 신자들은 하느님이 간청의 기도를 들으시고 대답하신다고 믿는다.

그러나 관상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마치 자신과 남을 위하여 하느님께로부터 은총과 호의를 얻는 데만 전력을 다하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관상생활을 왜곡하는 것이다. 
하느님과 기도에 대한 이와 같은 개념은 자연히 인과율의 우주 기계관에 꼭 들어 맞는 것이다.

인과율의 우주 기계관에서는 초월적인 신은 우주 "밖에" 또 우주 "위에" 있으며, 절대적인 제 1 원인이요 최고

동기로서 우주에 작용하는 것이다.

그 신(神)은 가장 미소한 세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결과를 인도하고 계획하고 원하는 "원인 없는 원인"이다.

그는 "최고 기사(技師)"로 간주된다.

그러나 인간은 그분과 서로 통할 수 있고 그분의 계획에 참여하고, 신앙과 기도로써 그 분의 원인력의 작용에 참여할 수 있다.

그 분은 인간이 당신과 일치하고 있는 한, 당신의 활동의 숨겨진 제한된 몫을 인간에게 위탁하신다. 
여기에 무슨 잘못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불완전하게 표현했을 뿐이며, 그것은 논리적으로 완전하며 자연히 어떤 전제들과 부합 된다.

그러나 뉴톤(Newton) 이후의 물리학과는 부합하지 않는 우주관이라고 생각되는 데 곤란이 있다.

19세기와 20세기 초의 근대주의적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이 문제에 대하여는 단 하나의 답이 있었다.

"만일 우리의 우주관이 현대 과학과 부합하지 않는다면, 과학이 틀린 것이다. 우리는 옳으며 그것은 그것이다."라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때 이후로 하느님은 초월적이면서 또한 내재적(內在的)이라는 것과, 신앙은 "저 밖에" 있는 신을 상상할 특별한 능력을 요구하지 않으며 멀리서 조종하는 하나의 기계로 간주되는 그의 피조물과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은 개념은, 시간과 공간과 하느님의 관계에 대하여 매우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난처하게 하고 기대에 어긋나게 했다.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세계와 하느님에 대한 전적으로 새로운 사상, 역동적이며 내재적인 개념을 역설한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 -의심없이 가장 잘 알려진-이다.

하느님은 인간 안에서 또한 인간을 통해서 계속적인 창조를 완성하는 작업을 하고 계신다.

다소 이것은 또한 우리가 포착할 수 있고, 우리가 현재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닌 받아들일 만한 개념을 창조해 내는 문제이기도 하며, 틀림없이 후 세대에 다른 개념들에 의해서 대치될 것이다. 
중요한 진리는 그 표현 방법이 달라지거나 그 보는 입장이 달라진다고 해서 변경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입장이 그 진리를 왜곡하거나 그르치지 않는 한 변경되지 않는다. 
우리의 존재 자체 안에 직접적으로 친밀하게 현존하시는 -한편 동시에 무한히 초월적인 존재이신- 하느님을 보는 내제적 방법이 관상적인 전통에 실제로 훨씬 더 가깝게 된다.

관상생활의 진정한 주안점은 신앙을 심화(深化)하고, 우리와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일치가 실현되고 경험되는 바로 그 점에 대한 이해와 자유의 인격적 차원을 깊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주의 왕이시며 통치자로서의  -물론 하느님은 그러하시다 - "저 밖에 계신" 하느님의 무한성과 존엄성의 인식에만 눈 뜬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재 안에 직접으로 인격적으로 친밀히 현존하시는 하느님이라는 보다 친근하고 보다 경이로운 인식에도 눈떴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이 우리 존재와 합병되어 있다는 범신론적인 혼동은 아니다.

반대로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이 우리보다도 더욱 진실된 우리 자신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하느님과 동일하지는 않으며,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잘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는 하느님과 맞서 있으며 그 분에게 맞섬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에 맞서는 것임을 인식하는 데에 뚜렷한 갈등이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표면적인 실존과 외형과 우리의 자아의 통속적인 관심사에만 관련된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우리 자신에게 진실되지 못한 것이다.

하느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참다운 깨달음에 이르려면 우리는 우리의 이기적이고 제한된 자아를 버리고 전혀 새로운 빛으로 우리 자신과 모든 것을 보게 하는 사랑과 동기의 내적 중심을 발견함으로써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에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을 신앙이라 하든 (더 나아가서) 관상적 조명(照明)이라 하든, 하느님에 대한 지각 혹은 신비적 일치라 하든, 이 모두는 동일한 인식을 서로 다른면, 다른 수준에서 본데 불과하다.

그 동일한 인식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새로이 인식하는 깨달음이다.

즉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안에 창조되고,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변화하고 현양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지각의 문들"이 열려있고, 모든 생활은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일상생활의 산만성 때문에 보통으로 가려지고 왜 곡된 우리 자신의 존재의 참다운 의미는 이제 중추적 직관 안에 계시된다. 
- 남으로부터 받는 자극과 암시에 밀려서 마치 기계와도 같이 생활하는 - 목적없는 행위의 상대적 무의미 속에

 

상실되고 분산된 것은 완전히 총괄된 의식적 의미 안에 함께 모인다.

크리스찬 전통에 따라 이 특별하고 빛나는 초점은 사랑의 활동이며 성신의 활동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 변형 되었고 하느님으로부터 오고, 하느님의 창조적 구원적 사랑을 위해 일하며 하느님의 영광 속에 완성에로 향하고 있음을 보는 이 "감미로운 지식"은 관상적 지식이며 생활한 신앙의 결실이며, 성신의 선물이다. 
환각제에 대한 오늘의 인기는 확실히 이와 같은 지식과 내적 통합에 대한 갈망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환각제로 인한 단 하나의 문제는 그들이 사랑의 통합을 산출하지 않고 그것을 피상적으로 일시적으로 모방 한다는 점이다. 
이 내적 [보임] (vision)은 하나의 선물이며, 기술에 의해서 직접 생산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를 준비하는 데는 어떤 방법이 필요하다.

묵상은 이 규칙적인 방법의 보다 중요한 특색있는 형태 중의 하나이다.

기도도 또 하나의 방법이다.

하느님의 직접적인 현존에 대한 이 내적 인식에 관련해서 볼 때 기도는 사랑의 경험만큼은 동기와 효과가 되지

못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 그 자체이며, 감사이며, 하느님으로부터 오고 하느님의 세계에 당신을 계시하시는 사랑의 무한하고 넘치는 선(善)에 대한 동의이다. 
이 내적 인식, 친밀하고 역동적인 현존인 이 사랑의 체험은 우리의 전망을 변경시키게 된다.

우리는 간청의 기도를 좀 달리 보게 된다.

하느님 의 현존에 대한 찬미와 사랑어린 열중이, 무엇을 "청하는" 것보다도 무엇을 이루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안에 하느님과 더불어 모든 선(善)이 우리에게 우리 인류에게 주어졌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는다면 그외 모든 것을 덧붙여 받게 될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세세한 것들에 대하여 별로 걱정을 하지 않고 비록 우리가 그렇게 해달라고 순간마다 하느님께 치근치근하게 청하지 않는다해도, 하느님은 우리의 문제들을 보살펴 주시리라 믿는다. 세상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한편 이 내적 인식과 개방성으로 해서, 우리는 그 시대가 긴급히 필요로 하는 바에 특히 민감하게 되며, 때로는 은총에 의하여 어떤 특별한 필요를 위하여 기도할 충동을 받을 수 있다.

관상생활은 간청의 기도를 무시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강조하지도 않는다.

관상생활을 하는 사람도 강력하고 자동적으로 영감을 받을 때는 특별한 지향으로 관상적 기도를 바치지만 하루 종일 이것 저것을 청하는 것을 자기의 본목적(本目的)으로 삼지는 않는다.  
기도 역시 하느님의 "부재"(不在)인 또 하나의 기본적 체험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내재적으로 현존하시는 한편 초월적이시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이해능력을 완전히 초월하신다는 말이다.

이 둘("부재"와 "현존") "모름으로써 아는" - 신비주의의 전통적인 표현의 하나- 감미로운 지식 안에 섞인다. 이것은 부재감과 고독으로 병들고, 기도나 하느님의 생각을 "하고 싶다"는 것마저 할 수 없는 현대인들에게는 더더욱 흔한 것이다.

"신의 죽음"에 대한 체험처럼 -마치 신이 완전히 무관한 것처럼- 이것을 피상적으로 퇴거시킨다면 하나의 중대한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즉 이 부재감은 일면적인 것이 아니라 그에 반대되는 면 말하자면 현존을 포함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의심으로 괴로워하는 한편 그것은 믿어야 할 깊은 필요를 포함한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점은 이것이다.

즉 현대세계에서의 관상생활의 체험은 관상과 묵상의 수련과 기도생활과 많은 현대인을 위한 가장 결정적인 초점은 틀림없이 소위 부재감, 고독, 보기에 "믿을 수 없음"임을 보여 준다.

나는 "보기에" 란 말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이 체험이 극도로 고통스럽고 혼돈시키는 그 무엇이며, 온갖 어려운 "종교적 문제들"을 일으킬 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또한 그들이 그것올 극복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크리스찬의 성장의 표지이며 신앙의 결정적 발전이기 때문이다.

그 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신앙의 보다 초기의 미성숙한 단계에로 퇴보하는 것이 아니며 어린이에 해당하는 감정이나 열망이나 생각들을 완고하게 재확인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수준의 묵상과 기도로써 이 신앙의 위기에 대처해야 하며, 체험에 의해서 보다 완전한 인격적이며 그리스도교적 완성에로 성장해야 한다. 
이 투쟁의 체험, 자기를 비웃는 체험, 해방의 체험, 이에 따라 새로운 수준에서 평화와 은총을 회복하는 체험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삶을 일변시키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것은 성사의 작용과 교회의 생활에 객관적으로 한 몫 드는 우리의 참여에서 체험을 초월하고 인간심리를 초월하는 은총의 활동에 대한 심리학적 측면이다. 
나는 물론 "신비적 경험"이나 무슨 새롭고 이상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지성적 동의와 외적 순종 이상의 가장 높은 수준에서 자기를 위탁함으로써 수반하는 총체적 자아포기와 함께 오는 인격적 인식의 충만을 단순히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를 암송" 하고 "교회에 다님"으로써 겨우 외적 예배만으로 만족하고 외적 의무를 이행하고 단순히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진정한 크리스찬 생활은 왜소되고 위축된다.

- 온전히 개인적인 의미에서나 크리스찬 집회에 있어서나 - 기도의 참다운 목적은 하느님에 대한 인식

- 비록 때로는 이 인식이 "부재"로 보이고 부정적 요인으로 생각 되더라도- 과 사랑 속에 인격적 실현을 심화하는 것이다.

묵상의 참다운 목적 내지는 적어도 현대인에게 가장 관련이 깊은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삶에 대한 인식을 심화함으로써, 자유와 조명과 사랑의 새로운 차원을 탐색하고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은 활동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간단히 말해서 이렇다.

자기 자신의 자기 이해, 자유, 통합, 사랑할 능력을 심화하지 않고서 남이나 세상 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고자 기도하는 사람은 남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는 남에게 아무 것도 전하지 못하고, 다만 자기 자신의 고착관념과 침략성, 자신의 자아중심적 야심과 목적과 방법에 대한 망상, 자신의 선입견과 생각만을 전염시킬 뿐이다.

현대세계에서 불화와 오해 때문에 일어나는 능력과 활동의 오용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갖고 있으나, 의미와 사랑의 내적 토대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서먹서먹하다.

이것의 결과는 명백하다. 
우리는 인류역사상 최대의 위기에 살고 있으며, 이 위기는 사람들이 활동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관상의 의미를 잃어버린 (어쩌면 가져 본 일도 없는) 곳에 특히 존재하는 것이다.

관계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는 기도와 묵상과 관상 이야 말로 오히려 오늘날 가장 중요한 것이다.

불행히도 수도원 생활과 같은  공적인 관상생활이 광범하게 재고되어야 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관상생활은 아직도 500년 전에 받아들여진 사고 방식과 너무도 같고, 현대인에게는 완전히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와 묵상은 새로운 길과 새로운 지평선을 향하여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한다.

만일 우리의 기도가 새로운 생활에 대한 심오하고 은총으로 충동된 욕구의 표현이며, 항상 친숙하고 "안전한" 것에 대한 맹목적 애착이 아니라면 하느님은 우리가 아직 상상도 이해도 할 수없는 것을 기도로 준비시키심으로써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교회쇄신을 위하여 활동하실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 우리의 기도와 신앙은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서는 결코 그 완전한 실현을 보지 못할지도 모르고 미래를 향하고 있을 것이다.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