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명상

 

목 차

1. 명상에 대한 서구인의 정의와 이해 1

2. 기독교의 명상 6

 

 

이 글을 명상인들이 보는 기독교의 묵상, 관상을 어떻게 보는지를 소개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읽어 남을 알고 나를 아는 기독교인들이 되길 바라서 원문 그대로 올립니다.

 

 

 

1. 명상에 대한 서구인의 정의와 이해

 

 

서구인이 보는 명상

 

최근 들어 서구의 학자나 일반인들이 명상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명상의 고향인 인도의 심오한 세계에 대한 흠모와 이해가 깊어지고 있다. 그러나 서구에서도 고대로부터 종교인이나 철학자들에 의해서 명상이 행해졌으며, 이에 대한 연구도 계속되어왔다. 깊이 생각하는 것, 그것이 명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고 했고, 파스칼도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라고 한 것은 인간이 바로 명상적인 존재임을 밝힌 것이다. 사실 인간의 모든 문화창조 활동은 정신적인 산물이며, 그 창조의 계기는 바로 깊은 생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존재의 본질적인 특징은 인간정신의 심오함에 있다. 명상이란 바로 이러한 인간의식의 역동적인 힘이 가장 심오한 곳으로 작용하게 하는 것이요, 또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인간의 의식은 일상적인 일을 대할 때에 기계적이고 본능적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을 경우가 있다. 곧 밥을 먹고 싶거나 목이 마르면 옆에 있는 음식이나 물을 기계적으로 취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과거에 음식이나 물을 잘못 먹어서 불쾌했던 경험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서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인간의 의식활동은 본능적이고 기계적인 활동과 보다 다른 심오한 층의 활동, 두 가지 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스런 기계적 · 본능적인 활동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습관화되고, 사고유형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보다 깊은 심충적인 의식작용에서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것을 초월하고 거부하기도 한다.

예를 든다면, 애써서 번 돈을 잃어버렸을 경우에 예사로운 심정에서는 분하고 원통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하나의 경험이 되어 더 큰 손해를 예방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웃어넘길 수도 있다. 이런 때의 의식활동은 심충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심층의식에는 상대적인 가치관을 초월하는 것이 있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기도 한다. 이러한 영역이 바로 명상의 영역이다.

이러한 영역은 뇌의 일상적인 활동에서 벗어난 상태다. 명상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연히 정신집중의 과정을 겪는다. 정신을 집중할 때 선정적인 주제에서 빗나가거나 망각하지 않고, 필요한 시간만큼 그것을 지탱하는 적극적이고도 정확한 의식의 방향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훈련이 바로 명상훈련이라고 하겠다.

중세의 기독교 명상 이론가인 리처드(rechard)는 묵상과 관상을 구별하여 '묵상 명상은 어떤 결과를 내다보면서 가파르고 힘든 길을 계속해서 진행해나가는 정신적인 노동이며, 관상은 충동이 이끄는 대로 크나큰 유동성을 가지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정신적인 작업이다. 그러므로 묵상인 명상은 탐색하는 것이요, 관상은 경이(驚異)를 느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들 서구학자들은, 명상이란 명상하는 사람이 어떤 상황 속에 참여하여 막연하게 어떤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것에 대하여 의식을 집중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상적인 경험의 한계를 넘어선 자기 초월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상이란 의식을 집중하여 자기 초월과 자기 성숙을 이룩하는 정신적인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명상의 세 가지 유형

 

오늘날 세계적인 종교나 철학에서 각각 나름대로 행하는 명상은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에 따라서 유형이 독특하다. 그리하여 오늘날 명상은 학문적으로 서로 다른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내향적(內向的)인 명상이다. 이 유형은 인간정신의 자발적 비약을 염두에 두는 명상이다. 여기에서는 명상자가 어떤 상징이나 대상에 비추어서 자신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열어젖혀서 깊은 내면 속의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것이다.

내향적인 명상은 상징이나 형식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따라서 어떤 기대나 선입관 또는 예정된 어떤 행동에 유의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명상자는 자기 안에서 자발성이 계발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체의 개인적인 관념이나 습성을 떨쳐버림으로써 자기 속에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니, 불교에서 행하는 선()의 명상이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고 하겠다.

둘째는 외향적(外向的)인 명상이다. 이것은 외부에서 부여된 초월적인 실재나 상징적인 대상에 행하는 명상이다. 이러한 명상에서는 신이나 신적인 대상에 의식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러한 집중을 통해서 명상자는 그 타자 안에서 존재의 참 뜻을 찾고, 그 타자에게 자신을 합일시키며, 또는 그것을 자기 속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이러한 명상은 외부로부터 주어져 형상화된 실재를 내면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그 대상에 투사하고, 자신의 주체를 명상의 대상 속에 몰입하게 된다. 이러한 외향적인 명상에서는 주체가 객체 속에 투사됨으로써 서로 동화한다.

초월적인 어떤 대상이나 상징을 향해서 명상하게 되면, 그 대상이나 상징과 내가 일치할 뿐만 아니라,그 대상이나 상징이 거울이 되어 자신을 반성하고 파악하는 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는 상하좌우라는 양극성이 서로 만나서 조화하기 때문에 인간과 신, 인간과 인간, 동물과 인간, 식물과 인간 등의 상대적인 양극성이 조화하는 상징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대해 명상하는 것은 신과 인간을 합일시키고 화해시키며 조화롭게 작용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형태의 명상은 상향적(上向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는 어떤 형식이나 형태에 대한 복종이 생긴다.

또한 이러한 유형의 명상은 이성을 따르기 때문에 아폴로(Apollo)적인 방법이라고도 한다. 기독교의 명상은 이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셋째는 자기 내부에서 어떤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발견하려는 명상이다. 외부의 어떤 대상과 합일하려는 외향적인 것이 아닌 또 다른 유형이다. 이것은 자아의식을 완전히 없애고 망아의 세계, 곧 엑스타시의 상태에 이르러서 절대적으로 고요한 상태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노력은 일체의 심리적인 활동을 쉬는 것이다.

이러한 명상은 자아의식이나 깨어 있는 상태가 자신의 완전한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는 경험적인 자각에 근거한다.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정신적 부자유로 인해 고통스러워진다. 완전한 자유란 우리를 속박하는 자아의식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의식세계에서 떠나는 길을 택하게 된다.

이러한 유형의 명상은 명상 수행자로 하여금 자신의 일체 심작용을 없애고 의식을 정지시켜서, 자아의 기능을 일시적으로 중지시키게 하는 데 역점을 둔다. 이렇게 되면 생명의 자유로운 활동은 의식에 의해서 제한받거나, 외부로부터의 자극 및 자아의식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서 보다 높은 차원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이러한 명상은 내향적이거나 외향적이 아니므로 중도적(中道的)인 명상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명상은 자아를 부정함으로써 우주적 자아, 곧 우주의식(宇宙意識, Cosmic Consciousness)을 얻는 요가의 명상에 해당한다.

이상 명상의 세 가지 유형을 구별해보았으나, 어느 것이든지 명상의 극치에 이르면 서로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같은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 예사다. 세 가지 길 중 어느 길을 택하든지 간에 도달점에 이르면, 자기 자신은 무한한 세계로 확대되며, 자아의 새롭고 심오한 세계를 맛보게 되고, 더없이 큰 환희를 얻게 되므로 여기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2. 기독교의 명상

 

 

1) 묵상 또는 기도의 본질

 

기독교에서의 종교적 행위나 사건은 모든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 창조주이며 구원자, 완성자인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인간존재의 참된 뜻은 하나님 안에서 파악되는 것이며,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이유와 의미를 찾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의 진리 곧 사랑, 복음(福音)의 빛에 반추해서 생각하고 성찰하고 결단내려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진리의 빛으로 구원받을 때에 참된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열려서 가치가 보다 높아지고 인간본성이 완성된다고 보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입장이다. 그리하여 기도나 묵상은 이것을 달성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기독교에서의 기도나 묵상은 그런 독특한 방법으로 하나님에게 접근하는 일종의 명상의 길인 것이다. 이런 뜻에서 본다면 기독교의 명상은 구약시대로 올라가서 그 유례를 찾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열어서 밝히고 천지를 창조하는 작업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명상 속에서 있게 된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부르시고 예언자들을 부르시는 사건, 또는 때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직접 인간으로 태어나시는 사건 등은 하나님의 명상의 결과요, 이에 대한 응답의 기도 또한 인간의 명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생명으로의 초대에 대한 회심적 응답과 이 응답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인 사랑과 정의에 참여하고, 하나님과 친교를 맺고, 또한 하나님의 자식인 이웃과 친교를 맺으면서 하나님의 창조사업 및 구원사업에 봉사하는 행위는 인간완성의 기도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는 기도가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니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창조주인 하나님과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에게 기도하는 것이다. 또한 기도는 개인적으로 하는 경우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서 하는 경우가 있고, 기도문을 사용하면서 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겠으나, 그 근본특성은 다를 수가 없다.

기독교의 기도나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에 응답하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묵상이나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감지되고, 이것이 인간에게로 확대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성령은 기도나 묵상을 통해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실천하는 일도 기도와 묵상 속에서 이루어진다.

기도나 묵상은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가는 것이다. 인간적인 갈등, 탐욕, 시기 등은 하나님에게 다가서면 사라지게 된다. 인간의 삶의 양식과 하나님의 삶의 양식은 대조적이다. 인간은 믿지 못하나 하나님은 인간을 믿고, 인간은 시기하고 미워하나 하나님은 용서하고 사랑하신다. 인간은 인간과 하나님을 외면하지만 하나님은 믿고 구원하신다. 인간은 나 이외의 존재를 거부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포용하신다. 인간의 삶은 부자유하나 하나님은 자유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독생자 또는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은 인간의 차원을 떠나서 절대적인 차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된다.

가령, 인간이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속죄와 사랑의 능력이나 거룩함을 받는 길이 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나 생명의 능력이 인간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는 반가운 소식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소식은 기도를 통해서 전해진다. 하나님의 소식이 인간에게 전해질 때 인간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믿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봉사하는 것이다.

 

 

2) 기도의 형태와 내용

 

기독교의 기도는 묵상(默想, meditation)의 형태와 관상(觀想, contemplation)의 형태를 취하는 기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두 가지는 서로 관련성이 있으므로, 묵상에서 관상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관상에서 묵상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묵상기도는 침묵 가운데 묵상하는 대상과 내용을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머릿속에서 깨닫고 확인하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머리로 확인하거나 깨닫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보고 듣고 동참하는 것이다.

이들 둘은 모두 정신적인 활동이지만, 깊이에서 다른 점이 있다고 하겠다. 묵상은 정신집중의 지적(知的)인 면이 강하나 관상은 마음이 중심이 되는 것이니, 오히려 지적인 것을 넘어선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둘을 확연히 구별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묵상이 관상으로 이어지고 관상이 묵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것은 우리인간의 예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과 사귄다고 할 때에 그 사람을 알게 되면 좋아지고, 좋아지면 마음이 서로 통하게 된다. 또한 마음이 서로 통하게 되면 서로 좋아지고, 다시 또 서로 이해하고 잘 알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기독교의 명상에서는 무엇을 묵상하느냐 또는 무엇을 관상하느냐가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묵상하거나 관상하는 대상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묵상하는 내용에 따라서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요한 뜻이 있다. 인간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존재인 것이다. 불교에서 마음먹기에 따라 극락도 가고 지옥도 간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뜻이다.

묵상기도는 주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진리와 내용을 음미한다. 말에 담겨 있는 참뜻과 그 진리를 추구하면서 맛보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과정을 통해서 말씀 안에 담겨 있는 진리가 기도하는 사람의 인격 안에 내면화되어 그 진리가 인격화된다.

관상기도는 성서(聖書)를 중심으로 하여 성서에 나타나는 인물들과 대면함으로써 마음의 눈으로 진리를 보고, 그 인물들의 행위를 통해 자기 자신도 같이 참여해서 하나님과 대면하며, 말씀드리고, 위로받고, 같이 행동하는 내적 경험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모든 신비, 곧 영보(領報), 강생, 탄생, 치유, 가르침, 수난, 부활, 발현, 파견 등에 직접 참여하고 그것들을 체험하여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이다.

 

 

3) 기독교 명상의 특성

 

기독교 명상은 이미 앞에서 말한 명상의 세 가지 유형 중에서 외향적인 명상에 속한다. 기독교는 이 세계의 창조주이자 섭리자인 하나님을 궁극적 신앙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명상은 하나님에 대한 의식의 집중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성서에 나타난 시 몇 구절에서 볼 수 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당신 생각,

밤을 새워가며 당신 생각뿐,

나를 도와주신 일 생각하면서

당신의 날개 아래에서 즐겁습니다.(63:6-7)

 

당신을 부르오니 구해주소서.

당신의 언약을 내가 지키리이다.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걸고

 

새벽보다 먼저 일어나, 이렇게 부르짖사옵니다.

뜬눈으로 밤을 지켜보면서

당신의 약속을 묵상합니다. (119:146-148)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겠는가!(1:2-3전반)

 

거짓말로 이 몸을 괴롭히는 교만한 자들을

망신당하게 하시옵소서.

이 몸은 주님의 계명을 되새기리이다.(119:78)

 

하나님의 계명을 되새기며 그의 약속을 생각하고 묵상하는 대상은 내 안에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밖에 있는 야훼 자신이나 그의 율법 또는 그가 인간에게 준 약속이다. 이러한 외형적인 기독교의 명상은 다른 유형의 명상과는 특성이 다르다.

첫째, 기독교의 명상은 그 대상과의 결합을 지향한다. 동양의 명상인 불교의 선이나 어떤 요가의 일파는 자아로부터의 해방을 통한 절대 안온과 그것으로 얻어지는 자아완성을 기약하려는 면이 있다. 여기에서는 기본적으로 신앙과 사랑의 대상이 되는 절대적인 존재를 예측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명상은 하나님에게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차원 높은 정신적인 세계로 나아가려고 한다. 여기에서는 혼란스럽고 고통스런 현실이 하나님에게로 이끄는 촉진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점은 불교의 정토교가 정토(淨土)를 관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고, 베단타적인 요가나 샤크티즘적인 요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동양의 명상에는 이와 달리 혼란스런 현실의 고통과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그것을 모멸시키는 것이 있다. 기독교의 명상은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맡김으로써 자신의 인간성을 회복하게 되고, 세상의 모순이나 죄악과 싸워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둘째, 기독교의 명상은 자아 속에 새로운 것을 채우는 것이다. 불교의 명상이 자아를 부정하여 텅 빈 상태로 만드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누가복음 11:24-26에 이런 구절이 있다.

더러운 악령이 어떤 사람 안에 들어 있다가 나오면 물 없는 광야에서 쉴 터를 찾아서 헤맨다. 그러다가 찾지 못하면 '전에 있던 집으로 되돌아가야지' 하면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훌륭한 악령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자리잡고 살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의 형편은 처음보다 더 비참해진다.

이 악령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의 의식이나 영혼은 항상 새로워야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자아를 부정하고 우주아(宇宙我)와 합일함으로써 인간적인 고통에서 벗어나는 동양의 요가 명상과는 달리, 기독교의 명상은 명상자의 개아가 뚜렷하게 존재하면서 우주아와 만나게 된다. 곧 개인적인 자아는 그대로 있으면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명상은 상상과 이상이 배제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이 있음으로써 절대적인 가치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명상에서도 궁극에 이르러서는 개아가 그대로 순화되는 것이니, 이것이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는 것이다.

셋째, 기독교의 명상은 '죄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한다. 인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적인 결론이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은, 인간은 유한하고 불안을 느끼며, 죽음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동양의 명상인 선이나 요가에서도 비슷한 점이 있다. 선에서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참회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죄의식에서 오는 것이다. 또한 정토교에서 말하는 오악중죄(五惡重罪)의 죄의식이 아미타불을 그리워하게 하고, 아미타불의 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니, 이런 점으로 보면 기독교의 명상이나 불교의 명상은 표면상 방법론적인 차이가 있을뿐임을 알 수 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전인적인 방향전환이라 할 수 있는 회개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도 참회를 통한 그릇된 자아로부터의 해방이 선행되어야 한다.

불교의 선에서 해탈을 얻으려면, 자아를 형성한 무명(無明)을 타파하여 인간 본래 모습을 보아야 하고, 다시 자신과 타인의 이원적인차원에서 벗어나 우주적인 것과 하나가 되어야하는데, 이것은 기독교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과 유사하다. 이런 점을 지적하여 기독교와 선의 명상적 차원을 합께 경험했다고 하는 일본의 가도와키(門脇)교수는 기독교와 선불교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고, 다만 기독교는 '이성에서 몸' 으로의 길을 택하고, 선은 '몸에서 이성' 으로의 길을 택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인 내용을 놓고 내린 비교요 평가일 뿐이다

기독교가 인간을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것이니, 곧 인간은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를 자신이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아무리 수행해도 인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믿고 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을 사랑하고 수용해서 다시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준다고 믿는다. 이런 점은 불교의 정토교와 흡사하다. 정토교에서도 인간이 아무리 수행하더라도 해탈할 수 없고, 오직 아미타불의 본원력(本願力)에 의해서만 구제받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기독교 명상의 대가인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은 명상 중에 내면적인 고뇌와 암혹을 경험하면서도 이를 물리치기 위한 아무런 방법도 제시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어둠을 물리치고 광명을 불러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명상자가 해야 할 일은 오직광명의 새벽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4) 기독교 명상의 실제

 

기독교의 명상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명상이란 일상생활 속에서 모든 생활인들이 행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아직 훈련되지 못한 사람은 일정한 장소나 자세나 시간을 정하는 방법도 필요하다. 따라서 기독교의 명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령과 여건이 필요하다. '장소' 는 어떠한 곳이라도 상관없으나, 방해받지 않을 만큼 조용한 분위기가 보장되는 곳이라면 좋다. 나무숲이나 식물들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면 더욱 좋다. 굳이 깊은 산 속에 있는 기도원으로 가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자세'는 단정해야 한다. 자세가 단정하면 정신도 바르게 되기 때문이다. 성서에는 마루에 누워서 드리는 기도나 머리를 뒤로 젖히거나 손을 들고 일어서서 드리는 기도 자세 등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자기 생활 속에서 적당한 자세를 취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선불교나 요가와 같이 곧게 다리를 꼬고 앉아도 좋고, 의자에 앉아서 척추를 곧게 하여 의자 등에 대고 손을 무릎 위에 가볍게 얹어놓는 자세도 흔히 취한다. 이때에 손은 손바닥이 위로 오게 하여 무엇을 받으려는 수용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눈은 생각하는 대상에서 마음이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 가볍게 감을 수도 있고, 때로는 햇빛이나 다른 빛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실눈을 뜰 수도 있다.

'시간'에 대해서는 제한이 없다. 식음을 전폐하고 금식기도 하는 사람은 오랜 시간을 계속할 것이나, 초보자는 조금씩 시간을 연장하며 행하는 것이 좋다. 우선 5분 동안 정신을 집중하는 훈련을 시작하고 차차 늘려나간다. 또한 사람에 따라서 오전, 오후, 저녁 등 편리한 시간을 택한다. 아침에는 지난밤에 꾼 꿈을 명상하고, 저녁시간에는 하루의 일을 반성하면서 명상하는 것이 좋다.

이와 같은 기본자세를 갖춘 다음에는 몇 가지 명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첫 단계에서는 중심잡기(center down)라고 하여 하루에 몇 분이라도 매일 규칙적으로 습관을 들인다.

중세기에는 이것을 회상(recollection)이라고 하였다. 이 단계에서는 혼란심을 평정하게 하고,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가 산란해진 마음의 초점을 잡아서 집중한다. 이 단계에서는 손바닥을 바로 놓거나 뒤집어놓는 방법을 취한다. 이때에 명상자는 하나님이 주는 무엇을 받으려고 기도를 드리게 된다. '주님이시여, 나는 당신이 주시고자 하시는 용서와 관용의 마음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라거나 또는 당신의 영원하신 사랑을 제게 채워주시옵소서, 제가 받아들이겠나이다등의 기도를 드릴 수가 있다.

반대로 손바닥을 무릎 위에 얹어놓은 다음에는 자신의 분노나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이나 또는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몰아내야 할 부정적인 요소들을 밖으로 내보내는 기도를 드릴 수가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아버지시여, 제 마음으로부터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을 씻어버립니다' 라든지, '하나님 아버지시여, 제 마음속에 있는 쓸데없는 욕심을 풀어놓아 보냅니다'라고 구체적인 일을 들어서 기도드릴 수도 있다.

둘째는 호흡에 대하여 의식을 집중하는 방법이다. 편안한자세로 앉아서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에 신경을 쓰면 마음이 안정된다. 이때 '주여! 나는 숨을 내쉬면서 마음속에 있는 불안과 공포를 밖으로 내 보냅니다'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숨을 들이쉬면서 '주여, 나는 나의 영적인 어리석음과 죄를 밖으로 뿜어내고 당신의 빛과 생명을 들이마십니다'라고 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손바닥뒤집기와 호흡에 관심을 갖게 되면 마음이 평정된다. 그 다음에는 미음 속에 내재해 있는 그리스도를 향해서 의식을 집중한다. 만일 이때 잡념이 생겨서 의식이 집중되지 않으면 그 집념까지 그리스도의 품에 맡기면서 포기해버린다.

 

둘째 단계에서는 첫째 단계에서 얻은 집중력으로, 5분이나 10분 동안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해 명상한다. 나무, , 구름 등 어떤 대상을 마음에 떠올려서 매일 조심스럽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명상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자연 속의 피조물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은 땅과 하늘에 있는 것들을 통해서 스스로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땅이나 바다나 공중의 새와 땅 위의 미물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믿는 것이다.

이 둘째 단계를 통해서 몇 주간의 의식집중훈련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성서에 나타나는 감정적인 말씀을 명상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셋째 단계에서는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서 명상한다. 명상대상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그 대상에 대한 배경, 의미, 그 대상과 나와의 관계 등에 대해서 상상한다. 가령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보듯이 상상하는 것이다.

또 이런 상상을 통한 명상훈련으로서 십자가, 성화, 성현들이 쓰던 유품을 상상한다. 그러나 가장 쉬운 방법은 오감을 모두 동원하여 주기도문이나 산상설교 등을 명상하는 것이다. 이 성서에 대한 명상은 기독교에서 행하는 모든 명상의 기초가 된다. 주기도문을 읽거나 외우면서 명상할 때에는 하늘의 아버지 모습을 상상으로 그려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란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을 되새긴다. 그리고 하늘의 아버지와 땅에서의 아버지 뜻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해본다.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 사는 나의 모습을 반성해보고, 나의 불쌍한 모습을 상상하여 나를 구원해달라고 애원해본다. 마지막으로 모든 힘과 영광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의 영광을 돌려보내면서 명상을 끝낸다.

또한 최근의 나의 삶을 거울처럼 비추어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도 있다. 자비와 깨끗함을 회구하는 열정을 가지고 자기의 모습을 견주어보면, 어떤 어려움도 견뎌나갈 수 있고, 새로운 세계를 멀리 내다보는 회망과 용기를 느낄 수 있다.

기독교적 명상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명상을 끝낼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문이나 산상설교의 마지막 부분도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찬양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넷째 단계는 꿈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모든 명상의 목표는 초월적인 체험을 통해서 자기의 성숙과 완성을 이루는 데 있다. 이와 같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듯이 반사적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이런 방법 중의 하나로서 꿈에 나타나는 무의식의 세계를 명상해보는 것도 있다.

꿈은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는 방법 중 한 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꿈은 언제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는 계시의 방편으로 이해된다.

20세기에 들어와 꿈은 프로이트나 융 등의 연구에 의해서 자신을 이해하고 성장시키는 명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반려자로 등장했다. 꿈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보려는 명상자는 첫째로 잠들기 전에 하나님께 꿈꾸게 해달라고 기도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떤 꿈이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해달라고 기도한다. 왜냐하면 꿈은 아름답고 낭만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험상궂고 무서운 장면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꿈을 효과적인 명상의 소재로 삼으려면 자기가 꾼 꿈 중에서 자신에게 깊은 의미를 전달해준 꿈을 잊지 말고 명상할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꿈을 잘 해석해야 한다. 그 해석을 통해서 변형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꿈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면, 그 문제로 깊이 생각하는 자신을 본 것이다. 가령 돈만 벌려는 사람은 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기의 관심사를 재인식할 수 있다. 아침에 꾼 꿈을 기억했다가 자기 전에 하루의 삶과 꿈의 내용을 비교해보면서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자기성숙을 이루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기독교의 명상은 일상생활 속에서 기도라는 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 기독교의 명상은 경건한 삶에서 실천되어야한다. 이런 경건한 삶속에 이루어진 기독교의 명상이 보다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다섯째 단계에선 신과의 합일을 위해 깊은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앞에서도 거듭 말한 바와 같이 기독교 명상에서는 신과의 합일이 최고의 목표이다. 어떤 갈멜회 신부가 쓴 기사에서 이런 것을 본 일이 있다. 곧 그는 서양인 신부 몇 명과 일본의 어느 선사(禪師)를 찾은 일이 있었다. 그때에 그 선사가 참선에 대하여 말하기를 '좌선에서는 숨을 고르고, 몸을 고르고, 마음을 고른다' 고 하자, 숨과 몸과 마음을 조절한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머리가 없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고 한다. 이 신부가 '머리가 없다'고 말한 것은 서구적인 방법론에 의해서 지성적인 것이 결여됐다는 것이요, 동양적인 사고 형태에서 말하는 '마음' 이 이해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서구종교에서 기도에 관해 언급한 문헌을 보면, 동방의 신비주의적이고, 명상적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도 지성적인 요소가 지배적임을 엿볼 수 있다.

동양의 기도에는 몸과 마음은 있으나 머리가 없고, 서양의 기도에는 몸이 없고 머리가 있다는 것이 매우 대조적이다. 이것은 신과의 영적인 합일을 목적으로 하는 서구종교의 기도와 무심을 목표로 하는 동양의 수도가 다름을 말하는 것이다. 서구적인 기도에서 지성이나 상상력의 역할이 큰 것은 그들 서구인의 정신구조에 기인한다.

서구종교에서 신과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높은 단계의 기도에서는 마음이나 지성이 문제이지, 몸의 자세는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다. 서구인의 모든 생활은 사색에서 시작하여 사색으로 끝난다. 가령 모스토라는 신학자는 그의 저서 신의 어머니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마음으로 행하는 기도(묵상)는 어떤 자세라도 좋으나, 말하고 있는 신에 대하여 존경을 나타내는 자세가 중요하다. 육체와 영혼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므로 존경을 잃은 자세는 기도를 방해한다. 존경하는 마음과 기도에 도움이 되는 자세는 잘 알려져 있다. , 많은 신자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여튼 정해진 자세는 없으니, 각자가 자기에게 맞는 자세를 취하면 된다.

 

요컨대 마음으로 기도로 행할 때는 일정한 자세가 없으나 신을 대하는 마음이 나타나야 하고, 그 마음은 자기 스스로 일으킨 것이라야 한다.

갈멜회의 벤저민 신부는 기독교적 기도의 오의라는 논문에서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실체적으로 결합되어 한 인간을 형성하므로, 올바른 기도는 신체적인 면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동안에 취해야 할 몸이나 손발 자세에 주의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도 기도는 역시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빌라의 성 테레사는 '기도는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가랏티아는 '나는 살아 있다. 그러나 살아 있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참된 기도는 인간 중심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이 아니고, 나라는 인간이 무()로 돌아가서 비로소 신의 경륜으로 이루어야 가장 높은 단계의 참된 기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신과의 대화다' 라고도 말한다.

시편 51:16'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다면 내가 드렸을 것이다.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니,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심령이다'라고 하였다.

나의 모든 정성과 있는 모든 것으로, 신 앞에 그저 몸을 의지하고 마음을 던져 기도했을 때에 신의 사랑의 손이 다가오는 것이다.

 

 

VIII 기독교의 명상_수정0306.hwp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