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관상 생활의 스승

 

      

십자가의 요한을 관상 생활의 사부로서, 즉 하나님과의 친밀한 일치를 추구하는 삶으로 이끄는 스승으로서 소개하는 것은 현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의 필요에 응답하는 일이 라고 믿는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전쟁(가브리엘 신부는 이 책을 제2차세계 대전후 썼다)이라는 쓰라린 운명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님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욱 안정된 실재에 대한 갈망이 그들 안에서 다시 싹트는 것을 느꼈다. 깊이 있는 영혼들은 쾌락과 인간적인 안전의 덧없는 속성을 체험한 후, 그들이 기댈 수 있는 더욱 확고한 무엇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간까지 주님을 떠나 살아왔던 참에서 주님께 드렸던 그 자리보다 더욱 큰 자리를 내어 드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너무 오랫동안 그분을 떠나 있었음을,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자주 하나님을 갈망하고 목말라하며 그분과 일치되기를 원한다. 피조물에게 기대했다가 허사가 되고 만 것을 이제 그분 안에서 찾게 되리라는 것을 믿게 된 것이다.

그러나 종종 그런 고결한 영혼들은, 주님과 친밀하게 지내기를 바라고 하나님과 일치되기를 바라는 이 자발적 열망들이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하고 걱정스럽게 자문한다. 이러한 열망 역시 결국 좌절하고 말 헛된 기대이며, 실패로 끝나고 말 큰 모험적인 계획은 아닐까? 자신의 이상을 너무 높은 데 둔 것은 아닐까? 어떤 방식으로 해야 이 이상을 성취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영혼들에게는 그들을 비추어 줄 빛이, 그들의 손을 잡고 이끌어 줄 안내자가 필요하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관상 생활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일치의 스승인 십자가의 요한에 대해 말해 줌으로써, 그러한 빛과 안내자를 그들에게 알려 주고자한다.

그 영혼들에게 성인의 가르침이 참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위해, 나는 다음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해 간단히 대답하겠다. "십자가의 요한은 누구인가? 그는 어떤 영혼들에게 스승이었나? 관상 생활이란 무엇을 뜻하나?"

    

 

스승 십자가의 요한 

 

십자가의 요한은 누구인가?

이 역사적 관점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나는 이 성인의 간만한 전기조차 소개하지 않했다. 그 대신 영혼들에 대한 십자가의 요한의 사명을 빨리 이해하게 해 줄 그의 특성 중 한 가지를 간단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그렇지만 십자가의 요한은 데레사 영성의 신학자였음을 밝혀 두어야 하겠다. 다시 말해서 그는 제자이며 학자로서,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개혁 가르멜의 첫 수도원들에서 영적 딸들을 하나님과의 친밀한 일치의 절정에 이르도록 이끈 성녀의 완벽하고 거룩한 생활에 대한 가르침을 정리했다. 또한 이 가르침을 신학의 확고한 원칙 위에 체계를 세워 하나의 계통적 학설로 간추린 사람이다.

사실 1562년에 위대한 아빌라의 테레사는, 영혼들이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환경을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몇몇 열렬한 수녀들과 함께 엄격한 봉쇄 수도원에 은둔하며 놀라운 지혜와 분별력을 갖춘 규칙들을 모아 수녀들의 수도 생활을 계획하고 준비했다. 성녀의 영성 지도자들은 이 성녀가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가르침을 받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책을 쓰도록 명령했고, 성녀는 자기에게 맡겨진 수녀들의 양성을 위해 영성적 교육에 관한 몇 권의 책을 썼다. 이 책들은 그 후 여러 세기에 걸쳐, 영혼과 하나님의 구체적인 관계를 연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찬사를 받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물론 이 글들은 천상적 은총으로 풍요로워진 천채적 지성의 결실이긴 했지만, 과학적 방식으로 제시되지는 않았다. 이 책들은 깊은 직관적 지식으로 가득 차 있으나 체계적으로 정리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명백한 추후설명이 필요하다.

겸손한 데레사는 매우 총명했으니 이 점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래서 수도원 개혁이 차츰 번져 갈무렵, 성녀는 그 수도 가족 안에 사제들도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 그 사제들이 자기 딸들처럼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추구하기 위해 묵상 생활을 하면서, 성녀가 실천적인 면에서 그처럼 잘 계획하고 준비한 생활양식에 신학적인 빛을 비추어 줄 수 있는 신학적 조예가 깊은 수도사제들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녀의 이 열망에 훌륭하게 응답해 주셨으니, 훗날 그의 심오한 학설로 교회 박사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탁월한 신학자가 된 한 사제를 이 새로운 수도 가족의 첫 아들로 보내 주셨다. 그가 바로 십자가의 요한이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요한이 성녀 데레사가 개혁한 수도원에 들어가 창립자인 성녀 데레사에게 직접 배워 양성되기를 바라셨고, 성녀는 바야돌리드에 새 수도원을 창설하기 위해 그를 데리고 갔다. 그때부터 십자가의 요한은 처음에는 성녀 데레사의, 후에는 가르멜 수녀들의 영적 아버지가 되었다. 십자가의 요한은 처음으로 성녀 데레사의 개혁 가르멜 수도원의 영성 지도를 맡고있는 동안에도 가르멜의 산길을 쓰기 시작했고, 이미 쓴 영가에 주해를 달기 시작했다. 이 두저서는 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보배로운 신비적 저술 가운데 가장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책들은, 십자가의 요한이 하나님과 하나가되는 삶에 관해 얼마나 깊은 조예를 지닌 신학자였던가를 말해 준다. 그는 이러한 일치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는 삶을 명백히 알려 준다. 그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처럼 실제적인 체험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라 신학적 원칙의 확고한 기초 위에 그의 모든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이와 같이 그는 다양한 부분을 균형 있게 다루며 명석한 논증으로 명백하게 설명함으로써 균형이 잘 잡힌 하나의 체계를 세웠다.

십자가의 요한은 데레사가 했듯이 자신의 놀라운 직관에 따라 "확언"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해설하고 추리하고 논증한다. 따라서 그가 가르치는 내용의 필연성을 확신하게 하고 이해하게 해 준다. 십자가의 요한은 영성의 길의 진수를, 특히 영혼들이 하나님과 깊은 친교를 나누도록 이끌어 주는 그 길의 진수를 알고 있으며 그것을 전해 준다.

이런 성인이 오늘날 하나님과의 일치를 목말라하는 영혼들 또한 잘 이끌어 줄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그의 가르침은 오직 수도자들만을 위한 것이며, 따라서 세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겠다는 의문이 마음속에 생길 수도 있다. 그 이유 때문에, '십자가의 요한은 어떤 영혼들의 스승이었나?'라는 다른 질문에도 대답하고 있다.

    

  

십자가의 요한의 제자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의 요한이 오직 수사들이나 수녀들만을 위한 지도자였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역사적 사실과 전적으로 어긋난다. 그는 늘 세상 사량들과 만났으며, 그들과의 만남은 결국 가장 높은 영성 생활을 하기 위한 진정한 실제 교육으로 이어졌다.

그는 예수의 안토니오 수사와 함께 작은 시골집에서 낭자 수도원의 개혁을 시작했는데, 이 집의 한 부분을 개조해서 아주 작은 성당으로 사용했다. 그러자 즉시 마을 사람들이 자주 찾아와서, 이 집은 베들레헴의 마구간처럼 주님께서 머무시는 곳이 되었다.

그 무렵 십자가의 요한은 단순하고 착한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며 헌신적으로 사도직 생활에 열중했는데, 이들은 종교에 관해서는 거의 배운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 사랑에 불타는 영혼을 만나자마자 정직한 그들의 마음에도 이내 불이 번져서, 가르멜 수사들의 작은 성당은 십자가의 요한이 회개시켜 주님께 돌아온 사람들이 긴 시간 기도하며 참회하는 곳이 되었다. 이 위대한 영혼의 감화를 받아 모여든 사람들은 시골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새 개혁 가르멜 수도회에서 수사들의 신학적 지식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도원들을 설립하게 된 알칼라(Alcala)와 바에자(Baeza)의 대학 도시에서도 많은 학생들과 교수들이 그를 만나러 왔다. 그리고 그들은 십자가의 요한이 대화를 통해 드러내는 정신과 마음의 비범한 천부적 자질과 은총에 깊이 감동했다. 결과적으로 십자가의 요한 자신이 사람들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를 찾아 수도원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사제였다. 그러니 어떻게 자신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을 거절할 수 있었겠는가?

분명히 그의 첫 번째 의무는 수도 가족을 돌보는 것이었다. 그가 장상이었던 수도원에서, 수사들은 그에게 제자라기 보다는 봉헌된 아들들이었다. 또한 그가 영성 지도자로 있던 수녀원에는, 십자가의 요한처럼 오로지 하나님과의 일치만을 추구하는 삶에 자신을 바치는 딸들이 많이 있었다. 그는 특히 개혁 초기 시절에, 교육자로서 자신의 막중한 의무를 자각하고 있었다. 바로 그가 개혁 초기에 수도회의 미래를 위해 개혁의 기초를 다지고 수도 가족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 줄 새로운 영성을 창안해야 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개혁 수도원들에서 자신이 완전히 그들의 '아버지'임을 느꼈다. 그는 모두들 자기한테서 바로 그 새로운 영성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는 타고난 천재적인 창조적 기질로 자신에게 맡겨진 수도자들의 영성을 양성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즉시, 격언, 그림, 해설, 강론 등 그가 사용한 모든 방법은 더욱 깊고 관대한 내적 삶을 살도록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이 모든 방법은 또한 그러한 새로운 영성을 더욱 깊이 생활하도록 비추어 주는 빛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며 그 영혼의 생명이 되어 주시는 저 영성의 절정에 이를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그의 아들들과 딸들은 그의 말을 듣기를 열망했고, 강론 때는 열심히 받아 적었고, 개인적인 대화 때는 많은 질문을 했으며, "신부님, 우리를 위해 글로써 주십시오." 하며 간청했다.

불멸의 책이 된 그의 작품들은 이렇게 해서 하나씩 태어났다. 가르멜의 산길에서는 "그 산에 오르기"를 원하는 영혼에게 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길을 더 잘 걸을 수 있게 하는 실천과 자세를 상세히 설명해 주고 어둔 밤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찾고 있는 영혼을 만나러 와 주시는 길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영혼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서 만나는 그 어두움 때문에 겁을 내거나 실망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크게 진보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조건임을 이해할 수 있도록 깨우쳐 준다. 또한 영가에서도, 하나님과의 거룩한 일치에 이른 영혼의 풍요로운 마음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는 그 우아한 구절들을 톨레도의 감옥에 갇혀 있는 비참한 환경에서 썼다. 예수의 안나 원장 수녀의 간청으로 그는 그 시의 주해를 베아스(Beas)에서 처음에는 말로 설명했고, 그라나다에서는 글로 써 주었다.

그러면 그는 언제나 수녀와 수사들만을 위해 글을 썼나? 그렇지 않다. 그들만을 위해 쓰지 않았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랑의 산 불꽃은 시도, 주해도 수도회 은인이었던 안나 데 펜냐로사(Ana de Pena1osa) 여사를 위해 쓴 것이다. 그 부인과 딸은 자주 성인을 방문했고, 성인은 그 모녀에게 수도원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똑같은 것을 가르쳤다. 따라서 그 부인에게도 하나님과의 완벽한 일치에 이르게 하는 철저한 포기에 대해 가르쳤다. 실제로. 어느 날 그라나다의 수녀들은 안나 여사가 성인의 발 앞에 꿇어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때 성인은 하늘을 응시하면서 안나 여사에게 "(), (), (),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온전히 바쳐야한다!"는 가혹하지만 구원을 주는 말을 못 박아주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인이 평신도들에게 준 몫은 호화로운 식탁에서 떨어진 빵부스러기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완전히 다 알려 주면서도, 그들의 환경이 수도자들과 똑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상황에 맞게 가르쳐 줄 수 있었다. 그들은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고 다른 의무와 과제를 갖고 있으나, 그들 또한 똑 같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불멸의 영혼을, 하나님과의 일치를 갈망하는 영혼을 지니고 있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수도자들만 성덕에 이르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고귀한 소명이다. 교황 비오 11세는 재위 중 이 점을 계속 거듭 강조했는데,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도 왜 평신도는 수도자보다 성덕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이 약한 것일까?

확실히 세속에서는 수도원에서만큼 성인이 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수도원에서도 많은 노력과 고통 없이는, 많은 어려움과 싫증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거룩해질 수 없다. 세속과 수도원에서 겪는 일들은 서로 다르겠지만, 수도원에서도 세속에서도, 그 문제들이란 오직 우리가 극복하라고 있을 뿐이다. 그런 문제들은 '기도''희생'이라는 똑같은 근본적인 방법을 통해 극복될 것이다.

어쩌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기도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여러 자녀를 기르는 어머니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실 성당에서 기도하기 위해 긴 시간을 내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자녀를 돌보는 중에라도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고, 그분의 현존 안에서 살아가며, 자신의 피로와 걱정과 고통을 그분께 바칠 수는 없을까? 약간의 선의로, 자기가 하던 일을 모두 중단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과 더 직접적으로 대화하기 위해 30분 정도 시간을 낼 수는 없을까? 노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는 사제 생활초기에 여러 해 동안 노동자들과 함께 지냈다. 지금도 그들이 바쳤던 감동적인 기도를 기억한다. 그들은 날마다 고달픈 하루를 하나님께 봉헌하며 기도드렸고, 그 기도는 향이 되어 타오르며 끊임없이 하나님의 옥좌로 피어올라 갔다. 더구나 그 기도는 말뿐이 아니었다. 벨기에의 가톨릭노동청년회 JOC는 이미 국제적 단체가 되었으며, 그중 성인품에 오른 사람들도 있다. 진실한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원은 수도자와 같은 방법은 아니지만, 날마다 묵상과 희생과 극기(고행)를 실천한다. 참으로 사회의 모든 계층에는 "철저한" 사람들이 있다.

그 영혼들은 참으로 "철저한" 이들이었기에, 어중간하게 사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을 갈망하면서 자발적으로 성인을 중심으로 모여 그룹을 만들었다. 그런데 왜 세상에서 살다보면 어중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세상에 사는 이들은 수도자들처럼 인간을 거룩하게 만드는 데 적합한 환경에 둘러싸여 있지 않다는 말민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의 환경은 정말 너무도 자주 기력을 잃게 하고, 유혹이 가득하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좋은 습관을 길러 악의 영향에서 빠져나오게 하고, 하나님과 일치되기를 바라는 더욱 거룩한 갈망을 키워 갈수 있는 영적 분위기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은 더더욱 보람된 일이될 것이다. 이 점에서, 십자가의 요한은 평신도이든 수도자이든 상관없이 그가 지도한 모든 사람을 다 도와주었다.

하나님과의 일치와 친밀한 사귐은 수도자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의 아버지시며, 그분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참된 아들딸로서 당신과 함께 살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그들이 그분과 사귀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십자가의 요한은모든 이에게 거기로 곧장 나아가는 길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관상 생활의 스승으로서 십자가의 요한을 소개하겠다. 그련데 관상생활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관상 생활 

 

'관상 생활''관상'과 혼돈해서는 안 된다. '관상'이란 참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분만이 우리의 능력을 판단하시고 거기에 알맞게 주실 수 있는 선물이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즐겨 거듭 말했듯이, 그분께서는 그 선물을 "원하시는 사람에게,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대로" 주신다. 그러나 관상 생활의 경우는 그와 같지 않다.

관상 생활이란 직접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활동과 관상으로 구분하는 옛 방식은 두 가지 층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이라는 두 대상을 통해 우리 자신 안에서 애덕을 닦아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적 완덕, 소위 성화(聖化)란 근본적으로 애덕의 완성에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 우리는 두 대상을 가진 이 애덕을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서 이웃에게 봉사하는 데 사용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사랑을 직접 탐구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꾸준히 닦아갈 수 있다.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은 활동생활을 이루고,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탐구하는 것은 관상 생활을 이룬다. 그리고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가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듯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탐구하는 이러한 삶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흔히 말하기를,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관상 생활에 자신을 바친다고 한다.

그러나 이 탐구가 결실을 맺게 하려면 가장 적절한 방법을 사용해야한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친교가 더욱 깊어지도록 도와주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주로 두 가지다. 모든 전통은 그 두 가지를 '기도''금욕'이라고 알려 준다.

금욕은 극기, 포기, 희생이라고도 하는데, 영혼이 피조물에게서 초연해지도록 도와줌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충동을 저지할 수 있는 모든 장애로부터 영혼의 능력을 해방시켜 더욱 사랑할 수 있게 해 준다. 기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사랑에 넘치는 대화로 이루어지며, 극기로 준비된 그 마음속에 하나님 사랑의 불을 지펴 준다. 우리가 피조물에서 마음을 떼는 것은 다만 마음을 공허하게 비워 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기 위해서다.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기 위해 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관상 생활이란 '기도와 금욕의 끓임없는 실천을 통해 하나님과의 친교를 나누도록 이끌어 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형태'라고 더욱 명확하게 묘사할 수 있겠다.

관상적 생활이 이것이 전부라는 것을 알고 나서, 여러분은 놀라며 다음과 같이 질문할 것이다. "'관상적'이란 낱말 자체가 이 삶이 관상과 연관이 있음을 뚜렷이 시사하고 있는데, 만일 그것이 전부라면 그런 삶이 관상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관상이란 관상적인 삶과는 도대체 아무 연관이 없다는 말인가?"

거듭 말하지만 '관상''관상 생할'을 혼동하지 않아야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상적인 삶은 관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관상적인 삶은 영혼이 관상을 동경하게 서서히 준비시키고, 관상에 들어가고 싶게 하고, 관상을 향해 나아가게 해 준다. 그뿐 아니라 관상 생활을 열심히 꾸준하게 계속하다보면, 보통 관상에 이르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관상 생활은 관상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며, 관상은 관상생활의 목표이자 목적이다.

그렇다면 관상이란 무엇인가?

관상은 하나님을 아는 특별한 방법으로, 관상 생활이 열망하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게 해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하겠다.

나는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어떤 '특별한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여러 다른 방법으로도 알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매우 다른 두 가지 방법 이 있다. 첫째 방법은 '지적' 방법으로, 우리의 지성을 사용함으로써 확인하는 것이다. 둘째 방법은 '경험적' 방법으로, 근본적으로 우리의 의지에서 나오는 사랑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좀 더 설명해 보겠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무엇보다 도지적 또는 개념적 인식으로 아는 것이다. ,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만들어 낼 관념을 사용해 깨닫는 것이다. 이 방법 이 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원칙적인 방법임을 기억하도록 하자. 우리는 관상적 인식을 검토하기 위해서도 언제나 다시 이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이런 깨달음은 개념적인 것도 아니며 관념을 사용해서 생기게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배운 교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창조주이자 주님이시며 무()에서 우리를 지어 내셨고 우리는 그분께 온전히 의존하고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이시며 곧 하나의 신성 안에 세 위격이 계시다는 것, 그중 한 위격이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으며, 우리는 언젠가는 영원한 지복 안에서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이러한 모든 진리를 지적으로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실재에 관해 우리에게 주어진 관념과 우리 자신이 형성한 관념들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계속해서 개념을 다듬어 가고, 이 게념들이 더욱 분명하고 명확해질수록 그 개념을 통해 하나님의 실재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된다. 이처럼 더욱 깊이 깨닫게 된 진리들은 하나님을 더더욱 깊이 사랑하도록 이끌어 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반려로 맞기를 원하시며, 당신과의 일치를 가로막는 죄에서 우리를 구해 주고자 하신다는 것을, 즉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신 당신의 거룩하신 아드님의 더없이 비통한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한없는 사랑을 더더욱 깊이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지적 묵상 기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지적 인식으로 이루어진다. 묵상 기도 안에서, 우리는 이 거룩한 종교의 신비들을 더욱 깊이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며, 이처럼 더 깊이 알아듣게 된 신비를 통해 새로운 자극을 받아 하나님을 더더욱 깊이 사랑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묵상 기도는 영성 생활에서 매우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해 주는 기도이다.

그러나 지적 인식이 매우 소중하기는 하지만, 그것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한 체험의 성격을 띈 깨달음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이 경우에, 관념들은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러한 인식은 우리에게 늘 분명치 않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나님의 심오하고도 강렬한 사랑은 직접적으로 그분에 관해 새로운 관념을 갖게 해 주지는 않지만,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감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감각을 지니게 해 준다. 영혼은 이런 감각을 추리나 논증으로써가 아니라 말하자면 체험적 방법으로 깨닫는다. , 하나님께서는 온갖 피조물과 전혀 다르시며, 참으로 유일하시고, 매우 위대하시며, 마땅히 우리 마음의 모든 사랑을 다 바쳐 드려야할 분임을 체험을 통해 깨닫게 된다.

이러한 감각은 십자가의 요한이 '수동적'이라고 부르는 사랑을, 즉 영혼이 스스로 원해서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뿐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로 끌어당겨짐을 느끼게 되는 그러한 사랑을 즐기고 있을 때 특별히 확실하게 깨닫게 된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관상의 첫 단계의 하나인 '고요의 기도'를 묘사하면서 말한 것처럼, 영혼은 자신의 의지가 하나님의 포로가 되었으며 그 어떤 다른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끼게 된다. 영혼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에 더없이 만족하며 커다란 평화가 밀려드는 것을 느낀다. 그리하여 영혼은 당신 자신을 위해 자기를 창조하신 그분과 어떤 사랑의 접촉(맞댐)을 하고 있다고, 마침내 자신이 있어야 할 제자리에 있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영혼은 성 아우구스터노와 함께 "당신은 우리를 당신 자신을 위해 만드셨으므로 우리의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을 누릴 때까지는 쉴 수 없습니다"(성 어거스틴의 참회록1,1)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참으로 영혼은 하나님 안에 쉬면서 자기는 완전히 만족할 수 있다고 느낀다. 이와같이 사랑의 방법을 통해서, 영혼은 하나님에 대해 어떤 체험을 하게 되고, 이 체험은 지성에도 반영된다. 그러나 이때 개념의 형태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혼은 자신이 느끼는 것을 표현한다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은 사실, 그 체험 이 관념이나 지적 개념의 방법으로 얻어진 인식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얻어진 인식에 관한 문제이며, 또한 이 인식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해 심오하기는 하나 명확하지 않은 어떤 감각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말은 우리의 개념에 의해서만 형성되고 적용된다. 그러므로 개념과 관계가 없는 것은 대체로 표현하기 힘든 법이다. 그래서 영혼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로 설명하고자할 때 큰 어려움을 겪게 되며, 마치 이런 체험이란 만족스럽게 표현할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하듯 형상이나 비교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인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 어렵다고 해서, 사랑을 통해 얻게 된 인식이 다른 것에 비해 열등한 인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런 종류의 인식 또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인식, 언젠가는 우리 자신도 거기에 이르리라고 희망하는 지고의 인식, 즉 천국에서 누리는 지복직관에 속하는 인식이다. 천국에서, 우리는 직접적인 지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다. 즉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뚜렷이 뵙게 된다는 말이다. 바꿔 말하면, 그때 우리는 그분을 뵙게 되는 것이지, 그분을 개념 안에 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떤 인간적인 개념으로도 우리가 얼굴을 맞대고 보며 깨닫는 하나님의 저 무한한 완전성을 표현할 길은 없다. 따라서 영원한 삶에서 가장 근본이 되며 천국에 있는 이들의 가장 내밀한 기쁨의 근원이 되는, 곧 거룩한 대상의 진정한 본질을 제대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해진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개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전할 수 있을 뿐이며, 이 거룩한 대상에 관해서는 그 어떤 개념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축복을 받은 영혼 중 그 누구도 자신의 가장 내밀한 체험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거기서 우리가 누리게 될 천상 행복 가운데 가장 깊은 행복을 하나님과 우리 각자 사이에서, 그리고 인간과 거룩한 세 위격 사이에서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인간의 지고의 위대함이 있으니, 인간은 자신의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며 영원히 살도록, 홀로이신 하나님과 홀로 표현할 길 없는 만남을 갖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복된 영혼들이 거기서 서로 교류하는 기음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앞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즐겁게 지내게 될 그 행복에 비하면, 그 기쁨이란 부수적인 행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렇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으니, 이미 이 지상에서부터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며 살고자 힘쓰는 영혼은 얼마나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관상가들이 하고 있는 일이다. 참으로 관상 안에서,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저 친국 행복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미리 발견하는 셈이다. 비록 천국에서의 지복은 하나님을 직접 뵙는 가운데 누리게 되는 행복이고, 관상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랑의 체험 안에서 누리는 행복이기는 하지만, 이 두 가지가 모두 표현할 길 없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깊은 체험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교로 이끌어 주는 관상의 위대함과, 관상을 하도록 영혼을 준비시키고 거기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는 관상 생활의 위대함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했다. 따라서 우리가 언젠가는 관상에 이를 수 있도록 관상적인 삶을 통해 자신을 잘 준비하기 위해 힘껏 노력하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관상에 도달할 가능성이 정말 조금이라도 있단 말인가? 성녀 데레사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관상을 "원하시는 이에게,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대로" 주신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말은 관상이란 거저 받는 선물이며 오직 하나님의 승낙에 달려 있다고 암시하는 것같다.

성녀 데레사가 관상은 거저 받는 선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녀의 말을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그의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성녀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께 관상의 은혜를 요구할 수 있기나 한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혹시라도 그 어떤 요구를 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를 보호해 주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착각과 망상에 빠지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 선물의 주인이시며, 우리 영혼들에게 어떻게 그 선물을 나누어 줄지를 판단하신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일에 우리가 참견하려고 하는 것은 정말 교만한 죄가 될 것이다. 동시에 성녀 데레사는 똑같이 강조하기를, 많은 영혼들이 관상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마음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 관상을 위해 자기 자신을 준비하는 것은 분명히 가능한 일이며, 그 준비란 소위 관상생활이라고 부르는 삶을 이루고 있는 '기도''금욕'을 스스로 실천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관상에 이르고자 하는 영혼은 관상 생활을 함으로써 자신을 준비해야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녀 데레사가 가르치는 것처럼, 한 영혼만이 아니라 모든 영혼을 관상에 이르도록 초대하신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목말라하는 모든 영혼을 초대하는 생명의 물의 비유를 통해 바로 그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세상 것에 대한 갈증을 모두 없애 주는 생명의 물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면서도 그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상의 선물을 주시는 것은, 당신의 선물들과 비교할 때 이 초라한 세상이 얼마나 가치 없는가를 우리 스스로 평가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이다. 성녀 데레사는 자신을 제대로 준비하는 모든 영혼은 이 물을 마실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명백히 말한다.

그러면 이러한 확실성과 함께 하나님의 그 선물은 거저 받는 것이라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어떻게 조화시켜 생각할 수 있을까? 데레사 성녀가 직접 그 해답을 준다. , 관상이란 풍요로운 샘이며 거기서 흐르는 물이 여러 물줄기를 이루는데 어떤 것은 작고, 어떤 것은 크고, 또 다른 어떤 것은 웅덩이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혼을 부르시고 모두에게 마실 물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어떤 종류의 물줄기에서 마시도록 부르심을 받았는지는 알려 주지 않으시며, 우리 생애 중 어느 때 그물을 마실 수 있는지도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

관상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으니, 어떤 것은 감미롭고 어떤 것은 무미건조하다. 어떤 것은 대단히 빛나고 말할 수 없는 감미로움을 주는 반면, 어떤 것은 어둡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어두운 관상이 앞의 것보다 영혼에게 덜 유익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어떤 형태의 관상을 마련하시는지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이에게 주시므로, 누구도 자기가 마시게 될 물이 큰 줄기의 물일지 작은 물줄기일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 친히 우리를 위해 그 선택을 하신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이'에게 주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련데도 언제나 꾸준히 준비할 수 있는 너그러운 영혼에게는 어떠한 형태의 관상이든 결코 부족함 없이 베풀어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그분의 몫이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몫이 있다. 우리를 위해 어떤 관상을 마련하시는지는 주님께서 결정하신다. 그 결정 이 바로 우리에 대한 그분의 의견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그 선물들을 내리실 때 주님께서 장애물에 부딪치시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선물들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주님의 선물들을 받도록 길을 트는 것은 우리의 일이며, 우리는 관상 생활을 함으로써 확실하게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십자가의 요한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상적 일치를 바라는 영혼에게 필요한 준비에 대해서다. 그는 그 준비에 대해 열성을 다해 가르치고 있다. 그는 영혼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은총이 우리 탓으로 지연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우리가 이 목표에 최대한 빨리 도달하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관상 생활의 스승이 지닌 이 거룩한 조바심을 함께 나누고 있는가?

스승의 안내에 따라 여행하기 위해, 우선 눈을 들어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즉 하나님과의 일치의 절정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응시하기 시작해야겠다. 십자가의 요한은 그러한 목표를 우리에게 제안하면서, 그리로 가는 길, 즉 포기와 기도에 관해서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단한 각오로 이 포기의 길로 들어서도록 하자. 성인은 이러한 포기의 절대적 필요성과 함께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도 보여줄 것이다.

따라서 포기와 더불어, 우리는 그 포기를 통해 깊어지게 마련인 기도를 합쳐야한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요한의 관심이 기도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우리가 묵상의 실천을 통해 기도의 귀중한 안뜰로 들어서도록 가르칠 것이다. 그런 다음, 영혼이 무미건조함의 위기를 겪음으로써 어떻게 묵상에서부터 첫 번째 겸손한 관상의 형태가 태어나기 시작하는가를 보여 줄 것이다.

우리는 이 위기에서 빠져나온 영혼이 신덕 · 망덕 · 애덕인 향주덕(向主德)을 실천하면서, 즉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와 순수한 사랑 안에서 우리나오는 신앙의 기도를 꾸준하게 열심히 바치면서, 하나님과의 일치의 길로 용감하게 달려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또 다른 위기에 부딪치게 하시면서, 가장 고통스럽지만 더없이 귀중한 영혼의 어둔 밤을 겪게 하신다. 그 어둔 밤은 영혼 혼자서는 결코 얻게 될 수 없는 어떤 순수함을 지니게 해 줄 것이다. 마침내 영혼은 자신을 사로잡으며 하나님을 닮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그 일치에 이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하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십자가의 요한은 우리에게 훌륭한 이상을 제시한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따르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 우리가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는 우리 편에서 노력할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아름답고 고결한 영혼은 그처럼 드높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노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연 우리도 그런 영혼들 중에 들어갈 수 있게 될까? 십자가의 요한이 우리를 위해 그 힘 있는 전구로써 하나님께 이 은총을 얻어 주시기를 바라면서, 이제 유순한 마음으로 그의 학교에 들어가도록 하자. 우선 성인의 가르침을 귀담아들은 다음, 정상을 정복하기 위해 길을 떠나도록 하자! 그것은 정말 노력해 볼만한 일이다.

 

 

1 관상생활의 스승.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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