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나님의 초대

      

오늘날 십자가의 요한의 저서들은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 성인을 국가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여긴다고할 수 있는 스페인에서는 그의 책들을 언제나 손쉽게 구할 수 있다. 그의 책들은 꾸준히 쉽게 팔리기 때문에 개정판이나 소책자가 잇달아 출판되고 있다. 그러나 스폐인 밖에서도, 십자가의 요한은 당연히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저자라고 해야 하겠다. 그의 저서는 유럽의 주요 언어들로 이미 여러 차례 번역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다섯 가지 번역판이 나왔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두 가지 번역판이 나왔고, 요즈음 또다시 두세 가지 다른 번역판을 준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이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두 가지의 번역본이 있다.(한 가지는 완역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이 사실은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에 대해 대단히 큰 관심을 갖고 있음을 분명히 말해 준다.

그런데 이런 세계적 명성에 이끌려서 그의 책을 손에 들고 두세 장 읽다가 그만 싫증이 나서 구석으로 밀어 놓는 영혼도 있다. 아마도 그들은 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르려면 반드시 완전한 금욕 생활을 통해 '어둔 밤'을 지나야 한다는 간결하고 단호한 십자가의 요한의 논증에 일종의 당혹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 영혼은 이 포기의 어둔 밤에만 온통 마음이 쏠려 있다. 그래서 마치 십자가의 요한이 그 모든 설명을 하는 이유는 오로지 그가 도달하게 해주고자 하는 그 이탈이란 것이 얼마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지를 더 잘 알아듣게 해 주기 위해서라고만 생각한다.

그런 삶은 꼭 죽음처럼 여겨진다! 자연스럽게 "이 말씀은 모질구"라는 복음 말씀이 떠오른다. 이 가르침은 너무 모질다. 그렇다. 우리는 "이 가르침은 너무 모질다.", "엄격하다. "라고 말한다. "이 가르침은 너무도 위대하고 영웅적이라서 나는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또는 "이 가르침은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같다. 그처럼 자기를 다 없애고 살아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한다.

십자가의 요한과의 첫 만남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성인의 어느 책을 읽었냐고 한번 물어보라. 틀림없이 가르멜의 산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문제의 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성인을 알기 위해서 가르멜의 산길을 먼저 읽어서는 안된다. 맨 먼저 손에 들어야할 책은 영가(영혼의 노래)이다. 이 책에서 받는 인상은 매우 다를 것이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영가는 그 첫머리에서부터 독자로 하여금 십자가의 요한이 영혼을 인도하고자 하는 저 드높은 목표에 관심을 갖게 해주기 때문이다. 영성 생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들은 영혼이라면, 이 지상에서도 도달할 수 있다고 십자가의 요한이 제시하는 그런 하나님과의 깊은 친밀함을 예상할 때 매혹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도달하고자하는 그 목표에 일단 매혹되고 나면, 그 영혼은 금욕, 포기, 그리고 십자가에 대한 말을 듣더라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것을 정복하기 위해 노력과 노고가 따라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와 반대로, 도달하고자하는 목표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이 제안하는 완전한 포기의 절대적 필요성에 대해 말해 준다면, 그 영혼은 이 포기 자체가 성인이 제안하는 최종 목적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런 것이 정말로 최종 목적이라면,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다. 나라도 그처럼 비상식적인 가르침을 제안하는 책이라면 즉시 덮어 버리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공허 속에 머물고자 전적인 포기를 하는 것도 아니며 마음속에 '()'를 위한 자리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기 위해 창조된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며, 하나님으로 채우기 위해 이 세상의 것을 치워 버리고 영혼을 비우는 것이다. 완전한 포기의 어둔 밤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일치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고 해서, 십자가의 요한이 가르멜의 산길 전체를 통해 가르치고자 의도한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일치임을 잊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 책에서, 특히 제1부에서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위해 제거해야 할 모든 것에 대해 매우 단호하게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탈하고자 하는 이러한 노력 자체가 최종 목적이 아니고, 그것은 다만 더 높고 더 매혹적인 목표에 이르게 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자칫 잊어버리게 할 위험성이 있다.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위험성 이 실제로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십자가를 통하여 빛으로~' 십자가란 다만 구원과 성화를 위해 필요한 수단이요 도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요한을 십자가와 포기의 박사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한 말이 아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일치에 관한 박사이다.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

 

십자가의 요한의 저서 영가(영혼의 노래)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를 갈망하는 영혼을 우리 앞에 보여 준다. 그 영혼은 "당신은 어디에 숨어셨나요?"라는 이 기쁨에 넘치는 시의 1절을 노래하는데, 십자가의 요한은 그의 책 전반에 걸쳐 이 구절에 대해 해설하고 있다. 이 구절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갈망하는 영혼의 외침이다.

이 영혼은 그리스도인의 영혼이라고 그는 주석을 단다. 이 영혼이 굳이 수사나 수녀 같은 수도자의 영혼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세례를 통해 새로 태어나 하나님의 은총으로 갈아입고, 그 은총 안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경지까지 드높여질 수 있는 잠재력이 들어 있음을 뼈저리게 의식하면서, 그 힘이 완전히 발휘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면 된다.

다시 설명해 보겠다.

인간은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

이 필요성의 첫째 원인은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우리의 조건에 기인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계속 존재하도록 돌보아주시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행동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 더구나 우리의 행동은 지존하신 존재께 온전히 의존하고 있으니, 가장 작은 일까지도 그분께서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셔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분 없이 우리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다. 따라서 진지하고 신중한 사람이 자신의 한계와 성공의 불확실성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되기 전까지, 그는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수많은 일을 겪기 마련이다. 종종 성공 여부가 자신의 영향력을 극히 조금밖에 행사할 수 없는 외적 조건들에 좌우되고는 한다. 그럴 때 특별히 그는 하나님께 호소하며 그분의 전능하심과 섭리에 의존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기 힘으로는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또는 부분적으로만 차지할 뿐 완전히 다 차지할 수 없는 것을 그에게 주시기를 주님께 겸손히 청하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며, 하나님께 의지할 필요성을 느낀다. 인간의 본성만으로도 이미 우리를 이처럼 하나님께 향하게 만든다면, 그분의 은총이야말로 얼마나 더 힘이 있겠는가.

우리는 바로 은총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성화의 은총을 입은 사람은 하나님의 집에 속하며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된다.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2:19) 그 가족에 속하는 영혼은 그 집과 재산 상속에서 정해진 권리를 갖게 되는데, 하나님의 가족이 받게 될 재산상속은 곧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죽는 사람은 천국에서 하나님을 영원히 누리게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은총은 우리를 천국에서 하나님을 뵐 수 있는 지복 직관의 경지까지 이르게 해 주어,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은총은 이처럼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가 되도록 도와주며, 우리가 진정으로 그분과 하나가될 때만 그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한 셈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은총 안에서 사는 사람은 자신 안에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려는 어떤 경향 또는 어떤 지향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너무도 많은 그러스도인들이 이 아름다운 지향성을 잘 키워 가지 않거나, 또는 피조물에 빠지게 만드는 수많은 다른 경향들과 자연스런 충동들로 그것을 질식시키고는 하나님을 멀리하며 지낸다. 그 대신 영혼이 이런 자연스런 충동들을 억제하려고 애쓸 때, 또는 완전히 지배한 결과로, 또는 그 보다는 거기에서 충분히 자유로워진 결과로, 그 영혼은 이런 식으로 어떤 깊은 내적 고요에 이르게 된다. 그때 비로소 그는 마치 격정으로 산란해져 숨어 버리고 묻혀 버린 듯했던 하나님을 향한 이 지향성을 깊이 자각하면서 매우 쉽게 이를 자유롭게 해 준다. 바로 여기서 영혼은 하나님의 필요성을, 즉 하나님께 다가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십자가의 요한의 사랑에 애타는 영혼의 입술에서 넘치는 "당신은 어디에 숨어셨나요?"란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우리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를 갈망하기에 그분께서 계속 어디에 숨어 계시는지 간절히 알고 싶어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십자가의 요한의 대답에 기쁘게 귀를 기울인다. "갈망하는 영혼이 자기 신랑을 만날 수 있기 위해, 가능하다면 이 세상에서 그 신랑과 사랑의 일치를 이룰 수 있기 위해, 그리고 이 세상에서 신랑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한 모금의 물로 자신의 갈증을 채울 수 있기 위해 설명을 시도해 볼 것이다. 잘 될 것이다. 영혼이 이것을 위하여 신랑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신랑이 가장 안전하게 숨어 있는 장소를 가르쳐주면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능한 최고의 기쁨과 완덕과 더불어 확실하게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대답을 시도할 것이다. 그래서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면서 곧바로 시작할 것이다.

여기에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말씀은 성부와 성령과 함께 본질적이고 실제로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계신다. 그러므로 말씀을 만나기 원하는 영혼은 애정과 의지에 따라서 모든 것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으며, 최고의 깨달음으로 자기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때에 세상 것들은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져야 한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한 작품에서 하나님께 '주님, 밖에서는 당신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밖에서 잘 못 찾앗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안에 계셨습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영혼 안에 숨어 계시므로 관상기도에 젖은 이는 거기에서 사랑으로 그분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노래한다: 당신은 어디에 숨으셨나이까?" (영가l,6)

그리고 이제 십자가의 요한은 열렬하게 영혼을 부르면서 감격하여 외친다.

"!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영혼이여, 너는 신랑을 찾고 그분과 일치하기 위해 신랑이 있는 곳을 알아내기를 그렇게 원하는구나! 이미 네게 말하듯이, 너 자신이 바로 그분께서 머무러시는 방이다. 네가 바로 그분이 숨어 계신 은밀한 곳이다. 너의 모든 선과 희망이 너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 아니 네 자신 안에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너는 그분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엄청난 기쁨이며 만족스러움이다." (영가1,7)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영혼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줄 중요한 대답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잠깐 멈추고, 십자가의 요한이 이처럼 엄숙하게 단언하는 말에 포함된 진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가? 그렇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며, 더구나 두 가지 형태로 거기에 계실 수 있다. , 하나님의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심 때문에 가능한 자연적인 현존으로 뿐만 아니라, 신적 내재라고 하는 초자연적 현존으로도 우리 안에 계신다.

이제부터 이 두 가지 현존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자한다.

첫째 형태인 우리 안의 하나님의 현존은 보통 '하나님의 무소부재'라고 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창조 업적의 한 결과이다.

여기에 대해 이미 말했듯이 ,우리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은 다만 우리를 존재하도록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해서이며, 이를 통해 당신이 존재하심을 알려 주시는데, 이런 의사소통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활동하는 식으로 일하시지 않는다. ,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에서 파생되는 기능들을 통해 활동하지만 이 활동들은 우리의 본질과는 별개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직 존재자체이시므로 당신의 본질 자체를 통해 일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자마자 바로 거기에 하나님 친히 계시게 된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 안에 역사하시면서 그들의 존재를 알려 주고 계시므로, 당연히 각 피조물 안의 가장 그윽한 곳에 계신다. 우리의 영혼 역시 하나의 피조물이기에, 하나님께서 당연히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지도 않고 당신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만 "있지"않게 되며 존재하지 않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요한은 진심으로 영혼에게 "너는 그분 없이는 존제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다는 아니다. 성화의 은총을 입은 영혼 안에는 이러한 근본적인 하나님의 현존 말고 또 다른 현존이 있다. 우리는 이 현존을 계시를 통해서만 알게 된다. , 만일 영혼이 초자연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그것은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살고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인데-그럴 때 삼위일체의 세 위격 이 그 영혼에게 오시어 그 안에 머무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이것이 곧 신학자들이 말하는 '내재적 현존'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세 위격은 새로운 모양으로 현존하시게 된다. 전과 같이 다만 모든 것을 유지하고 움직이도록 한다는 창조적 원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영혼이 인식하고 사랑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그에게 당신 자신을 주신다. 그리하여 영혼이 사귈 수 있게 되는 대상으로 현존하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이 현존으로 영혼에게 오시어 그의 반려가 되어 주시고, 또한 하나님의 반려가 되도록 영혼을 초대하신다고도 말하는 것이다.

영혼 안의 이러한 하나님의 특별한 현존을 통해, 영혼은 여기에 대응하며 그분과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자신 안에 지니게 된다. 그것은 은총이 있는 곳에는 ' · · '라는 향주덕이 따르게 되고, 이러한 초자연적 덕들은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성삼위 일체이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이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신앙으로 드높여진 우리의 지성은 우리 안에 사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우리의 의지는 확실한 희망으로 굳세어지고 애덕을 통해 모든 초자연적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 향하게 되어, 하나님을 친근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우리 안에 사시는 하나님과 이미 지상에서부터 이처럼 사귀면서 그분을 알고 사랑하며 하나가되기 시작할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는 향주덕을 실천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더구나 이 향주덕을 실천하면서, 신학자들이 말하듯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적어도 체험적 특성을 들해 하나님에 대해 알게 해 주는 성령의 선물들을 함께 받게 될 때, 우리가 이르게 될 정상이 어디일지 어느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분명히. 여기서 참으로 우리는 '관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무소부재라고 하는 첫째 형태의 하나님의 현존이 우리가 존재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지만, 내적 현존은 한층 더 귀중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잊지 말아야할 것은, 이 현존은 하나님의 은총과 연관되어있으며, 은총을 잃어버리는 영혼은 하나님의 반려자라는 이처럼 소중한 신분도 동시에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대죄의 가장 비참한 결과 중 하나이다. 대죄는 우리 안에서 성화의 은총을 파괴하며, 우리의 영혼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내재도 빼앗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숨어 계신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과 일치되기를 바라는 영혼이 그분을 찾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또한 하나님을 찾게 되기를 간절히 원해야 한다. 영혼은 성령께 응답하면서 "내 사랑하는 임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데, 왜 나는 그분을 느끼지도 못하고 찾을 수도 없습니까?"라고 새로운 질문을 한다.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과 거룩하신 분의 반려자가 되어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내 안에 내 영혼을 사랑하는 분이 계시다면 왜 나는 그분을 만나지도, 느끼지도 못하는가?"하고 영혼은 말한다. 여기에 대해서, 십자가의 요한은 성공할 수 있는 전반적인 계획을 설명해 줄 것이다. 하나님과 사량에 빠진 그 영혼이 하나님께서 바로 자기 안에 살고 계시는데, 왜 그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잘 들어 보자.

"그 이유는 그분께서는 숨어 계시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분을 만나고 느끼기 위해 네 자신이 숨지 않기 때문이다. 숨겨진 물건을 찾으려는 이는 아주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 한다. 거기서 물건을 찾을 때에는 찾는 이도 역시 그 물건처럼 숨어있게 된다."(영가l,9)

그렇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신다. 하지만 그분은 숨어계신다. 우리의 너무도 인간적인 수많은 관심사와 자신의 계획 달성을 가로막는 온갖 장애에 묻혀 숨어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다른 사람의 권리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그 계획들을 어떻게 해서든 달성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너무도 자주 세속적인 취향과 충동과 강렬한 격정이 넘치게 되고, 우리를 피조물에게 달려가도록 떠미는 바람에 거기에 마음을 다 빼앗기게 된다. 그런 욕망들은 우리로 하여금 피조물에다 희망을 걸게 하고 그런 것들을 회상하면서 위안을 찾게 만든다. 우리는 이와 같은 피상적인 세계 속에 너무도 깊이 빠져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결국에는 우리가 누릴 수도 있으나 누리지 못하고 있는 그 심오한 삶을, 즉 하나님과 관계가 이루어지게 하고 마침내 하나님을 만나게 해 줄 수 있는 그 삶을 그만 잊고 살게 된다. 주님은 우리의 영혼 깊은 데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않고 '우리의 일'에 매달려 거기에만 온전히 마음을 쏟고 있다.

이제는 왜 우리가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그분이 계시는 곳에 가야하며, 그러려면 우리가 피조물에 몰두하며 살아가는 그런 삶에서 도망쳐 나와야 한다. 깊은 내적 생활을 하려면, '그분께서 숨어 계시듯이 우리 자신도 숨어야' 하며 피상적인 삶에서 달아나야 한다. 만사가 우리의 작은 '자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피상적인 세계의 인간적 관심사를 단념해야 한다. 그래야 영혼이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을 배우는 곳인 우리 영혼의 더 깊은 중심처로 내려갈 수 있다.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을 들어보자.

"말하자면 신랑은 영혼의 밭에 숨겨진 보물이다. 현명한 장사꾼은 모든 것을 주고 그 밭을 산다(13:44). 그분을 찾기 위해서 너의 모든 것을 잊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모든 피조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너는 정신의 골방에 들어가 숨어라. 문을 닫아 걸은 다음 숨어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6:6). 여기에서 문을 닫아 걸으라는 것은 모든 사물에 대한 너의 의지를 거두어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영혼이 신랑과 함께 숨어 있을 때 숨어 계신 그분을 느낄 것이며, 그분을 사랑할 것이고, 숨어서 기뻐할 것이며, 그분과 함께 숨어 있어면서 즐거워할 것이다." (영가1,9)

십자가의 요한은 이처럼 가장 아름다운 약속으로 우리를 격려해 준다. 그는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장하면서도 힘들게만 보이는 정복 계획을 역설한다. 이제 그 계획을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포기 

 

실제로, 십자가의 요한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요구하고 있다. , 관상 생활의 특성으로 종종 들어온 두 가지 수단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를 포기와 진지한 간청, 금욕과 기도로 초대하고 있다.

"그분을 찾기 위해서 너의 모든 것을 잊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모든 피조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너는 정신의 골방에 들어가 숨어라."(영가1,9) 그러나 아마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른다. "십자가의 요한은 우리가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요구한다. 어떻게 우리의 모든 관심사와 일을, 그리고 직위와 가정에 따르는 의무를 다 잊어버리란 말인가.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에서 떠나라'고 한다. 하지만 집에서 살아야 하고, 평생토록 마음을 바쳐 돌보아야할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우리에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그들에게서 분리시키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는 없다."

그리고 정말,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 기회에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에 반대하여 한 번 이상 제기되었던 곤란함에 대해 즉시 기쁘게 답하겠다. 그런 요구는 비인간적 이다. 우리에게 불가능한 희생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외딴 수도원 안에서 '산 채로 매장된' 이들이나 따를 수 있다고 사람들은 주장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을 참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십자가의 요한은 심지어 '이탈'이라는 가르침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정신적인 면'을 말하고 있다. 그의 저서들에서 여러번 명백히 밝힌 것처럼, 그가 피조물에서 떠나라고 말할 때, 마치 모든 것을 떠나서 은수자처럼 살러 가야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 설명하고 있는같은 구절에서 그가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은 "의지가 애착을 갖는 모든 것에서 떠나라."는 뜻이다. ,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은 사랑하지 말라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니다! 이 점을 명심하자. ,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피조물을 사랑하기를 바라시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집착하는 것은 원치 않으신다.

실은, 애정 가운데는 허용된 애정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확실히 원하시는 거룩한 애정도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교 신자 부부 사이의 사랑과 자녀들을 위한 어머니의 사랑 등이 그렇다. 어머니가 자녀들을 사랑하지 않고 그들을 잊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을 거역하고 큰 죄를 범하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십자가의 요한은 우리에게 죄를 지으라고 권하지 않는다. 그러면 '피조물을 잊는다.', '의지가 애착하는 모든 것에서 떠나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의 말은 우리에게 다만 모든 무절제한 애정, 모든 집착을 피하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에게는 바로 이것이 '집작이라는 단어의 뜻이다. ,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거나, 또는 과장된 방식으로 마음을 얽매이게 하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사랑이 있을 수 있으며, 불행하게도 매우 정당한 애정 안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어머니가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주님께서 자기 딸을 수도 생활로 부르시면서 그분의 반려가 될 수 있도록 그 딸을 청하실 때, 자신을 포기할 수 없는 어머니가 종종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착한 어머니로서 딸의 성소가진정한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볼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일단 이 성소가 분별 있는 결정임을 모두 확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반대한다면, 또 틀림없이 어머니로서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피할 수 없는 딸과의 이별을 두려워해서 계속 "안 된다"고 고집한다면, 그런 사랑은 더 이상 하나님 뜻에 맞는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좀 더 평범한 예를 들어 보자.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드높은 산에서 용감한 등반을 즐기고 상쾌한 공기와 웅장한 풍경에 매혹된다. 자연의 장려함은 창조주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생하게 말해 주기에 하나님을 믿는 이 영혼은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벅차게 된다. 그래도 좋다. 그러나 그가 직무나 애덕의 의무를 이행해야할 때 이 매혹적인 등산을 포기할 수 없다면, 그는 틀림없이 거기에 '집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베드로가 친구들과 함께 푸짐한 마카로니나 맛있는 밀라노식 생선 요리를 즐겨 먹는 것을 보더라도, 나는 그가 먹는 것에 집착한다고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단식해야 하는 날에는 너그럽게 단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식하는 날,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즐기기 위해 폭음이나 폭식까지 한다면, 그는 그런 저속한 충족감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종종 우리 각자는 무척 많은 것에 조금 또는 많이 집착하고 있다. 그러한 집착은 쓸데없는 일들에 먼저 마음을 쏟게 만들며, 그런 일들에 집착하고 몰두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없다. 그린 집착은 결국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자기 만족만을 골똘히 찾는 일에 갇혀 살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내면적인 삶을 가려 버리고 방해하는 피상적인 세계인 것이다. 세속에서 사는 사랑이든 수도자이든, 하나님과의 친밀한 일치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러한 세계를 떠나려고 노력해야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요한은 사회와 가정에서 많은 의무가 있는 평신도의 경우에도 실천할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요구하지 않는다. 사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이런 의무를 포기하거나 잊어버리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 종종 이와같은 의무를 더욱 성실하고 탁월하고 품위 있게 수행하지 못하게 만드는 집착을, 너무도 인간적 이어서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쓸데없는 지나친 집착을 억제하라는 것이다. 결국, 십자가의 요한은 우리가 오로지 영성적 완성의 황금률인 하나님의 의지만을 따르는 밝고 깨끗한 삶을 확고히 살아감으로써, 그보다 열등한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가르치고 있다.

기도할 때, 우리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하나님께 온전히 마음을 집중하면, 자연히 피조물에서 관심이 떠나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십자가의 요한의 권고가, 즉 피조물을 잊어버리라는 권고가 기도하는 중에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말도 올바르게 알아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도할 때, 우리의 정당한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없다고 믿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애정을 축복해 주시기를 바라거나 그분께서 찬성하지 않는 소망을 들어주시기를 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짓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마땅히 의무로서 해야 할 일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 의무를 하나님의 가장 거룩한 뜻에 따라 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은 매우 옳은 일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비난받을 만한 일이 아니며 오히려 꼭 청해야하는 일이다. 이런 기도는 우리의 삶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생각을 그분께 털어놓는 것이다.

이제, 십자가의 요한이 요구하는 포기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실천할 수 있으며, 그러한 포기는 '정신적으로는' 절대적인 요구일 수도 있음을 이해했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적인 것에서 떠나라는 것이 아니라 온갖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가장 광범위한 사회적 의무들을 지닌 사람이라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가정생활뿐만 아니라 사회적 · 정치적 생활에서도 모든 것에 초연해질 수 있다. 참으로 누구나 다 그렇게 될 수 있다. 아마 우리는 마음속에서, 적어도 몇 사람만이라도 그렇게 되기를, 그러면 우리의 정치적 세계는 훨씬 나아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기도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바람직한 만남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십자가의 요한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첫째 방법은 그다지 어렵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면 이제 둘째 방법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 것일까?

십자가의 요한은 이 세상 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포기하고 우리 영혼의 깊은 은둔처로 들어가도록 초대한 다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정신의 골방에 들어가 숨어라. 문을 닫아 걸은 다음 숨어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6:6). 여기에서 문을 닫아 걸어라는 것은 모든 사물에 대한 너의 의지를 거두어들이라는 것이다."(영가 1.9)

십자가의 요한의 이 말은 기도를 잘하는 길을 보여 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이 생각나게 한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6)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를 잘하도록 가르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먼저 피조물에서 떠나도록 이끄신다. 십자가의 요한은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설명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그의 가르침이 복음의 보편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가 기도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신뢰하며 귀담아들어 보자.

하나님을 탐구하는 데는 두 가지 움직임이 있다. 첫째는 피조물에게서 이탈하는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그분께 다가가야 하는 것일까? 십자가의 요한의 말을 들어 보자.

"도달하기 힘든 진리와 실체로 가득 찬 말 한마디만 들어라: 신앙과 사랑 안에서 그분을 찾아라. 세상의 사물들에게서 기쁨을 찾으려거나 즐기려거나 알아야 하는 것 이상으로 깨우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신앙과 사랑, 이 두가지는 네가 모르는 곳, 즉 하나님께서 숨어 계신 곳으로 너를 인도해주는 장님을 인도하는 어린아이다. 은밀한 것이라고 우리가 말했듯이(영가1.3,9) 신앙은 하나님께로 가는 발이며, 사랑은 하나님께로 가는 안내자(가르멜의 산길II.1,2; 4.2-3)이다."(영가l,11)

십자가의 요한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기도란 순수한 기도로서, 영혼은 기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찾으며, 자기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족스럽게 해 드리고자 한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참으로 경박한 생각을 하곤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만, 다시 말해서 자기 힘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꼭 얻어 내기 위해서만 기도하는 것 같다. 그리고 바라는 그것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면 참지 못하고, 마치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적인 이익을 위해 너그럽게 봉사하셔야 하는 것처럼 화를 내며 투덜대기까지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해 얼마나 천박하게 반응하는지!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그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가 만사에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뜻을 이룸으로써 그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준비시키셨다. 이것이 피조물의 참된 모습이거늘, 우리는 종종 자신의 강한 욕망에 끌려서 그 현실을 뒤엎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십자가의 요한은 우리와 달리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해 매우 깊이 알아듣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시고, 우리는 우리 자신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세계의 중심은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니다. 우리의 완덕과 성화는 그분과 하나가 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지, 소위 근대적 '성화의 형태'라고 믿게 만드는, 즉 인간의 자질을 최대한 발휘하고 잘 조화시킨 그런 인간이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분명 초자연적 실재들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엄격히 말해서 초자연적 실재들은 '초인간적인 것'이다. 인간은 오직 이들에 대한 감각을 지님으로써만 성덕에 이를 수 있다.

우리를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바로 그 은총이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해 주며, 더 큰 은총을 받게 될 때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 안에서 살고자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사실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될 때 당연히 우리의 모든 기능이 조화를 이루게 되고, 그 조화 속에서 제각기 자신에게 맞갖은 형태로 활동하면서 '하나님의 영예와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다만 성화의 한 결과일 뿐이다. 교황 비오 11세가 훌륭하게 정의한 대로, 성화란 "거룩한 발명가이신 하나님의 생각과 원의에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말한다. 성화는 인간중심적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적이다! 성화란 인간적인 생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인 생활을 뜻한다. ,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인간적인 삶을 초자연적인 삶이 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에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초월성을, 온갖 피조물, 즉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위해 창조된 우리 인간까지도 넘어서는 그분의 절대 숭고한 초월성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규범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규범을 정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규범을 정해 주시면서, 참된 행복의 길, 즉 지극히 복된 처지인 당신과의 일치로 이끄는 길을 보여 주신다. 우리는 생명의 근원과 하나가 되지 않는한, 결코 참다운 행복을 충만히 누릴 수 없다. 현세에서의 참된 행복은 지상에서도 하나님과 하나가되는 데 있다. 그 행복은 우리의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노력하며, 하나님의 영예와 영광에 이바지하도록 이끌어 주는 그 섭리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김으로써 누릴 수 있게 된다. 행복하게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기를 잊고 매사에 하나님을 섬기려고 힘쓰는 데 있다.

"무엇에서도 만족을 찾으려 하지 말고, 신앙과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찾아라."고 십자가의 요한이 우리를 가르치면서 권고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사심 없는 탐구를 두고 한말이다.

자기를 떠나서 오로지 하나님의 기쁨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기도야말로 주님께 얼마나 큰 기쁨이 되겠는가! 정녕 주님께서는 이처럼 정성을 다하는 피조물의 흠숭을 받으셔야 마땅한 분이시다.

십자가의 요한은 기도할 때 우리 안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어야 된다고 가르친다. 그에게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알아들을 길이 없으나 그 말씀을 굳게 믿고 안심하며 매달리는 것이다. 이 말씀은 특별히 우리에게 하나님의 초월성, 그렇듯 높으시고 그렇듯 선하시고 그렇듯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숭고한 위대성을 깨닫게 해 준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참모습을 있는그대로 보게 해 준다. 우리가 하나님을 뵐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게 해 줌으로써, 우리의 지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만나게 해 준다. 그 다음 신앙에는 애덕이 따르게 되며, 사랑함으로써 이해하게 된다. 영혼은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며,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온전히 예속시켜야할 지극히 높은 존재이시고. 나아가서는 우리의 사랑을 다 바쳐야 할 참된 분임을 굳게 믿으면서 그분을 열렬히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요한이 약속한 다음 말이 그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영혼이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신앙의 신비들과 은밀한 것들을 잘 묵상하고 관상한다면 사랑은 신앙 안에 내포된 것을 드러나게 해 줄 것이다."(영가1,11) 따라서 신앙은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해, 즉 온갖 피조물을 초월하신 하나님께 대해 말해 줄 것이다. 사랑은 그 초월성을 맛보게 해 주며, 거의 체험하게 해 줄 것이다. 사랑은 '관상적 기도' 안에서 이것을 이루어 줄 것이다.

그런데 애덕이라고 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선의로서, 그 순수함은 완전함과 굳셈의 조건이 된다. 따라서 이 사랑은 하나의 소망, 즉 자기만족을 찾지 않고 하나님만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오직 하나의 소망만을 지녀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최고로 사랑해 드려야 할 무한한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만을 위해서 다가가야 할 것이다.

예수님 친히 주님의 기도(6:9~13)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하고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이처럼 이기적인 것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적인, 하나님만을 위하는 데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제일 첫자리에 두면서, 이 양식 안에 우리의 모든 관심, 모든 욕망의 만족을 포함시키려는 유혹을 종종 느낄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고자 하신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청하기를 요구하신다. 그러나 우선 당신의 뜻과, 당신 계획의 실현을 첫 자리에 두고 청한 다음에 우리의 소망을 구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의 계획은 바로 인간에게 초자연적 행복을 누리게 하시려는데 있다.

또한 우리가 이러한 도덕적 · 영성적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거기에 이르려는 노력조차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는 한, 우리는 자기가 받을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며 하나님과 결합하기를 더욱 간절히 바라게 됨으로써 마침내 당연히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음을 희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도 어느 날엔가는 신앙과 애덕의 열기로 불타는 행위가 되어 "사랑이 신앙 안에 간직되어 있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말하자면 신앙이 단순히 가르쳐 주는 데 그쳤던 것을 사랑은 그것을 즐기게 해주며,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한 감각을, 즉 하나님의 단일성, 위대하심, 초월성을 알려 주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게 해 준다.

만일 이러한 체험적이라고 할 만한 하나님께 대한 인식 이 우리의 영혼 안에서 자라게 되면, 영혼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해 십자가의 요한이 다음과 같이 약속한 말이 왜 우리 안에서 실현될 수 없겠는가? 십자가의 요한은 말한다. "영혼이 신랑과 함께 숨어 있을 때 숨어계신 그분을 느낄 것이며, 그분을 사랑할 것이고, 숨어서 기뻐할 것이며, 그분과 함께 숨어 있으면서 즐거워할 것이다. 이 느낌은 모든 말과 감각을 초월하는 방식을 말한다."(영가l,9)

그의 저서 영가는 시작부터 우리의 마음을 무척 매혹시키는 현시와 광대한 전망과 조화롭고 풍요로운 가르침을 한눈에 보여 주기 때문에, 십자가의 요한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가장 적절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시구의 제1절부터 별써 십자가의 요한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이미 어느 정도 하나님을 차지하고 느끼고 그분과 즐겁게 지내게 하는, 즉 하나님과 함께 머무는 관상적 일치의 정상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요한은 그 일치가 거의 우리 눈앞에 있다고, 우리와 너무도 가까이 있다고 알려 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그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영혼 안에 계시며, 아니 더구나 영혼 안에서 사시면서, 우리에게 알려지고 사랑받고자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깨달음과 사랑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될 것이다. 이 깨달음과 사랑이 때로는 특히 기도로 깊어지고 강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피조물에 대한 끊임없는 포기를 통해 성숙해지지 않은 한, 거기에 펄요한 정도의 굳셈에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일치하기 위해서는 두 날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금욕과 기도, 포기묵상, 달리 말해서 이탈기도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알아들었다. 또한 십자가의 요한이 보여 주는 이러한 방법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어서, 비록 수도자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도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이 방법으로 훌륭한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실천하기 어려운 요구라며 겁내지 말고 그 '전적인 이달의 가르침을 기꺼이 따라야 하겠다. 이렇듯 숭고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힘껏 노력하고, 이렇듯 해밝은 환희를 맛보기 위해 어느 정도의 희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코 헛수고가 아널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요한의 말로 끝맺겠다.

"용기를 내어라. 아름다운 영혼이여! 네가 원하는 신랑은 네 안(마음속)에 숨어 계신다는 것을 깨닫고 잘 숨어서 그분과 함께 있으려고 애써라. 그러면 네 안에서 그분을 끌어안을 수 있을 것이며, 사랑의 열정으로 그분을 느낄 것이다."(영가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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