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기라고 되어 있는 제목은 학생들 혹은 군인들이 받는 극기훈편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쉬우리라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도 극복해야 할 부분이 있답니다. 그래야 잠심으로 들어갈 수 있답니다.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집중훈련하지요!



3. 극기


"내 사랑을 찾으러,
산과 강가로 가리라;
꽃을 꺽지 않고,
‥‥"           (「영가」 3)


   이 「영가」에서, 영혼이 모든 힘과 정력을 기울여 곧장 앞으로 달려가 다다르기로 굳게 결심하는 목표는 바로 하나님과의 일치이다. 그 결단이 너무도 확고해서 '꽃들도 꺽지 않겠다.'고 외친다. 그렇다. 나는 피조물에서 만족을 찾는 데 사로잡히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이 목소리에서 무언가 절대적이고 영웅적인 힘이 느껴진다. 그러나 영혼은 사랑 때문에 이 결심을 하게 되었으며, 사랑이란 '죽음처럼 강한 것'이다. 이 길이 온갖 장애와 고뇌로 가득한, 위로라고는 없는 길임을 알고 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열정이 재촉하고 희망이 격려해 주고 있어, 그는 맨 끝까지, 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저 정상까지 가기를 원한다.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고 가능한 한 빨리 가기 위해, 돌아서 가는 길로 가지 않고 곧장 목적지를 향해 똑바로 올라가는 길로 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꽃들도 겪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처럼 완전한 포기가 정말 필요한 것일까?



전부 말끔히 벗어 버려야함


   이제부터는 가르멜의 산길을 인용하면서, 영혼을 놀라게 할까 봐 겁내지 않고 그대로 옮기겠다. 이 책에서 십자가의 요한은 전부 말끔히 벗어 버려야 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 논제는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에서 근본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그의 설명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말끔히 벗어 버림은 바로 그렇게 되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다만 일치의 관점에서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일치의 본성에서부터 말끔히 벗어 버림의 필요성을 밝혀야 한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 필요성을 증명하면서 우선 처음에, 그가 영혼을 인도하고자 하는 이 일치의 경지에 대한 정확한 관념부터 알려 주고 있다. 영혼이 열망하는 영적 완벽함이나 성화(聖化)에 대해 성인이 품고 있던 높은 관념이, 즉 완덕이나 성화란 영혼이 이 지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가장 친밀한 일치에 이를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그 관념이 성인의 모든 가르침을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일치의 상태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고찰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 일치의 경지에 이른 완전한 모습을 바라보며 묵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경지에서 영혼이 누리게 될 모든 풍요로움을, 이에 따라오는 감미로운 체험을, 하나님의 빛과 사랑에 잠기는 가장 지고한 은총을 생각해 보며 묵상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생애의 마지막에 가서야, 즉 관상 생활의 여러 단계를 감행한 후에야 이 경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성인이 실천한 방법에 따라서 그 일치 상태의 중추를 이루는 여러 가지 본질적인 요소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일치 상태의 근본적인 요소와 거기서 솟아나는 모든 복합적인 영성적 풍요로움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요한의 말을 빌려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다음과 같이 가장적절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일치의 상태(거룩한 일치의 단계)란 영혼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 완전히 변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며, 영혼 안에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이 아무것도(하나도) 없어야 하고, 모든 것에 있어서 그리고 모든 것을 위하여 영혼의 움직임이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가르멜의 산길」 1.11,2)
   일치 상태, 다시 말해서 거룩함의 본질적인 요소를 두루 다 포함하고 있는 십자가의 요한의 이 훌륭한 정의는 주의 깊게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사실상, 이 정의 안에서, 십자가의 요한의 모든 가르침의 골자를 파악하게 된다.
   우선 먼저 유의해야할 것은, 신비 박사인 십자가의 요한에 의하면 일치 상태의 본질은 의지 안에서 찾게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 일치를 즐겨 '변모의 일치'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곧 알게 되겠지만, 어쨌든 여기서는 이 변모가 '의지로써' 이루어지게 됨을 명백히 단언하고 있다. 이 주장을 살펴보는 것이 허사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최근에도 어떤 이들은 하나님 안에서의 영혼의 변화를 의지의 선에서보다는 오히려 지성의 선에서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마침내는 성인의 생각과 한참 동떨어진 철학적 관념론에 전적으로 의지해서 십자가의 요한에 대해 해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변화는 의지로써 이루어지는 변화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변화는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두 가지 사실에서 , 즉 첫째는 부정적인 사실, 둘째는 긍정적인사실에서 이루어진다.
   부정적인 사실이란 그 영혼의 의지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온갖 경향, 즉 그 경향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달려가게 하는 모든 경향의 부재(不在)를 말한다. 그러나 이런 경향이 없어지게 될 때 이에 대응하는 다른 경향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곧 부정적인 요소가 긍정적인 요소로 대치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는 언제나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움직여지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그 마음 안에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경향이 전혀 없으며, 그 대신 영혼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따라서 십자가의 요한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치의 단계를 영혼과 하나님의 뜻이 하나가 되었다고 부르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뜻에 맞춰진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곧 영혼의 뜻이 되는 것이다. 혹시라도 영혼이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어떤 결함 습관적인 결함들을 열거하면, 보편적인 습관처럼 말을 많이 하는 버릇,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집착으로서 사람이나 옷, 책과 방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음식을 준비하는 것과 쓸데없는 잡담, 무엇을 맛보거나 듣거나 이와 유사한 것들로부터 만족감을 조금이나마 느끼려는 것에 대한 집착을 꼽을 수 있다. 일상적으로 드러나는 나쁜 습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영혼이 무엇에 집착하는 것이 그리 크게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쁜 습관에서 오는 것이라면 결함이 ㅈ「아무리 작은 것이라할지라도 영혼이 완덕에 나아갈 수 없다. 이는 마치 한 마리의 새가 가는 줄에 묶여 있는 것과 같다 아무리 가는 줄이라도 묶여 있다면 날아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아무리 가는 줄이라도 끊지 않으면 날아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영혼이 제아무리 덕을 쌓았다할지라도 어떤 것에 집ㅊ착하고 있다면 거룩한 일치에 이르는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이라도 원했다면 하나님의 뜻과 하나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가르멜의 산길」 1.11,3)
   달리 정리하면; "이 상태에서 두 의지가 하나의 의지가 된다. 그 의지는 곧 하나님의 의지이고, 이 하나님의 의지는 곧 영혼의 의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인지를 말해 주는 결정적 요인이다. 즉, 하나님의 의지가 영혼의 의지로 되는 것, 말하자면 영혼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 안으로 사라져 마침내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로 되는 것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겠는가? 인간적인 것이 참으로 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말 그대로라면 물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이 점을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요한이 감화를 받았던 사랑의 심리학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잠간 인용해 볼 필요가 있다.
   천사 같은 박사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저서들에서 사랑의 심리적 과정에 대해 자주 말하면서 강조하기를,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의 애정 안에서,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의지 안에서 그 사랑의 대상에게 기울어지는 경향이 생긴다고 했다. 이런 경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만큼 우리의 감정을 사로잡아 그 사랑의 대상에게 우리를 끌고 가게 된다. 이런 경향이 온 마음에 밀어닥칠 때, 마음은 더 이상 어떤 다른 것에게도 애정을 느낄 수 없게 되며, 그 유일한 사랑의 대상에 의해 온전히 이끌려 가도록 자신을 맡겨버린다.
   이 경향으로, 그 사랑의 대상이 마음 안에 어떤 형태로 늘 현존하면서 마음을 지배하고 행동하도록 충동하기 때문에, 마음은 사랑하는 대상의 모습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말할 때, '그는 우리의 마음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물론 그 사람이 육신으로 마음속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안에는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며 그를 기쁘게 해주고 싶은 경향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할 수 없겠는가? 우리가 극진히 사랑할 때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려는 마음에서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즐거움은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사랑하는 자녀가 '마음 안에 있는' 어머니는 자기를 온전히 잊고 그 얼마나 너그럽고 헌신적으로 되는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쉬지 않고 돌보며 그 아이가 잘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더욱 기쁘고 만족스럽게 해 주기 위해 온갖 희생을 견디어 낸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신비다. 사랑할 때는, 그 사랑의 대상이 정신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게 되어 그 사람에게 마음을 쓰게 하며 우리를 움직이고, 그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그를 위해 행동하게 만든다.
   그러면 이제 그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 대상이 하나님의 뜻인 경우,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우리 주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작은 피조물인 우리가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그분의 뜻에 완전히 동의하며 따를 것을 전적으로 요구하신다. 이제 '하나님의 요구'를 완전히 이해하고, 온 마음을 바쳐 오로지 하나님의 거룩한 뜻만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영혼이 있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 하나님의 뜻 또한 이 피조물의 마음을 차지하게 되며, 그 마음 안에서, 언제나 그분의 뜻대로 살고 싶도록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경향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영혼 안에는 이러한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 영혼의 의지를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이 경향 하나뿐이 아니다. 종종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사랑하면서도, 영혼은 다른 것들을 무척 사랑하며 그런 사랑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심각하게 고민하지도 않는다. 때로는 너무 자주 그런 사랑이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어긋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는 하나님의 뜻을 몹시 거역하는 것이어서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죄를 범하게 된다. 다른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 즉, 선을 행하기를 원하면서도 더욱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바람직한 방법을 찾으려 애쓰지 않고 태만하게 지내는 경우다. 이 경우에는 마음을 다해 노력하지 않은 탓으로 불완전이라는 과오를 범하고 만다. 하나님의 뜻만이 우리 사랑의 유일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면서도 그것이 정말 그분의 뜻인지를 확인하지도 않고 자애심으로, 즉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사랑으로 다른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사랑한 모든 것 역시 우리의 마음을 차지해 버린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우리 안에서 그것을 사랑하게 만드는 경향을 생기게 하여, 우리를 행동하게 충동하고 그 사랑의 대상에게로 끌고 간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서도 이처럼 여러 다른 경향과 충동이 여전히 존재하는 의지는 분명 하나님의 의지에 온전히 '점령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피조물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의 사랑은 둘로 나뉘어졌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피조물을 사랑 할뿐만 아니라, 그 피조물 안에서 자기만족을 찾으며 피조물 자체에 빠져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자애심이 자리 잡게 된다.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되는 거룩한 충동과 함께 자애심에서, 자기 의지에서 나오는 충동이 있게 된다. 영혼은 이번에는 이 충동에 의해서, 다음에는 저 충동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며, 마침내 마음속에 두 개의 의지가 자리 잡게 된다.
   만일 영혼이 피조물인 그들 자신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기를 포기하고 그들에게 사로잡히는 일이 없게 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만 피조물을 사랑하고 싶어 하고, 그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통제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때야말로 그 영혼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피조물을 사랑하고 있으며, 하나님 뜻 이외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 그때 영혼은 다른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사랑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이 그 영혼의 유일한 동기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영혼 안에서 그 자신의 의지는 사라져 버리고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지배하게 된다. 자기만족에 이끌리는 충동은 영혼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할 수 있도록 양보하기 위해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이런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아버지의 뜻에 관해 하신 말씀을 되풀이할 수 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즉, "나는 어떤 다른 것도 참지 않으며, 다른 데로 마음이 기우는 일도 없다. 내 안에는 다른 충동이란 없고 하나님의 뜻만이 지배하고 있으며,  나의 의지는 사라져 버렸고 하나님의 의지 안에 흡수되어 버렸다."는 뜻이다.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뜻에 따라 변화된 영혼이란 이런 경우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화는 실제로 두 가지 조건을 갖추었을 때 생기게 된다. 이제 그 영혼 안에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밖에서'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영혼 안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려는 경향을 찾아볼 수 없게된다. 그때 '모든 일에서, 모든 것을 위해서, 그 영혼을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 두 조건을 충족시킨 영혼을 십자가의 요한은 하나님 안에서 모습이 변한 영혼, 즉 변모의 일치에 이른 영혼이라 부른다. 아주적절하게, 성인은 이것이 사랑의 일치라고 특징지었는데, 그것은 성인이 말하는 변모란, 앞서 말한 것처럼, 사실 사랑의 지시에 따라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서 그 의지가 변화된 영혼이란 그 결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영혼을 말한다. 당연히 그런 영혼 안에는 다른 마음의 움직임이 없게 된다. 바로 이련 이유에서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의 기본적 명제가, 즉 영혼은 전부 말끔히 벗어 버림을 통해서가 아니고는 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르지 못한다는 그 가르침이 정당화된다.
   하나님 안에서 변화되는 데 절대적 장애가 되는 것은 온갖 '애착, 또는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듯 충분히 통제되지 못한 '욕구'이다.
   되풀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피조물을 사랑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피조물을 사랑하라고 적극적으로 명하신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그들을 사랑하라고, 즉 그분께서 규정하신 한도 안에서 그분의 지고한 뜻에 따라 사랑하라고 명하신다. 피조물이란 늘 정도에 맞게 사랑해야 한다. 그 이유는 피조물이란 본질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피조물에게 '무한히', 한없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선 우리의 사랑이란 창조된 사랑이니만큼 필연적으로 한정되어 있으며, 게다가 피조물은 하나님에게서 독립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오직 하나님의 작용을 통해서만 존재하며, 우리의 사랑이 그분의 배려 안에서 합당한 사랑이 되게 하려면 바로 이 의존성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한도보다 더 피조물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보다 피조물에게 더 마음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더 사랑받는 분이어야 하며, 우리의 다른 모든 사랑은 그분에 의해서 조절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애정을 조절해야 하는 이 의무를 완전히 무시하고, 매력을 느끼는 순간 즉시 피조물에게 애정을 쏟아 버린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어느 정도 자기만족을 찾고 있다. 우리의 본성에 만족을 찾으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의도적으로까지 우리에게 그런 만족을 줄 피조물을 찾게 된다. 이렇듯 '애착'이, 즉 무질서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억제되지 못한 '욕구'가 숨어 있기 마련이다.
   이런 모든 집착이 똑같이 나쁜 것은 아니다. 이런 무질서가 늘 같은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종종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우정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에 애정을 쏟게 되면, 그 사람은 대죄를 범하게 된다. 그런 애정이 금지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다지 중대한 것이 아닌 경우라면 소죄가 될 것이다. 또 그 영혼이 완전히 자기 자신의 편의대로만 처신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힘껏 노력하지 않은 탓으로 불완전이라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이런 경우를 보면 번번이, 언제나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사랑하고 피조물에 '애착하면서', 오직 하나님께서 승인하시는 것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 안에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는 다른 움직임이 존재하며,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 안에서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는 표시이다. 단 하나의 의지가 영혼을 지시하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 옆에 나란히 남아 있게 된다. 따라서 사랑의 변화를 방해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십자가의 요한은 말한다. "한 마리 새가 가늘거나 굵은 줄에 묶여 있다고 하자. 아무리 가는 줄이라 할지라도 단단히 묶여있다면 마치 굵은 줄에 묶여 있는 것처럼 날아갈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가는 줄을 끊기가 더 쉽다. 그러나 아무리 쉽다고 할지라도 끊어지지 않는다면 날아갈 수 없을 것이다."(「가르멜의 산길」 1.11,4 )
   영혼도 이와 같다. 마지막 애착까지 포기하지 않는 한, 조금만 불완전한 채로 남아 있어도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로 변화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이 영혼을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충동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혼 자신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 곁에 나란히 남아 있다. 이처럼 두 개의 의지가함께 있는 한, 분명 하나의 의지만 남아 있게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변모의 일치에 도달하려면, 그 영혼은 반드시 전부 말끔히 벗어 버리게 되기를 간절히 원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영혼이 변화되고 싶은 열망에서 바라게 되는 그러한 말끔히 벗어버림이 얼마나 탁월하고도 근본적으로 사랑의 과업인가를 잘 이해하게 해 주려고, 십자가의 요한은 사랑을 정의하면서 '전부 말끔히 벗어 던져버리는 일'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벗어 버리고 던져 버리는 일"(「가르멜의 산길」 2.5,7)이라고 성인은 말하고 있다.
   완전한 이탈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의 왕국을 세우는 데 반드시 필요한 참된 실제적 수단이다. 성인이 내린 정의는 이 사랑의 왕국의 기원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면 이제 누구나 쉽게 추측하는 이 완전한 이탈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이탈의 규칙


   십자가의 요한이 쓴 책의 일부는 그의 저서들이 출판되기 훨씬 전부터 다행히도 그의 많은 제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읽히고 있었다. 그것은 당연히 십자가의 요한의 영성 지도 방법을 다룬 가장 전형적이고 특징적인 내용이었다. 거기서 성인이 그 가치와 풍요로움을 높이 찬미한 하나님과의 일치 상태에 영혼이 도달하고자 원할 때, 반드시 실천해야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러한 황금률을 가르멜의 산길에 삽입하기 전에, 강론할 기회에 이미 여러 곳에서 설명하고 다녔다. 성인의 가르침을 듣고 있던 영적 딸인 베아스 가르멜 수도원의 성령의 막달레나 수녀가 받아 적은 수첩에서도 가르멜의 산길에 있는 것과 똑같은 가르침을 볼 수 있다. 아마도 그 책이 출판되기 이전부터 널리 읽히고 있었고, 책에서 일부를 때내어 복사도 한 것 같다. 십자가의 요한의 저서가 스페인어로 처음 출판되던 바로 그해에, 프랑스의 퐁투아즈에서 세상을 떠난 강생의 복녀 마리아가 적어도 생애의 마지막 몇 해 동안 그것을 가지고 있었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프랑스어판은 그로부터 두 해를 더 지나서야 출판되었다. 확실히 이 원고들은 원본 그대로였던 만큼, 크게 흥미를 끌었을 것이다. 독자들은 아마 거기서 아래와 같은 구절을 읽었을 것이다.

항상 마음을 담아 실천해야 한다.

더 쉬운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을;
더 맛있는 것보다 더 맛이 없는 것을;
더 즐거운 것보다 오히려 덜 즐거운 것을;
쉬는 것이 아니라 고된 것을;
위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가 없는 것을;
많은 것이 아니라 적은 것을;
크고 값진 것이 아니라 작고 값이 없는 것을;
무엇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을;
세속적인 것들 가운데 더 좋은 것을 찾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떠 나쁜 것을 찾아야 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철저하게 벗어버림과 비움, 그리고 가난함으로 들어가기를 원해야 한다.
                           (「가르멜의 산길」 1.13,6)

   이것을 듣고 어떤 이들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또 인생의 모든 즐거움을 앗아가려는 그 파괴적민 작업 타령이군요. 그런 것은 사람이 싫어서 도피하는 이들이나 영웅적 은수자들이라면 몰라도,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그렇 다고 생각하는가?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을 다시 본문의 제자리에 넣어 앞뒤 관계를 이어 본다면, 아마 좀 더 받아들이기 쉬운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십자가의 요한은 「가르멜의 산길」에서 우리를 매우 높이 이끌어 주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하나님의 성화의 은총을 다시 입게 된 영혼의 열망을 가장 완전하게 채워 주는 경지까지,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일치 상태까지 우리를 이끌어 주고자 한다. 이어서 덧붙이고 싶은 말은, 십자가의 요한은 이 일이 매우 힘든 작업 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영혼이 영성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는 자신이 그런 일치 상태와 아주 멀리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흔히 그 시기에는 자기 안에 무질서하고 잡다한 집착이나 욕망이 가득하다. 감각적으로는 오관의 욕구를 채우는 데 너무도 익숙해 있어서 물질적 쾌락을 누리는 데로 기울어진다. 정신 속에는 종종 자애심과 자신의 우수성에 대한 만족감이 팽배해서, 마침내 자기 자신을 온 세상의 중심으로 삼으며, 다른 모든 것은 자기 지시를 받아야하는 것처럼 생각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그런 요구들 때문에, 그는 성급하고 불만스러워하며 근본적으로 겸손과는 거리가 멀게 된다.
   그러므로 악하고 불안전한 마음의 움직임과 경향에서 감각과 정신을 정화해야할 필요가 있는데, 이런 것들이 때로는 영혼 안에 아주 깊숙이 뿌리박고 있으므로, 그 뿌리를 뽑아내려면 크나큰 노력이 필요하다.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정신적 결함 속에서 헤매며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여러 해 동안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단호한 노력 없이는, 바라는 목표까지 도달할 수 없음을 잠깐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 해서 낙담해서는 안 된다. 우리 혼자의 힘만으로 이런 일을 시작하고 그것을 훌륭히 완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그 드높은 목표를 고려하면서, 그것은 인간의 창의만으로는 실현할 수 없는 일이며, 반드시 하나님 친히 손을 써 주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단언한다. 성인은 이 일이 수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이며, 물론 인간이 스스로해야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 편에서 역사하심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영혼은 용감히 이 일을 시작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오시어 자기 힘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훨씬 더 높은 곳으로 그를 친히 이끌어 주실 것이다. 자기 혼자서 이 일을 해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친히 도와주러 오실 것이므로, 그 목적을 꼭 이룰 수 있다는 큰 희망이 있음을 아는 것은 틀림없이 위로가 된다.
   영혼은 하나님의 호의와 은총을 통한 극진한 도움을 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일을 시작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는 것임을 이내 깨닫는다. 영혼은 이제 자기가 담당해야 할 일을 열정적으로 시작할 준비가 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일치하도록 이끌어 주는 완전한 정화의 밤으로 능동적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쁘게 노력할 것이다. 특히 피조물에게 빠지게 하는 오관에서부터 정화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성 요한은 이 밤에 들어가기 위한 가장 특징적인 수련을 설명하는데, 이것을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맞추면서 매사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본받을 일상적인 욕구를 지녀야 한다. 그분을 본받을 수 있고 모든 것에 있어서 그분이 하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의 삶을 깊이 연구해야한다." 십자가의 요한이 관상기도에 나아가기 위해서 우선 성경 읽기나 묵상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전제하고 다음 단계를 다루는 것이라는 사실을 여기서 알 수 있다.
(「가르멜의 산길」 1.13,3)
   영혼이 모든 인간적인 장애를 포기하는 작업을 힘차게 시작하게 해주기 위해서 , 십자가의 요한은 먼저 영혼이 사랑하고 사랑받는구세주인 예수그리스도와 다정한 벗으로 지내며 사귀도록 이끌어 준다. 우리의 본성 이 욕망을 채우고 싶어 하는 것을 꾸준히 물리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때로 우리는 불건전하고 어쩌면 어리석기까지 한 욕망의 충동을 매우 강렬하게 느끼게 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자애심을, 즉 십자가의 요한이 자애심의 충동이라고 하는 그 '욕구'를 거부하기 위해서는, 영혼은 다른 사랑에 대한 '초조함'을 지녀야 한다. 즉, 예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지님으로써 그리스도를 본받고 싶어져야 한다. 따라서 영혼은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가고, 또한 그분께서 살아가시면서 어떤 식으로 처신하셨는지 알기 위해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할 것이다. 그분의 행동 양식이 우리 삶의 규범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온전히 성부의 뜻 안에서 펀 생애를 사셨으며, 모든 것을 그분 마음에 들게 행하시면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셨다고 요약할 수 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영혼은 이와 같이 하려고 결심한다. 분명 이러한 수련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에 마음을 빼앗긴 영혼이 그분의 뒤를 따르려고 일단 결심하고 나면, 그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된다. 그러므로 이제 십자가의 요한은 그들에게 포기를 요구할 것이다. 그러면 둘째로 해야 할 일에 대해 들어 보기로하자.
   "둘째, 감각들이 가져다주는 어떤 기쁨일지라도 그것이 순수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공경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거절해야 하고 비운 상태에 머물러야 한다." (「가르델의 산길」 1.13,4) 이런 생활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내양식(요 4:34)이라는 말씀처럼 아무것도 원하지 말아야 하고 다른 기쁨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많은 세속적 활동들은 이를 통해 쾌락과 만족감을 맘껏 누려 보라고 제안하면서 우러를 유혹하고 매력을 느끼게 만든다. 가장 보잘 것 없는 행위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하건만, 우리는 얼마나 많은 행위를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만 행하고 있는 것인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라고 사도 바울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쳤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먹고 마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거의 생각하지 않으며, 너무도 많은 경우에 오로지 먹는 즐거움에만 빠져 있지 않은가. 이런 행동은 영원히 의미가 없으며, 노예근성과 애착이 생기게 할뿐이다.
   이 모두를 좀 더 잘 이해시키려고, 십자가의 요한은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 "만일 하나님을 섬기고 공경하기 위해 중요하지 않은 것을 들음으로써 얻게 되는 기쁨이 있다면 그것을 좋아하지도 말아야 하고 들으려고 하지도 말아야 한다. 만일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보게 됨으로써 기쁨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을 좋아하지 말아야 하고 처다보지도 말아야 한다."(「가르멜의 산길」 1.13,4)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만족을 위해서 어떤 행위를 하고 싶을 때, 언제나 그것을 삼가라는 것이다. 아마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실행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많은 즐거움을 삼가라니, 실제로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을 실천하면 첫째로 괴상한 사랑 취급을 받을 것이고, 다른 사람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 것입니다. 만일 어느 가정의 한 어머니가 가정생활에서 으레 있을 수 있는, 죄가 되지 않는 당연한 작은 즐거움까지도 그런 것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에서 모조리 단념해야 한다면, 남편과 자녀들을 기쁘게 해 주어야 하는 아내나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작은 것을 얻으려다 큰 것들을 잃는 셈이 되지 않습니까."
   십자가의 요한은 그런 반박을 미리 짐작하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감각의 모든 것들에 있어서도 더도 덜도 말고 거절할 수 있다면 기꺼이 거절해야 한다. 만일 이러한 만족감을 피할 수 없다면 단지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가르멜의 산길」 1.13,4)
   바꾸어 말하면, 그런 것을 즐기기를 그만두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 마음을 들어 올리고 지향을 바로잡으면서 지나쳐 버리기를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 행위는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될 것이다.
   모든 것에서 자애심을 끊고 모든 것에 매이지 않게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 행동의 지향을 놓치지 않고 늘 의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적용할 수 있으며, 이렇게 할 때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 될 것이다. 누가 이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둘째 규칙도 첫째 규칙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즐거움을 버리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힘(에너지)이 필요하다.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은 셋째 규칙으로 힘을 발휘해서 실천해야함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주님을 섬기고, 오로지 그분의 마음에 들고자 애쓰며, 그분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일에 더욱 마음을 바치는 데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것은 삶에서 누릴 수 있는 낙을 만끽하려는 우리의 무절제한 경향이다. 이러한 쾌락에 대한 갈망은 그것을 즉시 채워 주는 피조물에게 달려가도록 우리를 떠다밀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그것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본래의 경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도록 우리의 영혼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결코 그러한 경향을 이겨 내지 못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요한의 다음금언의 뜻을 더 잘 알아듣게 된다.

더 쉬운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을;
더 맛있는 것보다 더 맛이 없는 것을;
더 즐거운 것보다 오히려 덜 즐거운 것을;
쉬는 것이 아니라 고된 것을;
위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가 없는 것을;
많은 것이 아니라 적은 것을;
크고 값진 것이 아니라 작고 값이 없는 것을;
무엇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하도록 항상 마음을 써야 한다.
                        (「가르델의 산길」 1.13,6)

   십자가의 요한은 우리에게 언제나 가장 어려운 것을 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원의를 기르고, 그런 경향을 우리 안에 생기게 하며 그것을 실천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권유하고 있다. 그렇다. 말끔히 벗어 버림에 대한 사랑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 "세속적인 것들 가운데 더 좋은 것을 찾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떠 나쁜 것을 찾아야 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철저하게 벗어버림과 비움, 그리고 가난함으로 들어가기를 원해야 한다."(「가르멜의 산길」 1.13,6)  이 세상의 사물에 대한 애착에서 초연해져야 한다. 이 지상의 것을 있는 그대로 평가해야한다. 그것들은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질 수도 있는 덧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것들을 빼앗길 때 그런 것들 없이 살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런 일이 생기도록 허락하시든가 원하셔도 결코 낙담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충격은 전쟁 중에는 거의 날마다 겪었던 일이다! 그러나 고결한 영혼에게는 그것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용기를 지니게 해 주었다.
   십자가의 요한은 우리에게 열정을 갖고 시작하도록 권유한다. "실천하려면 우선 마음을 담아야 하고, 의지 안에서 일어나는 반발심을 잘 극복해야 한다."(「가르멜의 산길」 1.13,7)
   옳은 말이다. 이런 집착에 대해 강경한 조처를 취하지 많으면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요한이 비인간적이지는 않다. 그는 인간은 '진보하는 존재이며 단번에 모든 것을 이룩할 수 없음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순서에 따라 신중히' 나아가야 한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이런 신중함 때문에 힘이 빠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셋째 규칙은 힘을 지니도록 도와준다. 그 힘은 안일한 생활과 여러 가지 즐거움에 사로잡힌 노예적 집착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고, 필요한 작업을 하도록 격려해 줄 것이다.
   아직도 십자가의 요한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하는가?
   십자가의 요한은 천재이다. 그는 예술가 기질이 있으며,  예술가는 자신의 직관을 감각적 형식으로 표현한다.
   베아스 수도원의 수녀들을 위해서 십자가의 요한이 어느 날 그림 한 장을 가지고 갔는데, 그것은 가르멜 영성의 역사에서 유명해진 '완덕의 산', 즉 영성 생활을 풀이한 그림이었다.
   그것은 상징적인 산으로, 영혼의 완전한 상태를 나타내는 절정 부분은 도표에 둥근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예로부터 원형은 언제나 완전성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이 산에 오르는 길은 원을 중심으로 세 갈림길로 표시되어 있다. 바깥쪽의 넓은 두 길은 도중에 막혀 버렸고, 가장 좁은 한 가닥 길은 원의 중심을 향해 곧장 뚫려 있다. 그 길 위에는 '무(無), 무, 무'라고 여러 번 쓰여 있는데, 이 길이 바로 완전한 극기의 길이다. 이 길은 우리를 원형의 중심으로 곧장 인도한다. 그 종착점에는 '이 산에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영예만이 머무른다.'는 뜻깊은 문장이 적혀 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예만을 위해서 사는 영혼은 변모된 영혼임을 알게 되었다. 그 영혼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영혼이며, 따라서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고자하는 영혼임이 분명하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이 '무(無)'의 길을 걷기를 열망해야한다.
   '무(無)'의 길에서 이러한 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사실, 한복판에는 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른 영혼이 하나님께 집중하는 영적 태도를 나타내는 단어들이 쓰여 있고, 그 주변에는, 변모된 영혼에게 따라오는 여러 덕행과 성령의 은사와 그 결실을 드러내는 단어들이 머리에 쓰는 관 모양을 이루고 있다. 이 표시는 변화된 영혼이 관상을 깊이 즐기고 있으며, 이미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면서 이 세상에서도 그분과 즐겁게 지내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 일치에 도달한 영혼에게는 천국 보상의 전조로 지상에서 갚음을 받게 되어 있다. 변모의 일치는 영혼 안에 관상의 은사가 자연스럽게 자라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십자가의 요한이 그린 그림에는 참으로 많은 것이 암시되어 있다. 성 요한은 베아스 수도원의 수녀들에게 손수그림을 그려 주었고, 수녀들은 각자 그 그림을 성무일도서 안에 소중히 간직했다. 그 방법은 이상을 늘 목전에 두고 성무일도를 바치며 거룩한 시편의 날개를 타고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갈망하며 드높이 오를 때에도, 그 이상을 실현해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십자가의 요한은 자신의 그림을 통해   관상적 영혼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큰 공헌을 한 셈이다.
   유감스럽게도 그 그림은 원형대로 보존되지 못했다. 성 인의 저서를 맨 먼저 출판한 사람이 그림도 함께 소개하기 위해서 그 그림을 어느 예술가에게 맡겨 손보게 하였다. 그런데 그 예술가는 십자가의 요한의 간단한 그림을 변형시켰다. 선으로 표현한 상징적인 산에 언덕과 풀과 꽃을 그려 넣어 실제의 산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아름답게 꾸미려다 오히려 망쳐 버린 셈이 되었다. 그 다음에 출판된 책도 모두 이 초판의 그림을 본보기로 삼았기 때문에, 3세기에 거쳐 공개된 성인의 '산 그림'은 '변형된 산 그림'이 되고 말았다.
   최근에 들어서야 원형대로 돌아간 새로운 그림을 일반 독자에게 선보이게 되었다. 우리도 베아스 가르멜 수녀원 수녀들처럼 이 그림을 기도서 갈피에 끼워 두고 묵상하면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바라는 우리의 이상을 키워 갈수 있겠다.
   그 그림은 우리에게도 다음과 같은 십자가의 요한의 교훈을 거듭 일깨워 줄 것이다 "하나님과 친밀한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완전한 포기의 길을 가야 한다." 피조물에 대해 "무"가 되어야 하나님의 "온전함(穩全)"에 다다를 수 있다. "Nada,無-Todo,全; 무(無)는 전(全), 곧 온전함이다."


완덕의 산.jpg

                 십자가의 요한의 「완덕의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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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