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면 : 초보자에게 아주 유익하오니 꼭 읽어 보시고 묵상의 유익을 얻어 관상에 이르시기를 빕니다.



4 관상적 묵상 사랑의 눈길

 

 

1. 테레사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요한

2. 정적(情的)인 묵상- 마음에서 마음으로

3. 실생활과의 결부

4. 영혼의 관상적 시선-하나님을 바라보다.

      

이제, 마음을 다해 금욕을 실천함으로써 생기는 열정적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상적 일치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영혼은 묵상, 즉 묵상 기도의 수련을 쌓아야 한다.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묵상은 영혼 안에 극기(克己)하려는 결심을 더욱 단호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십자가의 요한은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과의 일치로 이끌어 주는 길, 즉 전부 말끔히 벗어버림의 길에 들어서도록 가르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 우리는 우리 안에 완전한 포기의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본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지녀야 하며,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그리스도께 배우기 위해 그분의 생애를 묵상하고자 하는 큰 소망을 키워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에 넘치는 묵상을 하며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힘과 용기를 얻게 되어, 영혼은 자진해서 그리스도처럼 살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묵상의 가장 중요한 목적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것은 '숨은' 목표라 하겠는데,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 가야할 중간 목표에 먼저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하다. 이 숨은 목표는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묵상에 특수한 성격을 부여하는 것으로, 묵상을 관상에 이르게 하는 입문이 되어 준다. 이 목표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넘치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관상생활의 본질을 설명하는 저술가들은 한결같이 관상적 생활이 실제로 관상을 준비하는 삶이 되게 하려면 두 가지 일, 극기기도, 특히 묵상 기도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묵상이 어떠한 방법으로 영혼을 관상에 다가가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십자가의 요한은 아빌라의 데레사에게 의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점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점에서도 역시 그는 스승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데레사 영성의 신학자다. 그는 개혁 가르멜의 영적 어머니로부터 그 본질적인 것을 받아들이면서 거기에 학문적 체계를 끌어들인 사람이다. 묵상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도 십자가의 요한은 전적으로 아빌라의 데레사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요한의 생각을 더욱 명확히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가르멜의 위대한 성녀의 가르침에 의존하기를 주저하지 않겠다.

 

 

1. 아빌라의 데레사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요한

      

십자가의 요한은 가르멜의 산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을 묵상한다, 추리한다 하는 그 목적이 당신께 대한 어떤 깨침과 사랑을 얻어 내자는 데 있다. "(가르멜의 산길2.14,2)

이 문구야말로 십자가의 요한 식의 묵상의 특별한 역양을 전해 주는 금언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 말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십자가의 요한이 살았던 환경을, 특히 그가 각별히 영감을 받았던 아빌라의 데레사의 생각을 알 필요가 있다.

가르멜의 거룩한 개혁자인 아빌라의 데레사가 마음에 품고 또한 수녀들에게도 해설한 묵상 기도의 개념에서, 성녀는 자신이 기도에 부여한 애정적 성격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성녀에게 기도란 "영혼이 하나님께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분과 자주 친밀하게 나누는 다정한 대화"(데레사 자서전8.5)였다. 결국 기도란 사량을 주고받는 것이다. 영혼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이해하고, 한편 자기도 주님께 사랑을 표시한다. 영혼은 하나님과 이야기하면서, 분명하게 사랑의 초대를 느꼈기 때문에 하나님께 사랑에 대해 말씀드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데레사는 거듭 "기도란 많이 생각하는 일이 아니고 많이 사랑하는 일이다."(영혼의 성4.1,7; 창립사5,2)라고 하면서, 생각하는 일을 사랑보다 못하게 여기라고 강조하고 있다. 물론 묵상 기도 중에도 생각은 하게 되지만, 이는 더 많이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더욱 깊이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테레사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 묵상 기도 중 줄곧 생각만 하며 시간을 보내지 말고, 잠시 머리로 생각한 다음에는 주님께서 자기를 사랑하고 계심을 확신하고 있으니만큼, 추론하기를 멈추고 주님 앞에 고요히 머물면서 주님과 함께 사랑에 넘치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그 대화중에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과 자기 자신, 곧 주님의 영광과 자신을 위해 품고 있는 모든 소망을 말씀드리라고 권한다.

아빌라의 데레사에게는, 바로 이것이 묵상 기도의 본질이다. 따라서 이 위대한 성녀에게 묵상 기도란 '주님과 나누는 사랑에 넘치는 대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개혁 가르멜의 신학자들이나 영성 지도자들은 아빌라의 데레사의 가르침을 체계를 세워서 영혼들에게 더 쉽게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랐다. 이 목적을 위해 그들은 묵상기도가 구체적으로 발전하면서 변화되는 여러 부분이나 다른 순간들을 구별하여 설명하면서, 하나의 작은 묵상 기도 방법을 제시했다. 이 방법이 가르멜의 여러 남녀 수도원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개혁가르멜 시초에 수련자의 교육이란 책에 모두 수록되었다. 초기 가르멜 저술가들은 이 책에 여러 차례 주석을 달았다.

그 기도 방법을 체계화한 사람이 십자가의 요한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십자가의 요한이 그것을 승인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개혁사가 말해 주듯, 수련자의 교육의 인쇄를 허가하는 공문서에서 '검토하고 교정함'에 십자가의 요한이 서명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을 직접 설명한 그의 저서는 한 권도 남아 있지 않다. 십자가의 요한은 다만 자신의 저서에서, 묵상의 영역에서 벗어나 어떻게 점차 관상으로 옮겨 가는지를 설명했을 뿐이다. 십자가의 요한의 전기를 맨 처음 쓴 작가는 이 점에 대해 매우 명백히 말하고 있다. 실제로 예수 마리아의 요셉 키로가 신부는 이 특별한 작은 책에서, 십자가의 요한이 어떤 방법으로 제자들에게 묵상을 가르쳤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는 십자가의 요한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전기를 남겼으며, 또한 성인의 가르침에 대해 많은 반대자가 있었던 시대에 그의 옹호자였다. 키로가 신부의 설명에서, 우리는 아빌라의 데레사의 가족에게는 전통이 된 작은 묵상 기도 방법의 본질을 모두 다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묵상의 실천에 관한 신비 박사의 가르침을 명확하게 다시 체계화하는 데 필요한 모든 기록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제 사실 십자가의 요한에게, 모든 묵상은 영혼을 가장 좋은 방법으로 관상에 이르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넘치는 깨달음에, 그리고 그분과 나누는 사랑에 찬 대화에 마음을 모으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2. 정적(情的)인 묵상 - 마음에서 마음으로

      

순서에 따라 잘 설명하기 위해, 가르멜의 전통적 방법에서 보여 주는 묵상적 기도의 개요를 따르기로 하겠다. 거기서 묵상은 일곱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지며 준비, 독서, 묵상, 대화, 감사, 봉헌, 청원이다. 마지막 세 가지는 자유이며, 처음 두 가지는 준비 단계이다.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묵상과 내적 대화, 또는 대화라는 두 부분만 남게 되므로 복잡하다는 생각이 없어진다. 처음 두 가지 부분, 즉 준비와 독서는 묵상과 내적 대화를 잘할 수 있도록, 심리적으로 가장 좋은 상태가 되도록 준비시킨다. 마지막 세 가지 부분, 즉 감사, 봉헌, 청원은 하나님과 더 길게 대화하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이다.

묵상 기도의 목적을 생각한다면, 독서와 준비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묵상 기도가 결국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 데서 비롯되고 깊어지는,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과의 대화로 끝나는 것이라면, 그런 묵상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한 우리에게 사랑 받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해야한다. 독서는 합당한 제목을 선택해야 하는데, 묵상 책이나 좋아하는 영적 서적이나 전례서, 또는 섭리로 눈에 적게 되는 구절이나 다른 모든 것이 묵상재료가 될 수 있다.

묵상 기도의 본질과 그것을 받쳐 주는 것이 곧 주님과 나누는 사랑의 대화임을 알 때, 우리는 준비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또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쉽게 이해하게 된다. 누구하고 친밀히 이야기하려면, 그가 내 앞에 있어야 한다. 정다운 대화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아주 큰소러로 말해야 한다면 정다움이 가셔 버릴 것이다. 주님과 더불어 사랑이 넘치는 대화를 하기 원하는 영혼 역시 하나님을 자기 곁에 모셔야한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랑이 넘치는 내적 대화로 끝나는 묵상 기도를위한 준비는, 하나님과 만나면서 그분 앞에 머무는 것이다. 하나님이며 사람이신 예수님께서 계시는 성당 감실 안에서 고분을 찾든, 성삼위께서 우리의 동반자로 우리 안에 머무시며 당신들과 함께 지내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계심을 알고 있는 우리 영혼의 지성소에서 그분을 찾든, 바로 그곳에 있어야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는 사랑을 드러내신 가장 거룩한 수난을 생각함으로써 우리의 하나님이신 구세주를 더욱더 사랑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가정해 보자. 복음서의 훌륭한 주해에서 주님께서 견디셨던 가혹한 채찍질 묘사를 읽었다면, 이제 묵상 기도를 시작하는 순간에, 우리는 말씀이신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무르며 자기 영혼 안에서 그분을 흠숭해야 한다. 말씀은 성부와 성령과 함께 참으로 거기에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삼위 일체 중 둘째 위격이시고, 거룩한 세 위격 모두가 우리 안에 거처하신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묵상기도를 잘 시작한 것이다. 키로가 신부는 십자가의 요한이 이것을 어떻게 제자들에게 가르쳤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 아빌라의 데레사의 경우와 같이, 추리야말로 영혼으로 하여금 주님과 사랑이 넘치는 대화를 시작하게 해 준다.

수난의 신비에 대한 추리나 성찰은 상상력으로 쉽게 재현해 볼 수도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어떻든 복음의 주해를 읽은 사람이라면 채찍질의 장면을 누구나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상상을 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은, 예수님의 그림을 손에 들고 보면서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그 신비를 '내적으로' 재현해 볼 수 있는 영혼이라면, 그렇게 재현해 보면 좋다. 그러나 십자가의 요한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거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지 말라는 것과 또한 정확하고 세부적인 상상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무엇을 재현해 보든 간에, 그 상상을 고정시켜 추리를 쉽게 할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 시간을 더 쓸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영혼 안에서 육화되신 말씀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깊이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충분히 써야한다.

십자가의 요한도 아빌라의 데레사처럼, 구세주께서 매 맞으시던 참혹한 장면을 자주 상상해 본 것 같다. 두 사람이 다 그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묵상할 때 추리를 좀 더 쉽게 하도록 작은 질문지를 만들어서 권했던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는데, 그 질문지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통 받으시는 분은 누구인가? 무엇으로 고통 받으시는가? 고통 받으시는가? 어떻게 고통 받으시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자연스럽게 나오는 대답들은 분명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깊은 확신을 갖도록 이끄는 데 적합한 것이 다.

'고통 받으시는 분은 누구민가?'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취하시고, 우리의 죄를 기워 갚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삼위일체 중 둘째 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거룩한 말씀이시다.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사람이 되시고‥‥ 저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딘"(신경) 그분이 바로 나를 위해 사람이 되신 나의 하나님이다.

'무엇으로 고통 받으시는가?' 로마인의 잔인한 매질, 납과 가죽으로 얽은 보기에도 소름 끼치는 채찍은 보드라운 살을 찢어 갈기갈기 상처 내고, 맞으실 때마다 늘어나는 수많은 상처에서 흐르는 피는 순식간에 온몸을 뒤덮고 만다.

'왜 고통 받으시는가?' '왜 성부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셨으며, 성자는 왜 그것을 승낙하셨는가?'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그 잔혹한 고통으로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어 구원과 성화의 길을 다시 찾아 주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희생되셨다. 또한 우리도 주님을 위해 무언가 고통을 겪을수 있도록 하시려고 우리의 모범이 되어 주시고 인내의 본보기가 되신 것이다.

'어떻게 고통 받으시는가?' 죽기까지 고통 받으시면서도 끝내 침묵하셨으며, 매도 피하려고 하지 않으신 이 '가장 인내로운 어린양'을 보아라. 이런 고통을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신 것은 참으로 우리를 위해 고통 당하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고, 또한 아낌없는 헌신의 모범을 보여 주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아드님께서는 우리를 참으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요!

자신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처럼 깊이 자각한 영혼은 자연히 사랑을 고백하게 되지 않겠는가? 자기도 사랑하고 싶다고, 사랑에 사랑으로, 아낌없는 헌신에 아낌없는 헌신으로 보답하고 싶다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고뇌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 주님께 사랑으로 보답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어 그것을 말씀드리지 않고는 옷 배기게 된다. , 영혼은 주님께 말씀드려야만 한다! 이제 영혼은 주님과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이토록 저를 사랑하셨기에 저도 주님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이제까지 너무도 조금 밖에 사량하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뉘우칩니다. 하지만 주님, 앞으로는 당신을 더욱 사랑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사랑에 저 자신을 바치고 싶습니다. 당신을 끊임없이 더욱 깊이 사랑하고 싶습니다. 당신 성심께 가는 길, 사랑에서 진보하는 길을 열어 주셨으니 저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저는 때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끓임 없이 진보하기를 바라며, 저의 사랑이 말로만 그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의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면서 저를 온전히 바쳐 주님을 섬기고 싶습니다!"

영혼은 이런 사람의 표현을 아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끊임없이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사량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다. 영성 생활에서 아직도 감수성 이 큰 역할을 하면서 영혼에게 그런 특별한 색조를 띠게 하는 한, 그러한 표현을 자주 말로 표현하며, 또한 소리를 내어 말하게 된다.

그러나 영성 생활이 진보함에 따라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제는 의지가 감수성을 더욱 지배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비록 사랑이 민감한 마음에 어느정도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사랑의 표현 방법 이 덜 충동적이고 덜 요란스럽게 되며, 자주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 대신 더욱 깊이를 지니게 된다. 그때 영혼은 사랑을 더욱 평온하게 표현하나 주님께 향하는 의지의 움직임은 훨씬 확고하고 진지해진다. 이제 영혼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어 그분을, 사람이 되신 말씀을 늘 주시하게 된다. 이때 영혼은 더 이상 깊이 지적 추리를 하지 않으며, 깊이 생각하면서 '찾지도 않고, 그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이미 '깨달았으므로', 이제는 사랑 때문에 고통 받으시고 사랑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직관적 눈길로 찾아낸 그 열매를 맛보며 음미하게 친다. 키로가 신부가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을 해설하듯, '영혼은 하나의 사랑의 행위 안에서 충실하게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짧은 순간이지만, 영혼은 일종의 사랑이 넘치는 눈길로 하나님을 주시할 수 있게 된다. 어떤 복잡함도 소란스련 행위도 없이, 매우 단순하게, 하지만 또한 진정한 깊이를 지니면서, 영혼은 고요한 그러나 강렬한 사랑의 움직임 속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열중하게 된다.

그 상태에서는 특히, 키로가 신부의 말처럼,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가 되며, 영혼이 하나님께 말씀드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영혼과 더불어 말씀을 나누신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에게 빛을 주시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만물 위에 사랑받으셔야 마땅한 분임을 더욱 깊이 깨닫게 해 주신다. 또한 영혼에게 사랑의 힘을 주시어 사랑하도록 도와주신다.

이처럼 의지가 충심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대화, 즉 하나님의 온화하심에 눈길을 모음으로써 계속되는 내적 대화야말로, 십자가의 요한에게 있어서, 묵상기도의 참된 목적이며 결과이다. 다음과 같은 십자가의 요한의 말로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을 묵상하는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넘치는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이다."(갈멜의 산길2.14,2)

    

 

3. 실생활과의 결부 

 

묵상 기도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며 ,또 적어도 여기서 끝내서도 안된다. 기도가 영성 생활에서 충분한 효력을 발휘하려면, 일상생활에 실제적으로 영향을 주어야한다. , 실생활에서 덕행과 극기를 꾸준하게 철저히 실천하는 좋은 습관을 기르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십자가의 요한은, 사랑이 우리를 재촉해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싶게 되어 그분의 모범을 묵상함으로써, 우리도 철저한 포기를 통해 우리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갈 것을 권한다.

그처럼 무섭게 매 맞으심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해 더욱 큰 사랑을 느끼게 된다.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고통을 받아들이고 견디어 내신 그 인내, 그 철저한 현신에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랑에 감동되어 '주님처럼 살려고 원하게' 된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실제적으로 극기를 결심하도록 자극을 받는 순간이다. 묵상 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이러한 실제적 결의를 다지고 더욱 확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묵상 기도의 둘째 부분은 반드시 이어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이 부분은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언제나 똑같은 식으로 묵상하게 되는 것이 아니며, 때로는 지금까지의 묵상 기도 중 여러 번 마음으로 다짐한 실제적 결의를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하는 것으로 묵상을 마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묵상 중 거의 모든 시간을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소망에서 주님과 사랑을 다하여 이야기하며 보낸 후, 기도 끝부분에는, 실제적인 결론을 내릴 생각으로 그 결심을 새롭게 하게 된다. 그런 다음 이 결심을 실현할 기회를 많이 만나게 될 일상의 일과로 돌아간다. 영혼이 일단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정말로 무엇을 요구하고 계시는지 알고, 주님과 사랑에 넘치는 대화를 쉽게 할 수 있게 되면, 위에 말한 것과 같은 순서로 묵상해도 아무 상관없다.

그렇지만 모든 영혼이 똑같은 자질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특히 초기에는 더욱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만일 하나님과 사랑에 대해서만 말하기위해 멈추고 싶어 해야 한다면, 이내 게을러지거나 싫증을 느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또는 '주님을 사랑하고 싶습니다.'라고 거듭 되풀이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싫증내시지 않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같은 말을 거듭하는 것에 싫증을 낸다. 여기에 영혼 측의 어려움이 있다. 계속 집중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가끔 약간의 변화가 필요하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릴 말씀이 몇 가지 있게 되면, 주님과 정답게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 더욱 쉽게 된다. 바로 이 점을 돕기 위해, 십자가의 요한이 인정한 데레사적 묵상 방법에서는 감사와 봉헌과 청원이라는 마지막 세 가지부분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계속 이야기하는 동안, 영혼은 또한 가장 아름다운 자극을 받게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극기를 더욱 열성껏 실천하고 싶어지고, 그리스도의 가장 거룩한 수만을 묵상하면서 얻게된 더욱 강렬한 사랑을 힘껏 실천하고 싶어진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고통당하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묵상하면서 사랑에서 우리나오는 말을 거듭 말씀드리고 나면, 영혼은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그러한 사랑의 고백에이어 저절로 감사의 행위를 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예수님께 우리를 위해 그처럼 많은 고통을 당하기를 원하신 것을 감사드리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거룩한 수단을 통해 얻어 주신 은총에 대해서도 감사드리게 된다. ,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서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분의 자녀가 되어, 우리의 영혼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며 살 수 있게 된 그 엄청난 행운을 감사드리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덕분이다. 이 은총에 관해서는,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함께 누리고 있는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감사드릴 수 있다. 여기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동된 고결한 영혼은 오랫동안기쁨에 잠길 수 있게 된다.

고결한 마음은 자신이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그 은혜에 보답해야겠다고 느낀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에서 자연히 무언가 바쳐야할 의무와 그러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이때야말로 좋은 결심을 한다든가, 아니면 결심한 것들을 돌이켜 보며 잘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때이다. 막연히 '주님을 섬기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것만으로는 흡족해 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현재 생활에서 어떤 결심을 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일치되기를 바라는 영혼이 해야 할 실천은 참으로 엄청나다! "보다 쉬운 것보다 보다 어려운 것을, 보다 즐거운 것보다 차라리 덜 즐거운 것"을 택하기 위해, 즉 온갖 집착에서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엄격한 힘든 고행을 받아들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에서 떠나야 하며 얼마나 많은 힘을 쏟아야 하겠는가! 영혼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셨으며, 자기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셨는가를 깊이 깨닫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당신의 행복과 건강과 생명까지도 내 영혼을 위해 다 버리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포기하겠다는 용기가 솟구치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다! 영혼은 자신의 지향을 깨끗하게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모든 일을 예수님과 성부님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애랄 것이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영예와 영광만을 위해서 살고싶어질 것이다.

그래서 영혼은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는 장애물들을 모두 없애 버리기로 결심한다. , 하나님의 툴에 맞지 않는 즐거움, 지나치게 감각적인 만족에 대한 집착, 안락을 무절제하게 추구하는 데서 생기는 물건에 대한 애착, 다른 사람의 결점을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어 이웃과 충돌하고 무례하게 굴고 불평하면서 종종 애덕을 실천하지 못하게 하는 자애심을 없애기로 결심한다.

그는 말할 것이다. '이토록 나를 사량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린 것들을 다 싫어하신다! 예수님 친히 완전한 포기의 표양을 보여 주셨는데, 내 영혼을 위해서 당하신 그 고통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예수님께 많은 사랑으로 보답하고 싶고, 나 자신의 성화를 위해 나를 버리고 예수님과의 완전한 일치에 이르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혼은 경험을 통해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있으며,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좋은 결심만으로 부족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 결심들을 꾸준히 충실하게 지켜야 하는데,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초자연적인 일이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은총 생활에 관한 문제이다. 영혼은 예수님께서 "나 없이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15:5)라고 가르쳐 주신 것을 잊지 않고 있다. 거룩한 삶에서 진보하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바로 이것을 하나님께 청해야 한다. 주님께서도 "청하시오,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두드리시오, 여러분에게 열어 주실 것입니다."(7:7)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영혼은 주님의 문을 두드리면서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주님 없이는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간청한다. 지난날의 나약함을, 유혹에 빠졌던 경우를 돌이켜보떤서, '주님, 제 영혼을 굳세게 해주십시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6:13)라고 간청한다. 영혼은 자신을 위해서 청하지만, 애덕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간청하도록 촉구한다. , 그가 돌봐야 할 영혼들을 위해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 죄인들, 임종자들, 죽은 이들, 사제들, 조국, 교회를 위해서도 청한다. 하나님께 청할 것이 너무도 많다. 영혼은 자신이 주님께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고 있기에, 이제 사랑이 충만한 분위기 속에서 주님께 청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힘 있는 도우심을 확신하면서 깊이 신뢰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말씀드리게 된다.

    

 

4. 영혼의 관상적 시선-하나님을 바라보다

     

감사, 봉헌, 청원으로 이루어진 이 모든 사랑의 대화는 결국 실제적으로 사랑의 생활을 하도록 준비시켜, 영혼은 실생활에서 관대한 행위를 통해 사랑을 보여 주기 시작한다. 또한 이러한 대화는 묵상의 결과로 지니게 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눈길을 더욱 정겨워지게 한다. 또한 지금까지 묵상한 개념을 통해 더욱 풍요로워진 지적인 눈으로 바라보며 나누는 육화하신 말씀과의 친밀한 대화를 한층 깊어지게 해 준다. 영혼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기로 다짐하면서 그의 의지를 온 힘을 다해 그분께 향하게 한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넘치는 깨달음을 통해서, 영혼은 그에게 필요한 몇 가지 실제적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음에서 솟구치는 사랑에 힘입어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 결심을 더욱 철저히 실천하고자 한다. 한편, 더욱 너그러워지려고 하는 이러한 노력은 주님께 대한 사랑을 더욱 자라게 해 준다. 이러한 노력은 마음속에 더더욱 사랑의 불을 당겨 주며, 계속 하나님의 벗으로 지내고 싶은 내밀한 소망을 마음 깊이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실제로 묵상 기도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넘치는 깨달음을 얻으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랑에 깊이 잠긴 영혼이 사랑에 넘치는 눈길로 바라보며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묵상 기도에 이중의 목적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하나님과 친밀한 대화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영혼은 마음속에서 주님께 말씀드리고 또한 하나님께서도 영혼에게 말씀하신다. 둘째는 철저한 포기를 통해 의지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둘째 목적은 첫째 목적을 통해 도달하게 된다. 포기를 실천하기 위해 너그럽게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하는 것 또한 더욱 굳세고 진지한 의지로 주님께 그의 사랑을 증명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요한은 묵상 기도의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은 뜻깊은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을 묵상하는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넘치는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이다."(갈멜의 산길2.14,2)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사랑에 넘치는 깨달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신비를 마음모아 깊이 헤아려 봄으로써, 지금까지 하나님을 사랑했던 것보다 더욱 사랑하고 싶다고 느끼게 하는 묵상끝에 오게 되는, 오히려 고요하고 평온한 영성적 마블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오히려 고요하고 평온한' 자세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추리를 멈추기 때문이다. 이제는 주님께 향하는 단순한 사랑의 눈길에 그 자리를 내어 주기 위해서이다. 지금까지의 묵상을 통해 그분의 선하심을 더욱더 깊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묵상하는 것이 이미 익숙해진 영혼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고 하겠는데, 그때는 주님과 나누기 시작하는 내적 대화 역시 매우고요하며, 많은 말을 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마음이나 의지의 단순한 움직임으로 점차 '주님의 사랑의 반려자'가 되는 것이다. 영혼은 사랑에 넘치는 눈길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비추어 주시며 당신께 가까이 끌어당기심으로써 이 소러 없는 사랑의 언어에 응답해 주신다.

십자가의 요한은 가르멜의 산길에서, 이러한 사랑에 넘치는 깨달음의 행위가 영혼을 관상에 이르도록 준비시켜 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는 매번 조금씩 사랑의 눈길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익숙해지게 해 주기 때문이다. 좋은 묵상은 종종 하나님과 사랑의 대화를 하는 행복한 순간을 갖게 해 준다고 성인은 설명한다. 이러한 순간은 지나가 버리지만 반복되면서, 서서히 영혼 안에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함께 머무는 습성이 생기게 한다. 따라서 영혼은 어도 자신의 힘으로 가능한 수준의 관상적 기다림을 어느 정도 배우게 된다. 심리적으로 관상적 시선을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욱 앞으로 나아가려면, 우리는 또한 주님의 중재가 필요하다. 사실주님께서 그 영혼을 만나러 오셔서 그의 갈망을 채워 주실 것이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많은 이들이 전혀 예기치 않은 식으로, 즉 영혼 안에 위기를, 무미건조함이라는 괴로운 위기를 겪게 하시면서 그를 만나러 오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편에서 하시는 일이다. 다음 장에서는 그것을 살펴보겠다. 이제까지 영혼이 어떤 식으로 자신의 몫을 하는지를 보았다. , '관상적' 묵상이라고 하는 사랑에 넘치는 묵상을 통해 영혼은 스스로 관상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4 관상적 묵상(성요한의 가르침).hwp





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