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메마름

      

"영혼이 하나님을 찾는다면, 자기 신랑이신 하나님께서 훨씬 더 많이(먼저) 영혼을 찾으신다."(사랑의 산 불꽃3,28)

신비 박사인 십자가의 요한의 사랑의 산 불꽃에 나오는 이 구절은 참으로 우리에게 격려가 된다. 이 구절은 십자가의 요한만의 독특한 표현은 아니지만, 성인은 이 위로가 되는 말을 명백하게 표현해서 감동적인 방식으로 거듭 들려준다. , 우리의 성화는 우리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주로 주님의 일이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하시는 그 일을 그대로 견디고 받아들이며 잘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영혼이 이 말을 바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처럼 하나님께서 영혼에게 다가오시는 것을, 즉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의 마음을 찾으러 오시는 것을, 우리를 위로와 격려로 채워 주시려는 뜻으로 성급하게 믿어 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잘못 이해한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이 위안이라는 단어를 쓴 의도는 위로의 정반대인 소위 메마름이라는 아주 다른 영적 생활의 현상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거기에서 말하는 현상은 특수한 행복감, 즉 내면의 고요와 만족감을 느끼는 시기가 지나고 나면, 이미 전부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관대하게 자신을 바쳐 온 영혼은 갑자기 큰 고통과 용기를 잃게 하는 유혹에 부닥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본다면, 주님께서는 감미로움이 아니라 시련을 가지고 우리를 만나러 오신다는 것에 놀라지 않게 될 것이다. 사실 4(관상적 묵상)에서 이미 알아들었듯이, 하나님과 완전한 일치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분 안에서 온전히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갖 집착에서 벗어나는 완전한 정화가 요구된다. 십자가의 요한의 생각으로는, 영혼이 그러한 정화를 혼자 힘만으로는 도저히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 작업에 친히 손을 대시어, 스스로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해방시킬 수 없는 집착에서 우리를 떼어 놓아 주셔야만 한다. 우리의 자애심은 너무도 교묘하게 편법을 써서 은밀하게 동의하도록 몰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속속들이 다 파헤칠 수가 없다. 또한 이 편법은 우리의 일과 기도까지도 오염시킨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정말 기도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만사가 잘 되어 가면 어느새 우리는 조금이라도 만족과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위로나 격려를 찾게 되기가 매우 쉽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이 당신을 사랑하기로 굳게 결심하면서, 특히 포기와 묵상 기도를 철저히 할 것을 다짐하는 모습을 보실 때, 그를 이러한 나약함이나 유치함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원하신다. 이련 영혼들은 주님께 매우 관대하며, 인색한 법 이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영적 생활의 더 높은 계획을 소개해 주시고자 그들을 만나러 오신다. 바로 그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메마른 상태에 빠지게 만드시는 것이다.

     

 

메마름의 본질 


메마른 상태라는 말은 영성 생활에서 가끔 경험하는 위로와 즐거움이 사라져 버린 상태, 특히 기도가 모호하고 어두우며 차가워지는 때를 말한다.

영혼이 하나님께 향하며 마음을 바로잡을 때, 흔히 처음에는 어떤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마음을 바로 잡는다'는 말은 지난 죄에서 다시 일어나 은총 생활로 돌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착한 영혼이 이제까지 목적 없이 정신을 흩뜨리고 지낸 것을 뉘우치며 완덕의 삶에 전념하려고 결심하는 때도 포함한다.

사람이 어떤 값진 보화를 지니고 있는 것을 자각할 때 기쁨이 솟구친다는 것은 심리학적인 법칙이다. 더욱 완전한 생활을 하기로 마음을 돌이킨 영혼이 자신의 현재 생활을 지난날과 비교해 보면서, 전에는 허영에 들떠 경박하고 속된 생활로 허송세월해 왔으나, 지금은 주님을 섬기고 기도와 애덕으로 다른 영혼과 교회에 도움이 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 이처럼 자신이 전에는 지니지 못했던 큰 보화를 얻은 것을 보면서 영혼은 어떤 기쁨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보화는 마음의 의지가 되어 주며, 그의 정신생활에 평온함과 기쁨이 감돌게 해 준다.

마찬가지로, 영혼은 기도 중에 많은 위로를 느끼며, 기도하면서 주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 쉬워진다.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여러 가지 아름다운 생각이 떠오르며 그의 의지를 움직여 마음을 감동케 하는 한편, 사랑의 말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영혼은 더없이 상냥하고 다정하게 주님과 이야기하면서 많은 위로를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묵상 기도를 하는 것이 그에게 결코 부담이 되지 않는다! 묵상 기도를 기쁘게 바치는 것은 분명 주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거기서 찾게 되는 만족감에 이끌려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바로 여기에 우리가 지닌 나약함, 즉 지향의 순수성을 어떤 식으로 오염시키는, 소위 자기만족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쉽게 끼어들게 된다. 그때 주님께서는 이러한 비참함에서 영혼을 건져 주시고자 메마른 상태에 빠지게 하시는 것이다.

영혼은 위로에 넘치는 묵상을 하면서 주님과 다정한 대화를 나누며 지내는 데 익숙해 있다가, 어느 날 상황이 완전히 바뀐 것을 깨닫는다. 여느 때처럼 마음을 준비하고 기쁘게 교회에 가기는 하지만, 일단 기도하려고 하나님 앞에 머무르면, 이제는 좀처럼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그분과 전혀 만날 수 없게 되는 것 같다. 독서의 주제와 묵상의 요점을 생각하면서 깊이 묵상해 보려고 애쓰지만, 요점을 이해하기가 어렵게 된다. 이제는 심오한 뜻을 파고드는 힘을 모두 잃어버린 것만 같다. 생각이라고는 없어지고 점점 희미해지면서 정신은 거의 공백 상태가 되고 만다. 종종 상상이 동요되고 혼란스럽게 되어 마음이 흩어지는 데서 오는 고통이 한층 심해진다.

사랑의 감정도 그와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된다. 영혼은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해 보려고 하지만, 여느 때처럼 다정하지도 않고 마음이 굳어 있음을 발견한다. 다만 순수한의지의 행위로 사랑을 표시할 따름이고, 그러더라도 마음에서는 전혀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 꽃피는 봄이 어둡고 추운 겨울로 변한 것만 같다.

영혼은 약간 놀라기는 하면서도, '참자! 내일은 좋아질 테지.'하고 용기를 낸다. 그러나 다음 날 그토록 정성껏 마음을 준비하는데도 똑같은 어려움에 부딪치고, 그 다음 날에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이제까지는 영성 생활에서 많은 도움을 받으며 큰 기대 속에 아름다운 희망을 키워 가고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한 말인가? 그는 몹시 걱정이 되어 영성 지도자를 찾아가 자신의 처지를 설명한다. 지도자는 그에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메마름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해 준다.

   


메마름의 원인

 

십자가의 요한은 메마름이라는 주제를 특별히 깊이 있게 상세히 다루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이 너무 엄격해서 용기를 잃게 된다고 하는데, 그 주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이 설명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정반대로 십자가의 요한은 괴로워하는 영혼에게 큰 위로를 주고 있다. 왜냐하면 성인은 그 시련 속에 큰 은혜가 숨겨져 있으며, 곁으로는 퇴보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영성 생활의 더 높은 단계로 부름받고 있음을 알아듣게 해 주기 때문이다. 메마름을 주님께서 보내 주신 경우에 그것은 틀림없는 어떤 진보의 수단이 된다.

그러나 이 메마름이 과연 주님에게서 오는 것일까?

이 질문을 제일 먼저 살펴보아야 하겠다. 왜냐하면 메마름은 여러 가지 원인에서 오는 것으로 그중에는 좋지 않은 원인도 있기 때문이다. 영혼은 차분하게 지내기 위해서 그런 원인들이 과연 자신과 아무 관련이 없는지 확인해 봐야한다. 그 원인을 잘 분석해 볼 수 있도록, 십자가의 요한은 그 메마름이 주님께서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 보내신 것인지를 식별하는 '세 가지 표징'을 말해 주고 있다.

이 유명한 '세 가지 표징'은 십자가의 요한이 스스로 발견한 것이 아니며, 이미 예로부터 영성의 전통으로 전해 내려왔고 이른바 '타울러(Tauler)의 가르침'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에서 특별한중요성을 지니는 이유는, 성인이 이 표징들을 깊이 연구한 후에 정리했기 때문이다. 성인은 영혼이 묵상에서 관상으로, 또한 아직 감각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던 내적 생활에서 더욱 순수한 영적 생활로 옮겨가는 미묘한 상태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두 번이나 그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가르멜의 산길에서는, 이미 메마름의 위기를 지나 온 영혼이 들어서게 되는 새로운 길, 즉 주님과 만나는 새로운 방법을 확실히 알게 해 주기 위해 이 세 가지 표징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어둔 밤에서는 그와 달리, 그 위기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경우임을 식별하기 위해 이 표징들을 사용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이 표징들은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으로, 위에 말한 두 곳에서 경우에 따라 약간 다르게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십자가의 요한은 이 표징을 사용해서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닌 다른 원인에서 오는 모든 영향을 없애 버리도록 권고한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영향은 그 시련을 통해 오직 위안과 도움을 받게 한다. 문제는 이처럼 메마른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을 당연한 현상으로 만드는 조금도 바람직하지 않은 이 원인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 자기 자신의 결함, 열의의 부족, 정신물리학적으로 균형을 잃은 상태, 육체적인 불안감 등 이른바 우리의 정신적 기능에 영향을 끼쳐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도록 방해하는 원인들을 말한다. 첫째 표징은 자신의 결함 때문에 생기는 영향을 식별해서 제거하게 한다.

유감스럽게도 영혼은 이따금 자기 과실로 메마른 상태에 빠지게 된다. 사실 얼마동안은 영성 생활에 전념하다가 불충실하게 되어 꾸준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뜻하지 않게 부딪치는 나약한 순간에 대해서가 아니다. 그런 경우에는 그 순간이 지나면 즉시 뉘우치면서 어느 때보다 굳은 의지로 더 덕을 닦으려고 분발할 것이다. 여기서는 영혼이 거듭해서 고의적으로 범하는 잘못에 대해 말하고 있다. , 전에는 철저한 포기의 길로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힘껏 싸워 이기려고 결심했던 악이나 결함에 데해 잘 알면서도 자진해서 거기에 끌려가며 범하게 되는 잘못을 말하는 것이다.

일찍이 영혼은 더 이상 자기만족을 찾지 않고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기 위해서 욕망을 억제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지쳐 버렸고, 자신의 본성에게는 계속 '아니오' 하고 주님께만 '' 하기가 무척 어렵게 느껴진다. 그래서 마침내 즐거움을 찾으려는 강한 욕구에 응하기 시작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이제는 거절할 용기가 없어진다. 처음에는 그저 작은 문제였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인내, 애덕, 겸손 등은 조금도 거스르지 않도록 충분히 혀를 다스리기로, 또는 선심 활동에 빠지지 않고 모든 임무를 정좌하고 충실하게 수행하기로 다짐했으면서도, 말을 많이 하며 자제하지 않는 것이다. 극기를 끊임없이 충실하게 실천한 덕으로 자애심을 억제하는 데 성공하여 이런 욕구가 약간 잠잠해쳤을 뿐이지, 아직 죽지는 않은 것이다. 그것은 강한 내구력을 지녀서 진정시킨 것 같지만 조금만 먹이를 주면 즉시 깨어나 힘을 회복하고 이린 저런 요구를 해 온다. 따라서 영혼은 다시 미끄러지기 시작하게 된다.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기로 결심한 착한 영혼이, 강아지가 자기가 토한 것을 다시 먹듯이, 한때 즐기던 보잘 것 없는 만족을 찾으며 알면서도 일부러 거기로 되돌아감으로써 범하는 잘못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이런 잘못을 결코 다시는 범하지 않도록 얼마나 조심하겠는가! 욕망과 맞서서 치러야 할 희생은 크다. 왜냐하면 즐기고 싶은 강한 욕망이 다시 깨어나면, 거기에 지배되어 즐기고 싶은 마음에서 소죄를 범하는 것도 피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게 소죄를 범하기는 쉽다. 착한 영혼들에게도 종종 그런 일이 생기지만, 즉시 뉘우치고 다시 일어나 두 번 다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전보다 더 조심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두 눈을 뜨고 충분히 알면서도 소죄를 고의로 범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영혼은 주님께서 그런 행동과 이런 몸짓과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똑같은 행위를 해 버린다. 십자가의 요한이 잘 지적하듯, 영혼이 그런 잘못을 범하게 될 때 스스로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고, 그 타격으로 다시 지상의 것에 집착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게 된다. 영혼은 거기에 다시 마음을 사로잡히게 되어 정신없이 그 유혹에 빠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또 다시 지상의 것을 추구하게 되면, 영혼은 더 이상 이전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게 되고 결국 메마름에 빠지고 만다. 이러한 영혼의 메마름은 확실히 하나님에게서 온 것일 수 없다.

그린데 지금 여기서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고 있는 영혼은 뜻하지 않게 불시에 잘못을 범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온전히 자기를 바치려고 굳게 결심하고 있는 영혼이다. 그러므로 메마름이 자기 잘못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첫째 표징, "하나님의 일들에서 아무런 위로나 기쁨()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피조물에게서도 역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감각적 욕구에서 정화시키고 닦아내기 위해 어두운 밤에 넣어주셨기 때문에 영혼이 무엇에 유혹을 느끼거나 기쁨을 찾지 못하게 된다.(어둔 밤1.9,2. 방효익 역, 좀 더 자세히 알기 원하면 pp.61~68. '9장 징표들에 대하여'를 찾아 읽기를 바람. 이하 같음) 또 다른 번역에서는; “하나님의 일들에서 맛과 위로를 얻지 못하는 것처럼 피조물에게서도 아무런 낙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마름에 처한 영혼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그러니까 이제는 피조물에게 돌아가야만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는 없다. 영혼은 여전히 지상 것에서 마음을 떼기로 굳게 결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 중에도 기쁨을 느끼지 않지만 피조물에게서도 아무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만일 하나님께 충실하지 않게 되고 피조물에게 돌아갔기 때문에 이처럼 메마름에 빠지게 되었다면, 자연히 지상 것에 훨씬 마음이 끌리며 즐기고 싶어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알고서도 거듭 범하는 잘못의 슬픈 결과는, 말하자면 열의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섬기도록 자극하는 모든 추진력을 잃게 되어 일종의 편리한 무관심에 빠져 버리게 된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에 더 이상 마음을 쓰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사실 알고서 범하는 소죄는 신학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자비로운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열정에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추진력을 감소시키는 특성이 있다. 그리고 그 열의가 점점 감소될 때 마침내 아주 소멸되고 말 것이다. 이 열의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싶어 하도록 재촉하는데도 영혼은 고의적으로 소죄를 범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다. 이 두 움직임은 서로 상반된 것이어서, 만일 소죄가 거듭되면 결국 그 영향에 지배되어 미지근한 상태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열의가 없어진 영혼은 악에 대한 저항력이 매우 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의 여정에서 어떤 큰 유혹에 부딪치게 되면, 그것을 물리칠 충분한 용기와 힘이 부족하게 된다.

따라서 가틀릭 교리가, 알고도 범하는 소죄는 영혼이 더 큰 죄를 범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고 가르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소죄를 거듭하게 되면 계속해서 하나님께 대해 무감각해지게 되고 그분을 섬기는 일에 대해서도 무관심해지게 된다. 그러므로 열의가 식은 영혼이 곧 메마른 영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메마름에서는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둘째 징표"영혼이 하나님께 대한 기억을 살려내기 위하여 마음을 쓰게 되고 고통스러운 근심과 함께 이루어지는데 마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옛날의 결함들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생각되면서 하나님의 일들에서조차 아무런 느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하나님의 일에서 맛을 못 느끼더라도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서 퇴보한 거라 믿고 행여 하나님을 잊을세라 애타게 찾음이다)."(어둔밤1.9,3)라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정말 미지근함에 떨어진 영혼이라면,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있다는 생각에 늘 두려워하며 걱정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영혼이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생각으로 계속 애가 탄다면, 이 메마름이 열심치 못한 데서 온 것이 아니라는 뚜렷한 표시이다. 따라서 이 둘째원인은 해당되지 않는다.

자연스런 메마름의 셋째 원인은, 정신물리학적인 불편함에서 오는 영향으로 생기게 되는데, 성인은 그 당시의 용어인 '우울증'이라든가 이와 비슷한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모든 불편함 안에 넣을 수 있는 것은, 그자체로 보아서는 가벼운 것이지만, 영혼을 무디고 침체되게 하고 싫증을 느끼게 하여 정신적 능력의 활동을 방해하는 원인이 된다. 예를 들면 격심한 피로감, 소화불량에서 오는 별난 무기력감, 견디기 어려운 졸음, 머리를 띵하게 하는 심한 감기, 숨 막히는 더위 등이다. 이런 불편한 상태는 모두 근본적으로 육체적인 것이지만, 정신생활에도 반영된다. 왜냐하면 어느정도 정신력을 가지고 추리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무척 더운 여름 밤, 잠도 제대로 못 이룬 데다가 공기까지 무겁고 답답할 때 아침 일책 기도하기로 진지하게 결심하고서 교회에 갔다고 하자. 기도 중에 잠이 오는 것은 피치 못할 일일 것이다. 확실히 이런 때는 그다지 신심이 우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경우 그대로 있으면 잠이 드는 것이 당연하므로, 졸음과 힘껏 싸웠다고 가정하자. 만일 그처럼 싸웠다면 기도를 제대로 못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때 주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그분께 "말로 표현" 하기 보다는 "보여 드리는" 것이다. 졸음과 싸우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경우에는 기도에서 크게 위로를 느끼지 못하고, 분명 마음의 심한 메마름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다음 날 잘 쉰다면 또 쉽게 기도할 수 있고, 마음의 메마름도 사라져 버리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기능의 자발적인 활동을 일시적으로 방해하는 여러 가지 육체적 원인들이란 실은 모두 이와 비슷비슷한 것이다. 그런 어려움은 오다가다 어느새 없어지는 성질의 것이어서, 그런 원인으로 오는 메마른 상태 역시일시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영혼의 정화를 위한 메마른 상태는 이처럼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이 메마름은 영혼 안에 깊이 자리를 잡는다. 물론 처음에는 다소 차이가 있어 어떤 날은 심하고 어떤 날은 약하지만. 이처럼 더하고 덜한 상태를 반복하다가 서서히 영혼 전체에 번져 마침내 묵상을 전혀 못하게 만든다.

여기에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감각의 정화를 알아차리게 하는 셋째 표징이 있다. "영혼이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서 무엇을 해보려고 한들 상상의 감각 안에서는 더 이상 사색을 할 수도 묵상을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아무리 자기편에서 할일을 다해도 그전처럼 상상의 감각으로 묵상이나 추리를 도무지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전에 개념들을 종합하거나 분석하는 사색을 통해서 하던 것처럼 감각을 통해서 영혼과 사귀셨으나 이제는 더 이상 감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정신을 통해서 사귀신다. 여기서 영혼은 사색에 들어가지도 않고 점진적으로 단순한 관상행위를 통해 하나님과 사귀게 된다. 이제 영혼의 낮은 부분의 내적이고 외적인 감각으로는 관상에 이를 수 없다. 결과적으로 상상이나 환상의 어떤 생각을 하기 위해 더 이상 기댈 곳이라고는 없으며 더 이상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지 못할 것이다.(어둔 밤1.9,8) 또한 십자가의 요한은 이런 능력의 상실은 점차 계속적인 것이 되고, 마침내 영혼을 참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게 한다고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메마름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지금까지 말해 온 메마름에서 우리 탓으로 오는 것과 자연적인 여러 원인에서 오는 것을 제외한 다음, 그 메마름이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것임을 식별하기 위해 우리는 십자가의 요한에게서 크나큰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성인은 이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 시련 안에 하나님의 크나큰 호의가 숨겨져 있음을 알려 준다. 십자가의 요한은 어떤 어려움을 만났을 때, '참고 견디자!'고 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 메마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통해 도움을 받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펼치시려는 그 일이이루어지도록 협조하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성인은 가르쳐 주고 있다.

십자가의 요한은 주님께서 우리를 정화시키는 메마름을 보내시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 시련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묵상에서 관상으로 옮겨가게 하신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더구나 이 메마름을 겪는 중에 비로소 관상에 들어가게 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조금 놀라게 된다. 메마름에 대해 말하다가 왜 관상을 다루는 것일까? 관상이란 이제까지 어떤 형태의 기도에서도 밀리 있는 듯싶었다. 이제 영적 생활도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 보이는데, 어째서 십자가의 요한은 하나님께서 지금 그 가장 높은 은혜를 주시려 한다고 믿게 하려는 것일까?

먼저 우리는 성인의 주장을 편견 없이 적절한 관계 속에서 이해하도록 노력하자. 관상을 즐기게 되는 것은 탈혼상태에 들어가는 것과 꼭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관상이란 다만, 이제는 지성만이 아니라 사랑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체험에서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개념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감각'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관상이라면 무슨 비범한 일처럼 여기고, 현시나 계시와 혼동하여 하나님의 신비를 명확히 볼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믿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관상이란 결코 그런 것이 아니고 한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이런 깨달음은 오히려 사랑이 충만한 체험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거기서 중요한 부분은 사랑으로 사로잡히게 되어 신적 대상에게 온전히 매달림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어떤 특수한 '감각', 어떤 체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하나님께 대한 그러한 깨달음이 이런 메마름 중에서 어떻게 영혼 안에 형성되기 시작하는가를 설명 하고 있다.

이제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정화의 메마름과 영혼에게 해로운 메마름을 구별하기 위해서 그가 보여 준 표징을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지금까지는 좋지 못한 여러 원인을 제거하는 부정적인 면에서 이 표징을 살펴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뜻에서, 특히 둘째와 셋째의 표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둘째 표징,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런 메마름 속에서도 끊임없이 그분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억에는 항상 괴로움이 따르는데, 그것은 영혼이 주님을 더 잘 섬기지도 못하고 이제는 더 이상 사랑하지도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으로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가장 아름다운 증거는, 이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게 된 것이 아닌가하고 두려워하며 깊이 괴로워하는 것이다. 이 고통은 좀처럼 그에게서 떠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듯 그를 온통 사로잡고 거기서 잠시도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 영혼은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사랑받으셔야 마땅한 분임을 더더욱 확신하게 되고, 이 깊은 확신 때문에 한층 더 괴로워하게 된다.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영혼을 괴롭히는 이 고뇌와 또한 이런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하나님께 대한 공경심은, 바로 그분의 위대하심을 알아차리는 감각이 영혼 안에 숨겨져 있다는 표시이다. 여기서 추리는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추리를 통해 이제야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그냥 '알아차리는' 것이다.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모든 것'으로 받들며, 그분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둘째 표징이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새로운 형태의 열렬한 관심을 하나님께 드러내는 데 비해서, 셋째 표징은 개념적 인식의 부재가 두드러져 보인다. 영혼은 이제까지 해 온 추리의 길로써 하나님께 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이제는 잘 생각할 수도, 또한 곰곰이 생각하는 것도, 철저히 성찰하는 것도 자유로이 안 되며, 오히려 그런 일이 싫증나고 귀찮아진다. 더 이상 방금 자기에게 닫힌 이 길을 따라갈 마음도 전혀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음이 편안하고 차분해지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새로운 길, 즉 지성을 통해 가는 것보다 훨씬 빠른 사랑의 길이 지금 자기에게 열려 있음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상이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 대한 깨달음이며, 이 깨달음이 하나님께 대한 명확한 개념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서도 그분과 그분의 위대하심을 알아차리는 '감각'이 생기게 하는 것이라면, 관상은 메마름 한가운데서 주어지기 시작한다는 십자가의 요한의 증언을 인정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영혼은 참으로 복된 영혼이다! 그런데 영혼은 왜 그렇게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일까?

   

 

영혼의 태도

      

사실, 십자가의 요한은 영혼이 메마를 때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 없이, 대신 자기 안에서 일하기 시작하신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함으로써 그분의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라고 가르친다.

묵상을 쉽게 할 수 있었던 지난날, 그토록 놀라운 열매를 맺는 듯 여겨졌던 저 영성 생활의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과 두려움에 쌓여, 영혼은 더욱 자주 억지로라도 그런 묵상을 해 보고 싶어 할 수도 있다. 또는 영성 생활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추지 못한 영성 지도자에 이끌려그 길로 끌려가는 수도 있다. 이런 지도자는 그 방법에 의지한 묵상만이 유일하고 안전한 길이라 믿고 거기서 나오는 것을 허락하지 많기 때문에, 그의 지도 아래 있는 가엾은 영혼은 어떠한 고생을 치르더라도 그 묵상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길을 강요할 수는 없다. 만일하나님께서 영혼을 다른 길로 이끄시려고 묵상을 못하도록 만드신다면, 이전 길로 되돌아갈 희망은 정말이지 전혀 없다. 따라서 이런 지도 방법은 영혼을 진정시키는 대신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만다.

관상적 영혼의 스승인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은 전혀 다르다. '세 가지 표징'으로 자신의 메마름이 정화를 위한 메마름임을 알게 되면, 묵상하기를 잠시 멈추고 억지로 하기 위해 자신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주님께서는 이미 그런 식의 묵상을 기대하지 않으시며, 이제는 다른 길로 묵상하기를 바라신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만 사랑 가득한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섬기면서 그분 앞에 머무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을 모시고 함께 있으면서 가끔 사랑의 말씀을 아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기도하는 데 조금씩 익숙해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근본적으로 이전보다는 훨씬 더 나은 방식으로 하나님과 가까이 만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주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 느낌을 믿어서는 안 된다. 전에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깊이 감동되었는데, 이제는 그런 깊은 사랑이 더 실감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초자연적 사랑은 감성적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사랑이므로, 꼭 그 사랑이 느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랑은 의지의 내적인 결단에 달려 있다. 영혼은 모든 피조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는 데 온전히 자신을 바치고자한다. 바로 이 사랑이 그의 마음속에 있으며, 이 사랑이야말로 참된 사랑이다. '하나님께 대한 감각'을 지니게 이끌어 주는 사랑이다.

사실 십자가의 요한에 따르면 메마름의 위기와 함께 그가 말하는, 불어넣어 주는 사랑이라는 것이 영혼 안에 생기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 사랑에 사로잡힐 때, 영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다고 단언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그분께 향하도록 힘 있게 밀어 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은밀히 끌려가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사랑이 훨씬 강렬해지고, 영적 길에서도 빨리 진보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밀리고 한편으로는 끌려가게 되니, 빨리 가게 된다!

 

 

크나 큰 이익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요한은 하나님께서 영혼에게 보내시는 '메마름의 밤'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이득에 대해 폭넓은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그 밤이 마음속에 어둠과 고통스러운 불안을 일으키기는 했으나, 한편으로는 영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게 했다. 우선 자신의 가만함과 가련함을 절실히 느끼게 해 주었다. 이제 체험을 통해 주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이 깨달음은 그를 매우 겸손해지도록 만든다. 바로 이 깨달음을 통해, 영혼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충분히 알아차리게 되며, 전보다 더 큰 존경심을 지니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

영혼은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으며, 더욱 드높고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된다. 그는 자신의 가난에 대해 깨달음으로써, 이웃을 판단할 때도 더욱 관대해지며, 따라서 형제들에 대한 사랑도 더욱 섬세해진다. 특히, 영혼은 이제는 선행을 행할 때, 그가 처음에 했듯이 거기서 발견하는 즐거움 때문에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배운다. 실은 그것이 전에는 여러 가지 결함을 남는 원인이 되었다. 이제는 그런 감각적 위로를 빼앗긴 채 순수한 의지로 행동하는 것을 배웠으므로, 바로 이것이 영성 생활에서 큰 걸음을 내딘는 것이다. 참으로 이 시련을 통해, 습관적으로 외적인 삶을 살아오던 감각적인 단계에서 영성적 단계로 옮겨지게 된다. 감각적 감명이란 그 자체로 변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생활까지도 불안하게 만들기 마련인데, 이제 거기서부터 점차 해방되어 간다. 완덕에 대한 소망도 훨씬 더 견고해진다.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다는 두려운 마음에서, 한층 더 충실해지고 싶고 다시는 뒷걸음질하고 싶지 않다는 크나큰 소망이 마음속에 불붙게 된다.

그러므로 이 메마름의 밤과 그 밤에서 시작되는 초기의 관상은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껍질 있는 빵', 즉 딱딱한 빵이기는 하지만 아주 영양가 있는 순수한 밀로 만든 것이다. 한편 위로와 위안을 주는 우유는 어린이의 음식이다. 물론 어린 시절에는 그시기에 적합한 음식이 필요하므로 우유가 필요하지 않다고 할 수 없지만, 이후에 우유를 마시지 않고 딱딱한 음식을 먹게 되는 것은 크게 진보하는 것이다. 좀 더 딱딱한 이 음식은 말하자면 묵상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기 시작한 관상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러한 놀라운 은혜의 시작이며 아직도 첫 단계의 시작밖에 안 되지만, 영혼에게는 이미 매우 귀중한 것으로 그로 하여금 관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일치의 길에 들어서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주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다.

따라서 영혼은 메마름이라는 시련에 다른 외부적 시련이 겹치더라도 당황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거기서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방해하는 온갖 집착에서 온전히 영혼을 자유롭게 해 주는 정화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영성 생활에서 마음의 위로를 받는 것을 영혼에게서 떼어 놓으시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해도 놀라서는 안 된다. 마음은 이러한 위로에만 집착하고 있을 뿐 아니라 너무도 자주 여러 가지 외부적인 것에도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 재산, 건강, 명성, 남의 호감 등에 집착하거나 또는 타고난 재주, 극기에 대한 자신감, 동요되지 않는다고 상상하는 마음의 평화 등에 대해 자만하고 있다. 그때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유혹을 당하게 만드신다. , 동요, 과도한 세심함, 불안, 어둠이 마음을 덮치며 먹의 길에서도 자신이 없어지게 되어, 어절 수 없이 자만심을 버리는 정화의 길을 어린이처럼 따라 나서게 하신다. 불행이 닥쳐 재산을 다 때앗기거나 죽음이 사랑하는 사람과 벗들을 앗아 간다. 이 모든 일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우연으로 보이고,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천벌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이며,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만나러 오시어 그의 마음을 정신적으로 한층 더 자유롭게 해 주시고 하나님과 일치하도록 준비시키신다.

물론 이런 상황 속에서 마음이 괴롭지 않을 수는 없다.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것을 빼앗길 때,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시련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영혼이 그렇게 애타게 찾고 있는 바로 그분임을,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 더욱 서둘러 가까이 와주신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관상적 사랑으로 굳세어진 그 영혼은 자진하여 그 시련을 받아 안고서 생명을 주시려고 죽음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손에 입을 맞추게 될 것이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이 시기에 있는 사람은 신앙의 정신을 키우도록 초대받았으며, 이 신앙에 의해서 그는 온갖 사건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보게 된다. 그는 자신의 고통 안에서 사랑하는 분의 부르심, 말하자면 더욱 높은 완덕으로 부르시는 손길을 느끼면서 사랑스럽게 "" 하고 시련을 받아들인다.

정말 하나님의 길은 신비스럽다. 마음의 메마름은 정신적 보화를 앗아 간 듯했지만 실상은 영혼을 한없이 풍요롭게 한다. 영혼을 시험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의노를 터뜨리신 것같이 보이지만, 유혹 그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자비의 수단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얼마나 좋은 도움을 주시는지! 우리가 그 신비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큰 이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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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