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신앙의 기도

                                                                               하나님과의 일치 (밀양가르멜 여자 수도원 )

 

 

마음의 메마름과 이에 동반되는 시련의 밤에서 빠져나왔다고 해서, 영혼이 성화하는 일을 마치고 마침내 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르게 되었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다만 감각적 욕망으로 몹시 집착하고 있던 피조물에서 이탈하는 것을 배우기는 했으나 아직 충분히 통제하지는 못함을 보았을 뿐이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적극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더욱 기도를 잘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가까이 간 것이다.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영혼을 들어 올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성 생활의 초기는 무엇보다도 무질서한 애착에서, 우리의 감각이 충족되기를 갈망하는 집착에서 영혼을 해방시키는 시기였다. 마침내 이러한 장애물이 치워지고 영혼은 자유롭게 하나님과 일치되기를 열망하게 된다. 영혼이 바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격려하며 힘을 길러 주기 위해서, 십자가의 요한은 향주덕 실천에 충실할 것을 권한다.

이 실천을 위해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다!신학이 가르치기를, 향주덕은 초자연적 생명을 만드신 창조자이시며 그 목적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영혼을 올바른 자리에 놓아준다고 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삶, 즉 하나님과의 일치는 우리 편에서 아무런 요구를 할 권리가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 선물은 우리에게 '할당'조차 되지 않은 몫이라는 것이다. 언젠가는 천국에서 알 수 있게 되듯이, 그처럼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되는 것은 우리의 필요와 본성적 능력을 모두 초월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지고한 운명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창조주만의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그분의 본모습 그대로를 안다는 것은 우리의 타고난 지력으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일이다.

천국에서도, 이 대상을 직접 지성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영광의 빛'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도 우리의 최고 목표를 하나님께 두기 위해서는 '신앙의 빛'이 절대로 필요하다. 지상 생활에서는 바로 신앙이 천국에서 받게 될 영광의 빛을 대신한다. 이윽고 친국에서 '보게 될' 것을 지금 우리는 신앙으로 '믿는' 것이다. '지복 직관'의 대상과 '신앙'의 대상은 오직 하나이지만 그것을 아는 방식은 다르다. , 전자(지복 직관)는 뚜렸하고 후자(신앙)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두 가지 경우 모두 우리의 지성은 본질적인 하나님 그분만을 바라보며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그 대상을 알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훨씬 초월하신 그분께 마침내 도달해야 하는데, 사실 우리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앙과 함께 희망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 망덕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믿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그 높이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주실 것을 기대하게 한다. 이 망덕이 주님께서 우리가 영원한생명을 얻을 수 있게 도와주신다는 확신을 갖게 해 준다. 따라서 오로지 하나님을 소유하고 싶은 열정에서 우리의 온 의지를 다 바쳐 하나님께 향하게 한다.

그러면서 신덕과 망덕, 첫 두 향주덕은 다음에 따르는 셋째 덕인 애먹을 위해 길을 닦아 준다. , 어느 날엔가는 우리가 함께 살게 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애덕을 위해 준비시킨다. 피조물이 자신을 온전히 다 바쳐야 할 지고한 존재이신 하나님을 자비심 많은 애정으로 그 무엇보다 사랑하게 만드는 애덕의 길로 부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향주덕은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께 향하게 하며, 모든 인간적 활동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향주덕도 다른 덕행과 같이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우리가 원할 때 언제나 그 덕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 영혼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도록 가르치기 위해서, 십자가의 요한은 우리에게 향주덕을 충실히 실천하기를 권유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관상이 시작되는 세 가지 표시

      

자기 탓이 아닌데도 메마름에 빠지게 된 영혼이 예로부터 말하는 '세 가지 표시'를 자기 안에서 알아보게 될 때, 그는 신비 박사의 권고에 따라 억지로 묵상하려는 모든 노력을 그만두게 된다. 그리고 오직 사랑에 넘치는 단순한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 곁에 머물도록 애쓴다. 영혼은 얼마 후에 큰 평화를 지니게 된다.

형식은 완전히 바뀌었지만, 영혼은 기도하는 것이 수월해졌다. 이제는 그 아름다운 이야기도, 처음에는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었던 많은 생각들도, 열정적인 말로 표현했딘 그런 달콤한 사랑의 감정도 모두 사라져 버렸지만, 더 좋은 것이 그것들을 대신해 준다. 묵상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영혼은 온전히 마음을 모으고 이내 하나님과 접촉하게 된다. 하나님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바라보면서 뭔가 자신의 가난함을 느낀다. 주님에 대해서는 아주 막연하게 일반적인 개념밖에 갖고 있지 않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알아차린다. 영혼은 하나님 곁에 머물며 오로지 그분만 바라본다.

이 눈길은 영혼을 하나님과 하나가되게 하는데, 이 눈길에 담긴 사랑이 더더욱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게 해 준다. 그때 영혼은 하나님께 대한 어떤 확실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느끼는 어떤 깊은 감각이 발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피조물과 너무도 다르시며, 그분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마음깊이 느낀다. 그토록 하나님께서는 다른 온갖 것을초월한 분이시다! 그의 마음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뿐이며, 다른 누구에게도 그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없다고 느낀다. 그분께서는 피조물의 모든 사랑을 받으셔야 할 분임을 깨닫는다.

이런 형태의 기도에 이르게 되면 안심해도 된다. 지금 이런 문제를 다루는 것이 무익한 일은 아니다. 거기까지 도달하게 되면, 그것에 대해 확실한 보증을 받는 일이 매우 필요함을 경험이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때 사람들은 자기는 아무노력도 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래서 해야할 것을 '충분히' 안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태만에 빠져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습관적으로 불안해하게 된다.

여기서도 십자가의 요한은 다시 한 번 '세 가지 표시'를 설명하면서, 우리 탓으로 생기는 마음의 메마름이나 단순히 자연적 원인으로 오는 메마름과 영혼이 관상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는 정화의 메마름을 구별할 수 있게 하여 영혼이 확신을 갖게 해 줄 것이다. 이제 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영혼은 자신이 더 이상 그 고통스런 양성 시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관상이 자기 안에 자리 잡기 시작하는 시기에 있음을 알아봐야 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요한은 그 세 가지 표시, 특히 셋째 표시를 관상의 이러한 새로운 상태에 적용할 것이다.

'첫째 표시'는 앞서 말했듯이 뚜렷한 개념의 도움으로는 묵상할 수 없게 되며, 이제부터는 영혼 안에 이러한 상태가 거의 고정되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떤 좋은 생각도 묵상에 사용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때로는 그런 좋은 생각들을 기억하는 것이 기도를 시작하도록 도와주며 꾸준히 발전하게 해 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잠깐 동안 자기도 모르게 정신이 흩어졌을 때, 다시 되돌아가기 위해서 도움이 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전과는 달리, 이런 생각에 오래 머물 수 없게 된다. 만일 거기에 머물고자 하면, 곧 마음이 텅 비고 매말라 버리는 것을 느낀다. 이제는 그런 데서 열렬한 신심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마음에 사무친 어떤 생각을 연상하며 도움을 받게 되는 날도 있겠으나, 결코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영혼은 여느 때처럼 이내 다시 무능력에 빠지고 만다. 신심의 옛 샘은 물이 다 말라 버렸으니, 이제는 다른 데서 찾아봐야하겠다.

'둘째 표시', 항상 자기 탓으로 하나님께만 전념할 수 없게 만드는 무능력함을 몰아내는 것이다. , 영혼을 유혹해서 사로잡으며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떠나게 만드는 피조물에 대한 사랑에 다시 애착함으로서 생기는 일종의 무능력 상태를 물리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성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기울여 보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그런 식으로는 아무런 마음의 양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상의 것을 따라가려는 욕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어떤 상상력이 떠오르는 것까지 물리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이 오히려 성가시게 여겨지고, 조금도 관심을 끌지 못한다. 오히려 마음이 흩어지게 할 수 있는 것은 다 경멸하게 된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

'셋째 표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특징적인 것이어서 결정적 판단을 하게 만든다. 이 점에 관한 십자가의 요한의 글을 인용해 보겠다.

"영혼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스러운 집중을 하게 되면서 아무런 특별한 생각이 없이 내적인 평화와 고요함과 쉼 속에 혼자 있는 것이 좋아진다. 더 나아가서 묵상에서 관상으로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상태로서 기억, 지성, 의지라고 하는 감각의 능력들의 움직임이나 활동, 즉 적어도 사색적인 활동이 없으며, 무엇에 대한 이해인지도 모르고 특별한 지식도 없이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다만 사랑이 가득한 전체적인 깨달음과 집중만이 있을 따름이다."(가르멜의 산길2.13,4)

첫째와 둘째 표시는 부정적이지만, 이것은 긍정적이다. 영혼은 온전히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그러나 메마름의 위기에서도 이처럼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었으며, 이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근심으로 가득한 나머지 진정 하나님을 사모하는 괴로움에 시달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분명히 이 괴로움은 주님을 섬기고 싶은 진지한 소망에서 나온 것이며, 따라서 겉보기에 어떻든 그 영혼은 온전히 사랑에 잠기어 정감과 인식으로 계속 하나님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넘치는 깨달음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 깨달음은 십자가의 요한의 권고에 따라 조금씩 얻게 되는 것이며, 이제 영혼은 그 안에서 많은 즐거움과 평화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괴로웠던 위기 동안에는 자신은 이미 주님을 섬기고 있지 않다는 걱정이 묵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가 처음에는 낮선 새로운 형태로 영혼을 하나님께 이끌고 갔다. 이제 하나님께 돌아가는 또 다른 새로운 형태란 바로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랑에 넘치는 평화로운 눈길을 말한다.

그러므로 영혼이 게을러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전혀 아니다! 영혼이 얼마나 하나님께 마음이 사로잡혀 있는지를 우리는 십자가의 요한의 설명으로 더욱 뚜렷이 알 수 있게 된다.

신비 박사 십자가의 요한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그 사랑에 넘치는 눈길을 분석하면서 그 안에 작용하고 있는 원리들을 깨닫게 해 준다. 우리는 그러한 원리들이 바로 향주덕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덕들은 성령의 은사의 은밀하고 오묘한 감화를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넘치는 보편적민 깨달음 안에서, 십자가의 요한은 무엇보다도 신앙의 탁월한 실천을 알아본다.

십자가의 요한은 신앙의 대상의 고결함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이 대상은 지복직관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실 대상과 같은 것이며, 지금은 우리가 그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만 '믿는 것'이다. 우리의 지성은 하나님의 증언을 믿으면서 분명히 감지할 수는 없지만 확신을 갖고 그 대상에게 집착한다. 그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제 그 대상은 피조물들을 통해서 우리의 타고난 이성으로 알 수 있는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힘만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그분의 본질 자체, 그분의 신성, 삼위일체의 신비를 통해 곰곰이 생각해 볼수 있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고유한 본질에 대해서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그 어떤 개념도 우리는 만들어 낼 수 없다. 신학자는 사색하면서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점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드높으신 완전성을 '소극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을 만들어 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개념은 연구의 결과이며 신학적 묵상의 결실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영혼은 경건한 묵상으로도 같은 전개 방법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높은 경지까지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영적 진보가 여기까지 이르면, 영혼은 더 이상 묵상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는 다만 이 세상 것에서 아득히 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높으심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될 뿐이다. 신앙은 이런식으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나 영혼은 하나님의 드높은 완전성에 관해 정확한 개념을 만들어 내려고 애쓰지도 않으며, 그가 알아들은 것을 적절한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한다. 지고의 완전성과 가없는 사랑과 자비 깊은 사랑에 만족해하면서 그분 곁에 머물 뿐이다. 따라서 영혼은 아무런 지적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 머물게 된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인식은 '지적으로''개념적으로' 보아 매우 빈약한 것이기 때문에 -영혼은 개념을 만들려고 별로 애쓰지 않으므로- 다른 데서 빛을 받지 않는 한, 마음이 거기에 오랫동안 머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여기서 영혼은 사랑을 통해 실제로 빛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요한은 온전히 마음을 모아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이러한 자세를 '사랑하고 있다'고 표현한다.

영혼이 사랑으로 하나님께 매여 있을 때, 일종의 커다란 기쁨을 맛보게 된다. 특히 그 사랑이 수동적 사랑, 즉 영혼이 하나님께 이끌리게 되는 사랑일 때는 더욱 그렇다. 그때 그는 자기가 창조된 존재 이유이며, 그 무한에 대한 자신의 갈망을 채워 줄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을 사랑하고 있음을 어떤 형해로 느끼게 된다. 신적 대상과 사랑에 넘치는 사귐 속에서, 그는 자신이 참으로 어디에 속하는지를 느끼는 것이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 자신을 위해 만드셨으므로 우리의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을 누릴 때까지는 쉴 수 없습니다."(어거스틴의 고백록1,1) 성 어거스틴은 말했다.

다른 번역에는 "주여, 임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임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의 마음이 평온하지 않나이다."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이때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쉴 수 있고, 이 때문에 평화 안에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떤 체험적 형태로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나 관념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말했듯이, 개념에 관해서 이 영혼은 오히려 약하다. 그러나 그 깨달음으로 일종의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라는 것을 얻게 된다. 이 감각은 의지에서 생긴 것이며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반드시 지성에도 반영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 주어 영혼을 더욱 즐겁게 해 주고, 사랑에 넘치는 신앙의 눈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더욱 쉽게 그분 안에 편안히 머물게 한다.

여기서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이 특별히 시사하는 것은, 이것뿐만 아니라 성령의 은사가 영혼이 사랑에 넘치는 신앙의 시선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게 도와준다는 것이다. 신비 박사의 말을 들어 보자.

"영혼이 신앙 안에서 더욱 순수하고 깨끗하게 닦아질수록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사랑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며, 사랑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영혼이 더욱 밝게 비춰지고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는 방법이며 원인이다."(가르멜의 산길2.29,6)

성령의 은사 안에서 '지혜'라 불리는 은사에 관해 십자가의 요한은 자주 언급하는데, '지혜'"하나님의 아들이 신앙 안에서 직접 영혼과 사귀시는 것이다."(가르멜의 산길2.29,6) 따라서 이 깨달음은 영혼을 더욱 즐겁게 해 주며 훨씬 더 체험적인 것이 된다. 이렇게 하여 영혼 안에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라는 것이 점점 자라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인식하는 새로운 형태이며 그분에 대해 지닐 수 있는 순수히 개념적이거나 지적인 인식과는 매우 다르다.

따라서 다음의 상태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앞의 설명으로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 메마름의 위기를 겪은 후에 얻게 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넘치는 보편적인 깨달음, 커다란 기쁨을 주는 그 깨달음은 이제 영혼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활발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최고의 힘을 발휘하여, 이제는 지성과 의지가 신앙의 빛으로, 애덕의 사랑과 또한 성령의 은사로 도움을 받아 초자연적 차원까지 들어 올려진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코 나태함이 아니라, 다만 활동의 단순화이다. , 머리로 추리하면서 상상과 감성에 많이 의지하며 배우던 것에서 더욱 영적이고 더욱 고요하고 더욱 귀중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의 단계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 영혼은 자신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자기 자신이 이 기도에서 '하나님의 것이 되고 싶은 마음'이 더더욱 강해져, 별로 이렇다 할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서도 철저히 하나님을 섬기려는 결의를 다지며 그 기도를 끝내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이 기도가 얼마나결실이 풍성한지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은가?

 

 

관상이 현시보다 바람직하다

      

이 기도는 앞에서 말했듯이 매우 결실이 풍성하고 귀한 것이므로, 영혼은 지난날의 아름다운 묵상을 생각하며 지금 상태를 탄식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제아무리 신심 깊은 영혼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은혜일지라도 그보다 이 기도를 더 소중히 여겨야한다고 십자가의 요한은 가르치고 있다.

십자가의 요한은 소위 '현시와 계시'라고 하는 것에 대해 특별한 주의를 당부하면서, 영혼의 원수가 많은 경우 이러한 현상을 일으켜 관상 초기에서 보여 주는 사랑에 넘치는 신앙의 열심한 수련에서 영혼의 마음을 돌려놓으려 한다고 가르친다. 성인이 강조하는 점은, 이러한 '특수한' 성격을 띤 은혜들이 영혼을 하나님과 일치하게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 역할은 위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향주덕에 국한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십자가의 요한은 관상적인 사람들에게 이러한 가장 귀중한 충고를 하는 것이다. 이 충고는 사실상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무엇보다 향주덕의 실천에 가장 큰 가치를 두는 그의 가르침과 논리적으로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므로 감탄하게 된다. 만일 기도 중에 어느 성인이 발현한다든가 또는 하늘에서 오는 듯한 무슨 말이 들리더라도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다만 거기서 암시를 받아 사랑에 넘친 신앙의 동작으로 하나님 안에 다시 마음을 모아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그 어떤 특별한 현시나 계시보다도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향상하도록 더욱 힘 있게 도와줄 것이다.

이 가르침은 수많은 경솔한 영혼들의 수련이나 그와 못지않게 견책 받아야할 영성 지도자들의 지도 방법과는 참으로 거리가 멀다. 그들은 이렇듯 불확실한 현상을 지나치게 중요시하고, 때로는 이런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영혼들을 지도할 때 그런 현상을 중시하는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종류의 모든 일에는 악마뿐만 아니라 흔히 자신의 성향이나 망상이 끼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균형이 제대로 안 잡혔거나 병적인 기질이 있는 사람들이 -더구나 이런 기질을 곧 알아차리는 것이 늘 쉬운 일은 아니다- 종교적 성격을 띤 아름다운 말이나 현시를 만들어 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에는 신앙심을 더 깊게 해 주는 좋은 말이나 현시도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하나님에게서 직접 오는 것이라고 믿으며, 이것을 참작하여 자신의 생활을 이끌어 나가야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잘못판단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영혼들, 종종 창의력이 풍부한 이들은 이런 것을 쉽게 믿어 버리게 된다. 그래서 자기는 하나님께 특별히 사랑받고 있다고 믿게 되면, 확신을 갖고 영적 지도자에게 '예수님께서 저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이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라고 말한다.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을 알고 있는 지도자를 만나는 영혼은 참으로 큰 은혜이다! 그 지도자는 우선 아예 이런 것들은 문제 삼지도 말라고 가르치며 조금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도록 가르치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영혼에게 그 점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 지도자가 주어야할 첫째 충고는 다음과 같다. "이런 식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나에게 먼저 다 이야기하고, 내 의견을 듣기 전에는 거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어떤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예부터 영을 식별하는 여러 기준에 따라 판단하며 이 영혼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영으로 믿어진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만일 신앙의 원칙을 참작해서 판딘할 때, 그의 이성으로 거기서 암시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여겨지지 않으면, 결코 계시를 통해 제안하는 것을 행하게 허락해서는 안된다. 그 특정한 계시에 관심을 두지 않게 해야 한다.

항상 이렇게 지도하게 되면, 많은 무모하고 경솔한 행위와 막대한 시간 낭비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고백하지만, 위의 예와 같은 현시들을 적은 두툼한 공책을 가끔 볼 때 여러 번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그들이 그런 시간을 정성껏 기도하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데 썼더라면 자신과 이웃에게 훨씬 더 유익할 것이고, 이런 부질없는 생각들을 경토할 수밖에 없는 지도자도 덜 피곤하게 될 텐데."

그런 현상의 근원이 어디서 왔건, 비록 그것이 초자연적인 것일지라도, 그런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일치된 생활을 하면서 향주덕의 실천과 관상에 늘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관상하는 동안, 사랑에 넘치는 신앙의 눈길은 반드시 하나님과 친밀해지도록 이끌어 주며 그 사귐이 더욱 돈독해지고 영혼 안에 굳게 자리 잡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저서에서, 영혼에게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감각을 지니게 하는, 즉 명백하게 수동적 성격을 띠는 관상의 여러 가지 형태를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다. 영혼은 때로는 매우 차분한 마음으로 거기에 깊이 잠겨 있어서 정신이 흐트러진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는가 하면, 또 다른 때는 쉴 새 없이 상상이 떠올라 지치게 된다.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되면 영혼은 지성을 통해서보다는 오히려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성은 진적으로 뚜렷한 관념을 만들어 내지 않으며 상상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상상력은 자유롭게 제멋대로 활동하기 때문에, 더욱 풍성한 하나님의 감미로움 안에 잠겨 있지 않으면 쉽게 영혼을 괴롭히곤 한다. 의지로 즐기게 되는 이 감미로움이 지성에까지 더욱 세차게 넘쳐흘러 온전히 하나님께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한, 괴로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때로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매우 열정적이어서 인간이 견디기 힘든 정도의 것도 있다. 이때 영혼은 소위 '탈혼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즉시 신비의 권위자인 십자가의 요한의 가르침을 참고하자. 예나 지금이나 어떤 심리학자들은 신비적 생활의 본바탕이 마치 거기에 있는 듯 믿으며 황홀한 현상의 중요성을 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과는 전혀 다르게 십자가의 요한은 그런 현상을 하나의 약점으로 보고 있는데, 영혼이 하나님과 일치되기 직전에 마음을 준비시키는 영혼의 어둔 밤을 통과할 때 마침내 그러한 약점에서 벗어나게 된다고한다.

하지만 하나님에게서 관상의 선물을 받게 되는 모든 영혼이 이런 이유에서 반드시 이 모든 형태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에 이르기 위해서 그 모두가 필요하다는 것도 아니다. 이 분야에서 선택권은 주님이신 하나님뿐이며, 우리는 골라주신 그 길을 따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관상의 형태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높은 것이든 낮은 것이든, 열정적인 것이든 감미로운 것이든, 또는 드러나거나 은밀하거나, 이러한 관상은 한결같이 성령의 은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향주덕을 열심히 실천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상은 영혼으로 하여금 온갖 현시나 특수한 계시, 또는 특별한 현상과 탈혼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르게 해 주며, 하나님과 일치하도록 이끄는 유효한 수단이 된다. 조금 후에 다루겠으나, 하나님과 일치된 바로 그 경지에서, 관상은 영혼으로 하여금 거의 끊임없이 하나님과 접촉하게 한다.

 

      

신앙의 정신

      

관상에 도달한 영혼은 이제 신앙을 충실하게 실천하며, 특히 기도 중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나날의 일과 중에도 기도할 때 못지않게 신앙의 덕을 가꾸고 있다. 영혼은 이 초자연적 빛으로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모든 사건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법을 배운다.

신앙은 지복 직관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에 관한 인식이다. ,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아시고 으레 당신과 관련지어 보시는 것처럼, 신앙 또한 피조물을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모습으로 보여 준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은 피조물을 첫째 원인인 창조주와 관련지어 생각하지 않고, 단지 둘째 원인인 피조물 자신의 관점에서만 보는 것보다는 훨씬 폭넓고 현실적인 세계의 시야를 열어 준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관해 너무나 추상적인 관념만 갖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나 그 진리가 지닌 참된 뜻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한다. 인간이 자유의사로 행한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지배를 벗어나서는 결코 이 세상에서 어떤 일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필연성의 법칙 아래 두신 것도 아니며, 또한 자유를 지닌 자로 창조된 피조물의 행위가 모두 정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도 아니다. 우리의 많은 행위들, 이를테면 온갖 죄악의 행위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이 아니며, 그런 행동들을 하지 못하도록 저지하시지 않고 다만 너그럽게 보아 주시는 것뿐이다. 그것은 바로 피조물인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로 이 엄청난 특권을 주셨지만, 뭇 인간들이 이 특권을 남용할 것도 미리 알고 계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반역자들이 스스로 그 행위들을 후회하도록 허락하심으로써, 다시 개입하셔서 그런 행위까지도 당신의 드높은 목적, 더구나 영혼의 구령과 성화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사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계시다. 정녕 하나님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인간의 행위란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만사가 선하게 이루어지도록 해 주신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신앙으로 사는 영혼에게는 하나님의 섭리가 하나의 구체적 현실이며, 그는 하나님께서 가장 높은 완덕으로 초대하시려고 모든 사건을 통해 자기를 만나러 오신다는 것을 안다.

어느 선택받은 한 영혼이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나에게는, 내 영혼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메시지다."(성삼의 복녀 엘리사벳)

이런 영혼들은 모든 사건 안에서 인간, 즉 둘째 원인인 인간의 행위만을 보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그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뚜렷이 반감을 나타내며 해를 끼치려고 벼르는 사람들의 그 행위만을 보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행위를 '넘어서' 그들은 하나님을 본다. , 인간이 불완전하게 행동하도록 허용하시면서 그것을 계기로 그가 영웅적인 덕행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시고, 이를 완수하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을 본다. 신앙으로 사는 영혼은 피조물보다 하나님과 함께 살고, 둘째 원인이 아닌 첫째 원인인 창조주와 함께 살아간다. 이러한 둘째 원인도 실재적인 것이어서 그것도 고려해야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첫째 실재는 하나님이고, 무엇보다도 언제나 하나님께 의지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가족의 아버지가 아니신가? 아버지께서는 자녀에게 합당한 자리를 주고자 하시지만, 우리도 아버지에게 참으로 마땅한 첫째 자리를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신앙으로 사는 영혼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탁월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첫째 자리를 자진해서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다.

그뿐 아니라 영혼은 그분께서 어디에 계시거나 자신의 주님을 알아본다. 관상 중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기뻐하며, 이제는 하나님 친히 당신 거처로 정하신 자기 영혼 안에 실제로 계시는 자신의 하나님을 흠숭한다. 영혼은 인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서를 통해 인간으로 사신 그분의 삶을 배우게 된 그 거룩한 구원자 안에서 하나님을 인정한다. 그러나 신앙의 눈은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의 둘째 위격을, 그리고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성령이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한다. 또한 그 신앙은 바로 이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우리가 당신을 경배하러 오기를 기다리고 계심을 믿고, 그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묵상한다. 그리고 신앙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장상, 특히 교회의 장상들의 명령을 통해 드러내신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 사랑이 되신 말씀인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형제들을 통해 당신께 봉사하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예수님의 차지인 모든 사람, 즉 주님의 보혈로 구속된 이들을 위해 행하는 것을 바로 예수님 당신을 위해서 행하는 것으로 여기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신앙으로 사는 영혼은 어디서나 하나님을 만나며, 또한 어디서나 우리를 선하고 너그럽고 거룩한 자가 되도록 초대하시는 하나님을 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섭리로 영혼이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주신다.

만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참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자리를 드린다면, 이 신앙을 통해 깨닫게 된 참된 하나님의 자리를 그분께 드린다면 우리의 생활이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이 세상에는 그 어떤 일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모르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역경을 더욱 잘 참으며 받아들이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는 사람의 악행을 인정하시지는 않으나, 당신의 권능으로 이 불행한 사건을 당신 사랑의 계획의 일부로 만들어 우리에게 선을 가져다주는 사건이 되게 하실 수 있다. 저 무서운 전쟁의 시련이 물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지상 대리자를 통해 그 전쟁을 막으시려고 가능한 모든 일을 다 하셨으며 전쟁을 멈추라고 큰소리로 외치셨다. 그러나 인간은 전쟁을 원했고 온갖 비참한 결과를 남게 했다. 아직도 우리는 그 상처로 괴로워하고 있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셨던 인간의 행동에서 생기는 결과들을 당신 친히 미리 막으셔야 했다고 누가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분께서는 자비하셔서, 인간이 겸허한 자세로 용서를 빌 때 마음이 움직이시어 용서해 주시고 도와주러 오신다. 반역자들은 이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용서를 청하지도 않으며 오만한 자세로 완고하게 버티고 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전능하신 지혜로, 심지어 악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어, 악인이 만들어 내는 시련 속에서 선량한 이들을 선으로 이끄신다. 사실 전쟁의 시련은 영성적 향상의 새로운 계기가 되어왔다. 나도 이런 사실을 여러 번 확인할 기회가 있었으며 하나님의 섬세하신 배려에 감탄했다. 하나님께서는 너그러운 영혼들을 만나러 오시어 그들이 영웅답게 행하도록 도와주시고, 이를 통해 당신과 일치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신다.

신앙으로 굳세게 살아갈 때, 신앙은 영혼이 더욱 힘차게 하나님에게 다가가도록 이끌어 준다. 신앙은 관상 중에 이성으로 하여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만나게 해 준다. 한편 성령의 은사인 사랑과 성령의 활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즐거운 깨달음을 얻게 하여 그분에 대한 귀한 감각을 지니게 해 준다. 따라서 영혼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할 것을 모두 바치고 싶어진다. 신앙은우주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움직이는 일상의 사건 안에서 정녕 하나님이 차지하셔야 할 자리를 영혼에게 보여 준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사건을 통해 우리가 가장 좋은 방식으로 구원되고 성화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 사실을 알고 인정하는 것은 영혼에게 가장 귀중한 일이다. 그러나 그 신앙의 원칙에 따라서 우리의 생활전체를 이끌어 갈수 있게 되는 것은 더욱 가치 있는 일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희망과 사랑의 덕이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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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