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희망과 순수한 사랑

 

 

신앙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도록 드높여 준다. 신앙이 주는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그분께서는 바로 우리가 가야할 최종 목적임을 인정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신앙은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그 모든 것 안에서 우리를 드높여 주시려고 끊임없이 우리를 초대하시는 자애로운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며 살게 한다. 더 나아가서, 신앙은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주고, 희망은 우리의 온 생애를 하나님께 의지하게 한다. 그리고 사랑은 강한 유대가 생기게 하여, 우리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를 굳게 매어 줌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바로 우리의 뜻이 되도록 변화시킨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일치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상태가 우리 안에 이루어지게 한다.

우리는 십자가의 요한이 가르치는 빛에 따라 신앙의 수련에 대해 연구했으니, 이제는 희망과 사랑의 삶을 더욱 진지하게 살아가는 길을 그에게 배워야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께 더욱 집중하게 되고, 그분과 더욱더 친밀하게 될 것이다.

 

    

희망의 본질 

 

현대의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감각'이라는 것을 잃어버린 것 같다. 그것을 믿고 있음은 틀림없으나, 실제로 실생활에서는 거의 중시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지상의 보화를 얻는 데만 골몰하며, 사실 거기에 온전히 마음을 때앗기고 그 일에만 정신을 쏟으면서 이 목적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렇다고 해서 세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보화에 무관심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물론 그들은 자신의 생활이나 가족을 돌보기 위해 재산을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상의 보화를 얻기 위해 어느 정도 걱정하는 것은 칭찬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만사를 합당한 제자리에 있게 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특히 하나님께 하나님의 자리를 드려야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당신과의 영원한 합일에 도달하도록 지시하셨는데, 혹시 우리는 그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을 올바른 처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영원토록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성부 · 성자 · 성령과 더불어 친밀하게 지내며 즐거워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지상에서 향주덕을 얼마나 초자연적인 노력으로 실천해서 드높은 사랑의 경지에 이르렀느냐에 따라 하나님과 더욱 깊게 사귀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 것은 사실 하찮은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한다. 만일 이것을 믿는다면, 왜 실제로 그것을 생의 최고 목표로 삼지 않는 것일까? 우리가 그 어느 것보다도 이 숭고한 보배를 진심으로 찾는다면, 다른 모든 소유물을 합당한 제자리에 놓아두는 일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마음이 집착하거나, 또는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강한 기억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자연스럽게 걱정하게 될 때라도, 우리가 알게 된 그 소식 때문에 거기에만 정신을 쏟으며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생각할 때도, 우리의 첫 번째 바람은 그들이 영원한 행복을 얻게 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의 물질적 행복보다는 그 영원한 행복을 보증하는 영적 행복에 더 중요성을 두어야겠다. 참으로 많은 경우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까지도 주된 관심사는 오로지 물질적 행복뿐이다. 그들은 이름뿐이지 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아니면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하겠다.

그러나 하나님을 소유하고 싶은 소망을 지니도록 열심히 권하면서, 우리는 다음의 한 가지 반론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이른바 '순수한 사랑에 대해 보쉬에(Bossuet)와 페늘롱(Fenelon)이 주고받은 유명하기는 하나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논쟁에서 주장하기를, 비록 천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영혼이 보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안에 '보수를 목적으로 하는' 정신이 생기게 되어, 자기 안에 틀어박혀서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대신 가장 사심 없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향주덕 사이에도 대립이 있을 수 있으며, 희망은 사랑을 반대하고 방해할 수도 있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십자가의 요한은 결코 이런 종류의 모순을 가르치지 않았다. 물론 십자가의 요한도 순수한 사랑에 관해서 한 가지 설()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말하겠는데, 그는 사실 희망에 대한 사랑을 물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희망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희망을 잘 키우고 거기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끓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매우 쉽게 해 준다고 가르친다. 하나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희망이 지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돌려놓지 않는다면, 사랑의 실천이 훨씬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훌륭한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을 찬미할 때, 바로 그런 행위에서 비로소 그 천상적 기쁨이 생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지적 피조물인 우리는 지성과 의지, 즉 인식과 사랑의 행위로 하나님을 찬미하도록 만들어졌으므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때 가장 완벽한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은 결코 우리를 자기 자신 안에 가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층 더 하나님께 향하게 하며,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도록 도와준다. 신비 박사의 영가의 뛰어난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천국에 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친국에서의 모든 삶은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복직관으로 하나님을 모시게 되는 것이 진실이라면, 거기에서 반드시 솟아나게 될 그 사랑으로 영혼은 온 힘을 다해 하나님과 결합하고자 결정적으로 자신을 바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지극히 복된 영혼은 자기에게 주어진 그 행복만큼 주님을 영원히 찬미하게 된다. 주님을 소유하면 할수록, 영혼은 한층 더 주님을 사랑하게 된다.

지상에서 온 생애를 통해 주님께 너그럽게 자기를 바치는 데서 큰 기쁨을 찾는 것을 배운 영혼이, 천국에서 자기를 주님께 바칠 수 없다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위대한 영혼들은, 특히 신비 박사의 학교에서 배운 영혼들은 늘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사랑에 관한 가르침을 보면, 성녀는 십자가의 요한의 영가사랑의 산 불꽃을 읽으며 깊이 감동했음을 알 수 있다. 성녀는 생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이 놀라운 저서에서 뽑아 놓은 글을 보며 영혼의 양식을 얻었다. 어느 수녀가 천국에서 성인들과 함께 나누게 될 기쁨에 대해 말했을 때, 성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것이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내가 받게 되고 또한 내가 드릴 수 있게 될 그 사랑 때문입니다."

이 작은 성녀는 사랑하기 위해 천국에 가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그러므로 천국의 지복을 일종의 이기적인 즐거움처럼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그것은 오히려 다만 '의무이기 때문에' 행동하기를 원하는, 칸트와 같은 철학자의 냉랭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되고 만다. , '나는 의무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어 엄격하고 씁쓸한 만족감을 느낌으로써, 마치 또 다시 자기 안에 들어박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스스로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자기 자신의 인격이 도덕적으로 완벽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자기 의무를 다하는 것이 되고 상하고 덜 이기적으로 생각되지 않을까? 십자가의 요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희망을 키워 가야 할 필요성

      

확실히 우리는 삶 안에서 하나님을 갈망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마련해야한다. 이러한 갈망을 더욱 키워 나가야 하고, 또한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잘 배려해야 한다. 또한 당신의 선과 자비로 우리의 희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주고자하시는 그분을 더더욱 신뢰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소망의 목적에 대해서도 또한 그 동기에 관해서도 희망을 키워 가야한다는 것이다.

소망의 목적에 대한 희망을 기른다는 것, 여기에 대해서는 필자가 어렸을 때 배운 망덕송의 말마디를 인제나 상기하는데, 정말 이것은 이 덕의 위대한 목적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그 기도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주님께 받게 될 것들을 믿고 기다리고 있음을 고백하도록 가르친다. , 죄의 용서와 선하게 살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과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 궁극적 행복인 영원한 생명과 또한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므로, 무엇보다도 죄의 용서를 믿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내가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당신께서 제정하신 대로 죄를 고백하고 싶어 하며 참회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용서해 주신다. 사실, 그때마다 주님의 용서에 대해 확신을 가지라고 주님께서 나에게 부학하심을 아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인가!

죄는 거룩한 생활의 장애물이다. 그러므로 내가 통회하면, 주님 친히 나의 거룩한 삶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치워 주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것만이 아니다. 통회의 소극적인 면 뒤에는 적극적인 면이 있다. 주님께서는 그 장애를 제거해 주시면서 '잘 살기 위한 은혜', 즉 나의 신분이나 소명에 따라 참으로 착하고 도덕적으로도 바르게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당신의 도우심을 믿음으로써 거룩해질 수 있기를 바라신다.

정말 주님께서는 여기에 대해 내가 확신을 갖기를 바라신다. 그것은 지적 확신이 아닌 마음의 확신, 즉 누군가에게 '나는 당신을 신뢰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극도의 신뢰를 뜻한다. 신학적 가르침에 따르면 이러한 확신이야말로 완전한 망덕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완덕을 향해 나아가기를 원하시며, 바로 그때문에 주님께 전적으로 신뢰 하기를 바라신다.

최상의 선()이신 분께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애한 이러한 확신을 키워가며,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를 도와주고 싶어 하시는 힘으로 반드시 어떻게든 강해져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쉽다. 하나님을 소유하게 될 때, 선의를 지닌 영혼의 신뢰는 절정에 달할 수 있게 된다. 이점에 관해서 십자가의 요한은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좋아했던 다음금언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영혼이 신랑을 바라는 만큼 신랑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다른 번역 : 우리는 하나님께 바라는 만큼 하나님에게서 얻는다)(어둔 밤2.21.8)

십자가의 요한이 인용하는 이 금언은 삶의 모든 소망을 오로지 하나님과 영원히 일치하는 데만 집중시켜 온 영혼에게 하는 말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정념 우리가 희망해야 할 일이다. , 영원한 생명을 최고의 목표로 삼음으로써 그 목표가 우리의 온갖 다른 욕구를 지배하고 종속시키도록 해야 한다. 이런 삶의 자세는 하나님의 참된 자녀답게 사는 영혼에게는 자연스런 마음가짐일 것이다. 우리 아버지의 집은 천국이다. 우리는 그곳에 도달해야 하며, 거기야말로 참으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잘 살도록' 힘쓰고 또한 '잘 살 수 있는 은총'을 하나님께서 주실 거라고 굳게 믿으며 바라자. 그런 다음, 지상에 있는 동안 이미 천상적 일치의 보증이라고 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는 은총을 청하자. 왜 그러지 않는가? 우리는 성인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목적을 이를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고 계심을 우리가 확실히 느끼기를 바라신다.

이와 같이 주님께 바라며 그 희망을 키워 가는 영혼은 참으로 더더욱 용기를 느끼게 되고 더욱 기꺼이 자기를 바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희망은 하늘의 아버지를 사랑에 넘치는 마음으로 신뢰하게 하고, 더 나아가 온전히 자신을 맡길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고자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며, 또한 신앙의 정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만사를 다스리고 계심을 알고 있기에, 자신의 성화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 드리기 때문이다.

이런 영혼은 '하나님께서는 나와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어 가기 위해 만사를 더욱 좋은 방법으로 해결하는 길을 알고 계실 것이다. 나보다 훨씬 선명하게 보시고 더 멀리 보시니까 그분께서 방법을 택하시게 하자. 나는 그분을 온전히 신뢰한다.'라고 생각한다.

그때 영혼은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대로, 어머니의 품에 안긴 어린이처럼 되어 '세상의 혼란 속에서도 주님의 품 안에서 평안히 잠들게 된다.' 그리고 늘 평온하면서 자제하는 힘이 있으므로, 쓸데없이 동요되어 힘을 낭비하는 일 없이 주님을 섬기는 데 온힘을 기울일 수 있게 된다.

      

 

기억의 정화 

 

십자가 요한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앙의 수련에서 지각의 정화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희망의 수련에서는 기억의 정화가 이루어진다. 신앙은 우리의 지각 안에, 둘째 원인을 능가하는 첫째 원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맨 첫자리에 두게 한다. 기도 생활에서도 묵상에 잠긴 모든 생각보다 사랑에 넘치는 관상적 시선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첫자리에 두게 한다. 물론 묵상적인 깊은 생각도 귀중하기는 하지만, 관상 기도를 낳게 하는 '하나님에 대한 감각' 보다는 덜 귀중하다. 명백하게 신앙은 지성을 하나님께 다가가게 한다. 비슷한 방법으로 희망은 우리의 기억을 하나님께 집중시킨다.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우리의 기억은 자기가 사랑하거나 두려워하는 것들에 대한 지난날의 일들을 자주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회상하는 것은 바로 그 일들 속에서 우리 삶의 여러 가지 목적이나 의도가 결정되었으며, 그 안에는 우리를 근면해지도록 충동하는 수많은 동기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것들에 대해 회상하는 것은, 그 기억 안에서 우리의 목적 달성을 방해하는 수많은 저항력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들이 우리의 동요와 끝없는 근심의 원인이 되어 마음에 평화를 주지 않고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면서, 때로는 우리를 완전히 불행하게 만든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굳센 소망을 마음에 키워 가면서 이 소망이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염려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영혼의 경우는, 자기 열망의 대상들을 대단히 절제하고 자제하면서 사랑한다. , 하나님과 더욱 일치하면서 그분의 뜻에 의탁하는 것이다. 기억 속에서도 그런 열망들에 대한 생각이 전보다 덜 떠오르게 된다. 한편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영혼은, 하나님께서는 사랑에 넘치는 섭리로 자기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 모든 일을 처리하신다는 것을 살아 있는 신앙으로 믿고 있기에 저항 세력을 만나도 그전처럼 두려워하지 않는다. ,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거기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거기에 대처할 행동 또한 하나님 섭리의 계획에 반드시 들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초자연적 희망을 기르고 있는 그 영혼은 가장 고통스런 시련 중에도 평온하게 지낼 수 있다. 그는 정적주의(靜寂主義, 17세기 말의 신비주의적 종교운동)의 게으름에 빠지지 않는다. 우리가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 자신도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기꺼이 자신의 의무를 다 마친 다음에는, '주님, 주님께서 알아서 해 주십시오. 저는 주님만 생각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어린이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자기를 맡긴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반드시 자기 자신과 많은 이웃들의 행복이 오게 되리라는 확신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을 과감히 맡긴다.

이와 같이 희망도 그 나름대로 영혼을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며, 더욱 하나님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그리고 가장 아름답고 진정한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하게 한다.

 

 

애덕 

 

신앙과 희망이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 다가가게 해 준다면, 애덕의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과 결합시킨다.

하나님 사랑의 박사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을 온갖 측면에서 바라보면서 사랑에 관한 놀라운 글들을 썼다. 하지만 여기서 밝혀 둘 것은, 그는 우리가 지금 다루려는 능동적 사랑보다는 오히려 수동적 사랑에 대해 더욱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동적 사랑에 대해서는, 가장 큰 시련 또는 그 시련을 거쳐서 도달하게 되는 관상적 합일 상태에 관해 다룰 때 더 넓게 살펴보겠다. 성인은 어둔 밤의 제2편과 영가사랑의 산 불꽃 대부분에서, 여기에 관해 철저한 연구를 남겼다. 능동적사랑, 즉 자기 나름의 열심한 방법으로 하나님과의 일치를 향해 걷기 시작하는 사랑에 관해서는 가르멜의 산길 3권에서 폭 넓게 다를 계획 이었다. 살아가면서 삶이 제시하는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보화에 집착하게 되어 하나님과의 일치에 방해가 되는 일이 없게 하고, 그 보다는 하나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해 세상의 보화를 사용하기를 원할 때, 영혼이 그런 것들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관해 상세히 저술하고 있다.

그 저서에서 성인은 내적 생활의 진보와 당연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 영성적 보화에 대해 영혼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쓰고자 했다. 그러나 그 주제에 대해 설명하기 바로직전에 그만중단 되고 말았다.

그는 영성적 보화를 여러 종류로 나누고 있는데, 그 첫 번째 것이 이른바 우리를 '완전하게 하는' 영성적 보화에 관한 것이다. 이 부분은 분명히 가장 흥미 있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완전하게 한다'는 제목만 보더라도 사랑을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데 직접 도움이 되는 것을 보여 주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자가의 요한은 그부분을 마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성인의 가르침이나 저서, 편지 등을 통해서 본다면, 사랑의 완성이 시작되는 근원을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 식별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 근원은 명백하게 바로 사랑 그 자체의 순수함과 힘이다.

      

 

순수한 사랑

      

십자가의 요한은 여러 저서에서 '순수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인의 이 말은 앞에서 페늘롱과 보쉬에 사이에 있었던 그 유명한 논쟁에서 언급된 표현과는 직접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논쟁의 요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깨달은 영혼이 그 초자연적 삶에서 과연 희망에 대한 사랑을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 영혼이 선을 향해 나아가게 하면서 그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더 이상 천국의 보상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위한 모든 요구를 거부하면서, 오로지 하나님만을 위해 행동하는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와 같은 문제가 십자가의 요한에게는 한 번도 떠오른 것 같지 않다. 십자가의 요한은 영혼에게 희망과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기르도록 권유하고 있다. 확실히 성인은 희망이 굳세어지는 것이 사랑을 방해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애덕은 영혼이 영원한 지복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가장 완전해진다고 보았다. 참으로 그때 영혼은 하나님을 '온 마음 다하여' 완벽하게 사랑하기 시작한다. 희망에 대한사랑은 이처럼 결국에는 궁극적 목적인 순수한 애덕에 대한사랑에 이르도록 되어 있다. 십자가의 요한에게 오로지 순수한 사랑이란, 사랑할 때 순수하고 단순한 자비심으로 변화되는 사랑을 말한다. 그렇게 될 때 그 영혼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자신의 만족을 찾지 않고 오로지 사랑하는 분의 만족만을 찾게 된다.

인간은 자기만족에 매우 쉽게 기울어지므로 가장 고귀한 행위에서도 자연스럽게 자기만족을 찾기 때문에 지향의 순수성을 더럽히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도 우리는 종종 그런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사랑에서 우리는 쉽게 상쾌함을 느끼는데, 만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도 이러한 만족감이 우리의 동기가 되고 있다면, 바로 그사랑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찾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 사랑의 활동이 개인적 만족을 찾고 있는 한, 그 사랑은 하나님께 향하지 않고 자기 안에서 끝나 버리고 만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 기울이는 우리의 사랑과 힘과 정력의 일부는 초자연적 관점에서 본다면 허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영혼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 안에서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만 찾아야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자기만족을 찾지 말라는 것이다.

순수한 사랑에 대해 영혼들을 잘 교육하기 위해 십자가의 요한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감정''활동(실천)'을 구별하도록 가르치려고, 첫째인 감정의 매우 상대적인 가치와 둘째인 활동으로서의 사랑의 실질적인 특성을 보여주었다.

우리 모두 안에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일지라도 쉽사리 감정이 따른다. 우선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 능력, 즉 감수성의 자리인 마음과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듯이 의지와 마음, 이 두 가지 능력 중 더욱 고귀하고 뛰어나고 영적이며 가장 참되게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의지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사랑에게 '선을 바라는 것'이라고 말할 경우, 우리는 바로 의지의 행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이탈리아어에서)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표현은 '당신의 행복을 바란다.'이다. 사실 의지가 사랑할 때, 언제나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마음도 쉽게 의지와 하나가 된다. 사랑은 특별한 방식으로 마음을 아주 상쾌하게 해 주는 것이며, 마음은 열정적인사랑에 사로잡혀 있음을 느낄 때 매우 즐거워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도 마음속에서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며, 그분을 사랑하며 온전히 마음을 빼앗길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영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도 기쁨과 만족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마음만이 사랑의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 역시 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강하게 쏠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의지도 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강하게 끌려가는 것을 느끼면서 기쁨을 느낀다. 영혼은 자신의 의지가 하나님께 강하게 끌리게 되어, 주님을 더욱더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라면 즉시 더욱더 자신에게서 뛰쳐나오겠다고 다짐할 정도가 되면, 그는 동시에 크나큰 기쁨을 느끼면서 그 기쁨 때문에 희생의 멍에가 가볍게 여겨진다.

이러한 모든 것은 다 괜찮으며, 우리의 사랑에 감정이 따르는 것을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지 않으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는 첫째 계명을 주실 적에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명하셨다. , 사랑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능력을 다해서, 따라서 마음의 감각적 능력도 사용해서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감정이 따르는 사랑에서는 자기만족을 채우려는 성향이 강한 우리의 본성이 자기만족을 추구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모든 능력과 모든 힘을 오로지 주님만을 위해 사용하면서 주님 이외의 것을 찾느라고 조금이라도 잃어서는 안 된다. 사랑 안에서 자기만족을 추구하려는 동기를 묵인함으로써 결코 사랑의 순수성이 퇴색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십자가의 요한은 사랑의 행위가 지니고 있는 영성적 가치와 감정적 가치 사이의 엄청난 차이를 설명한다. 사랑의 활동이란 의지의 행위이며, 그 의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피조물인 우리가 만일 '능동적인 경우에도 수동적인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면서 그분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그 외에 하나님에게서 무슨 행복을 바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따름으로써, 지성과 의지를 지닌 영적 피조물은 최선의 방식으로 창조주의 영광을 기리게 된다.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예와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 우리의 의지를 잃어버리기까지 완전한 방식으로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러한 영혼의 활동의 가장 높은 영성적 가치를 표현하면서 '사랑의 활동으로 영혼은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일치(합일)의 상태라는 것은 자기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 잃어버리는 것임을 뚜렷이 알 수 있다.

감정의 경우에는 전혀 다르다. 감정의 상태는 '(영혼을)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지 않으며', 그것은 다만 '자아'의 상쾌한 인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십자가의 요한은 명백히 단언한다. 사실 감정은 사랑에 따라오는 하나의 부수물일 뿐이고 사랑의 본질에는 전혀 속하지 않기 때문에,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감정은 필요하지 않다. 그와 반대로, 이미 보아 왔듯이 감정이 따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우에도 종종 자기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치우치게 되며, 그것은 명백히 불완전한 사랑이 되게 한다.

만일 그것이 하나의 결함이라면,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에 이르고자 하는 영혼은 거기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요한은 가르치기를, 사랑에서 감정을 중요시하지 않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오직 '사랑하는 하나님'께만 온전히 매달리라고 강조한다.

사실 영혼이 자기 나름의 노력으로 많은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는 결코 목표인 사랑의 완전한 순수성에 이를 수 없으므로, 주님께서 그 영혼을 만나러 오신다. 앞에서 말한 메마름의 위기에서, 주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일을 시작하시어 영혼을 감각적 집착에서 해방시켜주신다. 그리하여 감미로운 묵상을 하면서 깊이 느끼던 사랑의 달콤한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가르치신다. 메마름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영혼을 의지적 사랑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신다.

그런데 의지에도 스스로에게 집착하도록 만들 수 있는 어떤 평화로운 감정이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오셔서 메마름보다 훨씬 고통스런 내적 시련을 통해 이런 것에서도 마침내 영혼을 해방시켜 주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모진 시련의 도가니를 거쳐서 사랑은 완전히 정화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제부터 다루려는 가장 쓰라리고 가장 어두운 '영의 어둔밤' 이다.

그러므로 순수한 사랑, 즉 영혼이 자기 자신에게 다시 의지하는 일 없이 하나님을 위해 온 힘을 다 바치는 사랑에 관한 가르침이 바로 십자가의 요한의 견해의 근본이다. 따라서 이 가르침은 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르고자 하는 영혼이 저마다 보통은 통과해야 하는 메마름이나 영성적 황페함에 관한 깊은 영성적 설명의 열쇠가 되어 준다.

 

  

강렬한 사랑 

 

십자가의 요한도 '강렬한' 사랑에 대해 다루었다고 말한 바 있다. 성인이 가르멜의 산길 3권에서 사랑에 관한 논문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그가 말하고 싶어 했던 사랑은 우리의 인간적 본성을 지배하는 온갖 수단을 통제하고 조정할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의 모든 능력을 다스려서, 순수한 사랑이 유일하게 향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그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이 저서는 미완성이므로, 모든 기능의 활동에 미치는 이 사랑의 영향과 또한 영혼이 실제로 어떻게 이 경지까지 이르게 되는가에 대해 그가 의도했던 대로 다 설명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랑의 영역에 이르기 위해 열정적인 사랑이 필요함은 명백한것 같다. 영혼 안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어 그 속에서 저절로 끓임없이 솟아 나와 우리의 모든 행동에 자극을 주는, 바로 그런 사랑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어떤 방식으로 강렬한 사랑, 즉 영혼의 모든 생활을 지배할만한 사랑에 이르게 되는지 알기 위해서는, 실제로 어떤 방법이 가장 유효하게 사랑의 강렬함을 더해 주는지 알면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십자가의 요한의 제자들이 매우 명료하며 이론적이고 실제적인 가르침을 남겨 놓았다. 살라망카의 맨발 가르멜회 수사가 쓴 유명한 신학서 안에서 그 이론적인 가르침을 찾아볼 수 있다. 성인의 실제적인 가르침은 우리와 가장 친근한 성녀인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통해서 배우게 된다. 성녀의 사랑의 가르침은 온전히 우리의 스승인 십자가의 요한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라망카의 신학자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 안에서 애덕의 강렬함을 더해 주는 것은 우리의 덕행, 즉 애덕의 영향을 받아 행한 우리의 선행에 거의 좌우된다고 한다. 우리의 모든 선행은 당연히 애덕이 더 강렬해지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가 언제나 그 즉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종종 보류되었다가 천국에 들어가는 순간 비로소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 경우에, 우리가 얻게 되는 공덕은 이자에 비길 수 있다. 대체로 이자는 원금에서 생기는 것이어서, 그 이자는 그것을 얻은 자의 재산이면서도 원금과는 구별되어 있으므로 원금자체가 증가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마침내 이자가 원금에 합쳐질 때 원금이 불어나면서 이듬해에는 더 많은 이득이 생기고 이런 식으로 계속 불어나게 된다. 공덕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사랑의 증가도 때로는 이처럼 곧 사랑의 원금에 보태져서 그 사랑의 원금이 많아지며, 사랑의 강도가 즉시 한층 강렬해지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기울일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다 쏟아 선행을 할 때마다 증명된다. ,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온 마음으로 선행을 할 때는 언제나 이것을 체험하게 된다. 이때 우리의 마음은 더 강렬해지는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 열리게 되고, 그 사랑은 이미 진부터 갖고 있던 사랑과 합쳐지면서 그 강렬함이 더 증가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완전한 사랑에 이르고자 하는 영혼은 누구나 자신의 무력감과 본래의 좁은 마음을 극복하고 '마음을 다해서' 자신의 모든 일을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어떤 영혼은 착하기는 하지만 늘상 제자러 걸음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오히려 어떤 영혼은 얼마 후에 만나보면 언제나 더 발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전자는 선행을 하기는 하지만 피곤해지는 것이 싫어서 되는 대로 적당히 하고 마는데, 후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성심껏 행함으로써 그 보상으로 끊임없이 사랑이 증가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을 실천하도록,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늘 권유했다. 우리가 기꺼이 마음을 다해 하고 있다는 것을 주님께 보여 드리기 위해서 '모든 일을 웃는 얼굴로 노래하면서 사랑을 위해 하자."고했다.

"나는 노래하겠습니다, 비록 가시 속에서 내 장미를 꺽어 모아야 하더라도 언제나 노래하겠승니다."(성녀 소화 데레사 자서전)

성녀는 애덕과 통회의 행위에 '웃음'을 곁들이려고 노력했다. 성녀의 영혼의 특징인 끝없는 사랑과 빛나는 평온함을 드러내는 '웃음을 보여 주려고 힘썻다. 성녀야말로 '미소의 성녀'이다.

이러한 실천의 열매는 과연 무엇인가? 끝없는 사랑이다!

성녀는 죽음을 앞두고 "주님, 당신의 사랑은 어린 시절부터 저를 앞서갔고, 저와 함께 자랐고, 지금은 깊은 못이 되어 그 깊이를 알 길이 없습니다."라고 썼다(성녀 소화 데레사 자서전).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이 사랑으로 성녀는 자신의 주님을 사랑했고 모든 행동과 고통을 오롯이 그분께 바쳤다. 성녀는 그사랑 안에서 참으로 강해졌고 사랑의 법을 완전히 '실현시키게' 되었다. 이것은 성녀에게 주어진 특별한 은혜가 아니며, 다만 사랑의 증가의 법칙이 온전히 실현된 것뿐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성심껏 할 때, 사랑은 끊임없이 자라는 법이다.

희망과 사랑에 관한 십자가의 요한의 이 가르침은 매우 훌륭하다. 따라서 이 가르침을 열심히 실천하는 영혼은 영적인 길에서 '달려가게' 되며, 나날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진다. 영혼은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련시켜서 보는 신앙의 눈으로 삶의 현실을 바라본다. 그는 생기 찬 희망으로 하나님의 힘을 온전히 신뢰하며, 끊임없이 더욱 뜨겁고 힘차고 순수해지는 사랑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간다. 이런 영혼들은 자신이 하나님과의 합일을 이루어 가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이미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나날이 더욱더 '하나님을 찾을 것'이고, 또한 전보다 훨씬 자주 '그의 사랑이신 주님께서도 그 영혼을 찾으신다.' 이제 이러한 시샘을 하시는 하나님의 찾으심에 대해 다루도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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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Bless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