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안토니우스  (요약)

 

아타나시우스와 안토니우스의 생애

 

아타나시우스가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저술할 당시 그는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아리우스라는 사제에 의해 주창되고 확산된 아리우스 이단이 창궐했다. 그들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했는데, 예수는 거룩하고 위대한 인간일 뿐 하나님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4세기 내내 교회에 큰 해악을 끼친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싸웠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아리우스 이단은 니케아 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에서 단죄되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성자는 성부와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선언했다. 아타나시우스는 부제 신분으로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했고, 얼마 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 후 373년에 죽을 때까지 46년 동안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며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다. 그는 주교 재임 기간의 절반을 유배로 보내야 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아리우스파를 지원했던 황제들은 그를 먼저 트리어(Trier)로 2년간, 그다음 로마로 5년간 유배를 보냈다. 그러고서 그들은 아타나시우스에게 사형선고를 내려 그를 죽이려 했다. 356년 2월 8일 밤, 황제의 군대와 아리우스파 무리가 알렉산드리아의 산타 테오나(Santa Theona)성당을 포위했다. 그때 아타나시우스 주교는 성당에서 신자들과 기도하고 있었다. 아타나시우스는 거기서 탈출하여 사막에 있는 수도승들에게 피신했다. 계속된 박해에 그는 세 번씩이나 사막으로 피신해야 했다. 이렇게 그는 사막과 거기서 매우 훌륭히 생활했던 수도승들을 알게 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가 죽으면서(356년 1월 17일) 자신에게 물려준 외투(생애 91,8 참조)를 지니고 있었으며, 수도승생활이 전(全)교회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주교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늘 수도승생활에 큰 관심과 호의를 보였다.

유배지에서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와 관련된 증언들을 모아 성인의 생애를 통해 수도승생활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양심의 순교자(생애 47.1 참조)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이야기하고 있다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기술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사람'(vir Dei)의 모범과 수도승생활의 이상을 소개하고 있다. 이 작품은 바로 이것을 소개하는 최초의 문헌이자 니케아 신앙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문헌이다.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공의회의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를 참된 하나님에게서 난 참된 하나님으로 선언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옹호하면서 그분의 육화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가능해진 신화(神化)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예로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제시하고 있다.

안토니우스는 사막에서 싸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고, 훌륭한 전투를 치러 마침내 존재 전체가 은총으로 변모되어 거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 이 성인의 생애에 관한 진술이야말로 니케아 신앙에 대한 가장 훌륭한 방어다. 만일 아리우스파들의 주장대로 그리스도께서 본성으로써가 아니라 참여로써 하나님이셨다면, 인간 안에 절대 하나님과의 유사성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안토니우스의 생애는 수도승생활의 모델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 삶의 모범이자 신앙과 사랑이 육화한 모범이다. 이 작품은 단지 수도승들만을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참된 하나님이요 참된 인간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를 개인적으로 알았고, 성인에 대한 기억이 생생할 때 이 작품을 썼다. 따라서 이 생애의 기본 윤곽은 역사적 사실에 충분히 부합한다고 본다. 아타나시우스는 자기작품을 서방 수도승들에게 바치면서 그들이 이집트 수도승들을 본받고 또 이 작품을 널리 퍼뜨려 다른 이들도 읽게 하라고 권고한다. 이는 그 사람들도 수도승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주님이요 구세주께서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사람과 끝까지 당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것을 확신시키려는 것이었다(생애, 94,1 참조). 아타나시우스의 권고는 즉시 받아들여졌다. 얼마 후 안토니우스의 생애는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그 후 새딕(Saidic, 고대 이집트 방언)어, 아르메니아어, 시리아어, 아랍어, 에티오피아어, 조지아어 번역본들이 나타났다. 이 판본들의 방대한 확산은 안토니우스가 참으로 수도승들의 사부였고 안토니우스의 생애는 실제로 "이야기 형태로 된 은수생활의 규칙"이 되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안토니우스의 생애의 구조

0. 머리말

1. 서문 · 안토니우스의 소명 1-3

세 가지 복음 말씀 = 수도승이 되는 세 가지 조건

 

2. 안토니우스의 네 단계 = 수도승의 성장

1) 마을 밖에서 3-7

2) 무덤 안에서 8-10

3) 산상 요새에서(수도승들의 사부) 11-15

 

3. 금욕적 담화

1)금욕적 수행 16-20

2) 영적 투쟁 21-43

3) 결론 44

4) 내적 사막에서(모든 이의 사부)49-51

 

4. 하나님의 사람 안토니우스

기적, 예언, 금언 45-48+52-71

 

5. 호교론적 담화 72-80

(하나님의 사람 안토니우스의 귀착점) 81-88

 

6. 안토니우스의 죽음 89-92

7. 최후 모습 93

8. 맺음말 94

 

 

 

 

 

 

안토니우스의 여정

 

안토니우스의 생애는 매우 역동적이라는 점이 그 특징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 삶, 수도승생활, 안토니우스의 생애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여정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우리에게 일련의 연속적 단계를 제시하고 있다. E.T. 베텐코트(E.T. Bettencourt)는 이 작품을 전체적으로 네 단계로 나눈다. 안토니우스는 매번 더 큰 고독을 찾아 깊이 들어간다.

1단계(생애, 2-7) : 안토니우스는 열여덟 살에서 스무 살 사이(270년경)에 부모를 잃었고, 사도들의 모범에 따라 자기 재산을 팔고 금욕생활에 전념한다. 처음엔 자기 집 앞에서, 그런 다음 당시 금욕가들의 관습에 따라 마을 밖에서 금욕생활을 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가 초기에 했던 악령과의 싸움을 기록하고 있다.

2단계(생애, 8-10) : 안토니우스는 악령과 본격적으로 싸우기 위해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공동묘지로 떠난다. 한 무덤 안에 들어가 주님의 도우심에 의탁한다. 오랜 시험을 거친 후 서른다섯 살에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신다.

3단계(생애, 11-48) : 안토니우스는 사막으로 가 피스피르(Pispir)산위의 버려진 한 요새에 은거한다. 20년 후, 하나님의 은총으로 변모된 안토니우스가 요새 밖으로 나온다. 그는 영적 사부가 된다. 그의 성덕에 대한 명성이 널리 퍼지고 많은 이가 그를 찾아와서 도움과 조언을 구한다(생애, 16-43은 안토니우스의 긴 가르침을 전한다). 그 지역은 성인의 모범에 자극되어 사막에 살러 온 은수자들로 붐빈다. 병자들, 고통 받는 이들, 악령 들린 이들이 안토니우스에게 치유를 청하기 위해 사막으로 몰려든다. 이 3단계에서 안토니우스가 처음으로 세상으로 나간 이야기가 등장한다. 성인은 죽음에 처해진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러 알렉산드리아로 간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베드로가 순교한 후 박해가 중단된다. 안토니우스는 다시 사막으로 돌아가 밤낮으로 '양심의 순교'를 산다.

4단계(생애, 49-93) : 안토니우스는 하나님께 새로운 부르심을 받는다. 그것은 더 깊은 사막으로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그는 어떤 산 위에 정착하지만, 영적 부성(父性)의 은사에서 도망갈 수는 없었다.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구하러 왔고, 그리스도인들과 비(非)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도움과 위로를 구하려고 그를 방문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 작품 마지막 부분에 일련의 기적과 치유, 환시와 예언을 배치했다. 이것들은 성인 안에 하나님이 현존하신다는 표지다. 안토니우스는 아리우스파들을 논박하기 위해 두번째로 알렉산드리아로 간다.

전승에 따르면, 백 살이 넘은(356년) 성인은 이 세상에서 성부께로 가면서 결정적인 탈출을 완성한다.

 

1. 주님 말씀을 따르는 순종의 길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가 날 때부터 은거 생활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안토니우스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양육되었고 부모와 집 외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성장하여 소년이 되었을 때 그는 글을 배우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소년들과의 교제를 피하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생애, 1,2). 안토니우스는 아주 어릴 때부터 '세상에서 도피(fuga mundi)하고, 상황에 의해 부과된 일종의 은둔생활을 한다. 안토니우스의 가정은 박해가 끝날 무렵의 그리스도교 가정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 충실한 신앙인은 사실상 세상과 근본적으로 분리되고 이교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 될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아동은 그 자체로 세상에서 분리된 아동이었고, 안토니우스는 어려서부터 주변인으로 살아야 했고 본의 아니게 은거 생활을 해야 했다.

몇 년 후 교회의 평화 시기가 시작된다. 260년에 황제 갈리에누스(Gallienus)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의적인 칙령을 반포하여 그들에게 예배 장소들을 돌려주고 그들을 괴롭히지 말라고 명령한다. 이로 인해 약 40년 동안 교회는 비교적 평화를 누린다. 당시 안토니우스는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하나님만을 찾기 위해 은둔과 고독의 삶을 자유롭게 선택한다. 어린 시절에 강제된 고립이 하나님 얼굴을 찾기 위한 자발적 고독으로 바꿔다.

부모가 죽자 안토니우스는 누이와 단둘이 남는다. 어느 날 교회에 가면서 생각한다. 사도들이 어떻게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으며, 사도행전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재산을 팔아 그것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았는지를 숙고한다. 교회에 들어서자 그는 마태복음 19장 21절의 말씀을 듣는다(생애, 2,2-3참조).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마 19:21). 안토니우스의 소명(召命)은 하나님 말씀에 기원하고 있다. 그는 오로지 주님의 이 말씀에 순종하여 그것을 실천하기를 바란다. 그의 삶은 이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

안토니우스는 자기가 처음으로 행한 바를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친다. 즉, 자신의 여정은 성경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는 주저 없이 곧장 순종했다. 그는 늘 성경을 신뢰하고 거기서 영감을 받고 악령과 싸울 힘을 얻는다.

주님에게 같은 말씀을 들었던 복음의 부자 청년은 슬퍼하며 떠나갔지만, 두 세기 반 이후 같은 말씀을 들은 또 다른 부자 청년 안토니우스는 자기 보화가 하늘에 있음을 확신하고 자기 재산을 팔아 주님을 따른다. 안토니우스는 지상의 부는 참된 보화가 아니라 하나님 옆에 있는 것을 유일한 선으로 여기며 그것을 선택한 사람에게 지상의 부는 장애물이요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

"안토니우스가 한 번 더 주님의 집에 들어가 복음에서 주님이 '내일 일은 내일 염려 할 것이요'(마 6:34)고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나가서 남겨 둔 약간의 재산 역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생애, 3,1). 여기서 우리는 점진적 포기를 보게 된다. 처음에 그는 누이의 생계를 위해 재산의 일부를 남겨 두지만, 복음의 또 다른 말씀을 듣고 그것마저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다. 이제야 부에 대한 걱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져 주님을 따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말씀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더욱 철저히 따르게 한다. 그는, 주님은 모든 것을 원하시는 요구가 많은 하나님이라고 배웠다. 그의 이런 생각은 후에 수도승들에게 한 권고에서 나타난다. 안토니우스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누이동생을 위해 남겨 둔 재산마저 처분한 안토니우스는 신뢰할 만한 동정녀들에게 누이동생을 맡긴다. 그리고 자신은 집 앞에서 자기 자신에게 '주의'하면서 금욕생활에 전념한다(생애, 3,1 참조). 안토니우스는 이제야 '자기 자신에게 주의'하는 법을 배운다. 어느날, "압바(영적 사부) 안토니우스는 하나님 심판의 심연을 주의 깊게 살피며 물었다. '주님, 어째서 어떤 사람들은 젊은 나이에 죽고 어떤 사람들은 고령으로 죽습니까? 왜 어떤 사람들은 가난하고 어떤 사람들은 부유합니까? 어째서 악인들이 부유하고 의인들은 가난합니까?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토니우스, 너에게 주의해라. 이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것을 알필요가 없다"'(금언, 2). 이 주제, 즉 '자기 자신에게 주의' 혹은 '마음 돌보기'는 수도승 문학 전체의 핵심 주제가 된다. 안토니우스는 고독 속에서 점차 자기 마음을 아는 법을 배우고, 평화를 깨는 온갖 생각을 죽이는 법을 습득하고 영들을 식별하는 기술을 터득한다.

안토니우스는 이 여정을 홀로 걷지 않는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한 나이 든 금욕가를 알게 되고 그의 제자가 된다. 영적 부성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즉, 제자와 함께 호흡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가 자기 자신을 아는 법, 자기 마음을 아는 법,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오는 생각들과 악마에게서 오는 생각들을 식별하는 법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모든 영적 여정은 포기와 순종으로 시작된다. 안토니우스는 자기 재산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포기했지만, 동시에 자기 뜻과 모든 개인적인 계획도 포기했다. 그래서 이미 주님을 따르는 여정을 충실히 거친 사람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께서 자신을 인도하게 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수도승들의 사부'의 금욕생활 초기 단계를 안내했던 원로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단지 이렇게만 말하고 있다. '악령과의 초기 싸움에서 승리한 안토니우스가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혁신하기 시작하며 원로에게 사막으로 가자고 제안했을 때 원로는 자기가 나이가 많고 또 그것은 새로운 관습이기 때문에 거절하고 안토니우스 혼자 떠나게 한다'(생애, 11,1-2 참조). 우리는 그 거룩한 금욕가가 안토니우스의 위대함 뒤로 사라졌고, 세례자 요한처럼 작아져 제자를 사부가 되게 했다는 것 외에는 아는 바가 없다. 안토니우스는 수도승들에게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영성생활에 더욱 경험 있는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라고 권고한다.

안토니우스는 수도승생활 초기를 이렇게 보낸다. 그의 하루는 기도와 일로 이루어졌다. 안토니우스의 금언은 주림이 보내신 천사가 그에게 '기도하고 일하라'는 규칙을 가르쳤다고 말하고 있다(금언, 1 참조). 안토니우스는 고독의 고질병, 곧 정오의 악령(시 91:6) 아케디아(akedia)를 극복했다. 이 질병은 일종의 영적 태만, 영적 무기력, 낙담, 실의로서 특별히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공격한다. 그래서 수도승이 이 여정을 끝없이 길고 고된 것으로 느껴 중도에 포기하도록, 즉 자기 소명를 저버리고 도망치도록 유혹한다. 악령은 안토니우스가 수도승생활을 포기하게 하려고 과거에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면서 유혹한다(생애, 5,2 참조). 악령이 일으킨 이 '과거에 대한 기억'에 안토니우스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mrmoria Dei), 지속적인 기도, 온종일 노동을 하는 동안에도 역시 성경에 대한 '되새김'(uminatio)으로 응대한다. 안토니우스에게 나타난 환영은 두 가지 계명을 권고하는데, 곧 노동의 계명과 부단한 기도의 계명이다.

4세기에 노동의 필요성과 관련하여 큰 논쟁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소아시아에서 확산된 하나의 영성 경향, 즉 메살리아니즘(nossalianism, '기도하는 사람' 이단으로 흘렀다)의 경향인데, 이들은 끊임없는 기도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영적 인간은 어떤 노동도 해서는 안 된다고까지 주장했다. 교부들의 다음 두 금언은 이들 앞에서 교부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어느 날, 한 수도승이 압바 실바누스에게 갔는데, 수도승들이 일하는 것을 보고서 말했다. "사라질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들 마시오(요 6:27 참조).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했소(눅 10:42)." 압바 실바누스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자기 제자를 불러 말했다. "자카리아스, 이 형제에게 책 한 권을 주고 아무것도 없는 독방으로 안내하거라." 식사 시간에 그 수도승은 누군가 식사를 위해 자기를 부르러 오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자 압바 실바누스에게 물었다. "사부님, 오늘은 형제들이 식사하지 않습니까?" 실바누스가 식사한다고 대답하자 왜 자기를 부르러 오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실바누스가 말했다. "당신은 영적인 사람이라 이 음식이 불필요하기 때문이오. 하지만 육적인 우리는 식사하기를 바라고 그래서 일을 하는 것이오. 당신은 좋은 몫을 선택했소. 그래서 온종일 독서하고 육적인 음식을 먹기를 바라지 않소." 이 말을 듣고 그 수도승은 땅에 엎드려 용서를 청했다. 압바 실바누스가 그에게 말했다. '마리아에게는 절대적으로 마르다가 필요하오. 사실 마르다덕에 마리아도 찬양받는 것이오." (교부들의 금언 실바누스 5 (PG 65,409CD)참조)

또 다른 금언은 압바 루키우스의 금언이다. 몇몇 메살리안 수도승이 압바 루키우스를 찾아와 말했다. "저희는 저희 손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사도 바울의 명에 따라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압바 루키우스가 말하였다. "당신들은 먹거나 잠자지 않소?" 그들이 "잡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원로가 말했다. "당신들이 잠잘 때 누가 당신들을 위해 기도하오?" 그들은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지 몰랐다. 원로가 그들에게 말했다. "유감스럽지만 당신들은 말하는 대로 실천하지 않는구려. 당신들에게 내가 어떻게 내 손으로 일하면서도 끊임없이 기도하는지를 보여 주겠소. 나는 하나님과 함께 앉아 종려나무 가지를 적셔 새끼를 꼬면서 말하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시 51:1). 이것이 기도가 아니겠소?' 그들은 "예"라고 말했다. 그러자 압바 루키우스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일하고 기도하며 온종일을 보내면 대략 동전 열여섯개를 버오. 그중 두 개는 자선으로 내어 주고 나머지로 내 생계를 유지하오. 동전 두 개를 얻은 사람은 내가 먹고 자는 동안 나를 위해 기도하오. 그렇게 나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계명을 채우고 있소."(교부들의 금언 루키우스, PG 65.253BC참조.)

안토니우스도 일을 하여 자기가 필요한 것을 마련했고 수입의 일부를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남겨 두었다. 그는 일하면서 기도했고 자기의 일용한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되뇌었다. "성경독서에 그렇듯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에 거기에 기록된 것 중 아무것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모두 기억했습니다. 그에게는 기억력이 성경을 대신했습니다"(생애, 3,7). 성경 암기는 실제 이집트 사막에서 널리 퍼진 수행이 된다.

안토니우스는 자기 제자들에게도 성경의 계명들을 마음으로 배우라고 권고한다(생애, 55,3 참조). 안토니우스의 위대한 교육은 이러한 가르침으로 시작한다. "우리를 가르치는 데 성경이면 충분합니다"(생애, 16,1). 성경이면 충분하다. 그가 제자들에게 말을 할 때, 그의 말은 큰 주의와 존경으로 숙고하고 바라보고 경청한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다른 것은 없었다. 말씀은 날마다 그것을 경청한 사람의 삶 안에 육화된다. 순종을 낳는 경청이며, 큰 겸손과 복종으로 하나님 뜻을 찾으려는 독서다. 성경이 담고 있는 모든 것을 이해하듯이 떠벌이지 않고, 모든 것을 설명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안토니우스가 그랬듯이 모든 사막 교부가 성경에 대해 말하기를 매우 삼갔다. 성경을 연구의 대상으로 만들거나 신비를 헛되고 무익한 호기심으로 더럽힐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압바 팜부스의 금언은 사막 교부들이 성경을 어떻게 읽었는지 그 예를 보여 준다. 단순하고 문맹이었던 팜부스가 한 원로에게 성경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원로는 시편 39편의 구절을 읽기 시작했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시 39:1). 팜부스는 이 구절을 듣고서 다른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이렇게 말하며 떠났다. "내게 그것을 실천하는 법을 배울 힘이 있다면 내게 이 구절로 충분합니다."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생활했고, 이 때문에 모두에게 사랑받았습니다"(생애, 4,1). 안토니우스 여정의 초기 단계들은 평온하고 평화로웠다. 열정으로 가득한 그는 복음 말씀에 순종하여 재산을 포기했고, 마을과 친구들을 떠나 수도승생활의 초기 단계를 보냈다. 사막 교부들의 경험에 따르면 악령은 초심자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주님은 당신 자비로 당신을 따르는 사람의 길을 보호하시고 그를 유혹에서 지켜 주신다. 그러나 이제 안토니우스는 하나님 말씀의 양식과 영성생활에 이미 진보한사람의 형제적 권고들을 받으면서 악령과의 싸움에 직면한다. 주님은 안토니우스의 마음이 일치되고 통합되기를 바라시지만, 그 원수는 안토니우스의 마음속에 분열을 일으킨다.

영적 성장은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안토니우스의 생애 각 단계는 위기, 시험과 유혹의 순간으로 특징지어진다. 악을 거스른 싸움은 언제나 마음의 심연까지 도달할 정도로 더 깊이 나아간다. 안토니우스는 여기서 마음의 심연인 지옥으로 내려간다. 은총의 빛으로 변모된 새 인간으로 다시 부활하기 위해서다. 안토니우스가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초심자의 열정으로 행한 모든 것이 악령에 의해 뒤틀려져 부당하게 보일 정도까지 이른다. 그의 소명은 몽상처럼 보이고, 악마는 생각의 폭풍을 일으킨다. 또 안토니우스의 눈앞에 과거와 그가 포기했던 것들을 제시한다. 안토니우스는 그 유혹을 이기고 좌절을 극복한다.

안토니우스는 유혹과 싸우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법을 배우고 자기 힘을 불신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는 기도를 통해 유혹을 극복한다. 아타나시우스가 전하는 바처럼 이것은 주님께서 안토니우스 안에서 이루신 첫 승리였다(생애, 7,1 참조). 안토니우스는 악에 맞선 이 첫 싸움에서 위로받고 강해졌지만, 싸움을 늦추지 않는다(생애, 7,2-3 참조). 그렇게 그는 꾸준히 기도와 철야와 단식에 전념했다(생애, 7,6-7참조).

항상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요청(막 13:35 참조)과 '어떤 악령들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갈 수 없다'는 주님의 권고에 따라 식욕과 수면욕과 같은 인간의 기본 욕구에 대한 억제가 있다. 철야는 주님의 날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마음을 유지해준다. 단식은 또 다른 굶주림, 즉 말씀에 대한 굶주림을 향해 있다. 그리스도교 금욕수행은 결코 수행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도록 더욱 깨어 있게 해 준다. 안토니우스의 참된 금욕수행은 지속적인 기도, 성경에 대한 경청이다.

날마다 안토니우스는 회개하도록, 과거를 잊고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말도록, 그를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경청하도록 부름을 받는다(생애, 7,11 참조). 안토니우스는 수도승생활의 선구자인 엘리야에게서 배워야한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며 사막의 고독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사막의 은수자 엘리야도 낙담의 유혹을 받았지만, 주님에게서 위로와 위안을 받고 말씀의 양식을 먹고 일어나 다시 여정에 착수했다(왕상 19:4-8 참조).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금욕가는 거울에서 보듯이 위대한 엘리야의 삶을 바라보면서 항상 자기 삶을 인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생애, 7,13).

 

 

2. 영적 투쟁

악령과의 초기 싸움 이후 안토니우스는 자기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한 무덤으로 들어간다. 지금까지는 당시 금욕가들의 관습에 따라 주거 지역 외곽에서 생활했지만, 이제는 사막으로 나아가 자신의 비참함과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면서 사막의 고독 속에 있다.

은둔 수행은 널리 확산되지 않았더라도 이집트의 이교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집트에는 멤피스(Memphis) 신전에 은둔해서 살면서 세라피스(Serapis) 예식을 위해 성별된 사제들이 있었다. 안토니우스의 은둔을 설명하기 위해 이교 사제들의 이런 관습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고대인들은 무덤과 사막을 악령들이 거주하는 장소로 생각했다. 복음에도 이런 생각이 나타난다(참조: 막 5:2-5; 눅 8:29).

안토니우스는 버려진 무덤에 들어가 거기서 악령과 대면한다. 그는 고독과 침묵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죽는다. 여기서 그는 무시무시한 시험, 육체적으로도 그를 잡아 찢었던 시험을 당한다. 그를 방문한 한 친구가 그가 실신한 것을 보고 그를 마을로 옮기지만, 안토니우스는 다시 일어나 사막으로 돌아가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면서 인내한다. 이제 감히 안토니우스에게 맞설 악령들은 없게 되고, 그 자신이 악령들에게 용감하게 맞선다. 그는 악령들을 식별하는 법을 배웠고 주님에게서 '싸움의 기술'을 배웠으며(시 18:33-35 참조), 하나님 말씀과 시편 기도로 싸웠다. 처음에 악령은 악을 표상하는 자기 개들을(시 59:7 참조) 소집하고, 후에 맹수의 모습을 취한다"(생애, 9,6-7참조).

이 발현들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누군가는 이집트의 무덤 벽에는 죽은 이들의 영역, 오시리스(Osiris)의 법정에서 망자의 심판, 지하계로 태양신의 밤 여행, 죽은 이들의 세계를 묘사하는 그림들이 장식되어 있었다고 증언한다. 고대 이집트 신앙에 따르면 태양신은 밤 동안 밤의 열두 시간에 부합하는 열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지하계를 통과했다. 각 '시간'에는 일정 수의 신들, 영들, 동물들의 형상이 거주했다. 이 여행 중에 태양을 받아들였던 망자들의 울부짖음, 태양이 솟아오르기 위해 죽은 이들의 영역을 떠나는 순간에 탄식과 비탄이 따라왔다.

안토니우스가 본 발현들의 원천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무덤 속에 갇힌 안토니우스는 무덤 벽에 그려진 이 형상들이 살아 일어나 자기를 공격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스도인인 안토니우스를 거스른 일종의 이집트 이교의 공격이다. 다른 이들은 이 발현들이 고독 속에 있는 안토니우스의 잠재의식에서 올라와 내면의 환영들에 투사되어 실재처럼 보인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아마 안토니우스에게 나타나는 야수들은 박해 때 그리스도인 순교자들을 공격했던 야수들과도 관련되었을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순교를 갈망하며 피로써 자기 신앙을 증거하기를 바라고 자기 상상으로 이 야수들을 보며 순교를 각오하기 시작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가 사막을 떠나 알렉산드리아 박해 때 투옥되어 사형 언도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했다고 전하고 있다. 안토니우스는 권력자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지만, 피의 순교를 당하진 않는다. 박해가 끝나고 안토니우스는 사막으로 돌아가 거기서 "양심의 순교"(생애, 47,1)를 산다. 그것은 내적 순교로서 다양한 동물들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를 공격하는 욕정들을 거스른 싸움이다. 안토니우스는 자기 무덤 즉, 독방의 고독 속에서 신앙의 밤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침묵을 철저히 경험한다. 사막 교부들의 한 금언은 수도승의 독방을 바빌론의 불가마(단 3:49 참조)에 비유한다.

이후 모든 수도 교부가 독방에 항구히 머물 필요성을 강조하게 된다. 세대를 통해 반복되어 온 한 고대 금언은 말한다. "독방에 앉아 머무르시오. 그러면 독방이 당신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오." 심지어 수도승은 자기 독방에 항구히 머물기 위해선 온갖 다른 형태의 금욕수행도 포기할 수 있을 정도였다. 교부들은 온갖 분심을 피하면서 자기 마음속 생각들을 걸러 내고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해 고독과 침묵의 시간과 공간을 지키는 것을 영성생활의 근본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안토니우스의 금언에서 같은 주제를 접하게 된다. "물고기가 물기 없는 곳에 오래 머무르면 죽는 것처럼, 수도승이 암자 밖에서 지체하거나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머무르면 하나님 안에서의 깊은 평화를 빼앗깁니다"(금언 10).

수도승은 자기 독방의 고독 속에서 사막 교부들이 말하는 바대로 영성생활의 가장 큰 노고를 완수한다. 안토니우스는 이 싸움에 항구했고 극한의 상황에서 하나님 부재의 체험도 기도가 되게한다. "'어디 계셨나요? 제 고통을 끝내기 위해 왜 처음부터 나타나지 않으셨나요? 그러자 한 소리가 안토니우스에게 들렸습니다. '안토니우스, 내가 여기 있지 않았느냐! 하지만 나는 네가 싸우는 것을 보려고 기다렸단다. 네가 저항하고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항상 너의 도움이 될 것이고 네 이름이 어디서든 기억되게 하겠다"'(생애, 10,2-3). 주님의 말씀에 위로받은 안토니우스는 기도하고, 자기에게 또 다른 단계가 요구되고 있음을 이해한다. 그것은 여전히 더 깊은 고독 속으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라는 요구였다. 이는 오리게네스 영성에서 신앙인의 여정을 상기시킨다. 즉, 사막에서의 여정은 악령과 유혹들을 거스른 싸움을 가리키지만, 사막에서도 하나님은 당신 자녀들에게 안식의 장소, 평화의 오아시스를 제공하시어 약속된 땅을 향한 오랜 여정 중에 그들을 위로하신다.

 

3. 사막이 도시가 되다.

지금까지 안토니우스는 초기 그리스도교 금욕가들이 걸었던 길을 따랐지만, 35년 동안 고독을 체험한 후 새롭게 시작한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려는 더 큰 열정으로 자기 거처를 떠나 내가 말했던 그 원로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원로에게 사막으로 가서 자기와 함께 지내자고 간청했습니다. 원로는 나이 때문이든 거기에 아직 그런 관습이 없었기 때문이든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안토니우스는 혼자 그 산으로 떠났습니다"(생애, 11,1-2).

보통 수련자가 수도승생활의 초기 기본 원리들을 배울 때까지 일정 기간 스승과 제자는 함께 생활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다시 어떤 것을 제안한다. 영성생활에서 이제 더 이상 제자도 수련자도 아닌 안토니우스는 연로한 자기 스승에게 더 이상 마을 변두리나 거주 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이 아니라 더 깊은 사막에서 일종의 공동생활을 하자고 제안한다. 스승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자 안토니우스는 혼자서 사막으로 떠나 버려진 요새에서 약 20년 동안 또 다른 고독의 시기를 보낸다.

성경에서 사막은 이중의 뜻을 지니고 있다. 사막은 은총과 유혹의 장소, 하나님이 당신 백성과 계약을 맺는 장소,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리는 장소이지만, 동시에 반역의 장소, 불성실하고 반역하는 세대가 죽어야 하는 불모지, 백성의 죄를 대신 진 속죄양을 내보냈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막은 은총과 유혹을 동시에 체험하는 장소다.

안토니우스의 생애에서도 사막은 이런 이중의 뜻을 지닌다. 안토니우스는 악령과 싸우기 위해 사막으로 간다. 악령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후 세상을 하나님께 내드려야 했고 불모의 장소로 물러갔다. 악령과의 싸움 끝에 안토니우스는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은 안토니우스의 마음에 말씀하시고 당신 은총의 능력으로 그를 변모시키신다. 그러자 버려진 요새가 변모의 산, 타보르 산이 된다. 안토니우스는 "신적 입김으로 영감 받은"(생애, 14,2)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는 사막에 묻혀 자기 자신에게 죽었고, 하나님은 그를 새로운 삶으로 부르신다.

안토니우스가 추구했던 고독은 사람들로부터의 도피도 아니고 고립도 아니다. 그는 사막에서 시험을 통과했고, 하나님의 얼굴을 찾았고 아가페의 은사를 받았다. 하나님 안에서 생활한 고독의 첫 열매는 사랑이며, 모든 사람에 대한 깊은 동정심이다.

마을 변두리에서 생활했던 여정 초기부터 그는 이미 모두에게 사랑받았고 자기 주변으로 사랑을 퍼트렸디"(생애, 4참조). 이제 아타나시우스는 그를 변모된 성인으로 묘사한다. 그는 고통 중에 있는 이에게 위로와 희망의 말을 전하고, 조언을 해 주고 위로하고 격려한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 자를 이제 모든 사람이 찾는다. 그의 모범에 감화된 많은 이가 사막에서 그를 따르며 그의 제자가 된다. 마침내 영들의 식별 은사를 받은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통과한 길을 다른 이들에게 제시할 수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 지점에 영들의 식별에 관한 위대한 가르침을 배치한다(생애, 16-43 참조).

안토니우스의 가르침은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다.(생애, 16,1 참조). 그는 성경에서 삶의 양식을 배웠고(생애, 2-3 참조) 영들의 식별기술을 터득했다. 그는 자녀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아버지처럼 자기가 배운 바를 제자들에게 전해 준다. 첫 권고는 영적 투쟁을 포기하지 말고, 영적 무기력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권고다. "'유혹을 경험하지 못하면 아무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지요.' 그는 말했다. '유혹을 피하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오'"(금언 5).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자기 형제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며 이렇게 전한다. 즉, 하나님은 우리 힘에 부치는 유혹을 당하게 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직면해야 하는 시험들은 과거 성인들이 당한 것과 같이 그렇게 고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세대가 약하고 그런 전쟁을 견딜 만한 힘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금언 23)이라는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모세나 여호수아가 사막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듯이 수도승들의 무리를 인도한다. 모세처럼 그도 하나님과 백성 간의 중개자이고 하나님이 그에게 계시하신 삶의 율법을 부여한다. 그리고 여호수아처럼 약속된 땅을 정찰하라고 주님이 약간 앞서 보낸 척후병이자 안내자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생명의 포기와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주님에 희망을 두는 자, 밭에서 숨겨진 보물과 값진 진주를 발견한 자는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모든 것을 판다(마 13:44-46 참조). 수도승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고 그분과 만나는 마지막 순간을 고대한다. 수도승은 자신의 전 존재로 모든 것은 지나가고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영원히 남으리라는 것("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막 13:31)을 기억할 뿐이다.

꾸준히 선을 추구하고, 선은 그것을 찾는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다는 확신을 가지라는 격려 후에 그의 가르침은 영들의 식별에 관한 긴 담화로 이어진다. 많은 이가 수도승생활에 크게 열광하면서 사막에서 안토니우스를 따르지만, 그들은 악령의 간계에 맞서 싸우는 데 필요한 무기를 갖추지 않고 일시적 열정에 사로잡힐 위험을 안고 있다. 안토니우스는 하나님을 부르고, 그분께 기도 중에 집요하게 영들의 식별 은사를 청하라고 권고한다.

악령은 어떤 수단을 써서 그리스도인에게서 평화를 빼앗고, 그를 자기 노예로 만들기 위해 주님에 대한 봉사를 못하게 하려고 애쓰는가? 안토니우스는 자기 경험을 이야기한다. "악령들이 그리스도인들, 특히 수도승들이 금욕수행의 노고를 사랑하고 진보하는 것을 보면, 그들을 공격하고 유혹하려고 달려듭니다. 그리고 그들의 여정 내내 걸림돌을 놓습니다. 걸림돌은 불순한 생각들입니다"(생애, 23,1.) 악령들이 제안한 생각들과 기억들에 생각으로, 하나님 기억으로, 지속적인 기도와 말씀에 대한 묵상으로 맞서야 한다.

악령은 이런 식으로 마음을 유혹하는 데 실패하면 잠잠해지지 않고 되돌아와 책략과 간계를 써서 다시 공격한다. 그들은 온갖 환영으로 나타나 유혹하는데,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신앙과 십자성호로 무장할 때 즉시 사라지기 때문이다(생애, 23,4참조). 그러나 또 다른 유혹이 있는데, 무엇보다도 영적인 사람을 급습하는 유혹이다. 악령은 세상의 우상들을 섬기지 않고 욕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신앙인을 보면, 거짓 예언이라는 더 교묘한 방법으로 그를 유혹한다. 안토니우스는 헛된 환상들에게서 자기 형제들을 보호한다. 그것은 자기가 예언자이며, 모든 것을 예견할 줄 안다고 믿게 하는 교만이다.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권고한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어떤 것을 몰랐다고 해서 심판받지 않고, 그것을 알았거나 알고 있다고 해서 복되다고 선언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을 지켰는지, 계명을 충실히 지켰는지에 따라 각자 심판받게 됩니다"(생애, 33,6). 속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은 악령의 특성이다. 악령은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에게도 그렇게 했다. 죄는 항상 속임수, 사물에 대한 그릇된 환시, 실재의 왜곡이 낳은 열매다. 악령은 심지어 성경에 의지해 속이기까지 한다. 주님의 유혹 사화에서도 드러나는 바와 같다. 악령의 속임수를 알아차리는 법을 배운 안토니우스는 악령의 제안일 뿐인 금욕수행과 완덕에 대한 헛된 갈망들에 맞서 수도승들을 보호한다. 악령들은 시편을 노래하고 성경을 인용한다(생애, 25,2-4참조)

단식, 철야, 금욕수행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결코 그 자체가 절대시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도움을 주는 수단일 뿐이다. "어떤 이들은 금욕수행으로 자신의 몸을 해치지만, 그들은 분별력이 부족하여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금언 8). 우리는 사막 교부들의 금언에서 분별력 없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거짓 금욕수행을 경계하는 내용을 자주 접하게 된다. 한 이교 철학자가 어떤 수도승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여러분은 이 고독한 곳에서 우리보다 무엇을 더 행하시오? 단식하시오? 우리도 단식하오. 육체적인 고행을 하시오? 우리도 그렇소. 우리도 이 모든 것을 하오. 사막에 살면서 무엇을 더 하시오? 수도승이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고 우리 마음을 돌보오.' 그들이 원로에게 대답했다. '우리는 이것을 할 수 없구려."' 또 다른 금언에서 악령 자신이 금욕수행을 하는 내용이 나온다. "어느 날 압바 마카리우스가 종려나무 잎을 모아들고 습지에서 자기 독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악마가 낫으로 그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이링게 소리쳤다. 아카리우스, 네가 가하는 큰 폭력 때문에 나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 내가 너를 공격하려 해도 할 수 없기 때문이지. 하지만나는 네가 하는 모든 것뿐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을 할 수 있지. 너는 지금 그리고 이후에도 단식하겠지만, 나는 원기 회복을 위해 결코 어떤 음식도 필요하지 않지. 너는 자주 철야를 하지만, 나는 절대 잠들지 않지. 하지만 나는 네가 단 한 가지에 있어서만은 나보다 훌륭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마카리우스가 '그것이 무엇인데? 라며 물었다. 그러자 그가 '내가 너를 이길 수 없는 이유는 오로지 너의 겸손 때문이지'라고 대답했다"(교부들의 금언 라카리우스 11)

교부들은 분별력 없이 행해진 단식과 철야에 신앙, 겸손, 애덕, 순종을 대립시킨다. 안토니우스도 겸손만이 "땅 위로 던져진 원수의 모든 올가미"(금언 7)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느 날 안토니우스는 위대한 덕행으로 형제들에게 칭찬받은 어떤 수도승과 함께하며 그가 모욕을 견디는지 보기 위하여 그를 시험했다. 그가 모욕을 견피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안토니우스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앞은 잘 꾸며진 마을이지만 뒤는 강도들에의해 약탈된 마을과도 같소"(금언 15).

이 모든 것 안에는 자기 의화(義化), 교만, 자기 공로를 통한 자력구원이라는 무시무시한 유혹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비와 사랑으로 의롭게 될 것이다. 악령이 우리에게 과거의 죄들을 상기시켜 우리가 범한 악행에 대해 우리를 책망할 때조차, 우리는 그를 믿어서는 안된다." (생애, 25,4 참조). 안토니우스는 하나님께 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분 자비에 의탁하며 용서를 받아 자유롭게 된다. 범한 죄들에 대한 기억에 결부된 죄책감은 악령의 작용으로서 어떠한 영적 진보도 마비시키고 방해한다.

안토니우스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복음적 금욕수행은 예속이 아닌 해방의 행위다. 복음적 금욕수행의 열매는 기쁨과 평화인 반면, 악마적 금욕수행 열매는 슬픔, 영적 무기력, 낙심이다. 악령들은 "단순한 사람들을 절망하게 하여 금욕수행이 무익하다고 단언하게 하려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은수생활이 버겁고 힘든 것으로 여기게 하면서 그 삶을 혐오하게 하고 또 자기들(악령들)에 맞서 싸우며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생애, 25,4-5). 자신과 자기 힘에 의지하는 사람, 스스로 구원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조만간 자기 죄와 자기 한계들을 경험하게 되고 그로 인해 압박을 받는다. 하나님의 자비에 의탁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그분께 던져 버리고(금언 4 참조) 용서를 받고 살아간다. 하나님 자비는 신앙인이 영적 수행을 하도록 초대한다.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자유로워진 그는 이제 자신을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성령의 바람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안토니우스는 말했습니다. 악령들은 자주 주님이 욥에게 악마를 알게 하신 ‥‥ 것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생애, 24,1). 안토니우스는 고통과 시험 중에서도 욥이 그러했듯이 하나님을 아는 법을 배웠고 자신의 연약함과 비참함을 경험했지만, 하나님 사랑의 능력도 경험했다. 하나님은 인간이 홀로 버려졌다고 느낄 때조차도 현존하시고 활동하신다.

성령께 가르침을 받은 안토니우스는 빛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고후 11:14 참조)의 정체를 폭로하는 법을 배우고, 주님의 목소리를 식별하는 법을 터득한다. 하나님의 호소는 처음엔 두려움을 자아내지만, 곧 두려움은 사라지고 기쁨, 평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따른다. 이는 안토니우스도 했던 체험이다.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분을 사랑하오.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내기'(요일 4,18) 때문이지요"(금언 32). 하나님은 항상 침묵 중에 조용히 오신다. 악령과 악령에게서 오는 모든 것은 힘과 고함으로 압도하려 하고, 두려움을 자아내고 정신을 혼란시킬 정도로 떠들썩하다.

기도와 경계는 영들의 식별 은사를 받기 쉽게 해 준다. 안토니우스는 영들의 식별 은사를 받기 위해 기도하라고 거듭 강조한다(생애, 38,5; 22,3 참조). 우리 마음을 지킬 필요가 있는데, 이는 악령들이 "우리 안에서 발견하는 바에 따라 행동하고, 우리 안에서 발견하는 생각들에 부합한 표상들을 낳기"(생애, 42,5) 때문이다.

안토니우스의 가르침 끝에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를 모범으로 삼아 사막에 거주하러 온 수도승들의 생활을 묘사한다.

"그 산 위에 은수자들의 거처들이 있었는데, 마치 시편을 노래하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단식하고 기도하고 미래의 선에 대한 희망으로 용약하고, 자선을 행하기 위해 노동을 하고, 상호사랑과 조화 속에 생활했던 천상 합창대원들로 가득한 처소 같았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거처들과 수도승들의 무리를 본 사람은 이렇게 감탄할 수 있었습니다. "야곱아‥‥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좋으냐"(생애, 44,2.4). 이 묘사는 사도행전에 묘사된 예루살렘 공동체를 연상시킨다. 안토니우스에게 자기 재산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영감을 준 것은 바로 예루살렘 공동체의 이상(理想)이다(생애, 2,2 참조). 마침내 그 초기 공동체의 꿈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사막은 이제 수도승들로 가득하게 된다.

 

 

4. 안토니우스의 증거

"그 후 교회는 막시미누스의 박해를 당했습니다. 거룩한 순교자들이 알렉산드리아로 끌려갔을 때, 안토니우스는 자기 은수처를나와 그들을 따라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부름을 받는다면 싸우러 갑시다. 아니면 그들이 싸우는 자들을 주시합시다'"(생애, 46,1). 수도승생활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교회 내부에 하나의 은사다. 안토니우스는 고독을 추구했고, 세속적인 것에서 도피했지만 교회에서 도피한 것은 아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시련을 겪을 때, 안토니우스는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고통을 받으러 달려가서 신앙 때문에 감옥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지지하고 그들이 순교할 때 그들과 함께한다. 그는 자발적으로 순교에 자신을 넘기지는 않는다. 그러한 행위는 교만의 행위로 간주되어 고대 교회에서 단죄 받았다.

안토니우스는 순교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허락하신 일종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박해 기간 내내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며 피로써 신앙을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한다. 이교 권력자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숨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을 지지하였는데, 재판관이 모든 수도승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하라고 명령할 정도였다. 베드로 주교의 순교로 박해가 끝나고 안토니우스는 사막으로 돌아가 "거기 머물며 매일 양심의 순교를 살고 신앙의 싸움을 했다"(생애, 47.1). 여기서 수도승생활은 순교의 지속이라는 주제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생애의 다른 곳에서도 안토니우스가 지역 교회와 깊은 친교를 이루며 살았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안토니우스는 얼마나 인내롭고 겸손했던가! 바로 그의 이런 자질들로 인해 그는 성직자에게 매우 큰 존경심을 가졌고, 모든 성직자가 영예에 있어 자기 앞에 있기를 바랐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주교와 사제들 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어떤 부제가 자기에게 감화를 받기 위해 찾아오면, 그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기도에 관계된 모든 것에서는 그에게 자리를 양보했고 자신도 그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생애, 67,1-2). 박해가 끝나고 몇 년 후, 안토니우스는 다시 산에서 내려와 알렉산드리아로 갔는데, 이 두 번째 하산은 아타나시우스의 첫 유배 때인 335년이었을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가 신자들에게 미쳤던 큰 영향력을 고려하여 그를 알렉산드리아로 불러 아리우스파들과 싸우게 한다(생애, 69,2 참조).

지성인들과 이교 철학자들도 그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고 싶어했다(생애, 72-73 참조). 안토니우스는 그들의 지혜에 십자가의 지혜로 대항한다. 이교 철학에는 참된 철학, 즉 지혜에 대한 참된 사랑인 그리스도교로 대항한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우수성을 보여 주기위해 그리스도교 호교론의 전형적 주제들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말의 기교가 없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행동하는 신앙이 있다"(생애, 80,6). 아테나고라스(Atenagoras)의 다음 말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러분은 우리에게서 단순한 사람들, 장인들, 노인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우리 교리의 겸손을 말로 설명할 능력이 없다 하더라도 그들은 삶으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또 다른 전형적 주제는 순교자들과 독신자들의 존재에 대한 것이다. "도대체 언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그러한 광채로 빛났단 말입니까? 도대체 언제 절제와 동정의 덕이 나타났단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타난 때가 아니라면 언제 죽음이 그렇듯 멸시당했단 말입니까?"(생애, 79.5). 이것 역시 그리스도교 호교론의 전통적 주제다. 즉,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피를 흘리는 순교자들의 존재, 그리고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결합되려는 희망에서 결혼하지 않고 노년에 이른 남녀들의 존재다.

안토니우스의 명성은 널리 퍼져 나가고 황제들에게까지 알려진다. 황제들이 그에게 서신을 보내지만 안토니우스는 그들이 자기에게 편지를 쓰기 전처럼 그렇게 남아 있었습니다(생애, 81.2 참조). 그는 어떤 세속적인 것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황제가 이집트 사막에서 수도승이 된 단순한 농부에게 편지를 썼다고 놀라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이 사람들을 위해 율법을 쓰시고 당신 아드님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에 놀라십시오"(생애, 81.3). 그는 자기 수도승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황제들이 보내온 편지들을 형제들이 자기에게 읽어 주는 것을 허락한다. 그는 황제에게 답신을 써서 그들이 정의롭게 행동하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한다. 그는 권력가들에게도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안토니우스는 불의를 당한 사람을 변호했는데, 불의를 당하는 사람이 다름아닌 바로 자신인 듯 변호했습니다. 그는 모두를 돕는 데 그렇듯 용감하여 많은 군인과 부자들이 이 세상의 죄를 포기하고 수도승이 되었습니다"(생애, 87,2).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가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초대했을 때, 안토니우스는 제자 파울루스에게 조언을 구한다. "내가 가야 하오? 하고 물었다. 파울루스가 대답했다. 당신이 그곳에 간다면 안토니우스라고 불리겠지만,가지 않으면 압바 안토니우스라고 불릴 것입니다"(금언 31). 성인은 가지 않고 사막에 남아 수도승들의 사부가 된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돌아온 후, 안토니우스는 마지막으로 더 깊은 사막으로 물러난다. 그는 치유를 행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군중이 그에게 환난 중에 위로와 위안과 도움의 말을 청하러 몰려든다. 가장 강인했던 사람 세례자 요한처럼 늘 온갖 영예를 피하려고 주의했던 안토니우스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도움을 주고 치유한다. "그는 이런 것 때문에 자기를 칭송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 그것을 아는 은총을 주신 주님을 찬송하도록 간청했습니다"(생애, 62,2). 군중에게 둘러싸인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고독을 방어하며 오로지 하나님과 머물며 그분에게서 후에 다른 이들에게 줄 말씀의 은사를 받기 위한 공간을 찾는다.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를 하나님의 사람, 중재자, 평화의 기수로 묘사한다 생애 마지막 장들에서도 악령들과의 싸움이 나타난다. 자신의 여정 끝에서조차 안토니우스는 악령들의 유혹을 받는다. 아타나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모사하고 있다. "악령들은 안토니우스를 사막에서 쫓아내려고 갖은 짓을 다 했지만 성공하지못했다"(생애, 53,3).

마침내 안토니우스는 죽음을 앞두게 되었다. 그의 생애 마지막 시기에 두 제자가 그의 은수처에서 그를 따라 함께 생활했다. 안토니우스는 마치 구약의 성조와도 같이 그들에게 자신의 증언을 남기고 교부들의 길로 떠나갔다(생애, 91,2 참조). 그의 죽음도 하나의 여정이다. 그 죽음도 순종의 행위로 볼 수 있다. 그의 유언은 그의 가르침에 대한 놀라운 종합이고, 깨어 있음과 항구함, 악령들에 맞선 싸움에서의 식별을 북돋우고, 무엇보다도 "항상 그리스도를 호흡하라"(생애, 91.3)는 초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그리스도를 호흡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안토니우스는 수도승이 되었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 그의 죽음은 일종의 변모다.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 모세의 육체에 일어난 일이 수도승들의 인도자 안토니우스의 육체에도 일어났다. 아무도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 모른다. 이집트인들은 보통 순교자들과 증거자들의 시신을 아마포로 싸서 그들의 집에 보관했다. 안토니우스는 이런 우상숭배적 예식의 영예를 거부하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자기를 은밀한 곳에 매장해 달라고 청한다. "오늘날까지 저 두 수도승 외에 아무도 그가 묻힌 곳을 모릅니다"(생애, 92,2)

성인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친구 아타나시우스와 세라피온 주교를 통해서다. "아타나시우스 주교에게 내 멜로테(엘리야의 외투로 불리다)들 중 하나와 내가 걸쳤던 외투를 주시오. 그가 나에게 새것을 주었고 내가 그것을 사용하였소. 세라피온 주교에게 또 다른 멜로테를 주시오"(생애, 91,8-9). 엘리사가 엘리야에게서 그의 멜로테를 선물로 받은 것처럼(왕하 2:14 참조) 아타나시우스도 안토니우스의 멜로테를 받고 그것을 걸치는 순간마다 자기 스승이요 벗이자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의 가르침들을 기억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권고로 끝난다. "이 이야기를 다른 형제들에게 읽어 주십시오. 그래서 그들이 수도승의 삶이 어떠해야하는지를 알게 하십시오. 또 주님이시요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자를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십시오"(생애, 94,1). 아타나시우스가 자기 작품을 바친 서방 수도승들과 안토니우스를 사부로 모신 수도승의 후예들이 그의 이 권고를 받아들였다.

 

 

6. 사막의 안토니우스 (서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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