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마틴레어드, 이민재 역 {침묵수업} (서울, 한국살렘, 2018) pp.73-110.

*  필요에 따라   위출처에서 제목 등  약간의 수정이 있었습니다.

@.  거룩한 단어로 기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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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1  거룩한 단어로 기도하기  서론 

322-2  관상기도 수련의 시작

322-3  거룩한 단어

322-4  현제로 들어가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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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한 단어로 기도하기

- 세 개의 문 -


문을 두드려라
, 그러면 열릴 것이다. (7:7; 11:9)


네 안에 있는 보물 창고로 온 힘을 다해 들어가라.

러면 하늘의 보화를 발견할 것이니. (시리아의 성 이삭)


 

인생의 어느 시점에 기도를 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삶의 위기와 불편하지만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다. 이때 구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그리스도교의 구원사가 한 젊은 유대 여자의 신비한 임신과 함께 시작한다는 것, 그리고 천사의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2:19)하는 삶의 위기와 기도에 관해 많은 것을 알아가기 시작한 여자와 함께 시작한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인간의 위기가 기도를 통해 어떻게 끝나는지 잘 보여준다. 우리들은 가식으로 가득한 위선적인 세계에 살면서 점점 병이든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도 위선을 본다. 하지만 이런 위선으로 가득 찬 세계를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아직 모른다. 자신을 위기로 내몬 자기 중심성을 자각한 계기가 기도를 찾아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기회기 주어져 러시아 농부의 영적 순례기인 㰡”순례자의 길㰡•(The way of pilgrim)이 삶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보물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㰡”순례자의 길을 읽으면서 예수기도를 배운다. 그리고 예수기도는 진정한 인간, 곧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

예수기도란 무엇인가? 예수기도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방황하는 마음을 침묵으로 이끎으로써 기도하는 사람에게 내면의 깊은 곳을 열어주는 고대의 기도 방법이다. 사실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것은 무척 어렵다. 마음은 오만 가지 생각의 꽁무니를 끊임없이 쫓아다닌다. 머릿속에서는 내적 수다가 무수히 쏟아진다. 예수기도는, 그리고 모든 관상기도 훈련은 이러한 마음의 수다를 멈추려는 시도다. 마음이 내적 수다에 끌려가도록 하는 대신 조용하게 암송할 수 있는 짧은 구절이나 단어를 마음에 제공하는 것이다. 예수기도는 바로 이런 구실을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기도는 간단하게 "예수님"이라는 한 단어로 줄일 수도 있다. 이처럼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짧은 구절이나 하나의 낱말을 활용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오래된 전통이다.

 

거룩한 단어


예언자 이사야의 목소리는 관상기도의 본질을 이렇게 전한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26:3) 마가복음에는 예수께서 자기를 따르는 한 사람을 눈여겨 보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사람은 영생을 갈망하는 부자 청년인데, 예수님은 그와의 만남에서 감동을 받으시고는 계속해서 그를 주시하신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10:21) 대부분의 관상가들은 이사야와 마가가 전하는 것처럼, 이러한 상호 응시 속에서 휴식하는 아주 단순한 행위가 기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자기-망각의 응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기-증여의 응시 속으로 용해되며, 이러한 상호 응시 속에서 우리는 쉼을 얻는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깊은 기도를 비슷하게 규정한다. "하나님의 특별한 속성을 느끼거나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저 사랑의 시선으로 하나님을 응시하십시오." 이러한 사랑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안으로 들어간다.

의식이 자의식의 여러 껍질을 벗고 중심 이 중심은 "충만한 광활함"이며 그 바탕은 하나님이다 을 드러내려면 무엇보다 먼저 침묵이 자라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때 숙명 같은 인간 조건에 직면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당최 침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몸이 침묵하더라도 마음은 폭주하는 열차처럼 무서운 속도로 움직인다. 몸은 기도 장소에 있어도 마음은 다른 곳을 헤맨다. 쇼핑몰이나 지중해의 해변에 있기도 하고 논쟁을 재현하기도 하며, 미래를 염려하기도 하고 과거를 후회하기도 하면서 온 데를 떠돌고 온갖 일을 한다. 그러나 현재라는 순간의 단순성 속에만은 머물지 못한다.

오래전 이집트 사막의 관상가들은 이러한 강박적인 마음의 활동을 훤히 알았으며, 그것이 사람을 분열시키기도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사막에서 마귀를 물리치신 예수님을 본보기로 삼으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4:1-11; 4:1,13)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마귀를 만났을 때 예수님은 마귀와 대화하지 않으신다. 대화 대신 성경 구절을 인용하신다. 예를 들어 마귀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4:3)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마귀와 말을 섞지 않고 신명기 83절을 인용하신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4) 마귀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4:6)라고 유혹할 때도 예수님은 사탄과 대화하지 않고 성경을 인용하신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4:7) 예수님의 이런 대처는 마귀가 떠나갈 때까지 계속된다.(4:10) 누가는 마귀의 실패를 이렇게 묘사한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4:13)

초기 그리스도교 관상가들은 예수님을 본보기로 삼으면서 사막 영성심리학을 발전시켰는데, 그들은 내적 대화에 사로잡히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적 대화는 기도뿐 아니라 내면의 평화를 해치기 때문이다. 마귀는 인간의 심층에 들어갈 수 없다. 그곳은 주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귀는 우리가 가장 흥미를 느끼는 생각의 패턴 사막의 관상가들은 이것을 "정념(passions)"이라고 일컫는다 을 폭탄처럼 쏟아부으면서 우리가 내면의 심층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훼방한다. 일단 이런 생각의 패턴에 붙들리고 나면, 관상가는 뒤이어 소용돌이치는 비평의 홍수에 완전히 압도당한다. 이 마음의 비디오는 수십 년, 아니 평생 돌아갈 수도 있다.

사막의 관상가들은 마음의 산만함과 수다를 자기들의 삶을 통해 분명하게 알았다. 하지만 예수님을 본보기로 삼음으로써 산만한 생각과의 내적 대화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짧은 구절을 암송하라는 지침에 따라, 그들은 자신과 대화를 하는 대신 일을 할 때든 홀로 기도할 때든 예수님처럼 짧은 성경 구절이나 낱말을 침묵 속에서 끊임없이 읊조렸다. 포티키의 디아도코스가 좋은 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올리면서 산만한 마음을 일단 정지시켰어도 마음은 또 다른 일거리를 계속 찾을 것이다. 마음은 일거리가 있어야 만족하는데, 이러한 마음에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를 제공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래야 성령께서 산만한 마음을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성경에도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고전 12:3) [따라서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성령께서 다스리신다.] 마음은 자신의 활동 영역에서 이 단어들에 집중해야 그 어떤 정신적인 형상들에도 주의를 빼앗기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마음에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속성이 있다는 것을 디아도코스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침묵 속에서 짧은 성경 구절을 반복하는 것 같은 일거리를 마음에 제공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거룩한 단어의 특별한 임무다. 거룩한 단어는 마음이 생각의 꽁무니를 쫓아다니지 않게 하며, 일단 생각에 붙들리면 이어지는 비난이나 비평에 재빨리 채찍질을 가한다. 마음이 생각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다시 거룩한 단어로 주의를 돌리면 된다. 생각과 씨름할 때 거룩한 단어는 정말 많은 도움을 준다.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거룩한 단어]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고후 10:5) 따라서 이런 훈련을 계속하면 내적 고요와 내적 집중을 열매로 얻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끊임없이 생각하고 수다스럽게 지껄이며, 강박적으로 매달리고 이 떼처럼 바글거리는 의식의 활동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셋째 계명에 대한 설교에서 자신의 경험을 곁들이며 이 사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셋째 계명은 마음의 고요함과 침묵을 즐거워합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그 침묵 속에 하나님이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침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논쟁을 좋아하고 다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부산하기 때문에 안식일의 침묵은 그들의 삶 속에 스며들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런 부산함과는 다른 안식일을 마음에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부산떨지 말아라. 요동하는 네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라. 네 머릿속에서 날아다니는 어리석은 환상을 흘려보내라." 하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잠잠하라) 내가 하나님 됨을 일지어다."(46:10) 하지만 여러분은 침묵을 거절합니다. 여러분은 이집트인들을 괴롭힌 이 떼처럼 바글거립니다. 이 작은 벌레들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방향도 없이 여러분의 눈에까지 떼 지어 기어들어가 쉬지 못하게 합니다. 쫓아내면 그것들은 즉시 도망갑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떼 지어 다니는 쓸데없는 망상도 그렇습니다. 이 질병에 감염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현재로 들어가는 세 개의 문


예수기도 같이 짧은 문장이나 낱말로 하는 기도의 지침은 더 이상 단순해질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다. "기도를 시작하면서 외부를 향해 있던 당신 자신을 거둬들여라. 침묵 속에서 거룩한 단어를 조용히 읊조리면서 다른 모든 관심을 흘려보내라. 주의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 거룩한 단어로 부드럽게 돌아가라. 그러면서 한없이 깊은 현재라는 순간의 심연을 향해 나아가라."

이제 나는 우리 안에 있는 "바닥 모를 심연"으로 나아가기 위해 지나야 할 세 개의 문을 설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문은 세 개만 있는 게 아니다. 서른 개나 삼백 개의 문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심연은 무한하다. 엄밀히 말하면 그곳에 이르는 문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기도 생활에 진보라는 직선적인 관념을 적용해 "나는 지금 어떤 단계에 이르렀을까?" "나는 얼마나 발전했을까?"와 같은 질문을 던질 때가 있는데, 그런 경우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 생활이 진보했다, 발전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기도 생활은 단계를 밟아가며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은 생애 말년에 이르러 기도 생활을 이렇게 묘사했다. "기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출발하여 이미 소유한 것에 깊이 들어가며, 그곳에서 거기에 이미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깨닫지도 경험하지도 못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필요한 것은 이미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경험하는 것뿐이다." 바닥모를 심연 이 심연의 바탕은 하나님이다 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는 것은 없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바닥 모를 심연은 여러 문을 통과하고 나서야 보인다. 현재라는 순간은 길 아닌 길을 향해 열려 있는 문 아닌 문이다. 기도의 길에는 이런 역설과 신비가 깔려 있다.

거룩한 단어나 호흡 또는 침묵을 활용한 관상 수련은 기도를 하나의 테크닉으로 축소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테크닉은 어떤 결과를 산출하기 위해 과정을 통제한다. 이와 달리 관상 수련은 테크닉이 아니라 일종의 장인적 기술이다. 어떤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해 과정을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직접 통제할 수 없는 과정을 좀 더 원활하게 촉진시키려는 일종의 수행이다. 물론 관상 수련에도 목적이 있지만, 관상적 솜씨를 활용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목적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이는 나무들을 자라게 하는 이가 정원사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정윈사는 나무를 가꾸기 위해 꾸준히 연마한 장인의 기술을 발휘한다. 흙을 돋아주고, 물을 주고, 비료를 주고, 잡초를 뽑고, 가지를 친다. 하지만 나무가 자라도록 정원사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렇다고 정원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무들은 잘 자라지 못한다. 어쩌면 전혀 자라지 못할지도 모른다. 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항해에 필요한 많은 기술을 연마하지만, 항해에 필요한 바람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하지만 바람을 다루는 선원들의 노련한 기술이 없다면 배는 제멋대로 떠돌아다닐 것이다. 정원을 가꾸고 배를 움직이려면 그런 장인적 기술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수용성(Receptivity)이다. 기술은 필요한 것이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다. 관상적 영성 훈련과 영성 생활도 비슷하다.

관상은 순전한 은총이다. 관상의 꽃을 피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지만 관상의 기술도 중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관상의 꽃은 피어나지 못한다.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총은 서로 협력할 때 시너지 효과를 낸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당신 없이 당신을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없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의롭게 하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아빌라의 성 테레사(St. Teresa of Avila)"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증여의 하나님이다. 언제나 자신을 주신다. 문제는 하나님의 자기 증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자기 증여의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능력, 즉 수용성을 길러주는 것이 관상기도다.

테레사는 관상기도를 설명하기 위해 누에 이미지를 활용하는데, 이 은유는 매우 유명하다. 누에는 일정한 기간 동안 스스로 고치를 지으면서 그 속에 있다가 어느 날 돌연 나방으로 탈바꿈(변형)한다. 마찬가지로 영혼은 규칙적인 관상기도를 통해 점차 수용적으로 되어가며, 어느 순간 은총은 영혼이 변형되는 것을 도와준다. 관상 수련은 서서히 섬세하게 빚어지는 고치와 같다. 테레사는 유쾌하게 말한다. "그러니 벗들, 서두릅시다! 어서 할 일을 합시다. [관상기도]라는 비단 고치를 어서 빚읍시다!"

 

첫 번째 문


첫 번째 문의 특징은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겪는 초조함이나 지루함, 그리고 자기 몰두와 같은 문제들과 주로 관련된다. 기도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도 하루에 이삼십 분간 침묵 속에 고요하게 앉아 있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거룩한 단어를 열쇠로 하여 관상 수련의 첫 번째 문을 통과하면 그렇게 할 수 있게 된다. 오래전 디아도코스가 알려준 대로 거룩한 단어는 일종의 닻 역할을 한다. 거룩한 단어는 기도하는 우리를 붙들어주고, 쉴새 없이 돌아가는 마음의 비디오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은 다양한 거룩한 단어 사용법을 전해주고 있다. 초기 사막 영성 전통은 짧은 성경 구절을 암송하는 것이 산만한 생각을 다루는 좋은 방법이라고 가르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기도를 "화살기도"라고 불렀다. 에바그리우스 역시 㰡”안티레티코스㰡•(Antirrheticus)라는 훌륭한 책에서 다양한 성경 구절을 여러 유형의 산만한 생각을 치료하는 해독제로 제시한다. 그는 기도자를 괴롭히는 생각의 유형에 따라 성경에서 직접 가져온 구절들을 다양하게 분류해 각 상황에 맞게 권한다. 예를 들어 화가 난 사람들에게는 이런 구절을 해독제로 추천한다.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45:24)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20:16) 당신이 슬픈 생각과 씨름하고 있다면 에바그리우스는 이런 구절들을 추천할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1:8) 이런식으로 훈련을 하면 몇 가지 영성 훈련을 한꺼번에 하게 되는 이점이 있다. 성경에 관한 지식을 향상시킬 뿐 아니라 내적으로 깨어 있게 하며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생각이 어떤 것인지 알려면 내적으로 깨어 있거나 그것을 바라볼 수 있도록 고요해져야 한다. 또한 적절한 구절을 즉시 마음에 떠올릴 수 있게 하려면 성경에 관한 지식이 해박해야 한다.

에바그리우스가 이런 훈련을 권하는 까닭은 경우에 합당한 성경 구절들을 침묵 속에서 암송하면 괴롭히는 생각과 강박적으로 씨름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관상 수련을 꾸준히 하면 심리치료적으로도 효과가 있다. 이런 훈련을 통해 자기 자신과 괴로운 생각(또는 감정)의 관계가 치유되면서 스스로가 변형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상 수련은 심리치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고통스러운 생각이나 감정은 장애물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내적 침묵을 기르고 성경에 몰입하게끔 도와주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에바그리우스가 다양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성경 해독제를 가르쳤다면, 적어도 동방 정교회 전통에서는 그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성경 구절들이 좀 더 정선된 거룩한 단어로 축소됐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기도다.

디아도코스는 예수기도 초기 전통의 대변자다. 예수기도는 짧은 형태와 긴 형태가 있는데, 디아도코스와 클리마쿠스는 "예수" 라고만 하는 짧은 형태의 예수기도를 지지한 사람들이다. 수 세기에 걸쳐 전해져 내려오면서 예수기도는 점점 길어졌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유일한 예수기도의 형태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에바그리우스의 제자인 요한 카시아누스는 사막 영성을 서방교회로 가져온 사람인데, 그는 이런 짧은 기도를 권한다. "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주님, 지체하지 마시고, 나를 도우소서." 이 기도는 그가 말하는 "불의 기도"의 일부다. 또한 침묵 속에서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기도는 그가 권하는 가장 내밀하고 심오한 기도다. 여기서도 우리는 성경에서 영감을 받은 침묵 기도의 한 방법을 본다.

㰡”무지의 구름을 쓴 익명의 저자는 거룩한 단어로 기도하는 또 다른 방법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에 따르면 거룩한 단어는 모름지기 단순해야 한다. 또한 의미를 많이 함축하고 있는 단어여서도 안 된다. 의미가 많이 함축되어 있으면 기도하는 동안 그 의미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룩한 단어는 한 단어면 좋다고 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 음절로 된 짧은 단어를 선택하십시오. 그것이 두 음절의 단어보다 낫습니다. 짧을수록 성령의 활동을 잘 받아들입니다. '하나님' 이나 '사랑' 같은 단어가 그런 거룩한 단어입니다. 당신의 마음에 다가오는 단어를 선택하십시오. 어떤 단어를 선택하든 그 단어를 당신의 심장에 단단히 묶어놓으십시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과 분리되지 마십시오."

㰡”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예수기도를 모르거나 예수기도 방식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룩한 단어가 마음을 빼앗는 생각을 알아차릴 때 끊임없이 돌아가야 할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분명히 동의한다. 오늘날에는 토머스 키팅(Thomas Keating)과 존 메인(John Main)의 가르침을 살펴볼 만하다. 토머스 키팅은㰡”무지의 구름에서 얻은 영감과 현대 심리학을 잘 조화시켰으며, 존 메인은 사막 영성에 뿌리내린 관상기도를 가르첬다. (하지만 존 메인은 다양한 거룩한 단어가 아니라 "마라나타"만을 거룩한 단어로 권한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에는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는 기도 [낱말기도]에 관한 다양한 방법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방법이 다양하긴 해도, 기도 중에 마음이 산만해지는 문제가 생긴다는 점과 이때 거룩한 단어가 도움이 된다는 데 대한 인식은 동일하다.

어쩌면 당신은 거룩한 단어를 마음으로 반복하는 것이 또 다른 마음의 비디오를 돌아가게 하는 갓이나 다름없지 않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거룩한 단어를 반복하는 것에는 분명히 추론적인 차원이 내재되어 있다. 하지만 세번째 문을 통과하면서 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거룩한 단어는 일종의 예방 주사다. 질병을 일으키는 균을 환자에게 일정량 투여함으로써 항체를 형성시키면 그 질병에 걸리는 것을 예방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관상적 영성 훈련에서 질병은 지나치게 활동하는 마음이다. 물론 일상의 다양한 일을 처리하려면 반드시 마음의 활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마음의 산만한 활동은 존재의 심연을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이웃에게서 우리가 분리됐다는 느낌을 갖게한다. 하나님과 분리됐다는 느낌, 그리고 생각과 감정에서 생긴 정체감에는 마음의 작용과 관련된 수많은 파편이 달라붙어 있다.

거룩한 단어라는 백신은 잠심(潛心)과 초연함의 태도를 길러준다. 잠심은 기도를 시작할 때부터 내적으로 평화로운 느낌을 주며, 우리를 점차 깊은 평화로 이끌어간다. 이것은 내적인 평화와 혼돈의 공통 기반이다. 이것을 사막 영성 전통은 아파테이아(apatheia)라고 불렀다. 초연함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흘러가게 하며, 쉴 새 없이 벌어지는 마음의 장난을 지켜보게 한다.

가장 먼저 할 일은 거룩한 단어를 선택하여 잘 간직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거룩한 단어를 선택하는 일 자체에 과도하게 몰두하기도 하는데 그럴 필요는 없다. 그저 단순히 당신을 이끌어줄 단어나 당신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있는 단어를 선택하면 된다.

첫 번째 문을 통과할 때 사람들이 직면하는 과제는 한편으론 머릿속의 엄청난 소음을, 다른 한편으론 무미건조한 지루함을 극복하는 일이다. 때로 마음은 크게 요동하기도 하고 격렬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한다. 하지만 지침은 간단하다.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냥 부드럽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혼란스러운 생각을 없애려거나 다른 평화로운 생각으로 대체하려 애쓰지 말라. 그럴수록 더 많은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냥 단순하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어쩌면 스스로를 이렇게 비난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은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고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난 것일 뿐이다. 이때도 지침은 똑같다. 생각을 바라보라. 그대로 내버려둬라. 그리고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이렇게 간단한 훈련이 바로 "관상 수련(관상 수도)" 또는 관상기도다.

때때로 특히 관상 수련 초기에 자의식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다. 자신이 관상적으로 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매혹당하기도 하고, 이러한 자의식 자체가 너무 어색해 마음이 흐트러지기도 한다. 이럴 때도 지침은 똑같다. 생각을 바라보라. 그대로 내버려둬라. 그리고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이러한 훈련을 통해 습득되는 기술은 첫 번째 문을 통과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기술은 일종의 정신의 습관을 형성한다. 마음의 상태가 평화롭든 지옥 같든,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데 점점 익숙해지는 것이다. 생각을 알아차릴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습관이 형성된다고 해서, 매번 거룩한 단어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라는 말이 아니다. 테오파네스는 예수기도에 대해 이렇게 충고한다. "예수 기도의 낱말들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것은 단지 기도를 자동 반복하는 습관을 길러줄 뿐이다‥‥ 물론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그것은 외적으로 통제하려는 극단적인 방법일 뿐이다." 거룩한 단어로 하는 기도 훈련은 단지 테크닉을 정확하게 구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괄한다. "낱말기도의 힘은 주님에 대한 신심에서 오는 것이며, 마음과 심장이 주님과 깊게 일치할 때 생긴다." 거룩한 단어로 하는 관상 수련이 내면에 뿌리내리고 관상 수련에 들이는 시간이 더 많아짐에 따라 추론하는 일이 불필요해지고, 내면의 비디오를 보는 시간도 점차 줄어들 때 우리는 첫 번째 문을 지나 현재라는 순간에 들어선 것이다. 그것은 쉽게 감지할 수 없지만 분명하게 형성되고 있는 흐름이다. 새로운 곡을 연습하기 시작할 때 피아니스트에게 일어나는 일처럼 말이다. 새 곡을 처음 연주할 때는 어색하고 어렵고 자주 중단된다. 하지만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면 어느 날 갑자기 자연스럽게 연주할 수 있게 된다. 자의식의 어색함은 사라지고, 거룩한 단어는 피난처가 된다. 바로 이때 기도의 양이 기도의 질을 획득한다.

 

두 번째 문


두 번째 문을 통과할 때는 베짜는 사람이 베틀과 하나 되고 무용수가 춤과 하나 되는 것처럼 우리가 거룩한 단어와 하나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고, 그게 여전히 돌아가고 있는 마음의 비디오를 보는 일보다 더 흥미로워진다. 물론 내면의 비디오는 주의를 빼앗을 것이다. 하지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이 습관으로 자리 잡으면 우리는 거룩한 단어 안에서 자기 자신을 잊기 시작한다.

처음에 거룩한 단어는 어색하고 거북했다. 침묵 속에서 거룩한 단어를 떠올리기란 힘이 드는 정신 활동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문을 통과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침묵 속에서 거룩한 단어를 되풀이하여 떠올림에 따라 정신적인 언어 활동은 줄어들고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능력이 자라난다.

관상기도가 몸에 배면 육체적이고 정서적인 유익을 경험하기도 한다. 혈압이 내려가거나 안정되기도 하고 맥박이 느려지기도한다. 정서적인 유익은 훨씬 많다. 삶은 계속해서 스트레스와 긴장감을 더할 테지만, 우리는 점점 고통의 원인이 우리 자신임을 깨달을 것이며 어떤 사건도 흘려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어려웠던 일도 좀 더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으레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고 좋아하는 것들 중에는 통제하지 않아야 살아나는 것들이 있다. 그렇다. 지혜와 건강, 생명과 사랑과 같은 것들은 힘으로 통제하려고 해서 얻을 수 있는것들이 아니다. 항해를 하려면 바람을 통제하기보다 잘 이용해야하듯, 그것들을 얻으려면 현재의 순간에 수용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마음의 다양한 비디오나 그것들을 억제하려는 전략에 빠지지 않고, 단순히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수련이 바로 현재에 수용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내적 침묵이 깊어질수록 생각과 감정을 다루는 능력도 커지며, 낱말기도에 더욱 몰두할 수 있게 된다.

테오파네스는 거룩한 단어를 사용 하는 관상기도가 기계적인 일은 아니라고 하면서 "온 힘을 다해 예수기도에 힘쓰라"고 말한다. 그에게 관상기도는 예수기도만을 뜻하지만, 잠심에 이르게 하는 다른 관상 수련도 예수기도처럼 내적 침묵의 열매를 맺게 한다. 이를테면 십자가의 요한처럼 그 어떤 거룩한 단어의 도움도 받지 않고 그저 사랑의 의식을 품은 채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훌륭한 관상기도다. 아무튼 테오파네스는 "온 힘을 다해 예수기도에 힘쓰라"고 말한다. 그는 바닥모를 심연에 이르게 하는 거룩한 단어의 힘을 잘 알고 있다.

두 번째 문이 열리려면 내 쪽에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은총과 섭리로 일단 문이 열리고 나면, 거룩한 단어를 통해 형성된 몇 가지 기술이 필요하다. 그 기술이란 흘려버리고, 내버려두고, 현재라는 순간의 심층에 머무르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최대한 촉진시키려면 시간을 넉넉히 들여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는 [관상기도]에 힘써야 한다.

생각과의 씨름은 첫 번째 문을 통과할 때부터 시작되는데, 그 문을 통과한 다음에는 생각과의 씨름이 더욱 정교해져야 한다. 그렇게 해야 추론에 집착하는 마음의 경향을 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마음은 주먹을 움켜쥐듯 무언가 붙들 것을 끊임없이 찾으면서 의식(awareness)을 지배한다. 이와 달리 관상은 움켜쥔 손을 펴듯 붙들려던 것을 흘려버리면서 의식 자체와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관계한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붙들려는 마음의 경향은 치유되어야 하고, 정화되어야 하며, 통일되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은 고요에 이르며, 수용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문을 지날 때 거룩한 단어는 방패 혹은 피난처 역할을 한다. 생각에 붙들린 것을 알아차리면,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문에 가까이 다가갈 때 거룩한 단어는 우리가 좀 더 미묘한(subtle) 것을 지속적으로 주시하게 한다. 우리의 주의를 빼앗는 생각과 감정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쫓아다니게도 하는 마음의 집착 패턴을 주시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분노나 억울함과 같은 생각과 씨름하고 있다고 하자. 첫 번째 문을 지날 때 우리는 분노(이것도 생각이다)에 언제 주의를 빼앗기는지 알아차리는 능력을 얻는다. 두 번째 문을 지날 때, 우리는 거룩한 단어를 통해 빚어지는 내적 침묵을 통해 억울함(이것도 생각이다)을 알아차릴 뿐 아니라, 그 생각(억울함)의 바탕에 있는 정신적이며 정서적인 패턴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우리를 화나게 하거나 두렵게 했던 과거의 상처를 스스로 비평한다. 이러한 비평은 마음이 수백만 개의 손 중 하나의 손으로 무엇인가(실제적인 것이든 상상한 것이든) 움켜쥐려 할 때 일어난다. 이렇게 마음은 자신의 한 손으로 무언가 움켜쥠으로써 우리의 주의를 빼앗은 분노에 관한 이야기를 스스로 지어내는데, 이것이 바로 억울함이다.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를 알아차리는 능력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분노에 대한 정교한 비평이 사라지게 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 우리는 그것에서 해방될 수 없고, 또 우리가 비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그것이 사라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룩한 단어로 하는 관상기도가 더욱 깊은 내적 침묵으로 인도함에 따라 우리는 머릿속에서 지어내는 이야기를 고요하게 바라보게 되는데, 이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다.

테오파네스는 거룩한 단어가 "당신과 함께 하면서 이끌어갈 것"이라고 말한다. 낱말기도를 통해 감정의 정교한 작용을 봄으로써 우리는 정신의 심층에 있는 집착 패턴과, 그 패턴을 움켜쥐면서 고통스러운 생각과 감정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해방과 자유의 역동이 두 번째 문을 통과할 때 나타나는 특징이다. 거룩한 단어로 관상기도를 하는 동안 억압된 것들이 의식에 나타나면서 괴롭히기도 하는데, 토머스 키팅은 이런 현상을 "무의식을 덜어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해방을 가져다주는 관상기도의 본질로서, 이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렇게 무의식을 덜어내고 이전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을 알아차리면, 마침내 우리는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광활하고 성스러운 어떤 것, 즉 정신의 집착 패턴보다 더욱 깊은 곳에 있는 침묵의 영지를 발견한다.

거듭 말하지만, 첫 번째 문에서 거룩한 단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거룩한 생각을 포함한 온갖 생각의 폭격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피난처 혹은 방패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 거룩한 단어가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에 붙들리지 않도록 도와준다. 두 번째 문을 지날 때 거룩한 단어의 용법은 변한다. 거룩한 단어에 더 깊이 몰입할수록 거룩한 단어를 성가신 생각을 막아주는 방패로는 점점 사용하지 않게 된다. 이제 우리는 생각을 비평하는 대신 고요함 속에서 생각을 만난다. 우리는 생각을 그냥 내버려둔다. 그 생각을 뒤쫓지도 않으며, 그 생각에 대한 비평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첫 번째 문에서 거룩한 단어를 피난처와 방패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또는 "그런 생각을 흘려버려야 하는데"와 같은 마음의 비평이 계속된다. 분리된 "" 는 여전히 존재한다. ""는 흘려버려야만 하는 객관적인 생각을 갖고있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문에서 펼쳐지는 상황이다. 그런데 문제는 당신과 거룩한 단어가 여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룩한 단어가 내적 통합을 촉진함에 따라 이러한 자의식 즉 분리된 ""의 지배력은 점점 줄어든다. 두 번째 문의 문지방을 넘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와 같은 비평은 사라진다. 우리는 더 이상 생각을 방패로 막아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것으로 대하지 않는다. 거룩한 단어는 생각을 단순한 내적 침묵 속에서 비평 없이 대하게 한다. "생각을 흘려버려야 하는데"와 같은 비평은 사라진다.

테오파네스는 "예수기도를 할 때 마음과 주님 사이에 그 어떤 형상도 끼어들지 않게 하라"고 충고한다. 우리를 거룩한 단어와 분리시키는 생각이나 형상, 비평을 붙들지 않을 때 거룩한 단어와 우리는 하나가 된다. 거룩한 단어는 점차 막아주는 방패에서 강과 하나인 강바닥으로 변한다. 강바닥은 상류에서 무엇이 흘러 내려오는지, 하류로 무엇이 떠내려가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즉 비평하지 않는다. 떠내려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흘려버리는 것은 하나의 행위다. 생각과 감정의 끊임없는 흐름에서 우리는 같은 것을 경험한다.

두 번째 문을 지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거룩한 단어를 반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반복하더라도 드물게 할 뿐이다. 그리스도교의 어떤 관상가들은 다르게 가르치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두 번째 문을 지날 때 거룩한 단어가 고요해지는(사라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첫 번째 문을 지날 때는 거룩한 단어를 반복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도 거룩한 단어의 주요 목적은 생각을 뒤쫓던 주의를 되돌려 현재에 머물도록 돕는 것이다. 물론 거룩한 단어를 반복하는 것은 유익한 훈련이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테오파네스의 말을 늘 기억해야 한다. "거룩한 단어는 기도의 도구이지 본질이 아니다." 우리가 침묵에 푹 젖을수록 거룩한 단어도 침묵한다. 또한 생각이 거룩한 단어와 우리를 덜 분리시킬수록 거룩한 단어와 우리는 더욱 하나가 된다.

두 번째 문을 지나면서 우리는 침묵 안에 있는 존재의 근원적 바탕을 조금씩 알아차린다. 마음으로 거룩한 단어를 되풀이하든 안하든, 거룩한 단어는 바탕의식 안에 흔적 없는 흔적을 남기면서 우리를 침묵으로 인도한다. 거룩한 단어의 현존에 주의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모든 생각이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침묵 속에 잠겨든다. 이제 거룩한 단어 훈련을 통해 그냥 있는 것(just being)을 배운다. 여기서 우리는 세 번째 문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세 번째 문


세 번째 문을 지나려면 침묵 속에 단순히 있으면서 깨어 기다려야 한다.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자연히 생각을 분별하는 기술을 습득하게 된다. 생각은 의식 속에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데, 세 번째 문은 당신의 주의를 생각으로부터 생각을 알아차리는 의식 자체로 옮겨준다. 생각에서 의식 자체로 주의를 옮기는 것은 아주 단순해 보이지만, 그것이 마음을 아주 잠간이라도 고요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추론적이며 계산하고 따지는 데 익숙한 마음은 침묵에 대한 정신적 관념을 형성하거나 "마음이 고요하다"와 같은 생각을 만들어냄으로써 고요한 마음 자체를 다시 의식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비평이 시작된다. 이제 우리는 생각의 교묘한 작용을 잘 알고 있고,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여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웠다. 또한 생각에 반복적으로 집착하는 대신 침묵 속에서 그것을 비평 없이 대하는 법도 배웠다. 주의를 의식의 대상에서 의식 자체로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 거룩한 단어는 조용해진다. 물론 의식의 표면에서는 거룩한 단어를 조용하게 암송할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때가 무르익어 현재라는 순간이 문을 열기를 기다린다.

세 번째 문을 지나면서 우리는 언어를 초월한 것(ineff- able) 을 만난다. 그것은 "이것"이나 "무엇"이 아니다. 생각과 감정과 언어로는 포착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거룩한 단어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열어준다. 그것은 의식의 또 다른 대상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중심인 바닥없는 바탕(groundless ground)을 드러내 보인다. 이 바탕은 묘사하기 어려운 광활함으로서, 모든 곳에서 흘러나오지만 어떤 곳에서도 흘러나오지 않는 강물로서, 그리고 빛나는 무()가 흘러넘칠 정도로 충만한 대양으로서 마음에 새겨진다. 나는 지금 의식에 나타나는 특정 대상, 이를테면 보거나 느낄 수 있는 어떤 대상 또는 당신에게 현전(現前)하는 어떤 대상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그 어떤 언어도 가본 적 없는 곳, 언어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곳을 묘사하려 애쓰고 있다. 이제 해일과 같은 침묵이 지각의 해안으로 밀려온다. 지각은 드넓게 펼쳐지면서 빛, 일치, 고요, 광활함과 같은 은유로 침묵의 해일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광활함을 주시하는 것 자체가 바로 이 광활함이다. 빛나는 깊음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빛나는 깊음이다. 시편 시인은 이것을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42:7)라고 간결하게 묘사한다. 침묵의 영지에 이르는 세 번째 문을 온전히 통과할 때 우리는 이 경지를 깨닫는다.

세 번째 문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특징 중 하나는 우리의 자아감이다. 한편으론 정체성에 대한 확고하고도 고요한 확신이 모든 가식과 위선을 대체한다. 동시에 개념이나 언어, 형상이나 느낌은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결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들은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이 들어갈 수 있는 곳만큼 깊게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와 같은 어휘로도 부족하다. 우리가 "자신"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것들은 덧붙여진 딱지일 뿐이다. "자아"라고도 부르는 이러한 딱지는 일상의 실제적인 일을 다루는 데 꼭 필요하다. 그리고 에니어그램이나 주술이나 세무 관리 등의 일과도 많이 관련된다. 하지만 세 번째 문에서 출현하는 "비자아적 자아(unselfd self)"에는 그 어떤 이름도 덧붙일 수 없다.

그렇다고 정체성이 상실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체성이 만개한다. 그리고 세례가 선언하는 그리스도교 근본 진리의 향기를 들이마신다. 나의 "나 됨"은 그리스도의 "나 됨"과 동일하다. 전통적인 신학 용어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형상"에서 "모양"으로 옮겨간 것이다. 디아도코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 하지만 위대한 사랑을 통해 자신의 자유를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시킨 사람만이 그분의 모양을 덧입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속하지 않을 때라야 사랑을 통해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킨 그분의 모양처럼 되기 때문이다." 디아도코스가 말하는 "자신에게 속하지 않음"이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이며 진정한 본질이다. 생각도 그것을 붙들 수 없으며, 시간도 그것을 건드릴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이 모든 생각과 모든 시간과 우리의 생사를 포함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1:5) 했을 때의 "" 즉 태어나기 전,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아셨다는 우리 자신이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유에 관해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2:20)

사람들은 위와 같은 본질 차원에 대한 깨달음을 묘사하기 위해 빛의 은유를 사용하곤 한다. 그 차원은 추론하는 이성에게는 어둠이지만 덕과 관상을 추구하는 마음에게는 빛이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그 차원을 "빛나는 어둠"이라 불렀다. 또한 디아도코스는 이러한 깨달음을 "정신의 빛"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거룩한 단어 그에게는 예수의 이름이 거룩한 단어이었다 로 관상 수련을 오래할 때 맺을 수 있는 열매라고 하였다. "영광스럽고 거룩한 이 이름을 가슴 깊은 곳에서 쉬지 않고 묵상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지성의 빛을 볼 것이다." 이 말은 환상을 본다든지 물리적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든지 개념이나 이미지로 파악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십자가의 요한도 하나님에 관해 말할 때 비슷한 이미지를 사용한다. "당신은 내 지성을 밝히는 신적 빛입니다. 그것으로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정신의 빛"은 의식의 바탕에 대한 은유다. 우리는 그 바탕이 보여주는 무엇인가를 지각한다. 하나님 곧 바닥없는 바탕에 관한 무엇인가가 지각의 해안으로 밀려오며, 우리는 그것을 광활함, 빛나는 광대함, 모든 존재가 하나라는 느낌, 만물이 무한을 드러낸다는 느낌으로 경험한다. 시인 제프리 힐(Geoffrey Hill)은 그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어둠 ‥‥ 쉬지 않고 밀려드는 허허로움." 이런 경험은 온갖 긴장과 통제, 시련과 실패, 의무감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내적으로 깊은 해방감과 자유를 맛보게 한다.

거룩한 단어는 이런 각성을 돕는 훌륭한 도구다. 우리에게서 이런 각성이 일어나면, 다시 말해 바울이 말한 대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5) 그 어떤 보석보다 값진 것을 깨닫는다.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빛나는 바탕이 모든 피조물을 유지하는 바탕으로서, 단테의 표현대로, "태양과 뭇별을 움직이는 사랑" 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가슴의 심연이며, 하나님께 잠기고 하나님으로 흠뻑 젖은 의식 자체라는 것도 깨닫는다. 여기서 우리는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 피조물의 정체성을 잊고 침묵 속에서 자기를 완성함으로써 형상에서 모양으로 변형되어(1:26)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지는 것이다.(3:3)

우리가 거룩한 단어를 계속 반복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는 추론적인 마음이 고요해질 필요가 있는지 여부와 관련된다. 어떻게 기도를 하든지 간에 특히 예수기도를 할 때는 거룩한 단어에 대해 경건함, 감사함 또는 성스러움의 감정이 지속되기 마련이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세 번째 문을 통과한 후의 관상 수련은 의식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빛나는 광활함 또는 모든 존재가 출몰하는 의식이라는 강바닥을 고요하고 맑은 눈으로 응시하는 것이다.

 

거룩한 단어로 기도하는 것은 단순히 테크닉이 아니다. 거룩한 단어는 의식을 비추는 거울이다. 내면으로 마음의 시선을 돌리면서 고요의 기도를 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내적 혼돈에 직면한다. 이때 거룩한 단어는 폭풍 속의 닻이며, 온갖 생각과 감정의 맹폭, 지루함과 초조함의 폭풍에서 우리를 보호해줄 방패요 피난처다. 거룩한 단어로 계속 기도하다 보면 잠심과 주의력이 깊어진다. 이윽고 우리는 내면에 자리한, 혼돈보다 깊은 차원을 알게 된다. 이제 거룩한 단어에서는 이전과 달리 어떤 깊이가 느껴진다. 이때쯤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가라"는 테오파네스의 충고가 이해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통과하는 문들은 바탕의식 또는 의식 자체, 곧 내면의 심층으로 들어가는 문들이기도 하다. 의식 자체, 그리고 그 심층에서 우리는 빛나는 어둠과 함께 은총의 하나님을 만나는데, 그 하나님은 이미 "내가 내 자신에 가까운 것보다 더 나에게 가깝게" 빛나고 계신다.

거룩한 단어가 하는 일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거룩한 단어는 아주 부드럽게 현재의 순간을 드러낸다. 또한 마음의 시선이 내면을 향하게 하면서 내적 침묵을 유지시킨다. 이러한 내적 침묵은 마음의 소음을 제거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상상한 것보다 훨씬 깊은 심층(심연, 깊음)이 우리 안에 있음을 발견한다. 그렇다. 우리의 내면에는 혼돈과 혼란, 정서적 집착과 불안, 분노의 기억만 있는 게 아니다. 또한 경이로운 추론 이성, 상상력이 풍부한 통찰, 무의식적 본능만 있는 것도 아니다. 빛나는 모호함과 항상 함께 흐르면서 모든 정신 과정의 바탕이 되고, 모든 것과 하나요 하나님과 하나인 의식의 심연도 있는 것이다. 거룩한 단어는 현재의 순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도와준다. 거룩한 단어가 고요해질 때까지 ‥‥ 마침내 영적으로 무엇인가 성취하려는 모든 노력은 고요해지며, 우리의 기도는 그저 빛나는 광활함을 응시하는 빛나는 광활함이 되거나, 빛나는 광활함에 의해 응시되는 빛나는 광활함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세 번째 문을 통과했다고 해서 오락가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이 문들은 양쪽에 경첩이 달려 있는 문이라 우리는 이 문으로 들락날락한다. 삶의 폭풍우가 거세게 몰아치기라도 하면, 첫 번째 문을 처음으로 통과하는 것처럼 기도해야 할 때도 있다. 우리는 침묵 속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에 저항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세 번째 문을 통과했다면 이전의 문들을 두드리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 것이며, 침묵 속에 앉아 있는 것에 대한 저항감도 점차 작아질 것이다.

침묵의 신비를 발견하는 것은 생애 최고의 은총이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라도 사야 하는 진주"(13:46). 이러한 은총에 대한 최고의 응답은 침묵을 한데 모으고 겹겹이 쌓아올려 그것으로 우리를 둘러싸는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말해 관상 수련을 꾸준히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양이 좋은 음식을 일주일에 한 번 먹어서는 건강을 유지할 수 없고, 한 달에 한 번 걸어서는 탄탄한 몸을 유지할 수 없듯 관상 수련도 마찬가지다. 규칙적으로 운동해야 건강과 몸매를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관상 수련의 열매 또한 규칙적인 기도에 달려 있다. 디아도코스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훈련을 이따금 하는 사람들은 지속성이 없는 까닭에 그들이 기도를 통해 얻기를 바라는 열매를 잃고 말것이다." 규칙적으로 매일 꾸준히 훈련하는 것이 열쇠다.

토머스 키팅은 하루에 20분씩 두 번 할 것을 권한다. 이 정도면 기도 습관을 만드는 데 아주 좋다. 하지만 관상기도를 막 시작한 사람에게는 너무 길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럴 땐 8분이나 10분정도 해도 좋다. 점차 20분으로 늘리면 된다. 어느 정도 기도에 익숙해지면 30분에서 1시간씩 하루에 두 번 하기를 추천한다. 또한 아침이 기도 하기에 좋은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녁이 훨씬 좋다는 사람들도 있다. 기도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하루도 빠짐없이 일관성을 가장 잘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 규칙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어떤 관상가가 말했듯 관상기도란 "시간을 훔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기도와 관련해 시간만큼 중요한 것은 기도하기 위해 앉아 있을수 없는 환경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특별한 일을 하기 위해 추론적인 마음을 작동시키지 않아도 되는 때를 기도의 기회로 삼으라는 말이다. 출근할 때, 퇴근할 때, 쇼핑할 때, 샤워할 때, 면도할 때, 요리할 때, 다리미질할 때, 정원을 손질할 때가 그런 때다. 그밖에도 많을 것이다. 이런 순간들은 관상기도를 수련하기에 아주 좋은 시간이다. 그렇다고 관상기도가 추론적인 정신을 멍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신을 맑게 하여 온갖 모양의 창조성이 피어나게 한다. 그러므로 걱정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특별한 법칙도 없다. 생각을 쫓아다니고, 생각을 재미있게 극화하여 비디오로 만들고, 이러한 비디오가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믿는 데 들이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삶은 당신을 무시하고 지나 가버릴 것이다.

이제까지 나는 관상 수련과 내적 침묵에 초점을 맞춰 설명해왔다. 그러면 다른 형태의 기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관상기도를 하면 다른 기도는 사라지는가? 그렇다. 훨씬 깊은 기도의 차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은총을 맛보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기도가 된다. 기도 제목을 수북이 쌓아 올리는 것은 애인이 옆에 있는데도 애인에게 편지를 쓰는 것과 같다. 물론 중보기도도 나름의 역할이 있다. 하지만 놀라지 말라. 모든 존재의 바탕 [하나님]과 침묵 속에서 사귀는 일이야말로 모든 사람들과 연대하는 가장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길이며, 우리의 모든 필요를 창조주 앞에 내려놓는 일이라는 것을!

공동체와 함께 하는 기도는 여전히 필요하다. 하지만 [관상기도를 익히면] 공동체의 기도에 참여하는 방법은 달라진다. 전례[예배] 기도는 은총의 샘이 흐르는 통로가 된다. 은총은 근원 없는 근원(sourceless source)에서 계속 흘러나오는데, 전례는 존재의 바탕이신 하나님의 위대한 자기-비움이 성사(聖事)를 통해 흘러나오면서 가시적 형태를 띤 것에 다름 아니다. 과거에는 지상의 예배가 천상의 예배를 반영한다고 흔히들 말했다. 요즘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 편이지만, [관상적 영성은] 전례에 대한 과거의 관점을 더욱 명료하게 해준다. 우리가 침묵의 문들을 들어갈 때 예배의 진정한 본질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예배는 창조 세계가 그런 것처럼, 시간 안에서 어렴풋이 빛나는 영원이다. 심지어 가장 침체된 전례(이런 전례는 드물지 않다)에서조차 그리스도는 현존하며 유일한 주재자가 되신다.

하지만 전례 기도에 관한 진실이 이와 같다고 해서 수없이 많은 전례의 문제를 쉽게 처리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베네딕토회 수도사인 존 채프먼(John Chapman)은 지금은 고전이 된 저서 㰡”영적 서한㰡•(Spiritual Letters)에서 아주 냉정하게 말한다. "'신비주의'를 어떤 식으로든 접한 사람이 ‥‥ 구송기도에서 의미를 거의 찾지 못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채프먼은 사적으로든 공동으로든 구송기도를 낮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는 많은 관상가들이 직면하는 문제, 즉 구송기도가 점점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단순히 현존하는(just being) 기도다. 반면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전례 기도는 머리 중심적이고 자의식적이며, 장황하고 산만하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관상적 단순성이 꽃필 수 없다. 이 문제들은 전례에 참여한 사람들이 저마다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는) 낱말기도는 해방에 이르는 길이다. 두 번째 문을 지날 때 우리는 이러한 해방의 결과를 어느 정도 깨닫는다. 다채롭고 구체적인 삶의 모습 속에서 이제 우리는 언어를 초월한 빛나는 광활함이 현현하는 삶을 대면하기 시작한다. 심리적으로도 점점 건강해진다. 삶은 여전히 상처투성이지만 그 상처를 좀 더 빨리 극복하며, 예전처럼 정서적 집착 패턴에 쉽게 말려들지 않는다. 낱말기도가 해방의 길인 이유 중 하나는 모든 종류의 투사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 문을 통과하기 전에는 자아감이 매개물을 통해 형성되며,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투영된다. 그 때문에 참자아를 발견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강하게 마음이 끌린다. 영적인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길 갈망하기도 하고, 참자아를 실현하려면 수도원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완벽한 배우자가 진정한 정체성을 찾도록 이끌어주길 기대하기도 한다. 참자아는 획득해야 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얻으려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빛나는 광활함에 대한 시선이 깊어지고 강해지며, 거룩한 단어가 점점 고요해지고 관상 수련이 무르익으면 수도원이나 성당, 깊은 계곡이나 산, "완벽한 배우자"에 대한 우리의 투사도 점점 줄어든다. 우리가 찾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발견하셨다는 확고한 사실을 깨달을 때 "수도원"이나 "깊은 산"이나 "완벽한 배우자"는 예전처럼 우리를 잡아끌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이미 하나님과 하나인 우리의 내밀한 자아를 예전처럼 비춰주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진 우리의 자아(3:3)는 방금 태어난 생명처럼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이런 참자아를 발견하려고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나갈 필요는 없다. 참자아를 발견한 후에도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나갈 필요는 없다. 모든 것과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침묵, 그리고 모든 소리 가운데서 울려퍼지는 하나님의 침묵은 거룩한 단어가 주는 이별 선물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창공)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솜씨)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이야기)도 없고 말씀(말소리)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누리)에 통하고(퍼지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번져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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