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두글자 발견 : 침묵] 복음은 말씀이기 전에 침묵, 설교는 침묵의 테두리

입력 : 2019-03-15 18:45
픽사베이

침묵의 힘은 세다. 말은 생각과 감정을 담아내는 그릇이지만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은 대개 말이 아닌 침묵 속에 자리한다. 침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의미와 가치를 함축한다. 종종 백 마디 말보다 침묵이 더 무겁고 강렬하게 받아들여 진다.

만약 우리가 모든 말에 감정적으로 반응한다면 끊임없이 고통받을 수 있다. 워런 버핏의 말처럼 진정한 힘은 느긋하게 앉아서 논리적으로 상황을 관찰하는 데서 온다. 누군가의 말이 나를 통제한다면 모든 사람이 나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의 말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심호흡하고 상황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3.6~4.20)을 보내고 있다. 침묵 속에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를 향하는 모든 소리, 언어에 반응하기보다 침묵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 보자. 유진 피터슨은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침묵은 창(槍)끝으로 바위를 뚫게 할 만큼 강력한 것이며 불순종과 의심의 돌짝밭을 뚫고 내려가 견고하고 조용한 하나님의 말씀에 도달하는 통로가 된다”고 말했다.

스위스의 작가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의 세계’에서 침묵을 인간의 가장 탁월한 미덕이며 하나님의 인격을 만날 수 있는 ‘신비의 문턱’이라고 비유했다. 침묵은 인간과 하나님이 공유하는 영역이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침묵의 문’을 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침묵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침묵’만큼 강렬한 장면은 드물다. 초기 고대 로마 유대 지방의 총독 빌라도는 결박된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청년 예수에게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는 깊은 바닷속처럼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 세상의 왕이 아니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왔소.”

순간 그는 움찔했다. 예수가 말하는 나라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가 말하는 진리란 무엇이란 말인가.

“진리가 무엇이냐?”

“…”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란 빌라도의 유명한 질문에 예수님은 압도적이고 유창한 침묵으로 답하셨다. 사실 예수님은 이미 제자 도마를 위해 “내가 곧 진리다”라고 대답을 하신 바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오랜 세월 동안 빌라도의 주변엔 많은 정치가 신학자 철학자 시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진리에 대해 얼마나 많은 말들을 쏟아 놓았을까. 어쩌면 빌라도는 목이 멘 소리로 그런 질문을 던졌을 수도 있다. 빌라도는 진리가 아니라 편의주의로 살아온 사람이다. 빌라도는 인간을 자신의 용기와 재주밖에 의지할 것이 없는 우주 속의 외로운 존재로 보았다. 그렇다면 진리라는 말을 들을 때 인간은 목이 멜 수밖에 없다.

빌라도가 질문한 것은 우리는 누구이고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분은 누구신가에 대한 진리였다. 삶에 대한 진리, 죽음에 대한 진리, 진리 자체에 대한 진리였다. 어떤 말도 이것을 담아낼 수 없다. 예수님은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강력하고도 깊은 침묵으로 답하신 것이다. 

로마 황제의 자리를 꿈꾸던 빌라도 총독은 주님의 눈빛을 더 바라볼 수 없었다. 말이 되기 전에 침묵인 진리를 듣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 유대인들에게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편의주의자였으며 두려움이 많았던 그는 결국 산헤드린회의의 사형청원서에 서명하고 만다. 길고도 긴 하루를 보낸 빌라도는 탄광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고백했다. 

두치오 디 부오닌세냐의 ‘손을 씻는 본디오 빌라도’. 이탈리아 오페라 델 두오모박물관 소장.

“나는 오늘 한 나사렛 청년에 대한 산헤드린회의의 사형청원서에 서명하고 말았다. 나는 그에게서 반역죄의 혐의를 찾을 수 없다고 버티었지만 결국은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예수를 데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말했지만, 유대인들은 ‘우리에겐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며 총독인 나에게 예수를 죽여달라는 재판을 밀어붙였다. 나는 유대인 회중 앞에서 내가 비록 마지못해 서명은 했지만 내 양심에 따라 한 것이 아니므로 그 청년의 죄에 대한 책임은 그대들이 지라고 선언했다. 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자손들에게 돌리라고 소리쳤다. 나는 대야에 물을 떠 오도록 해서 손을 씻었다.”

침묵은 순종의 표현

살아가면서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만날 때가 있다. 그 설명할 수 없는 혼란의 고통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신이 침묵일 때가 있다. 침묵 가운데 하나님은 비로소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깨닫게 하신다. 

침묵은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순종을 표현하는 믿음의 덕목이다. 우리가 침묵하는 동안 하나님은 활동하신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침묵이다. 성경적 침묵은 무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불의를 냉철하게 직면함과 동시에 그 불의를 하나님께 내려 놓는 것이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때로 하나님은 침묵과 부재로 존재를 드러내시기도 한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고 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할 때 그 기막힌 심정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침묵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시편 62편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반역의 고통을 당할 무렵,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아뢰는 신앙적 아픔을 느끼게 한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 62:5)

미국의 작가이자 목사인 프레드릭 비크너는 ‘진리를 말하다’에서 복음은 말씀이기 전에 침묵이며 설교는 침묵에 말이라는 테두리를 두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진리와 복음은 하나고, 복음은 진리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말씀이기 전에 침묵이다. 평범한 침묵이 아니라 들을 게 아무것도 없는 침묵. 귀를 기울이면 저 스스로 들려오는 그런 침묵….”

침묵은 또 다른 언어이다. 침묵 안에 또 다른 자유함이 있다. 분주한 삶의 소음 속에 가려져 듣지 못한 하나님의 음성을 침묵을 통해 경청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 때론 어떤 일에 대해, 어떤 사람에 대해 분주히 떠들어대는 것보다 절제하고 침묵함으로써 사건과 사물의 진실을 깨달을 수 있다.

▒ 침묵에 하나 더 
“예수 침묵은 구원의 길 여는 십자가 죽음 이루기 위함"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고발에 대해서 계속 침묵하셨다. 예수님은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고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침묵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다. 변명이나 반박을 하지 않으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700년, 예수님이 어린양으로 오실 것을 예언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5~7) 

예수님의 침묵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시는 십자가 죽음을 이루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곤욕을 당하고 괴로울 때도 입을 열지 않고 침묵하셨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침묵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임하고 말씀이 임하고 구원의 힘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66808&code=23111653&sid1=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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