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종교개혁가들과 수도원 개혁

                                                                                                             김선영 : 교수

출처 : 기독교사상 2015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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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세 천년 교회사를 살펴볼 때 빠질 수 없는 한 가지는 교회와 수도원의 관계다. 흔히 제도적 교회가 부패하고 붕괴 직전에 놓였을 때 그 교회에 대한 일종의 견제와 정화의 힘으로 작용하면서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고, 자정 능력을 제공한 것이 수도원이라고 말한다. 이런 관계성을 상징적으로 잘 제시하는 것은 프란치스코가 1209년 새 수도회를 승인받기 위해 로마로 갔을 때, 망설이던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한 거지 차림의 청년이 기울어지는 교회를 떠받치고 있는 꿈을 꾼 뒤 프란치스코 수도회(작은형제회) 설립을 승인해 주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동시에 한 수도회에 이어 다른 수도회가 등장하는 지속적인 패턴은 설립 당시 수도회의 모습이 초심을 잃지 않고 유지 혹은 발전되지 못한 채, 수도회마저도 부패하고 붕괴시키는 타락의 세력으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않음을 노출한다.

교회사에서 발견되는 수도원 제도의 밝은 면을 볼 때, 현재 개혁의 실마리를 찾아 애쓰는 한국 개신교의 눈길이 한 줄기 빛에도 본능적으로 반응하듯 수도원 운동으로 끌리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수도원이라는 단순해 보이는 단어 뒤에 숨겨져 있는 장구한 역사와 그것의 어두운 면은 수도원 설립을 통한 문제 해결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이번 특집에 포함된 글들은 이 양면을 잘 제시해 주면서, 우리로 하여금 잠시나마 수도원과 우리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필자가 맡은 16세기는 수도원 운동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두 인물이 부각되는 시기다. 한 명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창시자 마르틴 루터(1483-1546)이고 다른 한 명은 가톨릭 종교개혁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던 맨발 가르멜 수녀회의 창립자 아빌라의 테레사(1515-1582).

 

마르틴 루터-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영역의 수도원화

새로운 수도회가 지속적으로 창립됨으로써 제도적 교회를 개혁하는 데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례들과 비교해 볼 때, 루터의 개혁 운동은 기존의 수도원 제도를 폐지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교회 개혁과 수도원 운동 간의 독특한 역동성을 보여준다. 사실 루터는 수도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 인물이다. 똑똑한 루터를 보고 아버지는 법학의 길을 걷도록 강요했다. 그래서 루터는 에어푸르트 대학교에서 학사과정(1501-1505)을 끝내고 법학공부를 시작했다. 150562일 만스펠트에 있는 부모를 방문하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인, 스토테른하임에서 폭우와 천둥번개가 내리치는 상황을 만난 루터는 당장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서 성 안나에게 살려주면 수도사가 되겠다고 절규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1505717일 루터는 에어푸르트 대학교가 아닌 에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원에 나타났다.

엄수파는 수도원 규칙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을 중요시 여겼는데, 루터가 이런 수도원에 들어갔다는 것은 수도원 생활에 대한 그의 헌신적 자세를 보여준다. 루터는 정말로 그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수도원 규칙을 따르며 고행했다. 그런데 이런 루터의 삶은 1525613일 전직 수녀 카타리나 폰 보라와의 결혼이라는 극적인 반전에 의해 막을 내린다. 둘 다 독신, 순결, 순종, 청빈, 종신서원을 깼고, 이로 인해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온갖 비방을 다 듣게 됐다. 도대체 루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루터는 하나님이 자신을 받아주시고, 자신을 기쁘게 여기신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다. 다른 수도사들보다도 더 엄격하게 규율을 지켜가며 고행을 감행했다. 그는 고행에 있어서 떳떳이 자랑할 수 있었다. 나만큼 규율을 철저히 지키고 충실히 고행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할 만큼. 그런 그의 남다른 수고 다른 수도사들도 다 인정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루터의 마음은 늘 불안했고, 확신이 서질 않았다. 내가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했는가? 대답은 늘 부정적이었다. 루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너무나 진지했다. 그만큼 더 괴로워했다. 이 실존적이고도 신앙적인 문제로 루터는 밤낮으로 씨름했다.

마침내 어느 순간 그 영적 고투 가운데 그에게 깨달음이 왔다. 소위 탑경험이 상징하는 루터의 영적 각성이다. 그것은 바로 구원의 문제, 하나님이 인간과 화해하고 인간을 받아주는 문제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해결되는 문제지 인간의 행위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믿는 자의 행위는 구원-천국-영생이라는 긍정적 보상을 획득하고 저주-지옥-영벌이라는 부정적 처벌을 회피하려는 불순하게 얽매인 동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믿는 자의 행위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 다 해결되었으니, 보상도 처벌도 신경 쓰지 않으면서 구원의 확신과 기쁨과 자유 가운데서 마음껏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다. 믿는 자의 삶의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 모두를 이처럼 믿음과 사랑으로 총괄하면서 루터는 그 누구보다도 더 헌신적으로 살았던 수도원의 문제점들을 인식하게 된다.

당시 대다수의 수도사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그리스도의 공로와 행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대신 인간의 공로와 행위, 의에 의지했다.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들이 무엇인가를 행하고 이룰 수 있다고 착각했다. 루터는 수도회 창립자들은 이런 자세를 가지고 수도원을 설립하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가 살고 있던 시점에 수도원들은 창립자들의 의도와는 너무나 멀어져 있었다. 구원의 유일한 필요조건이면서 충분조건인 예수 그리스도는 온데간데없고, 수도원 제도 자체를 구원을 위한 수단이나 지름길로 이해하고 인간의 행위와 수고에 자족하고 기대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루터의 그리스도와의 결혼 개념은 주목할 만하다. 수도원 제도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그리스도와의 영적 결혼이며, 의무화된 독신서원은 이 결혼을 위한 순결을 위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순결과 독신의 의도는 나쁘지 않지만, 문제는 아무나 독신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수도원 건물의 지하나 우물에 버려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태아의 수, 수도사들의 문란한 생활, 아내 없이 살 수 없는데 아내가 허락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정부나 매춘부를 옆에 끼고 살면서 겪는 명예 실추와 양심의 가책. 루터는 독신서원을 지키지 못하는 수도사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에게 가능하지 않은 것을 의무화하고 강요하는 것은 복음의 자유를 거스르는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순결이 아닌 음란과 타락을 야기하는 수도원의 폐지를 주장한다. 그리고 독신서원의 가혹성과 비현실성을 지적하면서, 죄를 피할 수 있게 결혼할 수 있는 자유를 주어야 하고, 죄를 범하지 않게 서로의 성적 욕구에 충실한 아름다운 부부관계가 오히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순결하고 고귀한 삶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루터는 그리스도와의 결혼을 믿음과 사랑으로 풀어낸다. 이 개념은 1520년 하반기에 저술된 루터의 3대 논문 중 하나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잘 기술되어 있다. 이 결혼은 구원의 유일한 원인인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 따라서 구원의 유일한 수단인 믿음이 그리스도를 꼭 붙잡아 믿는 자의 가슴속에 모실 때 일어난다. 그 가슴속은 신방이 된다. 신랑 예수는 신부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베풀어 준다. 거기에는 죄인이 구원받는 데 필요한 그리스도의 의를 비롯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 생명, 자유, 평안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 신랑 예수는 신부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에게 줄 것을 요청한다. 신부는 자신의 불의, , 하나님과의 깨어졌던 관계, 저주, 죽음, 속박된 양심, 불안 등, 이 모든 것들을 신랑에게 다 내어준다.

그러고 나면 믿는 자의 가슴속에 있는 그리스도는 믿는 자인 신부로 하여금 천국이라는 보상이나 지옥이라는 처벌을 신경 쓰지 말고 자유롭게 나아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내보낸다. 그리고 말한다. 그리스도 신랑이 정말 믿는 자 신부 안에 살아 있고, 둘이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랑이라는 믿음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라고. 그 열매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영역에서 맺어지는 것이라고. 그 열매 맺는 일은 여인의 산고와 같은 고통을 동반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걸으며, 또 십자가에 못 박히며 당한 그 고통을 감당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신부 그리스도인들이 피하지 말고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그리스도인 모두에게는 수없이 많은 이웃이 있고, 그 이웃은 가정에, 직장에, 시장에, 모임에, 길거리에, 도처에 있다고. 군주가 백성을 섬기는 것, 성직자가 성도를 섬기는 것, 가장이 가족을 섬기는 것, 직장인이 맡은 바 일을 하며 동료들을 섬기는 것, 이 모든 것이 곧 믿음과 사랑의 삶이라고. 루터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지는 않지만,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정말 살아있는 믿음인지 그렇지 않고 짝퉁 믿음, 죽은 믿음인지를 판단해주는 척도라고 주장한다. 믿음은 열매를 보고 알 수 있고,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런 믿음과 사랑의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수도원 제도는 믿음에 있어서도 문제를 갖고 있지만, 사랑에 있어서도 문제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특정한 시공에 한정된 수도원 제도 안에서 섬겨야 할 이웃은 너무나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루터는 고행이 그리스도가 남겨준 유일한 계명인 사랑의 계명,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더욱 순수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준행하기 위해 끊임없이 옛사람으로서의 나를 죽이고 새 사람으로서의 나를 성숙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말한다. 즉 믿음과 사랑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더 믿고 의지하고, 이웃을 더욱더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위한 자기 훈련과 수련이 아니라면 고행의 의미와 가치는 사라진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더 진실하게 사랑하고 더 잘 섬기기 위해 고행하고, 그렇게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통해 고행한다. 그리고 믿음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서서 이러한 고행의 과정을 감사와 찬양으로 감당하는 것을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로 본 루터의 입장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영역의 수도원화 운동으로 압축된다. 물론 독신 생활을 하도록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특정한 시공에 한정된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원 생활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루터의 의도는 이렇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수도원 정신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추구하고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루터는 교황, 주교, 사제 및 수도사를 영적 계급이라 부르고, 군주, 영주, 장인 및 농부 등을 세속 계급이라 부르는 것을 인간적 고안이라 규탄하면서, 수도사의 영적 엘리트 의식, 특권층 의식을 와해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해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영적 계급에 속한 자들임을 피력했다. 이로 인해서 수도사만 하나님에 의해 특별한 소명을 받았다는 사고는 무력해진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 의해 특별한 소명을 받았다. 그 소명의 자리는 하나님의 구원 질서뿐만 아니라 창조 질서와도 관련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영역이 소명의 자리인 것이다. 그 각 자리에서 믿음과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해 겪고 극복하는 모든 것이 수도원 고행이 된다. 그리고 루터는 믿음과 사랑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에서 지시한 삶이기에 이것이 제대로 순종 서원을 지키는 삶이요, 서로에게 충실한 부부관계를 통해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순결을 지킬 수 있기에 이것이 제대로 순결 서원을 지키는 삶이요, 정상적인 노동을 통해 돈을 벌되 나를 위한 소비는 최소화하면서 이웃을 위해 베푸는 삶이기에 이것이 제대로 청빈 서원을 지키는 삶, 즉 본질적인 수도원 정신을 지키는 삶임을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전직 수도사였던 루터와 전직 수녀였던 카타리나 폰 보라의 가정은 다름 아닌 수도원이었고, 그들이 감당한 역할 역시 본래적으로 의도된 수도사와 수녀의 역할의 연장선상에 서 있었다. 루터가 살았던 집은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루터에게 하사했던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 건물이었다. 루터는 그가 살던 집을 옛 수도원들이 감당했던 일들, 즉 말씀을 묵상하고, 노동하고, 가르치고, 병든 자들을 돌봐주고, 묵을 곳이 없는 자들에게 방을 빌려주고 먹을 것을 제공하는 장으로 아낌없이 바쳤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루터는 이러한 것들을 자기 의를 드러내고 구원을 획득하기 위해 공로를 쌓는 선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들은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 나아가 당당하게 그가 그 동안 가르치고 주장해 온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틀렸다고 입증되지 않는 한 양심 때문에 자신의 입장을 취하할 수 없다고, 죽으면 죽겠다고 했던 그 믿음의 열매들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비텐베르크 시에 역병이 돌아 선제후가 모든 사람들에게 시를 떠날 것을 명령했을 때에도 목자가 양떼를 남겨두고 어디를 가냐고 하면서 자신의 집에 남아 아픈 자들을 데려다가 돌보고 죽어가는 자들의 임종을 옆에서 지켜주는 믿음과 사랑의 삶을 몸소 행했다.

루터는 위에서 언급했던 문제점들 외에도 수도사들이 수도원장이나 상관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무서워한다는 점,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것보다 어느 수도회에 속해 있다는 것에 더 집착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수도원에서 드리는 미사가 후원자의 기부금과 수도사의 미사라는 영적 선물 간의 매매로 발생하는 희생제사와 선행으로 전락한 것을 한탄했다.

이처럼 루터는 특정한 시공에 한정된 수도원 제도의 많은 문제점을 열거하면서 그런 수도원 제도를 폐지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래적 수도원 정신과 삶 자체까지 없애고자 한 적은 없다. 그는 오히려 그것을 다시 살려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매순간 추구하고 구현할 것을 촉구했다. 이렇게 볼 때, 어떤 면에서 시공에 제한된 수도원을 폐지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전 삶의 영역을 수도원화 하는 것이 루터의 의도였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유럽 전역에 걸쳐 수도원과 수녀원이 실제로 폐쇄되는 과정에는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보다는 정치 지도자들의 이해관계에 근거한 결단이 더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빌라의 테레사-맨발의 가르멜 수도회 창립

프로테스탄트 개혁 시기에 수도원과 수녀원은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악영향을 끼치는 병폐의 한 온상이었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진정성을 갖고 수도원 정신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6세기 가톨릭 종교개혁에서 부각되는 한 대표적 여성이 있는데, 그는 2015년 탄생 500주년을 맞이한 아빌라의 테레사 혹은 예수의 테레사(1515-1582). 현재 로마 가톨릭 교회에는 4명의 여성을 포함한 35명의 교회박사가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테레사다. 테레사는 여성이요 유대인이라는 커다란 장해물에도 불구하고,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여성 신비가, 저술가, 수도회 창립자, 개혁가, 영적 스승으로서 당시 교회와 사회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큰 영향력을 끼친 역량 있는 지도자다.

스페인 카스티야의 아빌라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테레사는 20살이 되던 1535년 수녀가 되기로 결심하고 아빌라의 강생 가르멜(성경-갈멜) 수녀원에 입회했다. 이 관상수도회에서 테레사는 관상과 복음의 정신에 따른 자기포기라는 수도생활에 충실했고, 신비적 체험과 환시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일치와 교회의 영적 쇄신을 추구하고,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위해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정신으로 가르멜의 초기 규칙대로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고자 봉쇄 수도회로서의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를 창립했다. 온갖 어려움과 위기를 겪으면서도 테레사는 옆에서 큰 힘이 되었던 십자가의 요한과 함께 총 15개의 남자 수도원과 17개의 여자 수도원을 건립했다. 이후 테레사의 수도원 개혁은 다른 수도원들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수도회 개혁을 위한 그녀의 수고는 맨발, 금욕주의, 노동의 강조, 음성을 내지 않는 침묵의 정신적 기도, 수녀회 안에서 세속적 집안들, 특히 귀족 가문들과의 연계를 끊는 등의 노력으로 나타났다. 당시 평신도 후원자는 수녀원에 기부금을 내면서 기도를 부탁하고 장지를 얻었다. 특히 귀족 후원자들이 많았는데, 이로 인해 수녀원이 귀족들에게 종속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테레사는 이런 형태의 고정적 수입원을 거부함으로써 수녀원의 자치를 확립했고, 세상의 지배구조와 가치관으로부터 수녀원을 보호했다. 테레사는 가난한 집안의 여성과 지참금을 가져오지 못한 여성도 견습 수녀로 받아주었고, 수도원 안에서 사회적 계층 간의 차별의 흔적들을 없앴다. 또 테레사는 인종적 차별을 반대하면서, 다른 수녀원들이 받아주지 않던 유대인 개종자들의 딸들도 받아주었고, 이로 인해서 신흥 부호들인 유대인 개종자들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테레사의 자서전이요 가르멜 수도회의 초기 개혁 과정과 그 바탕을 이루는 신비체험을 쓴 책인 천주 자비의 글(1562-1565) 23-31장이 기술하는 내용에 의거하여 바로크의 거장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조각하여 이탈리아 로마 산타 마리아 델라 빅토리아 성당에 자리하고 있는 성녀 테레사의 법열은 그녀의 신비주의적 체험과 환시를 잘 보여준다. 이 글은 한나 아렌트, 시몬느 베이유,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현대 세계 4대 유대인 여류 철학자 중 한 명이요, 당시 하이데거와 후설과 교류하던 탁월한 지식인으로서 진리를 갈망했던 에디트 슈타인으로 하여금 마침내 진리를 찾았다고 외치게 하고, 가르멜회 수녀가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글이기도 하다. 테레사는 자서전 외에도 영혼의 성, 완덕의 길, 영적 보고, 하나님께 외침, 하나님 사랑에 관한 명상과 같은 많은 귀한 글들을 남겼다.

 

나가는 말

프로테스탄트 남성 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믿음과 사랑이라는 그의 핵심적인 개혁사상에 의거하여 특정한 시공에 한정된 수도원이 온갖 병폐의 온상이 되었음을 보고 이러한 수도원의 폐지를 제안한다. 그리고 본래적인 수도원 정신과 실천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의 전 영역에서 매 순간 추구하고 구현해야 할 것으로 주장한다.

가톨릭 여성 개혁가 아빌라의 테레사는 수도원의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고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여성의 몸에도 불구하고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를 창립했다. 봉쇄 수도회로서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는 본래의 수도회 정신과 규칙을 엄수할 것을 강조했다. 이렇게 볼 때 공간이라는 차원에서 루터와 테레사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루터는 시공에 한정된 수도원을 폐지하면서 그 정신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전 영역에서 추구되고 구현되어야 할 것으로 제시했다. 테레사는 수도원 정신을 엄수하기 위해 봉쇄 수도원을 건립했다. 이처럼 이 둘의 개혁의 형태는 상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심정은 동일했다. 그 심정은 세속의 지배논리와 가치관에 종속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가슴속에 모시고, 그리스도와 결혼하여 그와 하나가 되고, 그의 뜻을 추구하며, 섬기며 사는 것-수도사를 뜻하는 모나코스(monaco,j)라는 말은 하나라는 뜻이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이 되어 사는 것이었다. 루터와 테레사에 의한 개혁 이후 교회와 수도회는 다시 많은 폐해들로 앓아 왔다. 한국 개신교회가 수도원을 활성화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그 수도원도 타락하면 어떻게 될까? 비관적인 말을 하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본질적 문제를 놓치지 말자는 것을 겸허하게 강조하려는 것뿐이다.

 

김선영 | 교수는 이화여대와 연세대를 졸업한 뒤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마르틴 루터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Luther on Faith and Love: Christ and the Law in the 1535 Galatians Commentary, 믿음과 사랑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가 있고, 역서로는 초기 기독교 교부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있으며, 다수의 논문들이 있다. 현재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조교수이며, 루터회 종교개혁500주년기념 루터전집 번역·출판 사업회 총무 일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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